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로마서 강해 제14강(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1. 3. 13. 02:20

로마서 강해 14(2:17-24)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7 1 14()

 

율법선생과 유대교의 지도자들은 무엇으로 심판을 받는가?(2:17-24)

 

사도 바울은 그의 이름을 작은 라고 하는 뜻을 가진 바울 개명하기 전에는 한때 백성들에게 율법을 가르치는 랍비였으며 이름이 사울입니다(8:1, 9:1-4). 사울이란 그의 이름은 조상 가운데 가장 뛰어난 인물인 이스라엘 왕국의 초대 사울의 이름을 따온 것으로 보입니다(삼상10:20-24). 왜냐하면, 사도 바울은 그의 집안이 사울 왕과 같은 베냐민 지파라고 차례나 밝히고 있기 때문입니다(11:1, 3:5). 따라서 학자들은 사울이란 이름의 뜻이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랍비 사울이었을 때에 그가 스스로 라고 자부했던 것들이 이제는 이방인 사도인 바울이 되고 보니까 하나님 앞에 겸손할 수밖에 없는 작은 달리 보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그의 경험론적인 인식에 비추어 살펴볼 필요가 있는 글이 바로 본문이라고 하겠습니다. 그와 같은 시각에서 잠시 생각을 해보면 본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1)   첫째, 그의 옛날 이름 사울 의미하고 있는 그대로 랍비들은 선민 유대인들에게 율법을 가르치고 있는 자신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2:17). 그리고 백성들은 자신에게서 배우고 있는 사람들이므로 낮은 자이고 자신은 그들을 가르치고 있는 선생이므로 자이며 종교적인 지도자라고 인식하고 있습니다(2:20).

(2)   둘째, 그와 같은 자의식이 강해지고 같은 랍비들 사이에 공유가 되다가 보니까 자신들도 모르게 하나의 집단적인 계급의식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이며 율법선생인 랍비들 자신들이야 말로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의 수호자이며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백성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위대한 자라는 것입니다(2:18-20).

(3)   셋째,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정확하게 알고 있는 집단인 자신들은 백성들의 심판을 받지 아니한다는 것입니다. 나아가서 하나님의 심판에서도 면제를 받고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1)      그와 같은 인식이 팽배하다가 보니까 자신들도 모르게 스스로 율법의 위에서 군림하는 계급들이 되고 있습니다(2:21-23).

2)      율법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모르고 있는 백성들이 지켜야 하는 것이지 율법에 밝은 랍비들은 벌써 알고 있으므로 그것에 구애를 받지 아니한다는 잘못된 인식을 가지게 것입니다.

3)      그것은 마치 법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위에서 생활하다가 보니까 그만 법비’(法匪, 법을 이용하여 비적이 되는 ) 되어 법의 정신을 얕보게 되는 것과 비슷합니다.

(4)   넷째, 그것이 율법선생들과 유대교지도자들의 비극입니다. 마디로, 그들은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에서 벗어나버리고 것입니다. 그렇지만, 창조주 하나님은 율법선생이거나 종교적인 지도자이거나 상관이 없이 모두 똑같이 취급하고 있습니다;

1)       왕이나 제사장 또는 선지자라고 하더라도 율법을 위반하게 되면 같은 잘못을 범한 것으로 보고 계십니다.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다윗의 경우라고 하더라도 그러합니다(삼하12:7-15).

