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로마서 강해 제7강(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1. 3. 9. 00:10

로마서 강해 7(1:18-23)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6 1 7()

 

하나님 앞에서는 경건한 척하면서 종교적으로는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과 겸허하게 하나님 앞에 서는 경건함도 없으면서 불의를 행하는 자와의 차이에 대하여(1:18-23)

 

흔히 본문을 해석함에 있어서 사도 바울이 언급하고 있는 대상이 로마인과 같은 이방인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세하게 본문을 검토해보고 또한 의미를 묵상해보면 그것이 아님을 수가 있습니다. 종래의 해석은 사실 쪼가리 풀이일 가능성이 큽니다. 이유는 다음과 같은 두가지의 경우를 사도 바울이 모두 언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   첫째, 사도 바울이 이방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로마인과 같은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하여 먼저 언급하고 있는 대목이 있습니다. 이방인들이 자신들의 양심속에 창조주 하나님께서 태초에 심어 놓은 영적인 감응장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인정하지 아니하고 제멋대로 살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되고 있다고 사도 바울이 다음과 같이 경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이는 하나님을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1:18-20).

(2)   둘째, 본문에 대해서는 다른 해석이 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이방인들뿐만 아니라 선민들에 대해서도 하나님께서 경고를 하시고 있다고 사도 바울이 언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있는 대목은 군데입니다; 하나는 18절에서 두가지의 경우를 모두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1:18a) 대하여 먼저 언급을 다음에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1:18b)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는 21절부터 23절까지의 말씀은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는 선민들이 여호와를 버리고 제멋대로 우상을 섬긴 잘못을 더욱 적나라하게 지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말씀을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1:18);

(1)   하나님의 진노가 두가지 경우에 대하여 모두 발생하고 있음을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에 대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둘째, 단지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고 있습니다. 언뜻 보면, 두가지 경우가 하나로 보입니다. 일종의 강조용법에 불과한 것으로 보게 되면 그러합니다.

(2)   그러나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이 누구인지를 상상해보게 되면 사도 바울이 가리키고 있는 사람들이 누구인지를 금방 있게 됩니다. 그들은 선민 유대인들이며 그들의 종교적인 지도자들입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여기서 단순하게 불의에 젖어서 진리가 무엇인지 그리고 창조주가 누구신지도 모르고서 살아가고 있는 불쌍한 사람들에 대하여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마디로, 선민이 아니라 이방인들입니다. 그리고 로마교회에 보내는 서신을 작성하고 있는 사도 바울의 입장에서는 그들이란 로마제국의 수도에 살고 있는 이방인 성도들의 친지들입니다.

(3)   구체적으로, 사도 바울의 경험을 반영하여 짐작을 해보자면 자신들의 불의로 하나님의 진리를 막고 있는 유대교지도자들은 다음과 같은 행태를 보이고 있습니다; “첫째, 유대교의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본뜻을 왜곡하여 이기적인 선민우월사상과 현세적인 축복사상으로 바꾸어서 백성들에게 신앙교육을 시키고 있습니다. 둘째, 그들은 정치적인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해방자 메시아를 보내어 주시면, 그는 하나님의 능력을 행사하여 외세를 물리치고 선민의 제국을 재건한다는 것입니다. 셋째, 그런데 백성들이 어리석게도 메시아로 믿고 있는 나사렛 예수는 그러한 인물이 아닙니다. 그는 외세인 로마를 물리칠 생각을 하지도 않고 오히려 그들을 두둔하고 부디 원수를 미워하지 말고 그들에게 하나님말씀을 전하여 함께 구원을 받아 하나님나라에 들어가자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넷째, 그것이 하나님말씀의 본뜻인 복음이며 진리라고 선전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격분한 유대교지도자들이 나사렛 예수를 처단한 것입니다. 다섯째, 랍비 사울도 한때는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을 했습니다. 하지만 다메섹 도상에서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고 회개를 했습니다”. 요컨대, 사도 바울이 유대교의 지도자들의 잘못을 여기서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이는 하나님을 만한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1:19);

(1)   선민들에게는 하나님을 만한 것이 세가지나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히브리정경인 타나크또는 미크라이고 하나는 그것을 말로써만 전하고 있는 미쉬나입니다. 마지막 하나는 신앙의 선배들이 특히 바리새인들이 오랜 세월 타나크와 미쉬나를 비교연구하여 완성한 주석인 미드라쉬입니다. 그에 비해서 이방인들에게는 다른 것이 있습니다. 그것을 일컬어서 사도 바울은 이는 하나님을 만한 그들 속에 보임이라”(1:19a)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과연 무엇일까요?

