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여호와신앙을 떠난 선민 이스라엘을 돌이키는 언약의 갱신, 온세상을 구원하는 창조주 여호와의 공의와 종말심판 및 영생구원의 능력”(사50:1-51:23)
설교일; 주후 2027년 1월 24일 주일
작성자; 손진길 목사(25년 9월 17일 수요일 작성)

지금까지 강해한 대선지서 이사야의 내용 가운데 가장 중요한 대목을 손꼽아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첫째, 서두인 제1-5장에서 이사야는 동족인 선민 유대인들이 여호와신앙을 저버리고 우상을 섬기며 세상이익을 너무 탐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여호와의 버림을 받을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그리고 제6장에서는 이사야 자신을 선지자로 부르신 여호와께서 그에게 당부하신 말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은 이사야가 동족들에게 하나님이 맡기시는 예언의 말씀을 전달한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결코 회개하지 아니하고 외세에 의하여 멸망 당하게 될 것임을 분명히 하신 것입니다.
(2) 둘째, 그때부터 이사야의 관심은 언제 동족인 선민 유대인들이 우상문화를 척결하고 회개함으로써 올바른 여호와신앙으로 돌아오게 되는지에 대한 것입니다. 주전 701년에 유대왕국의 국왕 히스기야가 진퇴양난의 두가지 어려움에 처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치명적인 종기의 발생으로 죽음의 기로에 서게 됩니다. 이사야가 기도한 결과 그 병으로 죽을 것이라는 여호와의 말씀입니다. 선지자의 예언을 듣고 히스기야 왕이 여호와께 매어 달립니다. 그 결과 놀랍게도 죽임을 면하고 도리어 15년 수명연장의 예언을 얻고 있습니다(사381-5). 또 하나는, 앗수르제국의 대군에게 예루살렘성이 포위공격을 오래 당하고 있는데 히스기야 왕이 마지막 순간에 예루살렘성전에 들어가서 여호와께 구원을 호소하였더니 천사가 나타나서 적군을 섬멸하는 기적이 나타난 것입니다(사37:21-38). 그와 같은 두가지 기적을 경험한 선지자 이사야는 이제 다윗왕조가 새로워지고 동족 유대인들이 올바른 여호와신앙을 회복할 것으로 기대합니다.
(3) 셋째, 그러나 이사야의 기대가 구원받은 후의 히스기야 왕과 선민들의 배은망덕한 행동과 여호와를 마치 우상과 같이 여기는 잘못된 사고방식에 의하여 완전히 무너지고 맙니다(사39:4-8). 여호와의 구원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선민들이 이기적이고도 현세적인 탐욕에 젖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와 같이 배은망덕하고도 세상자랑에 빠져 있는 선민의 나라이기에 훗날 신바벨론제국에 의하여 멸망을 당하고 그 자손들이 바벨론에 끌려가서 포로로 비참하게 살아갈 것이라는 여호와의 예언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 말씀을 히스기야 왕에게 이사야가 전해주지만 그의 반응은 한평생 영화를 누리고 잘 살면 그만이지 죽은 다음 후세에 관한 심판과 멸망은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사39:8).
(4) 넷째, 그에 따라 선지자 이사야는 동족인 선민들에 대한 기대를 완전히 접어버립니다. 그 대신에 그는 그의 선지서 제40장에서 시작하여 마지막 장인 제66장에 이르기까지 선민 유대인사회에 먼 훗날 메시아가 오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자신의 영을 성도들에게 보내어 주시면 어떠한 일이 발생하게 되는지에 관심을 가지고 자신의 예언활동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 말씀은 이미 제7장, 제9장, 제11장에 기록되어 있는 예언에 대한 더욱 구체적인 내용입니다. 그리고 그 절정은 제49장입니다.
오늘의 본문인 이사야 제50장에 있어서는 두가지 사실을 여호와의 예언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1) 하나는, 모세오경에 이미 기록되어 있는 창세기와 출애굽기의 내용에 비추어 선지자 이사야가 선민 유대인들의 잘못이 무엇인지를 알기 쉽게 설명하고 있다는 것입니다(사50:1-3).
(2) 또 하나는, 시편 제110편의 내용은 물론 이사야 자신이 이미 기록한 메시아에 관한 예언의 내용을 참조하여 여호와의 의로운 종 메시아가 어떠한 대속의 고난을 당할 것인지를 비로소 언급하기 시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사50:4-11).
역시 오늘의 본문인 제51장에 있어서 선지자 이사야는 창세기에서 이미 여호와의 공의의 정신을 실천하고 있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선례를 다시 말하고(사51:1-2) 또한 그의 자손인 선민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은혜로 세상제국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청산하고 해방이 되어 약속의 땅 가나안을 차지하였음을 말하고 있습니다(사51:10-11).
그와 마찬가지로 선민 유대인들이 장차 세상제국 신바벨론에 의하여 멸망을 당한다고 하더라도 여호와의 역사섭리로 다시 해방이 되고 여호와의 공의의 정신을 실천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질 것이라는 예언입니다(사51:3-8, 12-16).
그러므로 부디 영원한 기쁨과 영생의 소망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감으로써 영원한 역사심판과 종말심판에서 여호와의 구원을 얻으라는 이사야의 권면이 생생합니다(사51:17-23).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에 대하여 구절풀이를 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얻은 소중한 교훈과 메시지를 아울러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첫째로, “1.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내가 너희의 어미를 내보낸 이혼증서가 어디 있느냐?(①선민 유대사회에서는 제사장이 발급한 이혼증서만 얻으면 자신의 아내를 버릴 수가 있음, 신24:1-4. ②그러나 그 제도가 악용되고 있기에 예수 그리스도가 두차례나 그 잘못을 지적하고 있음, 마5:31-32, 19:5-9. ③그런데 선지자 이사야는 여호와가 선민들을 내친 적이 결코 없다고 영원하신 창조주 여호와의 이름을 걸고서 그 진실을 여기서 밝히고 있음. ④그렇다면 그것은 여호와가 그들을 버린 것이 아니라 그들이 스스로 큰 잘못을 범하고 여호와를 떠나버린 것임) 내가 어느 채주에게 너희를 팔았느냐?(여호와가 빚 값에 시달려서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종인 선민을 채권자인 강대국에게 노예로 넘긴 적이 없다고 말씀하심. 그렇다면 외세에 의하여 선민의 나라가 멸망을 당하고 그 백성들이 포로생활을 하게 된 것은 전부 선민 유대인들의 잘못 때문임) 보라 너희는 너희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팔렸고, 너희의 어미는 너희의 배역함으로 말미암아 내보냄을 받았느니라!(그렇다고 하면 여호와의 진리의 말씀은 다음과 같이 이해가 됨. ①선민들이 여호와신앙을 버리고 세상적인 이익을 얻기 위하여 이방신과 우상을 섬겼으며 창조주 여호와를 우상의 하나로 여기고만 것임. ②그것은 선민들이 시내 산에서 맺은 여호와와의 언약의 핵심내용 곧 이방을 구원하는 제사장나라 거룩한 백성으로 전혀 살아가지 아니하고 있는 것임, 출19:4-6, 마12:39. ③그들을 선민으로 삼은 아무런 실익이 없으므로 여호와가 그들을 세상백성과 똑같이 취급하여 동일하게 역사섭리를 실행하고 말았다는 것임, 사39:4-7. ④그것은 그 옛날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함부로 따먹고 여호와의 말씀을 정면으로 어겨버린 아담부부를 그곳에서 실락원으로 내보낼 수 밖에 없었던 것과 같음. 그대로 두면 그들이 생명과까지 따먹고 죄악 가운데 영생을 누리게 되고 말 것이기 때문임, 창3:22-24. ⑤그러므로 장차 완전한 여자의 후손을 보내어 그들을 구원할 계획을 은근히 말씀하고 계시는 것임, 창3:15. 그것이 바로 훗날 선지자 예레미야가 기록하고 있는 여호와의 언약의 갱신 곧 새 언약의 핵심내용인 것임, 렘31:31-34) 2. 내가 왔어도 사람이 없었으며 내가 불러도 대답하는 자가 없었음은 어찌 됨이냐?(사64:7, 시14:2-3) 내 손이 어찌 짧아 구속하지 못하겠느냐? 내게 어찌 건질 능력이 없겠느냐?(전능하신 창조주 여호와의 능력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제멋대로 여호와의 눈을 떠나 세상적인 이익에 눈이 멀어서 살아가고 있는 것임, 창17:1) 보라 내가 꾸짖어 바다를 마르게 하며 강들을 사막이 되게 하며 물이 없어졌으므로 그 물고기들이 악취를 내며 갈하여 죽으리라!(출애굽기에 기록되어 있는 그대로 세상제국 애굽에서 종살이하고 있던 이스라엘 자손들을 해방하여 선민으로 삼기 위하여 애굽인에게 내린 10가지 재앙과 홍해사건 그리고 광야에서 베푼 여호와의 놀라운 기적을 전부 되돌아보라는 것임, 신8:11-20) 3. 내가 흑암으로 하늘을 입히며(여호와의 역사심판으로 하늘에 흑암의 재앙이 임하는 것임, 출10:21-23), 굵은 베로 (하늘을) 덮느니라!(지금의 하늘이 사라지고 새 하늘이 창조되는 것을 말함, 사65:17, 계21:1) 4. 주 여호와께서 학자들의 혀를 내게 주사(사49:2a, “2. 내 입을 날카로운 칼같이 만드시고” 구절과 동일한 맥락임), 나로 곤고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여호와와 영적인 교제를 하면서 안식의 복을 누리며 여호와의 치유와 회복의 능력을 믿으며 전부 맡기고 잠을 잘 때에 다음날 주님의 부활과 같은 새로운 창조의 역사가 임하는 것을 보게 될 것임, 눅24:1-9), 나의 귀를 (영적으로) 깨우치사, 학자들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창조주 여호와의 말씀의 이치와 인과관계를 이해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것임) 5. 주 여호와께서 나의 (영적인) 귀를 여셨으므로, 내가 (여호와의 말씀을) 거역하지도 아니하며 (그 말씀의 뜻을 저버리고) 뒤로 물러가지도 아니하며, 6.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마5:39), 모욕과 침 뱉음을 당하여도 내 얼굴을 가리지 아니하였느니라!(여호와의 의로운 종이 지니고 있는 거듭난 성품임. 그것을 이사야는 메시아에게서 생생하게 발견하고 있는 것임, 사53:2-11) 7.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므로 내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내 얼굴을 부싯돌 같이 굳게 하였으므로 내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할 줄 아노라(세상에서 수치를 당하더라도 단단한 부싯돌 같이 나 자신을 굳건하게 하여 여호와의 진리의 말씀을 준행한다는 것임. 그렇게 하면 여호와의 도우심을 체험할 것이라는 이사야의 간증임). 8. 나를 의롭다 하시는 이가 가까이 계시니, 나와 다툴 자가 누구냐? 나와 함께 설지어다. 나의 대적이 누구냐? 내게 가까이 나아올지어다!(여호와의 임재와 도우심을 이사야가 확신하고 있음) 9. 보라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리니, 나를 정죄할 자 누구냐?(훗날 사도 바울의 간증과 같음, 롬8:1) 보라 그들은 다 옷과 같이 해어지며 좀이 그들을 먹으리라!(세상의 이치와 이익만을 추구하는 자는 이 세상과 함께 사라지고 말 것임, 사65:17, 고후5:4) 10. 너희 중에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처럼) 여호와를 경외하며(창22:12), 그의 (선지자인, 사6:8) 종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자가 누구냐? 흑암 중에 행하여 빛이 없는(이방 땅에 살고 있는) 자라도 여호와의 이름을 의뢰하며 자기 하나님께 의지할지어다! 11. 보라 불을 피우고 횃불을 둘러 띤 자여, 너희가 다 너희의 불꽃 가운데로 걸어가며 너희가 피운 횃불 가운데로 걸어갈지어다!(심판 받을 이 땅에서 세상의 이익을 탐하여 제 욕심을 이루고자 살아가는 인생들은 종말심판을 받고 말 것임, 요5:28-29, 마25:40-46) 너희가 내 손에서 얻을 것이 이것이라. 너희가 고통이 있는 곳에 누우리라!(눅16:23-24)“(사50:1-11);

