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느보벨을 심판하시는 창조주 여호와, 그에 따라 우상을 섬기는 세상제국과 음녀 바벨론을 따르는 자들이 종말을 맞이하게 되다”(사46:1-47:15)
설교일; 주후 2027년 1월 3일 주일
작성자; 손진길 목사(25년 9월 6일 토요일 작성)

본문에서 선지자 이사야는 장차 다윗왕조 유대왕국이 신바벨론제국 갈대아군대에 의하여 멸망을 당하게 되면 그 백성들이 세상제국 신바벨론의 영향 아래에서 살아가게 될 것이며 그때부터 3가지 종류의 전쟁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1) 첫째, ‘신(神)들의 전쟁’이 제46장 전반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신바벨론의 주신인 벨과 느보를 심판하시는 창조주 여호와에 관한 내용입니다. 모세가 기록한 출애굽기 제12장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애굽제국의 주신과 우상들을 심판하고 이스라엘 자손을 해방시키고 있는데 그 일이 역사적으로 다시 발생할 것입니다(출12:12).
(2) 둘째, ‘패권(覇權) 전쟁’이 제46장 후반부에 기록되고 있는데 그 주역들이 신바벨론제국의 패권에 도전하고 있는 아리안의 국가들입니다. 역사적으로 동서양의 유목민들이 카스피해 근방에서 만나고 있습니다. 그들이 혼혈이 되면 잡종강세의 족속이 탄생하여 비옥한 메소포타미아지역을 탐내어 남침을 시도합니다. 그러나 그 지역 기존 패권국의 군사력이 강하여 동쪽으로 밀려납니다. 그 결과 동북쪽에는 메대왕국이 그리고 동남쪽에는 바사왕국이 형성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연합하여 기습적으로 패권국의 수도인 바벨론성을 공격합니다(단5:30-31). 선지자 이사야가 예언한 그대로 여호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신바벨론이 무너지고 바사의 고레스 왕이 패권을 장악하게 되는 것입니다(사44:28-45:8). 그에 따라 유대인들이 해방되어 그 일부가 예루살렘으로 되돌아와서 성전을 재건하게 됩니다(스1:1-4, 6:13-18).
(3) 셋째, 제47장에는 음녀 바벨론과의 전쟁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세상제국 바벨론에서 성행하고 있던 3가지 문화가 누룩이 되어 시공간을 뛰어넘어 거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선지자 이사야가 미리 예언하고 있습니다(계17:1-5). 구체적으로, ①왕국의 여주인이 탐닉하고 있는 주술문화(사47:5, 9), ②안일함에 젖은 사치와 향락문화(사47:8), ③인간의 꾀와 계략에 의존하는 지배층의 약탈문화(사47:13, 왕상21:7-16) 등입니다.
여기서는 ‘신들의 전쟁’에 관하여 서론삼아 조금 말씀을 드려두고자 합니다. 주전 586년에 예루살렘성이 함락되자 전쟁에서 살아남은 유대인들이 포로가 되어 바벨론으로 끌려가게 됩니다. 당시 신바벨론제국의 주신은 벨과 느보입니다.
예루살렘성전에서 여호와를 하나님으로 섬기던 선민 유대인들은 바벨론에서 현지인들의 주신인 벨과 느보 뿐만 아니라 많은 우상들을 보게 됩니다. 그 가운데 주신인 벨은 바벨론의 지배민족인 갈대아인들에 의하여 신중의 신으로서 말둑 또는 모르닥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그것을 아람사람들은 ‘벨’로 부르고 가나안사람들은 ‘바알’로 부르고 있습니다. 참고로, 주신 벨을 이름자로 사용한 바벨론왕이 벨사살입니다(단5:1). 한편 느보는 최고신인 말둑의 아들로서 지혜와 장사의 이익을 관장하는 신으로 널리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에 따라 세상적인 지혜와 상업적인 이익을 추구하고 있는 권력자들과 귀족들이 느보신을 섬기고 있으며 그 이름을 자신의 이름으로 삼고 싶어합니다. 그러한 측면에서 황제의 이름인 느부갓네살과 나보니더스가 유명합니다. 그 밖에 참고할 만한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봅니다;
(1) 첫째, ‘벨’(Bel)과 ‘느보’(Nebo)의 용어가 가지고 있는 의미에 대하여 먼저 알아봅니다; 본문에서 선지자 이사야는 아람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 아람어가 바벨론으로 넘어가서 달리 사용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신바벨론제국을 건설하는 갈대아인들이 그 옛날 아람 족속의 한 갈래이기 때문입니다(창11:31). 역사적으로 아람 족속의 한 갈래인 갈대아인들이 유프라테스 강을 타고서 남하하여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중심에서 왕조를 건설한 것이 고대 갈대아왕조입니다. 그들이 훗날 앗수르제국을 무너뜨리고 신바벨론제국을 건설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영웅왕 느부갓네살이 지상에 남은 마지막 제사장나라 유대왕국을 멸망시키게 됩니다(왕하25:1-7).
(2) 둘째, 아람의 벨 신이 바벨론으로 넘어가게 되어 훗날 ‘벨 마르둑’(Bel-Marduk)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됩니다. 그것은 바벨론의 으뜸신의 이름입니다. 아람어 ‘벨’은 히브리어로 ‘바알’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그 의미를 금방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가나안 원주민들이 주신(主神)으로 섬기고 있던 바로 그 ‘바알 신’이기 때문입니다. 농사의 신이며 풍요의 신입니다. 척박한 가나안 땅에 젖과 꿀이 흐르도록 해준다는 그 우상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풍요는 사람이 열심히 일을 한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노력으로 반드시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우상을 만들거나 신을 만들어서 섬길 이유가 하등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벨’은 사람과 땅의 ‘운명’을 관장하는 주신(主神, main god)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3) 셋째, ‘느보’(Nebo)는 ‘벨의 아들’입니다. 그러므로 2가지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하나는, 주신인 벨 다음으로 힘이 있는 신으로서 ‘지혜’를 관장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는, 백성들로부터 ‘주신 벨의 아들’로 추앙 받기를 원하고 있는 바벨론의 황제들이 그 이름 ‘느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약간씩 변형되고 있지만, ‘느부갓네살’, ‘나보니더스’, ‘나보폴라살’ 등 황제의 이름이 그러합니다. 느보 신이 가지고 있는 지혜의 힘을 황제가 가지게 되면 그 지혜로써 치산치수(治山治水, 조림사업과 제방사업에 힘써 홍수를 잘 다스림으로써 풍년이 들게 하는 것)를 잘하게 되고 전쟁에서도 승리를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4) 넷째, 선민 유대인들이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을 제멋대로 우상으로 여기고 이기적인 방법으로 섬기고 있습니다. 선민들의 현세적인 소원을 성취해주고 우월적인 이익을 얻게 해주는데 이스라엘의 만군의 여호와의 힘이 필요하다는 견해입니다. 자신들의 세상적인 소원성취와 성공을 얻게 해주지 못하게 되면 여호와 하나님은 필요가 없는 귀찮은 신일 따름입니다. 그러므로 겉으로는 여호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율법생활을 잘하고 있는 것 같지만 그 속은 이해타산으로 얼룩져 있는 것입니다. 창조주 여호와를 섬기고 있다는 선민들의 신앙의 모습이 바알 신을 섬기고 있는 가나안 원주민들의 현세적이고도 기복적인 신앙의 모습과 전혀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선민으로서의 지위와 신분을 계속 부여해주고 하나님께서 보호해주실 이유가 사라지고 있습니다(왕하21:11-13).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의 나라와 똑같이 역사적인 섭리를 행하시고 맙니다. 힘이 강한 신바벨론제국의 황제 느부갓네살의 군대에 의하여 마침내 다윗왕조 유대왕국이 멸망을 당하고 마는 것입니다(왕하25:1-7).
(5) 다섯째, 바벨론에서는 새해가 되면 ‘아키투 축제’(Akitu Festival)가 매년 열립니다. 그때에는 주신 ‘벨’의 신상과 벨의 아들 신 ‘느보’의 신상이 짐승과 가축에 실려서 행진의 앞장을 서게 됩니다. 백성들이 그 모습을 보고서 환호합니다. 그것이 바벨론의 영광입니다. 그 뒤를 패전한 나라의 왕족과 귀족들이 종의 모습으로 끌려오고 있습니다. 또한 패망한 나라의 백성들이 섬기고 있던 이방신과 우상들도 고꾸라지고 엎드러진 모습으로 짐승과 가축에 실려서 끌려오고 있습니다. 따라서 창조주 여호와의 모습이 바벨론 백성들의 조롱거리가 되고 맙니다. 그 결과 어떠한 역사가 전개될까요? 창조주 하나님에 의하여 전세를 역전시키는 역사가 전개되고 마는 것입니다.
(6) 여섯째, 그와 같이 교만한 신바벨론제국의 패망과 그 신들의 운명에 관하여 알아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바사 왕 ‘고레스’(Cyrus)를 불러서 바벨론 징벌의 도구로 사용하십니다(사45:1-5). 그리고 선민들을 해방시키는 목자로 삼고 있습니다(사44:28). 그 결과 상황이 역전되고 맙니다. 신바벨론제국이 패망하게 되자 그들의 주신인 ‘벨’의 신상과 아들 신 ‘느보’의 신상이 거꾸러지고 엎드러진 모습으로 짐승과 가축에 실려서 끌려가게 됩니다(사46:1). 그 신들을 우상으로 섬기고 있던 바벨론 백성들의 운명도 그렇게 비참하게 변하고 마는 것입니다(사46:2). 반면에 선민들은 해방을 맞이하고 그 일부가 당당하게 고토(故土, 연고가 있는 땅) 예루살렘으로 귀환하여 제2성전을 건설하게 됩니다(스1:1-4).
(7) 일곱째, 고대 아람의 영향을 모압이 받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아람의 선지자 발람을 모압왕 발락이 초빙하여 모세가 이끌고 있는 이스라엘12지파를 저주하도록 제사를 드리고 있는 장면 등이 그러합니다(민22:1-7, 23:1-6). 그 영향으로 모압평지에 있는 높은 봉우리 이름을 ‘느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느보 산’에 올라간 모세의 깨달음은 과연 무엇일까요? 그의 기록인 신명기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모세는 죽기 전에 하나님의 허락을 얻어서 모압의 ‘느보’ 산봉우리에 오르게 됩니다(신34:1-5). 그 장소는 요단강으로 비스듬히 흘러가고 있는 비스가 산맥의 높은 봉우리입니다. 그곳에서 모세는 그토록 동족들을 이끌고 함께 들어가고 싶어했던 약속의 땅 가나안을 멀리 내려다보게 됩니다. 북쪽 단에서부터 남쪽 브엘세바를 거쳐 그 남단 가데스 바네아에 이르는 네게브 지역을 모두 보게 됩니다. 그리고 나서 임종직전에 모세는 무엇이라고 부르짖었을까요?;

그의 마지막 깨달음은 그리스도로 오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토로하신 말씀과 유사했을 것입니다;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요19:30b),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23:46b).
