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로마서 강해 제20강(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1. 3. 16. 09:47

로마서 강해 20(3:23-25)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7 1 20()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도들이 얻을 있는 것들에 대하여(3:23-25)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贖良, 대신 값을 치르고 종을 해방시켜서 양민으로 살아가게 만드는 )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도들이 가지를 얻을 수가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세가지는 첫째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생의 영광입니다(3:23). 둘째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칭의의 은혜입니다(3:24). 셋째가 율법 위에 있는 하나님의 의로우심 대한 깨달음입니다(3:25). 의미가 무엇인지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첫째, ‘속량’(贖良)이라고 하는 옛날 용어를 구태여 사용하고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유는 속량이라고 하는 의미 가운데 종을 해방시켜서 좋은 백성인 양민’(良民)으로 삼는다고 하는 뜻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1)      흔히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우리들의 죄를 모두 용서하여 주시는 속죄의 제사를 하나님께 온전히 드리셨기 때문에 자신의 죄를 회개한 성도는 남은 인생을 완전한 자유인으로 살아갈 수가 있게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은혜를 입었기에 완전 자유자가 아니라 그때부터는 메시아의 나라의 좋은 백성으로 살아가야만 합니다.

2)      예수님의 공생애와 대속의 죽으심의 의미를 깊이 묵상하면서 사랑에 빚진 자로서 지상명령을 실천하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살아가야 합니다(28:18-20, 13:8). 그렇게 살아가는 성도들이 세상에서는 바로 메시아나라의 좋은 백성들입니다. 훗날 세상을 떠나게 되면 그러한 예수님의 제자들은 하나님나라에 들어가게 것입니다.

3)      메시아의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로 바뀌게 된다고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벌써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그후에는 마지막이니 그가 모든 통치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7:13-14, 메시아의)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그가 모든 원수를 아래에 때까지 반드시 노릇 하시리니,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고전15:24-26).

(2)   둘째, ‘영생의 영광 세상이 없는 영광입니다. 오직 영생의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있는 것입니다(3:23). 그러므로 영생의 영광을 얻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창조주 하나님께 나아가야만 합니다;

1)      피조물인 인간이 그것도 죄인인 인간이 그냥 그대로 하나님 앞에 수가 없습니다. 영생을 얻기도 전에 소멸이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33:20, 벧후3:12). 따라서 그리스도의 대속의 보혈이 필요합니다. 보혈은 마치 유월절 어린양의 피와 같아서 죽음의 심판 가운데서 죽음을 뛰어넘게 해주는 것입니다(12:13, 1:29, 6:54).

2)      세상의 영광이란 유한한 것이며 제한적인 것입니다. 영광을 누리는 당사자가 사라지게 되면 그것도 사라져버리고 맙니다. 따라서 세상의 영광을 얻는 것이 인생의 목표가 없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가지는 영광을 얻기 위하여 자신의 인생이 가치 있게 사용이 되어야만 합니다.

3)      영원한 영광을 가지는 생명을 창조주로부터 얻기 위하여 사람들이 영생의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있습니다. 명단이 창세기에 실려 있습니다; 첫째, 아담부부의 아들인 셋이 자신의 아들의 이름을 에노스’(유한한 인생을 살고서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가진 사람)라고 부르면서 영생의 하나님께 부디 영원한 생명을 달라고 부르짖고 있습니다(4:26). 둘째, 노아의 증조부인 에녹이 평생을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습니다. 결과 첫번째 휴거자가 되고 있습니다(5:24). 셋째, 브엘세바에서 아브라함이 에셀나무를 심고서 영생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면서 영원히 푸르른 생명에 들어가기를 소원하고 있습니다(21:33). 결과 아브라함이 천국에 들어갔다는 사실을 예수님께서 증거하시고 계십니다(13:28, 16:22).

(3)   셋째, ‘칭의의 은혜 당사자가 의롭기 때문에 주어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서 속죄의 제사를 드린 결과 당사자에게 주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정경에 의하면 가축으로 대신 속죄의 제사를 드립니다. 특히 10 10 속죄일에는 백성들이 지은 일년 동안의 죄를 모두 속죄하기 위하여 제사장이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지성소에 들어가고 있습니다(16:29-34). 일이 매년 반복이 되고 있습니다. 영원한 죄사함과 칭의의 은혜가 주어지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제사는 영생의 구원을 얻는 속죄의 제사가 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와 달리 하나님의 아들이 유월절 어린양으로 세상에 오셔서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고 드린 희생만이 영원한 제사가 되고 있습니다(7:27-28).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대속의 은혜를 얻어서 남은 인생을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고자 결단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의의 은혜 주어지고 있습니다. 끝까지 지상명령을 실천하면서 살아가게 되면 하나님나라에서 영생을 누릴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28:18-20, 22:28-30, 24:44-49, 1:8).

