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강해 제38강(롬7:1-4)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7년 2월 7일(화)
육신을 지배하는 법의 효력의 한계에 대하여(롬7:1-4);
사도 바울이 이 글을 전해주고자 하는 대상은 로마제국의 수도인 로마시에 개척이 되어 있는 그 초대교회에 출석하고 있는 성도들입니다. 그들은 대부분이 로마인들이고 소수가 유대인들입니다. 로마교회의 구성원에 대하여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근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첫째, 로마교회의 개척은 주후 32년경 유월절에 예루살렘을 방문한 바 있는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은 모두 로마시에 살고 있는 매우 경건한 자들입니다(행2:10).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첫째, 그들은 유월절로부터 오순절이 될 때까지 무려 50일간이나 예루살렘에 체류하면서 율법학자와 랍비들로부터 히브리경전에 대하여 배우고자 하는 열심을 보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2) 둘째, 그해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말미암아 예루살렘의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도를 하고 있던 120명 가량의 성도들이 갑자기 성령님의 능력을 받게 됩니다. 그들은 성령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120개의 각각 다른 언어로 하나님의 큰일 행하심에 대하여 증거하게 됩니다(행2:8, 11). 그 가운데 라틴어로 말하고 있는 것을 로마시에서 온 유대교인들이 듣게 된 것입니다.
3) 셋째, 로마시에서 예루살렘까지 순례의 길을 온 그 경건한 유대인 교포들과 또한 유대교를 믿고 있는 로마인들이 오순절 사건으로 큰 충격을 받게 됩니다. 라틴어를 알지 못하고 있는 예루살렘의 예수님의 제자들이 갑자기 로마인들이 로마에서 사용하고 있는 그 라틴어로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의 복음이 옳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그를 부활 승천시켰다는 사실을 전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행2:1-8).
4) 넷째, 그들이 회심하고 로마시로 돌아가서 초대교회를 그곳에 세운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유대교에서 이단아로 그리고 로마황제에 대한 반역자로 몰아서 사형에 처했다고 하는 그 나사렛 예수가 사실은 이 세상을 구원하는 그리스도이며 이제는 하나님께서 그를 재림시켜서 이 세상을 심판할 것이라는 내용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내용의 복음을 듣고서 로마시로 돌아간 그들에 의하여 자생적으로 교회가 그곳에 개척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개척 당시의 로마교회에는 유대인교포들이 많이 참여하고 있습니다.
(2) 둘째, 제4대 황제인 글라우디오(재위 주후 41-54년)는 로마시에서 소란을 피우고 있는 유대인들을 모두 쫓아내어버립니다. 그에 따라 주후 51년경 고린도에서 선교를 하고 있던 사도 바울이 로마시에서 쫓겨난 경험을 가진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를 만나게 됩니다(행18:1-4). 로마교회에서는 유대인들이 사라지고 그 기간 동안에는 로마인들만이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3) 셋째, 글라우디오 황제가 주후 54년에 죽고 네로 황제가 등극을 하자 유대인 축출령이 힘을 잃어버린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유대인 교포들인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 등도 로마시의 초대교회로 되돌아오게 됩니다(롬16:3). 그리고 로마교회의 성도들을 격려하는 사도 바울의 서신이 여집사 뵈뵈에 의하여 인편으로 그곳 성도들에게 전달이 되고 있습니다(롬16:1-2). 그러므로 로마서를 받아 보게 되는 당시의 로마교회에는 다시 유대인교포들과 로마인들이 함께 예배를 드리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에 따라 사도 바울의 로마서는 로마교회에 출석하고 있는 다수의 로마인 성도들과 소수의 유대인 교포인 성도들에게 전달이 되고 있습니다. 그들 가운데 로마인 성도들은 로마의 실용적인 만민법의 내용에 대하여 익숙합니다(롬7:1). 그리고 유대인 교포인 성도들은 율법에 대하여 많이 알고 있습니다(롬7:4). 그러한 양쪽의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사도 바울이 교묘하게도 로마법을 사용하여 율법의 효력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는 것이 바로 본문의 내용입니다(롬7:1-4). 그러므로 그 내용은 다음과 같은 논리성과 설득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1) 첫째, 로마법에 따르게 되면 남편이 죽고 나면 과부가 된 아내는 마음대로 재가를 할 수가 있습니다(롬7:1-2). 그것은 이혼한 경우와 같이 완벽하게 간음이나 음란한 행위가 아닌 것입니다(롬7:3).
(2) 둘째, 유대교의 율법의 효력에 대해서도 사실은 두가지의 경우 그 적용에 한계가 발생하게 된다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①하나는 당사자가 죽는 경우입니다. ②또 하나는 개종을 하는 경우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전자의 경우에 대해서만 본문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3) 셋째, 당사자는 자신의 죽음으로 율법의 적용에서 벗어날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도들은 아직 살아 있는데 어떻게 율법의 적용에서 벗어난 것일까요? 그 원리가 바로 예수님의 대속의 죽으심이 성도들에게 영적으로 의제가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앞으로 예수님을 자신의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가겠다고 결단하는 성도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율법의 정죄로부터 해방을 주십니다(롬7:4a).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서 그 제자로서 복음사역을 계승할 수 있도록 거듭난 성도의 삶을 허용하십니다. 더구나 성령님을 보내주셔서 복음전파의 능력까지 허락하십니다(롬7:4b). 그러므로 율법의 정죄가 성도들의 복음전파의 길에 장애가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행15:19).
