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로마서 강해 제19강(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1. 3. 15. 13:39

로마서 강해 19(3:19-22)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7 1 19()

 

율법의 역할과 예수 그리스도의 역할의 차이에 대하여(3:19-22)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율법 아래에 있는 선민들의 의와 율법 위에 있는 하나님의 의의 차이에 대하여 설명을 하고자 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이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차별이 없느니라”(3:19-22).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가지고 있는 믿음의 사람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뒤를 잇고 있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세가지의 은혜를 베푸시고 계십니다; 첫째, 세상의 제국인 애굽제국에서 노예와 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는 그들을 해방시키시고 애굽을 떠나게 하여 주십니다. 둘째, 시내 산에서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제사장나라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가라고 하십니다. 셋째, 사명을 감당할 있도록 하나님의 말씀을 모세를 통하여 율법으로 선민들에게 주십니다.

세가지의 은혜에 대하여 곰곰이 생각을 해보게 되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1)   첫째, 애초에 애굽제국에서 100 이상 엄청난 부역공사에 시달리고 있는 이스라엘 자손들은 자력으로는 노예생활에서 해방을 맞이할 수가 없으며 애굽을 탈출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이스라엘 자손처럼 세상의 나라에서 종살이를 하고 있는 인생은 자신의 힘으로써는 해방과 자유를 얻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쳐다보면서 부르짖어야만 합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주신 언약의 말씀의 내용에 의거하여 세상에서 종살이를 하고 있는데 불과한 삶을 변화시켜서 하나님을 섬기고 살아갈 있는 인생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2)   둘째, 시내 산에서 하나님과 새로운 언약을 맺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성도가 자들은 삶의 모습이 이상 세상에서 노릇을 하고 있는 삶이 아니라 제사장으로 그리고 거룩한 백성에 어울리는 모습으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참고로, 제사장은 자신을 위해서는 일년에 일주일간 위임의 속죄의 제사를 하나님 앞에 드립니다(29:35-37). 그리고 나서는 남은 기간을 온통 다른 백성들의 속죄를 위하여 제사를 드리는 직분자입니다. 그와 같은 모습으로 성도는 살아가야만 합니다. , 다른 사람들의 속죄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려주는 자들이 되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속죄의 제사만 드려주어서는 안됩니다. 마치 옛날 아브라함처럼 심판을 당하도록 되어 있는 이방인들을 용서해 달라고 그들의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께 간절하게 중보의 기도를 드려주는 거룩한 백성들이 되어야만 합니다(18:23-32, 19:6).

(3)   셋째, 그와 같이 과연 선민들은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고 제멋대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자들을 위하여 그리고 미워하고 증오하는 주변의 이방인들을 위하여 제사장으로 그리고 중보의 기도자로 자신의 인생을 살아갈 수가 있을까요? 선민들에게 그리고 성도들의 인생살이에 있어서도 그것은 불가능한 요구입니다. 왜냐하면, 모두가 하나님 보시기에 이기적이며 현세구복적인 죄인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그들이 자발적으로 사명을 감당할 있도록 도와줄 수가 있는 것일까요? 방법이 두가지로 역사 가운데 나타나고 있습니다;

1)      첫째로, 시범적으로 선민을 선택하여 선민의 의무를 감당할 수가 있는지를 보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일종의 파이럿 스터디’(시험연구, a pilot study)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율법이라고 하는 법률체계로 선민들에게 먼저 주신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국가가 법을 지키도록 백성들을 강제하는 것과 같습니다. 비록 하나님의 말씀은 자율적으로 지키도록 주신 것이기에 율법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사실은 그것을 범하게 되면 사회적으로 비난과 더불어 처벌을 받게 되는 것이므로 강압적인 법률과 같은 것입니다.

2)      하나님께서는 신중하게도 율법을 선민들에게 시험적으로 주시고서(15:25, 16:4) 준수여부를 파악하고자 하십니다. 그리고 결과를 지켜보고서 드디어 율법의 확대여부와 대안의 모색까지를 생각해보고자 하신 것입니다.

