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로마서 강해 제63강(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1. 4. 17. 23:21

로마서 강해 63(9:27-29)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7 3 4()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이스라엘 구원계획을 밝히고 있는 이사야의 글을 인용하다(1:9, 10:22, 9:27-29).

 

사도 바울이 설명하고 있는 본문의 이야기는 대선지서 이사야에 있어서도 풀이하기가 참으로 어려운 대목입니다. 이유는 이사야가 그의 남은 사상과 하나님이 주신 대한 예언을 적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째서 만민구원이라고 하면서 그렇게 제한적인 수가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모순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리고 사람들 가운데에서는 구원을 얻을 만한 씨가 없고 어째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씨만이 구원의 역사를 일으키게 되는 것일까요?

먼저 사도 바울의 본문을 한번 옮겨 적어 보고서 그러한 의문에 대하여 나름대로 생각을 해보고자 합니다; “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자손들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받으리니, 주께서 위에서 말씀을 이루고 속히 시행하시리라 하셨느니라. 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 , 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라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 함과 같으니라”(9:27-29).

본문에서 바울이 원용하고 있는 대선지서 이사야의 예언이 다음과 같습니다; “그날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와 야곱 족속의 피난한 자들이 다시는 자기를 자를 의지하지 아니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여호와를 진실되게 의지하리니, 남은 야곱의 남은 자가 능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라. 이스라엘이여, 백성이 바다의 모래 같을 지라도 남은 자만 돌아 오리니, 넘치는 공의로 파멸이 작정되었음이라. 이미 작정된 파멸을 만군의 여호와께서 세계 중에 끝까지 행하시리라”(10:20-23),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생존자를 조금 남겨두지 아니하셨더라면 우리가 소돔 같고 고모라 같았으리로다”(1:9). 간략하게 풀이를 해보고자 합니다;

(1)   먼저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의 두가지 특징을 말하고 있습니다;

1)      첫째, 자기를 자를 의지하지 아니하고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들만이 구원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10:20). 사람들은 정복자에게 고통을 당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하면 반드시 힘을 길러서 자신도 정복자가 되려고 합니다. 그것은 역사적으로 복수가 복수를 낳게 되고 피의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역사는 창세기 1-6장까지의 기록을 대입하게 되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창조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고 육신의 모양만 가지고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게 마치 짐승처럼 약육강식의 사회를 만들어서 살고 있는 인간사회를 예나 지금이나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떠나 버리십니다(6:3, 1:24, 28). 결과 땅에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멸망의 역사가 찾아오는 것입니다(6:5-7). 그러므로 원수 갚는 일을 하나님께 맡겨버려야 합니다. 오히려 원수처럼 미워하는 상대방이라고 하더라도 자를 구원하기 위하여 성도는 중보의 기도를 드려야만 합니다(5:43-48, 12:14-21).  그리할 때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가 되고 하나님의 구원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2)      둘째, ‘야곱의 남은 구원을 얻게 됩니다. ‘야곱의 남은 자신의 타고난 운명을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거듭난 인생으로 바꾼 자입니다. 야곱이 하나님으로부터 얻게 새로운 이름 이스라엘 뜻이 그러합니다(32:28, 35:10). 야곱은 태어날 때부터 에서의 발목을 잡고서 모태에서 나오고 있습니다(25:26). 장자만이 차기 족장이 되며 부친의 재산과 족장의 권리를 승계하게 된다는 사실을 미리 알고서 모태에서부터 에서와 다툼을 벌리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25:22). 그러나 상대적으로 힘이 약한 야곱이 둘째가 되고 맙니다. 모든 것을 에서에게 빼앗겨버리고 형이 나중에 족장이 되면 자신은 신하가 운명입니다. 그것을 야곱은 인정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예언 한조각만을 의지한채 기도로써 매어 달립니다(25:23, 27). 타고난 둘째의 운명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첫째가 있도록 바꾸어 달라는 것입니다. 터무니 없는 야곱의 오랜 기도가 현실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주의 능력으로 야곱을 가나안 땅의 족장 이스라엘 세워 주시기 때문입니다(48:22). 더구나 약속의 아들인 아버지 이삭의 뒤를 이어 영적인 장자가 됩니다(28:12-22). 그가 가는 곳에는 하나님의 말씀과 축복이 흘러 넘치게 됩니다(35:9-13, 47:7-10, 29-31, 50:19-21, 24-26). 요컨대, 여호와의 창조의 능력을 의지함으로써 자신의 운명을 바꾸고 영적인 장자가 야곱이 바로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자입니다.

