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로마서 강해 제10강(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1. 3. 10. 04:46

로마서 강해 10(2:1-5)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7 1 10()

 

남을 판단하는 위치에 있는 로마의 권력자들이 창조주 하나님을 두려워해야만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2:1-5)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제국의 수도인 로마에 살고 있는 성도들에게 예수님의 복음이 그들에게 어떻게 적용이 되고 있는지를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특히 바울은 만민법을 운용하면서 동시에 자신들의 특권을 향유하고 있는 로마시민들의 이중적인 잣대의 문제점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2:1-5).

로마제국은 자신들의 법이 만민을 평등하게 다루고 있는 선진법이라고 자랑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겉과 속이 다른 주장입니다. 왜냐하면, 로마시민에게는 적용을 배제시켜 놓고서 제국 내의 다른 모든 족속들에게 만민평등법인 로마의 법을 지키라고 강요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디로, 그것은 이중적인 잣대이며 왕자무치’(王者無恥, 왕은 법과 도덕을 지키지 않아도 위법과 수치가 되지 않는다고 하는 독재자의 사고방식) 같은 지배자의 삐뚤어진 논리에 불과한 것입니다(2:1-3). 그러한 이중구조 때문에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에서 멀어지고 있습니다. 결과 하나님의 진노로 로마의 특권층은 물론 제국전체의 멸망이 다가오는 것입니다(2:4-5).

그와 같은 이방인인 로마시민들을 향한 사도 바울의 주장은 일견하더라도 선민 유대인들과 특히 그들의 율법선생인 바리새인들에 대한 예수님의 비판과 흡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당시에 선민들에게 율법을 가르치고 있는 바리새인들의 외식적인 신앙생활에 대하여 강하게 질책하신 바가 있습니다(23:2-36).

그런데 곰곰이 생각을 해보면,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헤브라이즘의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그것은 유일신 여호와만을 섬기는 () 중심의 사회에 살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에 비해서 로마의 사람들은 헬레니즘의 영향을 받아 인간중심의 사회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창조주 여호와를 섬기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인간이 삶의 주체입니다. 그리고 로마시민들은 실제적인 인간의 삶을 더욱 중시했기에 사실은 헬라인보다 하나님을 떠나 인간중심의 사회에 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와 같은 내용들을 이해하기 쉽도록 다음과 같이 설명을 해보고자 합니다;

(1)   첫째, 사도 바울이 장차 방문하고자 계획하고 있는 도시 로마는 로마제국의 수도입니다. 그곳에는 로마의 시민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로마제국을 지배하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들의 사상과 사고방식이 로마의 세계를 경영하고 있는 시대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중적인 가치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그들보다 정신적으로 그리고 문화적으로 우세한 헬레니즘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것이 로마세계의 인본주의적인 철학과 학문 그리고 예술을 구성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정치 경제 사회 그리고 군사부문에서 로마인들은 자신들의 전통적인 실용주의 제도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습니다.

(2)   둘째, 로마인들은 그렇게 상부구조를 헬레니즘으로 채운다고 하더라도 끄떡이 없습니다. 이유는 로마시민들은 전통적으로 강력한 실용주의라고 하는 도구사상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로마인들은 자신들에게 도움이 된다고 판단하면 어떠한 사상이라도 받아 들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훗날 로마제국을 재통일한 콘스탄틴 황제는 그러한 맥락에서 만민구원과 평등의 종교인 기독교를 국교로 채택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제국의 주인은 여전히 자신들입니다. 그러므로 제국의 통치체제와 사회적인 계급구조가 확실합니다. 예를 들면, 자신들에게 예술과 학문 헬레니즘을 가르치고 있는 그리스 출신의 철학자들과 예술인들은 그들의 스승입니다. 하지만 스승들의 계급은 여전히 노예입니다.

(3)   셋째, 제국을 통치하는 결정적인 요소들인 정치제도와 법제도 그리고 군사제도 나아가서 군사시설과 도로망의 확충 등은 모두 로마의 전통적인 실용주의의 산물입니다. 그것이 강력한 것이기에 기타 필요한 부문에 있어서 남의 것을 가져와서 사용하더라도 전혀 문제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모습은 마치 20세기 후반 중국의 실용주의 지도자 등소평의 백묘흑묘론’(白猫黑猫論, 쥐만 잡으면 검은 고양이이든지 고양이이든지 전혀 상관이 없다는 극단적인 도구주의를 말하고 있음) 미리 보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은 강력한 공산주의라는 통치체제를 가지고 있기에 경제적으로 자본주의를 도입하더라도 끄떡이 없다고 하는 논리라고 하겠습니다.

