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로마서 강해 제17강(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1. 3. 14. 13:01

로마서 강해 17(3:6-8)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7 1 17(3:6-8)

 

율법생활에 실패한 유대인들이 그것이 오히려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는 도구가 되었다고 주장한다면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인정하실 것인가?(3:6-8)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로마교회의 성도들에게 헬라인들의 영지주의(靈智主義, Gnosticism) 하나님의 복음(福音, Gospel) 어떻게 다른가 하는 점을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을 깊이 있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헬라철학의 뿌리가 되고 있는 영지주의에 대하여 살펴보고 그것과 하나님의 복음이 어떻게 다른가 하는 점을 파악해볼 필요성이 있습니다. 간략하게 적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첫째, ‘영지’(靈智, 영적인 지식, Gnosis)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 자신의 영성과 지성으로 깨닫게 되는 하나님의 창조의 이치를 말하고 있습니다. 헬라인들은 그러한 영적인 지식 깨달을 있는 능력이 두뇌가 명석하고 세상의 이치에 밝은 일부 명철한 철학자들에게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냥 영지 얻을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와 같은 태초의 지혜에 해당하는 아르케 얻기 위해서는 동굴 속에서 오랜 세월 세상의 형성과 운영의 이치를 깊이 탐구하고 명상을 해야만 합니다. 그리하면 마치 한줄기 빛이 동굴 속으로 비추어 오듯이 그렇게 놀라운 지혜가 찾아 온다고 합니다. 그것을 붙잡고 그것으로 세상의 지식을 새롭게 하고 체계화하는 것이 철학자들의 득도(得道) 과정입니다. 결과 헬라의 철학자들은 어떠한 영지 얻고 있는 것일까요?

(2)   둘째, 헬라의 철학자들이 마치 고행을 하듯이 동굴 안에서 오랜 세월 깊은 사색을 하여 깨닫게 영지는 세상의 창조의 이치와 인생의 가치입니다. 세상은 본래 신적인 지혜와 에너지를 가지고 있는 영적인 지식에 의하여 만들어진 세계입니다. 그러므로 피조된 세계는 그것을 만든 영적인 지식의 사상과 지혜가 반영이 허상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한 사실을 깨닫게 되면 철학자는 본체가 되고 있는 실상의 세계인 영적인 지식의 세계를 더욱 탐구하게 되는 것이지 결코 영지가 만들어 허상인 육신의 세계를 추구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철학자들의 인생의 목표가 그러하듯이 이제는 올바로 인생을 살아가고자 하는 자들은 인생의 목표를 본질적인 창조의 가치를 가지고 있는 영의 세계에 두어야만 합니다. 결코 육신과 함께 허무하게 사라져버리는 허상인 세상에 영원한 가치를 두고서 살아가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3)   셋째, 그렇게 헬라의 영지주의 철학이 추구할 가치가 있는 영적인 세계와 인생이 끝나게 되면 아무런 필요가 없는 물질의 세계라는 이분법적인 사고를 기본적으로 가지게 되자 크게 두가지의 문제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쾌락주의의 발생입니다. 이왕 세상살이가 끝나게 되면 아무런 필요가 없어지는 육신이므로 육체를 입고 있는 동안에 세상의 향락과 쾌락을 실컷 즐기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생각은 영적인 구원과 육체의 타락과는 아무런 인과관계가 없다고 하는 극단적인 이분법적 사고방식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그러한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으로 복음을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의 세계를 쉽게 이해할 있는 방법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4)   넷째, 하나님이 계시는 영의 세계와 사람들이 살고 있는 육의 세계로 갈라서 생각하게 되면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이해하기 쉬운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것이 아닙니다. 이유는 둘은 전혀 별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1)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부터 영과 육을 가지고 있는 유일한 생명체로 만들고 계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2:7). 사람은 정체성이 물질인 육과 영이신 하나님의 영이 합체가 되어 있는 영육합일체(靈肉合一體) 생령(生靈, living soul)입니다. 그렇게 영과 육이 하나로 합쳐져서 (, soul)적인 기능 지성과 감성과 자유의지가 발휘가 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2)      그런데 그러한 인간의 정체성이 모두 소멸이 되어버리고 완전한 영적인 존재로 탈바꿈이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무덤 속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새로이 입고 계시는 부활의 이해를 해야만 것입니다. 비록 그것이 영생의 몸이며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따를 있는 몸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영육합일체인 사람의 정체성을 유지하게 해주고 있는 새로운 하나님의 창조물입니다. 결코 육적인 것을 완전히 버리고 오로지 영적인 것으로만 구성이 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3)      만약 사람의 정체성이 완전히 사라져버린 것으로 해석을 한다면 그것은 구원의 의미가 변질되어 버린 것을 의미하게 됩니다. 요한복음 3 16절의 말씀 그대로, 창조주께서는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독생자를 그리스도로 보내신 것이지 결코 세상을 멸망시키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늘과 땅의 창조와 하나님나라의 강림은 모두가 새로운 영적이고도 물질적인 세상의 창조를 말하고 있는 것이지 오직 영만이 존재하고 있는 그러한 세상이 아닌 것입니다.

