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로마서 강해 제25강(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1. 3. 19. 01:58

로마서 강해 25(4:17-22)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7 1 25()

 

아브라함의 믿음의 실체와 믿음을 상속하게 되는 후손들에 대하여(4:17-22);

 

사도 바울이 제국의 수도인 로마시에 살고 있는 성도들에게 자신이 깨달은 복음의 근원과 관련하여 중요한 내용 하나를 알려주고자 열심입니다. 그것이 본문에 적혀 있는 아브라함의 믿음의 본질에 대한 사도 바울의 심득(心得, 진리를 깨달아 마음속에 담아둔 )입니다. 내용을 먼저 정리를 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사도 바울은 아브라함의 믿음의 특징을 마디로, “아브라함이 바랄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4:18a)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말할 있는 근거가 창세기의 내용을 참조하면 다음과 같이 가지 경우입니다; 첫째, 처음으로 하나님의 언약을 믿은 둘째, 10년후 창조주의 능력을 믿은 셋째, 하나님께서 그의 이름을 바꾸어 주신 넷째, 모리아 산에서 여호와 이레를 깨달은 등입니다. 그러므로 가지 경우에 아브라함이 얻은 믿음과 깨달음이 무엇인지 사도 바울의 설명을 참조하여 이제부터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2)   첫째, 아브람은 75세에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의 언약을 믿고서 아버지 데라가 머물고 있는 하란 땅을 떠나 가나안으로 남하를 하고 있습니다(12:1-5). 하나님의 언약 가운데 첫번째가 자손의 번성입니다(12:2). 당시 아브람은 자식이 없습니다. 나이도 75세로 노년이며 아내 사래도 65세이고 더구나 불임입니다(11:30). 도저히 자식이 생길 가능성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와의 약속을 믿고서 아버지 데라의 엄청난 재산에 대한 상속권까지 포기하고서 가나안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요컨대, 아브람은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을 철석같이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의 믿음의 첫번째 특징입니다.

(3)   둘째, 아브람은 85세쯤에 한가지 깨달음을 얻고 있습니다(15:1-6, 16:3).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도 중요하지만 정작 그보다 중요한 것은 약속의 당사자가 바로 창조주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언약이 땅에서 실현이 되는지 여부는 땅에 살고 있는 피조물인 사람의 지혜와 능력으로 판단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약속을 주신 여호와 하나님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을 믿을 때에 비로소 확실하게 언약이 성취가 것이라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람의 두번째의 믿음의 특징은 피조물이나 피조세계를 믿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창조주 하나님을 발견하고 능력을 믿는 것입니다. 창조주를 믿기 때문에 아브람은 하나님의 언약이 반드시 실현이 된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아브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하는 인정을 받고 있습니다;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15:6).

(4)   셋째, 인간의 능력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을 믿고 살아가는 아브람에게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넘치는 축복으로 함께 하십니다;

1)      86세의 노인 아브람에게 서장자 이스마엘만 주는데 그친 것이 아니라 아내 사래의 몸을 치유하여 100세의 아브라함에게 약속의 아들 이삭을 주십니다. 그리고 137세에 조강지처 사라를 여의게 되는 아브라함이 175세로 향년을 맞이하게 때까지 후처 그두라를 통하여 6아들을 얻게 합니다(25:1-7). 그와 같은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가 있을 것임을 인생 가운데 경험하게 되는데 그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도저히 상상도 없는 후세의 축복이 아브라함에게 있게 것이라고 하십니다; “아브람의 자손이 여러 민족을 이루고 넓은 땅을 차지하며 많은 왕들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17:6-7).

2)      그리고 믿음의 조상으로 아브람을 세워 주십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아브람 이름을 아예 열국의 아버지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 새로운 이름 아브라함으로 바꾸어 주시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아브람 이름이 여호와 하나님에 의하여 아브라함으로 바꿔진 대목을 주시하고 있습니다(17:5, 4:17a). 이유는 두가지입니다; 첫째, 하나님에 의하여 이름이 달라졌다는 것은 운명이 달라졌다는 사실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는 땅에 속한 아브람으로 살았지만 이제부터는 하늘에 속한 믿음의 의인 아브라함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3)      둘째, 사도 바울 역시 그와 같은 경험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랍비 사울로 살아가고 있던 그를 다메섹 도상에서 환상 가운데 불러 주신 분이 바로 부활 승천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주님으로 말미암아 그가 새로운 운명 이방인 사도인 바울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브람의 믿음의 세번째 특징이며 개인적으로 사도 바울이 크게 공감하고 있는 대목입니다. 