(4)   넷째, 그러나 끄떡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이유를 사도 바울이 본문에서 진술하고 있습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는 공의의 정신에 따라 만민과 만물을 공평하게 치리(治理, 이치에 맞게 다스림)하십니다. 예외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예를 하나 들어 보자면, 옛날 다윗대왕이 십계명을 위반하여 간음죄와 살인죄를 저질렀을 때에 나단 선지자를 보내어 강력하게 잘못을 질책하십니다(삼하12:7-9).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용서를 빌고 있는 다윗대왕에게 사후징계에 관하여 예언의 말씀을 전합니다; “평생동안 칼날 위에서 살아가도록 만들겠다는 것이 하나님이 벌입니다”(삼하12:10-15). 다윗은 벌을 받겠다고 맹세합니다. 결과 다윗은 죽기 전까지 두번의 왕자의 난과 한번의 지파의 반란을 경험하게 됩니다(삼하15:12-23, 20:1-2, 왕상1:5-11).

(5)   다섯째, 예수님께서는 선민들의 율법선생인 바리새인들이 지니고 있는 외식적인 신앙의 모습에 대하여 강하게 질책하십니다. 마찬가지로 사도 바울이 로마시민들의 특권의식과 이중적인 지배자의 논리에 대하여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로마의 성도들이 만약에 그들에게 익숙한 그러한 이중적인 잣대를 지니고서 신앙생활을 계속한다면 그들의 신앙행태가 장차 바리새인들처럼 변하고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바울의 경고가 본문에서 매우 강력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2:3-5).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2:1);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2:1a); 사도 바울이 로마교회의 성도들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그들에 대하여 남을 판단하는 지위에 있는 사람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로마시민으로서 제국의 수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지위가 대단합니다;

1)      로마시는 이태리 반도에 있는 하나의 도시에 불과하지만 그들이 수백 동안 막강한 로마의 군대를 동원하여 정복한 영토는 광대하며 복속이 나라와 족속의 수는 참으로 많습니다. 역사적으로 페르시아 제국을 헬라가 정복하고 헬라제국을 로마제국이 정복했습니다. 따라서 페르시아제국보다 헬라제국의 영토가 넓고 그것보다는 로마제국의 영토가 광대합니다. 참고로 히브리정경 에스더 1장에 따르면, 페르시아제국에는 127개의 나라와 족속이 소속이 되어 있습니다(1:1).

2)      로마제국의 황제는 황도인 로마시에 살고 있는 로마시민계급에 대하여 특권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특권은 로마제국의 지배층으로서의 신분을 누리게 해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로마시의 시민에 대해서는 사회복지를 확실하게 하고 전리품을 나누어 줍니다. 그리고 모든 속국의 백성들에게 적용하고 있는 만민법에서 예외적으로 특권을 인정해주는 것입니다.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면, 소아시아 길리기아의 다소 출신이지만 사도 바울이 로마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습니다(22:25-29). 따라서 일개 속국을 다스리고 있는 로마총독이 사도 바울을 재판할 수가 없습니다. 로마시민은 자신이 원하면, 반드시 로마시로 보내어 로마황제 앞에서 재판을 받을 있도록 조치해야만 하는 것입니다(25:10-12).  

3)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자신이 알고 있는 바를 먼저 말하고 있습니다; “로마시민으로서 로마시에 살고 있는 자들은 로마제국을 다스리고 있는 특권층에 속하며 속국의 백성들을 판단할 있는 정치적인 지위를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2:1a). 물론 로마교회의 성도들도 대부분 로마의 시민이며 권력자에게 연줄이 닿아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마디로, 정치적 그리고 경제적으로 특혜와 특권을 누리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신분과 지위를 지니고 있는 자가 자칫 빠지기 쉬운 영적인 함정이 하나 있습니다. 이제부터 사도 바울은 점에 대하여 말하고자 합니다.

(2)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2:1b);

1)      세상적인 계급은 다양합니다. 로마제국에 있어서는 정점에 황제가 있고 그를 보좌하는 신하와 관료들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국의 수도에는 특권층인 로마시민들이 살고 있습니다. 기타 속국에 있어서는 로마의 총독부와 군대가 포진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수십개의 나라와 족속들을 다스리고 있는 것입니다.

