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로마서 강해 제39강(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1. 3. 25. 20:26

로마서 강해 39(7:5-8)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7 2 8()

 

히브리정경에서 말하고 있는 여호와의 말씀(명령), 계명, 규례와 법도, 율법(율례) 등의 의미에 대하여(22:18, 26:5, 15:25-26, 4:5, 8, 왕상9:4);

 

성경에서 사용하고 있는 용어에 대한 이해가 먼저 있어야만 하나님 말씀의 뜻을 오해하지 아니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정경에서 사용하고 있는 용어들에 대하여 주요개념과 우선순위를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하면 본문의 이해에 도움이 것입니다;

(1)   율법과 관련이 되고 있는 여러 가지 용어들이 어떠한 순서로 배열이 되고 있는지를 히브리정경에서 다음과 같이 파악할 수가 있습니다;

1)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하게 하며 모든 땅을 자손에게 주리니, 자손으로 말미암아 천하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이는 아브라함이 순종하고 명령 계명 율례 법도 지켰음이라 하시니라”(26:4-5); 첫째, 만민구원에 나서는 선민이나 성도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야 합니다. 그리하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 말씀에 대한 이해와 깨닫음을 얻어야만 합니다. 말씀을 알아야 올바르게 순종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구체적인 명령이 나타나면 엄수를 해야 합니다. 셋째, 하나님의 명령과 율법의 취지가 계명과 법도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에서 말하고 있는 십계명과 복음서에서 강조하고 있는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의 계명이 율법의 취지가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인을 섬기는 종의 법도가 율법의 취지입니다. 만약 주인의 눈을 속이는 종이 되면 율법위반이 됩니다. 선민들의 비극은 법도를 어겼기 때문입니다.

2)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행하며 계명 귀를 기울이며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15:26);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신앙생활의 처음이며 끝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마디로, 창조주의 공의의 정신을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 선민과 성도들은 하나님의 선한 청지기가 되어 모든 피조물을 돌보고 생명을 살려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들을 사랑하지 아니할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사랑은 반드시 이웃사랑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것이 십계명의 뜻입니다. 참고로, 여기서는 율례와 법도 규례라는 말로 대신 사용하고 있습니다.

3)      지금까지 말한 내용을 간추려서 용어의 우선순위를 생각해보면, 순서는 하나님의 말씀 > 공의 > 명령 > 계명 > 규례와 법도 > 율법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 지키라고 때에는 세가지 전제조건이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 보시기에 의롭고 둘째, 종의 법도를 벗어나지 말아야 하며 셋째, 하나님사랑이 이웃사랑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민 유대인들은 율법 주신 하나님의 뜻을 깊이 생각하지 아니하고 인위적으로 율법 준수만을 강조하다가 스스로 실족을 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2)   지금까지 논의한 내용에 대하여 말해주고 있는 히브리정경과 복음서의 내용에 대하여 알아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씨로 말미암아 천하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22:18); 선민이나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게 되면 만민구원의 복이 나타나게 됩니다.

2)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무를 가리키시니, 그가 물에 던지니 물이 달게 되었더라.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 율례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새”(15:25); 율법을 선민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의도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각종 규례와 율법을 지켜 행하려고 노력하다가 보면 한가지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도저히 자신들의 힘과 지혜로써는 모두 준행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갈림길에 서게 됩니다’ “모세처럼 여호와께 부르짖고 해답을 구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 앞에서가 아니라 사람들 앞에서 서로 율법을 준행한 것으로 인정을 주고 받으면 되지 않겠는가?”. 그것이 일종의 시험문제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선민 유대인들의 선택은 전자를 선택한 모세와 같지 아니하고 후자에 치우치고 있습니다. 요컨대, 하나님의 눈을 속이고자 하는 소위 외식적인 율법생활을 영위했기에 선민사회에 종교적인 타락이 찾아온 것입니다(23).

3)      내가 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규례와 법도 너희에게 가르쳤나니, 이는 너희가 들어가서 기업으로 차지할 땅에서 그대로 행하게 하려 함인즉”(4:5), “오늘 내가 너희에게 선포하는 율법 같이 규례와 법도 공의로운 나라가 어디 있느냐?”(4:8); 율법의 취지는 하나님 앞에서 규례와 법도를 지켜야만 한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해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성도들이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분수를 지키며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의지하여 피조물을 돌보고 사랑하며 생명을 살리기 위하여 희생하고 헌신할 때에 하나님의 나라가 세상에 건설이 되는 것입니다(12:30-31).

