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로마서 강해 제54강(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1. 4. 7. 19:34

로마서 강해 54(8:38-39)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7 2 23()

 

창조주의 공의의 정신에 따라 세상 만민과 모든 피조물을 구원하여 하나님의 나라에서 함께 영생을 누리고자 하는 성도들의 앞길을 어떤 세력이나 제도나 법칙이 막을 없는 이유가 무엇인가?(8:38-39)

 

본문의 구절은 로마서 8장의 결론 부분입니다. 그러므로 로마서 8장의 내용이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해보는 것이 본문을 깊이 있게 이해하는 방법입니다. 사실 로마서 8장은 사도 바울이 평생 연구한 그의 영적 기독론 내용을 두드러지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12사도와 달리 후속사도인 바울은 생전의 예수님과 공생애를 함께한 경력이 없습니다. 그러한 그가 어떻게 이방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그토록 정밀하게 논리적으로 설명해줄 있는 지식과 지혜를 가질 있게 되었을까요? 이치는 첫째, 그가 지니고 있는 엄청난 히브리정경에 대한 지식의 도움입니다. 둘째, 바울이 이방인 사도로 살아가면서 진리의 성령님의 도움을 받아 깨닫게 그리스도의 사랑과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히브리정경에 대하여 사도 바울만큼 지식을 가지고 있는 유대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이 소위 유대교의 율법선생인 랍비들입니다. 그렇지만 그들 유대교의 랍비들이 사도 바울처럼 회심을 하고서 하나님의 복음을 이방인들에게 전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이유는 그들의 지식이 유대교의 속에 갇혀 있기 때문입니다. 유독 랍비 사울이 유대교의 틀을 깨고 세상에 이방인 사도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사도 바울은 무엇을 확신하게 되었기에 감히 여호와 하나님 분만을 지극정성으로 섬기고 있는 유대교리를 벗어나고 있는 것일까요? 마디로, 그가 얻게 영적인 진리가 궁금합니다. 핵심만을 간추려서 다음과 같이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첫째, 사도 바울이 오직 산술적으로 뿐이신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하는 유대교의 신관(神觀, view of God) 벗어날 있었던 계기는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을 하나님의 영광과 형상을 가지고 계신 그리스도로 환상 가운데 영적으로 만났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서 처형을 당한 나사렛 예수가 랍비 사울 앞에 하나님의 영광을 가지신 주님으로 당당하게 영적으로 임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러한 일이 발생할 수가 있을까요? 유대교의 가르침으로는 도저히 수가 없는 수수께끼입니다. 그래서 랍비 사울은 히브리정경을 다시 공부하고 옛날 모세처럼 호렙 산을 방문하여 거룩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직접 만나서 해답을 얻고자 것으로 보입니다(1:17).

(2)   둘째, 랍비 사울이 시편 110편에 기록이 되어 있는 다윗 왕의 깨달음을 깊이 묵상한 것으로 보입니다. 결과 그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독생자를 사람의 아들로 보내시고 구원사역을 하게 하신 사실을 인정하게 됩니다. 그리고 대속의 십자가에 만민구원의 제물로 자신을 희생하신 예수님을 부활 승천시키시고 이제는 하나님의 보좌 오른쪽에 앉게 하신 것을 다윗 왕처럼 영적으로 보게 됩니다. 따라서 랍비 사울은 하나님의 보좌와 그리스도의 보좌를 모두 찬양하는 사도 바울로 바뀌게 된다고 하겠습니다(110:1-7, 5:13).