(1) 본문 제1-3절에서 선지지 이사야는 심판이냐? 구원이냐? 둘 가운데 전자를 선택하고 있는 선민들의 불행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사야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생명을 택하지 아니하고 그만 반대로 선택하고 말았다고 한탄하고 있습니다(사50:2a). 그 결과 구원의 하나님의 능력이 그들의 역사 가운데 더 이상 나타나지 못하고 있습니다(사50:2b). 반면에 무서운 심판이 그들의 앞에 기다리고 있습니다(사50:1, 3). 그 내용이 어떠한 것인지 이제부터 각 구절을 살펴봅니다;
(2) 첫째, 제1절입니다; “1. (a)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내가 너희의 어미(선민의 나라)를 내보낸 이혼증서가 어디 있느냐? (b)내가 어느 채주(債主, 채권자)에게 너희(선민)를 팔았느냐? (c)보라, 너희는 너희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팔렸고, (d)너희의 어미는 너희의 배역함으로 말미암아 내보냄을 받았느니라”(사50:1); 이사야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고의로 선민의 나라를 망하게 하고 선민들을 이방 땅에 유민이 되게 하신 적이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은 순전히 선민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외면하고 배신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1) 하나, “1.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내가 너희의 어미(선민의 나라)를 내보낸 이혼증서가 어디 있느냐?”(사50:1a); 모세는 아내가 수치스러운 일을 저질렀을 경우 남편이 이를 용납하지 못하게 되면 이혼증서를 써주고 집에서 내보낼 수 있도록 하는 율법조항을 신명기에 기록하고 있습니다(신24:1). 그 조항에 비추어서 이사야가 여호와 하나님과 선민의 나라와의 관계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째서 마지막 선민의 나라 다윗왕조 유대왕국이 여호와의 보호하심을 더 이상 받지 못하고 이방나라 신바벨론제국에 의하여 멸망 당하게 되는 역사가 장차 전개되는 것일까요?
2) 둘, “내가 어느 채주(債主, 채권자)에게 너희(선민)를 팔았느냐?”(사50:1b); 고대사회에서는 빚을 갚지 못하게 되면 그 집의 종이 되어서 그 빚을 갚도록 되어 있습니다(출21:31, 22:3, 잠22:7). 그런데 선민들이 그들의 나라가 망하게 되고 이방의 제국에 끌려가서 종살이를 하게 됩니다. 그것은 혹시 선민들이 이방제국에 빚을 갚지 못하게 되어서 그러한 것일까요?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그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혹시 여호와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을 이방나라에 종으로 주어야만 하는 큰 빚을 진 적이 있는 것일까요? 창조주 하나님이 세상나라에 대하여 그와 같은 빚을 지고 있을 이유가 하등 없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다윗왕조 유대왕국이 멸망당하고 그 백성들이 신바벨론제국에 종으로 끌려가게 되는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이란 말입니까?
3) 셋, “보라, 너희는 너희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팔렸고”(사50:1c); 그 이유를 선지자 이사야가 명쾌하게 밝혀주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나라가 망하고 종으로 팔려가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사50:1)는 것입니다. 여기서 선민들의 죄악이란 도대체 무엇일까요? 그것은 한마디로, 선민들이 이방인들과 똑같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선민이란 제사장나라 거룩한 백성의 역할을 하도록 특별히 여호와가 선택한 백성들입니다(출19:5-6). 그런데 이스라엘 자손들은 이웃나라의 잘못을 용서하거나 이방인들의 죄사함을 위해서 속죄의 제사를 드려주는 제사장의 직분을 도무지 행하지 아니하고 있습니다(마5:43-48, 12:39-41, 욘1:2-3).
4) 나아가서 여호와 하나님을 떠나서 이방 신을 섬기고 우상문화에 심취하고 있습니다(왕하21:2-9). 그 옛날 아모리 족속만큼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며 선민의 사회에 죄악이 만연하고 있습니다(왕하21:11, 16). 선민사회와 이방인의 사회를 구별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선민사회를 별도로 보호할 실익(實益, 실제적인 이익)이 완전히 사라져버리고 있습니다(왕하21:10-12). 따라서 약육강식의 법칙에 따라 유대왕국이 망하고 백성들이 제국의 노예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왕하21:13-15).
5) 넷, “너희의 어미는 너희의 배역함으로 말미암아 내보냄을 받았느니라”(사50:1d); 여호와 하나님은 믿음의 조상들과 맺은 언약에 의하여 이스라엘 자손들을 선민으로 삼고 계십니다; 그런데 그 언약의 내용은 하나의 조건을 지니고 있습니다; “18.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창22:18).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하고 천하만민에게 하나님의 복이 돌아갈 수 있도록 행동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조건을 어기고 있습니다. 그것은 언약을 배반하고 언약의 주체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결과 감히 선민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고 이방신을 섬기며 우상문화에 심취하는 반역행위를 일삼고 있습니다(사50:1d). 그와 같은 이스라엘 자손들의 행위는 한마디로, 심판과 구원 가운데 구원을 버리고 심판을 선택하고 있는 것입니다.
(3) 둘째, 제2절입니다; “2. (a)내가 왔어도 사람이 없었으며, 내가 불러도 대답하는 자가 없었음은 어찌됨이냐? (b)내 손이 어찌 짧아 구속하지 못하겠느냐? 내게 어찌 건질 능력이 없겠느냐? (c)보라, 내가 꾸짖어 바다(연안국)를 마르게 하며, 강들(내륙국)을 사막이 되게 하며, (d)물이 없어졌으므로, 그 물고기들이 악취를 내며 (목이) 갈(渴)하여 죽으리라”(사50:2); 여호와 하나님이 오랜 기간 선민의 나라가 제사장나라의 역할을 수행하기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만민구원의 뜻을 이방 땅에 전해주는 자를 선민의 나라에게 발견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사람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 결과 선민나라와 이방나라가 모두 멸망을 당하며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1) 하나, “2. 내가 왔어도 사람이 없었으며, 내가 불러도 대답하는 자가 없었음은 어찌됨이냐?”(사50:2a); 히브리정경에 들어 있는 여호와 하나님 말씀의 뜻은 창조주 하나님의 피조물사랑과 만민구원의 진리입니다. 그것이 이기적인 인간사회의 정의와 구별되고 있는 창조주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입니다; 그 정신을 실천하고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 있을까요? 이방인의 땅에서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이방인을 구원하는 제사장들이 되라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한 선민사회에서는 발견할 수가 있을까요? 역시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2) 둘, “내 손이 어찌 짧아 구속하지 못하겠느냐? 내게 어찌 건질 능력이 없겠느냐?”(사50:2b);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창17:1, 18:14). 그리고 하나님은 사람들이 심판 대신에 생명을 선택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신30:19-20); 다만 문제는 자유의지를 지니고 있는 사람들이 심판이 아니라 구원을 선택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혹자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억지로 사람을 구원해주시면 될 것이 아니냐?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올바른 구원이 아닙니다. 주님은 문밖에 서서 언제나 사람들의 마음 문을 두드리고 있습니다(계3:20). 자신의 마음의 문은 사람들이 스스로의 의지로 열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구원의 첫걸음입니다.
3) 셋, “보라, 내가 꾸짖어 바다(연안국)를 마르게 하며, 강들(내륙국)을 사막이 되게 하며”(사50:2c); 이 세상에서 도무지 의인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선민들이 이방인과 똑같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모두가 죄인들이며 심판의 대상이 되고 말았습니다(롬3:9-12). 그 결과 하나님의 재앙과 진노가 이 세상에 미치게 됩니다; “바다에 인접하고 있는 연안국들에 있어서 먼저 마실 물이 말라가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내륙의 나라들이 가뭄에 시달리게 됩니다”(사50:2c 의역). 요컨대, 강물이 말라가고 사막화 현상이 크게 진행되고 마는 것입니다.
4) 넷, “물이 없어졌으므로, 그 물고기들이 악취를 내며 (목이) 갈(渴)하여 죽으리라”(사50:2d); 그 옛날 애굽에 내렸던 재앙이 온세상에 임하고 있습니다. 강에서 악취가 나고 물고기들이 살 수 없게 됩니다(출7:21a). 사람들은 마실 물을 찾지 못하고 목이 말라 죽을 지경입니다(출7:21b).
(4) 셋째, 제3절입니다; “(a)내가 흑암으로 하늘을 입히며, (b)굵은 베로 덮느니라”(사50:3); 잘못된 선택으로 말미암아 어두움 가운데 죽음이 임합니다. 그리고 초상을 당하지 아니한 집이 없습니다;
1) 하나, “3. 내가 흑암으로 하늘을 입히며”(사50:3a); 출애굽 당시 애굽에 내린 하나님의 열 가지 재앙 가운데 흑암의 재앙이 들어 있습니다. 그것이 아홉 번째 재앙입니다. 3일 동안 애굽 인들이 살고 있는 지역에 어둠이 임하여 앞을 거의 볼 수가 없습니다(출10:22-23). 노동도 할 수 없으며 먹고 사는 일도 불가능해지고 있습니다. 그 재앙은 사람을 살 수 있도록 만들어주고 있는 빛을 거두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생명의 기운과 진리의 빛을 거두어 가버리시는 그러한 시대를 일컬어서 역사적으로는 ‘암흑의 시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것은 가장 비참한 천재지변을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2) 둘, “굵은 베로 덮느니라”(사50:3b); 애굽에 내린 마지막 재앙이 장자와 초태생의 죽음의 재앙입니다. 흑암의 재앙이 임하지만 애굽의 바로와 백성들이 회개하지 않습니다(출10:27-28). 그 결과 바로의 집부터 일반백성들의 집까지 줄초상이 나고 있습니다. 한밤중에 죽음의 천사가 방문하여 장자와 가축의 초태생을 전부 죽여버린 것입니다(출12:29-30). 그래서 굵은 베옷을 입고 다음날 애곡하며 초상을 치르게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완악하게 끝까지 거절한 결과가 그렇게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참고로, 선민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에서는 나라가 망하고 백성들이 죽임을 당하며 이방인들의 종으로 끌려가는 그 비참한 역사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5) 본문 제4-6절에서는 선지자 이사야가 영적인 귀머거리와 벙어리 신세를 면하자면 어찌해야만 하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세 구절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6) 첫째, 제4절입니다; “4. (a)주 여호와께서 학자들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고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줄 줄을 알게 하시고, (b)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들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사50:4); 신앙생활에 있어서 ‘학자들의 혀’가 왜 필요한 것일까요? 그리고 이사야의 귀로 들려오는 여호와말씀은 어떠한 논리성을 지니고 있는 것일까요?;

