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로마서 강해 제29강(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1. 3. 20. 16:31

로마서 강해 29(5:6-11)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7 1 29(주일)

 

성도들의 믿음을 견고하게 만들어 주고 있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과 부활의 은혜에 대하여(5:6-11);

 

본문에 앞서 사도 바울은 성도들이 환난 중에도 즐거워할 있는 이유에 대하여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환난을 통과할 때에 세가지 은혜가 주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구체적으로, 인내와 연단과 소망입니다. 한번 알기 쉽게 다시 정리를 해봅니다;

(1)   첫째, 환난을 견디고 이길 있도록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성령님을 통하여 환난의 때에 성도들에게 주어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환난을 당할 때에 성도들의 기도가 더욱 간절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환난이 없다면 성도들이 구태여 그러한 인내라고 하는 신앙의 성숙을 절실하게 이루고자 노력하지를 아니할 것입니다.

(2)   둘째, 철은 연단을 통하여 더욱 단단해 집니다. 그러므로 강한 쇠붙이를 만들자면 모루와 망치질 그리고 담금질이라고 하는 반복되는 연단의 과정을 거쳐야만 합니다. 그것은 마치 수많은 시험을 치르고 만한 인재가 탄생하는 것과 같습니다. 견고한 믿음은 그러한 연단의 과정을 통과한 결과물입니다.

(3)   셋째, 환난 가운데 천국을 소망하게 됩니다. 세상이 그토록 살기가 좋고 편하다면 누가 천국에 들어가기를 소망하겠습니까? 그것은 마치 자신의 죽을 병이 낫고 앗수르 제국의 군대도 물러갔기에 히스기야 왕이 태평성대를 누리고 있는 시기와 같습니다. 히스기야 왕은 이제 천하에 겁날 것이 없습니다. 15 수명연장도 보장을 받았으며 주변에는 감히 예루살렘과 유다 왕국을 넘볼 있는 적국이 없기 때문입니다(왕하19:32-37, 20:5-7). 그래서 현세적인 안일함과 안락에 빠져버린 히스기야 왕이 하나님신앙을 상실하고 맙니다. 사후에 유다 왕국이 망할 것이라고 하는 이사야의 예언에도 끄떡하지를 아니하고 있습니다. 살아 생전에 세상의 복을 누리고 있는데 죽은 다음의 일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39:8). 그것이 인생 가운데 환난이 사라지자 그만 교만해져버린  히스기야 왕의 불신앙의 모습입니다.

이제 본문에 들어오게 되면 사도 바울은 로마시의 성도들에게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새삼 깨닫게 되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하여 다시 한번 말해주고 있습니다. 요지를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첫째,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성경에 약속하신 대로 그리스도를 보내어 주시고 대속의 제물로 희생하신 것입니다(5:6-8).

(2)   둘째, 여호와께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그리스도의 피의 속죄를 믿는 자들에게 칭의와 구원의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5:9).

(3)   셋째,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함께 죽고 이제는 그리스도의 부활로 함께 살아난 인생입니다(6:4-5). 그러므로 남은 인생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화목하게 살아가고자 합니다(5:10-11).

하나님과 화목하게 살아간다는 그것이 바로 자신의 뜻이 아니라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을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삶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정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을 실천하는 삶입니다. 그와 같은 사도 바울의 설명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우리가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있거니와,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5:6-8); 다음과 같이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우리가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5:6);

1)      하나님께서는 신실하게 언약을 이행하십니다. 피조물에 불과한 우리 인간과의 언약이지만 그것을 무시하거나 소홀하게 여기지 아니하시고 아들을 성경에서 약속한 바와 같이 우리들의 구원을 위하여 죄짐을 지고 가는 어린양 그리스도로 보내어 주신 것입니다(53:4-9, 1:29, 5:6).

2)      사실 우리 인간들은 하나님께 약속을 지키라고 강제할 있는 힘과 능력이 전혀 없습니다. 창조주에 비해서 한갓 피조물인 인간들은 연약하기 그지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하나님께서 귀히 보실 만한 정도의 경건함이나 가치가 있는 존재도 아닌 것입니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힘과 지혜로써는 도저히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을 얻을 수가 없다고 고백하고 있는 인간들의 절규에 대하여 여호와께서는 귀를 기울이시고 구원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7:21-25). 그것은 믿음의 조상과 맺으신 하나님의 언약을 성경말씀 가운데서 찾아보고 그것을 믿으며 간절하게 기도한 결과입니다(2:23-25).