(3)   셋째, 세계선교여행을 계속하고 있는 사도 바울에게 지혜와 능력을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공급해 주십니다. 방법이 자신의 속사람속에 임재하셔서 내주 역사하고 계시는 성령님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천국에 계시는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이신 그리스도는 멀리 계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자신의 속사람속에 성령님께서 성전을 만드시고 성전에 함께 임재하여 역사하시는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십니다(고전6:19-20). 그와 같은 영적인 깨달음을 사도 바울이 로마서 8장에서 집중적으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4)   넷째, 그와 같은 시각에서 로마서 8 31-39절의 내용을 음미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첫째, 사도 바울은 아버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대적자들을 물리칠 수가 있다고 31-34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아들까지 대속의 제물로 주신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사도와 성도들이 모든 피조물을 구원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사역을 계승하고 있는데 어떻게 하나님께서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주시지 아니하시겠습니까? 사람들의 법정에서 성도들을 불의한 자로 정죄를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인정이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사역을 의로운 것으로 판정하신 하나님께서 벌써 그리스도를 부활시키셨기 때문입니다. ③하나님께서는 사도들과 성도들의 복음사역을 의로운 것이라고 판단하십니다. 따라서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에 대하여 걸고 넘어지고 있는 유대주의자들의 고발에 대하여 의연합니다.

2)      둘째, 사도 바울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모르고 대적을 했던 자신을 용서하시고 이방인 사도로 사용하고 계시는 그리스도의 놀라운 사랑에 대하여 35-36절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적어도 세가지의 희생을 무릅쓰고서 랍비 사울을 구원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①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아들로 태어나는 성육신의 자리까지 내려오신 것입니다. 그것은 독생자의 영광을 벗어 놓고 창조주가 피조물로 태어나는 자기 희생입니다(2:6-7). ②3 6개월 동안 공생애를 지내십니다. 제자들을 기르시면서 백성들에게 복음사역을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대적자들로부터 참으로 온갖 수모와 비난 그리고 생명의 위협과 고통을 당하시면서도 복음사역을 하신 것입니다. ③자신을 싫어하고 미워하는 그자들까지 모두 구원하기 위하여 자신의 몸을 하나님 앞에 화해의 제물로 바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대속의 십자가 앞에서 자신의 죄를 회개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의 빚을 갚기 위하여 뒤늦게 랍비 사울이 이방인 사도인 바울이 되어 자신의 남은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3)      셋째, 사도 바울은 자신의 속사람속에 임재하여 역사하고 계시는 성령님의 능력에 대하여 마디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8:37). 바울이 그렇게 대담하게 선언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대목이 오늘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결론입니다. 그는 성령님과 함께 자신의 영혼 속에 임재하여 계시는 놀라운 하나님의 신비를 발견하고 있는 것입니다.

(5)   다섯째, 사도 바울의 영적인 위대한 발견이 매우 감격스럽게 기술이 되고 있는 것이 바로 본문입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이나 장래 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그리스도 예수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없으리라”(8:38-39). 우리의 구원주이신 그리스도 예수 안에 항상 임재하여 계시는 분이 사실은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사실을 공생애 동안에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백성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한가지 사실을 잊지 말라고 하십니다; “하나님 나라에 제자들의 처소를 마련하신 다음에 반드시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제자들에게 돌아와서 성령님이 마련하신 성전에 함께 임재를 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러므로 사실은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이미 영적으로는 성도님들과 남은 인생을 복음사역을 위하여 함께 살아가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과 성도들이 한가지 목적을 위하여 사랑의 관계로 하나가 되어 있기 때문에 피조의 세상에서 감히 대적한 자가 없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사도 바울의 깨달음은 훗날 사도 요한의 기록에서도 그대로 확인이 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8:28-29, 14:1-1-3, 16-20, 17-17-26).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구절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이나 장래 이나 능력이나”(8:38); 사도 바울은 여기서 관념적으로 믿음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세계선교를 하면서 체험적으로 확인하고 있는 사실들에 대하여 간증하고 있습니다. 내용이 다음과 같습니다;

