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22년 손진길 목사 설교문

엘릴림과 엘로힘의 차이와 시편 제97편(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1. 4. 8. 13:13

제목; “엘릴림과 엘로힘의 차이와 시편 제97”(97:1-12, 86:8, 13, 1:4, 44:9-20)

설교일; 주후 2021411일 주일

작성자; 손진길 목사(48일 작성)

 

흔히 시편을 구약시대 유대인들의 찬송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백성들이 시편의 노래를 부르면서 여호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가운데 작자미상인 시편 제 97편이 유명합니다. 그 이유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창조주의 자리에 머무르지 아니하시고 이 세상을 다스리시며 궁극적으로 심판과 구원을 베푸신다는 말씀의 선포가 뚜렷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시편 제97편은 제7절에서 우상인 페셀(פֶ֗סֶל)의 특징을 헛된 것(אֱלִילִ֑ים)이라고 명쾌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사용되고 있는 히브리어 엘릴림’(אֱלִילִ֑ים) 개념이 여호와(יְהוָ֣ה) 하나님을 말하고 있는 히브리어 엘로힘’(אֱלֹהִ֑ים) 대조가 되고 있습니다. 개념의 차이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다음과 같이 한번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헛된 것이라고 하는 히브리어 엘릴림 기본적으로 다음 세가지의 개념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첫째가 허망하다는 것입니다. 둘째가 무가치하다는 것입니다. 셋째가 쓸모가 없다 것입니다;

그와 달리 엘로힘으로 불리고 있는 여호와 하나님은 역사적으로 다음 세가지의 권능을 지니고 계십니다. 첫째가 역사의 시작을 준비하신 창조주이십니다. 둘째가 역사를 섭리하시는 통치자이십니다. 셋째가 역사의 종말을 주관하시는 심판주이시며 동시에 의인을 구원하고자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시는  전능자이십니다.

둘째로, 위에서 말씀드린 엘로힘의 특징을 중심으로 하여 우상의 성격을 말하고 있는 엘릴림의 개념을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여호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에 오늘날 사람들이 제멋대로 만들어서 섬기고 있는 우상들은 전혀 관여한 바가 없습니다(1:1, 44:6). 우상숭배자들이 자신들의 우상인 페셀을 창조주의 하나라고 우긴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거짓말입니다(46:1-2). 왜냐하면, 그것은 세상의 창조에 전혀  관여한 바가 없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세상의 창조에 있어서는 더더욱 아무런 쓸모가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피조물인 사람들이 만든 우상들이(man made gods) 어떻게 세상을 창조하는 신적인 능력을 선보일 수가 있겠습니까? 점을 일찍이 동방의 제사장 앞에 현신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계십니다;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38:3-4).

욥이 알고 있는 인간의 지혜, 과학의 , 이데올로기 어떤 것으로도 세상을 창조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전능하신 지혜와 능력을 대신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욥은 자기가 알고 있는 세상의 지혜와 관념으로 감히 여호와 하나님의 뜻과 섭리에 대항하고자 했던 자신의 불의한 생각을 내려놓고 있습니다;

요컨대, 그것이 여호와신앙의 회복입니다. 자신이 창조주 여호와 앞에 서게 되면 한갓 피조물이요 죄인이라는 선명한 깨달음이 욥의 신앙심과 신원회복의 시발점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42:3-6).

둘째, 태초에 세상을 창조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자연과 인간세상의 경영에 있어서 손을 떼고 멀리 물러나 계신 것이 결코 아닙니다. 세상의 임금들을 내세워 통치하고 계시지만 이면에서는 인간의 역사를 섭리하고 계십니다. 점은 선민의 왕국에 있어서나 이방인들의 제국에 있어서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한 맥락에서 선견자 다니엘이 기록하고 있는 신바벨론제국의 황제 느부갓네살의 고백이 다음과 같습니다; “ 기한이 차매 느부갓네살이 하늘을 우러러보았더니, 총명이 다시 내게로 돌아온지라. 이에 내가 지극히 높으신 이에게 감사하며, 영생하시는 이를 찬양하고 경배하였나니, 권세는 영원한 권세요 나라는 대대에 이르리로다. 땅의 모든 사람을 없는 것같이 여기시며, 하늘의 군대에게든지 땅의 사람에게든지 그는 자기 뜻대로 행하시나니, 그의 손을 금하든지 혹시 이르기를, 네가 무엇을 하느냐고 자가 아무도 없도다”(4:34-35);

