2021-22년 손진길 목사 설교문

시편 제88편에서 얻는 한줄기 놀라운 위로(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1. 4. 22. 07:48

제목; “시편 제88편에서 얻는 한줄기 놀라운 위로”(88:1-18)

설교일; 주후 2021425일 주일

작성자; 손진길 목사(422일 작성)

 

 시편 제88편은 그 저자가 고라 자손에 속하는 에스라인 헤만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는 과연 누구일까요? 먼저 에스라인으로 명기하고 있는 헤만에 대하여 생각을 해봅니다;

첫째로, 그 옛날 고라 자손으로서 이스라엘 역사서에 뚜렷하게 이름을 남기고 있는 인물이 한사람 있습니다. 그가 바로 주전 10세기 초 다윗시대에 찬양대장을 지낸 헤만입니다(대상6:33). 당시 헤만을 좌우에서 보좌한 인물이 같은 레위인이지만 그 가문이 다른 아삽에단입니다(대상6:39, 44).

그와 같이 자랑스러운 조상 헤만의 이름을 후대에 와서 다시 사용하고 있는 인물이 시편 제88편의 저자인 에스라인 헤만입니다. 에스라인이라고 하는 말은 주전 5세기 중반의 율법학자인 에스라의 문하에서 히브리경전을 체계적으로 배운 인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7:25);

 그러므로 에스라인 헤만은 그 옛날 다윗시대의 찬양대장인 헤만과는 달리 제2성전 시대인 주전 5세기 후반에 활동한 선견자로 판단이 됩니다.

둘째로, 에스라인 헤만이 지은 시편 제88편을 고라 자손의 시가의 하나로 볼 경우에는 고라 자손의 시편이 총 11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기억해야 할 사항은 시편 제88편의 내용이 상당히 어둡다는 것입니다. 언뜻 보기에 환난 가운데 믿음이 크게 흔들리고 있는 다윗왕이나 이방인 제사장 욥의 경우와 비슷합니다.

그와 같은 사실 때문에 시편 제88편을 그 내용상 다윗왕의 시가가 아닌가고 추정하고 있는 성경학자들도 상당히 많습니다. 그렇지만 주전 5세기의 선견자 헤만이 그 옛날 히브리경전에 등장하고 있는 인물들 곧 다윗왕이나 제사장 욥의 처지와 지금 자신이 처하고 있는 환경이 유사하다는 사실에 입각하여 그와 같이 노래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더욱 타당할 것으로 보입니다.

그 이유는 느헤미야 총독의 권력이 주전 424년 아닥사스다 황제의 서거로 말미암아 사라지고 말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예루살렘에서 느헤미야의 종교개혁이 물거품이 되고 그 대신에 대제사장 엘리아십이 앞장서서 주변 이방족속의 실력자와 타협하여 선민의 자주성과 유대교 성전문화를 훼손하는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13:4-7);

그와 같은 주전 420년 이후의 유대교의 타락상에 대하여 구약상의 마지막 선지자 말라기가 그의 소선지서에서 적나라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당시의 선견자 에스라인 헤만이 시편 제88편을 통하여 암담한 현실을 고발하면서 여호와의 구원을 호소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여기서 시편 제88편을 음미하면서 깊이 생각해야 할 사항이 또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전체적으로 시인이 말하고 있는 환경적 요인이 암담하기 그지없지만 그 가운데 한줄기 구원의 빛이 시인의 심령에 벌써 닿아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과연 무엇인지 본문을 묵상하면서 제대로 찾아내게 되면 성도들이 시편 제88편에 숨겨져 있는 놀라운 위로를 오늘날에도 능히 얻을 수 있다고 생각이 됩니다. 그와 같은 관점을 가지고 이제부터 시편 제88편을 천천히 한 구절 씩 살펴보면서 그 빛나는 영적인 보석을 함께 찾아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1. 여호와 내 구원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야로 주의 앞에 부르짖었사오니,
2. 나의 기도로 주의 앞에 달하게 하시며 주의 귀를 나의 부르짖음에 기울이소서”; 선견자 헤만은 제1절과 제2절에서 중요한 사항을 두가지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이 세상의 구원은 오로지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으로 말미암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헤만 자신과 유대인들을 불쌍하게 보시고 부디 자신의 기도를 가납하여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먼저 헤만은 자신의 주위를 돌아보면 동족인 유대인들의 종교와 정치사회가 암담하기 그지 없습니다. 구체적으로, 유대교지도자들과 백성들의 여호와신앙이 바닥을 보이고 있으며 선민 유대인의 자주성이 크게 훼손되어 10여년 전 에스라와 느헤미야 시대의 종교개혁이 벌써 까마득한 옛날 이야기처럼 느껴지고 있습니다;

