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로마서 강해 제58강(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1. 4. 11. 20:09

로마서 강해 58(9:14-16)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7 2 27()

 

긍휼의 여호와 하나님 발견한 모세와 사도 바울에 대하여(33:19, 9:14-16);

 

본문과 관련하여 창세기 25장의 내용을 살펴보면 여전히 하나의 의문사항이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리브가의 태중에 들어 있는 쌍둥이 에서와 야곱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이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 국민이 태중에 있구나. 민족이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족속이 족속보다 강하겠고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2:23).

사도 바울의 설명과 같이 아직 태어나지도 아니한 에서와 야곱입니다(9:11a).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태아에 불과합니다(9:11b). 그런데 어떻게 당시 족장사회의 관습과 통념을 뛰어넘어서 장남으로 태어나게 되는 에서가 차남인 야곱을 섬기게 될까요? 현실은 분명히 정반대인데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무시하는 예언을 어떻게 그들이 태어나기 전부터 산모(産母) 리브가에게 들려주고 있는 것일까요? 과연 하나님의 의도가 무엇일까요?(9:12).

의문에 대한 명확한 답변을 하지 아니하고 사도 바울은 히브리정경의 마지막에 실려 있는 선지자 말라기의 기록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1:2-3)라고 하는 구절을 인용하여 그의 로마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기록된 ,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9:13).

그래서 풀리지 아니하는 의문에 대하여 하나의 답을 얻어 보는 심정으로 사도 바울이 이왕에 언급하고 있는 구절을 다시 살펴봅니다; “택하심 따라 되는 하나님의 행위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세 이르시되,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9:11c-12).

결과 다음과 같은 의미를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부르심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부르심에 어떻게 반응을 하는가? 하는 것이 평생을 좌우합니다. 이유는 자신의 선한 행위로 구원을 얻을 있는 능력이 피조물인 인간에게는 없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부르심과 치유하심에 대하여 긍정적으로 반응을 하고 회개를 하는 자가 구원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회적인 질서나 관행 또는 출신성분으로 대신할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9:11c-12의역).

사실 절대선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자면 인간은 죄인들입니다. 모든 피조물을 돌보고 생명을 살리는 일꾼이 되라고 인간창조를 했지만 그들이 하는 일은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뜻에 맞지 아니하면 창조주의 생각을 외면하고 아예 자신이 스스로 세상의 주인이 되어서 제멋대로 인생을 살아가고자 합니다. 결과 죄가 장성하여 사망으로 들어가고 있는 것이 사람들의 운명입니다.

그러한 처지에 있는 인간들에게 그래도 한번 돌아설 있는 기회를 주시고 계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이유는 하나님의 주요한 속성이 긍휼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긍휼의 하나님 사도 바울이 출애굽기에서 발견하고 있습니다;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33:19).

그래서 그는 본문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9:15-16).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리브가의 태중에 들어있는 에서와 야곱 가운데 누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긍정적인 반응을 것인지를 미래 내다보시고 계신다고 하겠습니다. 인생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을 고쳐서 사용하시고자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자가 훗날의 야곱입니다. 결코 그러하지 아니하고 마음을 완악하게 하여 버티고 있는 자가 에서입니다.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없느니라”(9:14);

(1)   만약 사람들이 자신의 선한 행위로 구원을 얻을 있는 능력자라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누구에게는 구원을 허락하고 누구에게는 아니하고 하시게 되면 그것에 대하여 불평할 수가 있습니다. , 자신같이 선한 사람에게 어떻게 구원을 주지 아니하시느냐고 항의를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에게는 그러한 자격이 없습니다. 애초부터 그럴 만한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2)   기본적으로 모두가 한평생 가운데 살다가 사망으로 들어가고 마는 운명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불쌍하게 여기시고 불러 주시니 그것이 감사합니다. 부르심에 감격하여 진심으로 자신의 잘못 살아온 인생을 회개합니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은혜로 거듭난 인생을 살아가고자 결심합니다. 예를 들면, 야곱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하여 그와 같이 반응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에서는 그러한 반응이 전혀 없습니다. 그것이 그들의 차이점입니다.

 둘째로,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9:15);

(1)   창세기 4장을 보면 카인이 동생 아벨을 시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제사를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있는 여호와께 대하여 원망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불평과 시기심을 드러내고 있는 카인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 지니라”(4:6-7). 그러나 카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습니다. 기어코 동생 아벨을 살해하고 암매장을 하고 맙니다(4:8). 사실을 아시고 하나님께서 카인을 멀리 동쪽 땅으로 유배를 보내십니다(4:11-12, 16).