1) 하나, “4. 주 여호와께서 학자들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고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줄 줄을 알게 하시고”(사50:4a); 여호와 하나님은 창조주이십니다. 인류를 창조하시고 그 역사를 섭리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개인적인 하나님이시기 이전에 이미 전체 공동체의 하나님이십니다. 그에 따라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다음과 같은 특징이 드러나게 됩니다; ①영적인 체험은 개인적이지만 그 이치는 공동체적인 것이며 객관적인 것입니다. 여호와의 말씀도 그러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과 영적인 체험은 그것을 간증하고 이웃과 함께 나누기 위해서라도 객관성과 일반성을 갖추어야 합니다. ②개인의 신앙고백과 진술에 있어서도 자체 논리성과 현실적인 타당성을 나름대로 지니고 있어야만 합니다. 그와 같은 입장에서 이사야는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학자들의 혀’가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2) 학자들은 설명의 논리성과 타당성을 중시하며 평소 학문의 객관성과 일반성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학자들의 설명을 듣고 있으면 개인적인 집착이나 공동체적인 아집을 상당히 치유할 수가 있습니다. 이사야는 동족들인 유대인들의 지나친 선민의식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선민에게는 구원, 이방인에게는 심판과 멸망을 호소하고 있는 유대인들의 신앙패턴은 창조주의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모든 인류를 창조하시고 모두 구원하시기를 원하시고 계시는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굉장히 이기적이며 주관적인 신앙입니다. 그러므로 선민들은 옹졸한 입장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무엇보다도 신앙생활에 있어서 ‘학자들의 혀’를 가져야만 합니다.
3) 둘,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들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사50:4b); 하나님의 지혜의 말씀은 언제 사람들의 귀에 들려오는 것일까요? 이사야는 아침마다 그의 귀에 들려오고 있다고 간증하고 있습니다. 마치 새벽기도와 새벽성경공부의 중요성을 이사야가 말해주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더욱 은혜스러운 것은 이제는 사람들에게 보다 객관적으로 하나님의 구원과 새 세상의 창조이치를 설명해줄 수 있도록 영적인 논리성을 지니고 들려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7) 둘째, 제5절입니다; “5. (a)주 여호와께서 나의 귀를 여셨으므로, (b)내가 거역하지도 아니하며 뒤로 물러가지도 아니하며”(사50:5); 여호와말씀의 뜻을 정확하게 깨닫게 되자 어떠한 현상이 발생하고 있을까요? 이사야가 영적인 귀가 열리는 것부터 설명하기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1) 하나, “5. 주 여호와께서 나의 귀를 여셨으므로”(사50:5a); 먼저 한가지 생각을 해보고자 합니다. 구원의 본질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생명의 원천이신 창조주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육신을 입고서 살아가고 있는 인간이 영이신 하나님을 온전히 만나고 그 앞에 설 수가 없습니다. 다만 가능한 방법은 영적으로 하나님과 교제하며 먼저 인생 가운데 주인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올바로 섬기기 위해서는 우선 여호와의 뜻을 말씀 가운데 정확하게 깨닫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의미에서 본문에 있어 이사야는 여호와 하나님에게 감사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인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정확하게 하나님말씀의 뜻을 이해할 수 있도록 이사야 자신에게 영적인 귀를 열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2) 둘, “내가 거역하지도 아니하며 뒤로 물러가지도 아니하며”(사50:5b); 그런데 이사야는 자신이 이해하고 있는 여호와말씀의 뜻을 백성들에게 전해주자 이상한 현상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동족들이 지금까지 알고 있는 유대교의 가르침과 다르다고 이의를 제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유대교지도자들이 백성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선민사상과 현세구복적인 신앙이 옳은 것일까요? 아니면 이사야 자신이 전하고 있는 메시아의 오심과 만민구원사상 그리고 영생의 구원이 옳은 것일까요? 이사야는 아무리 동족들이 반대하고 자신을 공격하더라도 결코 물러설 뜻이 없습니다(사6:9-10). 그 이유는 그가 하나님께서 세우신 선지자이기 때문입니다. 구체적으로, 선지자의 주인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사야에게 그 말씀을 주시고 동족들에게 그대로 전하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사6:8).
(8) 셋째, 제6절입니다; “6. (a)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b)모욕과 침 뱉음을 당하여도 (그들이 불쌍하여) 내 얼굴을 가리지 아니하였느니라”(사50:6); 이사야는 동족인 선민들도 자기처럼 영적인 귀가 열리고 학자의 혀를 가지게 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그의 마음은 장차 여호와의 종으로 오시는 메시아의 마음과 같습니다(사53장). 그리스도는 선민사회에서 엄청난 고난을 당하시면서도 그들이 올바른 여호와의 말씀의 뜻을 깨닫기를 원하고 있습니다(사53장). 그 마음이 이사야의 예언으로 본문 가운데 다음과 같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1) 하나, “6.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사50:6a); 여호와의 종으로 오시는 그리스도가 백성들의 구원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양으로 제공하십니다; 그 고난의 현장에서 그리스도의 등에 채찍질이 가해집니다(사53:5, 마27:26). 그리고 뺨을 얻어 맞게 됩니다(마26:67). 생각해보면 그것은 손자가 할아버지의 수염을 뽑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피조물이 자신의 주제도 모르고 감히 창조주이신 독생자가 육신을 입고 오신 그리스도를(요1:1-4, 14) 희롱하고 그 수염을 뽑고 있는 것입니다.
2) 둘, “모욕과 침 뱉음을 당하여도 (그들이 불쌍하여) 내 얼굴을 가리지 아니하였느니라”(사50:6b); 선민들은 선지자들과 메시아가 전하고 있는 말씀이 자신들이 알고 있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과 다르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반대하며 아예 외면하고 있습니다. 나아가서는 이단으로 정죄하며 모욕을 가하고 침을 뱉기도 합니다. 그래도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선민만의 구원이 아니라 이방인까지 포함하는 만민구원이라고 주장하게 되면 아예 선지자나 메시아를 살해하고자 합니다. 그와 같은 위협 가운데에서도 선지자와 메시아는 어리석은 백성들을 버릴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불쌍하게 여기고 부디 구원하여 달라고 여호와 하나님에게 기도할 따름입니다(눅22:60-62).
(9) 본문 제7-9절에서 선지자 이사야가 증언하고 있는 주 여호와의 도움은 무엇일까요?(사50:7-9) 구절을 살펴봅니다;
(10) 첫째, 제7절입니다; “7. (a)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므로 내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b)내 얼굴을 부싯돌같이 굳게 하였으므로, 내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할 줄 아노라”(사50:7); 이사야는 주 여호와의 도우심의 내용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1) 하나, “7.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므로 내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사50:7a); 사도 바울은 자신이 유대교의 랍비 사울이었을 때에 예수님의 교훈과 무덤에서 부활하였다는 허무맹랑한 주장을 부끄러워하였다고 간증하고 있습니다(롬1:16 반대해석). 그렇지만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영광을 지니고 그에게 환상 가운데 임재하였을 때에(행9:3-5) 그의 생각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가 그리스도이며 실제로 부활하고 승천했다고 증거하고 있는데 그 사실을 부인할 도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옳다고 말씀하시면 그것이 옳은 것입니다(롬1:17). 그리고 그 사실을 전파하는 것이 더 이상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랍비 사울은 사도 바울이 되어 남은 생애를 이방인들에게 그리스도의 부활신앙과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 신실하게 살아가게 됩니다(행9:15, 22:21). 그와 똑같은 이야기를 선지자 이사야가 본문에서 간증하고 있는 것입니다(사50:7a).
2) 둘, “내 얼굴을 부싯돌같이 굳게 하였으므로, 내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할 줄 아노라”(사50:7b); 사람은 수치를 당하게 되면 얼굴이 붉어집니다. 그것을 참기가 힘들어집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다가 백성들로부터 수치를 당할지라도 그러한 변화가 발생하지 아니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수치가 이사야의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하게 만들지 못하도록 조치해 주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마치 단단한 부싯돌과 같이 자신을 단단한 진리의 사람으로 만들어 주셨기에 문제가 그를 피해가고 있다는 이사야의 간증입니다.
(11) 둘째, 제8절입니다; “8. (a)나를 의롭다 하시는 이가 가까이 계시니(요5:32) 나와 다툴 자가 누구냐? 나와 함께 설지어다. (b)나의 대적이 누구냐? 내게 가까이 나아올지어다”(사50:8); 이사야는 주 여호와께서 자신을 의롭다 하시고 대적과 친히 싸워 주신다고 진술하고 있습니다. 그의 간증은 훗날 그리스도 예수님에 의하여 그대로 반복되고 있습니다;
1) 하나, “8. 나를 의롭다 하시는 이가 가까이 계시니(요5:32) 나와 다툴 자가 누구냐? 나와 함께 설지어다”(사50:8a); 사람들이 선지자를 두려워하는 이유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창세기에서 처음으로 하나님의 선지자로 불리고 있는 아브라함의 경우가 그러합니다(창20:7). 애굽의 황제인 바로나 블레셋의 연맹 왕인 아비멜렉이 그 때문에 아브라함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아비멜렉의 고백이 다음과 같습니다; “22. 그때에 아비멜렉과 그 군대장관 비골이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 23. 그런즉 너는 나와 내 아들과 내 손자에게 거짓되이 행하지 아니하기를 이제 여기서 하나님을 가리켜 내게 맹세하라”(창21:22-23). 훗날 예수님의 증언도 그러합니다(요5:32, 8:16).
2) 둘, “나의 대적이 누구냐? 내게 가까이 나아올지어다”(사50:8b); 이사야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진리로 깨닫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진리를 굳건하게 주장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대적하고 있는 무리에게 당당하게 위와 같이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12) 셋째, 제9절입니다; “9. (a)보라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리니 나를 정죄할 자 누구냐? (b)보라 그들은 다 옷과 같이 헤어지며 좀이 그들을 먹으리라”(사50:9); 이사야는 주 여호와로부터 받는 대접과 사람들로부터 받는 대접의 차이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1) 하나, “9. 보라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리니 나를 정죄할 자 누구냐?”(사50:9a); 이 땅에서는 선지자나 메시아가 그들의 종교적 교리와 다르다고 하여 사람들로부터 정죄를 받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최종심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법정에서 어떻게 판결 나고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이사야의 경우에는 자신이 동족들에게 전하고 있는 그 말씀이 하나님의 뜻에 합치하는 것이라는 증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는 여기서 이 세상의 정죄가 모두 헛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사50:9a).
2) 둘, “보라 그들은 다 옷과 같이 헤어지며 좀이 그들을 먹으리라”(사50:9b); 사람들의 정죄를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정죄한 그 사람들이 100년 안팎의 짧은 인생을 살다가 모두 이 세상에서 사라질 운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결론은 영원히 헤어지거나 좀이 먹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이며 영생하시는 하나님의 영의 증거입니다(마10:28). 성령의 감동으로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깨닫고 그것을 풀이하여 백성들에게 전하고 있는 선지자가 이사야입니다. 그러므로 영생의 말씀을 전하고 있는 이사야가 유한한 사람들의 한시적인 비난과 대적행위에 대하여 겁을 집어 먹을 필요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13) 본문의 말미인 제10-11절에서 선지자 이사야는 회개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는 스스로 죄인인 줄 아는 자인가? 아니면 스스로 의인으로 생각하는 자인가?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스스로 의인이라고 자처하는 바리새인들이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있습니다. 반대로 죄인이라고 손가락질을 받고 있던 자들이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있습니다.
(14) 첫째, 제10절입니다; “10. (a)너희 중에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종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자가 누구냐? (b)흑암 중에 행하여 빛이 없는 자라도 여호와의 이름을 의뢰하며 자기 하나님께 의지할지어다”(사50:10);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의 종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자가 구원을 얻게 됩니다. 누가 그러한 자가 될 수 있을까요?
1) 하나, “10. 너희 중에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종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자가 누구냐?”(사50:10a); 여호와를 경외한다는 것과 종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살펴봅니다; 여호와를 경외한다는 것은 자신의 생각보다 하나님의 생각이 더 옳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은 종이며 여호와가 자기 인생의 주인이시라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시키시는 일이면 그것이 자신의 생각과 사회적인 통념에 어긋난다고 하더라도 최선을 다해서 신실하게 실천하는 것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입니다(창22:12).
2) 이사야는 웃시야 왕이 죽던 해 주전 740년경에 선지자로 세움을 받습니다(사6:1-8). 그는 여호와의 계시의 말씀을 예언으로 받은 선지자로서 동족들에게 그 예언을 전하게 됩니다(사6:9-13). 그런데 여호와의 선지자이며 종인 이사야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과 예언을 히스기야 왕과 신하들 그리고 백성들은 자기들에게 유리한 것만 취사선택하여 듣고자 합니다(사39:5-8). 그것은 진정한 하나님의 구원으로 나아가는 태도가 아닙니다. 이사야는 여호와의 종의 목소리를 모두 듣고 실천하는 것이 구원의 길이라고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3) 둘, “흑암 중에 행하여 빛이 없는 자라도 여호와의 이름을 의뢰하며 자기 하나님께 의지할지어다”(사50:10b); 선지자 이사야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히스기야 왕과 백성들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하나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실천하고자 하지를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사야가 보기에 모두가 죄인들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을 멀리하고 캄캄한 어둠 속에서 이기적으로 살고자 합니다.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밝은 빛 아래로 나아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한 죄인들이지만 아직도 그들에게 구원의 기회가 주어져 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외면하고 흑암 중에서 서로 이기적으로 살게 되면 모두가 망하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여호와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매어 달리는 자들에게는 그 구원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나아오는 자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앞으로는 하나님을 의지하여 살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주시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조치가 바로 메시아를 보내어 주시는 것이며 성령님을 보내어 주시는 것입니다(사48:16).
(15) 둘째, 제11절입니다; “11. (a)보라, 불을 피우고 횃불을 둘러 띤 자여, (b)너희가 다 너희의 불꽃 가운데로 걸어가며, 너희가 피운 횃불 가운데로 걸어갈지어다. (c)너희가 내 손에서 얻을 것이 이것이라. 너희가 고통이 있는 곳에 누우리라”(사50:11); 하나님 경외에 이르지 못하며 하나님의 종이 전하는 말씀을 무시하게 되는 자가 어떠한 자인지 이사야가 설명하고 있습니다;