4)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언약을 믿고서 간절히 구하는 자들에게는 기약한 때가 되면 응답이 긍정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5:6).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2)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있거니와,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5:7-8a);

1)      세상에서는 의로운 자를 칭찬합니다. 그렇지만 막상 의로운 자를 구하기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라고 하면 별로 호응이 없습니다. 이유는 의로운 자가 극소수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의롭지가 않기 때문입니다.

2)      의인이란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보시는 자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의인의 인생에 동행하시고 있습니다. 창세기 5장을 보면, 하나님과 동행하는 인생을 살고 있는 에녹에게 휴거의 은혜가 있게 됩니다(5:24).

3)      선인(善人)이란 창조주 하나님의 생명살림의 뜻을 실천하고 있는 자입니다. 이웃의 생명을 살리기 위하여 자신의 희생을 감수하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입게 사람은 선인이 어려움에 처하게 되면 그를 구원하고자 헌신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배은망덕하게도 은혜를 잊어버리고 살아가게 됩니다. 세상이란 그렇게 배은망덕한 사회입니다. 반면에 하나님께서는 선한 사마리아인과 같은 사람을 칭찬하십니다(10:33-37).

4)      하나님께서는 의인과 선인을 귀하게 보십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의인과 선인을 구원하시고자 하시며 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보내어 주시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원이 필요가 없으며 의원은 병자에게 필요합니다(9:12).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죄인을 구원하기 위하여 세상에 보내심을 받고 있습니다(9:13).

5)      의인도 아니고 선인도 못되는 죄인인 나같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성경에 언약하신 그대로 구원자를 보내어 주셨다고 하는 그것이 은혜입니다. 은혜를 얻은 성도들은 이상 죄인의 모습으로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결코 히스기야 왕처럼 현세구복적인 신앙인의 모습으로 살아가서는 안되는 것입니다(39:8).

(3)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5:8b); 하나님의 사랑을 인간적으로 쉽게 이해하기 위하여 흔히 부모님의 자식 사랑이라고 하는 내리사랑에 비교를 하고 있습니다;

1)      사실 인간세상에서 아버지 하나님의 인간사랑을 이해할 있는 가장 비근한 예가 부모님의 자식 사랑일 것입니다. 손가락 깨물어서 아프지 아니한 손가락이 없다고 합니다. 특히 못난 손가락이 아프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부모님의 입장에서는 연약하고 죄인인 자식에게 마음이 가고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모습과 닮아 있습니다.

2)      하지만 하나의 차이점이 있습니다. 사람들의 사랑은 아무리 부모님의 사랑이라고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이기적인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므로 피조물 모두의 처지를 살피고 돌보며 생명을 살리고자 하는 소위 공의의 정신에 입각한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부모님의 사람이 자식에게 한정된 이기적인 사랑이라고 한다면 창조주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피조물을 돌보고 살리고자 하시는 넓은 사랑입니다. 그것이 소위 사도 요한이 증거하고 있는 그리스도를 통한 온세상의 구원입니다(3:16-17). 그리고 세례 요한은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1:29).

3)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고서 성도들이 이웃을 몸과 같이 사랑하고 구원하고자 나서는 경우에는(12:30-31) 본능적인 이기적인 생각을 뛰어넘을 있도록 달라고 먼저 하나님께 간구해야만 합니다. 요컨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창조물인 이웃을 돌보고 생명을 살릴 있도록 만들어 달라고 항상 기도를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도의 기도입니다(6:17-19).

둘째로,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이니라”(5:9-10); 다음과 같이 부문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5:9); 사도 바울이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구원에는 두가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피를 믿고서 회개를 하는 자들에게 주어지고 있는 사함의 은혜입니다. 그것은 성도들이 회개함으로써 벌써 그리스도의 대속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받고 있는 죄사함과 칭의의 은혜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 받았으니”(5:9a). 하나는 성도가 남은 자신의 인생을 그리스도의 제자답게 앞으로 살아감으로써 하나님의 진노를 면하고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5:9b). 그러므로 성화를 이루는 것과 예수님의 지상명령을 수행하는 것은 성도들이 떳떳하게 하나님나라에 들어가서 영생의 구원을 누리는데 있어서 선택의 문제가 아니고 필수적인 것입니다.

