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22년 손진길 목사 설교문

시편 제61편이 말하고 있는 하나님의 인자와 진리(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1. 3. 25. 12:57

제목; “시편 제61편이 말하고 있는 하나님의 인자와 진리”(61:1-8, 80:17, 110:1, 4:24)

설교일; 주후 2021328일 주일

작성자; 손진길 목사(325일 작성)

 

성경말씀은 하나님의 인자와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고 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인자하심으로 말미암아 죄인인 인간들이 당장 멸망을 받지 아니하고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있는 은혜를 얻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진리가 무엇인지를 인생 가운데 깨닫고 있습니다.

특히 시편 제61편에서 하나님의 인자와 진리에 대하여 깊은 내용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다윗이 이 세상에서 많은 어려움을 당하는 중에 문득 한가지 사실을 깨닫고 그것을 제7절에서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내용은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여호와 하나님께서 놀라운 계획을 세우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 깊은 내용이 과연 무엇일까요? 시편 제61편을 한 구절씩 풀이해가면서 그 점을 중점적으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첫째로, ” 1 하나님이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시며 내 기도에 유의하소서. 2 내 마음이 눌릴 때에 땅 끝에서부터 주께 부르짖으오리니 나보다 높은 바위에 나를 인도하소서”; 다윗은 젊은 시절 이스라엘의 국왕인 사울의 군대에 추격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는 황량한 유다의 광야지대에서 몸을 숨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추격군의 접근을 알고서 미리 피신하기 위하여 언제나 높은 바위 위에 올라가서 망을 보고 있습니다. 그렇게 도망자로 살아가는 중에 그가 한가지 사실을 깨닫고 있습니다. 그것은 아무리 높은 바위에 올라가서 파수를 본다고 하더라도 적의 침입을 완전히 파악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사울왕의 추격에서 온전히 벗어날 수가 있을까요? 그 방법은 높은 하늘에서 낮은 피조세계를 정밀하게 감찰하고 계시는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의 도우심을 얻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간절하게 여호와의 도우심을 기도하고 있습니다; “적군의 기습으로 제가 사로잡히는 꿈을 꾸면서 저는 불안에 떨고 있습니다. 주여, 불쌍하게 여기시고 높은 바위  안전한 산성에 저를 숨기시고 부디 보호하여 주옵소서… “.

 

둘째로, “3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원수를 피하는 견고한 망대심이니이다. 4 내가 영원히 주의 장막에 거하며 내가 주의 날개 밑에 피하리이다 (셀라)”; 따지고 보면, 우리 모두는 다윗처럼 세상의 많은 적들로부터 쫓김을 받고 있는 도망자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안전한 요새에 피신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방랑자로 그리고 나그네로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영원한 안식처와 완벽한 피난성이 과연 어디에 있을까요? 그 대답을 다윗이 여기서 하고 있습니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의 산성만이 가장 견고한 망대를 가진 우리들의 영원한 피신처가 된다는 것입니다”(61:3-4의역).

다윗은 젊은 시절 사울왕의 군대에 쫓기고 훗날 유다와 이스라엘의 왕이 되고 나서는 수많은 이방나라와 전쟁을 친 인물입니다. 따라서 그가 자신의 오랜 경험에 비추어 그와 같이 진술하고 있습니다. 참고로, 그 점을 익명의 히브리서 저자는 이 땅에 있는 요새가 아니라 창조주 여호와께서 마련하고 계시는 영생의 천성만이 우리들의 가장 안전한 피난처가 된다고 진술하고 있습니다(11:16). 요컨대, 구약시대에 그 사실을 알고서 평생 여호와신앙을 파수한 자들이 바로 믿음의 선진들인 것입니다(11:13-15).

 

셋째로, “5 하나님이여 내 서원을 들으시고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의 얻을 기업을 내게 주셨나이다. 6 주께서 왕으로 장수케 하사 그 나이 여러 대에 미치게 하시리이다”; 그렇다면 성도들은 하나님나라의 기업만을 얻는 존재일까요? 다윗은 그것이 아니라고 여기서 말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그가 사울왕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 왕국의 왕이 되었지만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엄청나게 큰 제국을 선물로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 옛날 여호와께서는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에게 큰 강 유프라테스 서쪽에서부터 나일강 동쪽에 이르는 광대한 땅을 그 자손에게 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15:8). 그 예언의 성취가 다윗왕의 시대에 이루어진 것입니다(61:5, 삼하8:1-14). 그리고 다윗의 이스라엘 제국은 그의 아들 솔로몬왕에게 그대로 대물림이 되고 있습니다(61:6, 왕상2:12).