먼 훗날 히브리서의 저자는 구약상의 믿음의 열조들은 공통적으로 젖과 꿀이 흐르는 이 세상의 가나안 땅이 아니라 생명의 창조주이신 아버지 하나님이 계시는 천성으로 돌아가기를 소원했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히11:15-16). 모세 역시 그리스도를 만나 천성에서 영생의 큰 상급을 얻기를 소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히11:25-26).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은 세상의 지혜를 말하고 있는 ‘느보 산’을 떠나서 영생의 진리가 살아 숨쉬고 있는 창조주 하나님께 돌아갈 준비를 해야만 한다고 하겠습니다. 그것이 성경말씀이 증거하고 있는 올바른 성도의 삶입니다.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에 대하여 구절풀이를 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얻은 소중한 교훈과 메시지를 아울러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첫째로, “1. (신바벨론제국의 주신인) 벨은 엎드러졌고 느보는 구부러졌도다! 그들의 우상(신상)들은 (아키투 축제 때 패전국의 우상들 처럼) 짐승과 가축에게 실렸으니 너희(바벨론 주민들)가 (주신이라고 찬양하면서 가마꾼들을 동원하여 귀족처럼) 떠메고 다니던 그것들이 (이제는 패전국의 우상들로 격하되어 그만) 피곤한 짐승의 무거운 짐이 되었도다!(그 무거운 엎드러진 신상을 수레에 싣고 가니 수레를 끌고 있는 짐승들은 힘이 들 따름이라는 것임) 2. 그들(신바벨론제국의 멸망과 더불어 그들이 섬기던 신상들)은 구부러졌고 그들은 일제히 엎드러졌으므로, 그 짐(신상)을 구하여 내지 못하고 자기들(벨과 느보를 주신으로 섬기던 신바벨론의 권력자들과 백성들)도 (아리안족인 메대와 바사의 군사들에게) 잡혀 갔느니라. 3. (벧엘에서 서원하고 여호와를 하나님으로 섬긴, 창28:13-22, 35:9-15)야곱의 집이여, 이스라엘 집에 남은 모든 자여(바벨론으로 끌려온 선민들이여), 내게(여호와의 말씀을 전달하는 선지자의 말을) 들을지어다! 배에서 태어남으로부터 내게 안겼고 태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업힌 너희여(야곱의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을 자신의 거룩한 백성으로 삼고 돌보신다는 것임, 출19:4-6), 4. 너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리하겠고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너희를 품을 것이라! 내가 지었은즉 내가 업을 것이요 내가 품고 구하여 내리라!(비록 제사장나라 거룩한 백성의 길을 버리고 제멋대로 살아갔기에 선민의 나라가 망하고 유민이 되겠지만 여전히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아버지 하나님께서 기다리고 계신다는 것임, 눅15:15-20) 5. 너희가 나를 누구에게 비기며 누구와 짝하며 누구와 비교하여 서로 같다 하겠느냐?(출20:1-8, 유일한 창조주이시며 역사의 주권자이시고 영생의 구원주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제멋대로 이방신이나 우상과 같다고 폄하하지 말라는 것임) 6. 사람들이 주머니에서 금을 쏟아 내며 은을 저울에 달아 도금장이에게 주고 그것으로 신을 만들게 하고 그것에게 엎드려 경배하며(돈을 들여 신상을 만들고 사람들이 그것을 신으로 잘못 알고 섬기고 있으니), 7. 그것을 들어 어깨에 메어다가 그의 처소에 두면 그것이 서 있고 거기에서 능히 움직이지 못하며 그에게 부르짖어도 능히 응답하지 못하며 고난에서 구하여 내지도 못하느니라!(사람이 만든 신상은 혼자서 바로 서 있지도 못하는 무능력자이니 결코 구원주가 될 수 없다는 것임) 8. 너희 패역한 자들아(아버지 하나님에게 패륜하고 창조주 여호와께서 반역하여 나라가 망하고 이방인에게 포로 되어 있는 너희 선민들은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장부가 되라!(창조주 앞에 똑바로 서서 여호와신앙인으로 살아가라는 것임, 욥38:3, 40:7, 창17:1) 이 일을(선민을 구원하고자 강력한 세상제국 바벨론을 쳐부순 여호와의 역사섭리를 말함) 마음에 두라!(명심하라는 것임). 9. 너희는 옛적 일을 기억하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같은 이가 없느니라!(출애굽 당시에 이미 선언한 것처럼 나 여호와는 유일한 창조주이며 모든 인간의 역사를 섭리하고 영생의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패권국의 위세나 그들이 섬기는 우상에게 굴복하지 말라는 것임, 출12:12, 19:4-6) 10. 내가 시초부터 종말을 알리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뜻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이 세상의 처음부터 종말까지의 역사를 섭리하며 먼저 예언을 주고 그대로 실현하시는 두려우신 창조주 여호와의 전능하심을 깨닫고 이제는 그 앞에서 여호와신앙인으로 올바로 살아가라는 것임, 창15:1, 17:1, 22:12-14, 롬11:33-36) 11. 내가 동쪽(신바벨론의 동쪽)에서 사나운 날짐승(아리안족인 메대와 바사의 군대)을 부르며, 먼 나라(천국 하늘나라)에서 나의 뜻을 이룰 사람(성육신하는 독생자 곧 인자 그리스도를 말함, 요1:12-18)을 부를 것이라. 내가 말하였은즉 반드시 이룰 것이요 계획하였은즉 반드시 시행하리라!(요3:13-17, 5:24-30) 12. 마음이 완악하여 공의에서 멀리 떠난 너희여 내게 들으라!(여호와신앙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며 약육강식의 포악한 사회를 만들었던 너희들은 들으라는 것임) 13. 내가 나의 공의를 가깝게 할 것인즉(아버지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을 실천하는 그리스도를 너희에게 스승과 부활의 주님으로 보내줄 것이니, 신30:11-14, 롬10:6-9) 그것이 멀지 아니하나니, 나의 구원이 지체하지 아니할 것이라!(멀지 아니하여 구원주 그리스도가 선민사회에 나타날 것임, 사9:7) 내가 나의 영광인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원을 시온에 베풀리라!(새언약의 시대가 예루살렘에서부터 나타날 것임, 렘31:31-34, 마27:50-54, 28:18-20)“(사46:1-13);

(1) 첫째, 제1절입니다; “1. (a)벨은 엎드러졌고 느보는 구부러졌도다. (b)그들의 우상들은 짐승과 가축에게 실렸으니, (c)너희가 떠메고 다니던 그것들이 피곤한 짐승의 무거운 짐이 되었도다”(사46:1); 하나씩 나누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1) 하나, “1. 벨은 엎드러졌고 느보는 구부러졌도다”(사46:1a); 우상문화의 최후를 이사야가 예언하고 있는 대목입니다. 바벨론의 주신인 벨과 주신의 아들인 느보 신이 모두 여호와 하나님의 징벌을 받아 패망하고 있습니다. 그 모습을 이사야가 엎드러지고 구부러졌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2) 둘, “그들의 우상들은 짐승과 가축에게 실렸으니”(사46:1b); 매년 신년 초에 바벨론 사람들은 ‘아키투 축제’(Akitu Festival)를 벌입니다. 그때 제국의 수호신 벨과 느보의 신상은 맨 앞장을 서게 됩니다. 먼저 사람들이 극진한 예를 갖추어 그 신상들을 신전에서 어깨에 메고 나와 큰 수레에 옮겨 싣습니다. 그러면 그 신상들은 짐승과 가축이 끄는 화려한 수레 높은 보좌에 앉은 자세로 거만하게 가두행진의 앞자리를 차지하는 것입니다. 그때 제국의 영광을 부르짖는 백성들의 환호는 고스란히 벨 신과 느보 신에 대한 열광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했던 그들의 영광이 하루아침에 땅에 떨어지고 맙니다(사14:11-20). 바벨론이 망하게 되자 그들의 신상이 수레에 처박혀서 치워져 버리고 있습니다. 그 광경을 이사야가 여기서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3) 셋, “너희가 떠메고 다니던 그것들이 피곤한 짐승의 무거운 짐이 되었도다”(사46:1c); 평소 신바벨론제국의 제사장들이 신전에서 섬기며 정성스럽게 떠메고 다니던 그것이 벨 신이며 느보 신입니다. 하지만 제국이 망하고 보니 그것들은 그저 무거운 쇳덩어리, 돌덩어리, 나무덩어리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것을 치우느라고 수레를 끄는 짐승들이 피곤할 따름입니다. 사람들에게 영생의 구원을 주지 못하는 신상과 우상들은 결국 무거운 짐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2) 둘째, 제2절입니다; “2. (a)그들(우상을 섬기는 자들)은 구부러졌고, 그들은 일제히 엎드러졌으므로, (b)그 짐(우상)을 구하여 내지 못하고, (c)자기들도 잡혀 갔느니라”(사46:2); 역시 분설(分設, 나누어서 설명함)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하나, “1. 그들(우상을 섬기는 자들)은 구부러졌고, 그들은 일제히 엎드러졌으므로”(사46:2a); 먼저 우상을 섬기는 나라와 백성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특히 지상 마지막 제사장나라를 쳐부순 신바벨론제국은 미구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들의 군대가 순식간에 메대와 연합한 바사 고레스 황제의 군대에 의하여 박살이 나고 맙니다(사13:17-19, 44:28). 수도를 지키며 내치를 담당하고 있던 벨사살 왕이 현장에서 살해당합니다(단5:30). 아라비아의 반란을 잠재우기 위하여 오랜 세월 원정에 나가 있던 나부니더스 황제가 급보를 받고 정예병을 이끌고 회군합니다. 하지만 백전백승의 용맹한 고레스 황제에 의하여 참패당하고 마는 것입니다(사45:1-3). 그 모든 신바벨론 멸망의 시나리오는 이사야의 예언과 동일한 하나님의 역사 섭리입니다(사45:4-5).
2) 둘, “그 짐(우상)을 구하여 내지 못하고”(사46:2b); 원정에 나가 있던 나보니더스 황제가 군대를 이끌고 수도로 되돌아 오려고 합니다. 하지만 바사의 젊은 황제 고레스의 전략을 당해내지 못합니다. 허무하게 참패 당하고 신바벨론제국은 완전히 망하고 맙니다. 그들의 수호신 벨과 느보의 신상을 구해내지 못합니다.
3) 셋, “자기들도 잡혀 갔느니라”(사46:2c); 수호신이라고 하면 나라를 구하고 백성들을 구원해야 합니다. 하지만 사람이 만든 신상이 무슨 힘이 있어서 나라를 구하고 백성을 구원하겠습니까? 창조주 하나님의 진노 앞에 그저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신세일 따름입니다. 뒤늦게 군사를 몰고 달려온 바벨론 마지막 황제 나보니더스가 애를 써보지만 헛수고입니다. 제국을 구하지도 못하고 신상을 되찾지도 못하고 그저 한갓 페르시아제국의 희생양이 되고 말 뿐입니다;

(3) 본문 제3-7절에서 선지자 이사야는 현세적인 이익만을 추구하여 우상을 섬기고 있는 자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생명창조와 영생의 구원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이사야는 동족인 선민들이 도대체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주 되심과 구원주 되심에 대하여 깊은 이해가 없다는 사실에 대하여 통탄하고 있습니다. 그에 따라 본문에서 동족들에게 부르짖고 있습니다; “부디 여호와 하나님을 우상의 하나로 취급하고 있는 불신앙을 청산하십시오. 얄팍한 현세적인 이익을 얻기 위하여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만 합니다. 야곱과 이스라엘 자손, 그리고 장차 이방 땅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게 되는 남은 자를 모두 구원하여 영생에 이르게 하실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기억해야만 합니다”(사46:3-7). 과연 그와 같은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는지 각 구절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4) 첫째, 제3절입니다; “3. (a)야곱의 집이여, 이스라엘 집에 남은 모든 자여, 내게 들을지어다. (b)배에서 태어남으로부터 내게 안겼고, 태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업힌 너희여”(사46:3); 이사야는 선민의 역사를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생명의 창조와 인생의 보살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해주고 있습니다;
1) 하나, “3. 야곱의 집이여, 이스라엘 집에 남은 모든 자여, 내게 들을지어다”(사46:3a); 이삭의 아들 에서와 야곱 가운데 여호와 하나님께서 믿음의 장자이며 약속의 아들로 선택한 자는 쌍둥이 동생인 야곱입니다; 그가 창세기에서 하나님의 대 족장 이스라엘이 되어 세겜 성을 차지하고(창48:22) 12지파를 낳게 됩니다(창49:1-28). 이스라엘의 자손은 출애굽하게 되고 시내 산에서 제사장나라 거룩한 백성으로 선택 받게 됩니다(출19:5-6). 하지만 12지파 선민의 나라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이방인을 구원하는 제사장나라의 삶을 살아가지 못합니다. 그 결과 나라가 망하고 이방 땅에서 유민으로 떠돌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이사야가 예언하고 있는 유대왕국의 미래입니다(사39:5-7). 하지만 여기서는 이방 땅에서 살고 있는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예언을 적고 있습니다. 그 내용이 무엇일까요?
2) 둘, “배에서 태어남으로부터 내게 안겼고, 태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업힌 너희여”(사46:3b); 배에서 태어나는 것과 태에서 나는 것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같은 내용을 단순하게 두 번 반복하여 강조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배에서부터 생명이 생성되는 것을 먼저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그 생명이 모태에서 열 달을 자라 세상에 태어나는 순서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이 해석됩니다; “배에서 생명이 잉태되는 것을 보고서 나는 그것을 기뻐하였다. 그래서 그 생명을 안아서 보호하였다. 나는 너의 생명을 창조하였으며 그것을 사랑하고 보호하는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잊지 말아라. 열 달 동안 모태에서 잘 자라나도록 보호하여 이 세상에 태어날 수 있도록 했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닮아 있는 그 아기의 성장을 바라보면서 나는 기뻐하였다. 그것을 업어서 기른 부모의 마음이 바로 나 여호와의 마음이다”(사46:3b의역).
(5) 둘째, 제4절입니다; “4. (a)너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리하겠고,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너희를 품을 것이라. (b)내가 지었은즉, 내가 업을 것이요, (c)내가 품고 구하여 내리라”(사46:4); 여호와께서 자신이 창조한 사람과 백성을 보호하며 끝까지 구원하실 것임을 이사야가 알기 쉽게 다음과 같이 말해주고 있습니다;

1) 하나, “4. 너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리하겠고,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너희를 품을 것이라”(사46:4a); 하나님의 사랑은 백성들의 유년기에 멈추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이를 먹고 늙어 백발이 될 때까지 많은 관심을 가지고 그 인생을 품어서 보호하신다는 것입니다. 개인적인 인생만 그렇게 보호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민족에 대해서도 끝까지 지키고 보호하신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그 사랑은 영원히 계속될 것입니다.
2) 둘, “내가 지었은즉, 내가 업을 것이요”(사46:4b); 왜 여호와 하나님은 끝까지 야곱의 인생과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보호하시고 지켜 주시고자 하시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하나입니다; 유일하신 그들의 창조주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3) 셋, “내가 품고 구하여 내리라”(사46:4c); 이스라엘 자손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왜곡하여 적용하고 있습니다; 이방인들과 만민을 구원하는 제사장나라가 되라고 했는데 이스라엘 자손들은 선민인 자신들만 구원받고 하나님의 복을 받기 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죄만 용서 구하는 대(大)속죄일 제사를 성전에 드리는데 그치고 있습니다(레16:29-34). 자신들을 괴롭히고 있는 이웃나라와 이방인들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처벌을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만민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뜻은 선민들의 사회에서 발 붙일 곳이 없게 되고 맙니다. 이제 어떻게 하면 될까요? 이사야가 전하고 있는 여호와 하나님의 예언이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품고 구하여 내리라”(사46:4c). 온 세상만민을 창조주 하나님께서 직접 품에 안으시고 반드시 구원해 내겠다는 약속입니다. 구원자 메시아를 보내시고 하나님의 영을 보내어 만민구원의 새 시대를 새 언약으로 반드시 실현하신다는 것입니다(사11:1-12, 렘31:31-34).
(6) 셋째, 제5절입니다; “5. (a)너희가 나를 누구에게 비기며, (b)누구와 짝하며, (c)누구와 비교하여 서로 같다 하겠느냐?”(사46:5); 여호와 하나님을 이방신과 우상에 비교하거나 짝하는 것 자체가 불경입니다;
1) 하나, “5. 너희가 나를 누구에게 비기며”(사46:5a); 여호와 하나님은 유일하신 창조주이십니다. 이 세상의 만물과 만민은 모두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피조물을 가지고 창조주 하나님과 비긴다고 하는 셈법은 애초부터 성립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2) 둘, “누구와 짝하며”(사46:5b);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과 짝이 될 수 있는 신이 이 세상에 있을까요? 가나안 원주민들은 농사의 신 ‘바알’을 주신(主神, 으뜸 신, main god)으로 섬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알의 짝으로서 아름다운 미의 신 ‘아스다롯’ 여신을 나무로 조각하여 그 옆에 세우고 있습니다. 그러한 신들은 인간들의 관념이 빗어낸 신상이며 우상에 불과하기에 그러한 짝짓기가 가능합니다. 그러나 유일하신 창조주 하나님에 대해서는 피조물인 인간들이 감히 육체적인 사상으로 그 짝을 거론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이시며 피조물인 인간의 관념과 시공간을 모두 초월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요4:24).