세상의 역사를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대로 통치하고 계신다고 하는 사실을 자신의 특이한 체험을 통하여 느부갓네살 황제가 명확하게 깨닫고 있습니다. 그가 한때 의지하고 있던 신바벨론제국의 토속신으로서 창조의 신이라고 세상에 선전하고 있는 모르닥도 제국의 경영에 있어서는 여호와 하나님 앞에 서게 되면 전혀 존재성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최고의 우상인 모르닥마저 가치가 없는 존재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것이 엘릴림이 지니고 있는 속성인 소위 ()가치성입니다.

셋째, 역사의 심판에서 백성들이 구원을 얻자면 그들이 섬기고 있는 신적인 존재가 백성들의 죄를 속죄하고 마침내 구원을 베풀어 수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소망을 가지고 사람들이 신을 섬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을 제외하고 나면 세상에 그와 같은 백성들의 소망을 실현시켜줄 있는 신이 결코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이유는 사람들이 섬기고 있는 우상이라고 하는 것이 나무나 또는 금속으로 만들어진 신상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입니다(44:9-20).

그와 같은 사실을 시편 97편에서는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습니다; “산들이 여호와의 땅의 앞에서 밀랍같이 녹았도다”(97:5), “조각한 신상을 섬기며 허무한 것으로 자랑하는 자는 수치를 당할 것이라. 너희 신들아,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97:7). 요컨대, 사람들에게 구원을 수가 없는 허망한 존재가 바로 그들이 만들어서 섬기고 있는 우상들인 것입니다.

다음으로 시편 97편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1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나니, 땅은 즐거워하며 허다한 섬은 기뻐할지어다. 2 구름과 흑암이 그를 둘렀고 의와 공평이 그의 보좌의 기초로다. 3 불이 그의 앞에서 나와 사방의 대적들을 불사르시는도다. 4 그의 번개가 세계를 비추니 땅이 보고 떨었도다”(97:1-4); 다음과 같이 한 구절씩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첫째,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태초에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1:1). 그리고 자신의 형상과 모양대로 인간을 창조하시고 그들로 하여금 선한 청지기가 되어 피조세계를 여호와의 뜻에 맞게 경영하도록 권한을 위임하고 계십니다(1:26-27).

사람들이 여호와의 뜻과 말씀을 청종하여 피조세계를 선하게 관리하고 있을 때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그 모습이 아름다워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심히 기뻐하고 계십니다(1:31). 하지만 여호와를 잘 섬기고 있는 아담과 하와의 가정에서조차 악한 영의 화신인 뱀의 유혹에 빠져서 여호와의 말씀을 경시하는 불신앙이 발생하고 있습니다(3:1-7).

그때부터 실락원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여호와께서는 선지자를 보내시고 또한 그 역사를 섭리하고 계십니다. 이 세상을 그냥 버려 두지 아니하시고 여호와의 사자들을 보내어 면밀하게 감찰하시고 부득이한 경우에는 국지적인 역사심판까지 행하고 계십니다(19:24-29);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선민답게 여호와의 역사개입과 그 직접적인 다스림에 대하여 먼저 찬양을 드리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나니, 땅은 즐거워하며 허다한 섬은 기뻐할지어다”(97:1). 여기서 허다한 섬은 멀리 떨어져 있는 여러 나라와 족속들을 지칭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둘째,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섭리하시고 필요한 경우에는 직접 통치를 하시지만 그래도 여호와의 보좌는 우주 바깥 천국에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1:2). 그러한 이치를 제2절 전반부에서 구름과 흑암이 그를 둘렀고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호와의 통치이념은 무엇일까요? 그것이 창조주의 공의의 정신인데 여기서는 의와 공평이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97:2b).

