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로마서 강해 제55강(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1. 4. 9. 09:47

로마서 강해 55(9:1-6)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7 2 24()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를 자신의 승리로 굳게 믿고 있는 사도 바울이라고 하더라도 탄식하며 끝까지 고통 가운데 개인적으로 간구하고 있는 하나가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가?(9:1-6)

 

9장에 들어서게 되면 사도 바울이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다른 각도에서 재조명하고 있습니다. 선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율법을 주시면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얼마나 정직하게 하나님 앞에서 율법을 지키는지를 보고자 하신 것입니다. 사실 사람의 능력으로는 온전히 율법을 지키고 행할 없다는 사실을 아시면서 율법의 ’(율법을 온전히 지키는 자는 의인이 되며 그것으로 구원을 얻을 있다는 ) 말씀하신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18:5).

그와 같은 하나님의 의도는 출애굽기 15장에 벌써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무를 가리키시니 그가 물에 던지니 물이 달게 되었더라.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새”(15:25). ‘율법의 라고 하는 것은 마실 없는 마라와 같습니다(15:23). 물을 단물로 변화시켜서 사람들이 마시고 갈증을 해소하자면 무엇보다도 먼저 모세처럼 여호와 하나님께 부르짖어야만 합니다. 그리하면 그리스도의 대속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율법의 믿음의 바꾸어 주시는 하나님의 사함과 칭의의 은혜가 임하게 것입니다.

그와 같은 하나님의 의도를 선민들이 짐작도 제대로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험을 통과하지를 못합니다. 선민 이스라엘 자손들은 불행하게도 하나님의 눈을 속이고 자신들끼리 서로 그만하면 율법을 지킨 것이라고 인정해주는 그러한 인위적인 종교사회를 형성하고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행하는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제에서 실패하고 있으므로 그것은 비극적인 육신적인 삶에 불과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와 같은 불행에 빠져 있는 동족들을 바라보면서 하나님께 얼마나 중보의 기도를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9:1-3).

창세기를 참조하게 되면 그것은 선민 이스라엘 사회에서 하나님의 형상이 사라진 것과 같습니다(1:26-27, 5:1-2,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 어느 사이에 모양만 남게 ). 그저 그들의 종교생활이 하나님을 위한다고 하는 모양새만을 갖추고 있을 뿐입니다. 그와 같은 종교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자들은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한 겉모양만 닮아 있는 자들입니다. 그러한 시각에서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교묘하게도 육신으로 하면”(9:5)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말은 육신적으로는 선민이지만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진심으로 회개하지 아니하는 이상 영적으로는 성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9:6).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9:1-2);

(1)   사도 바울이 분의 증인을 동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과 성령님이 바울의 근심과 마음속 고통에 대한 증거자들입니다. 그와 같은 사도 바울의 언급은 두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1)      첫째, 율법에서는 중요한 판결에 있어서 증인은 단수가 아니고 두세 사람이라고 하는 복수여야만 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죽일 자를 사람이나 사람의 증언으로 죽일 것이요, 사람의 증언으로는 죽이지 것이며”(17:6). 사도 바울은 그와 같은 각각 다른 인격체로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을 인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2)      둘째, 바울의 입장은 예수님의 경우와 닮아 있습니다; “내게는 요한의 증거보다 증거가 있으니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 내가 하는 역사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나를 위하여 증언하는 것이요, 또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언하셨느니라”(5:36-37). 간략하게 풀이를 해봅니다; 인자이신 예수님께 임재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행사하고 있는 성령님께서 예수님의 손과 입을 빌려서 이루어지고 있는 역사가 바로 하나님의 작품인 것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성부 하나님께서도 역시 성자 하나님의 복음사역이 자신의 뜻이라고 증언해 주십니다. 참고로, 그러한 하나님의 뜻이 진리라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무덤 부활 사건이라고 하겠습니다(1:17, 8:11).

(2)   이방인 사도로서 전심전력으로 세계선교를 수행하고 있는 바울의 심중에 있는 근심과 고통이 과연 무엇일까요?(9:1-2)

1)      그것은 자신의 형제와 친척들이 소속이 되어 있는 선민들을 먼저 구원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입니다(9:3). 동족들에게 나아가 복음사역을 하지를 못하고 계속 이방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선교여행을 하고 있으니 우선순위가 뒤바뀐 것만 같습니다. 정성과 노력으로 형제와 친척들에게 먼저 복음을 전하고 회개를 종용할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2)      그러한 기도를 사도 바울이 하나님께 많이 드린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대답은 부정적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기도를 외면하신 것일까요? 그것이 아닙니다. 다른 방법으로 사도 바울의 간구를 받아들이시고 역사적으로 응답하고 계십니다. 증거를 발견하고서 훗날 바울이 기쁨으로 로마서 16장을 기록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구체적으로, 그의 선교팀에 합류하고 있는 상당수가 회심한 그의 친척들이기 때문입니다(16:7, 11, 21).

