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로마서 강해 제57강(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1. 4. 10. 21:21

로마서 강해 57(9:11-13)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7 2 26(주일)

 

에서와 야곱 가운데 누가 자신의 타고난 운명을 바꾸고 있는가?(9:11-13)

 

사도 바울이 적고 있는 본문은 잘못 풀이하게 되면 엉뚱한 결론에 도달하기 쉽습니다. 내용이 다음과 같기 때문입니다; “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행위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9:11-13).

잘못 이해하게 되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절대적인 예정하심입니다. 애초부터 모태에 있을 때부터 에서는 미워하고 야곱은 사랑한 것으로 착각하기 알맞은 문장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일생을 창세기의 내용을 가지고 묵상해보면 상당히 다르다고 하는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현실적으로 성도의 일생에 비추어 보면 그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금방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야곱이 하나님께 기도로 매어 달려서 거듭난 인생을 살아갈 있는 축복을 얻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거듭난 인생 바로 성도의 새로운 삶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야곱이라고 하는 타고난 이름이 하나님의 은혜로 새로운 이름 이스라엘 바뀌고 있습니다(32:28, 35:10).

이름만 바뀐 것이 아니라 그의 운명이 달라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얍복 시냇가에서 숙적인 에서에게 맞아 죽을 뻔한 그의 운명이 바뀌어 이제는 형제 간의 극적인 상봉과 화해라는 현실을 맞이하고 있습니다(33:4).

더구나 세겜 성에서 원주민들을 겁내어 도망을 치던 나약한 야곱이(34:30-35:5)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나 다시 한번 이스라엘의 축복 확인한 다음에는 변하게 됩니다(35:9-13). 노년에 전쟁을 쳐서 세겜 성을 정복하고(48:22) 그가 살고 있는 가나안 남쪽 헤브론 땅에서부터 북쪽 도단 지역에 이르는 드넓은 초지를 지배하게 되는 것입니다(37:14-17).

그리고 숙적 에서도 아버지 이삭이 죽고 나자 재산을 전부 차지하고 아예 염해 아래쪽 세일 산으로 떠나버립니다(36:6-8). 마디로, 야곱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운명이 완전히 바뀌어 가나안의 지배자인 족장 이스라엘로 우뚝 서게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말년에 애굽의 총리가 되어 있는 그의 11번째 아들 요셉의 초청으로 가나안 땅의 이은 흉년을 피하여 애굽으로 이민을 가게 됩니다. 그곳 애굽에서 이스라엘은 위대한 하나님신앙을 아들들에게 보여주게 됩니다. 그는 요셉 총리의 부친으로서 애굽 명당자리에 묻히는 것이 아니라 가나안 헤브론 막벨라 굴에 믿음의 조상들과 함께 안장이 되기를 소원하고 있습니다(47:29-31, 49:29-33).

야곱의 선택은 세상의 영화가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기다리고 계시는 천국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조상들과 함께 막벨라 굴에 안장이 되어 죽어서라도 천국입성의 그날을 소망가운데 기다리고자 합니다(11:13-16). 신앙을 대물림하게 요셉이 죽기 전에 역시 소원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해골이라도 훗날 출애굽을 하게 되면 가나안 아버지 이스라엘 가까이 옮겨 달라는 것입니다(50:25).

그러한 야곱의 일대기와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는 자가 바로 에서입니다. 그는 자신의 야망을 성취하고 아버지 이삭의 세상적인 족장의 권리만 차지할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한 사람입니다. 그는 장남이므로 태어날 때부터 족장인 아버지 이삭의 상속자입니다. 그리고 들사람으로 태어난 튼튼한 사람이기에 용맹과 솜씨로 많은 부하를 이끌고서 승승장구하고 있습니다(25:27, 32:6). 그는 자신의 운명에 만족합니다.