1) 하나, “11. 보라, 불을 피우고 횃불을 둘러 띤 자여”(사50:11a); 인류의 문명은 불을 피우는 데서 시작됩니다. 불을 피우게 되면 그 빛이 사방을 밝히게 됩니다. 그래서 문명과 더불어 문화가 발생합니다. 그와 같은 맥락에서 살펴봅니다; 사람의 정신과 사회를 밝히는 빛이 또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진리입니다. 그래서 라틴어로 철학자들은 “진리는 나의 빛”(VERI TAS LUX MEA)이라고 말합니다. 역사적으로 계몽운동과 같은 것들이 모두 불을 피우고 빛을 던지는 운동입니다. 그 결과 인본주의 철학과 과학이 발달하게 됩니다. 아울러 사회의 발전을 주도하는 이념이 등장합니다. 자본주의, 공산주의, 사회주의 운동 등이 모두 그러한 것입니다. 시대를 이끌어가고자 하는 이데올로기 같은 것은 마치 횃불과 같습니다. 그 횃불을 들고 앞장서는 자들이 기존의 사회를 개혁하고 변혁하고자 하는 자들입니다.
2) 둘, “너희가 다 너희의 불꽃 가운데로 걸어가며, 너희가 피운 횃불 가운데로 걸어갈지어다”(사50:11b); 유물론자들은 철학과 과학의 발전이 사람들을 구원하고 사회를 구원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개혁주의자들과 혁명론자들은 자신들이 신봉하고 있는 이데올로기가 사회적인 갈등과 역사적인 모순을 해결하고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나아가서 유대교인들은 자신들의 선민사상이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자신들의 생각과 사고방식이 절대적으로 의롭고 옳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위하여 자신들이 헌신하고 희생을 하게 되면 그 열매를 얻게 된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과연 그러할까요?
3) 셋, “너희가 내 손에서 얻을 것이 이것이라. 너희가 고통이 있는 곳에 누우리라”(사50:11c); 이사야는 유물론자들과 인위적인 개혁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신념을 위해서 헌신하고 희생한다고 하더라도 고통스러운 종말 외에 얻을 수 있는 것이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우상을 섬기고 있는 것과 같아서 그 결과가 허망합니다(사44:9). 그 이유는 한마디로, 창조주의 뜻과 방법을 따르지 아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만민과 만물을 모두 구원하기 원하십니다. 전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민만 구원하고 이방인을 버리시는 것이 아닙니다. 모두가 죄인이므로 전부 회개하고 구원으로 나아오기 원하시는 것입니다.
4) 그런데 사람들은 개인적으로 자신만이 옳으며, 집단적으로는 자기 민족만이 옳다는 것입니다. 자신과 의견이 다른 자들은 모두 의롭지 못하므로 구원의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다른 민족에 대해서는 관용과 긍휼을 베풀 이유가 없다고 여깁니다. 그와 같은 이기주의와 집단이기주의가 겉으로는 선민사상으로 그리고 자기들만 옳다고 하는 의인사상으로 포장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결말은 창조주가 원하시는 구원이 아니라 영원한 멸망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 이야기를 이사야가 상당히 문학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내 손에서 얻을 것이 이것이라. 너희가 고통이 있는 곳에 누우리라”(사50:11c). 요컨대 하나님의 공의를 따르지 아니하고 자신들의 의로움과 집단적인 정의만을 내세우게 되면(롬10:3)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1. (공)의(צֶ֖דֶק, 체데크, righteousness, 여호와의 법정에서 생명을 살리고 돌보는 의로움으로 인정받는 것을 말함)를 따르며 (영원한 구원을 주시는 창조주) 여호와를 찾아 구하는(아브라함처럼 영생주시기를 간구하여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창21:33, 22:12) 너희는 내게 들을지어다! 너희를 떠낸 반석과 너희를 파낸 우묵한 구덩이를 생각하여 보라(생명을 창조하신 여호와, 사람에게 영혼을 불어넣기 위하여 여호와가 주신 그 생명의 영을 기억하라는 것임, 창1:26-27, 2:7, 겔37:9-10, 요3:13-17). 2.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과 너희를 낳은 사라를 생각하여 보라!(창17:4-9, 15-16) 아브라함이 혼자 있을 때에 내가 그를 부르고 그에게 복을 주어 창성하게 하였느니라(창12:1-3, 15:4-21). 3. 나 여호와가 시온의 모든 황폐한 곳들을 위로하여 그 사막을 에덴 같게, 그 광야를 여호와의 동산 같게 하였나니(메시아가 회개하는 죄인에게 주시는 낙원을 말함, 눅23:42-43), 그 가운데에 기뻐함과 즐거워함과 감사함과 창화하는 소리가 있으리라!(사11:1-9, 구원주 메시아와 하나님의 영을 보내어 주심, 사11:1-9. 더구나 새 예루살렘을 창조하여 성도에게 주시니 그 은혜를 영원히 감사하며 찬양한다는 것임, 사65:17-18) 4. 내 백성이여 내게 주의하라! 내 나라여 내게 귀를 기울이라! 이는 율법이 내게서부터 나갈 것임이라! 내가 내 공의를 만민의 빛으로 세우리라!(여호와를 하나님으로 섬기는 신정국가는 여호와의 말씀인 율법을 준수하여야 하며 그 율법의 기본취지가 창조주 여호와를 사랑하는 자는 여호와가 창조한 모든 피조물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여 그 생명을 살리고 돌보아야 한다는 것임, 눅6:9, 10:26-28, 출19:4-6, 마12:39) 5. 내 공의가 가깝고 내 구원이 나갔은즉, 내 팔이 만민을 심판하리니, 섬들이 나를 앙망하여 내 팔에 의지하리라!(여호와의 공의의 정신과 아가페 사랑이 메시아의 대속의 죽음과 부활로 그리고 성령님의 내주 역사하심으로 성도들에게 전달되어질 것이므로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은 반드시 성취가 된다는 것임, 사55:11) 6. 너희는 하늘로 눈을 들며, 그 아래의 땅을 살피라!(하늘에 계시는 여호와의 예언의 말씀을 묵상하며 이 세상의 종말을 생각하여 보라는 것임) 하늘이 연기 같이 사라지고(지금의 하늘이 사라지고 새 하늘이 창조되며, 사65:17a), 땅이 옷 같이 해어지며(지금의 땅이 낡아서 사라지며 새 땅이 창조되는 것임, 사65:17b) 거기에 사는 자들이 하루살이 같이 죽으려니와(피조물인 모든 육체는 하루살이와 같이 곧 사라질 것임, 벧후3:12), 나의 구원은 영원히 있고 나의 공의는 폐하여지지 아니하리라!(이 세상을 구원하는 여호와의 공의와 영생의 구원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할 것임, 벧후3:13) 7. 의를 아는 자들아, 마음에 내 율법이 있는 백성들아, 너희는 내게 듣고 그들의 비방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의 비방에 놀라지 말라(짧게 존재하다가 허무하게 사라지는 이 세상에서의 고난과 비방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임, 롬8:18). 8. 옷 같이 좀이 그들을 먹을 것이며, 양털 같이 좀벌레가 그들을 먹을 것이나, 나의 공의는 영원히 있겠고 나의 구원은 세세에 미치리라!(이 세상의 권력과 영광에 취한 자들은 지금의 하늘 및 땅과 더불어 사라질 것이지만 창조주의 공의의 정신을 실천한 성도들은 영생의 천국 새 예루살렘에 들어갈 것이라는 이사야의 놀라운 예언임, 사11:1-12, 66:17-18, 66:20-21) 9. 여호와의 팔이여 깨소서 깨소서, 능력을 베푸소서! 옛날(예컨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요셉의 일대기) 옛 시대(노아 및 출애굽 당시)에 깨신 것 같이 하소서! 라합을 저미시고(욥40:15, 41:1) 용을 찌르신 이가 어찌 주가 아니시며(계20:2), 10. 바다를, 넓고 깊은 물을 말리시고 바다 깊은 곳에 길을 내어 구속 받은 자들을 건너게 하신 이가 어찌 주가 아니시니이까?(출14:21-22, 29-31) 11. 여호와께 구속 받은 자들이 돌아와 노래하며 시온으로 돌아오니(새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니, 사65:2, 66:20), 영원한 기쁨이 그들의 머리 위에 있고 즐거움과 기쁨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달아나리이다!(사65:18-19) 12. 이르시되, 너희를 위로하는 자는 나 곧 나이니라. 너는 어떠한 자이기에 죽을 사람을 두려워하며 풀 같이 될 사람의 아들을 두려워하느냐?(목숨과 육신을 위협하는 자를 두려워하지 말고 영생을 좌지우지하는 창조주 여호와를 두려워하라는 것임, 마10:28) 13. 하늘을 펴고 땅의 기초를 정하고 너를 지은 자 여호와를 어찌하여 잊어버렸느냐?(욥에게 현신하신 여호와의 말씀과 같은 것임, 욥38:1-11) 너를 멸하려고 준비하는 저 학대자의 분노를 어찌하여 항상 종일 두려워하느냐? 학대자의 분노가 어디 있느냐?(여호와의 역사섭리로 패권국도 제국도 사라질 뿐임, 창11:7-9, 렘25:12) 14. 결박된 포로가 속히 놓일 것이니 죽지도 아니할 것이요, 구덩이로 내려가지도 아니할 것이며, 그의 양식이 부족하지도 아니하리라!(여호와의 역사섭리로 포로 된 자들이 해방을 얻을 것이며 그들이 여호와의 보살핌을 받게 될 것임) 15. 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라! 바다를 휘저어서 그 물결을 뒤흔들게 하는 자이니, 그의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니라!(풍랑을 일으키고 또한 그 풍랑을 잠재우는 전능자이심, 막4:39, 출4:6-8, 14:21-28, 사45:7) 16.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고(선지자로 삼아 그 입술을 주장하며 여호와께서 영적으로 함께하시는 것임, 출4:12, 14, 사6:7-9) 내 손 그늘로 너를 덮었나니(죽음에서 보호하여 그 생명을 보호하여 주시는 것임, 출3:12, 33:20-23), 이는 내가 하늘을 펴며 땅의 기초를 정하며, 시온에게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 말하기 위함이니라!(여호와가 태초에 천지를 창조한 것처럼 장차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여 성도를 시온 곧 새 예루살렘으로 맞아들일 것임, 사65:17-25) “(사51:1-16);

(1) 본문 제1-3절에서 선지지 아사야가 공의를 따르며 여호와를 추구하는 삶의 비밀 3가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①어떤 환경에서부터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는지를 깊이 생각하는 것입니다(사51:1). ②아브라함과 사라를 불어내어 이방 땅으로 보낼 때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 인생에 동행하셨는지를 생각해보라는 것입니다(사51:2). ③하나님의 공의를 따르며 여호와만을 바라보는 인생을 살았을 때에 풍성한 하나님의 축복이 그들이 가는 곳마다 넘쳤다는 사실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사51:3).
(2) 첫째, 제1절입니다; “1. (a)(공)의(righteousness)를 따르며 여호와를 찾아 구하는 너희는 내게 들을지어다. (b)너희를 떠낸 반석과 너희를 파낸 우묵한 구덩이를 생각하여 보라”(사51:1); 공의의 정신을 따라 여호와를 추구하는 자들이 반드시 하나님으로부터 들어야만 되는 이야기는 무엇일까요? 그리고 그 이야기는 왜 들어야만 하는 것일까요?
1) 하나, “1. (공)의(righteousness)를 따르며 여호와를 찾아 구하는 너희는 내게 들을지어다”(사51:1a); 성경은 구약 39권, 신약 27권, 합계 66권의 책이 하나의 정경으로 편집되어 있습니다. 그 가운데 창세기가 서론의 역할을 하고 있으며 요한계시록이 결론기능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이사야는 신앙생활에 있어서 하나의 결론을 맺고자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성경의 결론에 해당하는 요한계시록 제3장의 한 대목을 살펴보면서 본문의 의미를 파악해보고자 합니다; 사도 요한은 부활 승천하신 그리스도 예수님이 다음과 같이 사람들에게 말씀하시고 있다고 결론 삼아 적고 있습니다; “20.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21.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눅22:28-30). 22.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 지어다”(계3:20-22).
2)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의 공의를 실천하며 영이신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살다가 마침내 영생의 영광을 차지한다고 하는 것은 한마디로 꿈과 같은 소망입니다. 그것은 피조물의 능력으로는 이룰 수가 없습니다. 오로지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해야만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력을 육신을 가진 인간이 인생 가운데 받아 들여야만 합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능력을 사람이 받아 들일 수가 있을까요? 그 방법이 바로 위에서 제시한 요한계시록 제3장의 글에 다음과 같이 적혀져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먼저 사람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그리스도를 구원주로 믿고 있는 자들은 주님의 목소리를 알아 듣고 마음의 문을 엽니다. 그때부터 놀라운 인생이 시작됩니다. 주님과 함께 공생애를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그와 같은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이 발생합니다. 치유와 회복의 역사가 이 땅에 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복음사역을 끝낸 성도들은 천국에 입성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영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눅22:28-30)”(계3:20-22 의역).
3) 둘, “너희를 떠낸 반석과 너희를 파낸 우묵한 구덩이를 생각하여 보라”(사51:1b);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을 불러서 성도로 삼아 주시기 이전에 자신이 어떠한 세상에서 살고 있었던가 먼저 생각해보라는 것입니다; 그때 세속사회에서 자신의 가치관과 세계관이 어떠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면 앞으로 어떠한 새로운 가치관과 세계관을 가지고 살아가야 될지 다시금 이해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사야는 알기 쉽게 ‘반석’과 ‘우묵한 구덩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반석’은 세속사회가 추구하고 있는 가치의 기반입니다. 그것은 약육강식과 인과응보의 철칙을 말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약자는 강자의 지배를 받으며 그 종이 됩니다(창6:2-5). 그리고 보복의 법칙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습니다(출21:23-25). 원수를 미워하고 반드시 복수하게 되는 사회입니다(마5:43). 구약시대 율법사회도 그러한 무서운 사회입니다.
4) 그와 같이 약육강식과 보복의 피바람이 불고 있는 무서운 사회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목숨을 부지하고 살 수가 있을까요? 그 방법이 ‘우묵한 구덩이’라는 용어 가운데 들어 있습니다. 온 지면에 무서운 칼 바람이 불고 있을지라도 ‘우묵한 구덩이‘ 안에서는 평화를 누릴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정치 및 안보공동체에서 그 삶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즉, 같은 부족이나 민족의 테두리 안에서 보호받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세속사회의 최고의 가치는 효(孝)와 충성(忠誠)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속하고 있는 집단이 무조건 옳다고 하는 정의감입니다. 그와 같은 애국애족의 정신이 최고의 가치관이며 세계관의 기초입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세속적인 가치관과 세계관만으로는 하나님의 공의를 실천할 수가 없으며 하나님께서 계시는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곧 영생을 얻을 수가 없으며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이 모두 종말의 심판 가운데 들어가고 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성도로 불러 주신 그 놀라운 은혜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세속적인 사회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회로 만들기 위하여 자신의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깊이 생각해야만 합니다.
(3) 둘째, 제2절입니다; “2. (a)너희의 조상 아브라함과 너희를 낳은 사라를 생각하여 보라. (b)아브라함이 혼자 있을 때에 내가 그를 부르고, (c)그에게 복을 주어 창성하게 하였느니라”(사51:2);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을 실천하며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이른바 ‘하나님 경외’의 본을 보여준 믿음의 사람이 바로 아브라함과 사라입니다(창22:12). 그들 부부가 그와 같은 놀라운 인생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가 다음과 같습니다;