(5)   다섯째, 초대 예루살렘교회의 7집사 가운데 사람인 안디옥 사람 니골라가(6:5) 영지주의적인 시각에서 복음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는 극단적으로 육은 악하고 무익한 것이기에 구원의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어차피 육신적인 삶은 하나님의 구원과는 관련이 없다고 여깁니다. 모두 버리고 것에 불과하다고 한다면 육신을 입고 있는 동안에 실컷 세상의 쾌락을 누리고 가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쾌락주의에 빠져들게 됩니다. 그의 생각을 쫓는 무리들이 초대교회에서 발흥하게 됩니다. 이름하여 니골라 입니다. 그러한 잘못된 영지주의의 영향을 제거하기 위하여 초대교회가 발버둥을 치게 됩니다. 따라서 이름이 요한계시록에까지 등장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2:14-16).

(6)   여섯째, 오늘날에도  니골라 에서 엿볼 있는 그러한 잘못된 영지주의의 영향은 교회와 성도들의 성적인 타락을 부채질하고 있는 누룩이 되고 있습니다(2:14-16). 그리고 영향력은 누구나 영에 의한 육의 세계의 창조라는 창조의 이치를 정확하게 깨닫게 되면 자력으로 신이 수가 있다고 하는 인본주의 사상입니다. 그것은 서양에서는 헬라의 영지주의 철학에서 수가 있고 동양에서는 자력구원의 종교에서 많이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창조주의 존재를 부인하면서 세상을 무주공산(無主空山, 주인이 없는 )으로 보고서 단지 창조의 이치와 에너지를 깨닫고 얻어서 스스로 신적인 존재가 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득도를 위해서는 어떠한 고행이라도 감수를 하고자 합니다. 예를 들면, 브라만교가 그러하고 불교와 도교 등이 그러합니다. 그것은 뿌리가 유물론과 범신론이며 영지주의 철학이라고 하겠습니다.

이상과 같은 사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에 대한 묵상을 통하여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결코 그렇지 아니하니라. 만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어찌 세상 심판하시리요. 그러나 나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풍성하여 그의 영광이 되었다면 어찌 내가 죄인처럼 심판을 받으리요”(3:6-7); 본문은 가룟 유다의 항변을 전제로 하고 있는 사도 바울의 설명입니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기준에 유다의 항변이 통하지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유는 세가지로 정리가 됩니다; 첫째, 무엇보다도 진리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거짓에 근거하고 있는 사탄적인 방법을 일체 사용하지 아니하십니다. 둘째, 하나님의 세상심판의 기준은 정정당당하며 공정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권력자들이 즐겨 사용하고 있는 일벌백계나 연좌제 또는 거짓증인이나 누명 등의 방법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셋째, 어두운 구석에서 음모나 흥정에 대해서는 일체 가치를 인정하지를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는 어두움의 세력들이 행하고 있는 악한 음모나 그와 타협하고 있는 자들의 거짓말이 그대로 백일하에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조금 설명을 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마귀는 소위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 쥐만 잡으면 검은 고양이이든지 고양이이든지 상관이 없다고 하는 주장, 20세기 후반 중국에서 산업근대화에 기여하게 된다면 자본주의라도 도입하겠다고 하는 실용주의 정책을 말하고 있음) 같은 도구주의 사상을 가지고 사람들을 유혹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에게조차 자신에게 한번 경배를 하게 되면 천하권세를 전부 주겠다고 유혹을 하고 있습니다(4:5-8). 그리하면 예수님께서는 천하권세를 가지고 세상을 심판하면서 자신의 마음에 드는 자들을 구원하게 되면 하나님의 소원인 만민구원을 손쉽게 이룰 수가 있지 않을까요? 비극적이고 고통스러운 대속의 십자가라는 방법을 사용하지 아니해도 인류에 대한 구원이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언뜻 생각하게 되면 탁견(卓見, 탁월한 견해)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2)   그러나 문제는 발상의 뿌리 자체가 썩어 있다는 것입니다. 악한 음모자인 마귀의 제안으로부터 세상적인 기가 막힌 방법이 탄생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사탄과 타협을 하여 세상을 심판하고 사람들을 구원한다고 하면 구원받은 사람 속에는 무엇이 여전히 자리를 잡고 있을까요? 어두운 사망과 죄의 권세가 변함없이 동아리를 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겉으로 보기에 세상적인 구원의 모습인지는 몰라도 속을 들여다보면 여전히 심판의 대상에 불과한 것입니다.

