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로마서 강해 제18강(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1. 3. 15. 05:13

로마서 강해 18(3:9-18)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7 1 18()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가 죄인이라는 사도 바울의 선언에 대하여(3:9-18);

 

본문은 믿음생활의 시작점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로마교회의 성도들에게 들려주고 있는 사도 바울의 글입니다. 마디로, 믿음생활의 시작은 자기 자신이 하나님 앞에 어떠한 존재인가를 아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선민이라고 자처하고 있는 유대인이나 세계 최고의 학문과 철학을 자랑하고 있는 헬라인이나 역사상 최강의 제국을 건설한 로마인이나 모두가 하나님 보시기에 죄인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3:9-18). 그러므로 믿음의 시작은 자신을 포함하여 인간이란 믿을 구석이 하나도 없다고 하는 진실을 발견하고 인정함으로써 평등하게 출발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자신과 같은 사도나 그리스도의 제자들도 마찬가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3:9). 이유에 대해서는 7-8장에서 후술하고 있습니다. 마디로, 육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법을 깨달았노니,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지체 속에서 다른 법이 마음의 법과 싸워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 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 ,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7:21-8:2).

그렇다면 죄인을 회개시켜서 선한 하나님의 청지기로 만드는 비결이 무엇일까요?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길을 여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자신을 희생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해답을 찾아야 합니다(7:25). 왜냐하면,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기 위하여 자신을 희생했을 때에 부활과 승리의 역사가 예수님을 통하여 세상에 찾아왔기 때문입니다(52:13-1, 2:36). 그에 따라 예수님의 대속의 은혜를 힘입어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앞으로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겠다고 결단하는 성도들에게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벗어나는 해방의 기쁨이 벌써 주어지고 있는 것입니다(8:1-2).

그와 같은 복음의 은혜를 입기 전에 우리 모두가 얼마나 비참한 죄인이었는지를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선지서와 시편의 말씀을 원용하여 너무나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3:9); 다음과 같이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3:9a); 로마인들은 광대한 제국에 속국의 백성으로 살고 있는 자들보다 자신들은 우월한 자이며 나은 신분의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정치 군사적인 우월감이 도덕적이고도 종교적인 우월감으로 발전하여 그렇게 느껴지고 있습니다. 점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결코 그렇지가 않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유는 모두가 죄와 사망의 몸인 육신을 지니고 있는 같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7:18-20, 24).

(2)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3:9b); 선민인 유대인이나 이방인인 헬라인이나 이제는 제국을 지배하고 있는 로마인까지 포함하여 모두가 아래에 있다고 하는 사실을 사도 바울은 이미 우리가’(we) 선언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우리가 누구이며 어떻게 선언이 되어 있다는 것일까요? 여기서 우리 사도 바울과 선지자들과 로마교회의 성도들이라고 있다는 점을 다음과 같이 살펴봅니다;

1)      첫째, 사도 바울이 먼저 우리가’(we) 속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벌써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아니하면 모두가 죄인들이라고 다음과 같이 선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 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1:21-23).

2)      둘째,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전하고 있는 선지자들도 사도 바울의 입장과 같습니다. 이유는 사도 바울이 선지서의 내용을 공부하고서 그와 같이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예레미야 선지자는 모든 족속들이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같이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고 다음과 같이 예언하고 있습니다; “보라 내가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성에서부터 재앙 내리기를 시작하였은즉, 너희가 어찌 능히 형벌을 면할 있느냐? 면하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칼을 불러 세상의 모든 주민을 것임이라 하셨다 하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25:29).

3)      마지막으로, 사도 바울의 편지를 받아보게 되는 로마교회의 성도들도 우리가’(we) 속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어째서 선민 유대인과 높은 문화수준을 자랑하고 있는 헬라인들이 죄인이라고 여기고 있는 것일까요? 이유는 자신들은 지배족속이고 그들은 모두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는 피지배족속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전쟁은 정의의 전쟁이었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한 자들이 의인이고 패배한 자들은 불의한 자들이며 하나님이 보기에 죄인들입니다. 그래서 패전을 하고 망국의 백성이 되어 승전국의 백성들을 섬기는 종이 것입니다. 로마인들은 그렇게 믿고서 그들을 노예와 같이 여기면서 지내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기록 ,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도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3:10-12); 사도 바울이 히브리정경을 연구한 바에 의하면 하나님 보시기에 사람들 가운데 의인을 발견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기록 ,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3:10). 그래서 하나님의 진노의 발에 밟히고 있습니다. 특히 선지자 이사야의 기록이 그러합니다; “만민 가운데 나와 함께한 자가 없이 내가 홀로 포도즙 틀을 밟았는데 내가 노함으로 말미암아 무리를 밟았고 분함으로 말미암아 짓밟았으므로 그들의 선혈이 옷에 튀어 의복을 더럽혔음이라”(63:3). 그와 같은 처참한 심판을 당하게 되는 인간들의 잘못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알기 쉽게 본문에서 가지로 설명을 해주고 있습니다;