창조주의 공의(righteousness)의 정신은 세상사람들의 정의(justice)의 개념과는 다른 것입니다. 왜냐하면, 시공간에 갇혀서 살아가고 있는 피조물인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나와 너와 우리들의 입장이 최우선입니다. 우리편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남의 편에 대해서 억압과 착취를 행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불의한 일을 행하면서도 그것을 자신들은 정의’(justice)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우리들과 상대방의 입장을 골고루 살피고 계십니다. 그 결과 모두를 살리고 돌볼 수 있는 해법을 찾아서 역사를 섭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창조주의 공의의 정신을 집단적인 이기주의에 빠져서 자신들의 이익만을 정의라고 부르고 있는 인간사회에서는 제대로 구현할 수가 없습니다. 그 결과 아버지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을 실천하고자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끝내 유대인 사회에서 십자가 희생을 당하고 마시는 것입니다.

셋째, 인간들의 세상에서 창조주 여호와의 뜻을 전하고 있는 선지자들이 희생을 당하고 있습니다. 드디어는 마지막 계시자로 이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 예수마저 십자가에서 처형을 당하고 맙니다. 그렇다면 창조주의 공의의 정신을 파수하기 위하여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조치를 역사 가운데 취하게 되시는 것일까요?

그 점과 관련하여 시편의 저자는 3 불이 그의 앞에서 나와 사방의 대적들을 불사르시는도다. 4 그의 번개가 세계를 비추니 땅이 보고 떨었도다”(97:3-4)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가까운 역사적인 사례를 하나 살펴보고자 합니다;

유대교지도자들이 자신들의 종교적인 이익을 사수하기 위하여 로마총독의 권세를 빌려서 그리스도 예수를 그만 주후 32년경 십자가에 처형하고 맙니다. 그것을 보시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주후 70년에 로마의 군대를 보내어 유대인 사회를 멸망시켜 버리십니다(97:3);

그후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국가가 없는 상태로 온 세상의 나그네가 되어 살게 됩니다. 주후 20세기 중반에 비로소 팔레스타인 땅에 현대 이스라엘 국가를 건설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여호와의 역사섭리를 바라볼 때에 온 세상사람들이 두려운 마음으로 창조주 앞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97:4).

둘째로, “5 산들이 여호와의 땅의 앞에서 밀랍 같이 녹았도다. 6 하늘이 그의 의를 선포하니 모든 백성이 그의 영광을 보았도다. 7 조각한 신상을 섬기며 허무한 것으로 자랑하는 자는 수치를 당할 이라 너희 신들아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 8 여호와여 시온이 주의 심판을 듣고 기뻐하며 유다의 딸들이 즐거워하였나이다. 9 여호와여 주는 위에 지존하시고 모든 신들보다 위에 계시니이다”(97:5-9); 이 대목은 현존세상의 종말과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에 관한 예언의 노래입니다. 그 내용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세상의 종말이 임하게 되면 이 세상 모든 피조물들은 창조주 여호와의 현신 앞에 그만 녹아 내리게 되고 맙니다(97:5). 그 점을 훗날 사도 베드로가 다시금 언급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벧후3:12). 그렇지만 여호와신앙을 지킨 성도들은 구원을 얻게 됩니다. 왜냐하면, 영생의 몸으로 부활하여 새 하늘과 새 땅의 수도인 새 예루살렘성으로 입성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창조주 여호와의 진면목을 보게 됩니다. 모든 거룩한 것들이 앞서 가면서 하나님의 공의를 선포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태양보다 더 밝게 빛나고 있는 것입니다(97:6). 참고로, 이 대목은 그 옛날 모세가 기록하고 있는 내용과 동일한 것입니다(33:18-23). 그리고 태양보다 더 밝은 창조주의 영광에 대해서는 훗날 사도 요한이 그의 계시록에서 실감나게 두차례나 기록하고 있습니다(21:23, 22:5).

둘째, 출애굽기 제12장에서 모세는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이 두가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우상을 섬기면서 여호와의 말씀을 무시한 자들에 대한 심판입니다(12:12a). 또 하나는, 사람들이 만든 모든 우상과 신들을 벌하는 것입니다(12:12b). 그와 동일한 내용을 시편 제97편에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7 조각한 신상을 섬기며 허무한 것으로 자랑하는 자는 수치를 당할 이라 너희 신들아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97:7).

그 결과 새로운 이스라엘 12지파 곧 이 세상의 심판 가운데 구원을 받은 성도들이(97:8) 소리를 높여서 여호와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주는 위에 지존하시고 모든 신들보다 위에 계시니이다”(97:9).