둘째로,나의 형제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9:3);

(1)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진다고 하는 것은 생명책에서 이름이 지워져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21:27).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자신이 구원을 받지 못하게 되는 대신에 자신의 골육과  친척들 그리고 그의 동족들이 모두 구원을 받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강력하게 하나님께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9:3). 그것은 자신의 목숨뿐만이 아니라 영생까지 걸어 놓고서 필사적으로 하나님께 매어 달리고 있는 중보의 기도입니다.

(2)   그와 같은 사도 바울의 강력한 중보의 기도는 옛날 모세의 전철을 따르고 있습니다; “모세가 여호와께로 다시 나아가 여짜오되, 슬프도소이다.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송아지) 신을 만들었사오니, 죄를 범하였나이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이름을 지워버려 주옵소서”(32:31-32).

(3)   사도 바울의 중보기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선례와도 닮아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대속의 십자가를 지고 속죄의 희생제물이 터이니 부디 대속의 십자가를 바라보고서 자신의 죄를 진심으로 회개하는 자들에게는 사함과 칭의의 은혜를 달라고 아버지 하나님께 간구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23:34).

셋째로,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들에게는 양자 영광 언약들 율법 세우신 것과 예배 약속들 있고”(9:4);

(1)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을 북부 시리아 하란 땅에서 가나안 땅으로 불러내십니다(12:1-3).  아버지 데라가 오래 머물고 있는 하란 땅을 떠나 독자적인 이방인 선교에 나서라고 하십니다. 본래 족장 데라가 가나안으로 가는 선교팀을 이끌고서 고향인 메소포타미아 중심지 갈대아 우르 지역을 떠났습니다(11:31). 그러나 도중에 북부 시리아에서 탐나는 땅을 발견하고서 그곳에 주저앉고 맙니다. 힘든 이방선교를 하는 것보다는 그곳을 개발하여 도시를 세우는 것이 훨씬 여생이 편할 것으로 판단하고 있는 것입니다(24:10). 그래서 지역의 이름을 아예 일찍 죽은 사랑하는 아들 하란으로 명명하고 있습니다(11:28).  

(2)   그러한 아버지 데라를 장자인 아브라함이 75세에 떠나게 됩니다(11;26, 12:4). 데라는 60 동안 하란 땅에서 살다가 205세에 향년을 맞이하고 맙니다(11:32). 그렇지만 훗날 하나님께서는 집사 스데반의 고별설교를 통하여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제멋대로 하란 땅에서 육신적인 삶만을 영위한 데라는 그때 이미 영적으로 죽은 자라고 정의하십니다(7:4). 반면에 육신의 아버지의 뜻보다는 영적인 아버지 여호와의 뜻을 받들어 이방인 선교에 나선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며 영적으로 살아 있는 자라고 사도 바울에 의하여 규정이 되고 있습니다(4:13-18).

(3)   다시 말하자면, 창세기는 데라의 육신적인 삶과 아브라함의 영적인 삶을 대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대조법이 사도 바울에 의하여 그의 서신서에서 애용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측면에서 사도 바울은 그의 동족인 선민 이스라엘 자손들이 애초에 얼마나 혜택을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얻은 민족인지를 상기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들에게는 양자 영광 언약들 율법 세우신 것과 예배 약속들 있고”(9:4).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하나님신앙이 약속의 아들 이삭과 하나님의 족장으로 세움을 받게 되는 야곱을 거쳐서 그의 후손들에게 계승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 선민들이 그리스도를 먼저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있는 혜택을 먼저 향유할 있는 좋은 기회를 우선적으로 가진 것입니다.

(4)   그런데 시작은 그러하지만 결과는 다를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문제는 역시 데라의 전철을 따르느냐? 아니면 아브라함의 뒤를 따르느냐? 따라서 결과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만약 데라처럼 하나님의 명령을 도중에서 어기고 세상적인 이익을 쫓아서 제멋대로 살게 되면 바울이 열거하고 있는 그러한 하나님의 혜택이 아무 소용이 없게 되고 맙니다. 반면에, 아브라함처럼 세상적인 재산의 상속에 눈을 돌리지 아니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약속과 상급을 믿고서 이방인 선교에 나서게 되면 훗날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하나님의 자녀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선민 유대인들은 데라의 전철을 따르고 것입니다. 그들의 신앙생활은 마디로, 하나님의 눈을 속이고 인위적인 종교적 권위체의 인정에 의존하고 있는 편의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그것을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의 누룩이며 외식적인 신앙생활이라고 강하게 질책하십니다(23).

