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로마서 강해 제6강(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1. 3. 8. 03:22

로마서 강해 6(1:16-17)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7 1 6()

 

사도 바울이 이상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게 이유에 대하여(1:16-17);

 

흔히 본문이,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 하는 소위 종교개혁자들의 이신칭의’(以信稱義) 이론을 드러내고 있다고 말하고들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신칭의의 이론이란 복음에 대하여 그리 완전한 설명력을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유는 첫째, 선민 이스라엘 자손들의 하나님신앙을 단순하게 율법사상이라고만 단정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둘째, 구약과 신약을 율법과 믿음으로 이분법적으로 가르고 있는 것이 설명력이 약합니다. 셋째, 구교를 지배하고 있는 교황중심의 거대한 사제조직의 특징은 한마디로, 절대 관료제인데 그것을 단순하게 옛날의 유대교와 비슷하게 율법주의 정도로 보고 있는 것은 조직론적인 연구가 미흡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민들의 하나님신앙이 과연 율법주의에 그치고 있는 것인지를 먼저 따져보고 다음에 예수님의 복음이 오직 믿음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인지 진지하게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차제에 유대교의 선민구원사상과 예수님의 만민구원사상과의 차이도 다시 한번 생각을 해보고자 합니다. 우선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1)   첫째, 선민인 이스라엘 자손들은 예수님 당시에 하나님말씀을 세가지로 지니고 있습니다; 하나는 글로 적혀 있는 히브리정경입니다. 그것을 타나크라고 합니다. 그것은 모세오경인 토라’, 선지서인 네비임’, 성문서인 케투빔 글자를 떼어서 조어를 만들어 그렇게 부른 것입니다. 하나는 말로써만 전해지고 있는 하나님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을 미쉬나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마지막 하나는 주전 2세기부터 바리새인들이 타나크와 미쉬나를 비교연구하여 만들어 놓은 주석이 있습니다.

(2)   둘째, 바리새인들은 히브리정경인 타나크와 또다른 정경이자 부록의 역할을 하고 있는 미쉬나, 그리고 그들이 이상의 노력으로 완성한 주석을 모두 공부하고 그것을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랍비가 되면 그것으로 선민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에 비해서 대제사장을 비롯한 사두개인들은 모세오경만을 공부하고 믿으며 성전에서 드리는 제례의식을 중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두개인들은 성전과 유대교의 교권만 지킬 수가 있다면 외세와의 타협도 불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다릅니다. 그들의 권위의 기반은 히브리정경과 히브리 사상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가르치고 있는 백성들의 지지도입니다. 따라서 주후 70년에 로마의 정예병에 의하여 유대인들의 반란이 진압이 되고 예루살렘성전이 불타고 모두가 가나안 땅에서 쫓겨나게 때에 성전에 집착하고 있던 사두개인들은 사라집니다. 하지만 해외라고 하더라도 유대인 교포들과 그들의 회당이 존재하고 있는 곳에서는 어디든지 바리새인들이 살아남게 됩니다.  

(3)   셋째, 바리새인들의 유대교를 소위 랍비 유대교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가르침을 전부 토라’(torah)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랍비인 자신들이 백성들에게 신앙교육을 시킬 때에 사용하고 있는 히브리정경의 하나님말씀인 타나크’, 이야기로만 전승이 되고 있는 미쉬나’, 그리고 바리새인 선배들이 만들어 놓은 주석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이며 가르침인 토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바리새인들의 토라 개념은 본래 협소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사라진 사두개인들의 토라 개념이 좁은 것입니다. 사두개인들은 모세오경을 이름하여 율법서또는 토라라고 부르면서 그것만 알면 하나님신앙이 충분하다고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4)   넷째, 랍비 유대교에서는 타나크라고 하는 용어를 사용하여 넓은 의미의 하나님의 말씀과 가르침을 연구하여 그것을 선민들에게 가르치고 있는데 그러한 사실에 대해서 기독교에서는 달리 생각하고 있습니다; 첫째, 히브리정경을 떠나서 바리새인들이 가르치고 있는 히브리 전승과 주석에는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들의 행동을 규제하고 있는 너무나 많은 율법적이 요소가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모든 규정을 준수할 수가 없으므로 백성들은 남의 눈만을 의식하는 외식적인 신앙행태를 지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복음만 믿으면 구원을 얻을 있다고 하는 종교개혁이 그들에게 필요하다는 주장입니다. 둘째, 기독교지도자들은 히브리정경을 구약으로 받아들이면서 내용에 대하여 마치 사두개인들처럼 생각하고 있습니다. , 모세오경이 율법서인 토라인데 토라를 중심으로 유대교인들이 오로지 율법적 시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하나님신앙을 파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편의적인 사고방식은 단지 구약의 율법과 신약의 믿음을 이분법적으로 대비시키기 위한 단순모형에 불과하다고 하겠습니다.

