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로마서 강해 제11강(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1. 3. 11. 07:27

로마서 강해 11(2:6-8)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7 1 11()

 

영생을 얻는 자와 반대로 하나님의 진노와 분노를 당하는 자의 차이가 무엇인가?(2:6-8)

 

사도 바울은 로마서 2장에 들어서면서 제국의 수도인 로마시에서 초대교회를 세우고 성도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당부의 말씀을 드리기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요지는 광대한 로마제국을 움직이고 있는 권력자들의 수도인 로마시에 그들과 함께 살고 있는 로마교회의 성도들은 두가지 측면에서 하나님의 복음과 교회생활을 잘못 이해할 수가 있으므로 조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1)   첫째, 만민평등법을 자랑하고 있는 로마제국이지만 지배계급에 속하고 있는 로마시민에 대해서는 예외적인 특권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법을 적용하는데 있어서도 로마교회의 성도들은 자신들만은 예외적으로 특권을 누릴 수가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는 것입니다. 점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복음의 진리를 가지고 2 1-5절에서 그렇지가 않다는 사실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2)   둘째, 로마시민들은 자신들의 뜻으로 로마제국을 운영하듯이 그렇게 자신들이 하나님의 나라도 운영하는 주체가 있다고 사고(思考, 뜻을 헤아리고 생각함)하고 있습니다;

1)      그것은 잘못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만으로 통치가 되고 있는 영생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2)      그러므로 이방인인 로마의 성도들이 창조주가 예비하신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생의 복을 선민들과 함께 누릴 있게 되는 것만으로도 사실은 감지덕지(感之德之, 참으로 고마운 은혜에 해당하는 ) 일입니다(11:16-18).

3)      따라서 남은 인생 가운데 복음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하나님의 공의를 실천하는 삶을 신실하게 살아가야만 합니다(2:6-8).

그와 같은 두번째의 내용을 사도 바울이 설명하고 있는 것이 본문의 구절들입니다. 따라서 이제부터 본문의 구절들을 하나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행한 대로 보응(報應, 받은 그대로 되갚아주는 )하시되”(2:6); 오늘날에는 사람에게 행한 대로 보응하신다라고 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당연한 명제로 이해가 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주후 20세기가 시작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명제는 현실적인 설득력을 얻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1)   고대사회와 중세사회는 개인주의 사상이 있는 토대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고대 가부장사회와 중세 봉건주의사회에서는 개인이 개인을 만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1)      사람이란 그가 속한 집안과 가문에 따라 신분이 달라집니다. 그러므로 개인이 개인을 만나고 있는 사회가 아니고 개인을 통하여 그의 집안배경과 만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타고난 신분을 바꿀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국가의 의사결정은 왕과 귀족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기타 계급은 그저 종살이를 하고 있을 뿐입니다.

2)      사실 개인주의 사상이 확고하지 못한 현대사회에서도 여전히 그러한 경우가 왕왕 있습니다. 개인과 개인이 만나서 인간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집안이나 배경을 먼저 보고 접근하고 있는 것입니다. 배경을 보고서 사람의 가치를 평가하면서 인간관계를 형성합니다. 그러한 사회는 불행하게도 의식과 문화면에서 아직도 전근대적인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2)   산업근대화가 이루어지면서 근대사회가 성립이 됩니다. 그때가 되면 귀족과 평민이라는 과거의 신분이 사라지는 대신에 자본을 가진 자와 그러하지 못한 자로 다시 새로운 귀족과 평민이 나타나게 됩니다;

1)      이제는 자본이라고 하는 것이 새로운 신분의 척도가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학식과 기술이라는 재능도 또다른 자본으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제는 사람을 때에 개인적으로 먼저 가진 재능과 자본을 먼저 보게 됩니다.  

2)      봉건사회에서 집안의 신분을 먼저 보던 것이 약간 달라지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지만 새로이 자본을 가진 시민들이 참정권을 가지고 정치에 참여하게 것이 커다란 변화라고 하겠습니다. 투표권은 재산과 재능의 차이에 따라서 달라지고 있습니다.