세상적으로 살펴보면 세월이 갈수록 동서남북이 모두 막히고 유대교의 갱신은 그 길을 찾기가 힘이 듭니다. 그렇게 답답한 가운데 히브리경전을 공부하고 있는 선견자 헤만은 자신의 시편을 통하여 부르짖고 있습니다; “이제는 오로지 하늘에 계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옛날 출애굽의 시대처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살길을 마련하시고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셔야 합니다”(88:1a). 그래서 헤만이 그 은혜를 사모하면서 여호와 하나님께 주야로 부르짖고 있는 것입니다(88:1b).

헤만이 여호와신앙을 바로 세우고 유대인들의 종교적 정치적인 자주성을 위해서 매일같이 하나님께 부르짖는다고 하더라도 그 기도가 당장 받아들여질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나의 기도로 주의 앞에 달하게 하시며”(88:2a). 그래서 일단 자신의 기도를 가납하여 달라고 먼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헤만이 조심스럽게 기도 드리고 있는 이유는 그가 출애굽기의 기록을 잘 알고 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출애굽기 제2장 이후의 말씀을 참조하면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출애굽시키기 위하여 두가지를 미리 준비하고 계십니다; 첫째가 지도자 모세를 준비하시는 것입니다. 둘째가 아론을 비롯한 12지파의 장로들에게 여호와의 사자인 모세를 따르고자 하는 마음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준비가 있었기에 고령인 80세의 모세와 83세의 아론이 고센 땅에서 40년만에 기쁘게 해후하게 되고 두사람이 하나님의 큰일을 행하고자 이스라엘 70명의 장로들과 의견의 일치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준비가 두루 갖추어질 때까지 애굽에서 중노동에 시달리고 있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100년 이상 여호와 하나님께 해방과 구원의 은혜를 자신들에게 달라고 계속하여 부르짖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선견자 헤만은 여호와께서 응답하시는 그때가 빨리 오기를 소원하면서 자신의 기도가 그 일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헤만의 간절한 마음이 제2절 후반부에 진하게 스며들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주의 귀를 나의 부르짖음에 기울이소서”(88:2b). 자신의 기도소리를 들으시고 부디 동족들의 여호와신앙을 회복시켜 달라고 하는 간구라고 하겠습니다;

둘째로, “3. 대저 나의 영혼에 곤란이 가득하며 나의 생명은 음부에 가까왔사오니, 4. 나는 무덤에 내려가는 자와 함께 인정되고 힘이 없는 사람과 같으며, 5. 사망자 중에 던지운 바 되었으며 살륙을 당하여 무덤에 누운 자 같으니이다. 주께서 저희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시니 저희는 주의 손에서 끊어진 자니이다. 6. 주께서 나를 깊은 웅덩이 어두운 곳 음침한 데 두셨사오며, 7. 주의 노가 나를 심히 누르시고 주의 모든 파도로 나를 괴롭게 하셨나이다(셀라)”; 헤만의 시편 제88편을 흔히 시편 가운데 욥기에 해당한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말하기에 충분한 대목이 바로 제3절부터 제7절까지라고 하겠습니다. 그 이유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욥은 자신이 섬기고 있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유 없이 그의 재물을 사라지게 하시고 자식들마저 죽임을 당하도록 만드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주의 노가 나를 심히 누르시고 주의 모든 파도로 나를 괴롭게 하셨나이다”(88:7)고 진술하고 있습니다.  

둘째, 욥은 여호와께서 그 정도의 환난만 자신에게 주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온몸에 종기가 발생하도록 하여 그 고통 때문에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 점을 에스라인 헤만이 여기서 음부무덤 그리고 사망자라는 용어를 총동원하여 강조하고 있습니다(3-5).

셋째, 족장시대의 이방인으로서 여호와의 제사장이었던 욥이 그 옛날 느끼고 있던 절망감이 주의 손에서 끊어진 자의 고통”(88:5b)에 해당한다고 에스라인 헤만이 보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고통이 지금 제2성전 시대를 살고 있는 헤만의 마음을 짓누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절망 가운데 여호와 하나님께 부르짖고 있습니다; “주께서 나를 깊은 웅덩이 어두운 곳 음침한 데 두셨습니다”(88:6). 그러므로 이제는 한줄기 구원의 빛을 비추어 달라는 간구인 것입니다.

