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로마서 강해 제16강(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1. 3. 14. 02:38

로마서 강해 16(3:1-5)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7 1 16()

 

사도 바울이 로마의 성도들에게 인간이 따지는 상대적인 효용성이라는 판단으로 절대적인 죄사함과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긍휼을 판단할 수가 없다고 진술하다(3:1-5).

 

사도 바울의 13개의 서신서 가운데 특히 로마서가 어렵습니다. 당연히 강해를 하기에도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성도들이 최선을 다해서 의미를 이해하고자 노력을 해야만 합니다. 이유는 당시 하나님의 진리체계에 대하여 가장 깊은 내용을 바울의 로마서가 수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 그의 영적인 깨달음을 깊이 있게 논술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유는 그의 글을 편지로 받아서 당장 읽게 되는 로마시의 성도들의 수준 때문입니다. 당시 제국의 수도가 로마시입니다. 그러므로 그곳에 살고 있는 성도들은 세계에서 가장 문명인이며 세계관과 지혜가 뛰어난 자들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들은 로마교회의 성도들이지만 동시에 광대한 제국을 효율적으로 다스리고 있는 로마인들입니다. 제국을 다스리기 위해서 로마인들은 유럽과 중동에서 가장 뛰어난 학문과 철학과 예술을 모두 차용하여 사용하고 있습니다. 또한 가장 효율적인 정치제도와 법제도 그리고 군사제도를 운용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로마인들은 사상과 제도의 수용능력과 실용성의 추구라는 측면에서 가장 뛰어난 민족입니다.

그러한 그들에게 그들의 뛰어난 수준을 초월하고 있는 하나님의 복음의 진리체계에 대하여 이제 사도 바울이 논리적으로 이치를 설명하고자 합니다. 그러므로 작업이 어찌 쉽겠습니까? 하나님의 성령님의 도우심이 절실합니다. 그리고 평생 갈고 닦은 사도 바울의 학문과 사상 그리고 복음에 대한 깊은 통찰력이 총동원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측면을 이해하고서 본문을 들여다보게 되면 사도 바울이 무엇을 로마교회의 성도들에게 말하고 싶어하는지를 알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진리체계와 복음에 대해서는 그렇게 세상적인 효용성과 유익성을 따져서 함부로 재단하고 판단할 수가 없다고 하는 지론입니다. 약간의 설명을 덧붙여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첫째, 사람들의 판단과 선택은 시간적인 제약과 공간적인 제약을 가지고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인간의 오랜 경험과 지혜를 가지고 보다 나은 판단을 내리고자 노력할지라도 피조물인 이상 육신적인 제약은 벗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2)   둘째, 본질적으로 사람들은 자기 중심적이며 이기적이고 또한 세속적인 유익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에 비해서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판단의 기준은 완전히 다릅니다. 세상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시기에 피조물과 피조세계 모두를 돌보고 살리고자 하십니다(3:16-17). 또한 공평한 구원의 기회를 제공하고자 하십니다(8:18-22). 그것이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입니다.

(3)   셋째, 하나님께서는 인류에 대해서도 사람들이 도모하고 있는 집단 이기적이고 세속적인 차원을 넘어서서 모두를 살리고자 하십니다(6:39, 1:8, 9:24-26). 따라서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을 주고자 하십니다(28:18-20, 22:28-30). 그것이 하나님의 복음입니다. 구체적으로, 여호와의 뜻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긍휼과 사함의 구원 그리고 하나님나라의 건설 등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그런즉 유대인의 나음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 무엇이냐? 범사에 많으니 우선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3:1-2);

(1)   2장에서 사도 바울은 로마인들의 실용주의 사상에 입각하여 선민 유대인들의 율법과 할례와의 관계를 설명한 바가 있습니다(2:25-28). 핵심은 율법준수는 목적이며 육체적인 할례는 수단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할례가 율법생활을 올바르게 이루어 나가는데 도움이 되면 효용성이 있고 그러한 기여가 없다고 하면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도구적인 생각에 충실한 로마인들의 사고방식에 맞추어서 사도 바울이 설명한 것입니다.

