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로마서 강해 제62강(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1. 4. 17. 01:26

로마서 강해 제62(9:25-26)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7 3 3()

 

사도 바울이 만민구원의 하나님을 호세아의 글에서 찾다(1:10, 2:23, 9:25-26).

 

본문에 들어오기 전에 사도 바울이 로마시의 성도들에게 말한 내용은 세 개의 그릇에 대한 것입니다; 첫째, 진노의 그릇(9:22) 둘째, 긍휼의 그릇(9:23) 셋째 부르신 그릇입니다(9:24).

그 세가지 용어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알기 쉽게 이해시키지 위하여 바울은 히브리정경에 들어 있는 선지자 호세아의 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먼저 그 내용을 한번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첫째, 히브리정경에 들어 있는 12개의 소선지서 가운데 호세아가 첫번째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북조 이스라엘 왕국의 번영기 여로보암2세 시대의 선지자인 호세아가 당시 이스라엘 10지파가 국토확장과 경제적 번영이라는 물질적인 성공시대를 살고 있다고 자랑하고 있지만 사실은 하나님신앙을 버리고 영적으로 그리고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1:1). 특히 성적인 타락이 심함을 여실하게 보여주고자 합니다. 그 방법이 호세아 자신의 가족 이야기입니다.

(2)  둘째, 호세아는 특이하게도 하나님의 명령으로 품행이 매우 좋지 아니한 여자인 고멜을 아내로 삼습니다(1:2-3, 2:19-20). 그녀는 남편을 두고서 집을 나가 다른 남자를 연모하고 바람을 피웁니다. 그 결과 남편의 자식이 아니라 애인의 자식을 세 차례나 얻게 됩니다. 그러한 음란한 마음을 지닌 고멜이 사실은 북조 이스라엘 왕국 백성들의 우상문화와 영적인 타락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요컨대, 호세아의 아내인 고멜이 하나님을 떠나서 이방인들의 수호신과 우상을 섬기고 연애한 북조 이스라엘 10지파와 같다는 지적입니다.

(3)  셋째, 선지자인 호세아는 하나님의 마음을 아내 고멜에게 3번이나 보여줍니다. 애인에게 버림을 받고 바깥세상에서 헤매고 있는 그녀를 세번이나 구속하여 가정으로 데려오고 있기 때문입니다(3:1-3). 그런데 호세아는 자신의 자식이 아닌 세 자녀를 데리고 살게 되는 비극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호세아의 가정에 함께 살고 있는 그 세 자녀를 바라보는 호세아의 심정이 무엇일까요?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이 이제 그 3자녀를 통하여 드러나게 됩니다;

1)    첫째가, 진노의 자식들입니다. 아내 고멜이 남편 호세아가 아니라 외간남자를 애인으로 연모하여 음란한 행실로 잠자리를 함께 하였기 때문에 태중에 음란한 씨를 자식으로 임신하게 된 것입니다. 그녀를 호세아가 구해서 집으로 데려왔기 때문에 3자녀를 얻게 됩니다. 그러나 그 3자녀는 호세아의 자식이 아닙니다. 외간남자를 연모하고 통간한 음란한 여인 고멜이 임신하여 낳은 자식입니다.  그 자식들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신앙이 없습니다. 선지자 호세아가 자신의 자식으로 삼아 그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을 전해주고는 있지만 그것이 그들에게는 태생상 이해가 되거나 실천이 되지를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진노하시고 그들을 떠나시게 됩니다.