셋째로, “8. 주께서 나의 아는 자로 내게서 멀리 떠나게 하시고 나로 저희에 가증되게 하셨사오니 나는 갇혀서 나갈 수 없게 되었나이다. 9. 곤란으로 인하여 내 눈이 쇠하였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매일 주께 부르며 주를 향하여 나의 두 손을 들었나이다.
10. 주께서 사망한 자에게 기사를 보이시겠나이까? 유혼이 일어나 주를 찬송하리이까?(셀라)”; 다윗의 환난을 생각할 때에 이 대목은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그 이유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다윗왕은 마지막 전투를 앞두고서 예루살렘성에 남아 있습니다. 조카 요압을 대신 내보내어 암몬의 왕성인 랍바성을 함락하게 하고 자신은 왕성에서 인생의 낙을 즐기고자 합니다. 바로 그때 그가 타락하게 됩니다. 충신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왕궁으로 불러들이고 통간을 합니다. 그리고 우직한 장군 우리야를 랍바성의 공략에 선봉장으로 내세우고 지원사격을 해주지 아니하여 고의적으로 죽게 만듭니다. 여호와 앞에 간음죄와 살인죄를 저지르고도 다윗왕은 그것이 십계명의 위반인 줄 모르고 있습니다. 그만큼 그는 왕자무치(王者無恥, 왕은 무슨 일을 저질러도 수치가 아니며 죄가 아니다)사상에 빠져서 지내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잘못된 사조가 헤만의 시대 유대인 사회에서 삐뚤어진 선민사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인이 절망감을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 타락한 다윗왕은 하나님께서 보낸 선지자 나단의 책망을 받고서 정신을 차립니다. 그는 나단이 전하고 있는 여호와의 징벌을 달게 받고자 결심합니다;

 그 내용은 그의 남은 인생 가운데 칼날이 그의 집을 떠나지 아니한다는 것입니다(삼하12:10). 다윗왕이 은밀하게 자행한 간음죄와 살인죄가 알려지자 그의 친구들이 그를 떠나고 있습니다(88:8a). 그리고 두번의 왕자의 난과 베냐민 지파의 반란으로 다윗왕은 피난을 가거나 왕성에 갇혀서 사는 신세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88:8b).

셋째, 다윗왕은 자신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그와 같은 불행이 초래되고 있음을 알고서 여호와 하나님께 두 손을 들고서 호소하고 있습니다; “9. 곤란으로 인하여 내 눈이 쇠하였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매일 주께 부르며 주를 향하여 나의 두 손을 들었나이다. 10. 주께서 사망한 자에게 기사를 보이시겠나이까? 유혼이 일어나 주를 찬송하리이까?(셀라)”(88:9-10). 죽음을 맞이하기 전에 부디 징벌의 삶이 끝나게 하여 달라는 간구입니다. 그가 마지막으로 소망하고 있는 것은 대속자 메시아를 만나는 것입니다(110:1-7). 그리스도만 자신에게 보내어 주신다면 그의 영혼은 영원히 여호와를 찬송할 수 있을 것이라는 다윗의 마음이 바로 선견자 헤만의 마음이라고 하겠습니다.