2)      그것은 현대적인 법치국가의 모습과 같습니다. 아무도 위에서 군림하거나 예외적으로 특혜를 누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한 개인이나 계급이 법치국가에서나 교회에서나 존재할 수가 없다고 하는 의미입니다.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유대인이라 불리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율법의 교훈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분간하며”(2:17-18); 하나님을 섬기는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율법이라고 하는 법률체계로 다듬어 그들의 사회를 운영하게 되면 어떠한 유익이 있을까요? 그와 같이 사상이나 제도의 유익성을 따지고 있는 민족이 로마인들입니다. 광대한 제국에 자신들이 만든 만민법을 적용시키고 있는 자들이 소위 로마제국의 수도에 살고 있는 로마시민들입니다. 그들은 실용주의 정신이 강하므로 자신들의 것보다 효과적이거나 우월한 사상과 제도가 있으면 망서리지 아니하고 그것을 흡수하여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어 사용합니다. 그러한 로마시민들의 사고방식을 알고 있는 사도 바울이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몇가지 사실을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1)   첫째, “유대인이라 불리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2:17); 유대인들은 율법을 의지하여 그들의 선민사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비록 주전 586년에 그들의 다윗왕조 유다 왕국이 멸망을 당했지만 아직도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율법을 가지고 선민사회의 기강과 풍습을 바로잡아 나가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유대인들의 종교적인 자치능력을 로마제국에서도 인정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유대교의 자치권을 인정하고 산헤드린 공회가 종교적으로 유대인들을 치리(治理, ruling by God’s law) 있도록 허락을 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에 따라 비록 로마제국의 속국으로 살고 있다고 하더라도 유대인들은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대내외적으로 자랑하고 있습니다; “ 세상에서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오직 이스라엘의 자손인 유대인만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선민들을 이방인들과 구별하기 위하여 생활규범으로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선민으로서의 자부심을 가지며 율법을 주신 하나님을 자랑하지 아니할 도리가 없다는 것입니다”(2:17 의역).

(2)   둘째, “율법의 교훈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분간하며”(2:18); 율법의 효능은 무엇보다도 의미를 깊이 생각하면서 생활에 적용해보게 되면 하나님의 뜻을 수가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세상의 법률과 하나님의 율법이 어떠한 차이가 있는지 크게 구별이 되지를 않습니다. 하지만 율법을 실생활 가운데 적용하여 살아가다가 보면 하나님의 지혜와 창조주의 능력이 선민에게 드러나게 됩니다. 거룩한 , 생명을 돌보고 살리는 삶이 가능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선민들은 율법생활을 통하여 세상적인 것과 하나님의 것을 구별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법인 율법은 자체 생명을 살리고자 하는 하나님의 선한 뜻을 담고 있는 거룩한 법입니다(2:18).

둘째로,맹인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둠 있는 자의 빛이요, 율법에 있는 지식 진리의 모본 가진 자로서 어리석은 교사요, 어린아이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2:19-20); 율법선생인 랍비가 자신들이 행하고 있는 직분이 성직이라고 자부심을 가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합니다. 그리고 성스러운 직분이 랍비들의 삶을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도록 거룩하게 만들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와 같은 랍비들의 자부심이 나중에는 그들에게서 율법을 배우고 실천하고 있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확산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한 사실을 사도 바울이 요령 있게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1)   맹인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둠 있는 자의 빛이요”(2:19); 여기서의 맹인은 영적인 소경을 말하고 있습니다. 육신적인 눈은 보이지만 영적인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보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보시기에 영벌(永罰, eternal punishment) 향하고 있는 인생길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누가 그것을 바로잡아줄 수가 있을까요? 첫째, 율법선생인 랍비들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풀이하여 가르쳐 줌으로써 영적인 어두움에 빠져서 하나님의 진노 가운데로 들어가고 있는 사람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해줄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칠흑같은 어두운 바다를 비추고 있는 등대의 밝은 빛과 같습니다. 둘째, 이방인들에 대해서는 그와 같은 역할을 선민 유대인들이 수행할 수가 있습니다. 그들이 그러한 역할을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 속에 생명의 빛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이신 하나님)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1:4).

(2)   율법에 있는 지식 진리의 모본 가진 자로서 어리석은 교사요, 어린아이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2:20);

1)      여기서 사도 바울이 율법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은 히브리정경인 타나크 미크라 말하고 있습니다. 흔히 모세오경을 일컬어 토라또는 율법서라고 말하고 있는데 그것보다는 넓은 의미로 보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정경에 담겨 있는 글에 하나님에 관한 진리와 지식이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2)      사도 바울이 어린시절 예루살렘으로 유학을 가서 바리새인의 스승인 가말리엘에게 사사하여 배운 바에 따르면(22:3) 랍비들이 깨우치고 있는 하나님의 지식은 실로 놀라운 것이며 진리 자체라고 부를 있는 것입니다(2:20a).

3)      그러므로 후에 랍비가 사울은 유대교의 정경과 미드라쉬 바리새인들의 주석이야말로 창조주의 뜻을 수가 있는 진리 자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에 따라 유대교의 진리를 버리고 기독교인이 유대인들을 잡아서 이단으로 다스리는 것이 심히 당연하다고 여긴 것입니다(8:1, 22:4).