2)    둘째가, 긍휼의 자식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성적인 타락과 태생적인 음란 가운데 죄인으로 살다가 인생을 끝내게 될 호세아의 3자녀를 불쌍하게 생각하십니다. 그래서 진노의 자식에 대하여 멸망의 심판을 행하시려고 하시던 그 마음을 여호와께서 돌이키십니다. 그 대신에 스스로 뼈를 깎는 슬픔과 희생을 각오하시면서 그들을 구원하고자 하십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엄청난 희생과 헌신의 마음이 함께하고 있는 것이 바로 창조주의 긍휼입니다. 하나님의 그 마음이 그들을 구원하고 그들의 이름을 새로운 의미로 다시 불러주고 있습니다. 3자녀는 새로운 이름으로 거듭난 인생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3)    셋째가, 여호와 하나님께서 고멜의 3자녀를 긍휼히 여기시고 구원하시듯이 이스라엘 10지파를 다시 구원의 자리로 부르신다고 하는 하나님의 복음에 대한 내용입니다. 본래 선민이었다가 타락한 이스라엘 10지파는 이제 이방인과 같습니다. 그들의 이름을 부르시고 구원의 자리로 인도하시는 하나님께서는 그들과 같은 처지와 형편에 처해져 있는 이방인들을 함께 부르지 아니하실 이유가 없으십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의 부르심은 만민 구원이며 이 세상 모든 피조물을 순서대로 모두 구원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8:15-23).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한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그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호세아의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내 백성이라, 사랑하지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9:25); 소선지서 호세아의 관련내용을 살펴보면서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내용을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1)  호세아의 바람난 아내 고멜이 음란한 마음으로 외간남자를 연모하여 함께 살다가 3번이나 임신을 하게 됩니다(2:4-5). 애인으로부터 버림을 받고 임신한 몸으로 거리에서 방황하고 있는 그녀를 호세아가 하나님의 명령으로 3 차례나 구원하여 집으로 데리고 옵니다(2:7, 3:1-3). 그 결과 호세아가 본의 아니게 3자녀를 얻게 됩니다. 고멜을 용서하고 집으로 데리고 오라고 명령하신 하나님께서 그들의 이름을 지어 주십니다(1:4-9). 3자녀의 이름이 이스르엘, 로루하마, 로암미입니다.

(2)  그들의 이름에 담겨 있는 의미를 먼저 살펴봅니다; 첫째, 이스르엘은 아합 왕의 별궁이 있던 지역입니다. 당시 아합 왕은 경치가 좋은 포도원 땅을 차지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포도원 주인인 나봇이 절대로 팔지를 않습니다. 고민하고 있는 아합 왕을 위하여 왕비 이세벨이 음모를 꾸며서 나봇을 살해하고 맙니다. 그 결과 이스르엘 땅에는 나봇의 무죄한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왕상21:1-25, 1:4). 둘째, 로루하마는 내가 다시는 이스라엘 족속을 긍휼이 여겨서 용서하지 않을 것”(1:6)이라는 의미입니다. 셋째, 로암미는 그 뜻이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요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지 아니할 것임”(1:9)이라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3자녀의 이름자의 뜻은 진노의 자식이라는 것입니다(9:22).

(3)  그런데 그 진노의 자식들이 모두 회개하지 아니하고 죄와 사망의 운명을 그대로 맞이하고 마는 것을 차마 창조주 하나님께서 외면하실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사람을 만드시고 자식처럼 사랑하신 아버지 하나님의 속마음입니다(7:11). 따라서 스스로 엄청난 대가를 치르시면서 희생과 헌신을 통하여 그들을 구원하고자 하십니다(53:1-12, 1:29, 3:13-16). 그 결과 마치 호세아의 3자녀와 같은 진노의 자식들이 긍휼의 자식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이제 새로운 이름을 얻고 새로운 운명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1)    이스르엘이란 말은 두가지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하나는 흩어진다는 것입니다(1:4-5). 또 하나는 심는다는 것입니다(2:21-23). 처음 이름의 뜻에 따라 진노의 백성들은 역사적인 비극을 맞이하게 됩니다. , 무죄한 자의 피가 흐른 이스르엘에서 번성하던 아합의 왕가가 끝장이 나고 말기 때문입니다. 나아가서 북조 이스라엘이 망하고 10지파가 흩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훗날 하나님께서는 그곳에 새로운 씨앗을 심고 있습니다. 사마리아 수가 성에서는 우물가의 여인을 통하여 그 마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해 주십니다(4:5-42). 나인 성에서는 죽은 과부의 아들을 살려 내십니다(7:11-17). 따라서 하나님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며 새로운 운명으로 살아가는 백성들이 바로 이스르엘입니다(1:11, 9:1-2).

2)    로루하마는 긍휼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내가 다시는 이스라엘 족속을 긍휼이 여겨서 용서하지 않을 것임이니라”(1:6). 그러나 그 진노의 그릇이라는 의미가 변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새로운 이름 루하마로 불러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 뜻이 긍휼입니다; “그러나 내가 유다 족속을 긍휼히 여겨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로 구원하겠고 활과 칼이나 전쟁이나 말과 마병으로 구원하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1:7).

