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로마서 강해 제32강(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1. 3. 22. 02:23

로마서 강해 32(5:19-21)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7 2 1()

 

사도 바울이 마치 사도 요한처럼 하나님의 복음이 무엇인지 가장 알기 쉽게 그리고 가장 단순하게 설명을 시도하다(5:19-21).

 

사도 요한이 그의 복음서 3장에서 하나님의 복음이란 무엇인지를 다음과 같이 가장 알기 쉽게 그리고 가장 단순하게 한절로 절묘하게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3:16). 그와 같은 사도 요한의 뛰어난 복음설명과 비교할 있는 사도 바울의 복음설명이 바로 본문의 내용이라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의 복음서보다는 사도 바울의 글이 훨씬 먼저입니다. 이유는 사도 요한이 4복음서를 저술하고 있는 시점을 대략 주후 90년경으로 본다고 하면 사도 바울이 로마서를 저술하고 있는 시점은 그보다 35년이나 빠른 주후 55년경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세대나 빠른 시점에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복음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참으로 알기 쉽게 설명을 잘하고 있는 것입니다; “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것같이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노릇한 것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노릇하여 우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함이라”(5:19-21).

따라서 여기서는 사도 바울의 복음설명에 내포되어 있는 내용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먼저 아래와 같이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첫째, 아담 사람의 불순종과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을 비교하는 것은 사실 상당한 무리수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독생자의 영광을 지니고 있는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아담은 어디까지나 피조물인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아담이 하나님신앙을 가진 자로 창세기 2장에 등장하고 있는 최초의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그가 하나님의 창조물인 인간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인 아담과 창조주의 영광을 지니고 있는 하나님의 아들인 독생자 그리스도를 그렇게 마주 두고서 ‘1:1’ 비교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사도 바울은 그렇게 단순하게 대조를 함으로써 복음에 대한 설명을 성도들에게 용이하게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2)   둘째, 그러한 사실을 미리 알고서 본문,“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것같이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5:19) 내용을 음미하게 되면 참으로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아담의 경우와 예수님의 경우가 어쨌든 ‘1:1’ 대칭이 되기 때문입니다. 아담 사람의 잘못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신앙에서 실족한 사람들이 모두 하나님 보시기에 죄인이 되고 사망이라고 하는 징벌을 받고 있습니다. 그와 같이 예수님 사람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이제는 하나님 앞에서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의인으로 여김을 받게 되고 사망이라고 하는 징벌에서 벗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3)   셋째,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5:20a) 사도 바울의 표현은 잘못 이해를 하게 되면 엉뚱한 결과를 얻게 됩니다. 마치 율법이 죄인을 양산해내는 부작용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이해를 하고서 율법을 부정적인 눈으로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은 그것이 아닙니다. 율법이라고 하는 거울에 비추어 보게 되자 선민들이 비로소 자신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무서운 죄인인가를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3:20). 하나님이 주신 율법은 무엇이 하나님 보시기에 의로운 것인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지킨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의롭게 된다고 하는 의미입니다. 반대로 율법을 지키지 못하게 되면 정죄를 얻게 됩니다. 따라서 선민들은 하나님의 정죄를 벗어나기 위하여 편법을 동원하고 있습니다. 유대교의 지도자들과 그들의 산헤드린 공회가 하나님의 판결을 대신하도록 조치한 것입니다. 유대교지도자들과 산헤드린 공회가 율법을 지켰으며 의인이라고 선언하게 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논리입니다. 이상 하나님의 눈이나 하나님께서 보시는 마음의 중심은 그들의 종교생활에 있어서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와 같은 외식적(外飾的, 겉으로만 치장을 하는)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범죄가 만연이 되고 말았다고 하는 측면에서,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5:20a) 하는 바울의 설명은 이해가 가능하다고 하겠습니다.

(4)   넷째,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노릇한 것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노릇하여 우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함이라”(5:20b-21) 문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두가지 가정(假定, assumption) 필요합니다;

1)      첫째, 죄가 장성하여 사망에 이르게 되는 것은 사람들의 행위의 결과이지만 풍성한 은혜를 주시고 은혜로 영생에 들어가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둘째, 정죄하고 처형하는 것은 쉽지만 죄를 사해주고 처형을 면하게 해주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일을 하나님께서 직접 담당하시는 것입니다.