(2)   하나님신앙을 파수하고서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자들이 선민 유대인들입니다. 그에 비해서 하나님을 모르고 제멋대로 범신론이나 유물론적인 사고를 하면서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자들이 이방인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창조주를 기억하라고 그들 이방인들 속에 무엇을 보여주고 있는 것일까요? 바울의 말이 상당히 어렵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이제부터 상세하게 대목에 대하여 설명을 시작하고자 합니다. 그러면서 당장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1:19b);

(3)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피조물을 그냥 내버려두지를 않습니다. 그들의 생명을 돌보고 영적으로 살리고자 하십니다. 따라서 누구는 죽이고 누구는 살리고 하는 그러한 선택도 일방적으로 함부로 하지를 않습니다. 원칙적으로 모두를 똑같이 살리고자 하십니다. 그것이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입니다. 그와 같은 하나님의 뜻을 선민이거나 이방인이거나 상관없이 모두가 있도록 하나님께서는 이미 자연 가운데 그리고 인류의 역사 가운데 계시를 하셨다는 것이 사도 바울의 설명입니다(1:19b). 그러므로 죽고 사는 것은 모두 피조물들의 선택입니다(30:19-20).

(4)   그런데 세상에서는 가장 중요한 선택을 달리하고 있는 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공의의 정신을 실천하고자 하는 진짜 신앙인들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마음속 양심의 소리라든가 영적인 깨우침을 무시하고 계속하여 이기적으로 그리고 현세주의적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이방인들입니다. 그들의 세상은 범신론적이거나 무신론적입니다. 하지만 근본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유물론적인 사고방식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방인들이 신이라고 섬기는 것들도 사실은 도구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단지 불가항력적인 재앙을 피하게 해주는 그러한 이용의 대상으로 우상을 만들어서 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이방인들의 영적인 정체성을 간파하고 있는 사도 바울의 질책이 이하 구절에서 매우 날카롭습니다.

셋째로,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1:20);

(1)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 지금도 우주를 경영하고 있다는 사실을 진작에 만물의 영장인 사람들이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실을 솔직하게 인정하고서 창조주 하나님을 자신의 유일한 신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극소수라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감히 창조주의 지혜와 능력을 경시하고서 자신들의 지혜와 능력으로 세상을 경영하고자 몸부림을 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불경한 생각에 젖어 있는 이방인들의 잘못에 대하여 지금 사도 바울이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제국의 수도에 살고 있는 성도들에게 사실을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역사적으로 선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는 히브리정경과 하나님에 관한 전승들을 주셨지만 이방인들에게는 그러한 혜택이 없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대신에 선민과 이방인들에게 공통적으로 주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神性, 신적인 성질이나 성품) 피조세계에 그대로 투영이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두가지로 보입니다; 하나는 사람이 살고 있는 자연환경에 반영이 되어 있는 하나님의 창조의 지혜와 경륜입니다. 그것을 이름하여 자연계시라고 합니다. 자연과 우주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한치의 오차도 없이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거기에 약간의 오차가 발생한다면 지구뿐만 아니라 우주 전체가 깨어지고 것입니다. 하나는 아무리 부인하려고 해도 없는 하나님의 존재감과 영적인 능력이 사람들의 속사람속에 자리를 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구태여 신앙 양심이라고 표현하지 아니하더라도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선험적인 양심이 들어 있습니다. 그것이 미약하지마는 여전히 하나님의 음성에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넷째로,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 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1:21-23);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알고 있지만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아니하고 있는 자들에 대하여 그들의 잘못을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습니다;

(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1:21);

1)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알고 있는 자라고 하면 당연하게 두가지 신앙태도를 보여야만 한다고 말합니다(1:21a); 하나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신앙 태도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이란 자신의 인생의 제일목적이 하나님의 뜻을 세상에서 실현하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뜻보다 하나님의 뜻을 우선하는 신앙인의 기본자세를 말하고 있습니다.

2)      참고로,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따라 대속의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순종은 좋은 예가 됩니다. 반면에 유대교지도자들의 입장은 반대가 됩니다. 그들은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을 원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자신들의 생각 하나님의 능력을 빌려서 외세를 물리치고 선민의 제국을 세상에 재건함으로써 시온의 영광을 세상에 떨치고자 획책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이에 동조하지 아니하는 나사렛 예수를 유대교에 대한 이단으로 몰아서 처단해버린 것입니다.