1) 하나, “2.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과 너희를 낳은 사라를 생각하여 보라”(사51:2a); 하나님은 창세기에 등장하고 있는 인물을 통하여 신앙생활의 모범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믿음의 조상이 되고 있는 아브라함과 사라가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그들의 인생을 깊이 묵상하게 되면 성경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내용들이 무엇인지 많은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주제와 관련하여서도 분명히 그러합니다.
2) 둘, “아브라함이 혼자 있을 때에 내가 그를 부르고”(사51:2b); 이사야가 참으로 쉽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혼자 있을 때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부르셨다는 것입니다(사51:2b); 그러므로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혼자서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함께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처럼 우리가 이 세상에서 모든 일을 혼자서 결정하고 육적인 인생을 살아가고 있을 때에 그것을 불쌍하게 보시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 주셨습니다. 혼자서 제멋대로 살게 되면 멸망의 대상이 될 따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자신의 마음 문만 열어주면 함께 살아가고자 하십니다(계3:20). 그리스도 예수님이 그러하신 것처럼, 성도들이 구원을 얻고 세상을 이기며 천국에 들어가서 영생을 누릴 때까지 함께 동행하고자 하십니다(계3:21-22). 결국 하나님과 함께 인생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성도들이 하나님의 공의를 실천하며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이 땅의 천하만민에게 하나님의 복을 전해줄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3) 셋, “그에게 복을 주어 창성하게 하였느니라”(사51:2c);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하나님께서는 왜 복을 주어 이 세상에서 창성하게 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여호와의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이 세상에 드러나기 때문입니다(창20:7).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성도가 이 세상에서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자손의 번성과 당사자의 창성함을 허락하십니다(창12:2). 그리고 세상사람들이 볼 때에 그 사람의 뒤에는 창조주 하나님의 뜻과 능력이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깨닫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사실을 아브라함의 경우에는 블레셋의 연맹 왕인 아비멜렉이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22. 그때에 아비멜렉과 그 군대장관 비골이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창21:22). 사실 하나님과 함께 인생을 사는 그것이 축복이며 형통함의 비밀입니다.
(4) 셋째, 제3절입니다; “3. (a)나 여호와가 시온의 모든 황폐한 곳들을 위로하여, (b)그 사막을 에덴 같게, 그 광야를 여호와의 동산 같게(창13:10, 오아시스) 하였나니, (c)그 가운데에 기뻐함과 즐거워함과 감사함과 창화(唱和, 시나 노래 따위를 한쪽에서 노래 부르고 다른 쪽에서 화답하는 것)하는 소리가 있으리라”(사51:3); 여호와 하나님과 동행하는 인생을 살게 됨으로써 그들이 가는 곳마다 어떠한 하나님의 복이 흘러 넘치게 되었는지를 다음과 같이 말해주고 있습니다;

1) 하나, “3. 나 여호와가 시온의 모든 황폐한 곳들을 위로하여”(사51:3a); 하나님의 선지자는 그리스도의 시대부터 이방인들의 구원을 위하여 땅끝까지 나아가는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게 됩니다. 시온의 영광만을 외치며 가나안 땅에 갇혀 있던 여호와신앙이 개방되고 개혁되어 이제는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시대를 구가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시대를 선지자 이사야가 예지하고 있습니다. 그때에는 어떠한 변화가 이 땅에 찾아올까요? 무엇보다도 먼저, 이방 땅에 하나님의 만민구원의 뜻을 복음으로 전하게 되면 그만큼 자신들의 동족들이 구원을 얻게 됩니다. 그와 같은 사실을 알기 쉽게 여기서 이사야가 표현하고 있습니다; “3. 나 여호와가 시온의 모든 황폐한 곳들을 위로하여”(사51:3a). 선민들의 나라가 여호와 하나님의 만민구원의 뜻을 완전히 저버림으로써 마침내 멸망당하고 폐허가 되고 맙니다. 그러나 선민 유대인들이 훗날 회개하고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방세계에 전함으로 말미암아 그 땅이 회복되는 역사가 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2) 둘, “그 사막을 에덴 같게, 그 광야를 여호와의 동산 같게(창13:10, 오아시스) 하였나니”(사51:3b); 그와 같은 치유와 회복의 역사는 선민들에게만 주어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이방인에게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황폐한 땅이 비옥한 땅으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멸망의 대상이 이제는 구원의 은혜를 입는 땅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대목에 대한 이사야의 표현이 다음과 같습니다; “창세기 제2장을 보면, 에덴동산에서 강의 근원이 출발하고 있습니다(창2:10). 그 말은 에덴에 큰 샘물의 근원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막 한 가운데에 큰 샘물의 근원이 존재하게 되면 그곳이 바로 에덴동산으로 변화하게 될 것입니다”(사51:3b의역).
3) 그리고 가나안 남부 염해 아래쪽에는 광야가 넓게 펼쳐져 있습니다. 그 광야를 대상들이 많은 낙타를 이끌고 지나다니고 있습니다. 메소포타미아와 애굽 사이에 교역하고자 그 험한 길을 지나가고 있습니다. 그들 상인들이 편히 쉬면서 기력을 회복할 수 있는 오아시스가 염해 주위에 있는 5도시국가입니다. 소돔, 고모라, 아드마, 스보임, 소알 성입니다. 일찍이 가나안 남부 벧엘 땅에서 멀리 동남부의 그 지역을 관찰하던 롯은 그곳이 ‘하나님의 동산’과 같은 살기 좋은 오아시스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창13:10). 오늘날 전세계적으로 지구의 온난화현상과 사막화현상이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자꾸만 사막과 광야가 넓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이사야가 예언하고 있는 하나님의 치유와 회복의 역사가 절실합니다. 사막이 에덴과 같고 광야가 하나님의 동산과 같은 오아시스로 변모되어야만 하겠습니다. 그 은혜를 얻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이기주의와 집단이기심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인생의 주인으로 삼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을 모시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하면 땅의 회복 뿐만이 아니라 만민을 구원하여 함께 하나님의 복을 누리는 시대가 전개될 것입니다.
4) 셋, “그 가운데에 기뻐함과 즐거워함과 감사함과 창화(唱和, 시나 노래 따위를 한쪽에서 노래 부르고 다른 쪽에서 화답하는 것)하는 소리가 있으리라”(사51:3c); 땅이 치유되고 회복되는 것만이 아닙니다. 이사야는 하늘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새 예루살렘성으로 이 세상에 임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7.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18. 너희는 내가 창조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하며 즐거워할지니라. 보라,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운 성으로 창조하며, 그 백성을 기쁨으로 삼고”(사65:17-18). 그리하면 성도들이 얼마나 기뻐하고 즐거워하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하나님에게 감사하며 서로 찬양을 올려드리게 됩니다(사51:3c).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공의의 길을 끝까지 달려가는 것입니다.
(5) 본문 제4-6절에서 선지자 이사야는 율법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공의와 구원이냐? 아니면 심판과 소멸이냐?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대체적인 내용이 다음과 같습니다; ①창조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것이 율법입니다(사51:4). 그러므로 그것은 본래 생명을 살리는 창조주의 능력을 내포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오히려 하나님의 심판을 초래하고 있습니다(사51:6).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②그 이유는 선민들이 율법 속에 담겨 있는 창조주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지 아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민을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율법으로 주신 것이기에 그 율법을 만민에게 전하여 이방인들의 생명을 살려야만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공의를 실천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구원을 이 땅에 가져오는 방법입니다. 그런데 선민들이 그 뜻을 배반하고 있습니다. ③선민들은 자신들만 율법으로 구원을 받으려고 합니다. 그 결과 이방인들에게 율법을 전해주지 아니합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고 제멋대로 살고 있는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진노 가운데 멸망을 당하게 될 운명입니다. 그것이 선민들의 무서운 죄악입니다(사51:5). ④그 결과 이방인들이 심판과 멸망을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구원의 뜻이 담겨 있는 율법을 이기적인 목적으로 독점하고 있던 선민들이 하나님의 심판 가운데 하루살이같이 사라지게 되는 역사가 임하게 됩니다(사51:6a). 그 대신에 이방인들에게는 다른 방법으로 하나님의 공의와 구원이 전파되게 됩니다(사51:6b). 그 다른 방법이 바로 메시아와 그 제자들의 복음사역입니다.
(6) 첫째, 제4절입니다; “4. (a)내 백성이여, 내게 주의하라. 내 나라여, 내게 귀를 기울이라. (b)이는 율법이 내게서부터 나갈 것임이라. (c)내가 내 공의를 만민의 빛으로 세우리라”(사51:4); 누가 하나님의 백성이며 제사장나라일까요?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고 있는 그 말씀, 율법에는 무엇이 담겨 있는 것일까요?
1) 하나, “4. 내 백성이여, 내게 주의하라. 내 나라여, 내게 귀를 기울이라”(사51:4a); 성도들이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먼저 실천해야만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무엇을 원하고 계시는지 그 뜻을 파악하기 위하여 먼저 주목해야 합니다. 그 시선을 놓쳐버리거나 외면하게 되면 그때부터 신앙생활이 어긋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제사장의 나라도 제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만 합니다. 그 입에서 나오는 말씀의 뜻이 무엇일까요?
2) 둘, “이는 율법이 내게서부터 나갈 것임이라”(사51:4b); 이사야는 선민들의 신앙생활은 개인적인 삶인 동시에 공동체생활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신정국가의 기본법인 모세의 율법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선민들이 다 함께 율법을 실천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율법을 제대로 실천하게 되면 이스라엘 자손들이 이 세상에서 유일한 제사장나라 거룩한 백성의 역할을 담당하게 됩니다. 그것은 이방인들에게 율법을 가르치며 그들을 위하여 속죄의 제사를 드려주는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기능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3) 셋, “내가 내 공의를 만민의 빛으로 세우리라”(사51:4c); 그 뜻을 이사야가 명확하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율법 가운데 담겨 있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의 뜻은 공의의 정신으로 모든 생명을 살리는 것이며 구원의 빛을 던져주는 것입니다(사51:4c).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의 그 뜻을 선민들이 실천하느냐 아니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에 따라 심판이냐 아니면 구원이냐가 결정될 것입니다.
(7) 둘째, 제5절입니다; “5. (a)내 공의가 가깝고 내 구원이 나갔은즉, 내 팔이 만민을 심판하리니, (b)섬들이 나를 앙망하여 내 팔에 의지하리라”(사51:5); 율법 가운데 담겨 있는 여호와말씀의 뜻대로 실천하는 경우와 그러하지 아니하는 경우에는 어떠한 차이가 발생하게 되는 것일까요?
1) 하나, “5. 내 공의가 가깝고 내 구원이 나갔은즉, 내 팔이 만민을 심판하리니”(사51:5a); 오늘날 법치국가에서는 하나의 법적용의 원칙이 있습니다. 그것은 소위 ‘도달주의’(到達主義)입니다. 국가의 법이 공포되는 것만으로 즉시 적용되고 효력을 발휘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체적으로 당사자에게 그 법의 취지가 도착되었을 때에 적용가능해지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상대방에게 도달되어야 비로소 그 준수여부를 판단하고 판결을 내릴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심판과 구원이라는 분류와 최종판정이 가능해지기 위해서는 최우선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모든 사람들에게 전파하고 그 뜻을 올바로 해석하여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마28:18-20). 그 역할을 수행해야만 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들입니다. 그런데 선민들과 성도들이 그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을까요? 그 결과에 따라 그들의 구원과 심판도 결정될 것입니다.
2) 둘, “섬들이 나를 앙망하여 내 팔에 의지하리라”(사51:5b); 여호와 하나님의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말씀을 어디에까지 전해야만 하는 것일까요? 그 점에 대하여 훗날 그리스도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14. 이 천국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24:14). 그와 똑같은 내용을 이사야가 이미 여기서 말하고 있습니다. 저 먼 곳에 있는 나라가 바로 ‘섬들’(사51:5b)이기 때문입니다. 그들 먼 나라에 여호와의 말씀을 전하게 되면 그들 역시 여호와를 앙망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8) 셋째, 제6절입니다; “6. (a)너희는 하늘로 눈을 들며, 그 아래의 땅을 살피라. 하늘이 연기같이 사라지고 땅이 옷같이 헤어지며, 거기에 사는 자들이 하루살이같이 죽으려니와, (b)나의 구원은 영원히 있고, 나의 공의는 폐하여지지 아니하리라”(사51:6); 종말심판의 의미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기술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인 공의와 구원은 어떤 모양이든지 성취될 것이라고 이사야가 다음과 같이 선포하고 있습니다;
1) 하나, “6. 너희는 하늘로 눈을 들며, 그 아래의 땅을 살피라. 하늘이 연기같이 사라지고 땅이 옷같이 헤어지며, 거기에 사는 자들이 하루살이같이 죽으려니와”(사51:6a); 이 세상의 종말에 대하여 이사야가 예언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종말로 현재의 하늘과 땅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새 하늘과 새 땅이 창조됩니다. 더구나 하늘과 땅이 사라지고 나면 그 가운데에서 호흡하며 육신적인 삶을 영위하고 있던 사람들이 모두 하루살이같이 죽게 됩니다(사51:6). 그것이 종말에 대한 이사야의 예언의 내용입니다.
2) 그런데 더욱 세부적인 내용을 설명하고 있는 신약의 말씀을 참조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①새 하늘과 새 땅이 창조되면 하늘에서 땅으로 새 예루살렘이 내려오게 됩니다(계21:1-2). 그 성으로 들어가서 영생을 누릴 수 있는 자들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들은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자들입니다(계21:27). ②하나님의 최종심판을 위하여 땅과 바다는 그 가운데 죽은 자들을 토해내도록 되어 있습니다(계20:13). 그리고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아오게 됩니다(요5:29). ③부활 승천하신 그리스도가 최종심판 전에 재림하십니다. 그때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에게는 생명의 부활이, 아직 살아 남은 자들에게는 휴거가 있을 것임을 사도 바울과 사도 요한이 밝히고 있습니다(살전5:16-17, 계20:6).
3) 둘, “나의 구원은 영원히 있고, 나의 공의는 폐하여지지 아니하리라”(사51:6b); 만약에 선민과 성도들이 땅끝까지 하나님의 만민구원의 뜻을 복음으로 전하지 아니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하나님의 공의를 행하지 아니하고 자신들만 구원받고 영생을 누리겠다고 하는 신앙생활로 일관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그러한 자들은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지 아니했기에 심판의 대상이 되고 말 것입니다; 마치 그러한 경우를 염두에 두고 있듯이 여기서 이사야가 “나의 구원은 영원히 있고, 나의 공의는 폐하여지지 아니하리라”(사51:6b)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뜻은 사람은 유한하지만 하나님은 영원하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의 좁은 소견으로 우리가 아니면 하나님의 뜻을 끝까지 실현할 수 없다고 자만하지 말라는 내용입니다.
4) 선민과 성도들이 그와 같이 행하지 아니하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다른 대안을 창조하실 것입니다. 전혀 새로운 모습의 성도가 다시 이 세상에 출현하는 것입니다. 그 점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사도 바울의 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8.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10.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라. 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8:8-11). 요컨대, 영적으로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임재하여 함께 인생을 살아가시면서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9) 본문 제7-8절에서 이사야는 하나님의 공의를 아는 자들 그리고 그 마음에 하나님의 율법이 있는 자들에게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의 특징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이 다음과 같습니다;