3) 셋, “누구와 비교하여 서로 같다 하겠느냐?”(사46:5c); 유일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보좌를 침입하게 되면 반역의 무리가 됩니다. 히브리 전승에 따르면 미의 천사장 ‘루시엘’이 자신의 아름다움을 믿고서 자신의 보좌를 하나님만큼 높이려고 하다가 땅으로 추방당하고 맙니다(사14:11-15). 그것이 사탄인 ‘루시퍼’의 탄생배경이라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인류의 타락도 그러합니다.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과 같은 지혜를 얻고자 하다가 그만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고 맙니다(창3:6, 23). 그러므로 창조주 하나님과 비교하여 무엇이 같다고 주장하는 것은 피조물의 패역이며 용서받을 수 없는 불경함이라고 하겠습니다.
(7) 넷째, 제6절입니다; “6. (a)사람들이 주머니에서 금을 쏟아 내며, 은을 저울에 달아 도금장이에게 주고, (b)그것으로 신(神, god)을 만들게 하고, (c)그것에게 엎드려 경배하며”(사46:6); 사람들이 돈을 주고 도금장이에게 화려한 신을 만들게 합니다. 그리고 그 앞에 엎드려 경배하며 자신들의 소원을 이루고자 합니다;
1) 하나, “6. 사람들이 주머니에서 금을 쏟아 내며, 은을 저울에 달아 도금장이에게 주고”(사46:6a); 이사야는 사람들이 이방신과 우상을 만들어내는 과정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쇠나 나무로 신상을 만들지라도 그 겉은 화려하게 장식하고 싶어합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금과 은을 달아서 도금장이에게 주고 있습니다. 금박을 입히고 그 주위에 은박을 입혀서 아주 귀한 신상을 만들어달라고 주문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오늘날 외모를 아름답게 꾸미고자 엄청난 돈을 사용하고 있는 것과 비슷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풍조는 ‘사람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삼상16:7)의 눈 밖에 나고 있는 행위들입니다.
2) 둘, “그것으로 신(神, god)을 만들게 하고”(사46:6b); 사람들이 자신들을 위하여 정성을 들여서 신을 만들고 있습니다. 그것은 ‘소위 사람들이 만든 인조 신과 우상들’(so called man-made gods and idols)입니다. 많은 돈을 들여서 조각하고 금박을 입힌 것들입니다. 그렇게 비싸게 만들어야 그 신상과 우상이 영험이 있으며 자신들의 소원을 들어줄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3) 셋, “그것에게 엎드려 경배하며”(사46:6c); 신상을 세우고 그 앞에 제사 드리며 엎드려서 경배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소원을 들어달라고 빌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 행위가 창조주 하나님을 섬기는 행위와 같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엄청난 착각입니다. 그들이 빌고 있는 것은 자신들의 행복과 성공 그리고 소원성취를 위한 것입니다. 현세적인 복을 받아서 마음껏 누리고자 하는 욕심이 깔려 있습니다. 하지만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는 그러한 얄팍한 소원을 빌어서는 아니 됩니다. 자신의 잘못과 죄에 대하여 먼저 용서 구하며 그 다음에는 이방인들의 구원과 죄사함을 위해서 중보기도하고 속죄의 제사를 드려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제사장나라로 선택된 선민과 성도들의 거룩한 의무입니다(출19:5-6).
(8) 다섯째, 제7절입니다; “7. (a)그것을 들어 어깨에 메어다가 그의 처소에 두면 그것이 서있고 거기에서 능히 움직이지 못하며, (b)그에게 부르짖어도 능히 응답하지 못하며, 고난에서 구하여 내지도 못하느니라”(사46:7); 손발이 없는 무력한 우상들이기에 당연히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소원성취도 구원도 베풀 수가 없습니다;
1) 하나, “7. 그것을 들어 어깨에 메어다가 그의 처소에 두면 그것이 서있고 거기에서 능히 움직이지 못하며”(사46:7a); 이사야가 절묘하게 우상의 무능함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제사장들이 바알 신이나 아스다롯 여신상을 어깨에 메어다 신전에 모셔두게 되면 신상들은 그 자리에 붙박이로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쇠나 돌, 또는 나무로 빗어서 만들어 놓은 조각이 무슨 능력이 있어서 살아 움직이며 손과 발을 놀릴 수가 있을 것입니까? 자기 자신도 꼼짝 못하고 있는데 어떻게 남을 구원해줄 수가 있겠습니까?
2) 둘, “그에게 부르짖어도 능히 응답하지 못하며, 고난에서 구하여 내지도 못하느니라”(사46:7b); 그래서 이사야가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가나안의 바알 신이나 바벨론의 벨 마르둑 신이라고 하더라도 사람들이 만든 신상이며 우상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아무리 신탁을 받고 싶어도 그것들은 입이 없어서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움직일 수도 없으며 손과 발이 없어서 남을 구원해줄 수도 없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신상은 무용지물이며 우상을 섬기는 것은 허망한 결과만을 자초할 따름입니다.
(9) 본문 제8-11절에서 선지자 이사야는 하나님 앞에 떳떳하게 설 수 있는 ‘장부’(壯夫, 늠름한 사나이)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을 깨달아야 하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사야는 본문에서 동족들에게 부디 하나님 앞에 패역(悖逆)한 자로 서지 말고 떳떳하게 장부로 서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사46:8). 그리고 패역한 인생을 살지 않기 위해서는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 사실을 새삼 기억하고 그 은혜를 깨달아야 한다고 본문에서 강조하고 있습니다(사46:9-10). 만약 패역한 삶을 개인적으로나 민족적으로 계속하게 되면 역사적으로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것이며,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다시 구원의 손을 펼치실 것임을 아울러 알려주고 있습니다(사46:11). 그 상세한 내용을 알기 위해서 각 구절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10) 첫째, 제8절입니다; “8. (a)너희 패역한 자들아, 이 일을 기억하고 장부가 되라. (b)이 일을 마음에 두라”(사46:8); 이사야는 패역한 자가 그 마음을 돌리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그들이 하나님을 떠나 있는 그 마음을 돌이킬 수가 있을까요? 그 방법을 본문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훗날 그리스도 예수님의 비유에서 엿볼 수 있듯이 아버지의 품을 떠난 탕자가 세파 가운데 시달리다가 비로소 아버지의 크나큰 사랑과 은혜를 깨닫고 아버지 집으로 되돌아오는 것과 같습니다(눅15:11-32). 먼저 여기서는 이사야가 사용하고 있는 용어의 정의부터 알아보고자 합니다;
1) 하나, “8. 너희 패역한 자들아, 이 일을 기억하고 장부가 되라”(사46:8a); ‘패역’(悖逆)이라고 하는 말은 ‘패륜과 반역’을 합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닮도록 창조되어 있기에 하나님은 사람들의 아버지와 같습니다(창1:26-27). 그러므로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과 그 뜻을 저버린다면 그것은 패륜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창조주이시고 인간은 피조물입니다. 그러므로 피조물인 인간은 자신의 생명과 인생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명심하고서 그 뜻을 따라 성실하게 종의 자세로 살아가야만 합니다. 그런데 그 뜻을 어기고 스스로 자신이 인생의 주인이 되어 하나님 없이 살겠다고 나서는 경우 그것은 반역이 됩니다. 그와 같은 반역의 마음은 주군이신 하나님을 배신하고 자신의 보좌를 창조주의 자리에 두고자 했던 사탄과 같은 것입니다(사14:12-15).
2) 그러므로 ‘패역’이라고 하는 것은 사탄적인 것이므로 처벌과 심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에덴동산에서 발생했던 ‘원죄’의 의미이기도 합니다(창3:6). 패역한 자들의 마음을 돌릴 수 있는 방법을 이사야가 후술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탕자의 비유’를 되돌아보게 해주고 있습니다. 그렇게 회개하고서 아버지의 집으로 되돌아오는 자를 대장부로 세워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참고로, ‘장부’(壯夫, 늠름한 사내)라고 하는 그 용어는 회개하는 욥을 올바른 신앙인으로 똑바로 세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설명할 때에 다음과 같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 앞에 똑바로 서라)”(욥38:3, 40:7). 그와 같은 의미에서 바라보게 되면, ‘패역’한 인간은 하나님 앞에 제대로 서지 못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을 외면하고 있는 고약한 자입니다. 끝까지 회개하지 아니하게 되면 낭패를 당하는 자입니다.
3) 둘, “이 일을 마음에 두라”(사46:8b); 패역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인간의 마음을 돌리기 위하여 이사야가 하나님이 누구이신가를 이제부터 설명하고자 합니다. 반드시 사람들이 생각해야 하며 또한 그 마음속에 명심해야만 하는 여호와 하나님에 관한 일은 무엇일까요?
(11) 둘째, 제9절입니다; “9. (a)너희는 옛적 일을 기억하라. 나는 (창조주)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b)나는 (구원주) 하나님이라. 나 같은 이가 없느니라”(사46:9); 이사야는 무엇보다도 여호와 하나님의 정체성을 정확하게 아는 것이 올바른 믿음을 가질 수 있는 방법이라고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1) 하나, “9. 너희는 옛적 일을 기억하라. 나는 (창조주)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사46:9a); 이사야가 말하고 있는 옛적 일과 창조의 일을 쉽게 말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훗날 메시아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세례 요한이 백성들에게 소개할 때에 다음과 같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15.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언하여 외쳐 이르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요1:15). 그리스도는 피조물보다 먼저 존재하신 창조주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말입니다.
2) 그 의미를 사도 요한이 다음과 같이 명확히 말해주고 있습니다;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1:3-4).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시고 생명을 주셨다는 사실을 사도 요한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 창조에 관계하신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정확하게 증거해주시고 있으니 그것이 진리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말을 진리로 알아듣고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자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생명의 창조주 앞에 정확하게 나아가는 인생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자는 패역의 길을 버리게 될 것입니다. 참고로,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옮겨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5:24).
3) 둘, “나는 (구원주) 하나님이라. 나 같은 이가 없느니라”(사46:9b); 패역한 자는 심판의 대상입니다. 그 심판의 대상을 구원하자면 어떻게 해야만 하는 것일까요? 창조주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도록 만들어야만 합니다; 누가 그 일을 행할 수가 있을까요? 여호와 하나님이시라고 이사야가 증거해주고 있습니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패역한 자의 마음을 돌릴 수가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사람들의 마음을 회개하는 마음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일까요? 여호와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비책이 바로 그리스도이십니다.
4) 훗날 오순절 날 성령님께서 강림하시고 베드로를 통하여 그 역사를 일부 보여주고 있습니다; “36.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37.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38.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39.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40.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이르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41.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행2:36-41).
(12) 셋째, 제10절입니다; “10. (a)내가 시초부터 종말을 알리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b)나의 뜻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사46:10); 생명을 창조하시는 하나님은 목적이 있음을 이사야가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 목적을 미리 계시해주고 그 말씀 그대로 개인의 인생과 인류의 역사를 이끌어 가신다고 이사야가 증거하고 있습니다. 각 구절을 살펴봅니다;

1) 하나, “10. 내가 시초부터 종말을 알리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사46:10a); 먼저 영이신 하나님과 육체를 가진 인간은 근본적으로 살고 있는 그 차원이 다릅니다; 피조물인 인간은 시공간에 갇혀서 살고 있습니다. 따라서 공간적인 3차원에 시간의 차원을 더하여 4차원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이신 하나님은 그 차원을 초월하고 있는 존재이십니다(요4:24). 따라서 시간의 축을 뛰어넘어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동시에 통찰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통시적인 통찰력을 가지시고 언제나 현재를 살고 있는 인간과 교통하시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만나거나 예언의 말씀을 대할 때에 사람은 겸손해야 합니다. 미래까지 이미 아시고 말씀하시는 것이므로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명심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2) 영이신 하나님께서 시간의 축을 그렇게 뛰어넘어 버리시니 그 앞에서 공간적인 개념을 가지고 칸막이를 한다고 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선민과 이방인이라는 칸막이도 타당하지 않습니다. 자국민과 외국인이라고 하는 구별도 별로 의미가 없습니다. 만민구원과 만물구원이라고 하는 개념만이 의미를 가질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주이시며 영이십니다. 따라서 인간이 살고 있는 모든 공간을 빨아들이고 다시 펼쳐놓을 수 있습니다. 그것을 이름하여 ‘새 하늘과 새 땅의 창조’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입니다(사65:17). 그 개념은 요한계시록에서도 그대로 사용되고 있습니다(계21:1).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생명을 창조하시고 사람을 지으실 때에 그 미래를 바라보시고 인생의 목적을 부여하시고 있습니다. 그것이 그 사람에게 주어지는 사명입니다.
3) 구체적으로, 선지자를 통하여 그 사명을 감당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또 하나님말씀의 기록을 보게 함으로써 그 사명을 깨닫도록 하십니다(눅24:44-45). 훗날에는 메시아를 이 땅에 보내셔서 그 사명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눈으로 보여주십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이 자신의 공생애와 십자가 죽음 그리고 부활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맡기신 메시아로서의 사명을 실천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교훈과 그 일생을 묵상해보면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야만 하는지 그 사명과 인생의 목적을 올바로 깨달을 수가 있게 됩니다. 그와 같은 의미에서 본문의 말씀은 쉽게 이해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미리 예언을 주시는 이유는 그 말씀 가운데 자신들의 인생의 목적과 사명을 깨닫고 실천의 삶을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그대로 이루어지는 미래를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인생과 역사를 섭리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사야의 비근한 설명이 다음과 같습니다; “12. 야곱아, 내가 부른 이스라엘아, 내게 들으라. 나는 그니 나는 처음이요 또 나는 마지막이라”(사48:12).