한때 쌍둥이 동생 야곱이 장자의 축복을 빼앗아 갔기에 실망한 적도 있었지만 자신의 타고난 운명은 그의 완력과 함께 세상적으로 커다란 성공으로 인도해주고 있습니다. 아버지 이삭의 재산을 모두 차지했으며 동생 야곱으로부터도 재산을 얻었습니다(33:11, 35:29, 36:6-7). 그는 만족하여 처가가 있는 세일산으로 떠나갑니다. 훗날 그곳 호리 족속을 정복하고 에돔 들판의 지배자가 되고 에서입니다(36:9-43).

에서의 관심은 오로지 세상적인 성공과 무력의 증강입니다. 힘이 있으면 세상의 지배자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더라도 그것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한 에서입니다. 그러한 에서의 사고방식과 행동양식이 하나님 생각에는 거듭난 성도의 삶을 살아갈 없는 전형입니다(9:13). 그러므로 에서가 세상적으로는 권력과 부를 행사하는 장자가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신앙을 보여주는 영적인 장자는 결코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다음과 같이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파악해봅니다;

첫째로, “(a)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b)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c)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d)행위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9:11);

(1)   쌍둥이 아들이 어머니 리브가의 모태에서 자라고 있습니다(25:21-22, 9:11a, “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아직 태어나지도 아니한 생명들이므로 그들이 세상의 선과 악을 리가 없습니다(9:11b,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그러나 그것은 인간적인 생각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영이신 하나님께서는(4:24)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모두 한꺼번에 통찰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4:35, 5:24); “너희는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4:35),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말을 듣고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5:24). 육신의 눈으로는 현재를 보고 있지만 예수님의 영적인 눈은 미래까지 함께 펼쳐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확정이 약속은 예수님께서 벌써 과거의 시제로 성취의 확실성을 증언해주고 있습니다.

(2)   현재 모태에서 생명으로 자라나고 있는 그들이지만 그들의 미래가 하나님의 눈앞에서는 숨김이 없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마치 시내 위에서 모세가 하늘에 있는 성막의 모습을 보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25:8-9). 현재 리브가의 모태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쌍둥이의 미래가 어떠할까요? 하나님께서 관심을 가지시고 펼쳐보고 계시는 것은 그들의 미래입니다. 그들이 장차 어떠한 선택을 하면서 자신들의 인생을 살아가고자 할까요?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면서 인생을 살아갈까요? 아니면 자신의 뜻을 앞세워서 하나님을 무시하고서 살아갈까요? 하나님의 주관심이 그것입니다. 그것을 보고서 영적인 장자를 선택하고자 하십니다;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9:11c).

(3)   요컨대, 하나님의 뜻을 자신의 타고난 운명보다 우선시하고 있는 차남인 야곱이 영적인 장자로 하나님의 낙점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야곱은 훗날 얍복 시냇가에서 숙적 에서에게 맞아 죽을 위험에 처한 자신의 운명을 바꾸어 달라고 하나님께 매어 달리고 있습니다. 야곱이 행하고 있는 것은 단지 간절한 기도입니다. 부디 하나님께서 창조주의 놀라운 능력으로 자신에게 새로운 인생을 살아갈 있는 기회를 달라고 하는 간구입니다. 여호와 하나님만이 자신의 타고난 운명을 바꾸어 수가 있다고 절실하게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실제로 하나님의 뜻에 맞는 기도이며 거듭난 인생을 얻게 되는 관건이 되고 있습니다.

(4)   행위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9:11d); 야곱은 사느냐? 죽느냐? 하는 중대한 갈림길에 그날 자신의 운명을 바꾸어 준다는 축복의 마디만은 하나님의 사자로부터 얻고자 합니다(32:26). 결과 놀랍게도 그의 절실한 간구가 응답이 되고 있습니다. 세상적으로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에 의하여 타고난 운명이 바뀌게 것입니다. 세상적으로 보면 에서에 비해서 연약한 야곱이 이제 하나님에 의하여 믿음의 승리자로 운명이 바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거듭난 이름이 이스라엘이라고 기록이 되고 있습니다(32:28). 거듭난 자의 새로운 이름인 이스라엘 사실은 훗날 천국으로 들어가는 성도들의 이름이 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3:3-5, 7:2-4).