(5)   넷째, 117세쯤 되었을 아브라함은 모리아 산에서 여호와 이레 축복을 경험하고 있습니다(22:1-14). 과연 영생의 하나님을 아브라함이 믿고 있는지(21:33) 시험하기 위하여 여호와께서는 그에게 약속의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으로 데리고 가서 번제물로 바치라고 명령하십니다(22:1-2). 참으로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아니하는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피조물을 돌보시고 생명을 모두 살리고자 하시는 공의의 하나님께서 어떻게 귀한 약속의 아들을 죽여서 번제물로 바치라고 하시는 것일까요? 아브라함의 입장에서는 심각하게 질문을 해야하며, 이삭의 처지에서는 크게 반발할 수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묵묵이 아브라함 부자는 모리아 산으로 가서 번제의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막상 번제물을 토막을 내기 위하여 이삭을 결박해 놓고 칼로 목을 내리치려고 때에 하나님의 본심이 드러나고 있습니다(22:9-14). 인신제사를 드리지 말고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제물 수풀에 걸려 있는 숫양으로 대신하여 번제를 드리라는 것입니다(22:13). 그것이 여호와 이레 축복입니다(22:14).

(6)   본문과 관련하여, 그때 모리아 산에서 얻은 아브라함의 믿음의 깨달음은 사도 바울의 설명을 참조하면 크게 두가지입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는 죽은 자를 살리신다는 것입니다(4:17b, 11:19). 하나는 하나님께서는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신다는 것입니다(4:17c);

1)      사실 하란 땅을 떠나올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주시는 4가지 축복의 약속은 세상사람이라면 누구나 얻고 싶어하는 4가지 복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자손의 번성, 자기 이름의 창대함, 하나님의 강력하신 보호하심, 세상에 복을 나누어 주는 인생”(12:2-3) 등은 세상에서 얻을 있는 최고의 것이며 누구나 꿈꾸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얻고자 아브람이 아버지 데라의 재산을 포기하고 하나님 명령을 따라 가나안 땅으로 남하를 것이 사실입니다.

2)      하지만 아브람은 이상의 것을 깨닫고 믿게 됩니다. 그에게 약속을 해주고 있는 하나님의 축복은 과연 무엇일까요? 하나는 사람의 능력과 지혜로써는 가지를 모두 얻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주의 능력을 믿을 때에 비로소 언약이 성취가 되는 것을 수가 있다는 깨달음입니다. 하나는 유한한 인생이 땅에서 얻을 있는 그러한 것보다 영원하고 것이 있다는 깨달음입니다. 그것이 영생하시는 하나님을 믿고서 부활을 얻는 것입니다. 그것을 본문에서는 사도 바울이 하나님께서는 죽은 자를 살리신다는 ”(4:17b)으로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3)      사도 바울이 아브라함의 믿음과 깨달음을 설명하면서 로마시의 성도들에게 정도의 이야기만을 전해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설명이 나중에 나타나게 됩니다. 그것은 첫째, 부활의 신앙이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세상에서 성취가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 ‘여호와 이레 제물로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께서 대속의 십자가 제사를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는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신다”(4:17c) 역사가 발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표현 그대로 세상 만민 가운데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의 속죄의 제사를 믿고서 이제부터는 하나님으로부터 사함을 받아 남은 인생을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고자 하는 성도들이 교회를 이루고 세상 끝까지 선교에 나서고 있는 것입니다.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기록된 ,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시니라”(4:17);

(1)   사도 바울은 아브람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4:17a). 그렇지만 현실적으로는 겨우 하나님의 능력으로 86세에 하갈에게서 아들 이스마엘을 얻은 아브람입니다(16:16). 그리고 99세가 때까지 또다른 자식이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이 장차 많은 민족의 조상이 것이라고 예언의 말씀을 주시면서(17:4, 6) 아예 그의 이름을 열국의 아버지라는 의미로 아브라함이라고 부르십니다(17:5).

(2)   그렇다면,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는 자신의 미래를 아브라함이 믿게 되는 근거가 무엇일까요? 사도 바울은 비유적으로 다음과 같이 본문에서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가 믿은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시니라”(4:17b).

1)      여기서 죽은 자를 살린다는 것은(4:17ba) 아브람이 이미 약간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85세의 노인 아브람은 자녀 생산의 능력이 거의 없어지고 있습니다. 남자구실을 있는 몸이 아니라고 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고목나무에 꽃이 피듯이 젊은 여종 하갈을 씨받이 첩으로 맞이하여 아들 이스마엘을 다음해에 얻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람은 자신의 팔자에는 아들이 전혀 없는 알았는데 하나님께서는 창조주의 능력으로 자신의 몸을 회춘시켜서 아들을 만들어 주시고 계십니다.