(10) 첫째, 제7절입니다; “7. 의(righteousness, KJV)를 아는 자들아, 마음에 내 율법(my law)이 있는 백성들아, 너희는 내게 듣고, 그들의 비방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의 비방에 놀라지 말라”(사51:7); 신앙생활이란 한마디로 공의의 하나님을 섬기며 여호와의 말씀이 자신의 마음을 지배하도록 하는 것입니다(사51:7a). 그런데 그것이 쉽지 않습니다.
1) 왜냐하면, 하나님의 공의(righteousness)가 세상적인 정의(justice)와 질적으로 다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세상적인 정의는 폐쇄적인 것입니다. 자신이 소속되어 있는 집단 내부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집단의 규율을 지키고 함께 더불어 살고자 하면 그것이 바로 정의입니다. 그러나 공의의 정신이란 한없이 개방적인 것입니다. 창조주의 입장에서 모든 피조물을 공평하게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공의의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성도는 자신이 소속되어 있는 집단의 규율만 지켜서는 안됩니다. 열방과 만민 그리고 만물이 모두 더불어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하나님의 법을 지켜야만 합니다.
2)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대로 공의의 정신을 실천하고자 하면 엄청난 저항에 부딪히게 됩니다(사51:7b). 이사야는 그 저항이 비방과 두려움, 그리고 놀라움으로 다가올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신앙을 가진 백성들은 그것 때문에 결코 두려워하거나 놀랄 필요가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공의의 하나님을 섬기며 그 공의의 정신이 깃들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실천해 나가게 되면 새로운 세상이 그 앞에 열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구체적으로, 하나님께서 거듭난 삶을 허락하시고 천국이 이 땅 위에 임하는 것을 체험하게 해주시는 것입니다(요3:3-17, 14:2-3, 막9:1-5).
(11) 둘째, 제8절입니다; “8. 옷같이 좀이 그들을 먹을 것이며, 양털같이 좀 벌레가 그들을 먹을 것이나, 나의 공의는 영원히 있겠고, 나의 구원은 세세에 미치리라”(사51:8); 세상에서 당하는 환난과 핍박은 일시적인 것입니다(사51:8a). 아무리 그것이 대단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100년 안팎의 인생을 사는 동안에 지나가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1) 보이는 세상의 것들에 대하여 이사야는 마치 옷이나 양털과 같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영원한 것들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좀이 옷을 파먹고 좀 벌레가 양털을 갉아먹고 말기 때문입니다(사51:8a). 세상의 권세와 영광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찍이 인류의 역사 가운데 패권을 자랑하던 많은 제국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100개가 넘는 족속을 통치하며 마치 영원한 통치권과 영광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비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좀이 야금야금 옷감을 파먹듯이 어느 사이에 내부에서부터 허물어져서 오늘날 그 흔적조차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의 세상적인 고난 역시 장차 얻게 될 하나님자녀의 영광과 비교하면 참으로 작고도 적은 것입니다(롬8:17-18).
2) 그 사실을 여기서 이사야가 언급하고 있습니다; “나의 공의는 영원히 있겠고, 나의 구원은 세세에 미치리라”(사51:8b).영원히 남는 것은 이 세상에서 살아 생전에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을 실천한 내용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영생하시는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이름과 함께 일대기로서 기억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그 구원의 열매가 남게 됩니다. 새 예루살렘성에는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 곧 구원을 받은 성도들이 모두 입성하게 되기 때문입니다(계21:27). 자손대대로 복음을 믿고 실천한 성도들이 하나같이 구원받고 천국의 시민이 될 것입니다.
(12) 본문 제9-11절에서 선지자 이사야는 일평생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창조주의 공의를 실천하는 성도에게 임하시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각 구절을 하나씩 검토해보고자 합니다;

(13) 첫째, 제9절입니다; “9. (a) 여호와의 팔이여, 깨소서 깨소서, 능력을 베푸소서. (b) 옛날 옛 시대에 깨신 것같이 하소서. 라합을 저미시고 용을 찌르신 이가 어찌 주가 아니시며”(사51:9); 여기서 ‘여호와의 팔’은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의 팔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사야는 창조주의 능력을 다시 보여달라고 다음과 같이 간구하고 있습니다;
1) 하나, “9. 여호와의 팔이여, 깨소서 깨소서, 능력을 베푸소서”(사51:9a); 이사야가 보기에 선민 유대인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온 세상에 드러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제대로 깨닫고 실천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선민들은 하나님의 창조의 이치를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가 아무리 설명해주어도 선민들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선민을 만드신 이유와 목적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선민만 보호하시고 적의 침략으로부터 구원해주시는 신으로 알고 있습니다. 요컨대, 자신들의 수호신 정도로 알고서 섬기고 있을 뿐입니다. 근본적으로 천지와 만물 그리고 모든 인류를 창조하시고 온세상의 역사까지 다 주관하고 계시는 위대하신 창조주의 영광을 도무지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선민들은 그 점에 있어서는 현세적인 복을 구하고 있는 우상숭배자와 비슷하며 마치 영적으로 잠을 자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부르짖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옛날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이스라엘 백성을 구속하여 선민으로 삼으셨을 때의 그 창조주의 능력을 부디 다시 한번 온 세상사람들에게 보여달라는 것입니다”(사51:9a 의역).
2) 둘, “옛날 옛 시대에 깨신 것같이 하소서. 라합을 저미시고 용을 찌르신 이가 어찌 주가 아니시며”(사51:9b); 여호와 하나님께서 태초에 이 세상을 창조하셨을 때에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2가지 놀라운 일을 행하셨음을 이사야가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영적인 일입니다; 하나는, ‘라합’을 잡아서 마치 회를 치듯이 분해해 버리신 일입니다. ‘라합’은 본래 히브리어 ‘라하브’(난폭, 소란, 거만한 행동)에서 온 말로서 전설의 바다괴물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이무기’와 비슷한 ‘라합’은 난폭한 세상의 지배자를 의미합니다. 세상의 지배자이면서 영적으로 승천하여 하나님과 다투려고 하는 교만한 세상의 제국입니다. 그러므로 바벨탑을 쌓은 제국과 같습니다(창11:4). 이사야는 그의 선지서에서 애굽제국을 ‘라합’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7. 애굽의 도움은 헛되고 무익하니라 그러므로 내가 애굽을 가만히 앉은 ‘라합’이라 일컬었느니라”(사30:7). 그러한 난폭한 세상의 지배자를 하나님께서 태초부터 지금까지 굴복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사야는 창조주 하나님에게 다시 한번 간구하고 있습니다; “부디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교만한 사상과 제국의 논리를 와해시켜 주십시오”(사51:9ba의역). 또 하나는, ‘용’을 물리치신 일입니다. 용의 정체에 대해서는 사도 요한이 잘 정리하고 있습니다; “9. 큰 용이 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라. 그가 땅으로 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그와 함께 내쫓기니라”(계12:9). 하늘에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탄의 세력을 무찔러서 추방해 버리신 여호와이십니다(사14:12-15). 이사야는 그 역사가 다시 한번 이 세상에 있어야만 한다고 본문에서 하나님께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사51:9bb).
(14) 둘째, 제10절입니다; “10. (a)바다를, 넓고 깊은 물을 말리시고, 바다 깊은 곳에 길을 내어, (b)구속 받은 자들을 건너게 하신 (영생과 영벌로 분리하신) 이가 어찌 주가 아니시니이까?”(사51:10); 그 옛날 출애굽의 영광을 재현해주시기를 다음과 같이 원하고 있습니다;
1) 하나, “10. 바다를, 넓고 깊은 물을 말리시고, 바다 깊은 곳에 길을 내어”(사51:10a); 언뜻 보면, 출애굽 역사에 이어 홍해구원사건을 거론하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출14:21-22).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 보면, 그보다 더 넓은 의미를 전달해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넓고 깊은 물’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의미를 확장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홍해의 구원사건만을 거론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넓은 세상에서 누구든지 창조주의 능력을 믿으면 하나님의 구원을 얻을 수가 있다고 하는 선언입니다(사51:10a).
2) 둘, “구속 받은 자들을 건너게 하신 (영생과 영벌로 분리하신) 이가 어찌 주가 아니시니이까?”(사51:10b); 그 옛날 출애굽한 이스라엘 자손들을 완전히 구원한 사건은 애굽 땅에 내린 열 가지 재앙이 아닙니다. 추격해오고 있는 애굽의 정예병들을 홍해에 수장시켜버린 사건입니다. 그때부터 다시는 이스라엘 자손을 바로가 노예로 삼을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그 창조의 능력을 다시 발휘하여 새 세상을 만드실 것입니다. 그때에는 메시아로 말미암아 대속의 구속함을 믿고서 구원을 받은 자들은 천성으로 들어가서 영생을 누리게 됩니다(사51:10b). 반면에 끝까지 구속사업을 방해한 자들은 영벌에 처해지며 지옥의 불꽃 속에 영원히 갇히어 버릴 것입니다(계19:20, 20:9-10).
(15) 셋째, 제11절입니다. “11. (a)여호와께 구속 받은 자들이 돌아와 노래하며, (b)시온으로 돌아오니, (c)영원한 기쁨이 그들의 머리 위에 있고 슬픔과 탄식이 달아나리이다”(사51:11); 창조주의 구속을 받은 자들이 장차 어디에서 어떠한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되는지 백성들이 알 수 있도록 해달라는 이사야의 간구입니다;