넷째로, “11. 주의 인자하심을 무덤에서, 주의 성실하심을 멸망 중에서 선포할 수 있으리이까? 12. 흑암 중에서 주의 기사와, 잊음의 땅에서 주의 의를 알 수 있으리이까?
13. 여호와여 오직 주께 내가 부르짖었사오니 아침에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달하리이다. 14. 여호와여 어찌하여 나의 영혼을 버리시며 어찌하여 주의 얼굴을 내게 숨기시나이까? 15. 내가 소시부터 곤란을 당하여 죽게 되었사오며 주의 두렵게 하심을 당할 때에 황망하였나이다”; 지금까지 욥과 다윗왕의 경우를 빗대어서 여호와께 간구하던 선견자 헤만이 이제는 동족의 구원을 위하여 강력하게 하나님께 읍소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을 분설(分設,
나누어서 설명함)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11. 주의 인자하심을 무덤에서, 주의 성실하심을 멸망 중에서 선포할 수 있으리이까? 12. 흑암 중에서 주의 기사, 잊음의 땅에서 주의 의를 알 수 있으리이까?”(88:11-12); 에스라인 헤만은 여호와 하나님의 영원하신 성품 두가지를 세상사람들에게 선포하고 싶어 합니다. 그것은 주의 인자성실입니다. 주의 인자는 피조물인 인간들이 여호와를 제대로 섬기고 싶어도 세상 욕심에 이끌리는 약한 육신 때문에 그러하지 못하는 현실을 여호와 하나님께서 불쌍하게 생각하여 대속자를 이 세상에 보내어 주실 것이라고 하는 역사섭리를 내포하고 있는 용어입니다. 그리고 주의 성실은 새로운 구원의 역사를 반드시 이 세상에서 이루실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그러한 놀라운 여호와 하나님의 역사섭리가 하루 속히 이루어지기를 간절하게 소망하고 있는 헤만의 기도가 제11절에 담기어 있습니다. 또한 메시아의 오심이 하나님의 기적이며 메시아가 실천하고자 하는 일이 바로 모든 피조물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이라는 사실을 제12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2)  “13. 여호와여 오직 주께 내가 부르짖었사오니, 아침에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달하리이다”(88:13); 창세기 제2장의 말씀을 참조하면 안식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베푸시는 거룩한 복입니다(2:3). 그러므로 사람들이 아버지 하나님께 전적으로 맡기고 그 품에서 치유함을 받게 되면 안식이 끝나 새날을 맞이하게 될 때 그 일이 벌써 해결되어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와 같은 의미에서 거룩함이라고 하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께만 자신의 곤경을 호소하는 것입니다(88:13a). 그것은 결코 인간에게 불평과 원망을 쏟아내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하나님 안에서 안식을 누릴 때에 질병과 장애가 치유가 되고 새날을 맞이하는 을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3)  “14. 여호와여 어찌하여 나의 영혼을 버리시며 어찌하여 주의 얼굴을 내게 숨기시나이까? 15. 내가 소시부터 곤란을 당하여 죽게 되었사오며 주의 두렵게 하심을 당할 때에 황망하였나이다”(88:14-15); 14절의 내용은 훗날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말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15:34)와 닮아 있습니다;

(4)   예수님의 경우에 있어서나 선견자 헤만의 경우에 있어서나 가장 두려운 사실은 오직 하나입니다. 그것은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끝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니고 자신의 영혼이 하나님의 손에 보전되고 있다고 한다면 인생 가운데 임하는 모든 곤란과 두려움 가운데에서도 성도들은 당황하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은혜를 찬양할 수가 있다는 고백입니다(88:15).

다섯째로, “16. 주의 진노가 내게 넘치고 주의 두렵게 하심이 나를 끊었나이다. 17. 이런 일이 물 같이 종일 나를 에우며 함께 나를 둘렀나이다. 18. 주께서 나의 사랑하는 자와 친구를 내게서 멀리 떠나게 하시며 나의 아는 자를 흑암에 두셨나이다”; 앞 부문 곧 제11절에서 15절의 내용을 다시 한번 깊이 묵상하지 아니하면 어째서 선견자 헤만이 마지막으로 제16-18절을 노래하면서 그의 시편 제88편을 마무리하고 있는지를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앞 부문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먼저 요약하여 봅니다;

(1)  시편의 저자는 죽기 전에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을 온세상에 증거하기를 소원하고 있습니다(88:11). 그러므로 자신이 주의 인자하신 구원과 성실하신 약속의 이행을 생전에 맛볼 수 있도록 부디 기적을 베풀어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고 있습니다(88:12).

(2)  이 시편의 저자인 에스라인 헤만은 실로 선견자로 불릴 만한 인물입니다. 왜냐하면, 훗날에 메시아의 오심과 그 분이 실현하시는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새로운 역사를 미리 내다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은 사실을 암시하고 있는 용어가 제12절 후반부에 기록하고 있는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입니다. 구체적으로, 선민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모든 이방인들까지 동일하게 구원하시기를 원하시는 창조주의 공의로운 마음이 그가 보내시는 대속자 메시아에 의하여 실현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11:4-5);

(3)  그와 같은 사실을 알고 있지만 현실은 영적으로 어둡고 암담하기 그지 없습니다. 따라서 헤만은 다음과 같이 하나님의 새날을 보기를 간구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오직 주께 내가 부르짖었사오니, 아침에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달하리이다”(88:13). 그것은 마치 훗날 그리스도의 부활의 아침을 보는 것과 같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것으로 시편 제88편은 마무리가 되어도 좋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헤만에게 남아 있는 날들이 여전히 현실적으로 어둡고 암담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14절과 15절이 뒤따르고 있습니다; “14. 여호와여 어찌하여 나의 영혼을 버리시며 어찌하여 주의 얼굴을 내게 숨기시나이까? 15. 내가 소시부터 곤란을 당하여 죽게 되었사오며 주의 두렵게 하심을 당할 때에 황망하였나이다”.

