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로마서 강해 제23강(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1. 3. 17. 13:22

로마서 강해 23(4:6-12)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7 1 23()

 

영생하시는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을 믿고서 언약 안에 머물고 있는 아브라함의 믿음이 중요한 이유가 무엇인가?(4:6-12)

 

사도 바울은 제국의 수도인 로마시에 살고 있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에 대하여 설명을 해주기 위하여 로마서를 저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다루고 있는 이슈를 (, chapter)별로 구분하여 보면 다음과 같은 요지로 되어 있습니다;

(1)   1장에서 사도 바울은 그가 어째서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고 싶어하는지 이유를 적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창조주 되심을 알면서도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고 구원자 그리스도를 보내어 주심에 대하여 감사하지도 아니하며 제멋대로 살게 되면 심판을 받아 멸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러한 멸망의 심판을 면하게 해주고자 복음의 이치를 설명해주고 싶다는 것입니다.

(2)   2장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심판이란 개인별 심판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 선민 유대인과 이방인을 나누어서 집단을 달리 심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유대인들을 선민이라고 하여 우대할 필요가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이유는 그들이 육체적인 할례를 자랑하고 사람들 보기에 율법을 지킨다는 것을 자랑할 진실로 하나님 보시기에 진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고 있지 아니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이방인들이 창조주께서 마음속에 심어 놓은 본성인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고 제멋대로 행동하여 하나님께 범죄하는 것과 동일한 것입니다.

(3)   3장에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율법 아래에 있는 죄인 유대인들과 율법 바깥에 있는 이방인들을 모두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특단의 조치를 취하십니다. 그것은 율법 위에 있는 하나님의 아들을 세상에 대속의 제물로 보내시는 것입니다. 결과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의 제사가 자신의 죄를 사해주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이라는 사실을 믿고 회개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임하게 됩니다. 구체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사함의 은혜와 칭의의 은혜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4)   4장에서는 사도 바울이 아브라함의 믿음의 특징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1)      창세기 15장을 살펴보면, 하나님께서는 자식이 없는 노인 아브라함 부부에게 장차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많을 것이라고 예언의 말씀을 주십니다. 그것은 창세기 12장과 13장에서 하신 예언의 말씀을 계속 반복하신 것입니다. 무려 10 동안(16:3) 3차례나 반복하여 자손의 번성에 관하여 축복의 예언을 주시고 있지만 노년의 아브라함 부부에게는 여전히 자식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를 못하고 있습니다(15:3).

2)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끌고 장막 바깥으로 나가서 하늘의 많은 별들을 쳐다보게 하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하늘의 별과 같이 너의 자손이 많아질 것이라고 구체적으로 예언하십니다(15:5). 예언을 아브라함이 믿게 됩니다. 그가 믿은 까닭은 하나입니다; “ 예언을 주신 분이 바로 창조주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실현가능성이 없지만 창조주 하나님께서 하신 예언의 말씀이기 때문에 그대로 실현이 된다고 아브라함이 믿고 있습니다. 그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입니다.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의롭다고 여기시고 믿음의 조상으로 삼으십니다(15:6, 4:16).

3)      아브라함과 그의 서장자 이스마엘이 할례를 받은 것은 그로부터 14년의 세월이 지난 후입니다(17:25).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창조주 하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의를 얻게 것은 할례제도가 세상에 나타나기 14 전의 일입니다. 그에 따라 할례를 자랑하고 있는 선민 유대인이나 할례제도를 가지고 있지 아니한 이방인이거나 모두가 아브라함의 믿음의 선례를 따라서 하나님의 의로움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더구나 선민 유대인들이 온전히 율법을 행하지 못하여 구원을 얻을 수가 없다고 한다면 이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따라 하나님의 의를 얻는 방법을 수용해야 것입니다. 끝으로, 사도 바울은 훗날 아브라함의 믿음의 연장선상에서 만민을 살릴 있는 방법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의 행적이 나타나고 있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4:23-25).

(5)   5장에서 사도 바울은 아브라함의 믿음의 의로써는 완전한 구원을 얻을 수가 없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유는 인류의 조상인 아담부부의 원죄가 유전이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류는 하나님의 법정에 서야만 합니다. 어떻게 하면 심판의 법정에서 죄의 가리움을 받을 수가 있을까요? 죄사함의 방법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은혜를 얻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아들이 세상에 오셔서 유월절 어린양으로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고 흘려 나의 죄를 하나님께 속죄하였다는 사실을 믿고서 회개를 해야만 합니다(1:29, 10:19-22). 일개 피조물인 아담이 아니라 창조주의 위격을 지니신 하나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속죄의 제물이 되신 것이기에 대속의 은혜는 회개하는 세상사람을 모두 심판에서부터 구원으로 인도할 있는 능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5:18).