1) 하나, “11. 여호와께 구속 받은 자들이 돌아와 노래하며”(사51:11a);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로 구속 받은 자들은 장차 천국으로 인도될 것입니다(계21:27). 그곳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할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대속의 십자가를 지신 유월절 어린양 메시아를 또한 찬양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계5:13). 그와 같은 계시록의 내용을 벌써 이사야가 예언해주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2) 둘, “시온으로 돌아오니”(사51:11b); 여기서 ‘시온’이라고 하는 것은 선민들이 생각하기에는 그들의 선민사상의 중심지인 예루살렘입니다. 그러나 선지자 이사야가 예언하고 있는 새로운 세상의 창조와 관련하여 묵상하게 되면 그곳은 새로이 창조가 되는 새 예루살렘성을 의미하고 있습니다(사65:17-20). 선민 유대인들의 희망은 모든 이방인들이 선민을 섬기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종이 되어 들어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사야가 메시아사상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은 그것이 아닙니다. 새 예루살렘성이 창조되고 만민이 구원받아 다 함께 입성할 것이라는 종말 예언인 것입니다(사51:11b, 계21:27).
3) 셋, “영원한 기쁨이 그들의 머리 위에 있고 슬픔과 탄식이 달아나리이다”(사51:11c); 본문이 종말 예언임을 확실하게 말해주고 있는 대목입니다; 구속 받은 자들이 이 땅에 내려오는 하늘의 천국도성인 새 예루살렘성으로 들어감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기쁨에 참여하게 됩니다. 그것은 메시아가 이 세상에 옴으로 시작되고 있는 만민구원의 결과입니다. 그와 관련하여, 이사야가 그의 선지서 제11장 제5-9절에서 벌써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이사야의 예언은 이미 세상의 종말과 모든 성도의 구원을 일찌감치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계21:2-5).
(16) 본문 제12-14절에서 선지자 이사야는 창조주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되면 무엇을 두려워하고 무엇을 잃어버리게 되는지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17) 첫째, 제12절입니다; “12. (a)이르시되, 너희를 위로하는 자는 나 곧 나이니라. (b)너는 어떠한 자이기에 죽을 사람을 두려워하며 풀같이 될 사람의 아들을 두려워하느냐?”(사51:12); 이사야는 자신의 동족들이 이상하게도 위로자 하나님을 바라보지 아니하고 이방인들을 바라보고 두려워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1) 하나, “12. 이르시되, 너희를 위로하는 자는 나 곧 나이니라”(사51:12a); 이 세상에서는 진정한 위로자가 없습니다. 막상 사랑하는 사람이 죽음을 당하고 나면 유가족이나 친지들은 망자(亡者, 죽은 사람)의 생전 모습을 생각하면서 얼마나 다시 한번 보고 싶어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피조물들은 생명을 되살릴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에 그 소원을 들어줄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능력이 없으면서 말로만 위로하는 것이 결코 완전한 위로가 되지 못합니다. 따라서 ‘너희를 위로하는 자’(사51:12a)는 창조주 하나님입니다.
2) 둘, “너는 어떠한 자이기에 죽을 사람을 두려워하며 풀같이 될 사람의 아들을 두려워하느냐?”(사51:12b); 진정한 위로자 창조주 하나님을 알지 못하게 되면 사람들에게 비극이 찾아오게 됩니다; 생명을 되살릴 수 있는 능력자를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밖에 없는 유한한 그 목숨을 보전하기 위하여 얼마나 두렵고도 비굴한 인생을 살아가게 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자신의 안전보장을 최우선으로 삼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해침을 당할까 전전긍긍하게 됩니다. 서로가 서로를 두려워하면서 사회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들이 해칠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서 한시적인 기간 동안에 사용하고서 버려버릴 수밖에 없는 그 유한한 육체와 목숨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그들 역시 연약한 존재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사용기간이 정해져 있는 육체와 한시적인 목숨을 가지고 이 땅에서 살고 있는 피조물인 사람의 자식들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사51:12b).
(18) 둘째, 제13절입니다; “13. (a)하늘을 펴고 땅의 기초를 정하고 너를 지은 자 여호와를 어찌하여 잊어버렸느냐? (b)너를 멸하려고 준비하는 저 학대자의 분노를 어찌하여 항상 종일 두려워하느냐? (c)학대자의 분노가 어디 있느냐?”(사51:13); 천지와 더불어 사람까지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피조물인 지배자들을 두려워하고 있는 사람들이 딱하다는 것입니다;
1) 하나, “13. 하늘을 펴고 땅의 기초를 정하고 너를 지은 자 여호와를 어찌하여 잊어버렸느냐?”(사51:13a); 사람들이 타락하고 있는 이유는 한가지 때문입니다. 천지와 만물 그리고 사람을 창조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또한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사51:13a). 그러므로 그들이 보고 있는 세상은 창조주가 없고 오로지 피조물들만 설치고 있는 곳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아니하고 살아가고 있으므로 세상질서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피조물들 가운데 힘이 센 자가 약한 자를 지배하게 되는 짐승 같은 사회가 되고 맙니다. 지배자의 말이 곧 법이며 그들이 백성들의 생사여탈권을 지니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피조물이 피조물을 두려워하며 하나님처럼 섬기면서 그 종으로 살고 있는 사회가 바로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여호와신앙을 떠나 살고 있는 타락한 세상의 모습입니다.
2) 둘, “너를 멸하려고 준비하는 저 학대자의 분노를 어찌하여 항상 종일 두려워하느냐?”(사51:13b);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위로와 보호하심이 상실되어 있는 사회의 모습은 얼마나 두려움에 싸여 있는지 모릅니다. 도처에 위협과 위기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강자가 약자의 재산과 목숨을 빼앗기 위하여 빈틈을 노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힘이 센 자가 약한 자를 지배하고 종으로 삼아 학대하고 있는 사회이므로 약자는 자신의 목숨을 보존하기 위하여 하루 종일 두려워하면서 전전긍긍할 따름입니다(사51:13b). 개인간에만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약소국과 강대국 사이에서도 그러합니다. 그와 같은 비참한 인간세상을 향하여 선지자 이사야가 강하게 부르짖고 있습니다; “육신과 목숨 그리고 재물을 노리고 있는 세상의 힘과 권력을 너무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호와신앙을 회복하면 그 위협이 물러가게 될 것입니다”(사51:13b 의역).
3) 셋, “학대자의 분노가 어디 있느냐?”(사51:13c); 이 세상에 영원한 강자가 없습니다. ‘권불십년’(權不十年, 10년 이상 가는 권력이 없다)입니다. 사람에게만 ‘생노병사’(生老病死,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의 변화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떠한 제도나 국제관계도 모두 그러합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는 영원한 강자가 없으며 영원한 학대자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사51:13c).
(19) 셋째, 제14절입니다; “14. (a)결박된 포로가 속히 놓일 것이니, (b)죽지도 아니할 것이요, (c)구덩이로 내려가지도 아니할 것이며, (d)그의 양식이 부족하지도 아니하리라”(사51:14); 여호와신앙을 회복하게 되면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은혜가 임할 것임을 이사야가 말해주고 있습니다;

1) 하나, “14. 결박된 포로가 속히 놓일 것이니”(사51:14a);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해방자이십니다. 일찍이 출애굽의 역사를 통하여 세상제국 애굽에서 노예와 같은 삶을 영위하고 있던 이스라엘 자손들을 해방시켜 주신 바가 있습니다(출12:29-42). 하나님의 그와 같은 역사는 일회용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훗날 선민들의 바벨론 포로생활 역시 속히 해방될 것입니다(사9:4).
2) 둘, “죽지도 아니할 것이요”(사51:14b); 여호와신앙을 회복하게 되면 성도들은 죽지 아니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창조주가 주시는 영생을 받아 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 영생은 종말로 성도들이 무덤에서 부활하여 천성 곧 새 예루살렘성에 들어가서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요5:27-29계21:27). 그 뿐만이 아닙니다. 창조주 하나님에 대하여 정확하게 알게 되고 그리고 구속자로 이 세상에 오시는 메시아 곧 그리스도의 역할에 대하여 확실하게 알게 되면 자신이 그 영생에 참여하게 된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게 됩니다(요11:25-26, 17:3).
3) 셋, “구덩이로 내려가지도 아니할 것이며”(사51:14c); 여기서 구덩이는 음부의 세계를 말하고 있습니다. 영원한 불꽃이 회개하지 아니하는 죄인 곧 악한 자를 괴롭히고 있는 무저갱, 소위 ‘지옥’(地獄, hell)을 의미합니다. 종말심판을 받아 영벌에 처해지게 되면 그 음부로 내려가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알고 메시아를 구원주로 믿게 되면 그 심판이 면제를 받게 됩니다. 그래서 사망에서 생명으로 바로 옮겨지게 됩니다(사51:14c, 요5:24).
4) 넷, “그의 양식이 부족하지도 아니하리라”(사51:14d); 가장 간단한 말씀 같지만 사실은 대단한 예언의 말씀입니다. 그 이유는 첨단과학을 자랑하고 있는 21세기에 살고 있으면서도 인류는 아직도 양식의 부족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창조주가 누구신지 정확히 알고서 구원주로 섬기게 되면 그 양식이 절대로 부족하지 아니하게 되는 은혜가 임할 것이라고 이사야가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700년이 지나 메시아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의 ‘5병2어’와 ‘7병2어’의 기적이 그러합니다(마14:19-21, 15:34-38). 하늘의 곳간이 열리면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된다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20) 본문 제15-16절에서 선지자 이사야는 새로운 물결, 새로운 백성, 새로운 창조에 대하여 예언하고 있습니다. 구절풀이를 해봅니다;
(21) 첫째, 제15절입니다; “15. (a)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라. (b)바다를 휘저어서 그 물결을 뒤흔들게 하는 자이니, (c)그의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니라”(사51:15); 이사야가 ‘하나님 여호와’ 그리고 ‘만군의 여호와’의 개념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1) 하나, “15. 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라”(사51:15a); 일찍이 출애굽기에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설명해준 바와 같이 여호와의 뜻은 ‘스스로 있는 자’(I am who I am)입니다(출3:14). 그 말은 피조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있기 전에 먼저 계신 분이시며 이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시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이 대목은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인간들이 살고 있는 그 자연과 역사에 대하여 말씀하신다는 내용입니다.
2) 둘, “바다를 휘저어서 그 물결을 뒤흔들게 하는 자이니”(사51:15b); 창조주 하나님께서 자연을 창조하시고 그 흐름을 섭리하고 계십니다. 마치 바다를 휘저으며 바닷물을 출렁이게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 속에는 다음과 같은 깊은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람을 창조하시고 인류의 역사를 주관하고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바다와 같은 열방과 많은 백성들의 운명과 역사까지 그 흐름을 모두 관장하고 계신다고 하겠습니다”.
3) 셋, “그의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the Lord Almighty, NIV)니라”(사51:15c); 여기서 만군의 여호와는 절대권력과 주권을 가지신 창조주라는 의미입니다. 그 힘은 자연의 흐름과 인류의 역사를 동시에 변화시킬 수 있는 강제력을 말하고 있습니다. 종말심판과 새로운 창조까지 말하고 있는 것이 전능하신 만군의 여호와의 능력이라고 하겠습니다(사65:17-18, 계21:1-2).
(22) 둘째, 제16절입니다; “16. (a)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고, 내 손 그늘로 너를 덮었나니, (b)이는 내가 하늘을 펴며, 땅의 기초를 정하며, (c)시온에게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 말하기 위함이니라”(사51:16);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파송하시고 보호하시는 이유를 이사야가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한 것입니다. 과연 무엇으로부터 구원하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예정되어 있는 이 세상의 멸망으로부터 구원하여 새로운 세상에서 영생을 누리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측면에서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합니다;

1) 하나, “16.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고, 내 손 그늘로 너를 덮었나니”(사51:16a); 하나님은 선지자의 입에 여호와의 말씀을 위탁하시고 세상사람들에게 전하도록 파송하십니다. 그런데 선지자가 여호와의 말씀을 외칠 때에 백성들의 반응이 호의적이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입장에게 편리하게 여호와의 말씀을 해석하고 지켜왔는데 선지자가 외치고 있는 말씀은 그러한 편의적인 신앙체계와 다르기 때문입니다. 선민우월주의가 아니고 만민구원사상을 설파하고 있습니다. 현세구복적인 우상문화와 전혀 다른 신앙 곧 우상을 버리고 창조주에게 돌아올 것이며 영생을 얻기 위하여 여호와의 종으로 살아가라고 선지자가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말씀의 뜻을 정확하게 전하고 있는 선지자는 선민 뿐만 아니라 이방인으로부터도 환난과 핍박을 당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에 따라 하나님께서 그 능력의 손으로 덮어 주시고 강력하게 보호해주시는 것입니다(사51:16a).
2) 둘, “이는 내가 하늘을 펴며, 땅의 기초를 정하며”(사51:16b); 여호와 하나님은 그 옛날 태초에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습니다(창1:1-2). 이제는 종말로 새로운 세상을 다시 창조하십니다. 그 사실을 이사야가 제65장에서 다음과 같이 예언하고 있습니다; “17.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사65:17).
3) 셋, “시온에게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 말하기 위함이니라”(사51:16c); 출애굽 당시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신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출19:5-6). 그들이 소위 선민들입니다. 그러나 그 선민들이 역사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않습니다; 이방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주고 그들을 위하여 죄사함의 제사를 드려주는 제사장의 직분을 행해야만 하는데 선민들이 그 일을 전혀 시행하지 아니한 것입니다(출19:6). 여호와 하나님께서 보시다 못하여 갈릴리 변방의 선지자 요나에게 이방의 큰 도시 니느웨에 가서 그 일을 행하라고 명령하십니다(욘1:1-2). 그러나 그가 어쩔 수 없이 그 일을 행하면서 얼마나 이방인의 멸망을 끝까지 소원하고 있는지 모릅니다(욘3:1-3, 4:1-5, 마12:39-41).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을 버리시고 하나님의 백성을 새로이 선택하고자 하십니다. 그 백성은 만민 가운데 하나님께서 흔드시는 메시아의 깃발을 보고 그 아래로 모여드는 자들입니다(사11:5-12). 그들이 그리스도의 제자이며 새로운 성도들입니다. 그들에 의하여 하나님의 뜻 곧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복음은 세상 끝까지 전파될 것입니다(마24:14, 28:18-20). 그것이 선민사상과 현세구복사상을 넘어서는 새로운 물결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가 새로운 시온으로 이 땅에 임하게 될 것입니다(계21:2-8). 그와 같은 내용을 이사야는 함축적으로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시온에게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 말하기 위함이니라”(사51:16c).
셋째로, “17. 여호와의 손에서 그의 분노의 잔을 마신 예루살렘이여!(표현상 이사야의 예언이 후대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언과 같음, 렘25:18), 깰지어다 깰지어다 일어설지어다!(여호와의 생기를 얻어 하나님의 군사로 일어서라는 것임, 겔37:9-10. 또는 대속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써 여호와로부터 죄사함과 칭의의 은혜를 얻으라는 것임, 사53:10-12, 행2:36-42) 네가 이미 비틀걸음 치게 하는 큰 잔을 마셔 다. (겁도 없이 그 심판의 잔을 완전히) 비웠도다!(이사야가 보기에 히스기야 말기 유대인의 행동이 여호와신앙을 떠나서 제멋대로 비틀거리고 있다는 것임. 그러므로 곧 여호와의 관용의 한계를 벗어나고 말 것임, 창15:6) 18. 네가 낳은 모든 아들 중에(선민 출신 가운데) 너를 인도할 자가(선지자나 대속자가) 없고, 네가 양육한 모든 아들 중에(유대교를 믿고 있는 이방인 중에) 그 손으로 너를 이끌 자도 없도다! 19. 이 두 가지 일이 네게 닥쳤으니, 누가 너를 위하여 슬퍼하랴? 곧 황폐와 멸망이요, 기근과 칼이라!(예레미야의 표현을 빌리면, 칼과 기근과 전염병의 재앙임, 렘24:10) 누가 너를 위로하랴?(그때에 보혜사 성령님의 강림과 위로가 없다는 것임. 그러므로 후일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고 성령님의 내주 역사하심을 얻어야 하는 것임, 요14:16-20, 고전6:19-20) 20. (여호와신앙을 버린) 네 아들들이 곤비하여(끝내 세상살이에 지치게 되고) 그물에 걸린 영양 같이 온 거리 모퉁이에 누웠으니(자신의 욕심에 눈이 멀어 마침내 모든 재산을 탕진하고 노숙자가 되어 있으니), 그들에게 여호와의 분노와 네 하나님의 견책이 가득하도다!(이 세상에서 여호와의 저주와 심판을 받은 것임) 21. 그러므로 너 곤고하며 포도주가 아니라도 (세상적인 야망과 탐욕에) 취한 자여, 이 말을 들으라! 22. 네 주 여호와, 그의 백성의 억울함을 풀어 주시는 네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비틀걸음 치게 하는 잔, 곧 나의 분노의 큰 잔을 네 손에서 거두어서 네가 다시는 마시지 못하게 하고(여호와 하나님이 장차 그리스도를 구원주로 영접하는 성도에게는 진노의 멸망 대신에 죄사함과 영생의 구원을 허락하실 것임, 요3:13-17, 5:24), 23. 그 잔을 너를 괴롭게 하던 자들의 손에 두리라(성도를 핍박하는 자들이 여호와의 진노의 잔을 마시게 될 것임). 그들은 일찍이 네게 이르기를 엎드리라, 우리가 넘어가리라 하던 자들이라(너희 성도들을 짓밟고 학대하던 그들에게 임하는 여호와의 보응임). 너를 넘어가려는 그들에게 네가 네 허리를 땅과 같게(땅이 짓밟힌 자의 억울함을 여호와께 호소함, 창4:10-11. 또는 견딜 수 있도록 땅처럼 성도를 단단하게 만든다는 것임), 길거리와 같게 하였느니라(길거리에서 많은 사람들이 그 박해사건을 말할 것임, 일종의 미투와 같은 것임) 하시니라“(사51:17-23);