(4) 넷째, 사도 바울은 유대교인이 기독교인으로 개종함으로써 완전히 율법의 정신에서 떠나게 되는 것은 아니라고 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제3장에서 다음과 같이 밝힌 바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롬3:31). 요컨대, 사람의 능력과 지혜로 율법을 온전히 지키고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하나님의 눈을 속이는 외식적인 신앙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그것이 잘못이지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얻어서 율법을 온전히 지키고 구원을 얻겠다고 하는 생각이 잘못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한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그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 “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그 법이 사람이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롬7:1); 세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형제들아”(롬7:1a); 사도 바울이 로마교회의 성도들을 한 마디로 “형제들아”라고 친근하게 부르고 있습니다. 그와 같이 부르고 있다는 것은 일찍이 예수님께서 복음사역의 현장에서 자신의 말을 듣고 있는 성도들을 다음과 같이 부르신 것과 동일한 의미입니다;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하시더라”(마12:50). 사도 바울이 여기서 로마교회의 성도들을 ‘형제들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속뜻은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제국의 수도에 교회를 세우고 믿음생활을 잘 하고 있는 로마의 성도들은(롬1:8) 앞으로 아무쪼록 주님의 지상명령을 실천하기 위하여 세계선교에도 기여하기를 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롬15:24).
(2)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롬7:1b); 로마사람들은 그들의 칼과 법으로 광대한 제국을 다스리고 있습니다. 그들의 국내법이 바로 제국의 법이 되고 있는 시대입니다. 비록 로마시민들에 대해서는 특권을 인정하고 있지만(행22:25, 25:11-12) 로마의 법은 수 많은 속국과 그 백성들에 대해서는 공평하게 적용이 되고 있는 이른바 만민법입니다. 로마인들은 그들의 법이 만민을 평등하게 다루고 있으며 그 실용성이 뛰어나다고 온 세상에 자랑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로마의 검이 온 세상을 하나로 다스리고 있다고 자랑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와 같이 로마법에 대하여 자부심이 대단한 그 제국의 수도에 살고 있는 성도들에게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롬7:1b). 요컨대, 듣는 청중들에게 익숙한 것으로 복음을 쉽게 설명해주고자 하는 하나님의 지혜가 사도 바울을 통해서 흘러나오고 있는 대목이라고 하겠습니다.
(3) “너희는 그 법이 사람이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롬7:1c); 세상의 법은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에만 적용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당사자가 죽고 나면 그 법은 효력을 상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시장의 안정성을 위하여 채권과 채무관계의 일부는 그 상속자에게 승계가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일신(一身, 개인의 몸)을 구속하고 있는 법들은 모두 당사자의 죽음으로 그 효력을 상실하는 것이 맞습니다.
둘째로,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나느니라. 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녀라. 그러나 만일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롭게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지라도 음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롬7:2-3);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나느니라”(롬7:2); 일신(一身)을 구속하는 법 가운데 당사자의 죽음으로 가장 큰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이 혼인 관계입니다. 배우자가 죽고 나면 그 혼인관계는 실질적으로 깨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두 몸이 합하여 한 몸이 되고 가정을 이루도록 되어 있는데(창2:20-25) 그 하나가 더 이상 살아 있지를 않습니다. 그러므로 설혹 한쪽이 그 혼인관계를 지속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창세기 제23장을 보면,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127세로 향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창23:1-2). 아브라함은 그의 아내를 헤브론 막벨라 굴에 장사를 지냅니다(창23:19). 그리고 창세기 제25장에서는 아브라함이 후처 그두라와 함께 살면서 6아들을 낳고 있습니다(창25:1-6). 사라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과 사라의 혼인관계는 깨어져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아브라함과 후처 그두라와의 새로운 결혼생활에 대하여 자연히 그 다음에 기록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2) “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녀라. 그러나 만일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롭게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지라도 음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롬7:2-3); 죽은 남편이 살아서 과부가 되어 있는 아내를 여전히 부부관계로 묶어 놓을 수는 없습니다. 그 끈이 풀어져버린 것입니다. 그에 따라 과부가 된 아내가 다른 남자에게 재가(再嫁, 다시 시집을 가는 것)를 하더라도 그것을 혼인서약을 위반한 간음 행위라고 고발하거나 고소할 수가 없습니다. 고소할 수 있는 당사자가 없는데 어떻게 법적으로 그것을 다룰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혼인법에 따르게 되면 하등 문제가 될 것이 없으며 간음에 해당하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로마법에 대한 혼인관계를 사도 바울이 먼저 말하고 있는 의도는 그것으로 알기 쉽게 율법문제를 설명하기 위한 것입니다.
