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로마서 강해 제59강(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1. 4. 13. 04:46

로마서 강해 59(9:17-18)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7 2 28()

 

하나님의 긍휼을 입기 위하여 반드시 청산해야만 하는 인간의 잘못된 성품과 역사에 대하여(9:16, 9:17-18);

 

본문은 구절에 불과합니다;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일에 대하여 너를 세웠으니 너로 말미암아 능력을 보이고 이름이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9:17-18). 참으로 짧은 글입니다.

하지만 구절에 대한 해석은 쉽지가 않습니다. 언뜻 보면, 세상이 잘못 돌아가고 있는 모든 책임이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께 있는 것만 같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잘못 돌아가는 세상에 대하여 그것을 바로 잡을 책임이 모두 여호와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닙니까?

본문에서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면 그러합니다; 첫째, 애굽의 황제인 바로를 제국의 최고권력자로 세우신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시라고 합니다(9:17). 둘째, 바로가 모세를 통하여 말씀하고 계시는 여호와의 요구를 끝까지 받아 들이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의 완악함이 하나님의 작품이라고 기술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9:12, 10:20, 9:18).

명백하게 원천자료부터 그렇게 기록이 되어 있으므로 애굽의 장자와 모든 가축의 초태생을 전멸시키신 책임을 하나님께서 스스로 지셔야만 것으로 보입니다. 더구나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시켜서 출애굽기를 기록하시면서, “내가 (바로) 세웠음은 나의 능력을 네게 보이고 이름이 천하에 전파되게 하려 하였음이니라”(9:16) 바로를 그렇게 완악하게 만든 이유까지 밝히고 계십니다.

간략하게 풀이를 해보자면, 이유는 첫째, 창조주 하나님의 무서운 능력을 애굽 땅에 선보여서 최고권력자 바로를 덜덜 떨게 만들고 둘째, 세상 사람들에게 여호와가 두려우신 창조주이심을 인식시키실 의도입니다. 그렇다면 세상만사가 모두 창조주 하나님의 인형놀이와 같습니다.

구체적으로, 작가도 하나님이시고 연출과 감독도 모두 여호와이십니다. 바로와 같은 애굽 제국의 최고권력자라고 하더라도 마치 장기판의 (, 졸병) 같이 하나님의 각본에 따라 그대로 자신이 맡은 연기를 하고 있는 한갓 배우입니다.  배우가 각본에 어긋나는 연기를 하려고 하면 하나님께서는 인형의 줄을 잡아 당기듯이 그렇게 배우의 사지를 비틀어서 원하는 연출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진짜 그렇게만 해석을 수가 없는 대목이 있습니다. 이유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잘못에 대하여 역사적으로 벌써 책임을 져버리셨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인생도 그들의 역사도 모두 하나님의 뜻과 어긋나게 운영이 되고 있다고 한탄하시면서 모든 책임을 창조주께서 스스로 감당하시고자 자신과 함께 세상창조에 참여하신 아들을 인간으로 태어나게 하시고(1:3, 14) 십자가에서 속죄의 제물로 처형해버리신 것입니다(1:29, 3:13-15).

그러므로 모든 책임과 원망이 다시 피조물인 사람들에게 되돌아오고 맙니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세상을 잘못 경영하고 자신들의 인생을 하나님 보시기에 잘못 살아간 책임을 묻고 계십니다. 주인이 종인 청지기에게 준엄하게 책임을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원천자료인 출애굽기에서 간과하여 넘어간 대목을 다시 살펴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바로 앞에 서서 그에게 이르기를,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이니라. 내가 이번에는 모든 재앙을 너와 신하와 백성에게 내려 천하에 나와 같은 자가 없음을 네가 알게 하리라. 내가 손을 펴서 돌림병으로 너와 백성을 쳤더라면 네가 세상에서 끊어졌을 것이나, 내가 너를 세웠음은 나의 능력을 네게 보이고 이름이 천하에 전파되게 하려 하였음이니라”(9:13-16). 하나님의 진짜 의도가 그림으로 다음과 같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1)   첫째, 세상사람들을 모두 전멸시켜버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따라서 내가 손을 펴서 돌림병으로 너와 백성을 쳤더라면 네가 세상에서 끊어졌을 것이나”(9:15), “ 내가 이번에는 모든 재앙을 너와 신하와 백성에게 내려 천하에 나와 같은 자가 없음을 네가 알게 하리라”(9:14) 하는 문장이 도치(倒置, 거꾸로 뒤집혀져 있음) 되어서 적혀져 있는 것입니다.

(2)   둘째, 세상이 종말을 맞이하기 전에 부디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재앙의 의미를 깨닫고 되돌아서라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단숨에 멸망시킬 있는 창조주이시지만 아직 크신 능력을 모두 보이지 아니하시고 사람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작은 가지의 재앙을 숨돌릴 시간을 주어가면서 차례로 애굽 제국에 순차적으로 내리고 계시는 이유입니다.