4) 둘, “나의 뜻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사46:10b); 하나님의 뜻은 틀림없이 성취가 됩니다. 창조주이시며 역사의 섭리자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생명을 살리고 돌보시는 것입니다(막3:4). 그것이 선한 뜻입니다. 그리고 그 선한 뜻을 성취하기 위하여 성도들이 자신의 희생을 감수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지켜 보시며 언제나 기뻐하십니다(롬12:1-2). 물론 메시아가 그 일을 먼저 행하실 것입니다. 칭찬받을 수 있는 선한 목자(요10:10-11) 곧 종의 모범을 먼저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반대로, 생명을 죽이고 해치고자 하는 악한 뜻은 이루어지지 못합니다. 악한 세력들이 음모를 꾸미고 그 일을 행할지라도 결국은 스스로 함정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세상의 지혜가 하나님의 창조의 지혜를 당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성문서 에스더의 ‘부림절’ 기록이 그 사실을 증명하고 있습니다(에9:1-19).
(13) 넷째, 제11절입니다; “11. (a)내가 동쪽에서 사나운 날짐승을 부르며, (b)먼 나라(바사와 하늘)에서 나의 뜻을 이룰 사람을 부를 것이라. (c)내가 말(의사결정과 공포)하였은즉, 반드시 이룰 것이요, (실시사항을) 계획하였은즉, 반드시 시행하리라”(사46:11);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이 세상에서 어떠한 힘을 동원하시며 어떠한 영향력을 행사하실까요? 징계하고자 하실 때에 동원하시는 힘과 구원하고자 하실 때에 사용하시는 사람이 다를 것입니다. 그 점에 관하여 이사야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1) 하나, “11. 내가 동쪽에서 사나운 날짐승을 부르며”(사46:11a); 선민들이 진심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고 있지 않습니다; 막상 죽을 운명이 되면 그때 가서야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신위적인 능력으로 앗수르의 말발굽에서부터 유대왕국도 구해주시고 히스기야 왕의 죽을 운명도 다시 사는 운명으로 바꾸어 주었지만(사37:35-38, 38:1-8) 그 결과가 대 실망입니다(사39:4-8, 왕하21:1-15). 선민들은 제사장나라다운 구석이 전혀 없습니다. 제사장들은 선민들의 허물과 죄를 속죄하기 위하여 제사를 드릴 뿐입니다. 온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이방인들의 죄를 속죄하는 제사를 도무지 드리지 않고 있습니다(출19:6).
2)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도 자신들이 독식하고 맙니다(욘1:1-2). 이방인들은 여전히 하나님의 진노와 멸망의 대상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마5:43). 유대왕국의 백성들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창조주이시며 모든 피조물을 자식과 같이 사랑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아니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결정은 그들을 처벌하고 훗날 고쳐서 다시 사용하는 것입니다. 먼저 역사적인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동방에서 사나운 날짐승과 같은 세력이 몰려오도록 역사를 섭리하실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신바벨론제국의 느부갓네살 황제의 군대를 동원하시는 것입니다(왕하25:1-7).
3) 둘, “먼 나라(바사와 하늘)에서 나의 뜻을 이룰 사람을 부를 것이라”(사46:11b); 바벨론 땅에서 노예와 같은 삶을 살게 되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속히 임하고 있습니다. 바사의 고레스 왕을 일으켜서 마침내 신바베론제국을 정복하게 하실 것입니다(사44:28). 같은 맥락에서 먼 곳 하늘에서부터 온 세상의 구원자 메시아가 이 땅에 오시게 됩니다(요3:13-17). 요컨대, 사람을 불러서 역사적인 구원을 성취하시고 메시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온 인류와 온 세상의 구원을 실현시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4) 셋, “내가 말(의사결정과 공포)하였은즉, 반드시 이룰 것이요, (실시사항을) 계획하였은즉, 반드시 시행하리라”(사46:11c); 하나님의 말씀은 땅에 그냥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사55:11). 마치 생명력이 있는 씨앗과 같아서 싹이 트고 자라서 열매를 맺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은 이미 창조주께서 결정하신 사항을 공포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따라서 시간이 지나면 열매를 맺고 성취되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알고서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이 성취되는 과정을 추적해보면 세부계획이 구체적으로 다시 선포되고 그것이 면밀하게 시행되고 있는 현장을 찾을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구체적인 증거를 많이 포착하게 되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는 마음이 더욱 깊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일종의 믿음의 성숙이라고 하겠습니다.
(14) 본문 제12-13절에서 선지자 이사야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공의를 실천하기가 어째서 그토록 힘이 드는가?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하나님의 방법은 무엇인가?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이사야는 사람들의 마음이 ‘완악’(頑惡, 완고하고 악함)하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을 실천하기가 그토록 힘이 든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사46:12). 근본적으로, 사람들의 마음이 세상살이를 하면서 그렇게 완악해질 수밖에 없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렇다면 구원을 베풀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을 실천할 수 있도록 역사 가운데 어떠한 조치를 취하고 계시는 것일까요? 그 점에 관하여 이사야는 본문에서 어떠한 예언을 해주고 있는 것일까요?(사46:13) 이제부터 본문 2구절의 말씀을 분석하면서 위와 같은 질문에 대한 해답을 묵상을 통하여 다음과 같이 도출해보고자 합니다;
(15) 첫째, 제12절입니다; “12. (a)마음이 완악하여 공의에서 멀리 떠난 너희여, (b)내게 들으라”(사46:12); 일찍이 모세가 출애굽기와 신명기에서 말해주고 있는 내용을 가지고 그 의미를 풀이해보고자 합니다; 하나, “12. 마음이 완악하여 공의에서 멀리 떠난 너희여”(사46:12a); ‘완악’(頑惡, 완고하고 악함, to harden, or to be hardened, NIV & KJV)이라고 하는 용어는 모세가 출애굽기의 기록에서 처음으로 자주 사용하고 있습니다. 당시 애굽의 바로의 마음가짐이 그러하다고 표현할 때에 무려 14차례나 사용하고 있습니다(출4:21, 7:3, 13, 22, 8:19, etc.). 그리고 ‘출14:17’ 절에서는 애굽 사람들의 마음도 바로의 마음과 같이 완악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다음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1) 모세는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이나 애굽 사람의 마음을 완악하게 만드셨기 때문에 그들의 마음이 완악하게 되었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마음이 완악하게 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환경 가운데 그리고 환경에서 영향을 받고 있는 그 심성 가운데 이미 태생적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 의미가 과연 무엇일까요? 역시 모세가 기록하고 있는 창세기 제13장의 내용을 살펴보면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①벧엘과 아이 지역에서 아브람과 그의 장조카 롯이 각각 목축하고 있습니다. 풀이 부족하여 자주 다툼이 발생합니다(창13:7). 따라서 아브람의 권유로 롯이 거처를 소돔성으로 옮기고 있습니다(창13:12). ②하나님은 홀로 남은 아브람에게 그가 볼 수 있는 모든 땅을 자손들에게 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창13:15). 그리고 그가 걸을 수 있는 만큼 당대에 땅을 주겠다고 약속하시고 있습니다(창13:17).
2) 그것은 겉으로 보면, 엄청난 축복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것이 아닙니다. 한없이 불편하고 제약성을 지니고 있는 인간의 사고와 삶의 한계를 뚜렷이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①인간은 먹고 살기 위하여 땅을 차지하고자 서로 갈등과 경쟁관계에 있습니다. ②사람의 세계관이 고작 보이는 세계에 국한되고 있습니다. ③그나마 인간이 직접 관리할 수 있는 영역이란 자신이 걸어 다닐 수 있는 정도에 불과합니다. 그와 같이 인간은 태생적으로 생존경쟁이 치열한 사회에서 세계관과 관리영역의 제한을 받고서 살아가고 있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입장에서 어떻게 감히 창조주의 광대한 공의의 정신을 실천할 수가 있겠습니까? 구체적으로, ①모든 인류를 내 몸과 같이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②인간의 힘으로는 세상만민이 함께 먹고 살 수 있는 세상을 도저히 만들어낼 수가 없습니다. ③서로가 영역싸움과 먹고 살기 위한 소유권과 지배권싸움에 뛰어 들어 있는데 어떻게 일방적으로 창조주의 생각대로 공의의 정신을 실천한다고 하여 남들을 살리기 위하여 먼저 자신을 포기하고 희생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와 같은 입장에서 애굽의 황제인 바로가 일방적으로 히브리인을 노예신분에서 해방하여 출애굽을 시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3) 바로가 처한 환경을 그렇게 만들어 놓으시고 하나님께서 공의의 정신을 실천하지 아니했다고 바로와 애굽 사람들을 일방적으로 처벌하시는 것은 설득력이 약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모세의 표현이 교묘하게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으므로 그가 하나님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고 그 마음이 완악하였더라”고 나타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을 받아들이고 실천하기 위해서는 사람이 살고 있는 환경을 변화시킬 수 있는 하나님의 특단의 조치가 필요합니다. 서로가 서로를 돌보고 생명을 살려주고 함께 충분히 살아갈 수 있는 여건이 형성되어야 합니다. 동시에 이기적인 욕심을 버리고 함께 살기 위하여 자신의 희생과 헌신을 무릅쓸 수 있는 새로운 기풍이 조성되어야만 합니다. 그 모든 일의 시작을 메시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하실 것입니다. 그것이 이사야의 예언의 핵심입니다. 그 이유는 인간의 힘과 능력으로는 여건상 할 수 없는 것이므로 하나님께서 손수 시행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새로운 시대의 창조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사11:1-9, 19:22-25).
4) 둘, “내게 들으라”(사46:12b); 신명기 제6장에서 모세는 “4.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5.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6:4-5)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피조물인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창조주의 말씀을 들으라고 명령하시는 그것이 이름하여 ‘쉐마’(שְׁמַ֖ע)입니다. 인간이 처한 환경과 제약성이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설정된 것이므로 그것을 풀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말씀을 들어야만 하는 것일까요? 만민구원과 세상구원이 가능한 하나님의 비책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을 피조물인 인간이 어떠한 방식으로 실천할 수가 있게 되는 것일까요? 그 해답의 실마리가 놀랍게도 마지막 구절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16) 둘째, 제13절입니다; “13. (a)내가 나의 공의를 가깝게 할 것인즉, 그것이 멀지 아니하나니, (b)나의 구원이 지체하지 아니할 것이라. (c)내가 나의 영광인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원을 시온에 베풀리라”(사46:13); 하나님께서 자신의 공의를 실천하는 자를 사람들 가까이 보내어 주겠다는 예언의 말씀입니다. 어떤 방법으로 어디에 보내어 주시는지 이사야가 상징적인 수법으로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에게 모범을 보여주는 자가 되어 여호와 하나님의 공의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요? 본문을 분석하면서 한번 따져보아야 할 사항들입니다;
1) 하나, “13. 내가 나의 공의를 가깝게 할 것인즉, 그것이 멀지 아니하나니”(사46:13a); 하나님께서 창조주의 영광을 지니고 직접 인간 가까이 오시게 되면 그 진면목을 보게 되는 사람은 전부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출33:20).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주지 아니하도록 가장 비슷하고도 친근한 모습으로 이 세상에 들어오십니다; 모세는 창세기 제18장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사람의 모습으로 헤브론에 살고 있는 아브라함의 장막 앞에 나타나셨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창18:1-2). 그것은 ‘하나님의 현신’(theophany)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짧은 시간 인간 앞에 나타나서는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을 충분히 보여주고 또한 깨닫게 해줄 수가 없습니다. 그 일이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2)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구원자 메시아를 이 땅에 사람으로 태어나게 하십니다(사7:14, 9:6, 11:1-9, 요1:14-18). 아기로 태어나서 평생을 사람들과 똑같이 자라나고 함께 살아가도록 하십니다. 그리고 공생애를 통하여 메시아가 아버지 하나님과 동행하는 인생을 살아감으로써 제자들과 함께 창조주의 공의의 정신을 직접 실천하게 됩니다. 그렇게 인류의 역사 가운데 있을 수 없는 일이 처음으로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제약성을 똑같이 지니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능력을 얻어서 공의의 정신을 자기 희생으로 실천하고 있는 자가 메시아 곧 그리스도 예수입니다.
3)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비밀병기에 해당합니다. 그와 같은 하나님의 방법은 복음서를 참조하면 성공적입니다. 이제는 그리스도의 모범을 쫓아서 살아가는 그의 제자인 성도들이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을 성령님의 내주 역사하심이라는 강력한 영적인 도우심을 받아 그리스도의 천국복음으로 온세상에 전파하면서 만민구원에 나서고 있기 때문입니다(마28:18-20, 행1:8). 하나님의 비책이 장차 새로운 시대를 열 것입니다. 그것이 신약의 시대이며 복음의 시대입니다. 이사야는 그와 같은 놀라운 시대가 가까이 오고 있다고 기쁜 마음으로 본문에서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사46:13a).
4) 둘, “나의 구원이 지체하지 아니할 것이라”(사46:13b); 선지자 이사야가 위와 같은 예언의 말씀을 동족들에게 전하고 있던 때는 주전 700년을 전후한 시대입니다. 그는 700년 정도가 지나면 메시아가 만민구원의 사명을 가지고 이 세상에 오신다는 사실을 예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무려 700년이나 후의 일에 대하여 그는 “나(여호와)의 구원이 지체하지 아니할 것이라”(사46:13b)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물리적으로 700년의 시간적인 간격이 분명히 존재하고 있는데 어떻게 지체하지 아니할 정도로 빠른 조치라고 예언할 수 있는 것일까요? 어폐(語弊, 말의 폐단)가 있는 표현이 아닐까요?