그렇다면 성도들의 경우에는 어떠할까요? 자신의 갈 길을 온전히 주님께 맡겨드리고 평생 그 종으로 신실하게 살아가는 경우에는 영육간에 그 상급이 놀라운 것입니다. 만약 이 땅에서 그 보상이 흡족하지 못하다고 한다면 나머지 상급이 천국에서 온전하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12:2, 12:30-34).

그 점을 주님께서는 사도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한 자들인 즉,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12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22:28-30).

넷째로, “7 저가 영원히 하나님 앞에 거하리니 인자와 진리를 예비하사 저를 보호하소서. 8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이름을 영원히 찬양하며 매일 나의 서원을 이행하리이다”; 다윗은 내세의 영생을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영원히 하나님 앞에서 살기를 소원하고 있는 것입니다(61:7a). 그 뿐만이 아닙니다. 다윗은 남아 있는 인생 가운데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자와 진리를 예비하셔서 자신을 보호하여 달라고 간구하고 있습니다(61:7b). 그 의미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그것이 너무나 대단한 선물이기에 다윗은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자신은 남은 인생 가운데 영원히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며 여호와의 종으로 신실하게 서원을 이행하면서 살아가겠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61:8). 그러므로 이제부터 다윗이 말하고 있는 하나님의 인자와 진리라는 선물에 관하여 알아보고자 합니다;

  첫째, 인자라고 하는 것은 히브리어로 헤세드’(חֶ֥סֶד)입니다. 그것은 자비, 긍휼, 사랑 등과 같은 의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헤세드는 사람들의 헤세드와는 그 격이 다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때로는 자비를 베풀다가도 성질이 나면 인내하지를 못하고 그만 폭발하고 맙니다.

그와 달리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그 인자하시고 자비하심이 신실함 그대로 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의 헤세드는 믿을 수가 없지만 창조주 하나님의 헤세드는 신뢰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15:6). 그 점을 사도 바울이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9:22-23);

둘째, 하나님의 진리는 영원한 속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따라서 성부 하나님의 말씀과 성자 하나님의 실천 그리고 성령 하나님의 증거하심이 모두 일치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겉과 속이 다르기가 일쑤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것은 안과 밖이 다르지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이 진리입니다. 그와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는 히브리어가 에메트’(אֱמֶ֗ת)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공생애 가운데 언제나 자신이 아버지 하나님의 뜻대로 말씀하시고 실천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뜻대로 하려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려 하므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5:30),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인 줄을 알고 또 내가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매 많은 사람이 믿더라”(8:28-30).

성령 하나님께서도 이 세상에 오시면 성도들에게 내주하여 언제나 성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과 생애가 동일하다는 사실을 증거하십니다(14:26, 16:13-15). 그러므로 보혜사 성령님을 일컬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진리의 성령님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14:17, 15:26, 16:13);

셋째, 다윗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자와 진리를 이 세상에 보내어 주셔서 자신을 두텁게 보호하여 달라고 간구하고 있습니다. 그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보호하고 천국으로 인도하기 위하여 훗날 인자와 진리가 이 세상에 오신다고 하는 사실을 영적으로 깨닫고 있기에 그와 같은 간구를 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61:7). 그렇다면 하나님의 인자와 진리가 이 세상에 어떠한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일까요?

역사 가운데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은 독생자를 이 땅에 성육신시켜 제자들과 함께 공생애를 살면서 복음사역을 하게 하심으로 실현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헤세드 라고 하는 것은 인자(人子, son of man, 80:17) 예수님의 생애를 통하여 복음사역으로 나타나신 바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110:1-7);

진리의 성령님께서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여 승천하시고 나자 열흘이 지나지 아니하여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도하고 있던 120명의 제자들에게 강림하여 내주 역사하시기를 시작하십니다(2:1-4). 그때 120명의 제자들은 하나님의 큰 일 행하심을 세계 120개 언어로 외치게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본토 유대인들에게 사도 베드로가 유창한 히브리어로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과 부활하심을 증거하게 됩니다(2:14-40). 그 일로 말미암아 주님을 믿기로 결심한 유대인들이 모여서 예루살렘 초대교회를 형성하게 되는 것입니다(2:41-47).