이상과 같은 사도 바울의 로마서의 이슈와 논점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주께서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4:6-8); 사도 바울이 다윗의 시편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32:1). 다윗이 그의 시편에서 고백하고 있는 내용의 배경과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1)   다윗은 사울 왕의 추격을 피하여 10여년의 고달픈 피난생활을 하는 도중에 두번의 좋은 기회를 가지게 됩니다;

1)      3천명의 기병을 이끌고 자신을 추격하고 있는 사울 왕을 암살할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2번의 기회를 스스로 포기합니다(삼상24:1-7, 26:3-12). 이유는 하나님께서 기름 부은 종을 자신이 암살하는 것은 저주를 받을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종은 하나님께서 직접 치리하실 것이므로 자신이 나서서 사울 왕을 해쳐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2)      그렇게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을 쉽게 왕국을 얻는 것보다 귀하게 여긴 다윗의 신앙의 태도가 하나님의 마음에 들게 됩니다(13:22). 결과 하나님께서는 사울 왕의 전사 이후에 다윗을 유다 지파의 왕으로 세우고 나중에는 통일 이스라엘 왕국의 2 왕으로 즉위하게 합니다. 그리고 주변국과의 전쟁에서 연전연승을 하게 하여 옛날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광대한 메소포타미아의 유프라테스 이서지역과 애굽의 나일 이동지역을 아우르는 대제국을 건설하게 만들어줍니다(15:18, 삼하8:1-14).

(2)   그렇게 대제국을 완성하는 마지막 전쟁을 앞두고 다윗대왕이 그만 실족하게 됩니다;

1)      그는 요단 동쪽 멀리 위치하고 있는 암몬의 수도 랍바를 공격하는 전투를 조카인 요압 장군에게 맡기고 이제는 왕도 예루살렘의 궁전에 남아서 편히 쉬기를 원합니다(삼하11:1). 그렇게 역사상 유례가 없는 엄청난 세상적인 성공에 취하여 안락에 빠져버린 다윗에게 영적인 위기가 찾아오고 있습니다.

2)      그는 어스름한 달빛 아래 목욕을 하고 있는 여인 밧세바에게 음심을 품게 되고 마침내 간음의 죄를 범하게 됩니다(삼하11:2-5). 그리고 그녀의 남편 우리아 장군을 음모를 꾸며서 전사시키는 살인죄까지 저지르게 됩니다(삼하11:14-17). 그러면서도 왕자무치’(王者無恥, 통치자 왕은 왕국의 주인이므로 법의 적용에서 제외가 되며 도덕적으로 부끄러운 일을 행해도 죄를 물을 수가 없다는 ) 사상에 젖어서 율법 위에서 놀고 있는 다윗 대왕입니다.

3)      그러한 다윗에게 하나님께서는 나단 선지자를 보내어 십계명 위반의 죄를 묻게 됩니다(삼하12:5-15). 그때서야 다윗은 자신이 하나님 보시기에 용서 받을 없는 죄인임을 자각하게 됩니다. 이제 어떻게 하면 죄인의 신세를 면하고 구원을 얻을 수가 있을까요? 다윗의 나머지 인생은 해답을 얻고자 하는 영적인 간구의 세월입니다.

(3)   마침내 다윗이 해답을 얻고 있습니다;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복이 있도다”(32:1);

1)      하나님의 마음에 그토록 들었던 다윗조차 순간의 방심으로 그만 하나님 보시기에 십계명을 어기는 대역죄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노력으로는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가 없습니다. 모두가 죄인이며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영벌에 처해질 운명입니다. 과연 어떻게 하면 다시 의로운 자라고 여김을 받으며 구원을 얻을 수가 있을까요?

2)      사람의 능력과 지혜로써는 해답을 구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길을 마련해 주셔야만 합니다. 다윗은 여호와께서 대안으로 하나님의 아들을 세상에 대속의 제물인 메시아로 보내어 주신다는 사실을 영적으로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이제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를 믿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자들에게는 허물이 용서를 받고 죄가 가리움을 받게 되는 놀라운 은혜의 시대가 열리고 있습니다”(32:1의역)라고 찬양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3)      사도 바울은 그와 같은 내용의 다윗의 시편을 인용하여 사람이 자신의 행위와 공로로 하나님 앞에 의인이 되고 사함의 구원을 얻을 수가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오로지 하나님께서 대속의 제물로 그리스도를 보내어 주시고 십자가에서 희생시켜 주심으로 말미암아 사실을 믿고서 회개를 하는 자들에게 사함의 은혜와 칭의를 받은 성도의 삶이 나타나고 있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4:6-8).

둘째로,그런즉 복이 할례자에게냐? 혹은 무할례자에게도냐? 무릇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믿음이 의로 여겨졌다 하노라. 그런즉 그것이 어떻게 여겨졌느냐?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시가 아니요 무할례시니라”(4:9-10); 사도 바울이 다윗의 시편 말씀을 가지고 설명하고 있는 것은 사실 아브라함의 믿음의 본질에 관한 것입니다;

(1)   아브라함의 믿음의 특징은 사람의 능력이나 상식을 믿은 것이 아닙니다. 그는 여호와께서 창조주이심을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이 함께하실 때에 자신에게 주신 언약과 예언이 성취가 있다는 사실을 확고하게 믿고 있습니다(15:6). 그렇게 창조주를 믿고 능력을 의지하고 있는 아브라함의 믿음이 하나님으로부터 의로움을 얻을 있는 근거가 되고 있습니다; “그런즉 복이 할례자에게냐? 혹은 무할례자에게도냐? 무릇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믿음이 의로 여겨졌다 하노라”(4:9).

