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로마서 강해 제60강(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1. 4. 14. 03:16

로마서 강해 60(9:19-21)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7 3 1()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에 대하여(9:19-21);

 

어떻게 보면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내용은 단순합니다. 그것은 토기장이 비유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는 창조주의 주권 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점을 강조하고 있는 이유는 그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과 관계가 있습니다(4:16).

아브라함에게서 발견할 있는 가장 주요한 믿음의 특징은 그가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함으로써 믿음이 의로 여김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아브람이 이르되, 주께서 내게 씨를 주지 아니하셨으니 집에서 길린 자가 상속자가 것이니이다.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상속자가 아니라, 몸에서 자가 상속자가 되리라 하시고,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있나 보라. 그에게 이르시되,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15:3-6). 간략하게 풀이를 해봅니다;

(1)   첫째, 아브람은 그의 나이 75세에 북부 시리아 하란 땅에 머물고 있는 부친 데라의 곁을 떠나게 됩니다(11:31, 12:4). 이유는 남행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선지자로 살아가라고 하는 여호와의 명령을 따르기 위한 것입니다(12:1). 깊은 이유는 사실 여호와께서 주시겠다고 하는 언약과 관련이 되어 있습니다(12:1-3). 무엇보다도 당시 무자식인 아브람에게 자손의 번성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12:2). 고대 가부장 족장사회에서 후계자가 되는 장자가 없다고 하는 것은 절망스러운 일입니다.

(2)   둘째, 아브람이 145세나 되는 늙은 아버지 데라를 하란 땅에 홀로 남겨두고서 가나안 땅으로 남하를 것은 사실 장남으로서 일이 아닙니다(11:26, 31-32, 12:4). 하지만 여호와의 명령은 아비의 집을 떠나라고 하는 것이기에 눈물을 머금고 명령을 따른 것입니다(12:1). 더구나 그가 아버지 데라를 떠남으로서 엄청난 재물의 손해를 입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란 아버지 곁에 그대로 머물었더라면 훗날 그의 동생의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 나홀의 ’(, the city of Nahor, 24:10) 사실은 아브람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거부인 족장 데라의 재산을 상속받을 자가 차남인 나홀이 아니고 당연히 장남인 아브람인 것입니다(11:26).

(3)   셋째,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하나님신앙을 파수하면서 10 세월을 지내게 됩니다. 동안 위험한 일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지켜 주셨습니다. 하지만 철석같이 약속하신 언약의 아들만은 씨를 주지 아니하셨습니다. 기다림의 세월이 10년이나 되자 아브람이 단념을 하고 맙니다. 그래서 다시 현신하셔서 아브람에게 자손의 번성이라고 하는 복을 주시겠다고 지극히 복에 대하여 언급하시는 여호와의 말씀을 믿지 못하게 됩니다. 그저 자신에게 충성을 다하고 있는 젊은 무사장 다메섹 출신 엘리에셀을 자신의 양자로 삼을 터이니 그를 축복해 달라고 간구할 따름입니다. 그것은 세상적인 통념과 관례를 따르고 있는 지극히 합리적인 인간의 사고방식입니다.

(4)   넷째,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아브람을 장막 밖으로 이끄십니다. 그리고 가나안 남부 헤브론의 밤하늘을 수놓고 있는 총총한 많은 별무리를 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확실한 약속의 말씀을 주십니다; “뭇별을 있나 보라.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15:5). 하나님의 말씀은 이사야의 증언 그대로 하늘에서 결정이 되면 그것이 땅으로 내려와서 실현이 되고 열매를 맺는 법입니다(55:8-1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보여주시는 바와 같이 벌써 하늘에서는 총총한 별과 같이 많은 아브람의 후손들이 확정이 되어 있습니다. 이제 아브람이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의도와 능력을 믿기만 하면 하늘의 결정은 땅에서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으로 현실화가 것입니다.