4)      네가 만일 아버지 다윗이 행함 같이 마음을 온전히 하고 바르게 하여 앞에서 행하며 내가 네게 명령 대로 온갖 일에 순종하며 법도와 율례를 지키면, 내가 아버지 다윗에게 말하기를 이스라엘의 왕위에 오를 사람이 네게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대로 이스라엘의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려니와”(왕상9:4-5); 하나님의 눈을 속이지 아니하고 하나님 앞에서 종의 법도를 지키며 명령하신 율법과 규례를 행하는 것이 신정국가의 지도자가 갖추어야만 하는 덕목입니다. 의무를 이행하지 아니하면 선민이거나 성도이거나 누구라도 신앙생활에서 실족하게 되는 것입니다.

 

죄의 정욕을 이길 있는 힘은 율법에서 비롯되고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능력에서 비롯되고 있는가?(7:5-6)

 

본문의 내용이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율법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 지니라”(7:5-6). 다음과 같이 구절을 나누어서 풀이를 해보고자 합니다;

(1)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7:5); 선민들은 자신의 육신적인 힘으로 한번 율법을 온전히 준행하겠다고 몸부림을 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불가능합니다. 그때에는 옛날 마라 물가에서의 모세처럼 하나님께 부르짖어야만 합니다(15:25). 솔직하게 종의 힘과 지혜로써는 율법의 준수와 실천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정직하게 주인이신 여호와의 도움을 구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선민들이 그렇게 하지를 않습니다;

1)      하나님의 도움이 없어도 자신의 힘으로 끝까지 밀어 부치고자 합니다. 결과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지 아니하고 사람들 보기에 사회적으로 그리고 종교적으로 율법을 실천했다고 하는 인정을 받는 것으로 율법생활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2)      그것은 종의 법도에서 벗어난 것이며 하나님 앞에서 신앙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더구나 영이신 하나님의 밝은 눈을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육신적인 종교생활과 율법준수가 바로 죄입니다.

3)      하나님을 의식하지 아니하는 종교생활이 육신적인 죄의 정욕을 억제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떠나버린 사회에서는 죄와 사망의 권세만이 만연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2)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7:6a); 만약 모세처럼 자신의 능력과 지혜로써는 광야에서 백성들이 마실 있는 생수를 구할 수가 없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인정하고서 하나님께 부르짖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1)      그때에는 영생의 하나님께서 그와 같이 정직하게 부르짖는 백성들에게 마실 물을 뿐만 아니라 장차 영생을 얻을 있는 말씀과 능력을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처럼 그렇게 행동하지를 않고 있습니다. 그들은 물이 떨어지게 되면 습관적으로 광야에서 지도자 모세와 다투고 하나님을 시험하고 있습니다(17:7).

2)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목이 곧은 백성들을 하나님 앞에 정직한 일꾼으로 변화시킬 수가 있을까요?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여러 선지자들을 그들에게 보내어 패역한 길을 돌이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소용이 없습니다.

3)      따라서 마지막 방법이 동원이 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그리스도로 세상에 보내어 주십니다. 대속의 십자가를 지게 하시고 회개하는 백성들의 죄를 사하여 주십니다. 예수님이 속죄 때문에 백성들을 정죄하지 아니하시고 의롭다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사함을 받은 성도들의 남은 인생이 중요합니다(8:11).

4)      다시는 하나님 앞에 목을 곧게 하지 말고 자신의 능력으로는 율법을 모두 지킬 수도 없으며 구원을 이룰 수도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본문에서와 같이 무엇보다도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육신이 죽고 영적으로 다시 태어난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이미 설명한대로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성도들이 율법의 정죄로부터 벗어나는 은혜를 얻은 것입니다(7:6a).