3)      둘째로, 강제성을 가지는 율법이 없는 의로움과 구원을 모든 사람들이 얻을 있도록 하나님께서 은혜와 능력을 부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점에 대하여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자세하게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4)   넷째,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선민 이스라엘 자손이라고 하더라도 그들이 역사 가운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만민구원을 위하여 제사장나라 그리고 거룩한 백성으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하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계십니다. 그렇지만 그들에게 반성과 성찰의 기회를 계속 부여해주기 위하여 수도 없이 선지자들을 보내고 때로는 다윗왕조의 왕들을 각성시켜서 종교개혁을 해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세월이 얼마 지나지 아니하여 모두 실패로 끝나고 있습니다. 따라서 율법사회의 모습으로써는 도저히 만민구원에 나서는 거룩한 백성이 수가 없다고 하는 사실이 역사적으로 증명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한 위대한 실패의 역사 다음에 두번째의 방법이 역사 가운데 등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믿는 자들을 완전하게 탈바꿈을 시킬 있는 보혜사를 세상에 보내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그리스도로, 그리고 하나님의 영을 성도들에게 임재하여 역사하실 있는 성령으로 보내어 주신 것입니다(14:16-20). 그것이 사도 바울이 바로 이방인들에게 전해주고자 하는 하나님의 복음의 핵심적인 내용입니다.

(5)   다섯째, 그와 같이 이스라엘 자손들의 사회에서 역사적으로 세월 동안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역사를 사도 바울이 로마제국의 수도에 살고 있는 성도들에게 아주 간략하게 본문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3:19-20),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이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차별이 없느니라”(3:21-22). 뜻을 우선적으로 풀이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첫째, 사도 바울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 하나님의 감찰 아래에 있는 자들 구분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은 선민들입니다. 그들은 율법을 준행함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고 하나님의 구원을 얻는 알고서 열심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사람들 보기에는 율법을 준수한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 신앙 양심으로 판단을 하게 되면 진심으로는 그것이 아닙니다. 율법을 온전히 지키고 실천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2)      둘째, 율법사회에 살고 있는 선민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의인이 아니고 여전히 죄인의 자리에 머물고 있습니다. 그에 따라 산헤드린 대공회의 바리새인 랍비인 니고데모가 은밀하게 예수님을 찾아오고 있습니다(3:1-17). 그리고 부자청년도 예수님을 찾아오게 됩니다(18:18-27). 그들은 모두 어떻게 하면 구원의 확신을 얻을 수가 있는지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천국에 들어가서 영생을 누릴 있도록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보내어 대속의 제물이 되게 하시고 또한 성령님을 보내어서 영적으로 거듭나게 하여 주실 것이므로 부디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의 제자로 따라 나서라고 하십니다.

3)      셋째, 그러나 그것이 그들에게 있어서는 가능하지가 않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율법 아래에 살고 있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새로운 인생을 하나님의 처방에 의지하여 살아가고자 하는 성도들을 부르고 계십니다. 방법이 그리스도의 대속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믿는 것입니다(3:22). 그리고 사랑의 빚을 갚고자 남은 인생을 회개하는 심정으로 그리스도의 제자로 만민구원의 역사에 따라나서는 것입니다. 그렇게 결단하고 행동하는 성도들에게 율법의 아니라 성령님의 임재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칭의의 믿음의 확신으로 심령 속에 주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3:19); 다음과 같이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3:19a); 여기서 사도 바울이 우리가 알거니와”(3:19aa)라고 전제를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흔히 우리끼리 알고서 하는 이야기이지만”(I say between you and me)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글을 적고 있는 사도 바울과 글을 편지로서 받아 보게 되어 있는 로마의 성도들은 그들 사이에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 하나 있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1)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있는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이미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깨우치고 있는 진리가 하나 있습니다. 그런데 선민이라고 자처하고 있는 유대교인들이 아직도 깨닫지를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3:19ab)라고 하는 것입니다. 말씀은 율법의 지배를 받고 있는 자들에게 율법이 말해주고 있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율법을 벗어나 있는 자들에게는 달리 들리고 있다는 뜻입니다.

2)      그렇다면 율법이 율법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을 있다”(18:5의역) 말하고 있는 소위 율법의 (10:5) 아직도 그것을 절대적인 구원의 방법으로 믿고서 그것에 사로잡혀서 살아가고 있는 유대교인들에게 효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입니다. 반면에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인정을 하고서 하나님께 달리 구원의 방법을 가르쳐 달라고 매어 달린 자들에게는 새로운 해법이 제시가 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과연 그것이 무엇일까요? 그리고 그러한 과정을 거쳐서 정직하게 여호와 하나님 앞으로 나아오게 하시는 하나님의 의도는 과연 무엇일까요?