5)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후회하여 홍수심판을 일으키십니다(창6:5-7). 그때가 노아 600년인 주전 2,458년경입니다(창7:11). 이듬해 홍수가 끝나고 땅이 마르자 방주에서 나온 노아 가족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립니다(창8:20-22). 그때 하나님께서 맹세하십니다. 다시는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지 아니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스스로 자신을 규제하는 ‘무지개 언약’을 세우십니다(창9:11-17). 그것은 일종의 구원의 언약입니다. 그때가 주전 2,457년경입니다. 그때부터 인간을 심판이 아니라 죄에서 구원하시려는 여호와 하나님의 새로운 구원의 계획이 성립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6) 이제 이사야의 시대까지 1,700년 이상의 준비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이사야의 입을 통하여 거의 준비가 끝나고 있다고 발표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아직 그 기간을 구체적으로 언급할 수는 없지만 메시아가 오시는 시대가 거의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사야는 사람들이 자신들이 살고 있는 시대가 영원히 지속될 것으로 판단하고 있지만 결코 그렇지 아니하다는 사실을 말해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완악한 환경을 설정하셨기에 어쩔 수 없이 사람들이 완악하게 저부터 살고자 궁리하고 있지만 그 핑계와 변명이 더 이상 통하지 아니하게 되는 시대가 바야흐로 지체하지 아니하고 도래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공의의 원칙을 실행하는 만민구원의 프로그램이 이제 작동을 앞두고 있다는 엄숙한 선언이라고 하겠습니다.
7) 셋, “내가 나의 영광인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원을 시온에 베풀리라”(사46:13c); 메시아가 어디에 오시는 것일까요? 이사야는 일찍이 이새의 줄기에서 태어나신다고 예언하고 있습니다(사11:1). 그 예언은 미가 선지자의 예언과 맥을 같이하고 있습니다; “2.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미5:2). 그런데 메시아의 경우에는 태생지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사실은 자신의 일생을 통하여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으로 만민구원을 실천하고자 자기를 희생의 제물로 바친 그 장소가 중요합니다.
8) 그리고 하나님께서 무덤에서 그를 살리시고 승천시킨 그 장소가 중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구원의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훗날 성경은 그 부활의 장소가 예루살렘이며(마27:33, 60, 28:1, 7) 승천의 장소가 예루살렘 동쪽 5리(五里) 길에 있는 베다니라고(눅24:50, 요11:18)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사실을 여기서 이사야는 “내가 나의 영광인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원을 시온에 베풀리라”(사46:13c)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과 그들의 도성인 예루살렘 곧 시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 뜻은 자나깨나 선지자 이사야의 머리와 가슴속에는 그의 동족에 대한 사랑과 구원의 소원이 떠나지 아니하고 자리잡고 있다는 의미입니다(사6:11, 롬10:1).
둘째로, “1. 처녀 딸 바벨론이여, 내려와서 티끌에 앉으라!(천사장 루시엘이 창조주 여호와를 대적하다가 땅으로 추방된 것을 기억하라는 것임, 사14:12-15). 딸 갈대아여, 보좌가 없어졌으니 땅에 앉으라!(갈대아왕조 신바벨론제국이 여호와의 역사섭리로 패망할 것임을 예언하고 있음, 사14:4-11) . 네가 다시는 곱고 아리땁다 일컬음을 받지 못할 것임이라!(세상제국 신바벨론이 다시는 왕조를 이루지 못할 것임을 예언하고 있음, 사14:16-20). 2. 맷돌을 가지고 가루를 갈고 너울을 벗으며 치마를 걷어 다리를 드러내고 강을 건너라!(세상제국이 여호와의 역사섭리로 멸망 당할 것이니 속히 피난하라는 것임). 3. 네 속살이 드러나고 네 부끄러운 것이 보일 것이라!(제국의 영광이 아니라 비참한 패전국의 수치가 역사적으로 도래한다는 것임. 그 이유는 제국이라고 하지만 그 내부에는 분열과 갈등 그리고 부패와 죄악이 가득하기 때문임, 출20:26). 내가 보복하되 사람을 아끼지 아니하리라!(여호와의 역사심판이 참으로 두려운 것임, 창19:24-25, 출32:10) 4. 우리의 구원자는 그의 이름이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시니라(역사심판과 종말심판 가운데 유일한 구원자는 창조주 여호와 뿐이심, 창17:1, 출19:4-6). 5. 딸 갈대아여(아람의 한 갈래인 갈대아왕조 신바벨론제국을 말함) 잠잠히 앉으라. (여호와를 대적하고 있는 루시퍼와 함께) 흑암으로 들어가라(사14:15, 계16:19). 네가 다시는 여러 왕국의 여주인(계17:1-5, 말세에 득세하는 주술과 계략의 여왕 음녀 바벨론을 말함, 사47:9, 12-13)이라 일컬음을 받지 못하리라! 6. 전에 내가 내 백성에게 노하여 내 기업을 욕되게 하여(왕하21:9, 패역한 유대왕국을 멸망하기로 작심하고), 그들을 네 손에 넘겨 주었거늘(신바벨론 갈대아 군대에게 패망하도록 결정하였다는 것임, 왕하21:14), 네가 그들을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고(전쟁포로로 끌고가서), 늙은이에게 네 멍에를 심히 무겁게 메우며(노예로 삼았다는 것임), 7. 말하기를 내가 영영히 여주인이 되리라 하고(사치와 향락을 즐기는 음녀 바벨론의 영원한 종이 되도록 하고),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지도 아니하며, 그들의 종말도 생각하지 아니하였도다(그러나 창조주 여호와가 구원주 그리스도를 보내어 ‘거지 나사로와 부자와의 비유’가 발생하도록 역사를 섭리하신다는 것임, 눅16:19-31)“(사47:1-7);

(1) 본문 제1-4절에서 선지자 이사야는 미(美)의 천사장 루시엘이 타락하여 사탄 루시퍼가 된 것처럼 처녀 딸 바벨론과 딸 갈대아가 그러하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사야는 바벨론에 대하여 ‘처녀 딸’이라고 하는 순결한 이미지와 곱고 아리땁다는 ‘미’(美)의 이미지를 부여하고 있습니다(사47:1ac). 그리고 신바벨론의 갈대아왕조에 대해서는 ‘보좌’를 가진 ‘딸’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사47:1b). 그것은 다분히 갈대아왕조의 신바벨론제국을 미(美)의 천사장 ‘루시엘’과 비교하고자 하는 의도로 보입니다. 벌써 이사야는 제7장에서 메시아의 처녀 탄생에 대하여 예언하고 있습니다(사7:14). 그리고 제14장에서는 천사장 루시엘이 타락하여 루시퍼 곧 사탄이 되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습니다(사14:11-15). 이어서 루시퍼의 세력이 역사 가운데 바벨론이라고 하는 제국으로 등장하고 있음을 강력하게 암시해주고 있습니다(사14:4, 16-20). 참고로, 이사야의 예언이 사실이라고 훗날 사도 요한이 그의 계시록 제17장에서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맥락에서 본문의 각 구절을 하나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2) 첫째, 제1절입니다; “1. (a)처녀 딸 바벨론이여, 내려와서 티끌에 앉으라. (b)딸 갈대아여, 보좌가 없어졌으니 땅에 앉으라. (c)네가 다시는 곱고 아리땁다 일컬음을 받지 못할 것이라”(사47:1); 신바벨론제국과 그 왕조가 역사적으로 멸망 당할 것임을 이사야가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 옛날 천사장 루시엘의 타락 및 추락과 맥을 같이하고 있는 것입니다;
1) 하나, “1. 처녀 딸 바벨론이여, 내려와서 티끌에 앉으라”(사47:1a); 여호와 하나님이 이사야를 통하여 바벨론을 ‘처녀 딸’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은 굉장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①‘처녀’라고 하는 것은 순결하다는 의미입니다. 이사야는 그 의미를 사용하여 이미 메시아를 잉태하게 되는 여인을 ‘순결한 처녀’(사7:14)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②‘딸’이라고 하는 것은 사랑스러운 여인이라는 의미입니다. 그것은 천상에서 미(美)의 천사장 ‘루시엘’에게 어울리는 칭호입니다(사47:1c). 그토록 순결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던 루시엘이 그만 교만하여 창조주 하나님을 무시합니다. 자신의 보좌를 창조주 하나님만큼 높이고자 합니다(사14:13-14). ③그 때문에 천상에서 지상으로 내어 쫓기게 됩니다(사14:15). 그와 같은 전철을 세상나라 신바벨론제국이 밟게 될 것이라는 이사야의 예언입니다(사14:4, 12, 16-19, 47:1a).
2) 둘, “딸 갈대아여, 보좌가 없어졌으니 땅에 앉으라”(사47:1b); 본문 제1절에서 ‘바벨론’으로 지칭하고 있는 나라가 사실은 ‘갈대아’ 왕조의 신바벨론제국임을 여기서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사야는 갈대아 앞에 ‘딸’이라고 하는 사랑스러운 자녀의 신분을 붙여주고 있습니다; 흔히들 훗날 지상에 남은 마지막 선민의 나라 다윗왕조의 유대왕국을 멸망시키게 되는 갈대아왕조의 신바벨론제국을 ‘사탄의 나라’로 보고 있습니다(계17:5-6). 하지만 이사야는 그 처음 신분이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딸이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사47:1b, 엡2:2). 따라서 바벨론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온다면 하나님자녀의 신분을 회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사19:22, 롬11:24). 그와 같은 복음적인 관념이 이미 들어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갈대아왕조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교만하게도 창조주를 무시하고 루시엘의 전철을 밟고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땅에서 사탄의 하수인이 되어 선민의 나라를 멸망시키는데 동원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계18:3, 20:8-9).
3) 셋, “네가 다시는 곱고 아리땁다 일컬음을 받지 못할 것이라”(사47:1c); 하나님 보시기에 곱고 아리따운 존재는 누구일까요? 외모가 아니라 사람의 중심을 보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삼상16:7). 그러므로 당연히 창조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자입니다. 예를 들면, 메시아의 어머니로 택함을 받고 있는 마리아가 그러합니다; “37.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 38.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눅1:37-38). 그런데 갈대아왕조의 신바벨론제국은 그 반대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무시하고 제 고집대로 자신의 이익만을 도모하기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선민의 나라 다윗왕조 유대왕국을 함부로 정복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노예로 삼게 되는 것입니다.
(3) 둘째, 제2절입니다; “2. (a)맷돌을 가지고 가루를 갈고, (b)너울을 벗으며, 치마를 걷어, (c)다리를 드러내고 강을 건너라”(사47:2); 하나님 아버지를 버리고 이 땅에서 이기적으로 살아가고 있는 자들이 겪게 되는 육체적인 어려움과 영적인 타락상에 대하여 이사야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1) 하나, “2. 맷돌을 가지고 가루를 갈고”(사47:2a); 곡식을 맷돌에 갈아서 가루를 내는 경우는 두가지입니다; 하나는, 쌀가루나 밀가루를 만들어서 별미로 떡이나 국수를 만들고자 하는 경우입니다. 또 하나는, 밥을 지어서는 온 식구가 먹을 양식이 부족합니다. 따라서 가루로 만들어 죽을 쑤어서 많은 식구들이 기아를 면하고자 하는 경우입니다. 여기서는 전자의 의미가 아니고 후자의 의미입니다.
2) 그것은 예수님의 비유처럼 아버지의 품을 떠난 탕자가 생존을 위하여 돼지먹이 쥐엄 열매를 먹고서라도 배를 채우고자 하는 비참한 형편과 같습니다(눅15:16). 하나님을 무시하고 땅으로 내어 쫓김을 당한 악한 존재들입니다. 그들이 창조주 하나님의 도우심을 외면하고 이 땅에서 살아가고 있으므로 땅이 결코 그들에게 우호적이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죄를 범하고 에덴동산 밖으로 쫓겨나게 되는 아담부부의 경우가 그러합니다; “17.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창3:17b). 한마디로,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고 있는 것입니다.
3) 둘, “너울을 벗으며, 치마를 걷어”(사47:2b); 중동지역에서 너울은 시집가는 신부가 쓰는 것입니다. 신랑이 그 너울을 벗겨주면 함께 평생 살게 됩니다. 서로가 정조를 지켜야 합니다. 그것이 행복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성적인 타락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남편을 무시하고 함부로 떠나서 그 아내가 다른 남자 앞에서 치마를 걷어 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4) 셋, “다리를 드러내고 강을 건너라”(사47:2c); 돌아오지 못하는 강을 그만 건너가버리고 있습니다. 마치 한국의 고전민요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의 내용을 다른 측면에서 보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님이여, 그 강을 건너지 마오. 님이여, 그 강을 건너지 마오. 마침내 그 강을 건너다 떨어져 죽고 마시네. 장래 내 님을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본문에서는 약간 다릅니다. 죽음이 아니면 갈라놓을 수 없는 부부관계를 타락한 여자가 스스로 갈라놓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에 따라 음녀 바벨론의 행위는 비난 거리입니다. 그 성적인 타락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탐욕과 쾌락추구 향락적인 부끄러운 모습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점을 선지자 이사야가 다음 구절에서 설명하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4) 셋째, 제3절입니다; “3. (a)네 속살이 드러나고 네 부끄러운 것이 보일 것이라. (b)내가 보복하되, 사람을 아끼지 아니하리라”(사47:3); 바벨론의 영적인 정체성이 드러날 때에 사람들은 자신들의 태도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계속 세상제국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창조주 하나님을 따를 것인가? 선택을 잘못한 경우에는 용서함이 없을 것이라고 이사야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1) 하나, “3. 네 속살이 드러나고 네 부끄러운 것이 보일 것이라”(사47:3a); 창세기를 보면, 아담과 하와의 가정에서 카인과 아벨이 탄생합니다; 두 아들이 장성하여 각자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지만 동생 아벨의 제사는 받아들여지고 형 카인의 제사는 퇴짜를 맞게 됩니다. 형이 동생을 시기하여 죽이려고 합니다. 그 마음을 알고서 카인에게 여호와가 엄중 경고합니다;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창4:7b). 그러나 악한 마음을 다스리지 못한 카인이 그만 동생을 쳐죽이게 됩니다.