(2)   다음으로, 하나님께서 새로운 씨를 주시지 아니하시면 세상에서 구원을 얻을 자가 없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창세기를 보면, 아담부부의 아들이 카인과 아벨입니다. 그런데 둘째는 형에게 살해를 당하고 장남인 카인은 때문에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멀리 동쪽 유랑자들이 살고 있는 땅으로 유배를 떠나고 맙니다(4:8, 11-16). 이제 세상에서는 하나님신앙을 파수하는 후계체계가 사라질 형편입니다. 마디로, 하나님 신앙을 파수하는 남은 자가 없는 것입니다. 세상이 유물론과 우상문화에 빠져 있습니다. 황금만능주의가 퇴폐 향락문화와 함께 인간의 사회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마치 소돔과 고모라와 같은 멸망의 대상들 뿐입니다(1:9b). 바로 그러한 때에 하나님께서 다른 씨를 아담부부에게 주십니다(1:9a). 다른 씨인 아들이 바로 입니다(4:25-26, 5:3). 구체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집안의 특징이 다음과 같습니다;

1)      첫째, ‘ 하나님이 주신 형상을 보전하고 있는 아담의 형상을 대물림하고 있습니다(5:3). 그것이 하나님께서 죽은 아벨 대신에 아담의 부부에게 주신 다른 아들이며 구원의 대상인 ’(seed)라고 하는 의미입니다(4:25). 결과 자신의 영혼의 주인이신 아버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있습니다. 자신의 인간적인 모습 가운데에는 원죄를 범한 아담과 하와의 죄성(罪性, 죄의 성질) 육신 가운데 깃들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낳은 아들에게 유전이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셋은 죽을 수밖에 없는 육신을 가지고 태어난 불쌍한 인생이라는 의미로 아들의 이름을 에노스라고 명명합니다(4:26a). 그리고 아들과 함께 여호와 하나님께 부르짖고 있습니다(4:26b). 영생의 아버지 하나님께서 부디 불쌍한 자신들을 구원하여 영적인 영원한 생명을 달라고 하는 기도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살아가고 있는 집안이 창세기에서는 의인의 족보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구원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2)      둘째, 선민사회에 나타나신 메시아 예수님께서 복음의 뿌리십니다(4:3-20). 공관복음에 실려 있는 예수님의 뿌리는 자의 비유 그것을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천국복음으로 가르쳐주실 때에 말씀을 명심하고서 하나님신앙을 회복하게 되면 복음의 씨가 마음속에서 무럭무럭 자라나게 됩니다. 좋은 성도의 마음 밭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믿음으로 자라나게 되면 복음전파와 선교의 열매를 얻을 수가 있습니다(4:20). 그렇게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간 성도들에게 천국의 입성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자손들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받으리니”(9:27); 부분으로 나누어서 간략하게 살펴봅니다;

(1)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자손들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9:27a);

1)      선지자 이사야는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언약을 철석같이 믿고 있습니다; “내가 자손이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있을진대 자손도 세리라”(13:16). 아브라함의 자손을 땅의 티끌 같이 많이 번성시키시겠다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상한선은 사람이 있는 정도까지입니다. 그렇게 장차 세상에 편만하게 퍼져나갈 선민 유대인들입니다.

2)      하지만 그들에게 전달이 되고 있는 하나님신앙이 선지자 이사야는 참으로 걱정입니다. 당시 다윗왕조 유다 왕국의 히스기야는 이기적이고도 현세적인 구복사상에 취해 있습니다. 앗수르 대군의 침입으로 풍전등화와 같은 예루살렘 성을 여호와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십니다(왕하19:34-37). 그리고 죽을 병에 걸린 히스기야 왕의 수명도 15년이나 연장해 주십니다(왕하20:6). 그러자 히스기야 왕은 자신이 기도만 하면 인간의 수명도 늘어나고 적군도 물러가는 착각하고 있습니다.

3)      따라서 멀리 바벨론에서 친선사절에게 얼마나 소리를 치고 있는지 모릅니다(39:12). 하나님께서는 그만 우상문화와 도구주의 사상에 빠져버린 히스기야 왕의 영적인 타락에 대하여 장차 그의 왕국이 이방인들에게 멸망을 당할 것이라고 이사야를 시켜서 예언해줍니다(39:6-7). 하지만 히스기야 왕은 반성할 줄을 모릅니다. 그는 자신이 살아 생전에는 유다 왕국이 건재한 그것만으로 만족합니다(39:8). 죽은 다음의 일은 자기 책임이 아니라고 하는 한심한 현세구복적인 신앙의 행태를 보이고 있는 히스기야입니다.

(2)    남은 자만 구원을 받으리니”(9:27b); 다윗왕조의 왕인 히스기야의 영적인 타락이 바로 유다 왕국 백성들의 신앙의 타락상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선민들의 신앙의 타락에 대하여 절망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는 선지자로 세움을 받았을 때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신 예언의 말씀을 반추하고 있습니다;