(2)   그런데,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유랑민들이 살고 있는 땅으로 떠나게 되는 카인이 하나님께 통사정을 하고 있습니다. 부디 그들로부터 안전하게 자신을 지켜 달라는 것입니다(4:13-14). 하나님께서는 간구를 들어 주십니다(4:15).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유가 바로 하나님의 긍휼과 불쌍히 여기심입니다; 첫째, 자신의 육신의 소욕을 다스리지 못하고 있는 인간을 불쌍하게 보신 것입니다. 둘째,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도록 조치를 취해주고자 하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3)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섬긴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두 도륙하시려던 생각을 여호와 하나님께서 바꾸고 계십니다(32:8-14, 34). 출애굽의 지도자 모세가 자신의 영생을 걸고서 하나님께 읍소를 했기 때문입니다(32:11-13, 30-32). 그리고 그것보다도 하나님의 속성이 긍휼이시기 때문입니다(33:18-19);

1)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시고 십계명을 주셨지만 뜻을 온전히 깨닫고 실천하지를 못하고 있는 불쌍한 백성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을 정죄하고 심판하는 것보다는 훗날 회개시켜서 구원하고자 하십니다. 일을 실현하기 위하여 메시아를 그들에게 보내주시기로 작심하고 계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시라고 있습니다.

2)      그러하신 긍휼의 하나님께서 어찌 선민들만 구원하고자 하실까요? 그것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의 생각 그대로 이방인들에게도 회개와 구원의 기회를 주고자 하십니다. 그것이 창조주의 공의의 정신에 입각한 긍휼입니다.

셋째로,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9:16);만민구원의 은혜가 오로지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말미암아 땅에 것이라고 사도 바울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1)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9:16a); 사람들은 제각각 소원을 지니고 있습니다. 소원을 이루기 위하여 열심히 자신들의 () 찾고 있습니다;

1)      병이 자는 낫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장애자는 고침을 받기를 원합니다. 귀신이 들린 자는 축사(逐邪) 기적을 원하고 있습니다. 빈곤에 처한 자는 재물을 원하고 있습니다. 어떤 자는 입신양명을 원하고 있습니다. 어떤 자는 선행을 베풀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2)      그러한 소원들이 세상에서 온전히 이루어질 수가 있을까요? 특히 유한한 재화 가운데 살기다툼을 하고 있는 세상에서 풍요로운 이상세계를 건설할 수가 있을까요? 사람들의 크고 작은 소원들이 사람들의 뜻대로 성취가 되지를 않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사람들에게는 유토피아를 건설할 있는 능력이 애초부터 부재하기 때문입니다.

(2)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9:16b); 세상에서는 자력(自力)구원의 종교가 많이 있습니다. 사망으로 치닫고 있는 자신의 운명을 구하고 인류에게 구원과 영생을 얻게 해주고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행을 하며 수도를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헬라 시대의 철학자들도 세상을 창조한 영적인 지혜를 지식(Gnosis)으로 얻어서 그것으로써 세상에 소위 철학 다스리는 이상세계를 만들고자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역사 이래로 그러한 인간들의 달음박질이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유는 창조주의 존재와 능력을 처음부터 무시를 하고서 피조물인 인간들이 마치 세상의 주인인 것처럼 행세를 하고 인본주의적으로 달음박질을 했기 때문입니다.

(3)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9:16c); 그러므로 결론은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1)      사람의 운명과 인류의 역사를 바람직하게 바꾸어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애초부터 하나님의 긍휼과 돌보심이 없이는 불가능한 작업입니다. 사실을 철저하게 인정하라고 사도 바울이 본문에서 거듭 강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사실을 인정하지 아니하고 인위적인 노력으로 율법의 이루어보겠다고 노력했던 선민 유대인들이 실패를 하고 있습니다(3:20). 그러므로 창조주의 긍휼하심을 바라고 그리스도의 대속의 십자가를 의지하여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거듭난 인생을 살아가는 성도들만이 옛날의 야곱처럼 새로운 운명 이스라엘 살아갈 수가 있을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구원이나 구원을 얻게 하는 믿음 그리고 칭의도 모두 창조주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그것을 얻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부름에 긍정적으로 반응을 해야만 합니다. 그러한 자에게는 옛날 야곱에게 허락하셨던 타고난 운명의 변화가 발생하게 됩니다.

그러한 은혜를 오늘날 만민과 모든 피조물에게 골고루 주실까요? 사도 바울은 출애굽기에서 모세가 발견한 긍휼의 하나님을 발견하고서 그렇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의 뜻은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이라고 하는 천국복음 가운데 들어 있습니다.

공의의 하나님께서는 모든 피조물들이 허무하고 허망한 삶을 피곤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8:19-22). 그러므로 먼저 대속의 십자가 앞으로 몰려오는 사람들을 회개시켜 의롭다 하시고 성령의 사람으로 만드십니다. 그리고 세상 만민과 만물을 구원하라고 파송하십니다. 따라서 성도들이 지상명령을 실천하기만 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땅에 건설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쪼록 하나님의 부름에 오늘도 긍정적으로 응답하시고 거듭난 인생이 되어 예수님께서 맡기신 지상명령을 신실하게 실천하시는 성도님들이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