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로마서 강해 제64강(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1. 4. 18. 22:01

로마서 강해 64(9:30-33)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7 3 5(주일)

 

결국, 구원을 얻는 것은 율법의 인가? 아니면, ‘믿음의 인가?(9:30-33)

 

로마서를 기술하면서 사도 바울은 하나의 명제를 먼저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복음에는 하나님의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1:17)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자신 있게 그렇게 말할 있는 근거는 그의 명제가 히브리정경 하박국에 기록되어 있는 다음 문장에 의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속에는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2:4). 조금 풀이를 먼저 해보고자 합니다;

(1)   첫째, 하박국 선지자처럼 사도 바울도 믿음이란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최종결정권을 하나님께 맡기는 삶을 말하고 있습니다(15:6, 3:17-18, 1:16). 그런데 선민 유대인들이 그러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여호와를 믿고 최종결정을 맡기지를 못하고 자신들이 모든 것을 결정하고자 합니다. 그것이 바로 종교적인 교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반대입니다. 모든 심판과 판정을 아버지 하나님의 손에 맡깁니다. 자신의 말을 백성들에게 전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과 뜻만을 전해주고자 애를 쓰고 있습니다(5:30, 8:28-29). 말씀을 비록 백성들이 싫어하고 있을지라도 자신은 그렇게 복음사역을 수행하고 있습니다(5:39-44). 그것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서있는 믿음이며 하박국 선지자는 정직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2)   둘째,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서있는 믿음을 보시고 여호와께서는 의롭다고 선언하십니다. 비록 세상적으로 버림을 받고 무덤속에 들어간다고 하더라도 창조주의 능력으로 살려 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고 천국으로 인도하여 영생을 주십니다. 그와 같은 이치가 복음에 들어 있습니다. 사실을 일찍 선포한 선지자가 히브리정경에 있어서는 하박국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하박국 선지자의 글을 인용하여 그의 유명한 명제 1:17’ 절을 위와 같이 적고 있는 것입니다.

(3)   셋째, 그와 같은 바울의 명제와 기초가 되고 있는 하박국 선지자의 글을 생각하면서 본문의 내용을 한번 묵상해봅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따르지 아니한 이방인들 의를 얻었으니 믿음에서 , 의의 따라간 이스라엘은 율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어찌 그러하냐? 이는 그들이 믿음 의지하지 않고 행위 의지함이라. 부딪칠 돌에 부딪쳤느니라. 기록된 , 보라 내가 걸림돌 거치는 바위 시온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9:30-33). 이해를 돕기 위하여 간략하게 풀이를 먼저 해봅니다;

1)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지 아니하면서 제멋대로 살고 있던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해지자 그들이 먼저 하나님으로부터 사함과 칭의의 은혜를 얻고 있습니다. 이유는 그들이 창조주 하나님의 전능성을 인정하고 신뢰한 아브라함의 믿음의 의를 따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2)      반면에 여호와를 섬긴다고 대외적으로 자랑하고 있던 선민 유대인들이 율법을 온전히 지키지도 못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하는 인정도 받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유는 여호와를 믿지 않고 유대교의 권위를 믿었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지키는 꾸미고 있는 선민들의 종교행위에 대하여 사람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의롭다고 인정하시지 아니하셨지만 종교적인 겉모양만 보고 있는 유대교지도자들과 산헤드린 공회는 구원을 받을 있는 의로움이라고 인정을 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3)      그렇다면, 유대교지도자들이 선민들에게 영생구원을 있는 것일까요? 어림도 없는 이야기입니다. 여호와의 지혜와 창조의 능력이 아니고서는 결코 인간을 구원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영생의 구원을 얻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아버지의 뜻을 따라 영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이지 종교적인 권위체에 보이기 위한 인간의 종교적인 행위가 아닌 것입니다. 그와 같은 이치가 히브리정경에 아브라함의 믿음의 의와 그것을 설명하고 있는 선지자들의 외침으로 들어 있습니다(15:6, 3:17-19, 28:14-16, 41:8-14).

4)      그것이 이사야 선지자의 말처럼 유대인들에게 걸림돌이 되고 있습니다(28:14-16). 더구나 유대교지도자들이 처형을 해버린 예수 그리스도의 일생과 교훈이 최대의 걸림돌이 되고 있습니다. 그것을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종교행위만을 강조하고 있는 교만한 자들이 구원을 얻지 못하고 걸려서 넘어지는 가장 바위라는 뜻을 담아서 거치는 바위’(9:33)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따르지 아니한 이방인들 의를 얻었으니 믿음에서 ”(9:30);

(1)   바울은 하나님의 복음을 동족인 유대인들에게 체계적으로 가르쳐주고 싶은 사도입니다. 사도 바울은 메시아의 오심에 대한 예언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나라에 대하여 알고 싶어서 히브리정경을 참으로 열심히 연구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동족들에게 설명해주고 싶은 진리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그러한 기회가 주어지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형편이므로 자신의 안타까운 마음을 로마서 9 첫머리에서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진술하고 있는 바울입니다(9:1-3).

