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로마서 강해 제12강(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1. 3. 11. 20:09

로마서 강해 12(2:9-11)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7 1 12()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은 종말론적인 미래의 일인가? 아니면 인생 가운데 경험할 있는 현재진행형인가?(2:9-11)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복음의 기초로서 로마교인들에게 설명해주고 있는 화두(話頭, 진리를 깨닫기 위한 명상이나 깊은 성찰의 주제가 되고 있는 실마리) 사람의 영의 존재성에 관한 것입니다. 바울이 말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은 비록 시간적으로 종말론적인 미래의 일이지만 사람들에게는 그것을 미리 감지하고서 두려움에 떨거나 아니면 기쁨 가운데 그때를 고대하고 있는 영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지적은 충분히 공감할 수가 있는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현재 살아 숨쉬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미래에 다가올 자신의 종말에 대하여 두려움과 불안감을 떨쳐버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 세상을 떠나는 나는 그리스도에 의하여 구원을 받아 아버지 하나님이 계시는 영생의 나라에 영광 가운데 들어갈 수가 있을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영원한 소멸보다도 못한 영원한 처벌 가운데 들어갈 것인가?  그것이 누구에게나 궁극적인 관심입니다”.

과연 옛날 다윗왕조의 히스기야 왕처럼 자신이 죽고 다음에 닥치는 왕국의 멸망이나 후손들의 불행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할 수가 있을까요?(39:8) 그러한 하나님의 심판은 생전에 발생하는 것이 아니므로 자신은 그저 현재를 즐기며 세상에서 왕의 영광을 누리면 그것으로 만족한다고 그렇게 강변할 수가 있는 것일까요?

문제는 영이신 하나님께서 그렇게 마냥 현세주의적인 축복만을 누리고 말겠다고 작심하고 있는 사람들을 그냥 내버려두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조치하고 계시는 것일까요? 해답이 바로 본문의 내용이라고 하겠습니다.  

그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악을 행하는 사람의 에는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며”(2:9);

(1)   하나님의 심판은 종말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시공간을 초월하시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그렇게 인간의 시간이라는 관념에 갇혀서 반드시 인간과 인류의 종말의 시기에만 심판을 시행하시는 것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1)      그러므로 사실은 피조물인 사람들이 창조주 하나님을 인식하고 만나는 그때가 영적으로는 이미 자신의 종말입니다. 창조주 앞에 피조물인 인간이 서게 되었으니 영원한 소멸이냐? 아니면 사함을 받아 하나님 안에서의 영생을 얻느냐? 라는 중의 하나에 직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사도 바울은 사람들이 악을 행하게 되면 영적으로 어떠한 상태에 들어가게 되는지를 알기 쉽게 말하고 있습니다; “악을 행하는 사람의 에는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2:9a).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합리화에 익숙합니다. 악을 행하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악행을 변명하고 합리화하고 있습니다. 세상적인 명분을 동원하여 자신의 행위는 악행이 아니고 정당방위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3)      과연 그것이 가능할까요? 개인적으로 사람을 해쳐 놓고서 그것은 억울함을 풀기 위한 , 또는 원수를 갚기 위한 것이라고 변명할 수가 있을까요? 결과 살인을 저지른 자신이 영적으로 아무런 떨림이 없는 것일까요? 또한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서서 나라를 지키기 위한 것이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등으로 전쟁에서 살인행위를 자신을 용서할 수가 있을까요? 그렇게 되지가 않기 때문에 괴로운 것입니다. 살인은 어떠한 명분을 동원하더라도 하나님의 계명을 어긴 것이기 때문입니다(20:13).

4)      따라서 문제는 하나님께서 행위를 어떻게 보고 계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행위가 의로운 것으로 받아들여지지가 않으면 그것은 악행이며 사람의 영에는 환난과 곤고가 찾아오게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영적인 심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판이란 반드시 죽어서 받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죽은 다음의 심판이란 하나님께서 죽은 자의 영혼을 부활시켜서 영벌에 처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육신을 입고서 아직 목숨을 유지하기 위하여 살아가고 있는 인생 가운데 받게 되는 영적인 환난과 곤고함입니다.