(5)   다섯째, 초대교회의 출범으로 기독교는 유대교로부터 갈라져 나오게 됩니다. 그런데 유대교에서는 장로들이 만든 율법세칙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처럼 율법적으로 준수사항이 되고 있다는 폐단이 있습니다(7:7-9). 그와 비슷한 사례가 카톨릭에서 역시 발생하고 있습니다. 구교에서는 교황의 절대무류성’(絶代無謬性, 절대로 오류가 있을 없다고 주장함) 주장하면서 사제들이 하나님말씀과 동등한 효력을 가지는 교황의 명령을 가지고 전세계적인 카톨릭교회를 독선적으로 운영하게 되자 이에 강력하게 반발하는 종교개혁이 주후 16세기에 유럽에서 발생합니다. 그것은 주후 1세기 유대 땅에서 발생했던 초대교회의 유대교비판을 재현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율법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고 오직 예수님의 복음을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소위 이신칭의 이론이 빛을 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율법의 준수로 구원을 받느냐? 아니면, 예수님의 복음에 대한 믿음으로 구원을 받느냐? 대한 정확한 이해는 무엇일까요? 해답은 본문에 대한 보다 정확한 해석에서 비롯이 것입니다. 그와 같은 입장에서 본문의 말씀을 구절씩 이제부터 풀이를 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내가 복음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1:16); 부문으로 나누어서 검토를 해보고자 합니다;

(1)   내가 복음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1:16a);

1)      바울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 그가 랍비 사울이었을 때에는 예수님의 복음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솔직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랍비 사울은 당시 예수님의 복음을 믿어야 구원을 얻을 수가 있다고 부르짖고 있는 나사렛파의 주장에 대하여, 특히 예수가 무덤에서 부활하였다고 허황되게 주장하고 있는 사도와 제자들의 선전에 대하여 같은 유대인의 입장에서 매우 수치심을 느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각이 없는 일부 유대교인들이 나사렛파의 주장에 현혹이 되어서 기독교인으로 개종을 하고 있습니다. 랍비로서 유대교리를 가르치고 있는 사울은 그것을 그냥 두고 수가 없어서 초대교회의 성도들을 탄압하는데 앞장을 서고 있습니다. 대제사장에게 체포영장을 받아서 담대하게 사울은 시리아의 다메섹으로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들을 잡아들이기 위하여 길을 나선 것입니다(9:1-3).

2)      그러했던 랍비 사울이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영적인 체험을 하게 됩니다. 갑자기 엄청난 광선이 그를 집중적으로 비추는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과 형상이 나타나기를 시작합니다. 때문에 육신의 눈이 어두워지자 영적인 눈이 뜨여서 하나님의 현신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네가 나를 박해하느냐?”(9:4)라고 하는 음성이 들려오고 있습니다. 히브리정경의 선지서 기록에 밝은 랍비 사울은 그분이 바로 하나님의 현신임을 금방 깨닫게 됩니다. 그가 영적인 눈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보고 있으므로 이제 계시의 말씀만 자신에게 주시면 랍비 사울은 선지자가 있습니다. 그래서 계시의 말씀을 기대하면서 정체성을 묻고 있습니다; “주여 누구시니이까?”(9:5a). 상상을 초월하는 말씀이 재차 들려오고 있습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9:5b). 순간 랍비 사울이 신봉하고 있던 유대교리가 무너지고 있습니다. 사울은 그때부터 이상 복음에 대하여 수치를 느낀다고 말할 수가 없게 것입니다.

(2)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1:16b);

1)      선민들의 유대교에서는 선민만의 구원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신봉하고 있던 랍비 사울이 어떻게 예수님의 복음을 믿는 기독교인이 되고 선민과 이방인을 막론하고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만민구원사상 믿게 것일까요? 그것은 먼저 하나님의 능력이 예수님을 부활시키시고, 다음 승천하신 그리스도가 랍비 사울 자신 앞에 현신하여 만민구원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생생하게 증거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2)      이른바 다메섹 도상의 영적인 체험 통하여 랍비 사울의 신론과 구원론이 갑자기 변화한 것입니다. 그것은 이상 수치를 느끼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부활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영광과 형상을 가지고 자신 앞에 현신하여 백주에 환상 가운데 나타난 것입니다. 그리고 유대교 율법학자들의 가르침과 해석이 절대적인 진리라고 믿고 있던 랍비 사울의 모든 믿음의 체계를 허물어버린 것입니다.