(2)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3:19b); 사도 바울이 율법을 선민들에게 주신 여호와 하나님의 의도에 대하여 먼저 설명을 두가지로 하고 있습니다;

1)      첫째 의도는 모든 입을 막고자 하기 위한 ”(3:1ba)입니다. 참으로 유대교인들은 유구무언’(有口無言, 입어 있어도 변명할 말이 없음)입니다. 이유는 두가지입니다; 하나는 아무리 노력을 해보아도 자신들의 지혜와 능력으로써는 율법을 지킬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인정하지를 않습니다. 하나는 그래서 영이신 하나님의 눈을 속이는 신앙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것입니다. , 율법을 지키는 시늉을 하기에 급급합니다. 최소한 남들 눈에 보이는 부문에 있어서는 완벽하게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포장을 합니다. 그것을 서로가 은연중에 양해를 하면서 선민사회에서 그렇게 외식적인 율법생활을 하는 자들에 대하여 의롭다고 인정을 해주고 있는 것입니다(1:32). 그것은 참으로 인정 어린 사회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그와 같은 눈속임용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수가 없는 가증한 것입니다. 외식적인 율법생활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결코 속지도 아니하시고 용납하시지도 아니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보내셔서 율법선생인 바리새인들부터 크게 질책을 하신 것입니다(23).

2)      두번째 의도는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3:19bb)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용의주도하시게 이스라엘 자손들을 선민으로 삼으시고 그들에게 제사장나라 거룩한 백성의 사명을 감당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모세를 통하여 주시면서 그것을 마치 국가와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법률체계처럼 율법으로 조문화하여 백성들에게 가르치고 그대로 시행하도록 하라고 명령하십니다(19:7-8). 그러나 선민들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정직하게 율법생활을 유지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그저 눈속임용으로 율법사회의 모습만을 갖추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방인들의 속죄와 구원을 위하여 제사장 노릇을 하며 중보기도자의 임무를 수행하는 것은 전혀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12:39-41). 이에 따라 마디로, 구원에서 멀어진 선민들의 역사입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무릇 율법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2:12).

3)      풀이를 해보자면, 율법을 가지고 있지 못한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뜻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제멋대로 생활을 하다가 하나님의 진노 가운데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어서 그것을 생활화하도록 선민들에게 요구하였는데 그들도 눈가림용으로만 율법생활을 영위하다가 드디어 심판 가운데로 들어가게 됩니다. 결과 선민이거나 이방인이거나 상관없이 모두가 하나님 앞에 죄인이며 심판대 앞에 서게 되는 것은 기정사실이 되고 맙니다(3:9). 하지만 과정에 있어서 하나의 차이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선민으로 선택하시고 그들에게 시험적으로 율법생활을 하여 의롭게 되고 구원의 길로 나아가라고 하셨는데 구원의 기준에 선민들이 불합격을 것입니다.

4)      따라서 이방인들에게는 이상 율법생활을 하여 의로움으로 구원을 받으라고 권유할 이유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방인들이 자신들에게 선민들과 같은 기회를 주지 아니한 점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점을 사도 바울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3:19bb). 그러므로 이제는 이왕 실패한 방법 대신에 선민과 이방인들을 한꺼번에 구원할 있는 다른 대안을 하나님께서 제시를 하셔야만 합니다. 그것이 과연 무엇일까요? 다음 구절에서 사도 바울이 점을 설명하고자 합니다.

둘째로,그러므로 율법의 행위 그의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3:20); 하나의 시대가 지나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신정국가가 하나님의 말씀을 법률체계와 같은 율법으로 조문화하여 그것을 전심으로 실천함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의로운 자로 인정을 받고 영생구원에 들어간다고 하는 선민구원의 시대, 율법구원의 시대가 실패로 끝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1)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 계속 선지자들을 보내셔서 하나님의 눈을 속이고자 하는 겉치레용 신앙생활을 청산하고 부디 회개하여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율법을 실천하라고 선민들에게 부르짖게 했습니다. 하지만 쇠귀에 경읽기입니다. 드디어 하나님은 독생자를 메시아로 보내셔서 율법선생인 바리새인들의 외식적인 신앙생활에 대하여 꾸짖으시고 백성들을 실족시키지 말라고 강조하십니다. 하지만 비판의 결과는 예수님을 종교재판에 회부하여 사형으로 정죄하고 로마총독의 힘을 빌려서 사형에 처해버린 것입니다.

(2)   요컨대, 선민들의 마음을 되돌려서 신앙생활을 다시 잘해보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의도는 그들이 그리스도를 처형해 버림으로써 완전히 실패로 돌아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시험하신 결과 선민들조차 사람의 지혜와 노력으로 율법을 준행하여 의롭게 되고 구원을 얻는다고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증명이 되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 그의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3:20) 사도 바울의 명제가 일점일획도 틀림이 없이 진리가 되고 있습니다.