수년 후 유대교의 랍비였던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 승천하신 주님을 환상 가운데 만나게 되는 역사가 발생하게 됩니다(9:3-9). 그 일로 말미암아 랍비 사울은 기독교인 바울이 되어 새로운 인생을 시작합니다. 이방인 선교사로 살아가면서 사도 바울은 자신을 그리스도의 종이며 사도인 바울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1:1, 1:1, 1:1).

그는 남은 인생을 신실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끝까지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하는 히브리어 에베드(עֲבָדָ֧יו)가 헬라어 둘로스(δοῦλος)로 번역이 되고 있습니다. 결국 그리스도의 진실한 종 에베드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인 에메트를 왜곡하지 아니하고 이 세상에 액면 그대로 선포하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오늘날의 성도님들도 그 옛날 사도들처럼 온전히 복음을 실천하는 선지자의 삶을 살아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참고로, 시편에서 자주 등장하고 있는 단어로서 참으로 또는 진실로라고 하는 히브리어 아크’(אַ֤ךְ)가 있습니다. 시편 제73편의 경우를 살펴보면, 똑같은 용어 아크가 제1절과 제18절에서는 참으로라고 한국어로 번역이 되어 있고 제13절에서는 실로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실로라고 하는 한국말과 아크(ark)라고 하는 영어가 묘하게도 의미의 확장을 가져오고 있습니다. 실로라고 하는 지명은 주전 15세기 말에 여호수아가 백성들을 이끌고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처음으로 성막을 세우고 언약궤를 모신 장소입니다(18:1);

 그곳 실로가 사사 시대 300년 동안 성막을 모신 수도로서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물론 주전 11세기 초 엘리 대제사장 시절에 블레셋에게 언약궤를 빼앗김에 따라 실로의 역사가 끝나고 있습니다(삼상4:3-11, 18).

하지만 성경의 기록은 그 이상입니다. 그 옛날 이스라엘인 야곱이 12아들의 장래에 대하여 축복의 예언을 할 때에 실로에서 오시는 이가 나타날 때까지 유다지파가 왕조를 이루며 이스라엘 12지파를 이끌 것이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49:10). 그렇다면 주전 586년에 멸망한 다윗왕조 유다왕국이 언제 실로에서 오시는 하나님의 종을 만나서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게 되는 것일까요?

메시아의 역사는 지상에 있는 성막 곧 실로의 회복이 아닙니다. 예루살렘성전의 회복도 아닙니다. 오로지 천국의 큰 대제사장이 되시는 그리스도의 오심과 성령님의 내주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아 완전히 새로운 시대가 전개되고 있습니다.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을 실현하고자 하시는 주님과 그 제자들에 의하여 완전히 다른 실로의 시대가 열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 점에 대하여 흥미롭게도 예수님께서는 수가 성의 여인을 만나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계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자신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4:21-24). 그것은 신령과 진정 곧 그리스도와 성령님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성도들에게 열리는 주님의 새로운 구원의 방주(ark)의 시대를 말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본질적으로 실로에 모신 언약궤와 성막은 하늘에 있는 성소를 모방한 것입니다(25:8-9, 8:5).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시고 그 뒤를 이어 성령님께서 강림하여 성도들에게 내주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아 새 언약 곧 복음의 시대에는 모방이 아니라 본체에게 드리는 영적인 예배가 시작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에 따르면, 영적인 창조주 하나님께 드리는 더 나은 예배의 시대가 열리고 있는 것입니다(8:6).

구체적으로, 복음의 시대에는 성도들이 구약의 시대처럼 예루살렘성전이나 그리심산의 성전에서 회막을 중심으로 여호와께 속죄와 화목의 제사를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는 성경말씀의 진리를 성령님의 영적인 도우심으로 깨닫고 실천하는 예배인생을 살아가야만 하는 것입니다(12:1-2). 그것이 왕 같은 제사장인 성도들의 주님의 제자로서의 삶인 것입니다(벧전2:9).

그러므로 대속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주시고 진리의 성령님을 강림하여 내주 역사하시게 허용하신 아버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다윗처럼 자신의 서원을 끝까지 지켜 나가는 성도의 삶으로 일관해야 합니다(61:7-8). 아무쪼록 여호와의 신실한 종으로 그리고 주님의 제자로 끝까지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