(5)   다섯째, 아브람이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피조물이 아니라 창조주이심을 믿게 됩니다. 땅에서 물질적으로 그리고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며 약속입니다. 구체적으로, 85세가 되어버린 늙은 몸이 아브람입니다. 그리고 조강지처인 사래는 평생 불임이며(11:30) 그나마 75세의 할머니의 몸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들 노인에게서 약속의 아들이 탄생한다는 것일까요? 마치 거짓말과 같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가 창조주이시기 때문에 아브람이 믿고 있습니다.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아들을 창조해주시지 아니하시겠습니까? 마디로, 피조물과 피조세계의 관념을 벗어버리고 창조주 여호와 자체를 믿음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의 특징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 정답이라고 하여 믿음을 가진 아브라함을 옳다고 여호와께서 의로 여기십니다(15:6).

그런데, ‘토기장이 비유가운데에는 절대적인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개념만 들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중에는 창조주의 의도와 능력 그리고 책임에 대한 관념도 들어 있습니다. 먼저 그와 관련하여 히브리정경의 대선지서 가운데 이사야와 예레미야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첫째, 이사야 선지자의 글입니다; “너희의 패역함이 심하도다. 토기장이를 어찌 진흙같이 여기겠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어찌 자기를 지은 이에게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나를 찾지 아니하였다 하겠으며, 빗음을 받은 물건이 자기를 빚은 이에게 대하여 그가 총명이 없다 하겠느냐?”(29:16), “질그릇 조각 조각같은 자가 자기를 지으신 이와 더불어 다툴진대, 있을진저 진흙이 토기장이에게 너는 무엇을 만드느냐? 또는 네가 만든 것이 그는 손이 없다 말할 있겠느냐?”(45:9), “그러나 여호와여, 이제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이시니, 우리는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니이다”(64:8).

(2)   둘째, 예레미야 선지자의 글입니다; “진흙으로 만든 그릇이 토기장이의 손에서 터지매, 그가 그것으로 자기 의견에 좋은 대로 다른 그릇을 만들더라”(18:4),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족속아, 토기장이가 하는 것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이스라엘 족속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 같이 너희가 손에 있느니라”(18:6).

(3)   셋째, 주목할 만한 용어들이 다음과 같습니다; “패역함이, 총명이, 손이, 우리 아버지, 자기 의견에 좋은 대로, 이스라엘 족속아등입니다. 가운데 몇개의 용어의 의미를 조금 살펴봅니다;

1)      패역함이라고 하는 것은 가정의 윤리와 국가의 윤리를 모두 말하고 있습니다 가정에서 패륜을 저지르게 되면 국가적으로도 반역을 일으키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반역을 하는 자는 창조주가 아버지라고 하는 윤리의식도 없는 자입니다. 요컨대, 여호와 하나님을 아버지로 그리고 왕으로 인정하고 섬기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것은 마디로, 창조주의 주권을 확실하게 인정하고 따르는 믿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가 토기장이이며 사람들은 토기장이가 만든 진흙과 같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입니다.

2)      하나님의 총명 인간의 것과 다릅니다. 차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천지 차이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지혜로 함부로 하나님의 지혜를 짐작하거나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비록 비현실적인 약속이라고 하더라도 창조주께서는 하나님의 지혜로 그것을 반드시 실현시키십니다. 요컨대, 하나님이 능력자이심을 믿어야만 합니다(17:1).