(2)   시공간을 초월하여 영생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정죄가 오고 있으니 연약한 사람의 영이 어떻게 고통을 모두 감내할 수가 있겠습니까?

1)      마침내 모두 견디지를 하고 마치 가룟 유다처럼 자기자신을 죽이는 것으로 빨리 결말을 내고자 합니다(27:5). 하지만 그것도 현명한 방법이 아닙니다. 십계명 가운데 살인죄를 하나 추가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2)      물론 마지막 위안이 있습니다; 하나는 육신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고 청산이 수가 있다고 하는 심히 유물론적인 사고방식입니다. 하나는 영의 세계와 육의 세계는 완전히 분리가 되어 있으므로 육신을 입고 있는 동안에 행한 악행은 영의 세계에서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하는 영지주의의 견해입니다(2:15).

3)      하지만 그것은 창세기 1 1-2절을 들여다보는 순간 거짓임이 밝혀지고 있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지금도 모든 피조물을 영적인 능력으로 정밀하게 순찰하고 계시는데 그와 같은 어설픈 위로로써는 도저히 빠져나갈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3)   그러므로 사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정경으로 가지고 있다고 하는 그것이 괴로운 것입니다. 자신의 악행을 어쩔 없는 것으로 그리고 정당한 것으로 합리화하고 싶은데 그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인간의 행위를 선악으로 분별하고 있는 하나님의 눈이 숨어 있습니다(39:9). 따라서 사람의 변명이 통하지를 않습니다. 당장 십계명과 율법이 벌써 정죄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정경으로 지니고 있는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악행에 대하여 훨씬 심한 영적인 환난과 곤고함을 느끼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2:9b). 다음이 철학에 밝으며 관념의 세계를 깊이 탐색하고 있는 헬라인들입니다(2:9c). 다음이 실용주의를 숭상하고 있는 유물론자들인 로마 사람들일 것입니다.

둘째로,선을 행하는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라”(2:10); 선을 행하는 경우는 악을 행하는 경우와 정반대입니다. 영적인 하나님의 축복이 당장 사람에게 임하게 됩니다. 상과 벌에 얼마나 정확하시며 확실하신 하나님이신지 모릅니다. 악행을 행하는 자에게 영적인 환난과 곤고를 주시는 것처럼 반대로 선을 행한 자에게는 기쁨과 평강을 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게 되면 하나님의 자녀로 여김을 받게 되는 엄청난 영광과 존귀함이 찾아오게 됩니다(1:12-13, 2:10a). 어째서 그러한 현상이 발생하게 되는 것일까요?

(1)   이유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이 세상을 선하게 관리하라고 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종인 사람들은 세상의 것들을 돌보고 생명을 살리는데 최선의 노력을 경주해야만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청지기에게 맡기신 직분이며 인생의 목적입니다. 그러므로 맡기신 일을 처리할 때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칭찬하십니다. 훗날 하나님의 나라에서 함께 세상을 선하게 돌보며 같이 지내자고 하십니다(22:28-30).

(2)   그러한 하나님의 뜻과 상급을 알고 계신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생명을 살리기 위하여 자신을 대속의 십자가에서 속죄의 제물로 희생하십니다(3:13-15, 6:38-40). 결과 무덤속에서 부활하는 영광이 찾아옵니다. 그리고 사도와 제자들을 찾아오셔서 세상을 이기신 평강을 전해 주십니다(24:36, 20:19). 나아가서 승천하여 존귀한 자리에 앉아 모든 피조물의 경배와 찬양을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받게 되십니다(2:36, 5:13).

(3)   유대인들 가운데 예수님의 사도와 제자가 자들은 그리스도의 영광과 평강 그리고 존귀함이 훗날 자신들에게도 임하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습니다(2:10b). 따라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세상에 예수님의 부활의 신앙과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2:36-47, 3:1-10, 6:1-7, 8:5, 10:34-48, 13:1-12). 뒤를 개종한 헬라인들이 따르고 있습니다(2:10c). 이제는 로마의 수도에 살고 있는 성도들이 뒤를 따라야만 것입니다.