(3)   외경에 따르면, 가룟 유다는 자신이 악한 세력과 타협하여 예수님을 배신하고 십자가 처형에 넘겨줄 터이니 부디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그토록 원하시는 메사아의 사명을 완수하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눈물겨운 희생으로 보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하여 예수님 대신에 자신을 희생한 가룟 유다로 보입니다. 그러나 결코 그것이 아닙니다. 이유는 그와 같은 악한 음모를 하나님께서 싫어하시기 때문입니다.

(4)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세상의 구원입니다. 그런데 구원은 심판을 통하여 옥석(玉石, 귀한 옥과 평범한 ) 구분할 때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맞는 인생을 살아간 자는 하나님의 오른쪽으로 분류가 되어(righteous) 영생에 들어가고 그러하지 아니한 인생을 살아간 자는 하나님의 왼쪽인 영벌에 처해지게 됩니다(25:34, 41, 46, 5:29). 그와 같은 최종심판이 공정하게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심판의 기준과 과정이 엄격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일체 사탄적인 방법이나 사탄과의 제휴에 의한 방법이 사용이 수가 없는 것입니다.

(5)   결론적으로, 자신의 범죄에 대한 교묘한 자기 합리화, 세상적인 명분, 위장전술과 변명의 여부까지 철저하게 심사가 되고 허위성이 가려지게 됩니다. 그렇게 철저하고 공정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피조물의 섣부른 판단과 불의는 자리가 없습니다. 그에 따라 사람의 거짓말은 하나님의 진리와 영광을 드러내는 도구가 전혀 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사실을 사도 바울이 본문에서 다음과 같이 천명하고 있습니다; “결코 그렇지 아니하니라. 만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어찌 세상 심판하시리요. 그러나 나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풍성하여 그의 영광이 되었다면 어찌 내가 죄인처럼 심판을 받으리요”(3:6-7).

둘째로, 또는 그러면 이루기 위하여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 어떤 이들이 이렇게 비방하여 우리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하니 그들은 정죄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3:8);

(1)   초대교회에 있어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의 구별이 뚜렷합니다. 이유는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들 가운데 많은 성도들이 여전히 율법의 강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그리스도 되심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속의 십자가 구원을 믿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도 신앙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율법생활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과 유대인들의 율법을 같이 믿고 생활화할 때에 보다 완전한 성도의 삶을 살아갈 수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이름하여 교회내에 성도로 참여하고 있는 유대주의자들입니다.

(2)   그런데 이방인들은 유대주의자들의 주장에 동의를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만민구원과 영생구원 그리고 하나님나라의 건설이라고 하는 복음에는 이방인들도 유대인들처럼 되어 율법생활을 철저하게 영위하라고 강조하고 있는 대목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의 외식적인 율법생활을 비판하시면서 사람이 자신들의 지혜와 능력으로 온전히 율법생활을 수가 없다고 밝히고 있습니다(23). 따라서 율법은 사람들이 모두 죄인이라고 하는 사실을 비추어주는 거울과 같습니다. 이에 따라 죄인의 심정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그리스도의 대속의 십자가를 붙들어야만 하는 것입니다(18:10-14).

(3)   그런데 이제 유대주의자들이 또다시 자신들처럼 철저하게 율법생활을 하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들에 대한 이방인 성도들의 날카로운 비판이 초대교회에서 형성이 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정죄하고 로마의 반역자로 거짓 고발하여 십자가에 처형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비판에 대하여 유대주의자들이 변명하고 있는 이론이 다음과 같습니다; “대제사장과 유대교의 지도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처형한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하지만 때문에 복음이 이방인들에게 전해지는 계기가 마련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미 앞절에서 살펴본 바와 같습니다; “그러나 나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풍성하여 그의 영광이 되었다면 어찌 내가 죄인처럼 심판을 받으리요”(3:6-7).