(3)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율법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 지니라”(7:6b); 이제는 영적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로서 영적인 삶을 살아가면 됩니다. 그렇게 살아갈 있도록 아버지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성도들에게 보내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대하여 모르는 것이 있으면 하나님께 기도하면 됩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진리의 성령님을 통하여 친절하게 가르쳐 주시는 은혜가 있습니다(14:26, 7:6ba).  따라서 이제는 자신의 지혜와 능력으로 율법조문을 해석하고 그것을 인위적으로 성취하기 위하여 목숨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7:6bb).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7:7-8)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뜻이 백성들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한 것이라고 진작에 모세가 다음과 같이 기록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무를 가리키시니, 그가 물에 던지니 물이 달게 되었더라.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 율례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새”(15:25). 종의 법도를 지키는지 않는지를 보고자 하신 것입니다. 율법준수를 명령하셨지만 사람의 힘과 지혜로써는 온전히 지킬 수가 없다는 사실을 하나님께서 벌써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사실을 깨닫게 되면 백성들이 어떻게 할까요? 그것이 하나님의 관심사항입니다. 그와 같은 입장에서 사도 바울이 본문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속에서 온갖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율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라”(7:7-8); 다음과 같이 부분으로 나누어서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합니다;

(1)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7:7a); 영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 성도들에게 있어서 율법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아무리 영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하더라도 성도들은 여전히 향년을 맞이할 때까지는 세상에서 육신을 입고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따라서 성도들의 삶이란 육신적인 욕심과 영적인 소망 사이에 끼어 있습니다. 따라서 율법이 아직도 중요합니다. 자신의 선택이 하나님의 뜻에 맞는지 아닌지 손쉽게 비추어볼 있는 거울이 바로 율법이기 때문입니다. 마디로, 영과 육을 모두 소유하고 있는 성도들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여전히 율법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시험대 위에 서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사도 바울이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7:7a)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2)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7:7b); 육신의 요구는 일차적으로는 생존을 도모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다음에는 남보다 많이 소유하고서 남을 그것으로 지배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재물과 권력에 대한 탐욕이 엄청납니다. 남의 것을 탐내며 그것을 빼앗아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고자 합니다. 왕왕 살기다툼과 적자생존의 사회에서는 사회발전과 효율성이라는 측면에서 그것이 마치 정당한 것처럼 합리화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뜻은 그것이 아닙니다. 피조물을 돌보고 생명을 모두 살리기 위해서는 십계명과 율법을 지키라고 하십니다. 따라서 율법에 비추어볼 어떠한 변명과 합리화를 넘어서서 남의 것을 탐내고 욕심껏 많이 가지려고 하는 마음은 절대적인 관점에서 여전히 죄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3)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속에서 온갖 탐심을 이루었나니”(7:8a);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하나님의 눈을 가리고자 합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해 놓고서 일체 손을 떼시고 자신들에게 세상경영을 모두 위탁하신 것으로 치부합니다. 그렇게 무신론적이고도 물질적인 사고방식으로 사람들이 자연과 사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러하기에 영적으로 타락한 사회에서는 죄가 번성하게 됩니다. 더구나 인간의 탐심과 욕심이 사회를 발전시키는 원동력이라고 주장하는 잘못된 사조까지 생겨나게 됩니다. 그것이 이른바 자본주의의 폐단입니다.

(4)   이는 율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라”(7:8b);

1)      만약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사회에서 이제 율법까지 버려버리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이방인들의 사회와 같아집니다. 죄를 비쳐주는 거울과 같은 율법이 없기에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게 됩니다. 그것은 절망적인 사회의 모습입니다.

2)      선민 이스라엘 자손들이 자신들의 능력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들은 편법을 사용하여 율법을 모두 지킨 것처럼 치장하기에 열심입니다.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지 아니하고 오직 사람들의 눈만 의식하는 율법생활을 영위하고자 것입니다. 그것은 마디로, 죄인의 모습입니다.

3)      결국 율법으로 말미암아 그것을 온전히 지킬 없는 자신들의 한계가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의 눈을 속이면서 자기들끼리 율법을 전부 지킨 것으로 포장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종교적인 타락이 가장 심각한 죄라는 사실이 예수님에 의하여 여지없이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23).

결론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솔직하게 자신들의 능력과 지혜의 한계를 인정하고서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 앞에 나아 오기를 원하시고 계십니다. 도와 달라고 하나님께 나아와 정직하게 종의 자리에 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는 신실한 종을 얻어서 온전히 세상의 경영을 맡길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정직한 성도들이 선한 청지기의 직분을 수행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아무쪼록 그렇게 선한 청지기로 살아가시는 성도님들이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