(4)   넷째, ‘하나님의 의로우심 인정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주로서의 주권을 인정한다는 뜻입니다(3:25, 9:21, 11:36). 흔히 율법 아래에서 생활을 하다가 보면, 하나님께서 율법 위에 계신다고 하는 사실을 잊어버리게 됩니다. 결과 자신들이 율법의 권세 아래 지배를 당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율법에 기속(羈束, 굴레가 씌워져 있음) 되어 있는 것으로 착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1)      그러나 그것이 아닙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주께서 세상의 지배를 당하고 있을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선민들의 율법적인 해석에 창조주께서 구속을 당하실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7:6-9, 12:30-31).

2)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이나 율법이 하나님을 구속하려고 한다면 그때에는 창조주의 고유권한이 발동이 됩니다. 그것이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고 수도로서 예루살렘성을 세상에 임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로 벌써 선지자 이사야에 의하여 예언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65:17-20).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모든 사람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3:23); 선민 뿐만 아니라 모든 이방인들도 전부 하나님 보시기에 죄인들입니다(3:23a). 그러므로 영생의 하나님께서 계시는 그곳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영광 앞에 수가 없습니다(3:23b). 말은 영생의 구원을 얻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죄인이 의인으로 바뀌어 하나님의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서 영생을 누릴 수가 있을까요? 점에 대하여 이제부터 사도 바울이 다음 구절에서부터 설명을 하고자 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이해에 도움이 있도록 선민 유대인과 이방인인 헬라인 로마인이 어째서 모두 죄인인지 점만 다시 약술(略述, 간략하게 설명함)해보고자 합니다;

(1)   선민들은 세상사람들에게 자신들만은 죄인들이 아니고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라고 자랑하고 있습니다. 근거가 여러가지입니다; 첫째는 매년 지은 죄에 대해서는 속죄일의 제사가 행해지고 있기 때문에 전부 사함을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16:29-34). 둘째는 율법을 지킴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구원을 얻고 있다고 말합니다(18:5, 10:5). 셋째는 자신들의 성전에는 하나님께서 임재하여 계시는 지성소가 있으며(25:8, 22) 자신들의 육체에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징표로서 할례가 있다고 주장합니다(17:10-14).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렇지가 않다고 말합니다; 첫째, 유대인들의 제례의식은 완전한 것이 아닙니다. 매년 반복적으로 드려야만 합니다. 계속 죄를 짓는 죄인들이기에 계속 반복적으로 속죄의 제사가 필요한 것입니다. 둘째, 율법을 하나님 보시기에 온전하게 지킬 수가 없습니다. 그저 사람들 보기에 율법을 지키고 있는데 불과합니다. 셋째, 하나님의 보좌는 하늘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온전히 지킬 때에만 지상의 성전에 임재를 하십니다. 넷째, 육체적인 할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마음에 할례가 중요합니다(10:16).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진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실천하겠다고 하는 마음속 결단이 있고 행함이 있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선민들은 이방인과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어떠한 노력도 하고 있지를 않습니다. 그들은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주지 않고 제사장의 직무를 행하지를 않으며 중보의 기도도 드리지를 아니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선민 유대인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죄인들입니다.

(2)   헬라인들은 고대 유럽사회에서 최고의 문명과 학문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특히 인간의 명철과 지혜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성적인 탐구와 지성적인 노력으로 우주의 이치와 신비를 터득할 수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나아가서 철학적인 사색과 고행을 통하여 영적인 지식을 얻게 되면 인간이 신이 수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와 같은 자력구원론이 헬라의 철학과 종교에 깔려 있습니다. 마디로, 그것은 창조주를 부인하고 있는 유물론적인 불신앙이며 죄인들의 의식구조입니다.

(3)   로마인들은 제국의 수많은 나라와 족속들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지배족속이므로 우월한 존재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그들의 황제를 신으로 여기고 있으며 제국을 건설한 자신들을 세상의 지배집단이라고 과신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들이 만든 법이 세계를 지배하는 만민평등법이며 세계의 평화를 위해서는 신들도 로마제국의 편에 서야만 한다고 사고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현세적인 권력과 지배욕에 불타고 있는 실용주의자들이야 말로 창조주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이 아니라 세상제국의 부와 권력을 섬기고 있는 죄인들입니다.

