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로마서 강해 제65강(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1. 4. 19. 16:39

로마서 강해 65(10:1-4)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7 3 6()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위하여 자신의 뜻을 희생한 예수님이 율법의 완성이라는 사도 바울의 지적에 대하여(10:1-4);

 

사도 바울은 10장에서 동족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에 대하여 그가 깨달은 내용들을 적고 있습니다. 바울이 그와 같은 깨달음을 얻게 연유는 다음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첫째, 이방인 사도로 일하면서 바울은 항상 동족들의 구원에 대하여 하나님께 간구하였기 때문입니다(9:1-3, 10:1). 둘째, 어째서 여호와께서는 이방인들에게 회개의 기회와 구원의 기회를 많이 주고 있는지 이유를 그가 히브리정경을 다시 연구함으로써 어느 정도 짐작할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20:5-6, 32:21, 65:1-3, 10:19-21). 셋째, 예수님의 행적과 교훈을 묵상하면서 선민 유대인들의 하나님신앙의 근본적인 문제점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3-4). 조금 설명을 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첫째, 헬라의 철학자들이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사람은 정치적인 공동체에서 사회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소속되어 있는 사회와 국가에 대하여 애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말과 풍습과 문화가 같으며 삶을 공유하고 있으니 일가친척과 피붙이 그리고 자기 민족이 사람들의 고향입니다.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민족과 나라가 같은 피조물이지만 사람들이 육신을 입고서 땅에서 세상을 살고 있는 동안에는 자신의 골육과 친지 그리고 민족이 항상 우선입니다. 점에 있어서는 이방인 사도로 수십년을 살아오고 있는 바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이방인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풍성한 역사를 경험하면서 그가 얼마나 열심히 그러한 구원의 바람이 선민 유대인들에게도 크게 일어날 있기를 간구하고 있는지 모릅니다(9:1-3, 10:1).

(2)   둘째, 사도 바울은 여호와께서 어째서 이방인들에게 회개의 기회와 구원의 기회를 많이 주고 있는지 이유를 그가 히브리정경을 다시 연구함으로써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습니다(20:5-6, 32:21, 65:1-3, 10:19-21). 내용을 간략하게 살펴봅니다;

1)      먼저 시내 산에서 여호와께서는 모세에게 십계명을 주시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그것(우상)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리라”(20:5-6). 여호와 하나님의 속성이 첫째가 질투이며, 둘째가 징계는 3-4대로 짧고, 은혜 베푸심은 1,000대에 이르도록 길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질투 때문에 선민들을 모른 체하시는 기간이 생각보다 짧습니다. 안목으로 바라보면,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조상들을 기억하시고 은혜를 베푸셔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반드시 돌이키시고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2)      그와 같은 취지가 모세의 고별설교 가운데 다음과 같이 담겨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하나님이 아닌 것으로 질투 일으키며 허무한 것으로 진노를 일으켰으니, 나도 백성(선민) 아닌 자로 그들에게 시기 나게 하며 어리석은 민족(창조주를 모르는 이방인)으로 그들의 분노를 일으키리로다”(32:21). 사도 바울이 내용을 로마서 10장에서 기술하고 있습니다; “내가 백성 아닌 자로써 너희를 시기하게 하며 미련한 백성으로써 너희를 노엽게 하리라 하였고”(10:19).

3)      선지자 이사야는 직접적으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나는 (창조주) 구하지 아니하던 (이방인)에게 물음을 받았으며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에게 찾아냄이 되었으며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던 (이방) 나라에 내가 여기 있노라 내가 여기 있노라 하였노라. 내가 종일 손을 펴서 자기 생각을 따라 옳지 않은 길을 걸어가는 패역한 백성(선민)들을 불렀나니, 동산에서 제사하며 벽돌 위에서 분향하여 앞에서 항상 노를 일으키는 (이스라엘) 백성이라”(65:1-3). 점을 사도 바울이 그의 로마서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사야는 매우 담대하여, (여호와) 나를 찾지 아니한 (이방인)들에게 찾은 바가 되고 내게 묻지 아니한 자들에게 나타났노라 말하였고, 이스라엘에 대하여 이르되, 순종하지 아니하고 거슬러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손을 벌렸노라 하였느니라”(10:20-21).