2)      특히, 무엇이 하나님 앞에 죄인지도 모르고 있는 자에게 죄를 깨닫게 하고 회개시키는 것은 정말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대속의 십자가에서 있듯이 스스로 선민이며 의인이라고 여기고 있는 자들에게 그들이 죄인임을 깨닫게 하고 회개의 기회까지 제공하기 위하여서는 반드시 그리스도가 자신을 희생하여 하나님 앞에 속죄의 제사를 드려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하나님의 아들만이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을 위한 대속의 제사를 자신을 희생하여 창조주에게 드릴 수가 있습니다.

3)      그러한 하나님의 희생만이 죄인을 의인으로 만들어 거듭난 인생을 살게 하며 영생을 얻게 수가 있습니다. 이유를 다른 측면에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하나님께 죄를 범하고 제멋대로 살고 있는 죄인들은 그들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있습니다. 정죄하시고 처벌하시는 두려우신 하나님만을 경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어떻게 하면 그들에게 그들을 살리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을 전하고 회개시킬 수가 있을까요? 방법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진실로 창조주 하나님께서 회개하는 모든 죄인에게 사함의 기회를 주고 의인으로 만들어 거듭난 삶을 살게 하며 마침내 영생을 누릴 있게 해주고 싶다는 뜻을 하나님 아들의 희생을 통하여 믿게 해주는 것입니다”.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 사람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 죄인 것같이, 사람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 의인이 되리라”(5:19);

(1)   언뜻 보면, 아담도 사람이고 예수님도 사람이므로 ‘1:1’ 마주 비교하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지만 이미 위에서 설명을 바와 같이 의미와 비중에 있어서는 그것이 아닙니다. 아담의 경우는 쉬운 것이지만 예수님의 경우에는 어려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범행에 대하여 잘못을 지적하고 처벌하는 것은 쉬운 노릇이지만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치고 전혀 새로운 의인의 인생을 살아가도록 만들어주는 것은 새로운 창조만큼이나 어려운 작업이기 때문입니다.

(2)   아담의 불순종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죄인이 되고 예수님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이 의인이 된다고 하는 것은 그것이 심판의 기준이 된다고 하는 점에 있어서는 동일한 것입니다. 예를 들면, 아담과 같이 마귀의 화신인 뱀의 유혹을 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고 자신의 탐심을 이기지 못하여 선악과를 따먹게 되는 범행을 하게 되면 누구나 하나님 앞에 죄인이 된다고 하는 의미입니다(3:1-6, 5:19a). 마찬가지로,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을 위하여 희생하고 헌신하게 되면 누구라도 하나님 앞에 의인으로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5:19b).

둘째로,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5:20); 오해하기 쉬운 문장입니다. 그러므로 부문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5:20a); 율법 때문에 세상에 범죄가 많아진 것이 아닙니다;

1)      만약 하나님께서 선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율법이 그와 같은 부작용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진작에 율법을 폐기해버렸을 것입니다. 그것이 아니고 오히려 반대입니다. 율법은 거룩한 것이며(7:12) 그것을 완성하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 있는 것이라고 사도 바울이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3:31).

2)      율법이 선민들에게 주어짐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자손들은 율법을 지켜서 하나님 앞에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가고자 노력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많은 율법을 전부 지킬 수가 없습니다. 마음은 원이지만 육신적인 삶이 율법의 요구를 온전히 따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에 비추어 보자 자신들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3)      그렇게 깨달았으면 솔직하게 사실을 인정하고서 하나님 앞에 나아와서 율법을 온전히 지킬 있는 방법을 가르쳐 달라고 정직하게 간구하였으면 좋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선민들은 그렇게 하지를 아니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대담하게도 하나님의 눈을 가리고 또한 속이는 신앙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 보기에 율법을 준수하고 있는 것으로 인정을 받게 된다면 그것으로 의인이 되고 구원을 얻을 수가 있다고 하는 인본주의 종교생활에 빠져버린 것입니다. 결과 그들 모두가 하나님 보시기에 죄인이 되고 말았기에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5:20a) 사도 바울의 언급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2)   그러나 죄가 더한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5:20b);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지 아니하고 유대교지도자들의 인정과 산헤드린 공회의 권위에만 의존하여 율법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선민 유대인들이 문제입니다;

1)      하나님 앞에서 눈을 의식하면서 자신들의 율법생활을 똑바로 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에 하나님 보시기에는 율법 위반자들이며 죄인들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사람들 앞에서만 율법을 지키고 있는 것으로 비치게 되면 서로가 의인이며 선민이라고 인정해주는 편리한 종교생활을 하고 있습니다(1:32). 따라서 선민들은 유대교사회에서는 스스로 의인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결과 선민 유대인 사회는 하나님 보시기에는 율법위반자들이 모두들 의인이라고 자처하고 있는 타락한 죄인들의 사회입니다.

