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로마서 강해 제34강(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1. 3. 23. 11:39

로마서 강해 34(6:6-10)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7 2 3()

 

단번에 죽으심과 단번에 살아나심에 대하여(6:6-10);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사도 바울의 영적 기독론에 대하여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바울의 기독론을 쉽게 이해하기 위하여 사도 요한의 로고스 기독론과의 차이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사실 사도 요한과 사도 바울의 신학이 기독교 신학의 기둥이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의 관점이 상당히 다릅니다;

(1)   첫째, 사도 요한은 예수님 생전의 사도입니다. 그는 3 6개월 동안 예수님과 공생애를 함께한 제자입니다. 따라서 사도 요한의 주요한 관심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첫째, 성육신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독생자의 영광을 내려 놓으시고 세상에 사람의 아들로 태어나신 것입니다. 훗날 사도 요한은 헬라의 철학과 종교를 공부한 다음에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인 로고스의 성육신이라고 보고 있습니다(1:1-14).

2)      둘째, 예수님께서는 사도 요한과 같은 보통사람들을 제자로 거느리시고 함께 공생애를 지내시면서 복음사역을 하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께서 친히 인자가 되셨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고통과 슬픔을 체험하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3)      셋째, 만민구원을 위하여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고 자신을 속죄의 제물로 바치신 것입니다.

4)      넷째, 무덤속에서 3일만에 하나님의 은혜로 부활하시고 40 후에 승천하심으로써 사도와 제자들로 하여금 사함과 부활 그리고 영생의 복음을 세상에 전하게 하신 것입니다.

5)      요컨대, 그와 같은 예수님의 교훈과 생애를 경험한 사도 요한은 그것을 마디로, “아버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요일4:7-11).

(2)   둘째, 사도 바울의 영적인 체험과 복음에 대한 관점은 사도 요한과는 다음과 같이 상당히 다릅니다;

1)      무엇보다도 사도 바울은 예수님과 공생애를 함께한 사도나 제자가 아닙니다. 그는 도리어 예수님의 복음과 부활을 믿지 아니한 반대파에 속하는 인물입니다. 그러한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을 환상 가운데 만나게 됩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영광과 형상을 가지신 것을 영적으로 보게 것입니다(9:3-6).

2)      결과 바울은 유대교에서 주장하고 있는 산술적인 하나의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게 됩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대속자로 아들을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 승천하시면서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을 복음의 전파자로 세상에 파송하십니다. 대열에 바울과 같은 사람도 불러서 이방인 사도로 사용하십니다.

3)      공생애 당시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직접 부르시고 사명을 부여하셨지만 승천하신 이후에는 성령님을 통하여 제자를 부르시고 훈련시키시며 파송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이 생전의 예수님과 공생애를 함께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했다고 한다면 사도 바울은 부활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님을 통하여 자신을 부르시고 사랑하시며 복음의 일꾼으로 사용하신다는 사실을 믿고 있습니다(1:1-2). 그것이 이른바 사도 바울의 영적 기독론 본질입니다.

4)      그와 같은 입장에서 사도 바울은 누구보다도 성령님의 능력과 역사를 확신하고 있습니다. 강력한 사도 바울의 영적인 확신이 본문에서 다음과 같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의 십자가 대속의 공로로 하나님으로부터 사함과 칭의의 은혜를 얻게 성도들은 이제 복음의 일꾼으로 남은 인생을 살아가기만 하면 이상 죄와 사망의 지배를 받지 아니하게 됩니다. 이유는 성령님의 내주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얻으신 부활과 영생이라는 하나님의 은혜가 이제는 성도님 자신에게 주어지고 있다는 믿음이 날로 확고해지기 때문입니다”(6:6-10 의역).

그와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사람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6:6-7);

(1)   사도 바울은 옛사람과 새사람을 구별하고 있습니다. 옛사람은 죄인이지만 새사람은 의인입니다. 죄를 범한 옛사람은 성도가 대속의 그리스도의 속죄의 제사를 믿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면서 이제 남은 인생을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겠다고 서원을 때에 벌써 십자가에 못이 박히고 죽음을 맞이한 것입니다.

(2)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지하여 회개한 성도들이 하나님의 사함의 은혜와 칭의의 은혜를 얻게 되면 순간 벌써 죄의 종이 의의 종으로 신분이 바뀐 것입니다. 이제 의의 종으로 살아가게 성도가 바로 새사람이며 언약 아래에 들어간 그리스도의 제자입니다.