2)      그렇다면 여러 민족을 이룰 있는 능력이 자신에게는 없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신다면 어떠한 방법을 사용하시더라도 반드시 그렇게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시니라”(4:17bb) 능력이 발휘가 것으로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믿음을 지니게 조상의 이름이 아브라함입니다. 물론 그러한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한 사도 바울의 설명은 나중에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의 의미에 이르고 나아가서 하나님의 복음의 세상전파에 따라 여러 민족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제자인 성도들이 많이 나타나게 된다는 것으로 이어지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둘째로,아브라함이 바랄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4:18); 아브람은 자신의 이름을 많은 민족의 아버지라고 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아브라함으로 바꾸어 주시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습니다. 비록 아직은 아들이 이스마엘 하나뿐이고 자신이 늙은 고목과 같은 몸이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창조의 능력으로 새로운 미래를 자신에게 만들어 주실 믿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상태와 독자 이스마엘을 쳐다보면 분명히 믿을 수가 없으며 감히 꿈꿀 수도 없는 미래입니다. 그렇게 바랄 없는 미래에 대하여 바라보고 믿을 있는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것입니다. 창조의 능력이 재창조의 능력으로 터져 나오는 것을 감히 누가 막아 수가 있을 것입니까? 아브라함은 스스로 믿음이 없어서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자신의 옷깃을 여미고 있을 뿐입니다.

셋째로,그가 백세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4:19); 사도 바울이 지적하고 있습니다. 100세나 되어 마치 죽은 것과 같은 자신의 상태를 내려다보게 되면 아브라함은 분명히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4:19a). 그리고 평생 불임여성으로 살아온 아내 사래입니다.  이제 90세가 되어가고 있는 아내 사래의 몸은 죽은 것과 같으며 여자구실을 못한 지가 참으로 오래입니다(4:19b). 그와 같은 현실을 생각하게 되면 믿음은 약해지고 사라질 뿐입니다. 마디로, 세상과 자신의 현실을 직시하게 되면 아무 것도 바랄 수가 없으며 절망 뿐입니다. 바로 그와 같은 절망의 현장에 여호와 하나님의 놀라운 예언의 말씀이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늘에 계시는 창조주를 쳐다보고서 미래의 재창조를 믿으라고 하십니다. 말씀에 대하여 예스’(yes)라고 답변한 인물이 바로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이라고 사도 바울이 강조하고 있습니다(4:19c).

넷째로,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4:20-22); 세상을 창조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재창조의 의도와 능력을 믿지 못하면 하나님의 약속은 마치 휴지조각과 같습니다. 공산주의자에게 있어서는 인민을 속이고 있는 아편과 같으며 유물론자에게 있어서는 헛소리와 같은 공상소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창세기를 연구한 바에 의하면 아브라함에게는 하나님의 약속이란 반드시 성취가 되는 것이라고 하는 확고한 믿음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세가지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1)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4:20);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아니할 있는 방법, 그리고 믿음이 견고해질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은연중에 사도 바울이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하나님 영광 돌리면 된다 것입니다(4:20).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자 하는 자는 눈으로 먼저 하나님을 발견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자신은 하나님의 종이라고 하는 사실을 철저하게 자각해야만 합니다. 그때부터 자신의 뜻이 아니라 주인의 뜻을 실천하고자 전심전력을 다하게 됩니다. 결과 성취의 영광을 아버지 하나님께 올려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2)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4:21); 하나님의 언약은 사람의 힘과 지혜로 성취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사람들 사이의 계약이라면 양쪽 당사자인 사람들이 서로 자신들의 선의와 능력으로 이행을 하게 되면 열매를 얻을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축복의 언약은 성격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상대로 하여 세우신 언약이기 때문에 일반 사람들의 계약과 다릅니다. 언약의 이행을 위해서는 두가지가 기본적으로 필요합니다;

1)      첫째, 언약의 당사자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창조의 능력으로 아브라함에게 주신 축복을 언약의 내용대로 실현해 나가셔야만 합니다.

2)      둘째, 아브라함이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을 철저하게 믿고 의지해야만 합니다. 자신의 상태나 주위의 여건을 살펴보면 도저히 실현가능성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자리에 수가 없습니다. 그에 따라 눈을 하늘에 계신 하나님에게 두어야만 합니다.

3)      요컨대, 마치 주기도문처럼 하나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지는 그것이 아브라함의 기도의 제목이 때에 놀라운 언약의 성취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6:10).

(3)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4:22);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율법의 의와 하나님의 의를 대비하고 있습니다;

1)      선민 유대인들은 율법의 의를 이루어 구원을 얻고자 합니다(10:5). 하지만 율법을 전부 지킨다고 하는 것은 사람의 지혜와 능력으로써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편법을 동원합니다; “하나님의 눈이 아니라 이웃의 눈에 율법을 지키는 것처럼 보이게 되면 그것으로 율법의 의를 이루게 된다는 것입니다”.