(2)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5:10a); 위의 명제가 중요하므로 사도 바울이 부연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대속의 십자가 희생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자들에게 사함의 은혜와 칭의의 은혜가 주어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5:10a). 하나님께서는 죄를 회개하지 아니하는 자와 화목할 수가 없습니다. 성도가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용서를 구했기에 그것을 의롭게 여기시고 화해하시는 것입니다.

(3)   화목하게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이니라”(5:10b);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겨우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으므로 다시는 불화해서는 안됩니다. ,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자신의 뜻과 고집대로 세상을 살아가서는 안됩니다. 그렇게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면서 남은 인생을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게 되면 예수님께서 무덤 속에서 얻으신 부활을 성도들도 장차 얻게 것입니다(5:10b).

셋째로,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5:11);

(1)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십자가 희생을 믿고서 자신의 죄를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자들에게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사함의 은혜와 더불어 칭의의 은혜까지 주십니다. 특별히 칭의의 은혜를 주시는 이유는 이상 죄인으로서 세상의 종이 되어 살지를 말고 이제부터는 의로운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만민구원의 뜻을 성취하라는 의미입니다.

(2)   그렇지만 성도가 칭의의 은혜를 얻었다고 하여 금방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인생을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이유는 사도 바울의 설명과 같이 속사람으로는 새로운 영적인 삶을 살고 싶고 하나님 보시기에 의로운 생명살림의 삶을 살고 싶지만 오랜 세월 죄인들의 세상과 이기적인 삶에 길들어지고 익숙해진 육신은 그러하지가 않기 때문입니다(7:22-24).

(3)   더구나 갑자기 거룩하게 변해버린 친구를 세상의 친구들이 별로 반가워하지를 않습니다. 그들은 함께 세상의 연락을 지내며 호형호제하던 시절이 좋다고 말하면서 옛날처럼 그렇게 어울려서 세상을 살아가자고 유혹하고 있습니다. 요컨대 세상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제자로 그리고 여호와의 의로운 종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성도들을 이상 옛날 친구로서 반기지를 않는 것입니다.  

(4)   그러므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성도들이 이제는 거꾸로 세상에서 거부를 받으며 환난과 시험을 당하게 됩니다;

1)      그러한 곤란한 처지에 빠지게 성도들을 향하여 사도 바울이 격려의 말씀을 주고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5:11).

2)      사도 바울의 말은 부활 승천하신 주님으로 말미암아 이제 성도들은 하나님 안에서 남은 인생을 살아가게 되었으니 그것이 즐거운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게 되었다는 말은 환언하자면, 성령님께서 성도들의 속사람 속에 들어오셔서 함께 인생을 살아가게 되었으니 그것이 기쁘고 즐거운 일이라는 의미입니다(5:11).

3)      참고로, 그것이 기쁘면서도 성도의 감사의 조건이 된다는 사실을 사도 바울이 7 끝머리에서 다음과 같이 보충설명하고 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7:24-25).

결론적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우주 바깥에 보이지 아니하는 천국에 높이 보좌를 가지시고 그곳에 좌정하여 계십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4장에서 하나님도 분이시니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4:6a)라고 적고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보이지 아니하는 천국에 계시는 아버지 하나님 안에서 성도들이 즐거워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5:11). 말의 뜻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를 구속자로 영접한 성도들이 모두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성령님의 임재와 내주하심을 얻게 되었다는 것입니다(1:12-13, 8:15).

그와 같은 놀라운 성도들의 새로운 신분의 변화는 사실 부활 승천하신 주님께서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또다른 보혜사 성령님을 성도들의 심령 속에 보내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발생한 것입니다(14:49, 14:16-17, 1:8, 2:1-4). 그러므로 성도들은 세상에서 비록 환난과 시험을 당할지라도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당당하게 영적인 승리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깊이 생각해보면, 성도들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세상을 이기고 복음을 전하게 되었으니(4:6abc) 인생을 기뻐하면서 하나님께 감사하지 아니할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7:25). 아무쪼록 은혜를 크게 누리시면서 끝까지 거룩한 성도의 삶을 살아가시는 여러분들이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