(2)   그런데 3 본문에 들어오게 되면 사도 바울은 그러한 로마인들의 실용주의 사상을 단숨에 뛰어넘고 있습니다. 마디로, 그렇게 세상적인 효율성이나 기여도라는 측면에서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을 선민으로 삼으시고 그들에게 할례를 것이 아니라고 하는 차원을 생각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 무엇이냐? 범사에 많으니 우선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3:1-2). 조금 설명을 덧붙여 봅니다;

1)      첫째, 로마교회의 성도들이 제국의 변방에 살고 있는 유대교인들의 종교생활에 대하여 진작부터 제국의 정보조직을 통하여 듣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창조주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유일한 민족이라고 하는 자부심이 대단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일종의 법률체계인 율법으로 삼아서 그것을 지키면서 자율적인 종교생활을 영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들은 자신들의 성전문화와 할례의식에 대하여 이방인들에게 얼마나 자랑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2)      둘째, 하지만 그들의 현실을 대입하여 생각해보면 그것은 외식적인 겉치레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창조주의 말씀을 거론하면서도 그들은 유대인들만의 이익을 추구하기에 급급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을 벌하시고 선민만을 구원하신다는 메시아사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선민들은 할례, 율법, 성전 세가지만 보유하고 있으면 자연히 거룩해지고 하나님의 구원을 얻을 수가 있는 알고 있습니다.

3)      셋째, 그것은 로마인들이 보기에는 잘못된 종교생활입니다. 적어도 고등종교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면 그와 같은 극도의 이기주의나 수호신 사상은 극복하는 측면이 있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노력이나 사상이 전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유대교인들에 대한 로마인들의 판단은 이기적이며 폐쇄적이고 별로 세상적으로 나은 구석이 없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요컨대, 존경의 대상이 아니라 멸시의 대상입니다. 그래서 주후 41년에 즉위한 글라우디오 황제는 아예 로마시에서 유대인들을 전부 추방하고 말았습니다(18:2).

4)      넷째, 이제부터 사도 바울은 그와 같은 로마인들의 판단이 가장 중요한 진리를 놓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자 합니다. 그것은 두가지입니다; 하나는 그와 같은 유대인들을 선민으로 삼으시고 그들에게 율법과 할례를 주신 분이 창조주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는 종이 주인의 뜻을 따르지 아니하고 잘못하고 있다고 하여 다른 종이 주인까지 잘못하고 있다고 함부로 판단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종들은 어디까지나 종들이고 주인은 어디까지나 주권자라는 것입니다.

5)      다섯째, 그러므로 유대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특별히 선택하시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법률의 형태인 율법으로 맡겨서 애초에 하나님을 주권자로 모신 신정국가를 운영하도록 하신 하나님의 생각이 분명히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과연 무엇인지 겸허하게 창조주의 생각을 묵상하는 것이 성도들의 의무라는 사도 바울의 깊은 생각이 본문의 말씀 가운데 들어 있다고 하겠습니다.

6)      여섯째, 바울이 지금까지 논구한 바에 따르면, 선민들은 육신에 가진 자신들의 할례를 보고서 마음속으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각을 하고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준행하는데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2:29). 그것은 할례가 육신적인 차원에 머물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 자의식과 깨달음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점을 깨닫고 유대인들이 율법생활에 전념한다면 하나님의 뜻이 그들을 통하여 이루어질 수가 있습니다.

7)      결론적으로, 영적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서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진지하게 실천하고자 하는 신앙생활이 있게 되면 유대인들이야 말로 여호와의 종이며 그리스도의 제자가 있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유대인 기독교인에 의하여 세계선교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도 사실인 것입니다. 요컨대, 하나님의 선택이 틀린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이제부터 로마성도들은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주권적인 선택(9:21-24) 그리고 선택에 맞게 앞으로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역사섭리 등을 바라볼 있는 복음적인 안목이 열려야만 것입니다(11:28-36).

둘째로,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하리요. 믿지 아니함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겠느냐? 그럴 없느니라. 사람은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기록된 ,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 함과 같으니라”(3:3-4); 다음과 같이 부문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하리요. 믿지 아니함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겠느냐? 그럴 없느니라”(3:3-4a);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선택하여 자신의 언약의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19:5-6).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모세를 통하여 마치 법률체계와 같은 율법으로 그들 백성에게 주시면서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을 올바로 섬기는 신정국가를 운영하라고 하십니다. 하지만 선민들이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받들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본문에서 어떤 자들 선민들이 하나님을 제대로 믿고서 신앙생활을 하지 아니하였다고 지적하고 있는 대목입니다(3:3a). 결과 역사적으로 그들의 왕국이 망하고 여러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그렇다면,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하고 율법과 할례를 주신 하나님의 결정이 잘못된 것일까요? 사도 바울은 마디로, 그것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 믿지 아니함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겠느냐? 그럴 없느니라”(3:3b-4a). 그렇다면 그렇게 주장하고 있는 바울의 논거가 무엇일까요? 내용을 적고 있는 것이 사실은 이하 그의 로마서의 내용입니다. 참고로, 역사적인 사실을 조금 부연해봅니다;

1)      주전 722년에는 북조 이스라엘 왕국이 앗수르제국에 의하여 망하면서 이스라엘 10지파의 자취가 사라지고 맙니다. 그리고 주전 586년에는 다윗왕조의 유다 왕국마저 신바벨론제국에 의하여 패망을 하고 맙니다. 그후 페르시아 고레스 황제의 호의로 자유를 얻게 유대인들 가운데 일부만이 고토로 돌아와서 2성전을 건설하고 율법생활을 하게 됩니다(1:1-4).