4)      하나님의 지식과 진리가 풍성한 히브리정경과 주석을 매일 보고 있으니 랍비야 말로 어리석은 백성을 가르쳐 하나님을 아는 지혜자로 만들어 주고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생활을 하고 있는 백성들을 성숙한 신앙인으로 만들어 주는 사람들입니다.

5)      그런데 그와 같은 자부심은 선민들이 이방인들을 상대함에 있어서도 동일합니다. 이방인들은 모두 선민 유대인들에게 와서 하나님의 진리와 지혜에 대하여 물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유대인들은 히브리정경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지혜와 진리에 대하여 그들에게 가르쳐주게 것입니다.

셋째로,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자신은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둑질하지 말라 선포하는 네가 도적질하느냐?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전 물건을 도둑질하느냐?”(2:21-22); 앞절에서 사도 바울은 의도적으로 모본’(模本, 모범과 본보기)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2:20).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말로 가르치는데 멈추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선생이 제자들에게 먼저 실천하는 본보기를 보인다는 의미입니다(2:21a,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자신은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히브리경전과 주석 등을 공부하여 율법선생이 랍비들은 백성들에게 말로써만 율법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모범적인 행동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의 뜻과 율법의 의미를 입체적으로 보여 주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의미에서 당시 랍비들과 유대교의 지도자들이 백성들에게 율법생활의 모범을 보여주지 못하고 먼저 타락하여 실족하고 있는 사례들이 다음과 같습니다;

(1)   도둑질하지 말라 선포하는 네가 도적질하느냐?”(2:21b); 도둑질은 남의 재화를 슬쩍 훔치는 것을 말합니다. 주인이 주의를 기울이지 아니하는 사이에 재빠르게 가로채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남이 보지 아니하는 경우에는 율법을 위반하면서도 겉으로만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자신들이 의롭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당시의 율법선생들인 바리새인들입니다(2:21b). 그것은 겉과 속이 다른 신앙인의 자세입니다. 그와 같은 눈속임 위주의 외식적인 믿음생활에 대하여 사도 바울보다 먼저 갈파를 하시고 따갑게 지적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23:25-28).

(2)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2:22a); 랍비들과 유대교의 지도자들은 성직자들입니다. 그들이 십계명을 어기고 있습니다. 중에 심각한 것이 성적인 타락이라고 사도 바울이 지적하고 있습니다(2:22a). 옛날 다윗 대왕이 실수를 했던 것처럼 배꼽아래의 실수를 유대교의 지도자들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현상은 지도자 그룹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유대인 백성들도 그러합니다. 사실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 예수님의 다음 행적입니다; “너희 중에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그들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8:7-9).

(3)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전 물건을 도둑질하느냐?”(2:22b); 창세기 31장에 기록이 되어 있는 드라빔 사건’, 라헬이 친정아버지 라반의 드라빔을 훔친 사건을 참조하지 아니하면 이해하기가 힘든 대목입니다(31:19-20);

1)      라헬의 남편인 야곱은 약속의 아들 이삭의 차남이면서 장차 영적인 장자가 되는 이스라엘입니다(28:13-22, 35:9-13). 그런데 그녀는 하나님신앙을 깜빡하고서 그만 친정아버지의 드라빔, 권위있는 모습의 우상이 새겨져 있으며 보석으로 치장이 되어 있는 족장의 홀을 도둑질하고 있습니다(31:19).

2)      만약 라반이 라헬에게 드라빔을 선물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우상이 새겨져 있는 물건이므로 사양을 해야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헬은 그것이 비싼 물건이라고 탐을 내어 앞뒤없이 헤어지는 마당에 슬쩍 훔쳐낸 것입니다. 훗날 라헬은 그것이 잘못임을 깨닫게 됩니다. 따라서 세겜 교외에 신상을 묻어버리고 벧엘의 하나님을 찾아가서 제사를 드리며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의 여인으로서 거듭난 인생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35:4-15).