3)    로암미의 의미는 내 백성이 아니다라는 선언입니다;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요,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지 아니할 것임이니라”(1:9). 그러나 하나님의 긍휼로 말미암아 그 저주스러운 운명이 변하게 됩니다. 새로운 이름 암미를 하나님으로부터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놀라운 뜻을 지니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바닷가의 모래같이 되어서 헤아릴 수도 없고 셀 수도 없을 것이며, 전에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곳에서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할 것이요”(1:10).

(4)  그와 같은 의미를 담아서 사도 바울이 호세아의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내 백성이라, 사랑하지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9:25)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 말의 뜻을 선지자 호세아는 더 정확하게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이에 유다 자손과 이스라엘 자손이 함께 모여 한 우두머리를 세우고 그 땅에서부터 올라오리니 이스르엘의 날이 클 것임이로다”(1:11). 이스라엘 12지파가 회복이 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삼고(27:37) 그 지체가 되고 한 몸이 되어서 모두가 합심하여 가나안 땅에 선포된 그리스도의 천국복음을 온 세상에 전하게 되는 것입니다(24:44-49, 1:8). 그들이 천국에 들어가는 새로운 이스라엘 12지파입니다(7:4-8). 그렇게 새로운 복음의 씨앗을 온 세상에 심고자 나서는 자들이 훗날의 유대인 성도라는 의미를 강하게 담고 있는 예언이라고 하겠습니다.

둘째로,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곳에서 그들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함과 같으니라”(9:26); 겉으로 보면, 호세아 선지자의 글 제1장 제10절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바닷가의 모래같이 되어서 헤아릴 수도 없고 셀 수도 없을 것이며, 전에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곳에서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할 것이요”(1:10). 그렇지만 그 깊은 의미를 생각하면, 사도 바울이 호세아 선지자의 기록을 원용하여 사실은 이방인 모두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고 있는 대목입니다. 이제는 선민 이방인 상관이 없이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시고 그 지상명령을 실천하고자 나서는 자들이 모두 예수님의 제자이며 성도들입니다(28:18-20, 1:8). 그들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새로운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게 될 것입니다(21:5-7, 24-27). 그것이 사도 바울이 진실로 로마시의 성도들에게 전해주고 싶어하는 하나님의 복음의 핵심입니다(1:1-2).

결론적으로, 사도 바울이 그의 서신서를 저술하고 있는 시기에는 신약성경이 이 세상에 나타나기 전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히브리정경에 실려 있는 모세의 글과 선지자들의 글 그리고 시편 등의 성문서를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하여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사도 바울이 노력이 본문과 그 앞 부문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는 먼저 대선지서를 남긴 이사야와 예레미야의 글에 들어 있는 토기장이의 비유를 가지고 진노의 그릇’, ‘긍휼의 그릇’, 그리고 하나님께서 복음의 일꾼으로 부르신 부름의 그릇에 대하여 알기 쉽게 로마시의 성도들에게 설명을 해주고 있습니다.

이어서 바울은 본문에서 소선지서의 첫머리에 들어 있는 호세아 선지자의 글을 원용하여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구원하시는 과정에 대하여 쉽게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1)  첫째, 하나님께서는 진노의 자식들에게 멸망의 심판을 행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운명을 긍휼하게 여기시고 새로운 이름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거듭난 운명을 허락하십니다; “내가 나를 위하여 그를 이 땅에 심고(이스르엘),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였던 자를 긍휼히 여기며(루하마), 내 백성 아니었던 자에게 향하여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 하리니(암미), 그들은 이르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하시니라”(2:23).

(2)  둘째,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명령을 실천하는 성도의 삶을 신실하게 살아가게 되면 하나님나라에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들어가게 해주는 영광까지 약속하십니다(1:10).

참으로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복음에 대하여 알기 쉽게 히브리정경을 사용하여 이방인들에게 설명을 해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의 서신서가 정경으로 편집이 되어 오늘날 신약성경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제 그의 글을 읽고 있는 자들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어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갈 수 있는 강한 소망을 얻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무쪼록 그렇게 새로운 운명에 맞게 신실하게 살아가셔서 하나님 아들의 영광을 누리시는 성도님들이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