(2)   그러한 의미에서 로마서를 서신으로 당장 받아보게 되는 사람들은 로마시에 살고 있는 성도들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바울이 자신의 글을 읽어 주기를 원하고 있는 대상은 그의 친척들과 동족들입니다. 그와 같은 상황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 사도 바울이 동족에게 고하고 있는 그의 글의 중간결론을 본문에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첫째, 선민 유대인들이 먼저 구원의 자리에 나아가지를 못하고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복음을 전해 듣고서 대대적으로 구원을 얻고 있습니다. 점에 대하여 여호와 하나님께 항의를 해보고 싶지만 그렇게 수가 없습니다. 이유는 사도 바울이 구원을 얻는 근거가 무엇인지를 벌써 발견하여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근거에 비추어 보게 되면 동족들은 불합격입니다. 어처구니가 없게도 창조주의 존재를 모르고서 제멋대로 살고 있던 이방인들이 오히려 기준에 합격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2)      둘째, 구원을 얻을 있는 근거를 사도 바울은 믿음에서 ”(9:30)라고 진술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믿음의 조상이라고 아브라함을 지칭하면서(4:16) 믿음의 정의를 창세기 15장에서 원용하고 있습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15:6),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되었느니라”(4:3). 그렇다면 선민 유대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전심전력으로 섬긴다고 대내외적으로 자랑을 하면서 실제로는 무엇을 믿고서 종교생활을 영위한 것일까요?

3)      셋째,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드러나고 있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선민들이 종교생활을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율법선생들이 가르쳐주고 있는 유대교리를 믿었으며 자신들의 구원은 유대교의 최고기관이 율법을 준수한 의인이라고 권위있게 인정을 해줌으로써 자연히 주어지는 것이라고 여긴 것입니다. 그것은 전형적인 간접신앙의 형태입니다.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교제나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뜻을 헤아리는 묵상의 삶이 사라지고 없습니다. 그러한 형편이므로 예수 그리스도가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천국복음으로 쉽게 정리하여 가르쳐주고 있지만 뜻을 알아 듣지를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과 어리석게도 유대교의 도그마’(dogma, 독단적인 교리, 신념, 또는 학설) 갇혀서 그만 그리스도를 처형해버리는 잘못을 범하고 그들입니다.

둘째로,의의 따라간 이스라엘은 율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어찌 그러하냐? 이는 그들이 믿음 의지하지 않고 행위 의지함이라. 부딪칠 돌에 부딪쳤느니라”(9:31-32); 다음과 같이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의의 따라간 이스라엘은 율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9:31);

1)      사도 바울이 율법으로 말미암는 추구한 자들이 선민 유대인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10:5). 모세오경 레위기 18장에 기록된 말씀과 같이 율법을 온전히 지키고 행하면 분명히 의인이 되고 하나님의 구원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너희는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 나는 여호와이니라”(18:5).

2)      그러나 문제는 사람의 능력과 지혜로써는 율법을 온전히 준행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점을 과거 랍비 사울이었던 사도 바울이 솔직하게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3:20). 그렇다면 하나님으로부터 칭의와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3)      마디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만 합니다. 피조물인 사람의 힘으로 수가 없으므로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정직하게 자신이 자력으로는 구원을 얻을 없는 죄인임을 고백해야 합니다. 그리고 긍휼을 베푸셔서 부디 구원을 얻을 있도록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달라고 간구해야만 합니다. 그리하면 선하신 아버지 하나님께서 결코 외면하지 아니하십니다(7:11).

(2)    어찌 그러하냐? 이는 그들이 믿음 의지하지 않고 행위 의지함이라”(9:32a);

1)      그런데 그와 같은 솔직한 고백과 정직하게 하나님께 나아가는 믿음이 선민 유대인들에게는 없습니다. 그들은 율법선생들과 유대교지도자들이 만들어서 보급한 생활율법을 사람들의 눈앞에서만 지키는 하면 구원을 얻을 있다고 교육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만든 종교적인 조직과 교리가 하나님의 능력과 주권을 대신하고 있는 영적인 타락입니다.

2)      함정에 깊이 빠져버린 유대교인들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불쌍하게 여기시고 하나님의 뜻을 확실하게 전해주기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을 선민사회에 보내어 주십니다. 그러나 그들은 돌이키지를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나아오라고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외침을 듣기 싫어하여 형장으로 보내어버립니다. 결과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복음과 믿음의 의는 이방 땅으로 넘어가버리게 됩니다. 

(3)   부딪칠 돌에 부딪쳤느니라”(9:32b); 유대교인들이 하나님신앙에서 실족하고 있습니다;

1)      하나님의 눈을 속이는 그러한 외식적인 신앙생활을 청산하고 부디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바로 서라고 하는 선지자들의 부르짖음을 외면했기 때문입니다. 나아가서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부디 회개의 마당으로 나아오라고 외치는 예수 그리스도의 목소리마저 외면하고 있습니다.