(3)   19세기에 변화가 발생합니다. 개인주의 사상이 정치적으로 힘을 얻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인 일표주의’(一人一票主義, 사람이 하나의 투표권만 행사한다는 사상) 서서히 진행이 되게 됩니다; 첫째, 가장 먼저 재산의 많고 적음에 따라서 투표의 수가 달라지던 것이 개인당 표씩 주어지게 됩니다. 둘째, 다음에 학식의 차이에 따른 불평등이 없어집니다. 셋째, 여성의 참정권은 여전히 제한이 됩니다

(4)   20세기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뉴질랜드에서 여성의 참정권이 인정이 됩니다. 그때부터 남녀를 막론하고 일인일표주의에 따른 참정권이 제도화되기 시작합니다. 그러한 시대를 경험하면서 개인주의 사상은 현대의 확고한 특징으로 자리를 잡게 됩니다. 그러므로 주후 1세기에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외치고 있는 하나님의 ,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2:6)라는 명제는 무려 2천년 가까운 시간을 뛰어넘고 있는 주장이며 공간적으로도 로마제국이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확장이 되고 있는 마치 핵폭탄과 같은 선언입니다. 당연히 그러한 복음사상을 처음 듣게 되는 로마교회의 초대성도들은 어안이 벙벙했을 것입니다.

  둘째로,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2:7); 6절이 원자탄의 위력을 가지고 있다고 하면 여기 7절의 말씀은 그보다 수소폭탄의 위력을 지니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100살을 살기가 지극히 어려운 고대 로마사회에 살고 있는 성도들에게 장차 하나님께서 죽지 아니하는 영생의 나라를 그들에게 주실 것이라는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무엇을 믿고서 사도 바울이 그렇게 로마의 성도들에게 소리를 치고 있는 것일까요?

(1)   첫째, 사도 바울은 20 전에 다메섹 도상에서 놀라운 영적인 체험을 했기 때문입니다(9:3-7). 다메섹에서의 바울의 영적인 체험의 핵심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가지시고 자신 앞에 현신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놀라운 영적인 체험을 통하여 가지를 깨닫게 됩니다; 첫째, 예수님이 부활하셨으며 승천하셨다는 것입니다(9:3-4, 고전15:8). 둘째, 하나님의 영광을 가지시고 바울 자신 앞에 현신을 하셨다는 것입니다(9:5, 22:8-9). 셋째, 바울에게 이방선교를 부탁하셨다는 것입니다(9:6, 15, 22:10, 21). 넷째, 이방인 사도로서 끝까지 충성하면 바울 역시 부활의 몸을 입고 승천하여 하나님의 영생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3:10-12).

(2)   둘째, 히브리경전에서 메시아에 대한 예언을 다시 공부하였기 때문입니다(24:44-49).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40일간 사도 제자들과 함께 지내시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천국복음으로 요약하여 말씀하십니다. 주요내용을 의사 누가가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습니다; “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모세의 율법 선지자의 시편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24:44-45). 의사 누가는 사도 바울의 주치의입니다. 그는 사도 바울의 세계선교여행에 동행을 하면서 바울로부터 예수님에 관한 많은 이야기를 전해 듣고서 그의 복음서를 작성하고 있습니다(1:3-4). 그러므로 위의 누가의 기록은 바울의 경험을 반영하고 있다고 있습니다. 바울은 다메섹에서 놀라운 영적인 체험을 다음에 과연 나사렛 예수가 누구이신가? 대하여 히브리정경을 검토하면서 오랜 세월 다시 공부한 것으로 보입니다(1:18, 2:1). 결과 구약의 메시아 예언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대속의 삶과 죽음이 그대로 들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미 예언이 예수님의 생애를 통하여 성취가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사도와 제자들 그리고 백성들에게 말씀하신 영생의 하나님나라가 확실한 것입니다(9:27, 11:20, 14:1-3).

(3)   셋째, 세차례의 선교여행에서 놀라운 성령님의 역사를 체험하였기 때문입니다(16:6-40). 사도 바울 일행의 발걸음을 성령님께서 인도하십니다. 그것은 마치 옛날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여호와께서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앞세워서 인도하신 것과 같습니다(13:21-22). 그래서 소아시아에서 유럽선교로 인도하십니다(16:6-15). 그리고 성령님의 역사는 사도 바울을 여러 죽음에서 다시 살려주고 있습니다(고후11:23). 지진이 발생하고 옥문이 열리고 있습니다(16:25-26). 끝까지 복음을 이방인들에게 전하게 하시고 마침내 하나님나라로 인도하고자 하십니다. 그와 같은 체험을 로마교회의 성도들도 함께 맛볼 있기를 바울이 진심으로 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서신에 적고 있습니다; “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2:7). 요컨대, 사도 바울처럼 이방인 선교를 위하여 끝까지 충성하게 되면 영광과 존귀와 영생의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가 있으며 땅에서도 그것을 맛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8:10-18).