3)      우상을 가증히 여긴다고 하는 의미는 창조주 하나님을 존귀하게 여기고 섬긴다고 하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보다 귀하게 여기고 있는 것이 있다고 하면 그것이 우상이며 가증한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교의 지도자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성전에서 여호와보다 귀한 것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십계명 가운데 8계명, “도둑질하지 말라”(20:15) 규정을 어기고 신전의 물건을 슬쩍 사유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지적은 2천년 전의 일이지만 그것이 상당부분 오늘날에도 그러한 것만 같습니다. 하나님의 것을 사유화하는 것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넷째로,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 때문에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 도다”(2:23-24); 앞의 구절들이 주로 랍비와 유대교의 지도자들의 잘못에 대한 지적들이라고 한다면 대목은 유대백성들을 포함하여 선민 모두의 허물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1)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2:23); 마디로, 선민 유대인들이 너나 없이 모두가 율법을 범하고 있으며 그것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욕보이고 있다는 것입니다(2:23). 선민들은 세상적인 법률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율법으로 조문화하여 그것으로 사회를 움직여 나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강제성을 지닌 세상의 법률보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움직여지고 있는 선민들의 사회가 얼마나 인간의 존엄성과 자율성을 존중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참으로 자랑거리가 아닐 없습니다. 그런데 불행한 사실은 선민들이 율법을 자율적으로 지키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꾸만 유대인들이 송사를 많이 벌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율법을 어기고 십계명을 어기는 행위를 서슴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눈가림의 율법사회는 하나님을 속이고 있는 사회입니다. 그리고 이방인들도 유대인들의 잘못된 행동을 보게 됨다면 아예 하나님을 믿으려고 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2)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 때문에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 도다”(2:24); 로마인들은 실용적인 것을 좋아합니다. 그러므로 실제적인 효과가 있어야 그러한 사상이나 제도를 채용하여 사용하려고 합니다;

1)      지금 사도 바울은 로마교회의 성도들에게 하나님신앙의 위대성과 복음의 효과성에 대하여 설명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가운데 우선 율법사회를 고수하고 있는 선민사회의 우수성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특히 하나님말씀인 율법을 가지고 선민들이 사회생활을 결과 다른 이방인 사회보다 훨씬 백성을 귀하게 여기고 백성들이 사람대접을 받고 있는 좋은 사회생활을 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어합니다.

2)      하지만 차마 그렇게 말할 수가 없습니다. 이유는 그가 경험한 랍비의 신앙생활이나 유대인 백성들의 사회가 그렇게 진리 위에 서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선민들의 이중적인 신앙생활과 외식적인 측면을 이방인들이 세세하게 알게 되면 크게 실망할 것입니다. 특히 사상과 제도의 실용성을 따지고 있는 로마시민들은 하나님신앙을 받아 들이려고 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사회를 정화시키지도 못하고 백성들을 거룩한 삶으로 인도할 수도 없는 그러한 종교를 받아들일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대교의 현실을 두고 보면 바울의 결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 때문에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 도다”(2:24). 그것은 바울이 이사야 선지자의 , “ 이름을 항상 종일토록 더럽히도다”(52:5) 구절을 적절하게 인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본문은 마치 율법선생과 유대교의 지도자들은 무엇때문에 심판을 받을까? 하는 질문에 대하여 답을 해주고 있는 같습니다(2:17-24). 겉으로 보면, 그들은 율법을 지키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같습니다. 하지만 속을 들여다보게 되면 정반대입니다. 세속적인 모습들이 적나라하게 담겨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이방인의 사회보다 추악해 보입니다. 종교적인 지도자들이 그러하므로 선민인 백성들도 그러합니다. 지도자의 모범을 금방 따라가고 있는 것이 백성들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벌거벗겨 놓고 보면 하나님의 이름에 먹칠을 하고 있는 선민사회입니다. 이제 어떻게 하면 사회를 거룩한 사회로 되돌릴 수가 있을까요? 사도 바울이 로마교회의 성도들에게 궁극적으로 설명해주고 싶은 것은 바로 해답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유일한 처방이 하나님의 복음을 실천한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을 본받는 것이라고 그의 서신서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8:1-2, 고전11:1).

사도 바울이 경험한 선민 유대인의 사회가 오늘날 한국사회와 별로 달라 보이지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사회를 다시 정화시킬 있는 처방도 동일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의 의미를 곱씹어 보아야만 합니다. 결과 성도와 백성들이 복음적인 삶을 살아가야만 합니다. 그러한 치유와 회복의 역사가 하나님의 은혜로 한국사회와 모든 교민들에게 임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