(1)   첫째, 현실적으로 사느냐 죽느냐 하는 것이 이상 사도 바울의 삶에 있어서 궁극적인 문제가 되고 있지 않습니다. 이유는 영생의 하나님께서 벌써 바울의 속사람속에 임재하여 계시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정경을 보면, 신명기 30장에서 모세가 선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올바른 선택을 하라고 다음과 같이 권면하고 있습니다; “내가 오늘 하늘과 땅을 불러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 복과 저주를 앞에 두었은즉, 너와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청종하며 그를 의지하라. 그는 생명이시요 장수이시니, 여호와께서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주하리라”(30:19-20). 모세는 세상에서의 목숨과 장수함만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복으로 얻을 있는 것은 하나님 안에 있는 영생입니다. 그런데 영생의 하나님께서 지금 영적으로 사도 바울에게 임재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세상적인 목숨을 좌우하고 있는 사망의 권세가 사도 바울을 완전히 지배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2)   둘째, 여기서 사도 바울이 천사들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은 악한 영들 의미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전승에 따르면 사탄과 부하들인 귀신들도 본래는 하나님을 섬기는 하나의 천사장과 그의 부하인 천사들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미의 천사장인 루시엘이 그만 교만하여 자신의 보좌를 하나님의 자리만큼 높이려고 하다가 추락하고 맙니다(14:12-20). 그의 부하인 천사들도 함께 내쫓기어 땅을 어지럽히는 귀신들이 되고 맙니다(2:2, 6:12). 그와 같은 전승을 이사야가 그의 선지서 14장에서 기록으로 남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장로 유다가 다음과 같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1:6).

(3)   셋째, ‘권세자들 두가지 점에서 성도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①하나는 그들이 장악하고 있는 정치권력의 힘이 막강하다는 것을 성도들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일부 성도들이 정치권력의 힘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고자 하는 유혹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올바른 복음사역의 방법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40일간 금식을 하시고 마귀의 시험을 받으실 때에 그와 같은 유혹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벌써 물리치신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4:8-11, 4:5-8). ② 하나는 악한 영들이 세상권력자들로 하여금 성도들의 복음사역을 방해하도록 역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점을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 6장에서 다음과 같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6:12).

(4)   넷째, ‘현재의 고통스럽기 때문에 장래의 캄캄합니다. 현실적으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진 것이 별로 없는 무산자(無産者, 재산이 없는 사람) 삶은 고통스럽습니다. 상대적인 박탈감이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따라서 소위 수저 물고서 태어난 인생은 가지의 절망을 경험하게 됩니다; ①하나는 도저히 자신의 힘으로는 신분상승이 안됩니다. 그저 하루 벌어서 하루 먹고 살기에 바쁜 인생입니다. ② 하나는 자신의 어려움이 전혀 개선이 되지 아니한 장차 자식에게 대물림이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현실적인 앞에 절망을 하고 미래마저 불투명하므로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복음의 사명자로 살아가고 있는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아닙니다. 현재의 고난이 장래의 영광을 담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없도다”(8:18).

(5)   다섯째, 성도의 삶에 있어서 능력 궁극적인 문제가 되지를 못합니다. 이유는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는 일은 사람의 능력으로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승천하시기 전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두가지 사실을 말씀하십니다;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3일에 죽은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그의 이름으로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모든 일의 증인이라. 볼지어다, 내가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성에 머물라 하시니라”(24:45-49),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1:8).

둘째로,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그리스도 예수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없으리라”(8:39); 사도 바울이 교묘하게도 그가 에베소서에서 애용하고 있는 4차원의 표현방식인 높음과 깊음그리고 넓이와 길이라는 것을 여기서는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라는 표현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점을 먼저 논구해보고자 합니다;

(1)   첫째, 에베소서 3장을 살펴보면 사도 바울의 간절한 기도가 다음과 같이 적혀 있습니다; “이러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족속(모든 피조물)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너비 길이 높이 깊이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3:14-19). 그리스도의 사랑을 깊이 있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구원계획이 얼마나 폭이 넓으며, 언제부터 시작이 것인지, 그리고 절망의 깊이에서 어떻게 영광의 높이까지 역사하고 계시는지를 지식적으로 알아야만 한다는 사도 바울의 주장입니다.