(4)  아직도 죽음을 미리 맛보는 것과 같은 간난신고를 이 세상에서 당하고 있으며 자신의 영생과 구원에 대한 소망이 흔들리는 믿음의 시험을 황망하게 당하고 있습니다(88:15). 그러므로 헤만은 부디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신의 영혼을 보전하여 주시고 어려운 현실을 다시 한번 면밀하게 감찰하여 주시기를 간구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간구의 내용이 역설적인 문장 제14절에 깊숙하게 자리를 잡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5)  이제 마지막으로 제16-18절을 음미해보면 두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는, 이 세상의 영적인 타락과 정치적인 부패함이 이루 말로 다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마치 구원과 영생이 없는 것과 같은 캄캄한 어두움으로 이 세상에 그리고 시인의 남은 인생에 임하고 있습니다(88:16-17). 또 하나는, 친지마저 나를 떠나고 일찍 죽고 말아서 헤만은 홀로 이 세상에 남아 저주를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88:18). 그것은 그 옛날 욥의 처지와 같습니다. 그렇지만 그 문장으로 헤만의 시편 제88편이 내용상 끝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기술한 제15절의 내용, “15. 내가 소시부터 곤란을 당하여 죽게 되었사오며 주의 두렵게 하심을 당할 때에 황망하였나이다에 대한 구체적인 진술을 형식상 말미에 첨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6)  그렇다면 진정으로 선견자 헤만이 말하고 싶은 내용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여전히 앞 부문 제13-14절에서 역설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의미를 알기 쉽게 다시 파악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캄캄한 밤에 믿음의 사람은 영적으로 깨어나 밤새 하나님께 구원을 간구합니다. 그러면 영생과 구원의 새날이 이 세상에 임하는 것을 아침에 주님께서 주시는 믿음으로 확신할 수가 있습니다”;

(7)  참고로, 그것은 그 옛날 욥이나 다윗왕의 경우에도 그러합니다;14. 여호와여 어찌하여 나의 영혼을 버리시며 어찌하여 주의 얼굴을 내게 숨기시나이까?”고 하소연하던 그들이 하나같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그들의 믿음을 회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을 회복한 다윗왕은 진정한 왕이신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무릎을 꿇고서 남은 인생을 신실하게 살아갑니다(삼하 제12장 이하). 그리고 욥은 신원회복이 되고 그때부터 영생의 천국을 바라보면서 진정한 여호와의 제사장으로 남은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42).

결론적으로, 사람의 능력과 지혜로 이 세상을 구원할 수가 없습니다. 그 점을 선견자 헤만이 그의 시편 제88편에서 절절하게 진술하고 있습니다. 오로지 창조주이신 여호와의 역사섭리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 구원과 영생의 새날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믿고서 시인은 무신론적인 세상에 부르짖고 있습니다; “다윗과 욥의 믿음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다시 한번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다윗이 이 세상의 진정한 왕이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잊어버렸을 때에 그는 영적으로 타락하고 맙니다. 그리고 욥이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을 원하시는 공의의 하나님에 대한 깊은 이해가 없었을 때에 자신에게 환난을 주시는 하나님을 만나 담판을 짓겠다고 하는 어리석은 자신의 의로움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주님의 은혜로 회개의 자리에 나아가고 있습니다”.  

따라서 선견자 헤만이 진심으로 그의 시편 제88편에서 말하고 싶은 내용은 제13절에 오롯이 담기어 있습니다; “13. 여호와여 오직 주께 내가 부르짖었사오니 아침에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달하리이다”. 구원과 영생을 소망하고 있는 그의 기도가 여전히 하나님의 전에 도달하고 있으며 그 결과 기어코 역사의 새로운 아침을 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시편 제88편에 깊숙하게 담기어 있는 그 역설적인 하나님의 구원과 영생의 소망을 인생 가운데 자신의 믿음으로 거듭 확인하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