둘째로,리브가에게 이르시되,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9:12);

(1)   가부장 족장사회에서는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아니하는 예언의 말씀입니다. 장남이 차남을 섬기게 되는 운명의 변화가 장차 발생하게 된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장남이 아버지의 족장의 지위와 모든 재산을 상속할 있는 족장사회에서 어떻게 그러한 변화가 발생할 수가 있을까요? 그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창조주 여호와의 말씀이기 때문에 믿음의 여인 리브가는 자신의 마음속에 담아두고 있습니다. 과연 그와 같은 불가능한 일이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에 발생할까요?

(2)   아무런 변화가 없이 무려 77년의 세월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남편 이삭은 나이 60 쌍둥이 아들 에서와 야곱을 얻었습니다(25:26). 그리고 이제 137세의 노인이 되어 눈마저 없는 상태가 되고 맙니다(27:14). 이삭은 자신의 이복 형인 이스마엘이 137세의 나이에 향년을 맞이한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25:17). 따라서 자신도 이제는 족장권을 장남 에서에게 넘겨주고 뒷방으로 물러나고 싶습니다. 그에 따라 에서에게 족장권을 넘겨주기 위한 축복의 기도를 조용히 해주고자 합니다. 이야기를 아내 리브가가 듣고 있습니다. 그녀는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 그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생각하게 됩니다. 분명히 장차 차남인 야곱이 족장이 된다고 했는데 예언과 상관 없이 약속의 아들 이삭은 자신이 편애하고 있는 야인(野人, 들사람) 에서를 상속자로 삼고자 합니다(25:27-28).

(3)   그것을 바로잡고 싶은 생각에 리브가는 자신의 장막에서 여호와 하나님께 함께 기도하던 차남 야곱을 형인 에서처럼 꾸며서 아버지 이삭의 방에 들여보냅니다(27:8-18). 결과 야곱은 리브가의 친정 오라비가 살고 있는 북부 하란 땅으로 피신을 하게 되고 그녀는 살아 생전에 다시는 사랑하는 아들 야곱을 만나지 못하게 되는 운명을 맞이하게 되고 맙니다(28:6-7, 35:8). 그렇지만 야곱의 이름이 훗날 세상사람들 하나님과 겨루어서 이겼다 뜻을 가진 이스라엘 바뀌게 되는 변화가 발생하게 됩니다(32:28). 정확하게 야곱의 나이가 97세가 되었을 때의 일입니다. 그리고 족장 이삭이 소천하게 되는 야곱의 나이 120세에는 에서가 아버지의 모든 재산을 이끌고 세일 산으로 이주를 함으로 말미암아 야곱이 가나안 땅에서 족장으로 우뚝 서게 됩니다(36:6-8).

(4)   결론은 세상적으로는 에서와 야곱이 각각 족장으로 서게 것입니다. 에서는 아버지 이삭의 재산과 족장의 지위를 모두 상속합니다. 하지만 야곱은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장인 라반의 집에서 재산을 형성해줍니다(30:41-43, 31:8-12). 그리고 가나안의 중심지 세겜 성을 점령하게 도와주어 가나안 땅의 족장으로 우뚝 서게 만들어주고 있는 것입니다(37:14-17, 48:22). 비록 120년의 세월이 걸리고는 있지만 가나안의 지배자로 우뚝 서게 되는 자는 에서가 아니고 야곱입니다.

(5)   그리고 훗날 가나안 땅의 흉년을 피하여 애굽으로 이주하여 고센 땅에서 이민자로 살아가지만 야곱은 자손들에게 하나님신앙을 대물림해주게 됩니다. 자신 애굽의 총리인 아들 요셉의 아버지로 애굽의 명당에 묻히는 것을 거절합니다. 대신에 믿음의 조상들이 안장되어 있는 가나안 남부 헤브론 막벨라 굴에 들어가고자 합니다(47:29-31, 49:29-33). 그곳에서 때가 되면 조상들과 함께 천국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것이 이스라엘의 믿음의 종착역인 것입니다(11:13-16). 신앙을 사랑하는 아들 요셉이 계승하고 있습니다(50:24-26). 그것으로 창세기의 이야기가 마감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요컨대, 하나님의 뜻은 에서처럼 세상적인 운명에 만족하여 부와 권력을 추구하는 삶으로 살지를 말고 야곱처럼 하나님께 소원을 두고서 거듭난 인생을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들이 성도이며 훗날 천국에 들어가는 상징적인 14 4천명의 이스라엘 불리고 있습니다(7:2-4).