셋째로,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롬7:4); 두 가지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①하나는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성도들은 이미 육신적으로는 죽은 것으로 의제가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롬7:4a). ②또 하나는 그에 따라 거듭난 성도는 부활하신 주님을 모시고 남은 인생을 살아가야만 한다는 것입니다(롬7:4b). 조금 자세하게 살펴봅니다;
(1)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롬7:4a);
1) 살아 있는 하나님의 백성은 어떻게 해서든지 율법의 형태로 주어지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지켜보고자 발버둥을 치고 있습니다. 그렇게 아무리 애를 써보아도 그 많은 율법조항을 전부 지킬 수가 없습니다. 스스로 율법을 모두 준행함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고 구원을 얻을 수가 있다고 믿고 있는데 그렇게 할 수가 없으니 참으로 큰 일입니다.
2) 따라서 하나님 앞에서 행하고 있던 선민 유대인들의 신앙생활이 변질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 앞에서가 아니라 이웃이 보기에 율법준수를 하고 있는 것처럼 비치게 되면 그것으로 의인이며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으로 간주하자고 하는 합의가 유대교사회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신앙이 하나의 종교적인 요식행위로 변질이 된 것을 말합니다.
3) 더 이상 마음속의 하나님 경외심이 문제가 아니라 이제는 유대교지도자들이 그리고 율법선생들이 보기에 그 정도이면 율법을 지킨 것이며 의인이라고 인정해주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3년 6개월을 통하여 유대교지도자들과 바리새인들의 그러한 외식적인 율법생활에 대하여 얼마나 비판을 하고 시정을 하라고 말씀하셨는지 모릅니다(마23:2-36). 그러나 마이동풍(馬耳東風, 말해 보아야 마치 말의 귀에 그냥 스쳐 지나가고 있는 동쪽 바람처럼 아무런 효과가 없는 것)입니다.
4) 그러므로 공생애 끝에 마지막 카드를 사용하십니다. 그것은 살아서 더 이상 하나님말씀을 변질시키지 못하도록 함께 죽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대속의 십자가이며 속죄의 희생 제사입니다. 그리스도를 임의로 처형한 그 잘못으로 말미암아 이제는 자신의 능력과 힘으로 세상사람들 보기에 율법을 지킨 것으로 꾸미고 있던 선민 유대인들이 모두 정죄가 되고 있습니다. 그러한 엉터리 신앙생활을 계속하면 사망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형식적인 종교생활이 정죄를 받게 되고 그 정당성의 근거를 완전히 상실하고 만 것입니다.
5)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은혜를 바라 보아야만 합니다. 그 앞에서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처분을 기다려야만 합니다. 그와 같이 회개하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큰 은혜가 임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능력으로 율법의 의를 추구하던 시대가 끝났으며 그렇게 율법 아래에서 몸부림을 치고 있던 자신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6) 이제는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와 성령님의 능력 주심에 의지하여 신앙생활을 영위합니다. 따라서 하나님 보시기에 필요하시면 율법을 지키게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것으로 신앙생활은 충분합니다. 만약 모두 지키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시면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과 지혜를 먼저 공급해주실 것입니다. 그러한 은혜와 능력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의지와 능력으로 한번 모두 지켜보겠다고 시도하는 어리석음에서는 이제 벗어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2)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롬7:4b); 사도 바울이 가장 중요한 이야기를 여기서 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율법의 의’가 아니라 ‘믿음의 의’로 신앙생활을 하고자 하는 성도들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예수님 곧 주님에게 가서 새로운 신앙생활을 하는 방법을 배우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말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제자로 남은 인생을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더 이상 제멋대로 신앙생활을 하지 말라고 하는 뜻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처럼 생각하고 행동을 해야만 합니다. 그리하면 그리스도 예수님께 발생한 그 모든 하나님의 은혜와 은사가 복음사역을 하는 성도들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남은 인생을 성령님 안에서 부활하신 주님의 제자로 지상명령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성도들에게는 하나님의 다양한 은혜가 임하고 있습니다; ①첫째, 예수님의 교훈과 생애가 이해되기를 시작합니다. 그 속에 만민을 구원하여 하나님나라로 이끌어 함께 영생을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비밀이 들어 있습니다. ②둘째, 더 이상 율법을 자신의 힘으로 모두 지키고자 하는 분수에 넘치는 생각을 하지 않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말씀과 공생애 가운데 보여주신 그 정도만을 성령님의 능력과 지혜로 실천하도록 조치해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세상적인 율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와 창조의 능력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성령님 안에서 믿고서 신앙생활을 하며 지상명령을 실천하고 있는 자들이 바로 그리스도의 제자인 성도들이라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이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라고 로마교회의 성도들에게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자신의 지혜와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와 창조의 능력을 믿으며 전진하시는 신앙인들이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
'로마서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로마서 강해 제40강(작성자; 손진길 목사) (0) | 2021.03.26 |
---|---|
로마서 강해 제39강(작성자; 손진길 목사) (0) | 2021.03.25 |
로마서 강해 제37강(작성자; 손진길 목사) (0) | 2021.03.24 |
로마서 강해 제36강(작성자; 손진길 목사) (0) | 2021.03.24 |
로마서 강해 제35강(작성자; 손진길 목사) (0) | 2021.03.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