(1)   깨닫는 자도 없고”(3:11a); 깨달음의 세계에 대해서는 헬라의 철학자들이 설명을 해주고 있습니다. 동굴 속에서 진리가 무엇인지 사색을 하고 고행 가운데 명상을 계속하게 되면 어느 순간에 태초의 영적인 진리가 일종의 아르케로서 사람의 이성을 환하게 밝혀준다는 것입니다. 진리의 빛을 쪼이게 되면 사람에게 영적인 지혜가 생기고 세상을 움직이는 영적인 지식이 명철하게 깨달아진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일종의 자력구원론이며 사람이 진리의 깨달음 득도를 통하여 신적인 존재가 있다고 하는 소위 유물론적인 여러 사상과 종교의 기초가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주장하고 있는 것은 다윗의 시편 14편의 내용을 참조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인간들이 창조주 하나님이 계시지 아니하신다고 가정을 하고 있습니다(14:1a). 그러므로 하늘에서 인생들을 굽어 보시고 계시는 하나님을 깨닫는 안목조차 없는 것입니다(14:2a원용)”. 그들이 바로 불쌍한 무신론자들이며 헬라의 철학자들입니다.

(2)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3:11b); 창조의 이치를 깨닫고 우주질서를 유지하고 있는 지혜에 접근을 하게 되면 창조주의 존재를 눈치를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과학자들과 철학자들이 정직하게 사물의 이치와 인생의 진리를 탐구하게 되다면 인간이 알고 있는 것이 얼마나 부족한 것이며 창조주의 능력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를 파악하게 됩니다. 결과 자신들이 피조물임을 인정하고서 창조주 앞으로 겸손하게 나아가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그와 같이 하나님을 찾아 나서는 겸손하고 정직한 자를 발견할 수가 없다고 하는 안타까움을 로마교회의 성도들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참고로, 사도 바울이 원용하고 있는 시편의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14:2b), “하나도 없도다”(14:3c).

(3)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3:12a); 하나님 앞에서 학문을 하거나 철학을 하지 아니하고 인본주의적으로 탐구를 하게 되면 한가지 병폐를 보이게 됩니다. 그것은 자신의 연구결과와 깨달음이 바로 진리이며 절대적인 것이라고 과신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결과 사회적으로 비극적인 현상이 발생하게 됩니다. 서로가 자신의 이론이 진리라고 주장하면서 의견이 다른 자들을 이단으로 몰아 부치게 됩니다. 그와 같은 현상을 중세 스콜라 철학의 시대에서 많이 보게 됩니다. 철학이 하나님의 종교까지 지배하게 되면 형식적인 논리로 서로 자신들의 의로움을 드러내고자 하는 극단적이고도 무익한 논쟁이 범람하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참고로, 사도 바울이 인용하고 있는 시편 말씀이 다음과 같습니다; “ 치우쳐 더러운 자가 되고”(14:3a).

(4)   선을 행하는 자도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3:12b); 선을 행한다고 하는 것은 창조주의 마음을 이해하고서 모든 피조물을 돌보고 생명을 살리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그와 같은 좋은 이웃을 찾아보기가 힘듭니다. 모두들 살기에 바쁘고 원수를 미워하기에 바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회가 피조물을 자신처럼 사랑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글은 다윗의 시편말씀을 원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이 부패하고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14:1b),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14:3bc, 53:3).

셋째로,그들의 목구멍 열린 무덤이요, 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입술에는 독사의 있고, 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3:13-14); 창조주 하나님을 떠나 제멋대로 살고 있는 인간들의 모습이 너무나 처참합니다. 그들의 사회가 얼마나 가증하며 약육강식에 젖어 있는 짐승들의 사회와 같은지 모릅니다(6:11-13). 사회는 마치 아담부부의 장남인 살인자 카인이 유배를 가도록 되어 있는 동방 땅의 무법자들의 사회모습과 비슷합니다(4:14, 16). 그러한 무신론자들의 횡포한 사회로 떠나게 되는 카인이 하나님께 간절하게 보호하심을 요청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러한 사회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알기 쉽게 비유와 상징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1)   그들의 목구멍 열린 무덤이요”(3:13a); 사도 바울이 역시 다윗의 시편말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같고”(5:9). 옛말에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말의 뜻은 먹고 사느라고 별의 일을 다하다가 보면 도둑질까지 하게 되어 포도청에 잡혀가는 일도 발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재화가 부족한 세상에서 생존을 위하여 불가피하게 범죄를 범하게 되는 일이 다반사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한 맥락에서 다윗과 사도 바울도 열린 무덤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뜻은 사람들이 서로 먹고 살기 위하여 살기다툼을 벌이는 것이 아귀다툼과 같고 서로 살려고 죽고 죽이다가 결국에는 자신도 죽음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마디로, “열린 무덤으로 들어가는 인생 생존을 위하여 죄악을 범할 밖에 없는 악한 인간세상 표현하고 있습니다. 