2)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려고 하는 성도들은 다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신정국가에 소속이 되어 있기에 정점에는 하나님께서 홀로 계십니다. 그리고 다스림을 받고 있는 백성들은 빈부귀천이나 계급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특혜나 특권을 인정 받을 있는 계층과 계급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법은 만민에게 전혀 차별이 없이 적용이 되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로마교회의 성도들도 하나님 앞에서는 전혀 특권이나 특혜를 누릴 수가 없습니다. 그들의 속국의 성도들과 마찬가지입니다.

3)      그러한 하나님의 이치를 모르고서 만약에 초대교회에서 로마교회의 성도들이 로마제국에서 익숙한 그들의 특권을 행사하려고 하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 다른 족속들을 하나님의 법으로 판단하고 재판하며 자신들은 그들을 다스리고 치리하는 계급이므로 자신들에게는 예외적으로 하나님의 법의 적용을 배제하고 있다고 하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하나님께서 그와 같은 종교적인 지배계층과 특권을 예외적으로 인정하실까요? 사도 바울은 그러한 특혜나 이중적인 잣대는 결코 존재할 수가 없다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2:1b);.

(3)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2:1c); 참으로 사도 바울은 창조주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복음이란 차별이 없이 그리고 사람의 예외자가 없이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적용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로마교회의 성도들에게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2:1b). 더구나 남을 비판하고 판단하는 그것으로 같은 비판과 판단을 받도록 하는 하나님의 역사섭리가 발생하게 됩니다. 점을 바울이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2:1c) 말하면서 동일한 하나님말씀의 위반에 대해서는 종교적 지도자라고 하더라도 예외가 일체 없이 똑같은 징계를 받을 따름이라고 확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되는 우리가 아노라.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2:2-3); 사도 바울이 1절에서 말한 명제를 어째서 2-3절에서 다시 풀어서 설명하면서 재차 강조를 하고 있는 것일까요?

(1)   이유는 그가 일찍이 로마교회에 출석한 바가 있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 등에게서 들은 정보에 의하면(18:1-4, 16:3) 교회 성도들의 영적인 문제점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로마시민으로서 오랜 세월 제국의 수도인 로마시에서 누대로 살아온 그들은 특권의식이 팽배해 있습니다. 그들의 조직화된 특혜와 기득권은 설혹 황제라고 하더라도 함부로 수가 없습니다.

(2)   로마제국이 팽창할수록 그들의 지위와 특권계층의 단합은 더욱 공고해지고 있습니다. 그들의 인맥과 혼맥이 그러합니다. 그러므로 로마교회의 성도들이 비록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하나님나라를 소망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몸에 오랜 세월 배어 있는 특권의식을 쉽게 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때문에 로마에 살고 있는 로마시민이 아닌 일부 유대인이나 이방인들이 로마교회에 출석하는 경우 차별이 은연중에 나타나고 일종의 긴장이 조성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한 속사정은 옛날 조선말기 한양에서 먼저 기독교인이 백정 하층민들이 세운 교회에 뒤늦게 양반계급의 성도들이 들어와서 함께 신앙생활을 경우와 비슷합니다.  결국에는 양반출신 성도들이 별도의 교회를 세워서 독립을 하고 말았습니다.

(3)   그러한 현실적인 문제를 안고 있는 로마교회의 성도들에게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의 복음의 핵심을 다음과 같이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되는 우리가 아노라.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2:2-3). 의미를 살펴봅니다;

1)      하나님의 공의를 실천하는 자에게는 상급이 따르고 있습니다. 반대로 공의를 실천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벌이 따르고 있습니다. 사실을 마태복음 25장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가장 작은 소자 하나를 돌보고 생명을 살려주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영생의 은혜를 베푸십니다. 반대로, 생존의 어려움에 처한 자를 외면하는 자에게는 영벌이 기다리고 있습니다”(25:31-46).

2)      하나님의 공의는 누가 실천해야만 하는 것일까요? 혹시 제국의 백성들에게 그렇게 실천하라고 말만하고 자신은 그렇게 행하지 아니해도 되는 예외적인 특권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할 수가 있을까요? 세상 법정에서는 그것이 가능할지도 모르겠습니다.

3)      그러나 하나님의 법정에서는 그러한 특권이나 예외조항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하나님의 진리입니다. 특권층이 있을 없으므로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을 실천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예외가 없이 모두 심판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요컨대, 로마제국의 수도의 특별 시민이라고 하더라도 심판에서 핑계하거나 벗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2:2-3).