(3)   셋째, 세상 사람들은 완악하여 정도의 작은 재앙으로는 미처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존재를 깨닫지 못하고 능력에 대하여 의구심을 지니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그들에게 하나님이 진심을 만민구원의 복음으로 전달하고 그들을 전부 회개의 광장으로 불러낼 수가 있을까요? 일은 담당하기 위하여 세상에 하나님을 섬기는 민족을 출애굽시키고자 하십니다. 그들 선민들이 장차 이방인들의 속죄를 위하여 제사를 드려주는 제사장나라가 되며 중보의 기도를 해주는 거룩한 백성이 것입니다(19:4-6).

(4)   넷째, 그들 선민들이 하나님의 기대를 저버리고 있습니다. 역할을 담당하지 아니하겠다고 아예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처형장으로 보내 버립니다. 결과 선민이 아니라 이제는 출신성분을 따지지 아니하고 일을 맡겠다고 나서는 자들에게 성도가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주어지고 있습니다(1:12-13). 성도들이 이제는 하나님의 복음을 땅끝까지 전해주는 거룩한 백성들이 되며 이방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예수님처럼 중보 기도하며 대속의 삶을 살아갈 것입니다(28:18-20, 1:8).

(5)   다섯째, 이제는 세상사람들이 하나님의 긍휼을 입기 위하여 반드시 회개의 마당으로 나아와야만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떠난 자신들의 잘못된 성품과 하나님을 버리고 제멋대로 경영하고 있는 자신들의 역사에 대하여 책임을 지고 청산을 해야만 합니다. 그것이 온전한 회개입니다. 요컨대, 예수님께서 지신 대속의 십자가의 의미를 철저하게 깨닫는 자들은 하나님의 긍휼을 입기 위하여 먼저 한가지 실천을 해야만 합니다. 그것이 여리고의 세관장인 삭개오의 회개에서 엿볼 있는 그러한 올바른 청산의 절차입니다(19:5-10). 그것은 하나님께서 요구하고 있는 것이며 인간들의 자기 책임이라고 하겠습니다(9:13-16, 9:17-18).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일에 대하여 너를 세웠으니 너로 말미암아 능력을 보이고 이름이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9:17); 애굽의 황제인 바로가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의 역사에 있어서 일을 감당하게 됩니다;

(1)   첫째, 바로는 여호와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온몸으로 경험하게 됩니다; 모세와 아론이 바로의 황궁을 찾아와서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고 있는 히브리인들을 해방시켜 달라고 요구합니다(5:1). 바로는 하도 말도 되지 아니하는 요구이므로 묵살합니다(5:2). 세상에 어느 제국이 노예화된 피지배 족속을 스스로 해방시켜주는 그러한 어리석은 정책을 실시한다는 말입니까? 결과 히브리인들의 수호신이라고 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10가지의 재앙을 차례로 맞이하게 됩니다. 번째의 재앙으로서 애굽의 장자와 가축의 초태생의 죽음을 맞이하게 되자 이상 견딜 수가 없습니다(12:29-31). 이제 히브리인들을 출애굽시켜 주지 아니하면 바로 자신의 죽음과 애굽인 모두의 죽음이 다가올 것입니다. 제국의 멸망을 본능적으로 예감하면서 유월절 그날 밤에 바로와 신하들은 급히 모세와 아론을 불러서 신신당부를 합니다. 부디 히브리인들을 데리고 애굽을 떠나 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상 애굽에 재앙을 내리지 않도록 여호와께 기도를 드려 달라고 간청하고 있습니다.

(2)   둘째, 바로와 그의 신하들은 여호와 하나님이야말로 애굽의 모든 신들보다 뛰어나신 창조주이심을 깨닫게 됩니다;

1)      처음 모세와 아론이 지팡이로 뱀을 만드는 초능력을 선보이자 바로는 자신의 신하들에게 명령합니다(7:10-11a). 그러자 애굽의 현인들과 마술사들이 요술사들을 불러서 똑같이 자신들의 지팡이로 뱀을 만들게 합니다(7:11b). 그때 아론의 지팡이 뱀이 애굽 요술사들이 만든 뱀을 모두 삼켜버립니다(7:12). 그렇지만 애굽의 요술로도 능히 지팡이로 뱀을 만들어낼 수가 있었으므로 모세와 아론이 선보이고 있는 여호와 신의 능력이 그저 그런 것이라고 바로가 치부하고 맙니다.

2)      다음에 나일강물이 피로 변하는 것과 강에서 개구리를 불러서 인가로 올라오게 하는 여호와의 재앙이 모세와 아론을 통하여 애굽에 나타나게 됩니다(7:20-21, 8:5-6). 하지만 바로의 신하들과 요술사들도 정도는 넉넉히 해내고 있습니다(7:22, 8:7). 따라서 바로와 신하들은 히브리인들의 수호신인 여호와도 별것이 아니라고 여깁니다.