그 일을 훗날 사도 요한이 그의 계시록에서 환상 가운데 보고서 정확하게 기록으로 남기고 있습니다;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피조물이 이르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5:13).

셋째로, “10 여호와를 사랑하는 너희여 악을 미워하라 그가 그의 성도의 영혼을 보전하사 악인의 손에서 건지시느니라. 11 의인을 위하여 빛을 뿌리고 마음이 정직한 자를 위하여 기쁨을 뿌리시는도다. 12 의인이여 너희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그의 거룩한 이름에 감사할지어다”(97:10-12); 시편 제97편의 세번째 단락은 세상의 종말 가운데 심판이 아니라 구원함을 받은 성도들의 기쁨과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찬양입니다;

 그 가운데 인상적인 대목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성도의 의미를 여호와를 사랑하는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97:10a).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여 그 뜻을 실천하는 인생을 살아간 성도들은 역사의 종말에 대한 여호와의 심판 가운데에서도 멸망을 당하지 아니하고 그 영혼의 구원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97:10b). 그때까지 이 세상에 살아 있는 성도들은 영생의 몸을 입고서 그대로 승천하게 될 것입니다(살전4:17). 이미 죽은 성도들은 그 영혼이 그리스도를 만나 영생의 몸으로 되살아나서 천국으로 입성하게 됩니다(살전4:16, 5:28-29).

둘째, 창조주의 공의의 정신을 이 세상에서 실천한 자는 의인이라고 여김을 받게 됩니다(97:11a). 그들을 여호와께서는 빛의 자녀로 삼으십니다(97:11b). 그리고 여호와 앞에 정직한 신앙인을 하나님께서는 크게 기뻐하십니다(97:11c). 그 이유는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여호와신앙에 있어서 겉모습과 그 내심이 다른 이중적인 종교인을 무척 싫어하시기 때문입니다.

본질적으로 창조주 하나님의 진리라고 하는 것은 처음과 나중이 같으며 안과 밖이 동일한 것입니다(48:12, 5:48-6:4).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안과 밖이 다른 바리새인들을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크게 질책하신 것입니다(23).

셋째, 정직한 믿음을 가진 의인의 탄생은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와 성령님의 내주 역사하심으로 가능하게 됩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 성도들이 자력으로 얻을 수가 없는 하나님의 거룩한 선물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12 의인이여 너희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그의 거룩한 이름에 감사할지어다”(97:12)라고 벌써 여호와의 은혜를 찬양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방인들처럼 우상을 만들어 편리하게 창조주라고 섬기게 되면 여호와 하나님의 역사적인 심판과 종말론적인 심판을 모두 받게 됩니다. 그럴 밖에 없는 것이 사람이 만든 신상과 우상은 창조주 여호와의 역사심판과 종말심판을 면할 있게 해주는 능력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언급과 같이 나무로 만든 신상은 땔감이 되고 것입니다. 그리고 피조세계의 모든 것들이 녹아 내리게 되는 종말심판의 때에 강림하시는 여호와 앞에 서있을 존재가 없습니다. 다만 부활하여 영생의 몸을 입게 되는 성도들만이 앞에 수가 있습니다.

그와 같이 허망한 존재인 우상을 시편 97편에서는 엘릴림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것은 창조주이시며 역사의 섭리자이시고 종말론적인 심판주이신 여호와 하나님 엘로힘과는 전혀 반대의 개념입니다. 참고삼아 엘릴림과 비슷하게 사용하고 있는 우리들의 용어를 찾아보면 그것은 날라리 날림 같은 것입니다;

날라리는 너무나 가벼워서 키질을 때에 겨와 같이 바람에 날리게 됩니다(1:4). 그리고 날림은 부실한 것이며 일종의 짜가입니다. 겉으로는 그럴 듯하게 보이지만 부실한 믿음은 일단 창수가 나면 와르르 무너지고 맙니다(7:26-27). 또한 엘릴림 짝퉁인 가라지와 같아서 나중에 전부 모아서 불에 태워버리게 됩니다(13:30).

아무쪼록 그와 같은 차이를 확실하게 분별하면서 주님의 제자답게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