셋째로,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다만,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2:4-5); 대목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2:4);

1)      하나님의 목적은 심판보다는 구원입니다(3:16-17). 그러므로 자신들의 잘못을 깨닫고 죄를 회개하기를 기다리고 기대하십니다(2:4a). 그것이 죄인을 불쌍하게 여기시고 긍휼을 베풀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며 인내입니다.

2)      그런데 그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세상의 역사를 바라보게 되면 마치 하나님께서 아니 계시는 것만 같습니다. 부와 권력을 가진 자가 약자와 무죄한 자를 한없이 괴롭히고 죽음으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세상을 마냥 방관하고 계시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3)      그래서 무신론자들은 아예 하나님께서 아니 계시므로 자신들이 자신들의 정의를 구현하는 사회를 만들고자 나서고 있습니다. 그리고 범신론자들은 자신들이 만든 신에게서 일방적인 보호와 소원성취만을 얻고자 합니다. 마치 사람들이 주인이고 그들의 수호신이나 우상들은 주인에게 필요한 것을 마냥 가져다 바치고 있는 충실한 종과 같습니다.

4)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호락호락한 신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소원과 뜻을 이루어 주는 신이 아닙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에 입각하여 죽어가는 자를 살리고 무죄한 자들의 핏값을 찾으십니다(4:10, 15:16, 왕하21:11-16). 그리고 회개하는 죄인들을 많이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심판의 때를 인내로써 늦게 잡고 있을 뿐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교회의 성도들에게 부디 그러한 사실을 명심하고서 하나님의 인내와 긍휼 그리고 심판을 멸시하지 말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2:4b).

(2)   다만,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2:5); 하나님께서 아니 계신다고 생각하거나 또는 하나님의 심판이 더디다고 생각하고서 사람들이 제멋대로 외식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자신들의 신분적인 특혜나 특권만을 챙기고 세습하고자 계속 노력하게 된다면 그들과 그들의 사회는 어떻게 되고 마는 것일까요? 사도 바울은 그들의 악행과 무신론적인 불신앙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일일이 감찰하시고 또한 기록을 하여 두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2:5). 그러므로 심판의 때가 되면 그러한 자는 가중처벌이 되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로마는 이중적인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그들의 상부구조 학문과 철학 그리고 예술과 종교 등에는 인간 중심의 헬레니즘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한편, 실생활에 있어서는 그들의 독특한 실용주의가 두드러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로마의 정치, 군사, 법제도 등이 제국을 운영하기에 효과적입니다. 따라서 로마제국은 이전의 제국들보다 훨씬 강하고 안정적인 제국입니다.

로마인들은 두가지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로마의 법입니다. 그것이 만민평등의 법이라고 자랑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그들의 대단한 포용력입니다. 자신들의 것보다 뛰어난 것이 있으면 그대로 섭취하고 소화하여 로마의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놀라운 포용력과 수용의 능력을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사도 바울이 보기에 한가지 결정적인 흠이 있습니다. 그것은 로마제국의 수도에 살고 있는 로마시민들이 오랜 세월 제국팽창의 이익을 나누어 가지면서 특권층의 혜택에 매우 익숙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제국에는 두개의 계급이 있으므로 당연히 두개의 법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로마의 수많은 속국과 백성들에게 평등하게 적용이 되고 있는 로마의 만민법입니다. 하나는 로마의 주인이며 통치계급인 자신들을 한없이 우대하고 있는 지배자의 법입니다.

그러므로 로마교회의 성도들은 하나님나라에서도 자신들은 특권계급이라야 하며 하나님의 법도 자신들을 우대하여야 한다고 사고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예외적인 특권의식에 젖어서 성도의 삶을 살아가고자 합니다. 이에 따라 자신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속국의 백성들에게 지키라고 강제하는 그것이 자신들의 사명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법이 자신들까지 규제하며 자신들도 똑같이 지켜야만 된다고 하는 사실에 대해서는 무심한 것입니다. 그와 같은 로마시민들의 문제점을 사도 바울이 정확하게 알고서 본문에서 고치라고 강력하게 지적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한 사도 바울의 지적은 오늘날 우리들의 교회와 성도들의 삶에 있어서도 그대로 적용이 되고 있습니다.

아직도 외식적이고 이중적인 잣대로 교회를 운영하며 성도들 사이에 새로운 계층을 형성하고 있지나 않는지 다시 한번 자신과 주위를 살펴보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아무쪼록 그러한 자기성찰의 은혜가 성도님들에게 풍성하게 주어지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