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로마서 강해 제9강(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1. 3. 10. 00:52

로마서 강해 9(1:28-32)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7 1 9()

 

제국의 수도에 살고 있는 로마시민들이 생각해야만 하는 점으로서 사도 바울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게 되면 사회적으로 어떠한 현상이 만연하게 된다고 말하는가?(1:28-32)

 

본문의 사도 바울의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가지고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어째서 강제적으로 인간의 역사에 개입하지 아니하시는가? 둘째,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 없다고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행동하시는가? 셋째, 하나님께서 떠나 버리시게 되면 사회는 어떻게 되고 마는가? 넷째, 어떻게 하면 사회를 치유할 수가 있는가?

우선 상기 여러 질문에 대하여 간략하게 답을 구해보고자 합니다;

(1)   첫째, 하나님께서는 강제적으로 사람들의 역사에 개입을 하고자 하지 아니하십니다;

1)      그와 같은 하나님의 의도가 정확하게 기술이 되어 있는 요한계시록 3장의 기록이 다음과 같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3:20-22).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스스로 자신들의 마음의 문을 열지 아니하면 하나님께서는 강제적으로 문을 열고 그들의 인생 가운데 그리고 그들의 사회의 현실 가운데 개입을 하지 아니하시겠다고 하는 선언입니다. 이유가 과연 무엇일까요?

2)      전능하신 창조주이시며 피조세계의 경영에 관하여 주권을 지니고 계시는 여호와이시므로 하나님께서 원하신다면 사람들의 인생과 사회생활에 대하여 물론 개입을 하실 수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제력의 행사를 자제하십니다. 이유는 다른 피조물과는 달리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인류를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1:26-27). 형상과 모양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수는 없지만 신명기에서 모세는 그것이 인간에게 주고 있는 자유의지 선택권이라고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오늘 하늘과 땅을 불러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앞에 두었은즉 너와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청종하며 그를 의지하라. 그는 생명이시요 장수이시니, 여호와께서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주하리라”(30:19-20).

3)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자유선택권을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선택에 대해서는 당연히 책임이 따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주이십니다. 그러므로 만유보다 먼저 계시고 스스로 만물을 창조하시고 주권을 행사하십니다. 그리고 창조에 대한 책임을 지시고 심판을 행하십니다. 그와 비슷하게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서 창조가 되어 있는 만물의 영장인 인간들은 스스로 결정하고 자신의 결정에 대해서는 책임을 져야만 합니다. 따라서 생명과 사망, 축복과 저주 가운데 자신이 스스로 선택한 결과 이제는 책임을 하나님에게 떠넘길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요컨대, 사람이란 비록 우주에서 연약한 존재라고 하더라도 정신적으로는 참으로 위대한 존재입니다. 왜냐하면, 피조물 가운데 유일하게 자유의지를 지니고 있으며 자신의 선택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2)   둘째, 사람들에게 자유의지를 주신 하나님께서는 문밖에서 사람들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1)      사람들이 문을 열어주게 되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하나님께서 문으로 들어오셔서 함께 동거하며 동행하시기를 시작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자 하시는 세상의 비전을 보여주면서 그러한 세상을 함께 만들어 그것을 만민과 함께 그리고 모든 피조물과 함께 영원히 누리자고 하십니다(3:20-21).

2)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은 자신들의 마음의 문을 열지를 않고 있습니다. 그것은 창조주 하나님의 개입이 싫기 때문입니다. 자식이 머리가 굵어지면 부모의 개입이 싫듯이 그러합니다. 따라서 마음대로 자신의 인생을 한번 신나게 살아보고 싶습니다. 자신들의 사회도 그렇게 하나님의 생각이나 창조의 질서와는 상관이 없이 사람의 욕구와 필요에 맞게 그렇게 한번 운영을 해보고 싶습니다.

3)      그렇게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 없다고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행동하실까요? 창세기 6장의 기록을 참조하면, 영이신 하나님께서는 육체화된 인간의 세계를 떠나 버리십니다(6:3). 그와 같은 맥락에서 사도 바울이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1:28).

(3)   셋째, 하나님께서 떠나 버리시게 되면 사회는 어떻게 되고 마는 것일까요? 마디로, 범신론적인 유물론자들의 사회가 되고 맙니다;

1)      사람들은 자신들의 인생과 사회경영에 참여하는 그러한 신을 싫어합니다. 대신에 일방적인 도움만을 받을 있는 그러한 신을 원합니다. 그러한 사람들의 요구에 절대 부응하고 있는 것이 수호신이며 우상들입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자신들이 만든 신들을 섬기는 체하면서 자신들이 필요한 것들을 챙기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수호신과 우상들은 사람들이 이용하고 있는 도구적인 신들에 불과합니다. 그것은 실상을 말하자면 유물론적인 사고와 진배가 없습니다. 여전히 사람들의 이성과 지성이 역사의 주체이기 때문입니다.