(3)   그런데 그렇게 확실하게 자신의 신분이 죄의 종에서 의의 종으로 바뀌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성도들이 현실생활에서 크게 실감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자신의 영적인 변화는 눈에 보이지 아니하고 변함없이 육신적인 삶이 지속이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4)   어떻게 하면 영적인 삶에 더욱 철저할 수가 있을까요? 방법이 사도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성도들의 복음생활의 핵심입니다. 그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적인 내주 역사하심이 성도들의 속사람 속에 있다는 사실을 확고하게 믿는 것입니다(7:21-25, 8:1-2, 37-39, 고전6:19-20). 그리고 기도를 통하여 능력을 얻는 것입니다(6:17-20).

둘째로,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줄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다”(6:8-9); 예수님의 부활은 무덤속에서 되살아나온 베다니의 나사로의 경우와 다릅니다;

(1)   나사로의 경우에는 죽을 수밖에 없는 육신이 다시 살아나온 것입니다(11:43-44). 그러므로 향년을 맞이하게 되면 다시 죽게 됩니다. 그것은 육신적인 삶이 다시 시작된 것에 불과합니다.  반면에 예수님의 부활은 다릅니다. 그것은 육신이 다시 살아나온 것이 아니라 영생의 부활의 몸을 입고서 살아나온 것입니다. 따라서 몸으로 시공간도 초월하시고 승천까지 하시게 됩니다(20:19, 24:50-51). 영생의 부활의 몸을 지니고 있기에 이상 죄의 종으로 살지 아니해도 됩니다.

(2)   부활하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법을 온전히 즐거워할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 속사람의 뜻대로 움직이는 부활의 몸을 가지게 되었으니 이상 죄가 어찌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7:22). 영생의 기쁨이 함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부활의 미래를 성도들이 장차 누리게 것입니다.

(3)   그런데 당장은 육신을 입고 계속 살아가야 하는 성도들의 남은 인생이 문제입니다. 아직 무덤 속에 들어간 것도 아니며 예수님처럼 실제로 부활한 것도 아닙니다. 여전히 죄에 익숙한 육신을 지니고서 성도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7:23-24). 어떻게 하면 죄의 요구를 차단할 수가 있을까요? 방법에 대하여 사도 바울이 본문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줄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다”(6:8-9);

(4)   간략하게 풀이를 해봅니다; 첫째, 성도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살아났다고 하는 부활의 믿음을 지니고 있습니다. 둘째, 영생의 하나님께서 주신 영적인 부활이기 때문에 다시는 육신의 지배나 죽음이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한 부활의 믿음과 영적인 깨달음이 함께하고 있기에 성도들에게 내주하신 성령님께서 강력하게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죄와 사망의 두려움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로마서에서 사도 바울이 하고 싶은 이야기입니다.

셋째로,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6:10);

(1)   구약시대의 속죄의 제사는 효력이 1년짜리입니다. 매년 10 10 속죄일이 되면 대제사장이 모든 백성들의 죄를 속죄하기 위하여 제사를 드리고 제물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갑니다(16:13-17, 29-34). 그리고 속죄소에서 울려 나오는 사면의 신탁을 듣고서 성막의 뜰에 나아가 기다리고 있는 백성들에게 사함의 은혜를 선포하게 됩니다. 그와 같은 매년 반복이 되고 있는 제례의식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제사로 말미암아 이제는 사라지고 없습니다. 왜냐하면, 단번에 영원히 드린 속죄의 제사이기 때문입니다(6:10a, 7:27-28).

(2)   예수님의 속죄를 믿고서 자신의 죄를 회개한 성도들은 다시는 속죄의 제사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남은 인생을 주님을 모시고 복음의 일꾼으로 살아가야만 합니다. 영적인 삶에 목숨을 걸어야만 합니다(8:5-14).  육신적인 죄의 소원이 강해지면 열심히 내주하신 성령님의 역사하심을 간구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세상을 이기신 능력으로 성령님 안에서 역사를 하십니다. 결과 성도들은 예수님의 승리와 부활이 자신에게 역사하고 있음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그와 같은 은혜가 있기에 사도 바울이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8:1-2). 성령님께서 성도들에게 이제는 죄의 종이 아니라 영원히 의의 종이며 하나님의 의로운 일꾼이라고 선포하여 주시고 있습니다. 아무쪼록 은혜를 생각하면서 열심히 남은 인생을 복음의 일꾼으로 달려가시기를 바랍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