2) 인류최초의 비극이 형제간 살인으로 발생하고 카인은 살인자가 되고 맙니다(창4:8). 자신의 속살과 치부가 그대로 드러나고 만 것입니다. 그 속살과 치부를 보게 된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그 결과에 대하여 심판해야만 하는 것일까요? 창세기에서는 카인을 떠돌이들이 살고 있는 놋 땅으로 유배 보내고 있습니다(창4:12, 16). 카인의 행위를 신바벨론제국이 반복하고 있습니다. 하나님백성이 살고 있는 다윗왕조 유대왕국을 시기하여 마침내 그 나라를 멸망시키고 선민들을 노예로 부리고자 합니다(사39:6-7). 그 사실을 이미 알고 있는 선지자가 이사야입니다. 그는 여호와 하나님이 신바벨론제국을 어떻게 처벌하실 지에 관하여 이어 예언하고 있습니다.
3) 둘, “내가 보복하되, 사람을 아끼지 아니하리라”(사47:3b); 하나님께서 갈대아왕조의 신바벨론제국에 대하여 강력하게 보복하실 것이라고 이사야를 통하여 예언의 말씀을 주시고 있는 대목입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엄청납니다. 그래서 신바벨론제국의 멸망이 예상외로 빠르고 처참합니다. 실제로 훗날의 역사 가운데 바사의 고레스 왕이 메대와 연합하여 기습적으로 신바벨론제국의 수도를 점령하고 맙니다(단5:30). 내정을 책임지고 있던 벨사살 왕이 그날 밤에 죽임을 당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라비아에 원정나가 있던 나보니더스 황제가 군사를 이끌고 수도를 탈환하고자 되돌아오지만 엄청난 희생을 내고 참패당하고 맙니다. 이사야의 예언이 그대로 응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바벨론제국의 느부갓네살 황제가 유대왕국을 정복한 때로부터(왕하25:1-7) 어이 없게도 48년 후 주전 538년에 그 크고 강대한 제국이 페르시아의 고레스 황제에 의하여 멸망당하고 역사 가운데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5) 넷째, 제4절입니다; “4. (a)우리의 구원자는, (b)그의 이름이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시니라”(사47:4); 누가 사람을 온전히 구원할 수 있을까요? 이사야의 설명이 다음과 같습니다;

1) 하나, “4. 우리의 구원자는”(사47:4a); 바벨론의 영적인 정체성이 드러날 때에 사람들은 자신들의 태도를 분명히 해야만 합니다. 계속 세상제국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창조주 하나님을 따를 것인가?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구원자는 세상적인 제국의 힘과 막강한 황제의 권력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육신적인 삶이며 영적인 타락에 불과할 따름입니다. 사람들이 현세적인 문제의 해결과 무병장수 그리고 세상적인 성공에만 목을 매고 있습니다. 어리석게도 육신적인 삶이 영원히 지속될 것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엉뚱하게도 생명의 주인이신 창조주를 떠나서 영생의 소망을 피조세계에서 찾고 있는 것입니다. 때로는 사람이 만든 것에 불과한 신상이나 우상을 찾아가서 자신들의 현세적인 소원성취를 빌고 있습니다. 그것이 온전한 구원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훗날 메시아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이 다음과 같이 명쾌하게 지적하시고 있습니다; “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마10:28).
2) 둘, “그의 이름이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시니라”(사47:4b);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가 누구일까요? 이사야는 그 이름이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시니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사47:4b). 그러므로 현세적인 이익과 육신적인 성공만을 위하여 사람들이 또 바벨론 제국을 만들어서는 안됩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뜻을 좇아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고 인간 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 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영생을 얻는 길이며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도래하게 하는 방법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께서 개척하신 그 길을 제자로서 뒤따라가는 자들이 바로 성도들입니다.
(6) 본문 제5-7절에서 선지자 이사야는 특이하게도 ‘여러 왕국의 여주인’에 대하여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을 구절풀이를 통하여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7) 첫째, 제5절입니다; “5. (a)딸 갈대아여, 잠잠히 앉으라. 흑암으로 들어가라. (b)네가 다시는 여러 왕국의 여주인이라 일컬음을 받지 못하리라”(사47:5); 갈대아왕조의 신바벨론제국이 하나님의 엄청난 진노아래 들어가게 됩니다. 왜냐하면, 제국은 여러 왕국의 여주인으로 행세했는데 그 정체가 음녀이기 때문입니다(사47:5, 계17:5). 따라서 그 어떠한 변명도 통하지 않습니다. 다음과 같이 영원한 멸망이 그들 앞에 예비되어 있을 뿐입니다;

1) 하나, “5. 딸 갈대아여, 잠잠히 앉으라. 흑암으로 들어가라”(사47:5a); 먼저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통하여 갈대아를 친근하게 ‘딸 갈대아’라고 부르시는 이유를 알아보고 이어서 그들이 왜 변명조차 제대로 못하고 심판의 대상이 되고 마는지를 다음 번 대목에서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여호와신앙을 노아로부터 대물림하고 있는(창9:26) 셈의 족보가 창세기 제11장에 실려 있습니다(창11:21-32). 그 가운데 셈의 아들이 ‘엘람, 앗수르, 아르박삭, 룻, 아람’입니다(창11:22). 아브라함의 조상인 아르박삿과 갈대아인들의 조상인 아람이 서로 형제 간이며 애초에 여호와신앙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람의 한 갈래인 갈대아왕조에 대하여 ‘딸 갈대아’라고 친근하게 호칭하시고 있는 것은 나름대로 일리가 있습니다.
2) 더구나 이사야의 선지서 제19장의 내용을 참조하게 되면 이스라엘과 앗수르가 모두 훗날 구원의 대상입니다. 그러므로 앗수르와 마찬가지로 셈의 후손인 갈대아인들도 모두 구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와 같은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염두에 두고서 ‘딸 갈대아’라고 부르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잠잠히 있으라’고 말씀하십니다(사47:5a). 그 말은 너희들의 죄상이 너무나 뚜렷하므로 변명할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도대체 어떠한 죽을 죄를 하나님 앞에 졌기에 조용히 멸망을 당해야만 하는 것일까요? 다음 대목에서 이사야가 설명하고 있습니다.
3) 둘, “네가 다시는 여러 왕국의 여주인이라 일컬음을 받지 못하리라”(사47:5b); 신바벨론의 정체가 ‘여러 왕국의 여주인’이기 때문에 심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언급입니다. 갈대아왕조 신바벨론제국의 황제는 모두 남성입니다. 그런데 ‘여주인’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영적인 의미이며 ‘큰 음녀’를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그의 계시록에서 그 사실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많은 물 위에 앉은 큰 음녀가 받을 심판을 네게 보이리라. 2. 땅의 임금들도 그와 더불어 음행하였고 땅에 사는 자들도 그 음행의 포도주에 취하였다 하고”(계17:1b-2), “5. 그의 이마에 이름이 기록되었으니 비밀이라, 큰 바벨론이라,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 하였더라”(계17:5). 땅의 여러 나라를 지배하는 제국 가운데 신바벨론이 특별히 우상문화와 음행의 풍조를 퍼뜨리는 원흉이 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가차없는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8) 둘째, 제6절입니다; “6. (a)전에 내가 내 백성에게 노하여 내 기업을 욕되게 하여 그들을 네 손에 넘겨주었거늘, (b)네가 그들을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고 늙은이에게 네 멍에를 심히 무겁게 메우며”(사47:6); 신바벨론제국이 영원히 멸망 당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사야가 그 두번째 이유를 미리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혼내기 위하여 잠시 신바벨론제국에게 맡기신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갈대아왕조는 하나님의 의중을 전혀 알아채지 못한 채 그들을 평생 동안 노예로 삼아 가혹하게 다루었다는 것입니다(사47:6, 출2:23);
1) 하나, “6. 전에 내가 내 백성에게 노하여 내 기업을 욕되게 하여 그들을 네 손에 넘겨주었거늘”(사47:6a);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과 기업을 세상의 제국에게 잠시 넘겨주는 이유가 드러나고 있습니다. 선민들이 하나님을 욕되게 하였으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욕되게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로 오시는 예수님의 비유를 참조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여호와의 백성들은 마치 하나님의 자식과 같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아버지를 버리고 재산을 미리 달라고 하여 제멋대로 살겠다고 악한 세상 속으로 떠나버립니다”(눅15:12-13). 아들이 하나님을 버렸으므로 그가 향하고 있는 곳은 우상의 나라 바벨론입니다.
2) 바벨론에서 탕자가 받고 있는 형벌에 대해서는 그 비유가 다음과 같습니다; “아버지를 떠난 자식은 세상 속에서 향락을 누리다가 재산을 탕진하고 맙니다. 인간취급을 받지 못하게 되고 돼지가 먹고 사는 쥐엄 열매라도 먹고서 허기를 채우려고 발버둥을 치고 있습니다”(눅15:16). 그러나 아버지는 아비 집을 떠난 탕자를 영원히 처벌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가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늘 기다리고 있습니다(눅15:20). 마침내 회개하고서 아들이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옵니다. 부디 죄를 지었으니 종으로라도 삼아 달라고 합니다. 그러면 먹고살 방도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는 그 아들을 맞이하고 환영의 잔치까지 열어주게 됩니다(눅15:21-24). 그것이 죄인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만민구원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창조주의 그 구원과 사랑의 마음을 바벨론이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탕자와 같은 선민들을 괴롭히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그것이 갈대아왕조의 신바벨론제국이 멀지 않아 비참한 멸망을 당하게 되는 두번째 이유입니다.
3) 둘, “네가 그들을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고 늙은이에게 네 멍에를 심히 무겁게 메우며”(사47:6b); 창조주 하나님은 사람에게 긍휼을 베푸십니다. 모세의 증언이 다음과 같습니다; “19.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내 모든 선한 것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선포하리라.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출33:19). 그런데 세상제국 신바벨론은 그 반대입니다. 선민의 나라를 멸망시키고 그 백성들을 포로로 잡아와서 평생동안 부려먹고 있습니다. 그리고 선지자 다니엘의 기록에 따르면, 갈대아의 왕과 귀족들은 향락에 빠져들고 온갖 우상을 섬기고 있습니다(단5:1-4). 그 모습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갈대아왕조의 신바벨론제국을 빨리 멸망시키기로 결정하십니다(단5:22-28). 그 일을 위하여 바사의 영웅 왕 고레스를 부르시고 계시는 것으로 선지자 이사야가 예언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사45:1-5).
(9) 셋째, 제7절입니다; “7. (a)말하기를, 내가 영영히 여주인이 되리라 하고, (b)이 일(단지 잠시 맡기심)을 네 마음에 두지도 아니하며, 그들의 종말(구원의 대상임)도 생각하지 아니하였도다”(사47:7); 이사야가 신바벨론제국이 망하게 되는 두번째 이유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다시 한번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창조주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그 역사섭리 그리고 종말심판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자신들의 제국 곧 자신들의 기득권의 영구화를 획책했다는 것입니다(사47:7-9, 14:12-15);
1) 하나, “7. 말하기를, 내가 영영히 여주인이 되리라 하고”(사47:7a); 현대국가에서 통치자들이 정치를 쉽게 하기 위해서 백성들을 우민화(愚民化, 어리석은 백성으로 만드는 것)시키는데 있어서 주로 3가지 기법을 사용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소위 ‘3s’로 표현하고 있는 ‘①sports, ②screen, ③sex’산업(産業)의 육성입니다. 그 가운데 영화산업을 빼고 연극을 집어넣게 되면 고대국가의 통치술에도 그대로 어울리게 됩니다. 예를 들면, 백성으로 하여금 향락과 사치 그리고 음란문화와 야릇한 연극 및 격투기 행사 등에 빠져들게 하면 ‘탈(脫)정치화’(정치에서 관심이탈)되거나 ‘몰(沒)정치화’(정치에 대한 몰이해)되고 맙니다. 그리하면 갈대아왕조는 신바벨론제국을 영원히 지배할 수 있게 됩니다. 약 120개의 종족을 아우르고 있는 거대한 제국이 신바벨론입니다(단6:1). 그 지배자들이 음란한 우상문화를 내세워서 제국의 통치를 한없이 쉽게 하고 모든 백성들을 우민화시켜 나가고 있습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악하다고 보시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역사섭리로 심판의 대상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2) 둘, “이 일(단지 잠시 맡기심)을 네 마음에 두지도 아니하며, 그들의 종말(구원의 대상임)도 생각하지 아니하였도다”(사47:7b); 이미 제6절에서 설명한 바가 있습니다; 갈대아왕조는 유대왕국이 힘이 약해서 그들에게 정복당하게 된 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평소 선민이라고 자랑하고 있던 교만한 유다 백성들을 혼내 주려고 합니다(사39:1-2). 포로로 끌고 와서 가혹하게 부리고 있는 것입니다(사39:6-7, 47:6). 자신들의 제국이 영원할 것이므로 그들 포로들의 운명도 영원히 자신들의 종이 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그들의 착각입니다. 창조주가 살아 계시며 여전히 역사를 섭리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특히 여호와 하나님은 선민들을 노예로 부리고 있는 그 옛날 애굽제국과 마찬가지로(출2:23-25), 신바벨론제국의 통치자에 대해서는 눈이 따갑게 주시하시고 있습니다. 참고로, 선지자 다니엘의 기록이 다음과 같습니다; “17. 이는 순찰자들의 명령대로요, 거룩한 자들의 말대로이니, 지극히 높으신 이가 사람의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며, 또 지극히 천한 자를 그 위에 세우시는 줄을 사람들이 알게 하려 함이라 하였느니라”(단4:17).