2)      하지만 페르시아의 뒤를 이어 헬라제국과 로마제국이 유대사회를 계속 속국으로 다스리고 있습니다. 단지 주전 140년경부터 80 동안 레위인들의 하스모니안 왕조가 시리아로부터 독립을 얻어 한때 유대 땅을 다스렸을 이외의 기간에는 작금에 이르기까지 패권국의 속국신세를 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선민 유대인들의 현실입니다.

3)      그와 같은 유대인들의 역사를 검토해보면, 도저히 창조주 하나님께서 유일한 선민으로 선택하시고 여호와의 이름을 두신 민족이 아닌 것만 같습니다. 어떻게 창조주 여호와를 섬긴다고 하는 유일한 백성이 세상의 패권국의 지배에서 계속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는 것입니까? 무엇이 잘못 되어 있어서 그러한 결과가 역사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일까요?

4)      단지 선민 유대인들이 율법과 할례만을 자랑하고 진심으로 하나님을 올바로 섬기지 못한 결과일까요? 아니면 애초부터 하나님의 선택이 잘못된 것일까요? 점에 대하여 사도 바울의 설명이 충분히 있어야만 것입니다. 실제로 점을 중심으로 복음의 내용과 하나님의 역사섭리를 논리적으로 서술하고 있는 것이 바로 사도 바울의 로마서라고 하겠습니다.

(2)   사람은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기록된 ,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 함과 같으니라”(3:4bc);

1)      사도 바울은 사람들에게는 진리가 없지만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진리 자체라고 전제를 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3:4b).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택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왈가왈부를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참새가 만물의 영장인 사람의 뜻을 모두 헤아릴 수가 없는 것과 같습니다.

2)      사람들은 피조물 가운데 유일하게 영성을 일부 지니고 있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자신이 마치 하나님이라도 듯이 세상의 질서를 관장하고 피조세계를 자신의 입맛에 맞게 다스리고자 하는 오만과 교만이 득세를 있고 있습니다. 때로는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생각과 지혜도 자신들의 생각으로 대체를 하고자 합니다.

3)      특히 거대한 제국을 경영하고 있는 수도 로마의 시민들은 그러한 경향이 농후합니다. 그들은 오랜 세월 이웃나라의 우월한 학문과 철학 그리고 예술과 기술 등을 적극적으로 흡수하고 발전시키며 자신들의 장점인 실용주의를 극대화한 결과 역사상 가장 거대한 제국을 건설한 것입니다. 따라서 로마인들이야 말로 그들의 수용능력과 실용주의사상을 세상에 자랑할 만합니다. 그것은 선민이라고 하는 유대인들의 율법이나 할례보다 자신들의 만민법과 도구주의가 더욱 뛰어난 것이라고 자랑할 만하다는 것입니다.

4)      그러나 그렇게 판단하는 자체가 사도 바울은 피조물인 인간의 교만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이유는 하나님의 깊은 지혜와 역사섭리의 방향성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인간의 좁은 생각과 자기 중심적인 판단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점을 알기 쉽게 지적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기록된 ,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 함과 같으니라”(3:4c).

5)      바울의 말은 다윗의 시편에 있는 다음 구절을 원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주께서 심판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51:4). 요지는 선민과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다른 백성들이 입을 수가 있는 차원의 것이 아니라는 주장입니다. 왜냐하면, 선민들의 잘못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판단하시고 장차 회개를 시키시고 잘못을 고쳐 나가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6)      그러므로 오직 이방인들은 하나님 앞에 지은 자신들의 죄악에 대해서만 회개를 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옳게 형성하게 되면 그것으로 족한 것입니다. 그와 같은 바울의 지적은 마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사도 베드로에게 주신 다음과 같은 가르치심과 동일합니다;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님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21:21-22).

7)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은 사람은 모두가 죄인들이므로 남을 비판하는 것이 먼저가 아니라 자신과 너희 자손들을 위하여 울고 회개하면서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는 것이 먼저라는 것입니다(23:28). 로마인들도 당연히 그렇게 처신하여야만 하는 것입니다.

