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로마서 강해 제15강(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1. 3. 13. 11:14

로마서 강해 15(2:25-29)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7 1 15(주일)

 

율법을 온전히 행할 있도록 만드는 능력은 유대인들의 육체적 할례에서 비롯되고 있는가? 아니면 마음에 할례를 베풀고 있는 하나님의 영의 역사인가?(2:25-29)

 

본문의 이해는 쉽지가 않습니다. 이유는 문자적인 해석을 넘어서는 의미적인 해석이 많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선 다음과 같이 의미적인 해석에 도움이 되는 개념들의 연결을 먼저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첫째, 할례의 유익성을 따지는 자들은 실용주의에 철저한 로마인들입니다. 당시 로마교회에 출석하고 있는 성도들 가운데 대부분이 이방인이며 로마의 시민들이기 때문에 그들이 할례의 유익성에 대하여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2:25). 사실을 이미 알고 있는 사도 바울이 점에 착안하여 율법과 복음과의 관계를 설명해주고자 합니다.

(2)   둘째, 사도 바울은 할례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실천하는데 도움이 때에 유익성이 있는 것이라고 단언하고 있습니다(2:26, 28).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데 육체적인 할례가 기여하지를 못하고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선민들이 자신들의 할례를 자랑할 근거가 사라지고 없는 것입니다.

(3)   셋째, 그렇다면 육체적인 할례를 선민의 징표로 가지고 있는 유대인들이 어떻게 하면 그것으로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지키는데 도움을 얻을 수가 있을까요? 사도 바울은 2단계의 조치가 필요하다고 보고 있습니다(2:29); 첫째 단계는 자신이 할례를 받은 선민이므로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준수해야만 한다고 하는 강한 의식을 마음 속에 가지는 것입니다. 둘째 단계는 영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있도록 하여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하나님의 영적인 능력이 기도하는 자에게 율법을 준수할 있는 능력으로 발휘가 되는 것입니다.  

(4)   넷째, 유대인들이 육체에 할례를 받았다고 하는 사실을 가지고 자신은 선민이라고 자랑을 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방인들과 달리 하나님의 말씀을 율법으로 지니고 있다고 자랑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율법을 실천하는데 있어서 그들의 할례가 별로 도움이 되지를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유는 그들이 자신들의 육체적인 할례를 자랑하는데 열심이었지 실제로 할례를 받은 선민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데 앞장을 서야만 한다고 하는 그러한 의식이 부족한 것입니다. 따라서 그저 남들 보기에 율법생활을 하고 있다는 시늉만 내고 있습니다. 그것은 속마음으로는 율법을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2:25). 결국,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갈 있도록 자신들에게 진심으로 율법을 실천할 있는 영적인 능력을 달라고 하는 정직한 간구가 없다는 것입니다(18:11-12, 그것은 자신의 의를 하나님 앞에 자랑하고 있는 철부지 바리새인과 같음).

(5)   다섯째, 그런데 선민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할례를 심히 부끄러워할 수밖에 없는 현상이 이방인 성도들 가운데 발생하고 있습니다(2:27). 할례를 받지 아니한 이방인 성도들이지만 그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고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심전력으로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의 결론은 육체적인 할례를 자랑할 것이 아니라 마음 속으로 자신은 하나님의 종이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인생을 살아가야만 한다는 자의식’(自意識, self-consciousness) 중요하다는 것입니다(2:29). 그리고 실천할 있는 능력이 부족하면 그것을 달라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아버지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라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성령님께서 역사하셔서 성도가 충만한 복음적인 삶을 살아갈 있도록 도와 주신다는 것입니다.

위와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네가 율법 행하면 할례 유익하나 만일 율법을 범하면 할례는 (, 없음)할례가 되느니라. 그런즉, 무할례자가 율법의 규례를 지키면 무할례를 할례와 같이 여길 아니냐?”(2:25-26);

(1)   사도 바울은 할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율법을 행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음에는 걸음 나아가서 율법을 지키는 것은 목적이고, 할례는 수단에 불과하다 뜻을 표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지키는데 도움이 되지 못하는 할례는 아무런 효용성이 없다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극단적인 실용주의자의 입장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그러한 사도 바울의 말은 실용주의 입장에서 효용성을 강조하고 있는 현실주의자 로마인들의 마음에 드는 발언이라고 하겠습니다.

(2)   하지만 사도 바울은 자신의 발언에 대하여 가급적 논리적인 비약을 피하고자 합니다. 따라서 다음과 같이 2단계로 나누어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1)      첫째, 율법을 범하게 되면 할례를 행하고 있는 선민 유대인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처벌을 면할 수가 없다고 하는 전통적인 선지자들의 주장을 그대로 따르고 있습니다(2:25, 25:29).