1)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하시기로”(6:10); 아무리 선지자 이사야가 선민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예언으로 외쳐도 마치 소의 귀에 경을 읽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현세적인 부귀영화에만 정신이 팔려 있지 자손의 대에 가서 나라가 망하는 따위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세상 살다 가면 그만이지 영생이라든가 천국은 관심의 대상이 아닌 것입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자꾸 선민사회에 보내시는 것은 그저 여호와께 좀더 정성을 보이라고 하는 말씀이지 실제로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과 예언대로 역사가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이상한 자신감에 사로잡혀 있는 선민 유대인들입니다. 참으로 무서운 이기주의와 현세주의 그리고 물질적인 성공신화가 선민의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2)      중에 10분의 1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황폐하게 것이나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같이 거룩한 씨가 땅의 그루터기니라 하시더라”(6:13); 그러나 선지자 이사야의 눈앞에는 다윗왕조 유다 왕국이 이방제국에 의하여 멸망을 당하는 처참한 모습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불쌍한 동족들을 부디 구원해 달라고 여호와께 매어 달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적으로는 선민 유대인들의 멸망을 막을 방법이 없다고 하십니다. 대신에 하나님의 아들이 구속자 메시아로 세상에 오는 사실에 대하여 예언을 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씨가 세상에 오시게 되면 새로운 신앙운동이 발생하게 됩니다.

3)      요컨대, 하나님신앙을 파수하고자 하는 자들이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 하나님의 복음을 온세상에 전파하게 되는 것입니다; “남은 자만 구원을 받으리니”(9:27b). 죽은 신앙의 그루터기에서 새로운 움이 하나님의 역사로 돋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을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게 되면 성령님께서 성도들에게 오셔서 거듭난 인생을 살게 것입니다(42:1-7, 48:16, 53:1-12). 그것만이 마지막으로 선지자 이사야가 학수고대하고 있는 구원의 길입니다(7:14, 9:1-2, 6-7, 11:1-12).

둘째로,주께서 위에서 말씀을 이루고 속히 시행하시리라 하셨느니라”(9:28);

(1)   이사야가 주전 695년경 히스기야 왕에게 유다 왕국의 멸망에 대한 여호와의 예언을 전해줍니다(왕하20:17-18). 그로부터 100 남짓 지났을 때에 지상 마지막 선민의 나라인 다윗왕조의 유다 왕국이 신바벨론 제국에 의하여 멸망을 당하고 맙니다(왕하25:1-7). 따라서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위에서 말씀을 이루고 속히 시행하시리라 하셨느니라”(9:28).

(2)   사도 바울의 가운데에는 다른 의미가 하나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인간이란 100 남짓 세상을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왕국의 멸망이나 세상의 종말이 멀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개인적으로 100년을 넘기기가 힘이 듭니다. 왜냐하면, 육신이 죽어서 무덤 속에 들어가게 되면 영적으로 며칠만에 부활하게 되면 자신의 심판을 마주하게 되기 때문입니다(5:28-29).

(3)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의 심판을 훗날의 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참으로 잘못된 생각이라고 하겠습니다. 인생은 생각보다 훨씬 짧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짧은 생애가 영생의 구원이냐? 영벌의 심판이냐? 판가름하고 있습니다(5:24).  세상적인 생각으로 육신적으로만 살게 되면 영벌의 심판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반면에, 하나님께서 세상 구원을 위하여 보내어 주신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게 되면 성도들은 지상명령의 사명을 감당한 후에 부활하여 하나님나라에 들어가서 영생구원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22:28-30).

셋째로,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 , 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라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 함과 같으니라”(9:29); 사도 바울은 예수님처럼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서 메시아에 관한 많은 예언을 발견하고 있습니다(24:44). 그리고 예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와 대속의 십자가 죽음, 그리고 무덤 부활과 승천사건을 통하여 거의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이제는 초대교회가 성립이 되고 세상에 하나님의 복음이 전파가 되고 있습니다. 일을 진두지휘하시는 성령님의 역사가 어느 때보다도 뜨겁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아버지 하나님께 얼마나 감사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그래도 세상에 메시아를 영접할 있는 믿음의 씨를 남겨 주셨기에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 세상에 복음을 전파함으로써 이제는 우리의 친척과 동족들이 소돔과 고모라같이 멸망하는 것을 예방하게 되었다고 하는 확신입니다(9:29).

결론적으로, 사도 바울은 히브리정경을 살펴보면서 새삼 여호와 하나님께 두가지 사실을 감사하고 있습니다; 첫째, 자신이 그리스도의 부활 승천과 성령님의 오심 이후에 하나님의 복음을 믿고 성도가 것입니다. 이사야가 700 전에 그토록 메시아가 오시는 것을 보고 싶어 했는데 바울 자신은 직접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 이방인 사도가 되어 세상에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면서 만민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피부로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메시아와 성령님께서 오시는 구원의 때를 예언하면서 얼마나 그때 보기를 원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루터기와 같은 자신이 놀랍게도 부활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적으로 만나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을 심령으로 깨닫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에 대한 자신의 깨달음을 체계적으로 세상에 기쁨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복된 인생인지 모릅니다.

바울은 복을 로마시의 성도들도 함께 누리기를 원하고 있습니다(1:11-12, 15:24). 그리고 자신의 형제와 친척과 골육들도 풍성하게 누리기를 원하고 있습니다(9:1-3, 10:1). 아무쪼록 사도 바울의 소원이 저희 성도님들의 소원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