  셋째로, “오직 (, 힘을 뭉친 무리)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2:8);

(1)   하나님께서는 개인별로 심판하고 또한 구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신분의 사람이든지 집단적으로 어떠한 위치에 있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세상적인 지위와 신분이 사람 개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오로지 하나의 인간으로서 어떻게 창조주의 뜻을 깨닫고 그것을 인생 가운데 실천했는지가 중요합니다. 만약 평생을 세상의 영광을 추구하고 세상적인 성공을 위하여 헌신했다고 한다면 그러한 자는 세상의 것이 자신의 몸과 함께 썩고 사라질 때에 아무 것도 얻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2:8b).

(2)   반면에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예수님의 복음으로 깨닫고 그것을 끝까지 성취하고 실현하는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인생을 살아갔다고 한다면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상급을 얻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참고로, 상급의 내용이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인생을 살아간 자는 부활 승천하여 영생의 하나님의 나라에서 세상을 다스리는 권세를 누리게 것입니다”(22:28-30의역).

(3)   그러한 복음의 이치를 깨닫지를 못하고 집단적인 세상의 관념을 가지고 똘똘 뭉쳐서 반론을 전개하면서 하나님의 뜻에 맞서고 있는 무리들이 있습니다(2:8a). 그들은 개인별로 심판하고 또한 구원을 베푼다고 하는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의 원칙을 참으로 싫어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시대에 있어서 특히 그들은 그러한 개인주의가 확립된 사회에 살고 있지 않기 때문에 더욱 그러합니다.

(4)   로마교회의 성도들은 대체로 자신들이 속하고 있는 집안과 가문과 권력과 부가 대단합니다. 또한 그들과 혼맥을 맺고 있는 가문들도 대단합니다. 따라서 로마제국에서 특권층으로 살고 있는 로마시의 시민들은 참으로 살기가 좋습니다. 그들은 그러한 기득권과 특권을 영원히 누리고자 합니다. 그래서 세습을 하고 있으며 로마제국이 영원하기를 소원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헛된 소망입니다. 왜냐하면, 창조주의 역사섭리의 법칙에서 벗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렇게 계속 특권층의 무리 가운데서 살아가게 되면 하나님의 진노 가운데 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와 같은 이치를 거듭 설명하고 있는 사도 바울의 말씀이 다음과 같습니다; “오직 (, 힘을 뭉친 무리)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2:8).

결론적으로, 사도 바울이 로마제국의 수도인 로마시에서 성도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은 집단을 대상으로 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개인별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명심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2:6). 그러므로 로마제국에서 특권층에 속하고 있는 로마시의 시민이라고 하더라도 그들이 교회생활을 하면서 성도의 삶을 살아가게 되면 생각과 마음가짐이 세속적인 사람들과는 달라야 합니다.

세상사람들은 끼리끼리 특권계층을 이루어 자신들의 기득권을 세습하면서 세상의 낙을 영원히 누리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그리해서는 안됩니다. 그렇게 끼리끼리 무리를 지어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행하며 또한 그렇게 불의를 행하는 자를 의롭다고 무리가 되어 변호를 하게 되면 하나님의 진노 가운데로 들어가게 되기 때문입니다(1:32, 2:8).

깊이 묵상해보면, 도저히 그냥 흘려 들을 수가 없는 사도 바울의 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이 살고 있는 21세기의 세상사가 대부분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개인주의가 극히 발달하고 있다고 하면서도 세상은 가진 자와 가진 자로 자꾸만 새로운 계급과 계층으로 분리가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끼리끼리 뭉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부와 권력의 기득권은 자꾸만 세습이 되고 가난도 대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마치 고대와 중세의 신분사회가 다시 도래한 것만 같습니다.

그러므로 혼자서 믿음생활을 올바르게 한다고 복음적인 삶을 살아가게 되면 자꾸만 외로워지게 됩니다. 그러한 현실 가운데서 다시 눈을 들어 영생의 하나님께서 마련하고 계시는 나라를 소망 가운데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하면 진리의 성령님의 역사로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자신과 함께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재삼 발견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아무쪼록 그러한 영적인 눈을 크게 뜨실 있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