2)      둘째, 반대로 할례를 행하지 아니하고 있는 이방인들이라고 하더라도 율법의 규례를 지키면 할례의 유무를 따질 필요가 없이 거룩한 성도라고 하는 새로운 해석입니다(2:26).

(3)   그렇지만, 사도 바울의 새로운 해석은 로마시의 성도들의 마음에 흡족할지는 몰라도 자체 다음과 같은 문제를 내포하고 있는 발언입니다;

1)      첫째, 율법의 규례 가운데에는 안식일의 규정이나 할례의 규정 등이 엄연히 들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규례를 지킨다고 하면 이방인들도 할례를 받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에서 유대주의자라고 하는 성도들의 지적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사도 바울의 주장은 내부적인 모순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2)      둘째, 그렇다면 사도 바울은 율법 가운데 그리스도의 구원론과 직접 관계가 되는 중요한 것은 지키고 직접적인 관련성이 없는 것들 예컨대, 육체적인 할례나 음식을 가려서 먹는 방법 등은 반드시 지킬 필요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4)   이방인 사도로 서방선교에 전념하고 있는 바나바와 바울이 주후 50년경에 예루살렘 총회에서 그러한 현실적인 문제를 거론하게 됩니다. 그들의 주장은 이방인선교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구원론과 직접 관계가 되고 있는 율법 규례는 반드시 지키도록 강조해야 하겠지만 육체적인 할례나 음식 규정 등은 이방인 성도들을 옥죄고 있는 것들이므로 강요하지 말도록 하자고 총회의 동의를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15:1-6). 총회장인 사도 베드로와 차기 총회장인 장로 야고보 그리고 예루살렘교회의 실세인 장로 시므온 등이 크게 찬성하여 일부 사소한 율법의 규정을 포기하는 대신에 이방인 선교를 적극화하게 됩니다(15:7-21). 본문과 관련하여, 그와 같은 진단과 처방의 절차가 미리 있었다는 사실을 차제에 기억할 필요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둘째로,또한 본래 무할례자가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율법조문과 할례를 가지고 율법을 범하는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겠느냐?”(2:27);

(1)   유대교와 기독교는 본질적인 차이를 지니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다메섹 도상의 영적인 체험과 이방인 선교를 통하여 두가지 가장 중요한 차이를 파악하고 있습니다;

1)      첫째, 유대교리에서는 산술적인 하나의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기고 있습니다(6:4).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섬기고 있습니다(4:6). 둘째, 유대교에서는 율법의 규례를 모두 지킴으로 하여 구원을 얻을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10:5). 하지만 기독교에서는 그리스도의 대속의 십자가 죽음을 자신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아들의 영원한 속죄의 제사라는 사실을 믿고서 은혜에 감사하여 철저하게 회개하고서 남은 인생을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감으로써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생의 구원을 얻을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16:24, 28:18-20, 22:28-30, 2:37-42, 6:4).

2)      그러므로 유대교인들이 율법을 지킴으로 말미암아 의로 구원을 얻는다 믿고 있는 반면에 기독교인들은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를 받아들이고 제자로 살아감으로써 영생의 구원을 얻을 있다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쉽게 표현하여 율법준수 얻는 구원 복음을 믿음으로 얻는 구원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2)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할 있는 능력을 어떻게 얻을 있느냐? 라는 문제에 대하여 유대교인들과 기독교인들은 접근방법이 다릅니다;

1)       먼저 유대교인들은 율법을 실천해야만 의롭게 되고 구원을 얻을 수가 있기 때문에 그것을 준수하기 위하여 모든 힘과 노력을 총동원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본래 하나님의 말씀을 일종의 법률체계와 같은 율법으로 조문화하고 있는 많은 규정을 사람들의 지혜와 능력으로는 도저히 전부 지킬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유대교인들은 준수의 기준을 다음과 같이 변경하게 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진심으로 지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율법을 모두 지키는 것으로 인정이 되면 그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2)      그것은 외식적인 이중적 신앙생활을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으로부터 따가운 질책을 받고 있습니다(23:27-28).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될까요? 양심적인 공회원 니고데모가 처방을 얻고자 예수님을 방문하고 있습니다(3:1-2). 그때 그에게 주신 예수님의 말씀이 사실은 복음의 핵심입니다. 마디로 사람이 영적으로 거듭나야만 한다는 것입니다(3:3-8). 의미는 사람의 지혜와 능력으로써는 율법의 의를 이루고 구원을 얻을 없다는 사실을 정직하게 하나님 앞에서 고백하며 스스로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구원을 얻을 있는 첫걸음이라는 것입니다.