2)      창조주를 버리고 사람들이 마음대로 만들어 놓은 사회의 절망적인 모습에 대하여 사도 바울이 로마의 성도들에게 다음과 같이 22가지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불의, 추악, 탐욕, 악의,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 수군수군, 비방, 하나님 증오, 하나님 능욕, 교만, 자랑, 악을 도모, 부모 거역, 우매, 배악, 무정,  eq \o\ac(,21)21무자비,  eq \o\ac(,22)22그와 같은 행악자를 옳다고 말함”(1:29-32) 등입니다.

(4)   넷째, 그러한 절망적인 사회를 어떻게 하면 치유할 수가 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선택의 기회를 다시 한번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그냥은 안됩니다;

1)      재시험을 치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사전에 처음 시험에 불합격을 하게 이유를 밝히고 책임의 소재를 밝혀야만 합니다. 그리고 잘못된 선택에 대하여 일단의 책임을 져야만 합니다. 사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육신적인 삶을 선택하고 약육강식의 사회를 만들고 말았습니다. 결과는 절망적인 죽음입니다. 그러므로 잘못된 선택을 회개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먼저 있어야만 합니다.

2)      그렇게 후회하고 회개하는 사람들에게 다시 한번 선택의 기회를 주기 위해서는 처음의 잘못된 선택에 대한 책임을 사람들이 죽음으로써 져야만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죽음을 대신하여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셔서 대속의 제물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가 대신 죽고 사실을 믿는 사람들은 살아나게 됩니다(22:13-14, 6:4).

3)      요컨대, 하나님의 아들이 대신 죽고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믿고 회개하는 자들에게는 새로운 선택의 기회가 다시 주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재시험이 다음과 같이 실시가 되고 있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3:20).

4)      재시험에 합격하는 방법은 실로 간단합니다. 부활 승천하신 주님께서 성도들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실 때에 문을 열고서 자신의 구주로 맞아들이시면 됩니다. 그때부터 성령님 안에서 성도들이 주님의 제자로서 살아가게 됩니다(14:16-20, 1:8).  성도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말씀을 묵상하고 성령님 안에서 하나님의 치유의 능력을 간구하는 인생을 살아가게 되면 사도 바울이 열거하고 있는 절망적인 사회의 22가지 현상들이 서서히 꼬리를 감추게 되는 것입니다.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1:28);

(1)   여기서 마음에 지식에 포함하고 있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지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아니하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그것이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1:28a)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창조주이시며 사람들의 인생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징계하셔야만 합니다. 주인의 뜻을 따르지 아니하며 주인을 섬기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있는 종을 징계하지 아니할 주인이 없기 때문입니다. 드디어 주인의 처결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얼핏 이해가 가지를 않습니다. 내용이 하나님께서 그들을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1:28b)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2)   그냥 내버려두고 손을 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불의한 종들의 소원대로 되고 마는 것이 아닙니까?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떠나버리신다면 종들은 뜻대로 자신들의 인생을 살아갈 수가 있으며 또한 제멋대로 사회를 경영할 수가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음 구절을 검토하게 되면 그것이 아닙니다. 엄청난 불이익이 밀어닥치기 때문입니다;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1:28c).

(3)   피조물이 창조주를 싫어하고 자신의 가슴에서 그리고 머리에서 하나님의 뜻을 배신하게 되면 그때에는 엄청난 진노와 재앙이 밀어닥치게 됩니다. 그것이 단계로 되어 있습니다; 첫째 단계는 하나님께서 죄악이 만연하도록 손을 떼시고 내어버려 두시는 것입니다(6:3). 둘째 단계는 무죄한 자의 피가 철철 흘러서 하나님께서 정하고 계시는 일정한 한계를 넘어서게 되면 땅에 재앙을 내리시고 마침내 쫓아내어 버리시는 심판이 찾아오게 되는 것입니다(15:6, 왕하21:11-15).

(4)   하나님께서는 비록 백성들을 떠나시지만 그렇다고 하여 완전히 손을 놓고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옛날 소돔과 고모라 성의 사례를 검토하면 분명히 그러합니다. 성읍에 무죄한 자의 피가 흐르고 피해자들의 부르짖음이 하늘로 올라오게 되자 하나님께서는 실상을 파악하기 위하여 천사를 보내신 것입니다(18:20-22). 실태파악보고를 받으시고 불심판을 시작하십니다(19:24-26). 그러므로 선민이거나 이방인이거나 상관없이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아니하는 이른바 합당하지 못한 (죄악)”(1:28c) 저지르게 되면 사회가 하나님의 진노로 심판을 받아 망하고 마는 것입니다.