3)      랍비 사울은 이제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만 할까요? 그는 3년간 아라비아 호렙 산을 찾아가서 광야에서 진리를 추구했으며 소아시아 길리기아 다소성의 집에 칩거하여 히브리정경과 히브리사상에 들어 있는 메시아에 관한 예언과 하나님 말씀의 뜻을 다시 연구하게 됩니다(1:14-24). 세월이 자그마치 14년간입니다(2:1). 결과 두가지 사실을 알게 됩니다; 하나는 산술적으로 하나라고 하는 단순한 인간의 이해를 뛰어넘어서 여호와 하나님은 31체의 신비를 지니시고 하나의 의사결정을 하시는 유일신이시라는 것입니다.

4)      하나는 하나님의 아들이 메시아로서 세상에 오신 것은 히브리정경의 하나님말씀 가운데 들어 있는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뜻을 온전하게 드러내기 위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뜻이 만민을 구원하여 하나님나라에서 영생을 누리도록 해주고자 하는 것이므로 성육신하여 공생애를 살아가시는 예수님께서 뜻을 복음으로 전했으며 만민의 속죄를 위하여 자신의 몸을 대속의 십자가에서 희생하셨다는 것입니다(1:16b). 그것이 창조주의 공의의 정신을 실천하는 예수님의 삶과 죽음인 것입니다.

(3)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1:16c);

1)      예수님의 공생애는 주로 선민의 땅에서 있게 됩니다. 그곳에서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하여 복음사역을 하신 것입니다.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이 전해 주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복음으로 들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 만민구원에 있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크게 공감하지를 못했습니다. 하지만 엄청난 하나님의 치유의 능력이 예수님을 통하여 나타나 그들의 각종 질병과 장애를 고치는 것을 보고서 예루살렘 주민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환영했습니다(21:7-11).

2)      그러나 며칠이 지나지 아니하여 전격적으로 유대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체포하고 종교재판을 통하여 사형에 해당하는 하나님모독죄로 정죄하고 맙니다. 그리고 로마총독에게 넘겨서 로마반역죄로 몰아 십자가처형을 받아 냅니다(23:1-2, 23-25). 유대교지도자들은 일단 나사렛 예수부터 처형한 다음에 그가 유대교리를 반대하고 이방인의 편을 배신자이며 거짓 메시아라고 백성들에게 선전하고 맙니다. 백성들은 나사렛 예수의 편을 들다가는 유대교에서 출교를 당하게 될지 몰라서 그냥 눈을 감고 맙니다(12:42).

3)      그러나 무덤에서 3일만에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부활시키십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은 사도와 제자들을 다시 만나 40일간 복음에 대한 교육을 다시 실시하십니다(14:44-49, 1:3). 그리고 세상에 부활의 신앙과 만민구원의 신앙을 전하라고 명령하십니다(28:18-20). 그후 성령님께서 강림하시고 예루살렘에 초대교회가 서고 이방 시리아 안디옥에도 교회가 탄생합니다(2:1-4, 37-47, 11:19-26). 안디옥교회가 성장하여 바나바와 바울을 이방인 사도로 삼아 세계선교에 파송함으로써 대대적으로 헬라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이 증거되게 것입니다(13:1-3, 1:16c).  

둘째로,복음에는 하나님의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1:17); 역시 3부문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복음에는 하나님의 나타나서”(1:17a);

1)      선민만의 구원과 정치적인 메시아에 의한 선민의 제국의 재건을 주장하고 있는 유대교지도자들의 하나님말씀에 대한 해석이 옳은 것일까요? 아니면 만민을 구원하여 하나님나라에서 함께 영생을 누릴 것이라는 예수님의 복음이 옳은 것일까요? 하나님말씀에 대한 어느 쪽의 해석과 주장이 옳은 것인지는 사람들의 법정에서 시비가 가려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법정에서 옳고 그름이 판정이 나야만 합니다.

2)      그런데 사도 바울은 판정이 이미 났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고 속죄의 제물로 자신을 희생하신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의 만민구원의 뜻을 실천하신 것이 틀림이 없으므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창조주의 능력으로 그를 무덤 속에서 부활시켰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복음이 옳다고 그의 손을 들어준 하나님의 결정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과감하게 사도 바울이 여기서 주장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이 하나님의 뜻에 맞는 진리입니다. 그것이 창조주의 공의의 정신을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의롭다고 인정하시고 그를 죽음에서 부활시키신 것입니다”(1:17a의역).