(1) 본문 제17-20절에서 선지자 이사야는 여호와의 진노의 잔을 선택하여 마시고 비틀거리는 선민들과 그 후손들의 처참한 모습에 대하여 예언하고 있습니다;
(2) 첫째, 제17절입니다; “17. 여호와의 손에서 그의 분노의 잔을 마신 예루살렘이여, 깰지어다, 깰지어다, 일어설지어다. 네가 이미 비틀걸음 치게 하는 큰 잔을 마셔 비웠도다”(사51:17). 모세가 죽기 전에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권면하고 있는 말씀이 다음과 같습니다; “19. 내가 오늘 하늘과 땅을 불러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신30:19). 그런데 이스라엘 자손들은 모세의 유언을 잊어버리고 맙니다. 그들은 생명과 복을 택하는 대신에 그만 사망과 저주를 선택하고 말기 때문입니다(사51:17a). 선민들의 잘못된 선택에 대하여 본문에서 선지자 이사야가 부디 여호와신앙을 회복하라고 부르짖고 있습니다; “깰지어다, 깰지어다, 일어설지어다. 네가 이미 비틀걸음 치게 하는 큰 잔을 마셔 비웠도다”(사51:17b).
(3) 둘째, 제18절입니다; “18. 네가 낳은 모든 아들 중에 너를 인도할 자가 없고, 네가 양육한 모든 아들 중에 그 손으로 너를 이끌 자도 없도다”(사51:18). 이사야는 예루살렘의 유대왕국 백성들을 깨우고 다시 일으켜 세우려고 하지만 그것이 순조롭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선민들이 이미 자정능력(自淨能力, the power of self-purification)을 상실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은 사실을 지적하고 있는 이사야의 말씀이 본문 제18절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비상조치가 장차 이 세상에 나타날 것입니다. 그것이 메시아의 오심입니다. 사람들이 스스로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이 자신의 창조의 능력으로 이 세상에서 가능하도록 하십니다(창18:11-14, 눅1:34-38). 독생자가 이 땅에 사람의 아들로 태어나십니다(사7:14, 요1:14). 사람들과 동일하게 자라고 생활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전통적인 유대교의 가르침이나 선민우월사상에 결코 물들지 아니하실 것입니다.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을 위하여 자신의 한평생을 기꺼이 바칠 것입니다(눅24:44-48). 그리고 죄인을 의인으로 만들기 위하여 자신을 대속의 제물로 바칠 것입니다(사53:3-12, 요1:29). 그 시대를 앙망하고 있는 선지자가 바로 이사야입니다.
(4) 셋째, 제19-20절입니다; “19. 이 두 가지 일이 네게 닥쳤으니 누가 너를 위하여 슬퍼하랴? 곧 황폐와 멸망이요, 기근과 칼이라. 누가 너를 위로하랴? 20. 네 아들들이 곤비하여 그물에 걸린 영양같이 온 거리 모퉁이에 누웠으니, 그들에게 여호와의 분노와 네 하나님의 견책이 가득하도다”(사51:19-20). 이사야는 메시아의 시대 곧 만민을 구원하기 위하여 여호와 하나님께서 구원자 메시아의 깃발을 흔드시는 그 시대를 바라고 소원하라고 그의 동족들에게 호소하고 있습니다(사11:10-12). 그러나 선민사상과 유대교의 교리에 심취하고 있는 동족들과 선민사회내의 이방인들은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그들의 장래에 대하여 다시 한번 본문 제19-20절에서 2가지로 예언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는, 선민의 나라가 멸망을 당하고 황폐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나라 잃은 백성들이 강대국의 지배를 받으며 생존의 위기에 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을 구원해줄 위로자가 없습니다(사51:19). 선민사상을 버리며 우상문화를 청산하고 만민을 구원하시려는 창조주 하나님 앞으로 돌아올 때까지는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돌아올 수 있는 기회가 앞으로 제공될 것입니다. 그들의 사회에 오시는 메시아입니다. 선지자의 말씀을 배척했을지라도 메시아의 말씀만은 영접하는 것이 선민들이 다시 구원 얻는 방법입니다. 그런데 이사야가 미래를 예지해보니 선민들의 후손들이 그러하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가장 참혹한 풍경이 제20절과 같이 환상처럼 펼쳐지고 있는 것입니다;

(5) 본문의 말미인 제21-23절에서 선지자 이사야는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려면 성도들은 어떻게 해야만 하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6) 첫째, 제21절입니다; “21. 그러므로 너 곤고하며 포도주가 아니라도 취한 자여 이 말을 들으라”(사51:21); 여기서 ‘곤고(困苦)하며’로 표현하고 있는 것은 외롭고 쓸쓸하며 그 형편이 곤궁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맨 정신으로 그러한 처지를 견딜 수 없어서 포도주를 마시고 취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례가 벌써 창세기 제9장에서 노아의 경우로 등장하고 있습니다(창9:18-23). 노아는 포도주를 마시고 취해서 잠이 들지만 본문에서는 그것이 아닙니다. 포도주를 마시지 아니하고 취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의 부귀영화를 얻기 위하여 골몰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세상에서 출세하고 성공만 할 수 있다고 하면 다른 모든 것은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는 삶의 태도입니다. 그러한 성공지향주의 세상사람들을 향하여 이사야가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을 본문에서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7) 둘째, 제22-23절입니다; “22. 네 주 여호와, 그의 백성의 억울함을 풀어 주시는 네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비틀걸음 치게 하는 잔 곧 나의 분노의 큰 잔을 네 손에서 거두어서 네가 다시는 마시지 못하게 하고, 23. 그 잔을 너를 괴롭게 하던 자들의 손에 두리라(성도를 핍박하는 자들이 여호와의 진노의 잔을 마시게 될 것임). 그들은 일찍이 네게 이르기를 엎드리라, 우리가 넘어가리라 하던 자들이라(너희 성도들을 짓밟고 학대하던 그들에게 임하는 여호와의 보응임). 너를 넘어가려는 그들에게 네가 네 허리를 땅과 같게(땅이 짓밟힌 자의 억울함을 여호와께 호소함, 창4:10-11. 또는 견딜 수 있도록 땅처럼 성도를 단단하게 만든다는 것임), 길거리와 같게 하였느니라(길거리에서 많은 사람들이 그 박해사건을 말할 것임, 일종의 미투와 같은 것임) 하시니라”(사51:22-23); 영적으로 죽은 자들이 세상 재미에 취하여 제멋대로 살아가는 것(창11:31-32, 행7:4),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분노의 큰 잔을 마셨다는 의미입니다;

1) 그렇지만 이사야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분노의 큰 잔을 거두어들이실 것이라고 제22절에서 말합니다. 그 이유는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긍휼과 구원을 베풀고자 결심하셨기 때문입니다. 제22절에서 ‘억울함’이라고 하는 것은 형평에 어긋나게 불이익을 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갑을병정’(甲乙丙丁) 네 사람이 똑 같은 죄를 범했는데 그 가운데 ‘갑’만 처벌을 하고 나머지 3사람은 처벌을 유보하고 있는 경우를 말합니다; 그러한 불이익을 편파적으로 당하고 있는 경우, ‘갑’은 재판장이 되시는 여호와 하나님에게 다음과 같이 항의할 수가 있습니다; “나머지 세 사람도 죄질이 같으므로 저와 똑같이 처벌을 해주십시오. 그것이 공평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이 그것이 아닙니까?” 일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나머지 3사람, 곧 ‘을병정’에게 차례대로 분노의 잔을 마시게 합니다(렘25:29).
2) 그런데 하나님이 우선 ‘갑’에게 분노의 잔을 마시게 하고 나머지 3사람에게 집행을 늦추고 있는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갑이 먼저 당하고 있는 그 참상을 보고서 나머지 사람들이 자신의 죄를 회개하도록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민의 경우를 보고서 이방인들이 빨리 회개해야 합니다. 늦어지면 여호와의 진노의 잔을 자신들도 마시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회개하는 이방인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공평하게 동일한 처벌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사실을 이사야가 제23절에서 드라마틱하게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23. 그 잔을 너를 괴롭게 하던 자들의 손에 두리라. 그들은 일찍이 네게 이르기를 엎드리라, 우리가 넘어가리라 하던 자들이라. 너를 넘어가려는 그들에게 네가 네 허리를 땅과 같게, 길거리와 같게 하였느니라 하시니라”(사51:23);
3) 그러나 분노의 잔을 마시고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는 것을 창조주 하나님께서 원하시지 않습니다. 자식과 같은 인류를 그렇게 멸망시키고 싶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그래서 심판 대신에 구원의 길을 모색하십니다. 구원자 메시아를 이 세상에 보내셔서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길을 여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메시아의 구원사역입니다(요3:13-17). 구체적으로, 이사야는 제53장에서 여호와의 의로운 종의 모습으로 복음사역의 방법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참고로, 모세는 창세기 제23장에서 아브라함을 통하여 이방인에게 여호와신앙인의 모습을 끝까지 보여주는 성도의 선교자세를 벌써 기술하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선지자 이사야는 멀지 아니하여 선민의 나라 다윗왕조 유대왕국이 망하고 이스라엘 자손들이 이방인들에게 종으로 끌려가게 되는 비참한 역사가 전개될 것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역사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인 선민들을 버리셨기 때문에 발생하게 되는 것일까요?
이사야는 그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반대입니다. 선민들이 자신들의 주인 여호와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에 발생하고 있는 현상입니다. 그 옛날 모세의 마지막 권유, 곧 생명과 사망 가운데 부디 생명을 선택하고 사망을 선택하지 말라고 그토록 신신당부를 했는데 이스라엘 자손들이 다음과 같이 모세의 권면을 까맣게 잊어버린 것입니다;
(1) 첫째, 겁도 없이 하나님말씀의 뜻을 왜곡하여 지극히 이기적인 선민사상으로 바꾸어서 적용하고 있습니다.
(2) 둘째, 그리고 이웃나라와 강대국들을 물리치고 그 옛날 다윗의 제국을 재건할 수 있도록 부디 메시아를 보내어 달라고 간구하고 있습니다.
(3) 셋째, 현세적인 복을 얻기 위하여 이방신과 우상을 섬기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도 그와 같은 목적으로 일종의 도구로 삼아 섬기고 있습니다.
(4) 넷째, 여호와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있는 만민구원과 영생의 구원은 설 자리가 사라진 선민의 사회입니다. 그 결과 그들에게 흑암의 역사가 임하고 백성들이 죽임을 당하는 재앙이 찾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역사가 이사야의 시대와 그리스도 예수님의 시대에만 임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영생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오늘날에도 그대로 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만민구원과 영생의 구원을 원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좇아 신실하게 살아가는 성도님들이 되어야만 합니다.
아울러 현세적인 복과 이익을 하나님의 구원으로 알고서 이기적으로 그것만 추구하는 과거 선민들의 잘못된 신앙노선에서 벗어나야만 합니다. 아무쪼록 깊은 이해와 성찰이 있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