(3)   셋째, 사도 바울이 예수님의 행적과 교훈을 묵상하면서 선민 유대인들의 하나님신앙의 근본적인 문제점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깨닫고 있습니다;

1)       예수님께서는 시종일관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우선시하고 있습니다. 뜻을 따르기 위하여 자신의 뜻을 굽히고 있습니다(22:42, 5:30, 6:38-39). 그런데 이스라엘 자손들은 반대입니다. 자신들의 뜻이 우선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다만 자신들의 소원성취를 위한 도구일 따름입니다. 마치 우상의 하나로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고자 합니다.

2)      그렇게 자기들의 생각을 따라 하나님 보시기에 옳지 아니한 길을 걸어가고 있는 선민 이스라엘 자손들이 회개하고서 돌아오기를 여호와께서 얼마나 고대하고 계시는지 모릅니다. 점에 대한 선지자 이사야의 기록이 이미 살펴본 그대로입니다; “내가 종일 손을 펴서 자기 생각을 따라 옳지 않은 길을 걸어가는 패역한 백성(선민)들을 불렀나니”(65:2)(3-4).

3)      대목이 중요하기에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 다시 적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에 대하여 이르되, 순종하지 아니하고 거슬러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손을 벌렸노라 하였느니라”(10:21). 점을 본문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10:3).

4)      그렇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반대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받들기 위하여 자신의 뜻을 굽히고 스스로 희생하십니다. 그것이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키고 있습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10:4) 기록하고 있습니다. 말은 예수 그리스도처럼 살아가게 되면 최종재판권을 가지신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판정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급심을 관장하고 있는 율법이 하나님의 최종심판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할 수가 없습니다.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형제들아 마음에 원하는 하나님께 구하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함이라”(10:1);

(1)   하나님신앙을 가진 자의 행동은 세가지로 구성이 되고 있습니다; 첫째, 마음의 소원이 있습니다. 둘째, 소원을 이루어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셋째, 하나님의 허락을 얻어서 행동에 나서게 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의 경우에는 동족인 이스라엘 백성들의 구원을 위하여 위의 두가지 행동을 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10:1). 그렇지만 바울은 세번째 행동에 나서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이유는 그가 행동에 나서는 것을 아직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2)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언제 허락을 하실까요? 분명히 주님께서는 다메섹 도상에서 랍비 사울을 불러서 회개시키시고 다음과 같이 그에게 사도의 사명을 맡기시고 계십니다;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9:6),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사람(랍비 사울) 이름을 이방인 임금들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9:15). 복음을 전하는 순서가 언급이 되고 있습니다.

(3)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순서가 구체적으로 정해지고 있습니다; 첫째가 이방인입니다. 둘째가 권력자들입니다. 셋째가 동족들입니다. 가장 후순위가 동족들인 선민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체계적으로 전파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로마서를 저술하고 있는 시점에서는 바울이 아직 하나님의 구체적인 허락을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이 글을 유대인들의 교회에 동시에 회람시키는 정도 외에는 별다른 행동에 나서지를 못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4)   그렇지만 사도 바울은 마음이 급합니다. 동족들에게 마음 놓고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빨리 이방인 사도로서의 사명을 완수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가 로마서 15 23절에서 밝히고 있는 바와 같이 유럽 지중해의 서쪽 끝인 서바나까지 복음을 전하고 나면 기회가 주어질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서바나까지 가는 4 세계선교의 실행을 위하여 로마시의 부유한 성도들의 도움을 받고 싶은 것입니다(15:23-24). 그것이 글을 적어서 로마교회에 보내고 있는 구체적인 이유의 하나입니다.

둘째로,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10:2-3);

(1)   서신으로 복음을 설명하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특히 당장 동족들에게 찾아가서 상세하게 복음을 설명해줄 없는 사도 바울의 처지로서는 그것이 좋은 방법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차제에 자신이 깨닫고 있는 선민 유대인들의 신앙상의 가장 문제점을 여기서 말해주고자 합니다. 그로 미루어 보아 글은 로마교회의 성도들만을 위하여 기록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편지를 뵈뵈 편으로 로마교회에 보내는 한편(16:1-2) 사본을 여러 지역의 초대교회에 회람을 시키고자 계획하고 있는 것입니다.