넷째로,조상들도 그들의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셨으니, 그는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9:5);

(1)   여기서 사도 바울이 믿음의 조상들의 후손으로 선민 이스라엘 자손들이 태어났다고 지적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조상들의 믿음을 상속하느냐? 아니면 육신적인 삶을 누리고자 하느냐 하는 선택의 문제가 그들 선민들에게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2)   육신적으로 말하자면, 이스라엘 레위 지파인 대제사장 아론의 자손인 마리아에게서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나십니다. 그리고 다윗 대왕의 후손인 목수 요셉의 의붓아들이 됩니다. 하지만 그러한 육신적인 인연이 하나님 앞에 의미를 가지기 위해서는 영적인 신앙이 함께해야만 합니다.

(3)   그리스도의 오심은 세상 만민과 만물을 모두 구원하여 하나님의 나라에 데리고 가기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은 그리스도의 삶을 닮아 제자로서 영적으로 거듭난 인생을 살아가는 자들이 바로 성도들입니다. 이제 남은 문제는 선민 유대인들이 회개를 하고서 그러한 성도의 영적인 삶을 살아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4)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마디로, 그는 하나님이시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셨으니, 그는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9:5);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고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신을 속죄의 제물로 희생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부활과 승천이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세상을 구원하는 주님이 되십니다. 사실을 믿고서 선민 유대인들이 회개를 하고서 예수님의 제자로 성도의 삶을 살아가게 되면 성부와 성자가 보좌를 함께하고 계시는 그곳 예루살렘에서 영원토록 하나님을 찬양하게 것입니다(5:13). 그러한 소망을 머리 속에 그리면서 바울이 글을 적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요컨대, 바울은 동족들로부터 아멘소리를 듣고 싶은 것입니다.

다섯째로,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같지 않도다. 이스라엘에게서 그들이 이스라엘 아니요”(9:6);

(1)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이 지금도 그대로 살아서 적용이 되고 있다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 보면, 족장시대에 데라와 아브라함 사이에 발생한 일이 어김없이 아브라함의 자손인 선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도 동일하게 적용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1)      족장 데라와 그의 아들인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순종해야만 하는지 모범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데라는 문명지역 갈대아 우르에서 미개한 이방 가나안으로 가서 하나님신앙을 전하라고 하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이동을 합니다. 하지만 도중에 북부 시리아에서 좋은 땅을 만나자 마음이 변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잊어버리고 하란에서 도시개발에 따른 이익을 추구하고자 평생을 허비하고 맙니다. 결과 살아 있으나 죽은 자라고 하는 하나님의 평가를 받고 맙니다(7:4).

2)      반면에 그의 장남인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에 끝까지 순종하고 있습니다. 결과 사도 바울에 의하여 믿음의 조상으로 불리고 있습니다(4:16). 물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눈에 보이는 세상적인 이익보다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약속을 더욱 신뢰하고 있는 아브라함을 하나님 경외자라고 칭찬하십니다(22:12).   그러므로 아브라함처럼 이방 땅에서 하나님의 선지자로 끝까지 살아가게 되면 가는 곳마다 세상에 하나님의 복을 전해주게 것입니다(12:3, 20:7, 17-18, 22:18).

(2)   아브라함의 자손인 선민 이스라엘 백성들이 역사 가운데 누구의 선례를 따르고 있는 것일까요? 사도 바울은 안타깝게도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모범을 따르지 아니하고 족장 데라의 욕심을 추종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영적인 삶이 아니라 육신적인 삶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자손으로 그리스도 예수님이 탄생하시고 그들에게 예수님의 천국복음이 먼저 전해지는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이 함께하고 있지만 모든 것들이 선민들에게는 소용이 없게 되고 맙니다. 축복을 온전히 누리자면 하나님의 말씀에 끝까지 순종하여 영적인 삶을 살아가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족장 데라처럼 도중에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게 되면 그때부터 선민이라고 하더라도 영적으로 하나님 보시기에 죽은 자들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사도 바울은 로마시의 성도들에게 선민 유대인들처럼 육신적인 종교행위를 하지 말라고 합니다. 반면에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처럼 만민 구원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뜻을 끝까지 따르는 영적인 성도들이 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리하면 진정한 아브라함의 믿음의 후손이며 세상에 하나님의 구원의 복을 전하는 거룩한 백성들이라는 것입니다.

요컨대, 이제는 혈통적으로나 육신적으로 선민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를 않습니다. 출신성분에 상관이 없이 아브라함처럼 세상에 하나님의 복을 전하려고 하는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답게 영적인 삶을 살아가는 자들이 진정으로 하나님께서 선택하시는 거룩한 백성들입니다. 그들이 하나님나라를 상속하게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쪼록 끝까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인생을 살아가셔서 하나님나라에 들어가시는 성도님들이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