(2)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1:17b);

1)      하나님을 믿고 있는 민족이 선민들입니다. 그들이 유대교리를 신봉하고 있다고 하여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유대교인들을 한꺼번에 모두 율법주의자라고 폄하하고 몰아세우는 것은 어폐가 있습니다. 그것보다는 선민들의 신앙은 이론적으로 예수님의 복음사상에 비추어볼 두가지 심각한 오류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들은 선민만 구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고 있으며 현실적으로 하나님은 메시아를 보내셔서 외세를 모두 쳐부수시고 선민의 제국을 재건해준다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의 복음을 믿게 되면 선민들의 집단 이기적이고 현세주의적인 믿음을 넘어설 수가 있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사도 바울은 여기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1:17b)라고 적고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의 격상을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선민만의 구원이 아니라 이방인까지 포함하는 만민구원사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피를 흘려서 자신들의 제국을 만드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있는 소위 현세구복사상 아닙니다. 구체적으로, 모두가 구원을 얻어서 함께 영생을 누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영생의 하나님나라를 소망하고 있는 경지로까지 나아가고 있는 놀라운 믿음의 발전인 것입니다.

(3)   기록된 ,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1:17c);

1)      선지자 이사야는 아주 신비로운 대선지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후인들이 이사야의 선지서를 분류하면서 66개의 장으로 구분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신구약성경 66권을 닮아 있습니다. 그리고 39장까지는 구약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으며, 40장부터 66장까지 27 장에는 복음적인 신약의 메시지가 풍성합니다.

2)      그런데 구약적인 기술을 끝내면서 선지자 이사야가 다윗왕조 유다 왕국의 왕인 히스기야의 말을 싣고 있습니다; “히스기야가 이사야에게 이르되, 당신이 이른바 여호와의 말씀이 좋소이다 하고 이르되, 생전에는 평안과 견고함이 있으리로다 하니라”(39:8). 왕의 신앙이 하나님 보시기에 잘못되어 있기에 멀지 아니하여 바벨론에 의하여 나라가 망하고 왕손들이 환관이 되는 고난을 당하게 된다는 이사야의 예언을 듣고 다음에 나타난 히스기야 왕의 반응이 위와 같습니다.

3)      히스기야는 망국의 비극이 100년후의 일임을 알고서 안심을 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살아 생전에는 나라가 망하지 아니하고 왕의 영광을 누리게 되는 그것으로 만족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루 말할 수가 없는 현세구복적인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영생의 하나님의 구원을 앙망하고 있는 신앙이(1:17c) 결코 아닙니다. 마디로, 만민구원과 영생구원 그리고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을 구현하고 있는 하나님나라와는 전혀 상관이 없이 살아가고 있는 자가 소위 선민의 나라의 왕인 히스기야입니다.  

4)      다윗의 후계자인 히스기야 왕만이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선민인 유다 왕국의 백성들도 그러한 현세적인 축복신앙을 많이 지니고 있습니다. 왕은 백성들의 신앙을 대표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자에 불과합니다. 말을 들은 선지자 이사야는 절망을 하게 됩니다. 이상 선민의 역사 가운데 구원의 소망을 수가 없게 이사야는 남은 세월 동안 오로지 하나님의 뜻을 옳게 구현하시는 메시아가 오시기만을 기다리며 복음의 시대를 예언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40-66).

결론적으로, 다음과 같이 본문의 뜻을 정리해봅니다;

(1)   첫째, 사도 바울은 이상 예수님의 복음에 대하여 부끄럽게 여기지를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복음에는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담기어 있기 때문입니다(1:16a).

(2)   둘째, 하나님의 말씀의 뜻은 선민만의 구원이 아니고 만민구원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뿐만 아니라 헬라인들 나아가서 로마사람들까지 모두 구원의 대상입니다(1:16b).

(3)   셋째, 유대교의 주장이 옳은지 아니면 예수님의 복음이 옳은지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판정을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무덤에서 부활시키심으로 이미 그의 복음사상이 옳다는 것을 드러내신 것입니다(1:17a).

(4)   넷째, 예수님의 복음사상은 만민구원이며 또한 영생구원입니다. 그러므로 이기적이고도 현세적인 구원만을 원하고 있는 모든 초보적인 믿음의 경지를 초월하고 있는 것입니다(1:17b).

(5)   다섯째, 사람들이 말하고 있는 정의가 아니라 예수님처럼 아버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공의를 실천하기 위하여 대속의 삶을 살아가는 그것이 하나님나라에 들어가서 영생을 누릴 있는 방법입니다(1:17c).

  아무쪼록 본문의 뜻을 오래 묵상하시고 많은 깨달음을 얻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