(2)   그러한 하나님의 선언은 아브라함에게 할례제도를 지시하신 시점보다 14년이나 앞서고 있습니다; “그런즉 그것이 어떻게 여겨졌느냐?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시가 아니요 무할례시니라”(4:10). 그러므로 할례를 자랑하고 있는 선민 유대인들이 율법의 의로 구원을 얻을 수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보다 아브라함의 믿음의 의가 앞선 것입니다. 그에 따라 사도 바울은 선민 유대인들이 율법을 온전히 실천하지 못하는 자신들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고 하면 이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본받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셋째로,그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그들도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또한 할례자의 조상이 되었나니, 할례 받을 자에게 아니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무할례시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따르는 자들에게도 그러하니라”(4:11-12);

(1)   아브라함이 창조주를 믿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예언과 언약이 장차 틀림없이 실현이 것이라고 확신한 것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의인으로 여기시게 근거가 되고 있습니다(15:6). 그로부터 14 후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가정에 할례를 실시하라고 명령하십니다(16:3, 17:10, 24-25). 그러므로 사도 바울의 지적과 같이 할례제도라고 하는 것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서 하나님께서 앞으로 할례를 받게 되는 그의 자손들도 아브라함의 믿음을 본받으라고 하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의를 인친 것이니”(4:11a), “또한 할례자의 조상이 되었나니”(4:12a).

(2)   사도 바울은 사람이 없는 언약의 성취와 구원을 하나님께서 창조의 능력으로 베풀어 주신다고 하는 믿음을 아브라함처럼 가지게 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의 믿음의 자취를 따르게 되면 유대교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가 있으며 세상 만민이 믿음과 구원의 길로 달려갈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그들도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4:11b), “ 할례 받을 자에게 아니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무할례시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따르는 자들에게도 그러하니라”(4:12b).

(3)   선민인 유대교인들은 사람의 힘과 지혜를 가지고서는 율법을 전부 지킬 수가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사실을 하나님 앞에 솔직하게 인정하지 아니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에서 멀어지고 있습니다. 실제로 유대교인들은 외식적인 신앙생활에 젖어 있습니다(23). 하나님의 눈이 아니라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여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꾸미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사람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을 속이고 있는 거짓된 믿음 생활입니다. 선민사회가 인정해주는 의로움과 유대교지도자들이 선언하고 있는 의로움을 의지할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고 계시는 의로움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마디로, 그들의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믿음을 계승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4)   반면에 이방인들은 아예 창조주의 계심을 인정하지 아니하고 사람의 지혜와 영적인 깨달음을 통하여 자연의 이치를 꿰뚫으며 세상을 인위적으로 경영하고자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죄인의 모습이며 심판을 받아 멸망에 들어가게 된다고 하는 사실에 대해서도 무감각합니다. 그와 같은 이방인들을 향하여 사도 바울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본받으라고 본문에서 주장하고 있습니다. 우주와 인생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므로 사람들이 손을 들고 앞에 나아가기만 하면 전능하신 능력으로 고쳐 주시고 의로운 종으로 삼아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창조주로 믿고 구원과 언약의 성취를 바라보면서 평생을 여호와의 종으로 살아간 아브라함의 믿음의 자취를 쫓아가는 성도들이 모두 되라고 하는 것이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요지입니다.

결론적으로, 선민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복음으로 드러내고 그들에게 회개하라고 부르짖고 있는 선지자들과 메시아를 배척하고 맙니다. 특히 그리스도 예수를 종교적으로 정죄하고 정치적으로 로마총독에게 넘겨서 십자가에 처형함으로써 유대교는 하나님 앞에 설자리를 잃어버리게 되고 맙니다.

그러한 저간의 사정을 알고 있는 랍비 출신 사도 바울은 유대교인들이 죄를 회개하고서 죄인의 심정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율법의 의를 내세우지 말고 죄인임을 깨달아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을 믿고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를 받아들이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리하면 아브라함의 믿음을 따라가는 믿음의 후손들이 수가 있을 것입니다.  

아예 하나님의 창조주 되심을 모르고 있는 이방인들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인간의 지혜와 영적인 능력으로 창조의 이치를 깨닫고 신의 경지에 도달할 수가 있다고 하는 교만을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회와 인생이 얼마나 수치스럽고 영적인 환난과 곤고함을 경험하고 있는지 솔직하게 인정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믿고서 그리스도의 대속의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야만 합니다. 그리하면 옛날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의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회개하는 이방인에게도 임하게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사도 바울이 증거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의가 역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의를 땅끝까지 전하는 일에 최선의 노력을 다하시는 성도님들의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