(2)   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입술에는 독사의 있고”(3:13b); 사도 바울이 역시 다윗의 시편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뱀같이 혀를 날카롭게 하니 입술 아래에는 독사의 독이 있나이다”(140:3). 살기다툼의 사회에서 자기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남을 속이고 해치는 것이 다반사입니다. 그러한 악한 사회가 마귀의 화신이라고 표현이 되고 있는 뱀의 모습으로 표현이 되고 있습니다. 뱀의 혀같이 혀를 사용하여 나오는 말이 사람들을 속이고 또한 해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입술에 감추인 독이 품어져 나와서 남을 해치는 것입니다.

(3)   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3:14); 사도 바울이 인용하고 있는 시편 말씀입니다; “그의 입에는 저주와 거짓과 포악이 충만하며 (그의 밑에는 잔해와 죄악이 있나이다)”(10:7).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두가지의 기능을 지니고 있습니다. 선한 말은 사람을 격려하고 또한 살립니다. 반대로 악한 말은 사람을 해치고 죽입니다. 그것은 사람의 마음속에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가에 좌우가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선민사회에서 백성들이 외우고 있는 시편 말씀과 사도 바울의 가르침이 똑같이 한가지 사실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들 사회의 백성들이 하나같이 마음이 악하여 남을 해치고 상하게 하는 말을 상투적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넷째로, 흘리는데 빠른 지라. 파멸과 고생이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3:15-17); 사도 바울이 이사야 선지자의 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 발은 행악하기에 빠르고 무죄한 피를 흘리기에 신속하며 생각은 악한 생각이라. 황폐와 파멸이 길에 있으며 그들은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며 그들이 행하는 곳에는 정의가 없으며 굽은 길을 스스로 만드나니, 무릇 길을 밟는 자는 평강을 알지 못하느니라”(59:7-8). 행악하기에 빠르면 하나님의 진노로 파멸하게 되고 터전이 황폐화되고 맙니다. 그와 같은 하나님의 역사섭리를 알고서 행동을 하기 전에 두번 세번 깊이 생각을 해야만 합니다. 자신의 분노와 미움을 다스리면서 하나님께 기도를 해야만 합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온전히 분노하는 마음을 다스릴 수가 없으며 행악하기에 급한 발걸음을 다스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도와주십시오. 그렇게 간절히 기도할 때에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게 됩니다. 결과 마음속의 평강을 회복하면서 악행을 하고자 하는 발걸음을 다스릴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다섯째로,그들의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3:18); 사도 바울이 다시 다윗의 시편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악인의 죄가 그의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그의 눈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빛이 없다 하니, 그가 스스로 자랑하기를 자기의 죄악은 드러나지 아니하고 미워함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함이로다”(36:1-2). 행악을 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유는 자신의 완전범죄를 하나님께서 알아채실 수가 없다고 하는 가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설혹 알아채신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자신을 어찌할 없을 것이라고 하는 자신감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요? 다음과 같은 예수님의 말씀에 비추어보면 그것은 엄청난 착각입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10:28).

결론적으로, 로마제국은 만민법을 가지고 제국 내의 속국들과 속민들을 평등하게 다루고자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제국의 법정신과 사도 바울이 설명하고 있는 만민평등의 원칙 ,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는 누구나 죄인이라고 하는 주장이 어울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250 남짓 지나게 되면 기독교가 로마의 유일한 국교로 채택이 됩니다.

그렇지만 사도 바울이 지적하고 있는 인간의 벌거벗은 모습을 들여다 보게 되면 실로 끔찍합니다. 마음속의 악의가 입술을 통하여 상대방을 미워하는 살의로 발현이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발이 곧바로 상대방을 해치며 죽이고자 나서게 됩니다. 선지서와 시편에서 기록하고 있는 그와 같은 일들이 사도 바울 당시 선민 유대인의 사회에서나 최고의 문명을 자랑하는 헬라인들의 사회에서도 실제로 발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아가서 제국의 수도인 로마에 살고 있는 성도들의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죄인인 자신들의 모습을 발견하고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십자가 앞으로 다시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사도 바울의 권유는 오늘날 우리들의 현대사회에서도 동일하게 적용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우리들의 사회가 성령님의 역사로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해방이 되고 평강을 누릴 있기를 기도해야만 하겠습니다. 아무쪼록 그렇게 기도하시는 성도님들이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