3)      하지만 다음 3번째 재앙부터 10번째 재앙까지는 그들 인간들의 능력을 벗어난 것들입니다. 애굽의 여러 신들을 모시고 있는 신관(神官, 신을 섬기는 관리들)들이 도저히 흉내도 수가 없는 재앙입니다. 특히 10번째 재앙이 애굽의 장자의 죽음과 모든 가축들의 초대생의 죽음입니다(12:29-30). 그날 애굽에 곡성이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결과 바로와 그의 신하들은 철저하게 깨닫고 있습니; “히브리인들의 수호신 여호와 하나님이야말로 창조주이시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모세와 아론의 요구대로 히브리인들을 모두 출애굽시켜 주고 있는 것입니다(12:31-33).

(3)   셋째, 유일하신 창조주의 이름이 여호와이심을 세상에 알리게 되는 나라가 바로 바로의 애굽 제국이 것입니다;  실제로 유월절 장자의 죽음과 애굽의 모든 가축의 초태생의 죽음을 통하여 바로와 그의 신하들은 철저하게 깨닫고 있습니다(12:29-33). 히브리인들의 수호신 여호와 하나님이야말로 창조주이시라는 것입니다. 앞을 막아서는 자는 모두가 재앙을 만나고 죽임을 당하게 된다는 교훈입니다. 따라서 애굽에서부터 창조주 여호와의 이름이 세상으로 전파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9:18); 다음과 같이 세가지 질문을 가지고 본문의 의미를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합합니다;

(1)   첫째, 하나님께서는 누구를 긍휼히 여기시고 있을까요? 출애굽기 32장을 보면,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여호와로 섬긴 이스라엘 백성들을 전멸시켜버리겠다고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32:8-10). 모세가 하나님의 생각을 돌이키려고 탄원을 하고 있습니다(32:11-13). 마지막에는 자신의 영생을 포기하더라도 동족의 잘못만은 용서해 달라고 간청을 합니다(32:32).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중보의 기도를 받아들이시고 마음을 돌이키십니다(32:14, 33-34). 그렇다면 모세가 자신의 영생까지 걸고서 간구한 중보의 기도가 하나님의 마음을 돌이키고 있는 요인이 되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보다는 모세에게 나타나신 여호와 하나님의 모습 가운데 진짜 이유가 무엇인지 다음과 같이 나타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모든 선한 것을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앞에 선포하리라.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33:19). 마디로, 하나님께서는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들에게 긍휼을 베푸십니다. 그리고 회개하는 자들을 위하여 살길을 마련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2)   둘째, 하나님께서는 누구를 완악하게 만들고 있을까요? 출애굽기에서 모세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애굽 제국의 황제인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만들고 계신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으므로 그들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심과 같더라”(9:12), “그러나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으므로 이스라엘 자손을 보내지 아니하였더라”(10:20). 그렇다면 바로가 자신의 마음을 완강하게 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거역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무엇인가 이루실 목적이 있으셔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3)   셋째, 완악함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 것일까요? 바로일까요? 아니면 여호와일까요? 하나님께서는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고 하시면서 아들을 세상에 육신으로 보내셔서 죄짐을 십자가에서 지게 하십니다. 그것으로 창조주의 책임을 감당하십니다. 그렇다면 다음에 남게 되는 것은 사람들이 스스로 자신들의 마음이 완악하게 부분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역사를 만들고 계시는 것일까요?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사람들은 모든 것이 창조주이신 하나님 책임이라고 강변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십자가에서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고 자신을 희생제물로 바치실 때까지는 그것이 상당한 명분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모세가 기록한 출애굽기의 내용에 비추어 보더라도 분명히 그러합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피눈물을 흘리신 다음에는 이상 그것이 아닙니다. 창조주께서 사람을 잘못 만든 책임을 지도록 자신의 아들을 십자가에서 희생하셨기 때문에 다음에는 모든 잘못이 사람들의 책임으로 귀결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제는 죽음의 운명과 멸망을 피하기 위해서는 속히 십자가로 나아가서 회개를 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영접하고 구원의 성도로 살아갈 있도록 성령님의 능력을 달라고 간구해야만 합니다(24:49, 1:6-8). 그것이 당장은 자신을 살리며 나아가서는 만민과 만물을 살려서 영생의 하나님나라로 인도하는 유일한 방법이 되고 있습니다(8:16-23).

그러므로 누구든지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붙들고 자신의 죄를 철저하게 회개하고서 거듭난 인생을 살아갈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얻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명령하신 지상명령을 실천하는 인생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성도의 거듭난 삶입니다.

그러므로 아무쪼록 그러한 성도의 거듭난 삶을 기쁨으로 영위하시는 여러분들이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