셋째로,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라”(2:11);

(1)   영이신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가장 깊숙한 속사람을 보고 계십니다. 안에 담겨 있는 사람의 영이 평강을 누리고 있는지 아니면 불안에 떨고 있는지를 항상 감찰하십니다. 그런데 육신의 눈으로 이웃을 보고 있는 사람들은 그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깊숙한 영적인 상태나 마음속 속사람에 대해서는 무지합니다. 그래서 기껏 보고 있는 것이 당장은 겉모습입니다. 다음에 오래 겪어보면서 사람의 지식과 감정과 의지의 정도를 파악하게 됩니다.

(2)   그와 같은 관점의 차이와 능력의 차이를 사람들이 깜빡깜빡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영적으로 둔감해지면 마치 하나님께서 아니계시는 것으로 취급하고 맙니다. 그래서 유물론적인 사고방식에 빠져서 그만 세상적인 , 물질적인 , 그리고 겉으로 드러나는 것을 중시하게 됩니다. 그러한 것들을 많이 소유하고 그것으로 이웃을 지배할 있다고 하면 어떠한 수단을 사용하더라도 모두 정당화가 된다고 생각하고 맙니다. 그것이 현대 물질사회가 겪고 있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3)   어떻게 하면 고질병을 고칠 수가 있을까요? 사도 바울은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는 로마시의 성도들에게 마디로 명쾌하게 대답을 하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라”(2:11). 그러므로 창조주 하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성도들은 하나님의 눈이 보고 있는 것을 함께 있어야만 합니다. 그것이 어렵다면 그리스도 예수께서 무엇을 보시고 공생애를 살아가셨으며 무엇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셨던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4)   결국 문제는 겉으로 살아서 움직이고 있는 육신이 아닙니다. 살리는 것은 속에 들어 있는 영입니다(8:1-11). 영이 하나님을 느끼며 기뻐하고 복음적인 삶에 익숙하면 세상에서 평강을 누리고 마침내 하나님나라에서 영광과 존귀함에 참여할 수가 있습니다. 반대로, 아무리 세상적으로 소원성취를 하고 출세를 하여 지배자의 권위를 행사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환난과 곤고함을 영이 느끼고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불쌍한 악행자의 삶이며 결국은 영원히 죽을 수도 없는 고통의 연속입니다.

결론적으로, 사람은 살아서 영적으로 지옥을 맛보고 있는 자와 영생의 기쁨을 맛보고 있는 자로 이미 갈라지고 있습니다. 겉으로 외모만 보아서는 그것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내심 그렇지가 않은 척하면서 겉으로 그것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필사적인 노력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영적인 상태를 먼저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금방 아십니다.  

그와 같은 영적인 활동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있을 때에 더욱 민감하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알고 있는 선민이 율법을 아예 모르고 제멋대로 생활하고 있는 이방인보다 사실은 영적으로 축복을 먼저 받은 백성들입니다. 그런데도 그것이 축복임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사실을 안타까워하고 있는 사도 바울의 동족사랑의 마음이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라”(2:9-10).

사도 바울과 같은 심정으로 성도들을 바라보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먼저 듣고 있는 축복을 받은 자들이 바로 성도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알고서 이제는 영적으로 크게 각성을 해야만 합니다. 성도들부터 먼저 이상 보이는 것과 세상적인 외적인 겉모습에 취해서 살아가서는 안됩니다. 자신의 영적인 상태를 정확하게 진단해야 하며 나아가서 하나님을 모르는 이웃에 대하여 예수님의 복음으로 그리고 성령님의 진리의 역사로 영들을 깨워야만 합니다.

우리 모두 영적인 환난과 곤고를 벗어날 있도록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만 합니다. 그것이 살아생전에 지옥을 벗어날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아무쪼록 그러한 영적인 대각성이 여러 성도님들과 특히 복음을 많이 듣고 있는 한국의 백성들에게 풍성하게 있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