3)      토기장이가 으로 흙을 빗어서 토기를 구워내듯이 하나님께서도 창조의 손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피조물인 인간은 하나님의 능하신 손으로 만들어 가시는 새로운 창조를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예언 가운데에는 이미 그것을 실현시킬 있는 방법까지 들어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4)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라고 하는 발견은 실로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가르쳐 주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7:11). 하나님의 의도는 선하신 것입니다. 모든 피조물을 돌보고 생명을 전부 살리고자 하십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자신의 형편과 자신의 목숨이 먼저입니다. 그러므로 이기적인 생각을 접어 두고 하나님의 선하신 의도와 공의의 정신을 믿고서 인내하고 기다려야만 합니다. 믿음으로 참고 기다리게 되면 가장 선한 것으로 우리 아버지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토기장의의 주권은 선하신 의도대로 행사가 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4)   요컨대, 토기장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주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 의로운 믿음의 시작입니다. 그리고 다음에는 주권을 하나님께서는 좋으신 아버지로서 선하게 사용하신다고 하는 사실도 믿어야만 합니다. 역사적으로, 모든 피조물을 구원하여 새로운 천지에서 영생을 누리도록 하시겠다고 하는 새로운 창조를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만한 능력과 지혜의 소유자이심도 믿어야 합니다. 나아가서는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의 속성도 믿어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버지의 책임을 다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도 예수님처럼 아들의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아버지께 영광을 올려 드리기 위하여 지상명령을 수행하는 영적인 삶에 전력투구를 해야합니다.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냐? 누가 뜻을 대적하느냐? 하리니”(9:19); 부문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냐?”(9:19a); 구절은 바로 앞의 ,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9:18) 하는 내용과 직결이 되고 있습니다. 뜻을 쉽게 이해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출애굽기 12장을 살펴봅니다;

1)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출애굽의 은혜를 베풀고 있습니다. 반면에 바로와 신하들의 마음을 완악하게 만들어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한 책임을 역사적으로 묻고 계십니다(9:12, 10:20). 결과 애굽의 장자와 가축의 초태생들이 유월절 밤에 몰살을 당하고 맙니다(12:29-30).

2)      그렇다면 그것은 이치에 맞지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자기 뜻대로 한쪽에는 긍휼을 주시고, 다른 한쪽에는 완악함을 주신 것입니다. , 바로와 신하들의 마음을 완악하게 만든 책임이 여호와에게 있습니다. 그러므로 애굽 인들에게 완악함이라고 하는 허물의 책임을 물어서는 안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와께서는 애굽 인들에게 책임을 묻고서 강력한 징계를 행하고 있습니다. 결국 그것은 합당하지 못한 처사입니다.

3)      그러한 질문을 사도 바울이 히브리정경에서 발견하고 있습니다. 대선지서인 이사야와 예레미야의 글을 살펴보면, 분명히 여호와 하나님께서 마치 토기장이처럼 창조주의 주권을 행사하시고 계십니다(29:16, 18:4). 그렇다면 피조물들이 귀책사유가 여호와에게 있는데 어찌하여 저희들에게 책임을 묻고 계십니까?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응당 그릇을 잘못 만든 허물은 토기장이가 져야만 하는 것입니다”(9:19a의역)라고 주장하는 것은 근거가 있는 항변입니다.

(2)    누가 뜻을 대적하느냐? 하리니”(9:19b); 그에 따라 바로와 신하들 그리고 애굽 사람들은 여호와 하나님께 항변을 수가 있습니다; “재앙을 잘못 내리신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모든 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허물이며 귀책사유가 아닙니까?”.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것이 아니라고 답변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 뜻을 대적하느냐? 하리니”(9:19b). 피조물인 인간들이 감히 창조주가 하시는 일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어째서 사도 바울이 그렇게 단언할 수가 있을까요? 그가 그렇게 단정할 있는 이치를 헤아려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토기장이가 그릇을 만들 듯이 그렇게 여호와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것이 맞습니다. 그러므로 혹시 잘못 만들어진 부분이 있으면 피조물이 점에 대하여 항변을 수가 있습니다. 모든 허물은 만든 이의 책임이므로 창조주께서 책임을 먼저 지셔야만 한다는 논리에 입각하고 있습니다.

2)      그것은 마치 자식이 부모님께 항변하는 상투적인 말투와 닮아 있습니다; “이렇게 잘못 만들어서 태어나게 하셨으니 제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잘못 태어나게 하신 부모님의 책임입니다”. 부모님께서 두가지로 답변하십니다; 첫째, 잘못 만든 책임이 있다면 그것은 부모책임이 맞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같이 못난 자식을 세상에 내어놓은 부모의 책임을 통감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둘째, 그러나 세상에서 잘못 자란 책임이 너에게도 있다는 것입니다. 책임을 장차 어찌할 것이냐? 너무나 염려가 되는구나고 한탄을 하십니다.