셋째로, “8. 그러므로 사치하고 평안히 지내며 마음에 이르기를 나 뿐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도다. 나는 과부로 지내지도 아니하며 자녀를 잃어버리는 일도 모르리라 하는 자여(여호와의 뜻을 저버리고 있는 패권국 신바벨론제국의 3가지 자랑 곧 ①사치와 향락, ②절대권력, ③강력한 안전보장을 말하고 있음), 너는 이제 (여호와의 심판의 예언을) 들을지어다. 9. 한 날에 갑자기 자녀를 잃으며(욥1:18-19) 과부가 되는(의지처와 보호자가 사라짐), 이 두가지 일이(제국의 멸망을 말함) 네게 임할 것이라. 네가 (그러한 몰락을 사전에 막고자 음녀 바벨론이) 무수한 주술과 많은 주문을 빌릴지라도 이 일이 온전히 네게 임하리라!(세상을 심판하시는 여호와의 역사섭리를 막지 못할 것임, 출12:12) 10. 네가 네 악을 의지하고 스스로 이르기를 나를 보는 자가 없다 하나니(사람의 눈만 속이면 창조주 하나님의 눈도 능히 속일 수 있다고 큰소리 치고 있으니), 네(제국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는 음녀 바벨론의 세상적인) 지혜와 네 지식이 너를 유혹하였음이라(자신이 말한 거짓말에 자신이 속고 말았다는 것임, 창39:9반대해석. 그것이 전능하신 여호와의 눈을 의식하지 아니하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불신앙인에 대한 여호와의 처벌임, 요8:44)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나 뿐이라!(천생천하에 유아독존)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였으므로(창조주 여호와의 절대주권에 대항하는 사탄 루시퍼의 처신과 같음, 사14:12-20), 11. 재앙이 네게 임하리라. 그러나 네가 그 근원을 알지 못할 것이며, 손해가 네게 이르리라. 그러나 이를 물리칠 능력이 없을 것이며(출12:12, 피조물에 불과한 사람이나 그가 만든 이데올르기나 우상은 결코 창조주의 새역사창조에 맞설 수가 없는 것임, 롬8:37-39), 파멸이 홀연히 네게 임하리라(출12:29-30). 그러나 네가 알지 못할 것이니라. 12. 이제 너는 젊어서부터 힘쓰던 주문과 많은 주술을 가지고 맞서 보라. 혹시 유익을 얻을 수 있을는지, 혹시 놀라게 할 수 있을는지(세상을 움직이는 실세 음녀 바벨론의 주문과 주술로 여호와의 역사섭리를 결코 막을 수 없다는 것임), 13. 네가 많은 계략으로 말미암아 피곤하게 되었도다(음녀 바벨론이 사용하고 있는 세상적인 꾀와 계략이 도리어 함정이 되고 만다는 것임). 하늘을 살피는 자와 별을 보는 자와 초하룻날에 예고하는 자들에게(점성술사들에게) 일어나 네게 임할 그 일에서 너를 구원하게 하여 보라(창41:8, 단2:2, 10). 14. 보라 그들은 초개 같아서 불에 타리니(거짓선지자 발람 역시 모세가 보낸 군사에 의하여 죽고 말았음, 민31:8) 그 불꽃의 세력에서 스스로 구원하지 못할 것이라(단3:26-27 반대해석, 눅23:35반대해석). 이 불은 덥게 할 숯불이 아니요, 그 앞에 앉을 만한 불도 아니니라(여호와의 창조의 능력과 역사섭리를 폄하하고 비방하는 우상문화와 거짓선지자들의 말은 아무 쓸모가 없다는 것임). 15. 네가 같이 힘쓰던 자들이 네게 이같이 되리니, 어려서부터 너와 함께 장사하던 자들이(장사의 신 느보를 섬기던 자들이) 각기 제 길로 흩어지고, 너를 구원할 자가 없으리라(바벨론의 주신 벨도 느보도 백성을 구원하지 못할 것임, 사46:1)“(사47:8-15); 우상을 심하게 섬기며 전쟁포로를 가혹하게 노예로 부리고 제국의 패권을 절대시하며 안으로는 사치와 향락 그리고 음란문화가 널리 퍼진 신바벨론의 전철을 훗날 많은 세상제국들이 본받고 있습니다. 그것이 이름하여 ‘음녀 바벨론’입니다. 구절풀이를 통하여 자세하게 알아봅니다;

(1) 첫째, 제8절입니다; “8. (a)그러므로 사치하고 평안히 지내며 마음에 이르기를, 나 뿐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도다. (b)나는 과부로 지내지도 아니하며, 자녀를 잃어버리는 일도 모르리라 하는 자여, (c)너는 이제 들을지어다”(사47:8); 갈대아왕조는 매우 이기적인 자들입니다. 그들은 집단 이기적 소원을 이루기 위하여 금 신상을 만들고 여러 가지 재료로 우상을 만들어 섬기고 있습니다(단3:5, 5:4, 23). 그리고 점성술을 이용하여 미래의 재앙을 사전에 예방하고자 합니다(단2:2, 48, 4:6-7, 36, 마2:1-2). 더구나 그 옛날 애굽과 욥의 가정에 임했던 자녀에 대한 재앙을(출12:29-30, 욥1:18-19) 자신들은 당하지 아니할 것이라고 자신하고 있습니다. 과연 그러할까요?
1) 하나, “8. 그러므로 사치하고 평안히 지내며 마음에 이르기를, 나 뿐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도다”(사47:8a); 갈대아왕조는 신바벨론제국을 경영하면서 사치와 평화를 누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들 왕조와 제국의 영광이 영원할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그들만이 세상을 경영하며 패권을 휘두를 수 있는 천명(天命)을 얻고 있다고 자랑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정복자 느부갓네살 황제와 같은 경우에는 금으로 큰 신상을 만들어서 수도권 두로 평지에 세워놓고 제국의 고관들은 모두 그 신상에 절을 하라고 천하를 호령하고 있습니다(단3:17). 마치 그 옛날 니므롯의 후예들이 바벨탑을 세우면서 자신들의 제국이 영원할 것으로 판단한 것과 같습니다(창11:4). 그것은 교만하게도 자신들이 세상에서 가장 높은 탑을 건설할 수 있으며 하늘의 뜻으로 영구히 천하를 통치한다는 사상입니다.
2) 그것이 잘못된 사상이라고 다니엘이 다음과 같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18. 왕이여,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왕의 부친 느부갓네살에게 나라와 큰 권세와 영광과 위엄을 주셨고, 19. 그에게 큰 권세를 주셨으므로, 백성들과 나라들과 언어가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의 앞에서 떨며 두려워하였으며, 그는 임의로 죽이며, 임의로 살리며, 임의로 높이며, 임의로 낮추었더니, 20. 그가 마음이 높아지며 뜻이 완악하여 교만을 행하므로, 그의 왕위가 폐한 바 되며, 그의 영광을 빼앗기고”(단5:18-20). 선지자 다니엘의 지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22. 벨사살이여, 왕은 그의 아들이 되어서 이것을 다 알고도 아직도 마음을 낮추지 아니하고, 23. 도리어 자신을 하늘의 주재보다 높이며, 그의 성전 그릇을 왕 앞으로 가져다가 왕과 귀족들과 왕후들과 후궁들이 다 그것으로 술을 마시고, 왕이 또 보지도 듣지도 알지도 못하는 금, 은, 구리, 쇠와 나무, 돌로 만든 신상들을 찬양하고, 도리어 왕의 호흡을 주장하시고, 왕의 모든 길을 작정하시는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지 아니한지라. 24. 이러므로 그의 앞에서 이 손가락이 나와서 이 글을 기록하였나이다”(단5:22-24). 교만한 인간의 생각과는 달리 하나님의 심판으로 말미암아 견고한 신바벨론제국이 멸망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3) 둘, “나는 과부로 지내지도 아니하며, 자녀를 잃어버리는 일도 모르리라 하는 자여”(사47:8b); 고대사회에서 가장 불행한 자가 아들을 얻지도 못했는데 남편이 먼저 죽고 만 과부의 신세입니다. 그 이유는 아들이 없으므로 재산상속을 받지 못하고 남편이 죽었으므로 자신을 부양할 자가 없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불행을 결코 당하지 아니할 것이라고 갈대아왕조가 큰소리치고 있습니다; 불행은 그들의 지배를 받고 있는 약한 나라와 백성들의 몫이라고 말합니다. 반면에, 강한 군사력을 지니고 튼튼한 제국을 유지하고 있는 그들은 영원히 세상의 지배자로 영화를 누리며 살게 된다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우상을 섬기고 있는 그들은 과부의 신세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국난을 당하게 되면, 그 우상이 전혀 의지처가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뜨인 돌을 보내어 제국의 기반을 붕괴시키면 그 우상은 맥없이 쓰러지고 말 것입니다(단2:34-35).
4) 셋, “너는 이제 들을지어다”(사47:8c); 그러므로 세상제국의 경영자라고 하더라도 겸손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만 합니다. 창조주이시며 역사의 섭리자이고 심판주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만민구원의 계획에 귀를 기울여야만 합니다(단4:27). 자신에게 주신 그 권력으로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시기를 원하시는지 묵상해야만 합니다. 그러하지 못할 경우에는 느부갓네살 황제처럼 치매가 걸려서 7년간 권좌에서 밀려나게 될 것입니다(단4:27-37). 그리고 끝까지 이기적으로 우상을 섬기게 되면 하나님께서 또 다른 고레스를 불러서 그들의 제국을 없애 버리실 것입니다(단5:30-31, 사45:1-4).
(2) 둘째, 제9절입니다; “9. (a)한날에 갑자기 자녀를 잃으며, 과부가 되는 이 두 가지 일이 네게 임할 것이라. (b)네가 무수한 주술과 많은 주문을 빌릴지라도, 이 일이 온전히 네게 임하리라”(사47:9); 사람들이 바로와 같이 완악합니다. 그리고 욥과 같이 자칭 의인입니다. 나아가서 세상의 권력과 현인들의 지혜로 얼마든지 한세상 잘 먹고 잘 살 수 있다고 자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노가 그들에게 온전히 임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강력하게 회개를 종용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1) 하나, “9. 한날에 갑자기 자녀를 잃으며, 과부가 되는 이 두 가지 일이 네게 임할 것이라”(사47:9a); 느부갓네살처럼 강력한 제국의 황제자리에서 한 순간에 풀을 먹고 사는 짐승과 같은 삶으로 추락할 수 있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 이유는 사람의 살고 죽는 것, 그리고 왕위를 얻는 것과 빼앗기는 것이 모두 세상 권력자의 수중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같이 창조주 하나님의 장중에 있기 때문입니다(단4:30-32).
2) 둘, “네가 무수한 주술과 많은 주문을 빌릴지라도, 이 일이 온전히 네게 임하리라”(사47:9b); 자신의 제국이나 아성을 흔히 세상적인 지혜와 지식으로 아주 합리적으로 잘 다스리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모두 사람의 이성과 예지력을 신처럼 섬기고 있는 사상입니다; 예를 들면, 갈대아왕조 신바벨론제국이 그러합니다. 그들은 신상과 우상을 많이 만들어 섬기며 사람들의 지혜와 지식을 숭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느부갓네살 황제의 기이한 꿈을 신바벨론의 현자들 곧 주술사들과 박사들이 전혀 해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3) 그리고 벨사살 왕의 연회석상에 나타난 손가락 글씨의 의미조차 풀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제국의 운명과 통치자의 운명이 모두 하나님의 역사섭리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결코 인간의 지혜와 지식이 그것을 뒤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말씀의 첫머리 창세기 제1장을 보더라도, 피조물인 인간의 이성의 경지를 태초부터 초월하여 하나님의 영이 온 우주의 수면 바깥에서 운행하고 계십니다. 그 사실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이 유신론이며 여호와 신앙입니다(창1:1-2). 그것이 욥기에서 강조하고 있는 바와 같이, 창조주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바로 서는 피조물인 인간의 겸손한 신앙이라고 하겠습니다(욥42:1-6).
(3) 본문 제10-11절에서 선지자 이사야는 인간의 교만과 그 능력의 한계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본문말씀을 구체적으로 그리고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 창세기 제4장에 실려 있는 ‘카인의 이야기’를 원용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두 구절의 본문말씀에 대하여 의미의 분석이 용이하도록 다음과 같이 분절하여 각각 살펴보고자 합니다;

(4) 첫째, 제10절입니다; “10. (a)네가 네 악을 의지하고 스스로 이르기를, 나를 보는 자가 없다 하나니, (b)네 지혜와 네 지식이 너를 유혹하였음이라. (c)네 마음에 이르기를, 나 뿐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였으므로”(사47:10); 사람의 악의 시작이 무엇인지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말해주고 있는 대목입니다.
1) 하나, “10. 네가 네 악을 의지하고 스스로 이르기를, 나를 보는 자가 없다 하나니”(사47:10a);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지 아니하고 있는 것 자체가 바로 사람의 악의 시작이라고 갈파하고 있습니다(사47:10a). 사람들이 하나님은 눈이 없으시다고 스스로 판단하고서 이기적으로 자신의 욕심을 이루고자 행동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악행입니다. 창세기 제4장에 수록되어 있는 카인의 경우를 참조하면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하나님께서 카인의 심중을 벌써 살펴보시고 있습니다.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어찌 그 속을 통찰하지 못하시겠습니까?
2) 그래서 카인에게 “악의 소원이 들어 있는 너의 마음을 잘 다스리라. 그렇지 못하면 악행을 저지르게 되고 심판을 받게 된다”는 요지의 말씀을 해주시고 있습니다(창4:6-7). 그러나 어리석게도 카인은 완전범죄를 꿈꾸고 있습니다; 동생 아벨을 넓은 들판 한가운데 불러내고 있습니다(창4:8a). 사방을 둘러보아도 보는 눈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몰래 아벨의 머리를 쳐서 죽여버립니다(창4:8b). 그 시신을 땅에 암매장하고 있습니다. 그는 안심하고 있습니다. 보는 눈이 없으므로 완전범죄에 성공한 것으로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3) 둘, “네 지혜와 네 지식이 너를 유혹하였음이라”(사47:10b); 사람의 지혜와 지식은 한마디로, 사람이 감지할 수 있는 것에 의지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오감을 통하여 수집된 자료를 분석하고 그 의미를 파악하여 체계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 사람의 지식입니다. 그 지식에 인간의 직관력과 예지력을 더하게 되면 일종의 지혜가 탄생합니다. 그런데 근본적인 문제가 내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의 오감이라고 하는 인식의 단계를 거쳐서 자료를 수집하고 있으며 그렇게 수집되는 자료만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며 진리라고 쉽게 단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빠져나가고 있는 존재가 있습니다. 영이신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의 인식론적 경험론이라는 실증주의의 바깥에 존재하고 있는 그것이 이름하여 신의 영역입니다.