2)      특히 예수님의 복음사역은 유대교지도자들에게 가장 위기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께서 하나님말씀의 뜻을 천국복음으로 선포하시자 많은 유대인들이 믿고서 물세례를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각종 질병과 장애를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놀랍게도 예수님의 복음사역의 현장에서 수없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셋째, 하늘 곳간을 열어서 오병이어 기적과 칠병이어 기적을 연출하고 있습니다. 수만명의 청중들이 옛날 만나와 같은 기적을 맛보고 있는 것입니다. 넷째, 죽은 자를 살려내고 있습니다. 나인성 과부의 아들, 회당장 야이로의 , 베다니의 나사로 등이 예수님의 말씀으로 다시 살아나고 있습니다.

3)      그대로 두었다가는 유대교의 설자리가 사라질 판입니다. 그래서 대제사장을 비롯한 유대교의 지도자들이 은밀하게 군사력을 동원하여 한밤중에 예수를 체포하고 로마총독의 협조를 얻어서 십자가에 처형합니다. 그러한 유대교지도자들의 불법적인 행위가 과연 거치는 돌을 치워버리는 효과를 가지고 오는 것일까요?

셋째로,기록된 , 보라 내가 걸림돌 거치는 바위 시온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9:33); 사도 바울은 그것이 아니라고 여기서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를 시온에 것은 선민 유대인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부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1)   그러므로 걸림돌에 걸려서 넘어지게 되면 무엇보다도, 어째서 그렇게 넘어지게 되었는지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신앙생활에서 실족한 원인을 발견하여 그것을 고쳐 나가야 합니다. 그때에 비로소 바른 하나님신앙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고 선민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신앙 양심에 가책을 주고 있는 걸림돌이 보기 싫다고 미워하여 아예 한쪽으로 치워버리고 있습니다. 그러한 역사의 반복이 이스라엘의 역사서와 선지서에 계속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많은 선지자들의 외침이 있었지만 선민 유대인들이 하나님신앙을 온전히 회복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2)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는 선민의 사회에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을 천국복음으로 외치는 그리스도를 보내어 주십니다. 사람인 선지자들의 말씀은 듣지 아니하였지만 그래도 하나님의 아들의 가르침은 마음에 새기지 아니하겠느냐고 하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21:37). 하지만 기대는 무너지고 맙니다. 유대교의 최대의 위기가 바로 나사렛 예수의 천국복음과 그가 행하고 있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판단한 대제사장과 산헤드린 공회원들이 그만 예수님을 정죄하고 로마총독에게 정치적인 압력을 가하여 십자가 처형을 결정하고 말기 때문입니다.

(3)   그것으로 유대교지도자들은 거치는 바위를 제거하였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으로 정직하게 나아가서 믿음을 회복하고 만민에게 구원을 전할 있는 선민의 자격을 상실하고 말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십자가 처형이 있고나서 40년도 지나지 아니하여 선민의 사회는 로마군대에 의하여 멸망을 당하고 초토화가 되고 맙니다. 무려 110만명의 유대인들이 학살을 당하고 그들의 땅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다니엘의 예언 그대로, 거치는 바위가 그들 위에 심판의 바위가 되고 것입니다(2:44-45, 21:43-46).

(4)   그와 달리 오순절 성령강림이 있자 사도와 제자들이 예루살렘에서부터 하나님의 행하심에 대하여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합니다(2:1-42). 그때 회개하고서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한 유대인들은 구원을 얻게 됩니다. 그렇게 믿음의 자리로 나아온 자들은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일꾼이 되고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게 됩니다. 예를 들면, 사도 요한이 주후 70년에 소아시아로 피신하여 주후 90년대에 4복음서와 요한서신들 그리고 계시록을 기록하기도 합니다. 그와 같이 많은 유대인출신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 의미가 있는 인생을 살아간 것입니다. 주후 40년대 중반부터 세계선교에 나선 사도 바울도 그들 중의 한사람입니다.

결론적으로, 성도들도 신앙생활에서 거치는 돌을 만나게 수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유대교지도자들처럼 무조건 자신들이 옳다고 주장하면서 돌을 치워버리기에 급급해서는 안됩니다. 거치는 돌에 걸려서 넘어지도록 혹시 자신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하나님을 외면하고 있는 일이 없는지 곰곰이 생각해야 합니다.

혹시 하자와 흠결이 발견이 된다면 솔직하게 인정을 하고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정직하게 고백을 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치유하여 주시고 걸림돌을 넘어설 있도록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주실 것입니다. 그것이 성도의 믿음 생활입니다.

아무쪼록 자신의 부족함을 정확하게 알고서 전능하신 하나님께 나아가서 능력과 지혜를 보충 받으시는 신앙인들이 모두 있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