(2)   바울은 선민 유대인들이 종교심이 대단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특히 여호와 하나님께 열심을 가지고 있는 유대인들의 신앙심은 칭찬할 만한 것입니다(10:2a). 그러나 문제는 열심이 올바른 지식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그것은 위험한 것입니다. 좋은 예가 바울 자신의 경우입니다. 바울은 점을 다음과 같이 간증하고 있습니다;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육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는 . 내가 (그리스도) 도를 박해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노니”(22:3-4).

(3)   성경말씀에 대한 올바른 지식으로 하나님의 뜻을 정확하게 깨닫지 못하게 되면 자신의 뜻으로 밀어 부치게 됩니다. 자신들의 뜻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라고 우기게 됩니다. 결과 엄청난 비극이 찾아 옵니다. 그것은 선민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생각으로 율법의 의를 한번 이루어 보겠다고 나서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고 있는 율법 생활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율법선생인 바리새인들에게 외식적인 신앙생활을 영위하고 있다고 질책을 하고 있습니다(23). 그러한 따가운 지적을 그들이 싫어합니다. 결과 예수님은 유대교지도자들에 의하여 배척을 받고 십자가로 향하게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10:3) 사도 바울이 말할 있는 가장 확실한 증거입니다.

셋째로,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10:4);

(1)   사도 바울은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하는 인정을 받을 있는 두가지 방법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얻는 것입니다. 하나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얻는 것입니다. 대목을 설명하고 있는 바울의 글이 다음과 같습니다; “모세가 기록하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의로 살리라 하였거니와”(10:5, 18:5원용),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3:20-22).

(2)   위와 같은 바울의 설명은 하나의 결론으로 수렴이 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육신을 가진 인간은 율법을 온전히 지키고 행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자신이 의인이라고 강변하더라도 율법에 비추어보면 죄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을 받고서 구원을 얻을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사함과 칭의의 은혜를 얻는 것입니다.

(3)   그러한 맥락에서 사도 바울은 율법의 역할에 대하여 세가지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 율법의 역할은 육신을 가진 인간은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킬 수가 없다고 하는 사실을 철저하게 깨닫도록 하는 것입니다. 둘째, 자신의 육신을 십자가에 못박고 거듭난 영적인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고 무덤 속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 인생의 주인으로 영접해야만 합니다. 셋째, 그와 같이 성도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갈 있도록 인도해주는 것이 율법의 사명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10:4) 주장하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사도 바울은 자신의 경험을 동족들과 함께 나누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전력이 선민들의 율법선생인 랍비이기에 참으로 동족들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많은 것입니다. 그가 어째서 산술적인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기는 유대교리를 버리고 아버지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동시에 믿는 구원론을 가지게 되었는지 점을 간증하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당장은 선민 유대인들의 근본적인 신앙상의 문제점이 무엇인지를 글에서 지적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글을 로마시의 성도들뿐만 아니리 장차 유대인 성도들도 받아보게 것임을 짐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년이 지나지 아니하여 실제로 사도 바울은 자신의 소원을 조금 이루게 됩니다. 그가 예루살렘에 들르게 되고 그곳에서 체포를 당하는 와중에서도 유대인들 앞에서 담대하게 간증설교를 하는 기회를 가지게 되기 때문입니다(15:25, 21:39-22:21).

이방인 사도로 활동하면서도 동족들의 구원을 위하여 기도하고 있는 바울의 모습을 본문에서 넉넉하게 수가 있습니다. 창조주 여호와의 종으로 살아가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는 세계가 모두 구원의 대상이며 복음의 일터입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육신을 입고 있기에 자신의 피붙이와 동족들을 먼저 구원하고 싶은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처럼 동족들의 신앙상의 문제점이 무엇인가를 지적해주고 그들의 구원을 위하여 진심으로 하나님께 깊은 기도를 드리시는 성도님들이 모두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무쪼록 그러한 은혜가 성도님들에게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