셋째로,기록된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9:13);

(1)   말라기 선지자가 여호와의 경고의 말씀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의 산들을 황폐하게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이리들에게 넘겼느니라”(1:2-3). 주전 5세기 말의 선지자인 말라기는 예루살렘 2성전을 섬기던 레위인들이 지방으로 흩어지고 마는 현실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지방에 흩어져 살고 있는 유대인들이 십일조를 내지 아니함으로 말미암아 예루살렘의 레위인들의 살길이 막막하여 고향으로 돌아가고 것입니다.

(2)   말라기는 그러한 현상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하나님의 이스라엘 사랑의 은혜를 잊어버렸기 때문에 발생하고 있다고 하는 여호와의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비록 이삭의 차남으로 태어났지만 야곱이 에서보다 하나님신앙이 특출했던 것을 기억하고 계십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부디 예언의 말씀 그대로 자신의 운명을 바꾸어 주어 하나님의 장자로 살아갈 있도록 달라고 끈질기게 100 가까운 세월을 기도로 매어 달리고 있는 야곱입니다. 사회적인 통념과 질서를 뛰어넘어서 사람의 타고난 운명을 재창조하여 거듭난 인생을 살게 해주시는 능력이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을 야곱이 확신하고 있습니다.

(3)   여호와께서는 야곱의 믿음을 귀하게 보십니다. 그것은 자신의 세상적인 지위와 세력과 힘을 의지하여 자신의 왕국을 건설하겠다고 세일 산으로 떠나가고 있는 에서의 행동과는 정반대입니다. 그러므로 에돔 족속은 칼로써 망하게 되고 이스라엘 민족은 훗날 인류 최초로 하나님을 섬기는 신정국가를 형성하게 됩니다(19:4-6). 하지만 말라기 선지자의 시대에는 그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와 같은 야곱의 선택과 하나님의 은혜를 모두 잊어버리고 있습니다. 그들의 신앙의 타락은 마치 에돔 족속의 사회와 같습니다. 그것을 개탄하는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 말라기의 탄식이 그의 선지서에서 위와 같이 기록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1:2-3).

결론적으로, 사도 바울이 히브리정경 첫머리 창세기에서부터 마지막 선지서인 말라기에 이르기까지 여호와 하나님께서 선민들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계시는지를 요약하여 본문에서 상징적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이제는 타고난 운명에 매어 달릴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출신성분에 따라서 천국에 들어갈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말라기 선지자의 기록과 같이 일찍이 하나님께서 야곱을 사랑하여 운명을 거듭나게 했습니다. 형인 에서보다 더욱 번성하게 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아주었습니다. 하지만 주전 5세기 말이 되자 그들의 하나님신앙은 곤두박질하고 말았습니다. 오죽이면 예루살렘 2성전에서 여호와를 섬기던 레위인들이 생계가 막연하여 지방으로 흩어지고 있겠습니까? 마디로, 에돔의 형편과 이스라엘의 타락이 비슷해지고 말았습니다.

똑같은 형편을 오늘날 보게 됩니다. 하나님을 믿는 성도와 믿지 아니하고 세상적으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사이의 구별이 자꾸만 없어지고 있습니다. 거듭난 인생을 감사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거룩한 성도로 살아가고 있는 자의 수가 자꾸만 줄어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위기상황 가운데 로마서 본문의 말씀을 재음미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아무쪼록 거듭난 성도의 삶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을 다시 생각하면서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부끄럽지 아니한 삶을 살아가시는 성도님들이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