셋째로,그러나 우리 불의 하나님의 드러내게 하면 무슨 하리요. [내가 사람의 말하는 대로 말하노니] 진노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냐?”(3:5); 사도 바울의 말은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두가지 경우를 살펴보면서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는 반면교사나 타산지석의 경우입니다. 하나는 가룟 유다의 반론과 같은 것입니다.

(1)   반면교사나 타산지석의 경우; 선민들이 하나님을 잘못 섬기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가 그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방인들이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고서 하나님신앙에 대하여 거꾸로 많이 배울 수가 있습니다. 선민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잘못 섬기고 있는가 하는 점을 연구하여 그들과 반대로 실천하면 하나님을 섬길 있는 방안이 되기 때문입니다;

1)      그러므로 남의 잘못을 보고 거꾸로 행하여 자신의 잘못을 사전에 예방하고 바로 잡을 있는 효과가 분명히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입장에서 선민들이 하나님께 자신들의 기여에 대하여 이렇게 말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잘못한 신앙생활이 나름대로 하나님의 뜻을 이방인들에게 알게 하는데 크게 도움이 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공로를 인정해 주십시오”.

2)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러한 주장이 성립이 수가 없다고 말합니다. 이유는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선민도 이방인도 전부 돌보고 살리기를 원하시며 모두를 공평하게 대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선민을 본보기로 일벌백계함으로써 이방인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그러한 무리수를 두시지를 않으시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심판에 있어서는 누구나 공평하게 똑같이 자신들이 지은 잘못만큼의 처벌만을 받을 따름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대속의 희생에 따라 사람들에게 회개와 구원의 기회를 제공함에 있어서도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여 모든 족속들에게 공평한 기회를 주고자 하십니다(24:14, 28:18-28). 요컨대, 하나님께서는 연좌제나 본보기 처벌 같은 것을 행하시지를 않으시는 것입니다.

(2)   가룟 유다의 반론의 경우;

1)      최후의 만찬식을 지낼 때에 가룟 유다가 스승이신 예수님께 다음과 같이 제안을 했다고 하는 내용의 외경이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시자면 반드시 유월절 어린양으로 처형을 당하셔야만 합니다. 기회를 만들기 위하여 가룟 유다 자신이 희생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내부고발자가 되어 스승을 대제사장과 유대교지도자들에게 팔아 넘길 것입니다. 그리하면 훗날의 역사에 있어서 가룟 유다 자신은 만고의 역적이며 마귀라고 불리게 됩니다. 하지만 가룟 유다의 희생에 의하여 예수님은 순조롭게 정해진 시기에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게 되고 부활의 역사가 찾아오게 됩니다”.

2)      마디로, 그러므로 가룟 유다의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는 기여를 하고 있다는 논리입니다; “그러나 우리 불의 하나님의 드러내게 하면 무슨 하리요(3:5a). 주장이 과연 설득력을 지닐 수가 있을까요? 사도 바울은 전혀 그렇지가 않다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이유는 [내가 사람의 말하는 대로 말하노니] 진노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냐?”(3:5b) 자문자답을 해보게 되면 당장 그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자명하기 때문입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당사자의 잘못에 대해서만 정확하게 처벌을 하십니다.

3)      하나님께서는 이미 창세기에서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밝히신 그대로 대속의 제물로 절대로 사람을 사용하지를 않으십니다(22:10-14). 구약시대에는 가축으로 대신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저도 하나님의 아들을 대신 희생양으로 보내셔서 영원한 속죄의 제사를 드리시고 가축을 사용하는 속죄의 제사의 시대를 마감하고 계십니다(7:27). 그러하신 하나님께서 무엇 때문에 가룟 유다를 대속의 제물로 사용하시겠습니까?

4)      그러므로 가룟 유다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거룩한 희생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탐욕과 기회주의자적인 속성 때문에 그렇게 행동한 것입니다(12:5-6). 구체적으로, 예수님을 버리고 달리 출세할 있는 길을 모색하고자 대제사장을 비롯한 유대교의 지도자들을 찾아간 것입니다(26:14-16). 그리고 양심의 가책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하고 것입니다(27:5).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선택이 틀린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로마성도들은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주권적인 선택(9:21-24) 그리고 선택에 맞게 앞으로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역사섭리(11:28-36) 등을 바라볼 있는 복음적인 안목이 열려야만 것입니다.

그와 같은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 사도 바울의 로마서 기록이 다음과 같습니다; “토기장이가 진흙 덩이로 하나는 귀히 그릇을, 하나는 천히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9:21),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11:29),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11:33-36). 아무쪼록 본문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많은 깨달음과 실천의 은혜를 얻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