3)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과 구원의 은혜에 대하여 감사하는 신앙 태도를 지니지 아니하게 되면 시험에 빠지게 됩니다. 시험에 빠지게 되면 두가지 증세가 발생한다고 사도 바울이 알기 쉽게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1:21b); 첫째, 하나님께서 창조하시는 영생구원의 하나님나라를 산소망으로 바라보지를 못하고 자꾸만 허망한 생각에 사로잡히고 맙니다. 세상에서의 삶이 끝나고 나면 모든 것이 (, 없음) 돌아간다고 하는 지극히 현세주의적인 비관론에 사로잡혀서 남은 인생을 제멋대로 허랑방탕하게 살다가 삶을 끝내고 마는 것입니다.

4)      둘째,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가 사라지고 영적인 감각을 상실하게 됩니다. 따라서 생각하는 것이 미련스럽기 그지 없습니다. 자신은 살길이며 형통한 길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자승자박이고 스스로 올무를 놓고 있는 것입니다. 탄로가 일을 마치 완전범죄를 도모하고 있는 것처럼 실시하고 있습니다. 급기야 거짓말이 꼬리를 물게 되고 나중에는 자신의 거짓말에 자신이 속아넘어가게 되는 미련한 자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2)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 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1:22-23);

1)      쉽게 말하자면, 율법의 기본정신은 법도(法度, 분수와 구분과 경계를 지키는 )입니다(26:5, 왕상9:4). 하나님을 경외하는 여호와의 종은 두가지의 법도를 지키고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자신의 인생의 주인이시며 자신은 그분의 피조물이며 청지기라는 기본적인 인식입니다. 둘째, 주인의 뜻을 받들고 뜻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청지기인 자신은 주인의 생각과 뜻에 자신의 생각과 뜻과 행동을 맞추어 나가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2)      그렇게 여호와의 종의 법도를 지키며 신앙생활을 하는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지혜와 능력을 부어 주십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진짜 형통함을 맛볼 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17세의 나이로 졸지에 애굽에 노예로 팔려가 오직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만을 붙들고서 새로운 삶을 살아간 요셉의 경우가 그러합니다(39:1-6). 요셉에게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 함께하심으로 말미암아 훗날 애굽의 총리가 되어 애굽의 백성은 물론 주변국의 수많은 백성들까지 목숨을 7 흉년으로부터 살리게 됩니다(50:20).

3)      반대로, 여호와의 종의 법도를 버리고 제멋대로 살아간 자의 전형적인 모습을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많이 수가 있습니다. 가운데 두드러진 경우가 북조 이스라엘 왕국의 초대 왕인 여로보암1세의 치세입니다. 그는 절기때마다 북조 이스라엘의 백성들이 남조 유다 왕국의 수도인 예루살렘의 성전으로 올라가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합니다(왕상12:25-27). 그래서 이스라엘 왕국의 북단인 단과 남단인 벧엘에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놓고 그것을 여호와로 알고서 섬기라고 왕명을 내립니다(왕상12:28-30). 이에 반발하는 레위인들을 버리고 아무 지파에서나 제사장을 선발하여 자신이 임명합니다(왕상12:31).

4)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섬긴 것이 아니라 사실은 출애굽 당시 광야시대 초기처럼 금송아지 우상을 섬긴 것입니다. 결과 정책을 정치적인 목적으로 대대로 답습한 북조 이스라엘 왕국이 주전 722년에 멸망을 당하고 이스라엘 10지파의 흔적이 역사 가운데 사라지고 맙니다(왕하17:5-34). 하나님의 진노와 징벌이 정도로 혹독한 것입니다. 이유를 십계명에서 이미 밝힌 바가 있습니다;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20:4-5).

  결론적으로, 사도 바울은 여호와의 종으로 살아가지 아니하고 제멋대로 사람의 지혜와 능력으로 유대교를 경영했던 자들의 잘못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 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1:21-23);

그런데 사실은 그와 같은 유대교지도자들의 잘못보다 잘못을 범하고 있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창조주의 지혜와 능력을 아예 무시하고 무신론적인 사고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는 이방인들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사도 바울의 지적에서 선민이거나 이방인이거나 모두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성도이거나 성도가 아니거나 모두가 자신은 해당이 되지 않는다고 단언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신앙을 지니고 있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생각과 뜻을 자신의 생각과 뜻보다 앞세우지 아니하게 되면 똑같이 영적으로 미련한 선택을 하고 말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타락은 자신을 망치고 믿음이 약한 많은 성도들을 실족시키게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창조주 되심을 아예 인정하지 아니하고 제멋대로 살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아무쪼록 사도 바울의 글을 통하여 자신의 신앙의 태도를 다시 점검하는 은혜가 풍성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