둘째로,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되었느니라”(3:24);

(1)   예수님께서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고 자신을 희생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속죄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희생이 자신을 위한 속죄임을 믿고서 회개를 하는 자들에게는 선민이거나 이방인이거나 상관이 없이 누구에게나 하나님의 사함의 은혜가 주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은혜를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속량의 은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3:24a). 뜻은 그리스도 안에서 좋은 백성으로 살아갈 있는 기회가 주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고 있는지 아닌지에 따라서 이제는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느냐 아니냐가 결정이 되는 것입니다. , 성도라고 하면서 그리스도의 제자의 삶이 아니라 제멋대로 뜻대로 계속 살아가버리게 된다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2)   사람들이 자신의 죄를 청산하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스스로 희생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대신 자신을 희생하여 속죄의 제사를 드려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주로 모시고 있는 성도들은 자신의 공로를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그저 예수님의 희생 덕분에 얻게 하나님의 고마운 사함의 은혜입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되었느니라”(3:24) 말하고 있습니다. 마디로, 죄인을 예수님의 사죄 때문에 의인으로 간주해 주십니다. 결과 예수님을 구주로 믿게 성도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의인의 반열에 서게 것입니다.

셋째로,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3:25);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 세우셨으니”(3:25a); 사람들이 하나님과 화해하기 위해서는 다음 세가지가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는 대목입니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가 피를 흘린 십자가의 희생의 제사가 하나님 앞에 나를 위한 속죄의 제사라는 사실을 믿어야만 합니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를 대속자로 세상에 보내어 주신 아버지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해야 합니다. 셋째,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희생에 성도가 믿음의 삶으로 보답할 때에 하나님과의 화해가 이루어집니다.

(2)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3:25b); 두가지 생각해야할 점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같은 죄인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희생을 바라보고 회개를 때까지 나를 심판하고자 하는 마음을 참으시면서 오래 기다리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는 장차 짓게 되는 죄를 사해주신 것이 아니라 전에 지은 죄를 눈감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남은 인생을 더욱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성령님 안에서 신실하게 살아가야만 합니다. 그것이 이상 죄인으로 살지 아니하는 방법입니다. 사실을 모르고서 남은 인생을 이제 제멋대로 방종하게 살아가도 영생구원은 이미 따놓은 당상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러한 잘못된 사조가 바로 초대교회에 성행한 소위 영지주의적 사고방식에 기초하고 있는  니골라 쾌락주의입니다(2:15).

(3)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3:25c); 여기서 의롭다고 하는 것은 창조주의 공의의 정신에 합당하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세상에서 말하고 있는 정의의 개념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1)      세상의 정의라고 하는 것은 알기 쉽게 말하자면, 사람들의 법정에서 선포가 되는 것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공의는 하나님의 법정에서만 선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정의는 나라나 사회 또는 집단에게만 의로운 것이면 의롭다고 판정이 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공의는 그러한 집단이기적인 성격의 정의가 아닙니다. 창조주의 피조물사랑에 합당해야만 합니다.

2)      하나님의 공의는 모든 피조물을 사랑하고 돌보며 생명을 전부 살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공의를 이기적이고 현세적인 유익을 추구하고 있는 사람들은 실현할 수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창조주의 공의의 정신을 실천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만이 주권적으로 공의에 합당하다고 판결을 하실 수가 있습니다.

3)      그와 같은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을 실천한 유일한 사례가 바로 대속의 십자가에서 믿는 자들을 전부 구원하고자 자신을 희생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음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 앞에 회개하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칭의의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의로움에 대한 최종판정권을 가지신 창조주 하나님의 가장 신성한 판결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도 시비를 수가 없습니다.

결론적으로, 성도들은 남은 인생을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시고 메시아나라의 좋은 백성으로 살아가야만 합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예수님의 교훈과 생애를 배우고 만민구원의 뜻을 실천하는 인생을 살아가야 합니다. 결코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을 자신의 죄를 용서받는 도구로서만 여기고 뜻을 외면한 제멋대로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그렇게 남은 인생을 살아가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살아가야만 하는 이유를 본문에서 발견하시기를 바랍니다. 아무쪼록 사도 바울이 깨닫고 실천하고 있는 복음의 비밀을 깊이 알게 되는 은혜가 성도님들에게 있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