3)      첫번째 부모의 책임에 대해서 그것을 회피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복음서에서는 하나님께서 인간창조에 참여하신 독생자를 세상에 사람의 아들로 태어나게 하시고 대속의 십자가를 지게 하십니다. 의미는 창조주가 책임을 통감하시고 자신을 속죄의 제물로 희생한 것입니다.

4)      다음으로, 세상의 죄악에 물든 책임이 자식에게 남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선민 이방인 구분하지 말고 누구나 대속의 십자가 앞으로 나와야만 합니다. 자신의 세상적인 죄를 고백하고 회개를 해야합니다. 거듭난 인생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십자가 대속이라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사랑의 빚을 갚는 길입니다.

둘째로,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9:20);

(1)   사도 바울이 히브리정경에 나타나고 있는 토기장이의 비유를 가지고 창조주의 주권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마디로, 지음을 받은 피조물이 지음의 주권을 지니고 있는 창조주에게 책임을 묻겠다고 하는 것은 언어도단(言語道斷, 말도 되지 아니하는 지나친 언사와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만약 항변을 하고 반문을 한다고 하면 잘못 만들어진 그릇을 모두 부수어 버리면 것입니다. 마음에 맞는 그릇만 남기고 그러하지 아니한 그릇을 전부 부수어 흙을 재사용하는 것이 토기장이의 상례가 아닙니까? 그러한 무섭고도 두려운 창조주의 주권을 생각해보라는 것입니다.

(2)   한편,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물을 덮어주고 고쳐주어서 재사용하겠다고 하시는 여호와의 깊은 뜻을 헤아려 보라는 것입니다(19:22-25).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완전히 부수어 버리지 아니하고 소재를 활용하여 새로운 그릇을 만들어낼 수가 있을까요? 그와 관련하여, 부대를 새부대로 그리고 그릇을 새그릇으로 만들어 내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와 은혜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성령님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성도들의 일생을 통하여 놀라운 의화와 성화로 번쩍이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셋째로,토기장이 진흙 덩이 하나는 귀히 그릇, 하나는 천히 그릇 만들 권한 없느냐?”(9:21);

(1)   사도 바울은 8장에서 다음과 같은 명제를 말한 바가 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8:28). 선하신 하나님의 뜻은 세상구원과 영생구원에 있습니다(3:16-17). 모든 피조물을 돌보고 생명을 살리고자 하시는 것이 창조주의 공의의 정신이며 사랑입니다. 일을 위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세움을 입고 있는 자들이 그리스도의 제자이며 여호와의 종인 성도들입니다.

(2)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몸이 되어 복음의 일꾼으로 살아감에 있어서는 역할의 분담이 있게 됩니다. 몸의 부문이 기능을 수행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한 이치를 본문에서는 토기장이 진흙 덩이 하나는 귀히 그릇, 하나는 천히 그릇 만들 권한 없느냐?”(9:21) 사도 바울이 알기 쉽게 표현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예컨대, 달란트의 비유처럼 능력과 역할에는 분명히 차이가 있습니다(25:14-15). 그러나 여호와의 종이며 하나님의 일을 분담하여 수행하고 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귀천을 불문하고 모두 구원하고 또한 구원의 일꾼으로 사용하시겠다고 하는 이유입니다.

결론적으로, 언뜻 보면 이치에 맞지 않는 것으로 보이는 본문의 내용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흠결에 대해서는 대속의 십자가를 지신 하나님 아들의 희생이 있기에 하자가 치유가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사도 바울처럼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하여 당당하게 주장할 수가 있습니다.

히브리정경에서도 선지자인 이사야나 예레미야가 토기장이의 비유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장차 하나님의 아들이 메시아로 세상에 오시는 것을 알고 있기에 창조주의 주권과 하자보수의 은혜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피조물인 인간의 입장에서는 그래도 죄인을 완전히 부수어 버리지 아니하시고 길을 열어 주시고 거듭난 삶을 주시는 은혜에 대하여 창조주 하나님께 깊이 감사하게 됩니다. 아무쪼록 은혜에 보답하시는 귀한 성도님들의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