3)      그리하면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도움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속죄의 제사가 회개하는 심령에게 칭의의 은혜를 주는 것입니다(7:27, 3:24). 그리고 하나님말씀을 지키고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갈 있도록 성령님께서 그리스도의 제자인 성도들에게 임재하십니다(24:49, 8:1-15). 성령님의 인도와 능력 주심으로 말미암아 성도들에게 복음적인 삶과 세계선교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1:8).

(3)   그와 같은 의미를 전제로 하여 사도 바울이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습니다; “또한 본래 무할례자가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율법조문과 할례를 가지고 율법을 범하는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겠느냐?”(2:27); 그러므로 해석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무할례자인 이방인들이 그리스도의 은혜로 칭의를 얻고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실천하게 되는 것을 사도 바울이 무할례자가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2)      반면에 선민 유대인들 대부분은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가 필요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유는 자신들이 죄인이 아니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 보기에 율법을 지키고 있으며 또한 선민이라고 하는 표징인 할례를 가지고 있으므로 그것으로 충분한 의인이라고 서로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3)      따라서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시면서 아버지 하나님께 구하여 보내어 주시는 성령님의 임재나 내주 역사하심의 은혜를 누릴 수가 없습니다. 오로지 선민들은 자신들의 결단과 노력으로 모든 율법의 의를 이루고자 계속 노력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입니다.

4)      결국 선민들은 율법을 온전히 지키는데 있어서 실패하고 맙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와 성령님의 도우심을 얻어서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실천하고 있는 이방인 성도들이 할례와 율법을 자랑하고 있는 선민들도 수가 없구나 하고 비판을 하더라도 그들은 말이 없는 것입니다; “율법조문과 할례를 가지고 율법을 범하는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겠느냐?”(2:27b).

셋째로,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2:28); 이제는 겉으로 드러나는 육체적인 표시로서 할례를 하고 있다는 유대인들이 선민이 아닙니다. 진정 하나님 보시기에 거룩한 백성은 하나님의 뜻을 올바르게 실천하는 자들입니다. 그렇게 진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먼저 인정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그동안 육체적인 할례를 자랑하고 하나님 보시기에 눈속임용의 율법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선민 유대인들은 그만 스스로 의인인 착각을 하게 되어 자신이 하나님 보시기에 의롭지 못하다고 하는 사실을 인정하거나 신앙 고백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자리에 정직하게 나아가지 못하게 만들고 있는 그러한 육체적 할례와 외식적인 율법생활이 무슨 가치가 있으며 무슨 효용성이 있겠습니까? 그와 같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바울의 명제가 다음과 같습니다;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2:28). 그렇다면, 진정한 할례는 무엇이며, 진짜 선민은 누구일까요?

넷째로,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2:29);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 할지니”(2:29a); 진정한 할례는 육체에 하는 할례가 아니라 마음에 새기는 할례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으므로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생활에 적용하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인생을 살아가야만 한다고 결심하는 그것이 마음에 하는 할례입니다.

(2)   있고 율법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2:29b); 그때에는 사람이 만든 율법의 뜻이 아니라 진정 하나님께서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을 위하여 필요로 하는 말씀의 뜻을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깨닫도록 하여 주실 것입니다(고후3:6). 진리를 깨닫고 실천할 있도록 영적으로 도와주기 위하여 성도님들에게 임재하여 역사하시는 분이 바로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3)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2:29c); 의롭다고 하는 진정한 칭찬과 인정이 누구로부터 비롯되는 것일까요? 사람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유는 구원 영생과 관련되는 사항은 전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소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서 제자로서 만민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그들의 구원을 위하여 헌신하는 삶을 살아갈 때에 비로소 그러한 성도의 삶이 의로운 것이라고 칭찬하시며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서 영생을 누릴 있도록 조치해주시는 것입니다(21:27).

결론적으로, 사도 바울은 선민의 할례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온전히 지키고 실천하는데 도움이 때에 의미가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선민 유대인들이 단지 할례와 율법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자랑해서는 안됩니다. 진정 자랑하기를 원한다면 할례를 받은 선민으로서 부끄럽지 아니하게 하나님의 뜻을 율법으로 제대로 실천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방인들에게 보여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사실을 말하면서 사도 바울은 이방인 성도들이 육체적인 할례가 없더라도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온전히 실천하고 있으면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통하여 의인이라고 칭찬하여 주신다고 하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일찍이 모세가 언급한 마음에 할례 해당한다고 하겠습니다(10:16).

그러므로 성령님께서 성도들의 마음에 새겨 주시는 확인 도장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은 의인이며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이 진짜 할례입니다(8:14-15, 고후3:3). 아무쪼록 그러한 사실을 명심하고서 남은 인생을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만민구원과 하나님나라 건설에 매진하시는 성도님들이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