둘째로,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악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1:29-31); 사람들이 마음 머리 속에 하나님의 뜻을 새기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기를 싫어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사회를 구원하기 위하여 이상 개입하시지를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을 버린 무신론적이고 범신론적인 인간사회가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아니하는 불법한 일을 얼마나 극심하게 자행하는지를 감찰하십니다. 결과 하나님께서 인내하시는 수준을 넘어서게 되면 옛날 가나안 땅의 원주민들이나 다윗왕조 므낫세 왕국의 경우처럼 멀지 아니하여 역사적인 심판을 받게 하고 맙니다. 그와 같은 심판을 받기 그러한 사회의 모습이 어떠한지 사도 바울이 제국의 수도에 살고 있는 로마교회의 성도들에게 일일이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바울의 의도는 다음과 같은 22가지의 잘못된 현실을 로마인들의 사회생활에 한번 비추어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속히 회개를 하라는 것입니다. 세세한 항목을 다음과 같이 나누어서 한번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합니다;

(1)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1:29a); 먼저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떠나 제마음대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악한 의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4가지 용어로 묘사를 하고 있습니다;

1)      불의 하나님의 공의와 사회적인 정의를 모두 저버리고 있는 사람들의 악한 의도를 말합니다.

2)      추악 악한 의도 속에 들어 있는 결코 아름답지 못한 벌거벗은 더러운 모습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3)      탐욕 하나님의 것이나 다른 사람의 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소유하고자 하는 탐심과 욕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4)      악의 선한 의도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의 생명을 돌보고 살리고자 하는 것이 아니며 남을 해쳐서 자신의 이익을 얻고자 하는 속셈을 말하고 있습니다.

(2)   시기, 살인, 분쟁, 사기”(1:29b); 사람들의 악한 의도가 어떻게 악한 행동으로 나타나게 될까요? 성경상에 예를 쉽게 찾아볼 있도록 사도 바울이 예를 다음과 같이 들고 있습니다;

1)      시기 살인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옛날 카인이 동생 아벨을 시기하여 그만 살해를 경우가 그러합니다(4:5-8).

2)      분쟁 사회의 집단간에 갈등이 증폭되어 서로 미워하면서 쟁론과 쟁투를 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한 분쟁은 왕국을 갈라지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10지파가 여로보암을 내세워서 다윗왕조 르호보암 왕과 세금 부역문제로 분쟁을 하게 됩니다(왕상12:3-15). 드디어 자신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아니하자 북조 이스라엘 왕국을 세우고 갈라져 나오고 맙니다(왕상12:16-17).

3)      사기 상대방을 속여서 이익을 취하고자 하는 행위입니다. 옛날 장자의 축복을 가로채고자 리브가가 차남 야곱을 장남 에서처럼 꾸며서 지아비 이삭에게 들여보낸 사건이 그러합니다(27:5-18). 결과 야곱은 쌍둥이 에서 대신에 장자의 축복을 사기로 가로채었으나 나중에 아버지의 재산을 하나도 얻지를 못하게 되고 맙니다(27:27-30, 33:11, 36:6-7). 그리고 리브가는 사랑하는 아들 야곱과 헤어지고 나서 다시는 생전에 상봉하지를 못하게 됩니다(35:8, 27).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기행위를 얼마나 강하게 징계하시는가를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는 사례라고 하겠습니다.

(3)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1:29c-30a); 여론을 일으켜서 상대방을 폄하하고 인신 공격하는 경우를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 악의적인 선전입니다. 둘째, 멋모르고 유언비어에 속아서 소문을 함부로 퍼뜨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실 율법에 위반되는 사항입니다; “너는 거짓된 풍설을 퍼뜨리지 말며”(23:1). 셋째, 악의에 비난이 비방입니다. 전형적으로, 예수님의 복음사역의 현장에서 있는 유대교지도자들의 공격적인 태도가 그러합니다(11:15).

(4)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1:30b); 특히 하나님 앞에서 뻔히 잘못을 범하고 있는 5가지 경우를 사도 바울이 열거하고 있습니다; 첫째가 하나님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둘째가 하나님을 능욕하는 것입니다. 특히 앗수르의 침략군이 여호와를 능욕한 경우가 그러합니다(왕하18:32-35). 또한 예수님을 능욕한 유대교지도자들과 로마병정들이 그러합니다(27:27-31, 39-44). 셋째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보좌를 높이고 있는 교만한 자입니다. 예를 들면, 로마총독 빌라도는 자신이 예수님을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는 권력을 지니고 있다고 교만을 떨고 있습니다(19:10). 넷째가 세상자랑을 하나님 앞에서도 늘어놓고 있습니다.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간 바리새인들의 자기자랑이 그러합니다(18:11-12). 다섯째로, 기타 하나님 앞에서 버젓이 남을 해치고자 하는 음모를 꾸미고 있는 자입니다. 옛날 요셉에게 자신의 죄를 뒤집어 씌우고 있는 시위대장 보디발의 아내가 그러합니다(39:11-20).