(2)   둘째, 사도 바울이 지적하고 있는 하나님의 구원의 넓이와 길이, 그리고 깊이와 높이의 대강을 간략하게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구원계획은 인류만을 대상으로 하고 있지 아니한 사실을 정확하게 윗글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러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족속(모든 피조물)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3:14-15).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은 인류와 새들과 그리고 천상 천하의 모든 만물을 지칭하고 있는 개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계획은 만민과 만물이라고 하는 모든 피조물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8:19-23). 그것이 이른바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복음의 너비입니다. 참고로, 사도 바울의 기록은 사도 요한의 기록과 일치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4복음서에서 사도 요한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아들을 구원자로 보내셨다고 진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3:16-17).

2)      길이 하나님의 세상구원계획이 언제부터 시작이 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노아의 홍수심판이 있은 다음으로 수가 있습니다(8:21-22). 무지개 언약이란 그것을 상징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9:7-17).

3)      깊이 음부의 세계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죄와 사망의 권세가 자리를 잡고 있는 스올의 세계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육신적인 욕심을 제어하지 못하게 인간들이 죄의 종으로 살게 됩니다. 그리고 향년이 되면 음부의 세계로 들어가서 깊은 곳에서 사망의 권세 아래에서 신음하게 됩니다. 어두움의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악한 영들과 마귀의 권세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에 의하여 깨어지고 맙니다(8:1-2).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십자가 희생을 믿고서 자신의 죄를 회개한 성도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사함과 칭의의 은혜를 얻게 됩니다. 순간 사망으로부터 생명으로 옮겨지게 됩니다(5:24). 깊은 음부의 권세가 성도를 어찌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4)      높이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고 무덤속으로 들어가신 예수님께서 3일만에 부활하셔서 승천하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2:31-33). 그리고 주님께서는 지금도 하나님 아버지 우편에서 성도들의 복음사역을 위하여 간구하십니다(8:34). 또한 복음의 일꾼으로 살아간 성도들에게 하나님나라에서 처소를 준비하시고 하나님 자녀의 영광을 나누어 주십니다(22:28-30, 14:1-3, 8:11, 15-17). 그것이 높이 해당하는 개념들이라고 하겠습니다.

(3)   셋째,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사용한 너비라는 개념을 알기 쉽게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8:39a)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 모든 만민과 만물을 모두 구원하겠다고 하는 넓이 지니고 있는 하나님의 구원계획이 모든 피조물을 구원하고자 하는 계획입니다. 점을 로마서 8 19-22절에서 충분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4)   넷째, 사도 바울은 이상 4차원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방해할 있는 존재는 있을 수가 없다고 하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우리 그리스도 예수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없으리라”(8:39b)

결론적으로,구원의 길이라고 하는 것은 창세기에서부터 선을 보이고 있는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만민뿐만 아니라 모든 피조물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입니다. 그것이 구원의 너비입니다. 그러므로 선지자 이사야의 글과 요한계시록에서는 하늘과 땅의 창조라고 계시가 되고 있습니다(65:17-18, 21:1-2).

구원의 깊이와 높이 대하여 사도 바울이 또한 언급하고 있습니다.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고 돌아가신 예수님을 아버지 하나님께서 부활시키시고 승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두가지 현상이 발생하게 됩니다; ①첫째, 오랜 세월 사람들을 두려움에 떨게 하고 있는 악한 영들의 죄와 사망의 권세가 깨어지고 있습니다. ②둘째, 예수님에게 하나님 보좌의 오른 쪽의 자리를 주심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창조주의 위격으로서의 영광을 회복하십니다. 그리고 모든 성도들의 주님이 되십니다. 주님께서는 성도들에게 땅에서의 복음사역을 마친 다음 천국에서 함께 영광을 누리자고 제안하십니다. 그것이 크나큰 영광이며 상급입니다.

끝으로, 사도 바울은 세상을 이기고 성도들이 복음사역을 있도록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임재하고 계신다고 하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영광의 약속과 미래는 확실한 것입니다;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그리스도 예수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없으리라”(8:39). 아무쪼록 사도 바울의 승리의 확신이 성도님들의 확신이 있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