(4)   그렇다면 또는 그러면 이루기 위하여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3:8a) 섣불리 판단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유대교지도자들이 그리스도를 정죄하고 처단한 죗값을 역사 가운데 정확하게 받게 것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사도 바울이 이글을 기록하고 15년쯤 후에 로마의 정예병들이 유대 땅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하여 출동을 하게 됩니다. 결과 예루살렘과 유대 땅에서 110만명이나 죽게 되는 비참한 역사가 임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5)   그런데 사도 바울은 애매하게 유대인들의 잘못만 강조하고 있는 이방인 성도들의 지적도 온당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유는 만민을 구원하시려고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섭리의 이치를 제대로 생각하지 아니하고 선민들을 싫어하고 비방하는 경향이 농후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와 같은 애매한 비방은 삼가를 해야만 합니다. 사실 하나님의 말씀을 파수하고 하나님신앙의 원형적인 모습을 보전하고 있었다고 하는 측면에서 선민들의 역할을 무시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6)   따라서 사도 바울이 이미 다음과 같이 말한 바가 있습니다;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냐? 범사에 많으니 우선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3:1-2).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초대교회 내에서 사이의 불필요한 논쟁을 마무리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이 이렇게 비방하여 우리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하니 그들은 정죄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3:8). 교회 내에서 서로 자신들이 옳다고 죄인들끼리 다투고 분쟁을 하게 되면 그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정죄를 받고 있는 것이라는 지적입니다.

결론적으로, 사도 바울은 자신의 편지를 받아볼 로마교회와 그곳의 성도들에 대하여 사전지식(事前知識) 가지고 있습니다. 수년 고린도에서 만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로부터 들은 정보를 참조하고 있습니다(18:1-3). 지금 그들 부부는 주후 54년에 글라우디오 황제가 서거함에 따라 유대인 추방령이 풀리게 되어 로마시에 들어가서 살고 있습니다(16:3). 그러므로 로마교회의 구성원에는 다음과 같은 변화가 발생하고 있는 것입니다;

(1)   첫째, 주후 32 6 오순절에 예루살렘에 남아 있었던 로마에서 순례객들이 예수님의 복음을 듣게 됩니다(2:10). 그들은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120명의 사도와 제자들이 120개의 종족의 말로써 예수님의 복음과 부활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을 듣게 것입니다. 그들은 유대교를 믿고 있는 유대인 교포들과 유대교에 입교한 로마인들입니다(2:10, “로마로부터 나그네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  그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기로 결심하여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하고 로마시로 돌아가서 자생적으로 초대교회를 세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성원은 유대인들과 로마인들입니다.

(2)   둘째, 주후 40년대에 4 황제인 글라우디오가 로마시에서 유대인 전부를 추방해버리게 됩니다. 따라서 그때 쫓겨난 유대인 교포들이 황제의 서거로 다시 돌아올 때까지 주후 54년까지는 로마인들이 단독으로 교회를 운영하게 됩니다.

(3)   셋째, 주후 54년에 유대인 추방령이 황제 글라우디오의 서거로 유야무야가 되자 유대인들이 재빨리 로마시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로마교회는 로마인성도가 다수이며 유대인성도가 소수로 다시 참여하게 됩니다. 그러한 시점 주후 55년경에 사도 바울의 서신이 로마교회에 도착하게 됩니다.

그와 같은 로마교회의 변천을 알고 있는 사도 바울은 자신이 소아시아와 마케도니아 그리고 그리스 반도 등에서 경험한 바에 따라서 유대인성도들과 이방인성도 사이의 알력에 대하여 어느 정도 짐작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부딪히고 있는 유대주의자와의 투쟁의 역사와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본문에서 양시론(兩是論, 쌍방이 옳다고 하는 주장) 아니라 양비론(兩非論, 쌍방이 틀렸다고 하는 주장)적인 입장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교회내에서 유대주의자들이 이방인성도들에게 모든 율법을 모두 준수하여야 구원을 확실히 얻을 있다고 강조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왜냐하면, 율법을 모두 지킬 있는 능력이 사람들에게는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을 알고서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와 성령님의 내주 역사하심의 은혜를 얻어서 성도의 삶을 살아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예수 그리스도를 정죄하고 십자가 처형에 넘겼다고 하여 이방인성도들이 유대인들을 원망하고 비방하는 것도 잘못입니다. 그와 같은 역사는 모두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섭리하시는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서로 비방하거나 정죄하지 말고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섭리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선민 이방인 구별하지 아니하고 누구나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사함의 은혜를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도의 삶을 영생구원의 하나님의 나라에까지 이르도록 인도하여 주시는 성령님의 은혜에 대해서도 선민 이방인 모두가 한마음으로 감사를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아무쪼록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서로 용서하고 포용하며 협력하여 세상을 끝까지 구원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