2)      그러한 선민 유대인들의 율법사회에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타나셔서 부디 하나님 앞에서 율법생활을 똑바로 하라고 강조하십니다. 자신의 마음중심이 탄로가 나게 유대인들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특히 외식적인 율법생활을 눈감아 주고 있던 율법선생인 바리새인들과 유대교지도자들이 예수님 배척에 앞장을 서고 있습니다. 따라서 산헤드린 공회에서 예수님을 유대교의 이단자로 몰아 사형에 해당하는 자로 정죄하고 맙니다(26:65-66). 로마총독에게 끌고가서는 로마황제에 대한 반역을 도모하였다고 거짓고발을 하여 십자가처형의 허락을 받아 냅니다(19:12-16).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처형을 하고 맙니다. 그것으로 하나님의 눈을 속이는 자신들의 유대교가 무사할 것으로 여기고 있는 한심한 유대교지도자들과 유대교인들입니다.

3)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무덤 속에서 3일만에 예수님을 부활시키심으로 유대교지도자들과 유대교인들이 모두 죄인들이라고 하는 사실을 역사적으로 증명하십니다(2:32-37, 1:16-17). 그리고 이제는 하나님의 눈을 속인 자신들의 죄를 진심으로 뉘우치고 새로운 영적인 삶을 살기를 원하는 자들에게 크나큰 은혜를 다음과 같이 베푸십니다; 첫째,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의 희생을 믿고 회개하는 자들에게 사함의 은혜를 주고 있습니다. 둘째, 칭의의 은혜를 얻게 성도에게 성령세례를 통하여 성령님의 내주 역사하심을 허락하고 있습니다(24:49, 14:16-17, 2:1-4). 셋째,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면서 세상에 부활과 영생의 복음을 전하게 하십니다(28:18-20, 24:44-49, 1:8, 2:1-4).

셋째로,이는 사망 에서 노릇한 것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노릇하여 우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함이라”(5:21); 부문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이는 사망 에서 노릇한 것같이”(5:21a); 하나님 앞에서 신앙생활을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떠나서 제멋대로 종교생활을 하거나 유물론적인 사고방식으로 이기적으로 살아가고 있는 자들에게는 죄와 사망의 법칙이 지배를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욕심대로 살아가도록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려두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1:21-24),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1:28).

(2)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노릇하여 우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함이라”(5:21b);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희생에 대하여 그것이 자신을 위한 속죄의 제사라는 사실을 믿고서 회개하는 자들에게는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가 다음과 같이 임하고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의 속죄의 제사로 말미암아 회개하는 자들에게 사함과 칭의의 은혜가 주어지고 있습니다. 둘째, 죄로 말미암은 사망의 권세가 깨어지고 성도가 영생의 구원을 누릴 있도록 생명의 성령님의 내주 역사하심이 시작이 되고 있습니다. 셋째, 남은 인생을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역을 감당하게 됩니다. 일을 마친 후에는 하나님나라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영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요한복음 3 16절이 하나님의 복음과 그리스도의 사역을 가장 설명하고 있는 문장이라고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보다 35 전에 벌써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의 복음사역으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대하여 성도들이 이해할 있도록 본문의 말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특히 본문은 죄인인 우리들이 어떻게 영생의 구원을 얻게 되었는지를 아담의 불순종과 예수님의 순종의 인생을 대조하면서 알기 쉽게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3구절은 성도님들이 매일같이 암송할 만한 가치가 있는 기록입니다; “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것같이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노릇한 것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노릇하여 우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함이라”(5:19-21).

아무쪼록 본문의 말씀을 묵상하시면서 크신 하나님의 은혜를 새삼 깨달으시는 은혜가 성도님들에게 풍성하게 있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