(5)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악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1:30c-31); 가정생활에 있어서는 어떠한 악한 일이 발생하게 될까요? 사도 바울이 다음과 같이 거론하고 있습니다;

1)      하나님 경외가 사라지고 있는 사회에서는 불효자가 많이 발생합니다. 반대로, 창조주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면 부모님을 공경하게 됩니다. 따라서 십계명 5조에서 다음과 같이 명시하고 있습니다; “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땅에서 생명이 길리라”(20:12).

2)      부모를 공경하는 것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서로 연계가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모세는 하나님 앞에 패역한 자가 되지 말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21:18-20, 32:20). 그런데 어리석고 몽매한 백성들이 패륜과 반역이 서로 통하는 개념이라는 사실을 모르고서 함부로 부모님을 저주하고 구타까지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모세의 율법에서는 그러한 자식을 죽이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21:15, 17). 그것은 은혜를 원수로 갚고 있는 배신이요 악한 행위이기 때문입니다(1:31).

3)      무정한 자와 무자비한 자는 형제와 이웃을 사랑하지 아니하고 힘으로써 위에 군림하고자 하는 자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저 어떤 권모술수를 사용하더라도 남을 해치고 권력과 금력만 차지하게 되면 만사가 형통하고 남을 지배할 수가 있다고 생각하는 자가 바로 사람의 정이 없으며 자비가 사라진 포악한 자입니다. 결국, 가정에서의 폭군이 나라에서도 독재자가 되고 맙니다. 그리고 종교적으로도 독선적이고 군림하는 지배자가 되고 맙니다. 마디로, 사람들이 하나님을 싫어하게 되면 사랑이 없고 생명을 사랑할 모르는 자들이 사회에 가득차고 만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그러합니다. 현대에서도 인명경시 황금만능주의 사상이 여전히 기승을 부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셋째로,그들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1:32); 사도 바울의 지적이 탁월합니다. 다음과 같이 예리하게 분석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   첫째, 율법에서 위와 같은 잘못과 악행을 범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규정하고 있음을 백성들이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으로 그러한 율법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적용시키지를 아니하고 있습니다. 이유는 하나님을 섬기는 신정국가가 이상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왕이 아니라 정치적인 지도자와 종교적인 지도자가 왕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이 실천이 되는 사회가 아니라 정치적 종교적 기득권자들의 뜻이 실현이 되는 사회입니다.

(2)   둘째, 그러한 사회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올바로 해석하여 예수님처럼 천국복음으로 주장하고 있는 자들이 미움을 받고 제거의 대상이 되고 맙니다. 그러한 사회에서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의 뜻도 질적인 문제가 아니라 양적인 문제로 취급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추종자들이 유대교인들의 수보다 많지 아니하면 사회에서 발을 붙일 수가 없게 되고 맙니다. 다수의 힘이 지배하고 있는 사회입니다. 다수결이 바로 진리를 판정해주는 도구입니다. 철저하게 사람들의 법정이 하나님의 법정을 대신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비극적인 절망을 사도 바울이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1:32).

결론적으로, 백성들이 하나님을 싫어하는 이유는 뻔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뜻이 자신들의 뜻과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는데 그것이 싫은 것입니다. 약육강식의 사회에서 어떻게 남을 나같이 사랑하며 보호해줄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게 나약하게 살아가다가는 영원히 자손대대로 남의 종이 되고 피를 흘리는 피해자가 되고 것입니다.

그리고 이왕 태어난 인생이라면 자아를 실현하며 자신의 꿈을 실천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되는 것이 옳지 어떻게 하나님의 종으로서 평생을 살아가라는 것입니까? 똑똑하고 영리한 사람이라면 결코 그러한 어리석은 선택을 아니할 것입니다. 요컨대, 사도 바울이 선교여행을 하고 있을 당시 로마제국을 다스리고 있는 권력자들의 도시 로마시에서는 그렇게 사고하고 있는 영특한 자들이 많이 살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한 자들을 향하여 사도 바울이 본문에서와 같이 질책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마음과 머리속에 주인으로 두기를 싫어하고 마음대로 권력을 휘두르면서 제국을 경영하게 되면 22가지의 악행이 범람하게 되는 나라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결과는 제국의 멸망입니다. 그러므로 로마교회의 성도들부터 복음을 바로 받아들이고 회개의 기도를 드려야만 합니다”.

그와 같은 사도 바울의 경고가 오늘날에도 유효합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사회적으로 별로 달라져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아무쪼록 본문의 의미를 되새기시면서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다시 전진하시는 귀한 성도님들이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