(3)   그것은 선민들만 그러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방인들도 마찬가지로 죄인들입니다. 그들이 철학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선민들처럼 인간의 힘과 지혜로 한번 창조의 이치를 깨닫고 영적인 지식을 얻어서 신이 되어 보고자 헛되이 노력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자력구원을 부르짖는 종교적 활동이 모두 창조주를 무시하고 있는 불신앙이므로 고행의 결과는 스스로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셋째로,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이라”(3:21);

(1)    율법생활을 자력으로 영위함으로써 한번 의인이 되어 보겠다고 하던 선민들이나 스스로 창조의 이치를 깨닫고 신이 되어 보겠다고 하던 이방인들이 얻게 결과는 자신들이 모두 죄인이라는 진리입니다(3:20). 그런데 거기서부터 한가지 희망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것은 율법을 생활화하는 자력구원의 시대가 지나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대신에 이제는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의지하여서 구원으로 나아가는 복음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2)   하나님께서는 선민들에게 율법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도록 한번 의인의 삶을 살아보라고 말씀하셨지만 역사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선민들은 자신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모두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것입니다. 따라서 이제는 율법구원의 시대가 아니고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미 선민을 대상으로 하는 율법시험을 역사적으로 거친 것이기에 그리스도의 복음은 적용의 대상이 선민과 이방인 모두입니다. 그들 모두를 복음생활로 구원하고자 하는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시대가 활짝 열린 것입니다.

(3)   이제는 자력으로 율법을 실천함으로써 얻는 구원의 시대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대속의 십자가 희생을 믿고서 자신의 죄를 하나님 앞에 회개함으로써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고자 하는 복음의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새로운 구원의 방법론이라는 사실을 사도 바울이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이라”(3:21) 말하고 있습니다.

(4)   여기서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의사 누가가 부활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3일에 죽은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그의 이름으로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모든 일의 증인이라. 볼지어다. 내가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성에 머물라 하시니라”(24:44-49).

넷째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차별이 없느니라”(3:22); 율법을 지키고자 하는 자력구원의 시대가 아니라 이제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에 의하여 타력으로 구원을 얻는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따라서 두가지 점이 달라지고 있습니다; 첫째, 사람들이 구원을 얻는데 있어서 자신의 공로를 자랑할 수가 없습니다. 자신들이 힘과 능력으로 아무리 율법을 올바르게 지키려고 노력을 해보았지만 실패를 하였기 때문입니다. 나중에는 하나님의 눈을 속이는 외식적인 율법생활을 영위하면서 스스로 의인이며 구원을 받은 자라고 거짓으로 대내외적으로 자랑을 하기도 했지만 모든 것이 거짓이라는 사실이 탄로가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죄인이 되어버린 자신들을 그리스도께서 흘려 대속의 십자가에서 속죄의 제사를 드려서 구원해주신 것이니 무엇을 스스로 자랑할 수가 있겠습니까? 둘째, 하나님께서 창조주의 주권으로 공의에 입각하여 만민구원을 시행하시는 것이기에 피조물이며 죄인들인 선민들이 감히 이의를 제기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차별이 없느니라”(3:22).

결론적으로, 말이 없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자력으로 진리를 깨닫고 하나님의 말씀을 마치 법률체계처럼 여기고서 율법생활을 해보고자 애를 썼지만 모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다행히 이웃의 눈을 피하여 율법생활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신앙 양심에 비추어보면 자신은 의롭지 아니한 자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는 죄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민들의 경우에는 속에 감추인 죄를 들추어내시는 예수님의 날카로운 지적에 대하여 참지 못하고 도리어 그리스도를 정죄하고 처형해버린 것입니다. 그것이 그들만의 잘못이 아니고 사실은 우리 모두의 허물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선민이거나 이방인이거나 상관이 없이 모두가 죄인의 심정으로 하나님께 용서와 구원의 은혜를 다시 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정직하고 겸손하게 하나님 앞에 용서를 구하는 죄인들에게 긍휼을 베푸시고 달리 구원을 얻을 있는 방법을 허락하셨습니다. 방법이 바로 그리스도가 대신 흘리신 대속의 십자가를 쳐다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나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아들께서 속죄의 제물이 되신 것을 바라보고서 회개를 합니다. 이제는 남은 인생을 그리스도의 것으로 살아가고자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이루어 드리고자 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저희들의 남은 생애를 통하여 성취가 되는 은혜가 있게 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할 따름입니다.

그렇게 새로운 구원의 방법을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신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면서 평생을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길로 달려가며 하나님나라를 건설해나가는 자들이 바로 성도들이라고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의 성도들에게 가르쳐주고자 하는 복음의 핵심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쪼록 사도 바울의 편지를 지금 읽고 있는 저희들에게도 동일한 깨달음과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