2)      그렇게 하나님의 눈을 가리고 눈속임으로 율법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자들이 바로 선민 유대인들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마음 중심을 보시고 눈이 밝으신 하나님께서는 결코 속지도 아니하시고 유대인들을 의롭다고 평가하지도 아니 하십니다. 결과 율법사회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3)      율법이라고 하는 것이 기본적으로는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언약과 비슷합니다. 아브라함의 경우에도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써는 언약을 성취할 수가 없다고 하는 사실을 진작에 깨닫고 있습니다. 그에 따라 아브라함은 선민 유대인들과는 달리 자신에게 언약을 주신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을 믿고 성취를 의지하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결코 하나님의 눈을 속이는 신앙생활을 선택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언약이 성취가 것이므로 자신은 여호와의 종으로 일평생 살아가면서 언약이 성취가 되는 미래를 맞이하고자 합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것이 선민 유대인들과는 확연하게 다른 아브라함의 믿음입니다.

4)      아브라함의 믿음에 하나님께서는 언약의 성취로 화답을 하십니다. 특히 창조주를 믿고 의지하는 아브라함을 의롭다고 인정하십니다;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4:22). 그리고 믿음의 조상으로 삼으십니다. 그에 따라 아브라함의 믿음이 율법사회의 잘못된 신앙생활을 바로 잡을 있는 방법이 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방인 성도들도 본받아야 하는 믿음 생활입니다. 그와 같은 맥락에서, 선민 유대인 뿐만 아니라 이방인까지 모두 구원할 있는 하나님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3:21).

5)      구체적으로, 아브라함이 믿고 있는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이 만민을 구원할 있는 지혜로 발휘가 되고 있습니다;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을 원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고자 세상에 하나님의 아들이 그리스도로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이제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을 동시에 믿어야만 합니다. 그리하면 하나님의 의를 이루어 그리스도의 부활과 하나님나라의 영생구원에 참여할 수가 있게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현실이 암담할수록 사람들은 희망찬 미래를 꿈꾸게 됩니다. 그러나 미래가 오늘과 같이 절망적인 것이 아니라고 하는 보장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궁극적으로 무엇을 믿고 살아가야만 하는 것일까요? 점에 대하여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에게서 다음과 같은 믿음의 특징을 발견할 수가 있다고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밝히고 있습니다;

(1)   처음에는 아브람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약속하시는 축복의 미래를 얻고자 달려가고 있습니다(12:1-5). 여호와의 언약이므로 충분히 믿을 만한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방 가나안에서 10 세월을 하나님의 선지자로 살아가고 있지만 언약이 이루어지고 있지를 않습니다. 단지 2차례나 축복의 언약이 반드시 성취가 것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확인이 있었을 뿐입니다(13:14-18, 15:1-7).

(2)   믿음이 흔들리고 있는 아브람에게 하나님께서는 하늘의 별을 올려다 보라고 하십니다. (, 없음) 자식이지만 장차 자손의 번성이 별과 같이 많을 것이라고 강조하십니다. 순간 아브람은 도저히 불가능해 보이는 약속을 믿게 됩니다. 이유는 그가 이상 사람의 능력과 현실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약속을 주신 분이 창조의 능력을 가지신 여호와 하나님이시기에 창조주를 믿겠다고 마음을 고쳐 먹었기 때문입니다. 결과 하갈에게서 이스마엘이 태어납니다.

(3)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제 여러 민족이 아브람의 후손으로 발생할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아브람의 이름을 아예 여러 민족의 아버지라는 뜻으로 아브라함으로 바꾸어 주십니다(17:4-6). 순간 아브라함은 자신의 미래도 그리고 찬란한 약속의 성취도 전부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의 섭리에 맡겨버리게 됩니다.

(4)   결국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믿음이란 영생의 하나님을 믿고 자신의 미래도 후손들의 미래도 그리고 언약의 성취도 전부 맡겨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평생 여호와의 종으로서 신실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자신의 소원과 뜻의 성취보다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창조하시는 새로운 세상을 소망하면서 뜻을 받들어 평생 쓰임 받기를 원하는 그것이 아브라함의 신앙의 본질입니다.

그리하면, 성도들도 사도 바울의 설명과 같이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시니라”(4:17) 하는 신앙고백이 가능해집니다. 부활의 하나님,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성도들에게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사함의 은혜와 부활의 은혜가 주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역사에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참여하게 되는 놀라운 미래가 펼쳐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쪼록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자신의 뜻을 맞추어 나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평생 제자로 살아가심으로써 주님처럼 부활과 영생을 경험하시는 귀한 성도님들이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