4) 셋,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나 뿐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였으므로”(사47:10c); 이 세상에서 사람들은 만물의 영장(靈長, 영적인 어른)으로 불립니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창조된 유일한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창1:26-27). 그러므로 보고 생각하고 지식을 체계화하여 나름대로 세상을 보는 지혜의 눈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너무 보고 느끼는 것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보이는 현상 그 속에 깃들어 있는 창조주의 숨결을 느끼는 데에는 자꾸만 둔감해지고 있습니다(요3:8). 역사의 흐름을 사실적으로 관찰하고 그 자료를 분석하면서도 그 역사를 움직이고 있는 하나님의 의도와 섭리에 대해서는 생각하기 싫어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보이는 것만 가지고 증거위주로 논쟁하자고 자기주장을 하고 있는 인간의 교만함이 가장 큰 이유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도 큰소리를 치고 있습니다.
(5) 둘째, 제11절입니다; “11. (a)재앙이 네게 임하리라. 그러나 네가 그 근원을 알지 못할 것이며, (b) 손해가 네게 이르리라. 그러나 이를 물리칠 능력이 없을 것이며, (c) 파멸이 홀연히 네게 임하리라. 그러나 네가 알지 못할 것이니라”(사47:11);

1) 하나, “11. 재앙이 네게 임하리라. 그러나 네가 그 근원을 알지 못할 것이며”(사47:11a); 카인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자신이 동생 아벨을 살해하고 암매장한 사실을 알고 계시는지 그것이 궁금합니다. 그의 궁금증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뜻밖의 말씀을 해주시고 계십니다; “10.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11.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창4:10-11). 모든 피조물이 여호와께 직소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2) 둘, “손해가 네게 이르리라. 그러나 이를 물리칠 능력이 없을 것이며”(사47:11b); 카인이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있습니다; 여호와는 카인이 동생 아벨을 시기하여 그를 죽이고 싶어하는 마음을 이미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카인에게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라고 말씀하십니다(창4:7). 그러하지 못할 경우에는 엄청난 손해를 감수해야 할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하나님을 떠나서 제멋대로 살고 있는 땅 곧 세상적인 힘을 숭상하는 약육강식의 무서운 땅, 소위 동방의 ‘놋’ 지방으로 보내 버릴 것입니다(창4:12, 16). 그러한 손해가 있다고 경고하더라도 카인이 그 말씀을 받아들여서 자신의 마음을 다스릴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사실 사람의 능력으로는 자신의 마음을 다스릴 수가 없습니다(롬7:21-24). 그래서 모두가 죄인입니다(롬3:9-10). 다만, 창조주 하나님께 간구할 때에 그 능력을 얻을 수가 있을 뿐입니다.
3) 셋, “파멸이 홀연히 네게 임하리라. 그러나 네가 알지 못할 것이니라”(사47:11c); 인간의 예지의 능력은 어느 정도일까요? 아주 희미한 수준입니다; 예를 들면, 내일의 날씨를 정확하게 감지하는데 있어서 사람은 때로 개미보다도 못합니다. 기상예보가 왕왕 틀릴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개미와 같은 미물은 정확합니다. 본능적으로 비가 올 것임을 알고서 부지런히 무리 지어 이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6) 본문의 마지막 제12-15절에서 선지자 이사야가 신바벨론제국이 자랑하고 있는 것들 곧 그들의 주술, 계략, 천문, 우방 등이 왜 자신의 구원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지 그 이유에 대하여 예언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제부터 본문의 각 구절을 면밀히 살펴보면서 그 질문에 대한 해답을 다음과 같이 찾아보고자 합니다;
(7) 첫째, 제12절입니다; “12. (a)이제 너는 젊어서부터 힘쓰던 주문과 많은 주술을 가지고 맞서 보라. (b)혹시 유익을 얻을 수 있을는지, 혹시 놀라게 할 수 있을는지”(사47:12); 이사야가 주문과 주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1) 하나, “12. 이제 너는 젊어서부터 힘쓰던 주문(呪文, 신의 힘을 빌리는 글이나 말)과 많은 주술(呪術, 초자연적인 능력을 행하는 다양한 술법)을 가지고 맞서 보라”(사47:12a); 인간의 능력을 넘어서고 있는 초자연적인 세계 그리고 불확실한 미래에 대처하기 위하여 인류가 오랜 세월 주로 사용하고 있는 방법이 두 가지입니다. ①주문과 ②주술입니다. 주문(spell)을 외우게 되면 신의 힘을 일시적으로 빌릴 수 있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마술과 요술 등으로 마치 환상과 같은 일시적인 기적을 연출하기도 하지만 특히 상대방의 영혼을 지배하기 위하여 주술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러한 사람들의 다양한 도전들이 과연 효력이 있을까요?
2) 둘, “혹시 유익을 얻을 수 있을는지, 혹시 놀라게 할 수 있을는지”(사47:12b); 사람들이 주문과 주술을 사용하여 얻고자 하는 것이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자신들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이익을 얻고자 합니다. 또 하나는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두려워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주문과 주술을 행하고 있는 자신을 무조건 따르도록 만들고자 하는 것입니다. 과연 그와 같은 목적을 달성할 수가 있을까요?
(8) 둘째, 제13절입니다; “13. (a)네가 많은 계략으로 말미암아 피곤하게 되었도다. (b)하늘을 살피는 자와 별을 보는 자와 초하룻날에 예고하는 자들에게, (c)일어나 네게 임할 그 일에서 너를 구원하게 하여 보라”(사47:13); 사람들의 계략, 천문학, 점성술 등이 과연 미지의 영역을 풀이하고 소원을 성취하게 하는 수단이 될 수 있는 것일까요?;

1) 하나, “13. 네가 많은 계략으로 말미암아 피곤하게 되었도다”(사47:13a); 여기서 이사야가 ‘많은 계략’으로 표현하고 있는 내용은 다음 2가지라고 하겠습니다; ①이미 언급하고 있는 주문과 여러 주술입니다. ②제국이 미지의 세계에 도전하고자 사용하고 있는 많은 전략입니다. 이사야는 그 결과가 신통하지 않다고 명쾌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그러한 방법들을 사용해보아야 신통한 결과는 없고 피곤할 따름이라는 결론입니다(사47:13a).
2) 둘, “하늘을 살피는 자와 별을 보는 자와 초하룻날에 예고하는 자들에게”(사47:13b); 그렇다면 신바벨론이 특히 자랑하고 있는 천문학과 점성술의 발달은 어떠한 결과를 가져오고 있을까요? 선지자 다니엘의 기록에 따르게 되면, 신바벨론제국의 황제 느부갓네살이 자신의 이상한 꿈을 해석하도록 황궁으로 부르고 있는 지혜자들의 종류가 다음과 같습니다; “2. 왕이 그의 꿈을 자기에게 알려주도록 박수(magician, 마술사)와 술객(enchanter, 요술사)과 점쟁이(sorcerer, 마법사)와 갈대아 술사(astrologer, 점성가, NIV)를 부르라 말하매 그들이 들어가서 왕의 앞에 선지라”(단2:2).
3) 그들은 일반적인 학문을 연구하고 있는 보통 박사들이 아닙니다. 특별히 신비롭고도 기이한 현상에 대하여 연구하고 있는 박사들입니다. 그들에 대한 꼭 맞는 용어가 동양에 없어서 번역에 애를 먹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가운데 갈대아 술사는 점성가 또는 점성술사를 말하고 있다고 알려지고 있습니다. 갈대아인들은 천체의 움직임 및 별의 밝기를 관측하여 지상의 변화를 설명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 전통은 비록 메소포타미아에서 제국이 바뀌더라도 계속 흘러내려오고 있습니다. 그 결과 동방박사들이 메시아로 태어나시는 아기 예수를 만나고자 예루살렘까지 다윗의 별을 보고 찾아오기도 합니다(마2:1-2).
4) 셋, “일어나 네게 임할 그 일에서 너를 구원하게 하여 보라”(사47:13c); 그런데 백성들이 마술과 요술, 그리고 마법과 점성술에 너무 빠져들게 되면 문제가 발생합니다. 마치 하나님의 세상경영과 역사섭리의 비밀을 모두 알게 된 것처럼 착각하여 영적으로 교만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음 2가지의 실패를 경험하게 됩니다;
5) 하나는, 창조주를 인정하는데 실패하게 됩니다. 초월적인 하나님의 능력만이 필요하지 그것을 얻고 나면 하나님이 더이상 필요 없다고 하는 사고방식입니다. 또 하나는, 다른 편리한 것으로 하나님을 대신하고자 합니다. 하나님보다 더 편리하고 실제적인 이익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술법이나 우상이 더 좋다는 사고방식입니다. 그러한 함정에 빠지게 되면 창조주 하나님의 눈 밖에 나게 됩니다. 따라서 다가오는 종말심판에서 결코 구원을 얻지 못하게 되고 말 것입니다.
(9) 셋째, 제14절입니다; “14. (a)보라 그들은 초개(草芥, 풀과 티끌, 지푸라기와 같은 하찮은 마른 풀) 같아서 불에 타리니, (b)그 불꽃의 세력에서 스스로 구원하지 못할 것이라. (c)이 불은 덥게 할 숯불이 아니요, 그 앞에 앉을 만한 불도 아니니라”(사47:14); 신의 영역에 도전하고 있는 사람들의 그 모든 방법이 마치 우상을 섬기고 있는 것과 같다는 이사야의 지적이 다음과 같습니다;
1) 하나, “14. 보라 그들은 초개(草芥, 풀과 티끌, 지푸라기와 같은 하찮은 마른 풀) 같아서 불에 타리니”(사47:14a); 술법으로 신의 힘을 빌릴 수 있다고 큰소리치고 있는 자들이나 점성술로 미래의 재앙을 파악하고 예방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 자들에게 이사야가 경고하고 있습니다; “너희들은 모두 바짝 마른 풀과 같다. 불 재앙이 임하게 되면 꼼짝 없이 타버리는 지푸라기와 같은 존재에 불과하다”(사47:14a). 한마디로, 티끌과 같은 피조물임을 알고서 처신을 똑바로 하라는 것입니다.
2) 둘, “그 불꽃의 세력에서 스스로 구원하지 못할 것이라”(사47:14b); 인위적인 재앙이라면 대비하거나 대처할 수가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는 다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심판의 불기운을 일으키시고 있는데 어떻게 그 불꽃을 피하고 스스로 구원을 얻을 수가 있겠습니까? 애초부터 피조물에 의한 ‘자력구원’(自力救援, self-salvation)은 어불성설(語不成說,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왜냐하면, 구원은 근본적으로 피조물의 영역을 넘어서고 있는 창조주의 권한이기 때문입니다(행1:6-7).
3) 셋, “이 불은 덥게 할 숯불이 아니요, 그 앞에 앉을 만한 불도 아니니라”(사47:14c); 창조주가 일으키시는 심판의 불은 피조물을 처벌하는 일종의 형벌입니다. 따라서 완전히 소멸시키는 것이 아니라 참을 수 없는 뜨거움과 타는 고통을 무한반복적으로 느끼게 하는 것입니다(눅16:23-24). 그것은 음식을 조리할 때에 사용하는 고마운 숯불이 아닙니다. 더구나 겨울 추위를 견디기 위하여 피우는 모닥불이 아닙니다. 두려운 불심판일 따름입니다. 요컨대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 구원의 방도를 찾고 있는 자들은 그들의 우상이나 술법 등과 함께 영원히 꺼지지 아니하는 불꽃 속으로 들어가고 말게 될 것입니다(계20:10).
(10) 넷째, 제15절입니다; “15. (a)네가 같이 힘쓰던 자들이 네게 이같이 되리니, (b)어려서부터 너와 함께 장사하던 자들이 각기 제 길로 흩어지고, (c)너를 구원할 자가 없으리라”(사47:15); 제국 내에서의 다양한 노력 그리고 우방과 연합하여 이룩하고자 한 그 모든 노력들이 다음과 같이 물거품이 되고 말 것이라는 이사야의 지적입니다;
1) 하나, “15. 네가 같이 힘쓰던 자들이 네게 이같이 되리니”(사47:15a); 일찍이 니므롯의 후예들이 구(舊)바벨제국을 건설하고 그들의 제국을 영원히 유지하고자 바벨탑을 세우기 원했습니다(창11:4). 그때부터 자신들의 제국을 인위적인 노력으로 영원한 제국으로 만드는 것이 세상통치자들의 한결같은 꿈입니다. 그래서 불확실한 미래와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안보의 위협요인을 사전에 제거하기 위하여 정책적으로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우상을 만들고 신의 능력을 빌려서라도 그 일을 성사시키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바벨탑이 무너진 것과 같이 언제나 제국의 붕괴입니다(사47:15a).
2) 둘, “어려서부터 너와 함께 장사하던 자들이 각기 제 길로 흩어지고”(사47:15b); 인류의 역사는 자연부락에서부터 계약사회로 이행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국제관계도 그러합니다. 혈통적인 연합에서부터 상호이익을 함께 얻을 수 있는 협력관계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서로의 잇속에 따라 연합하고 있는 장사꾼의 셈법과 같습니다. 여기서 ‘어려서부터 너와 함께 장사하던 자들’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은 그러한 관행이 오래되었다고 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따라서 일단 거대한 제국이 와해되면 그 주변에 영원한 동맹도 우방도 없습니다. 마치 경박한 장사치처럼 모두가 제 살길을 찾아서 뿔뿔이 흩어지고 말 것입니다(사47:15b, 막14:27).
3) 셋, “너를 구원할 자가 없으리라”(사47:15c); 두가지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①아무리 단단한 결속을 자랑하고 있는 제국이라고 하더라도 내부에서부터 무너져 내리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부에서부터 균열이 발생하도록 역사를 섭리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제국의 영광과 힘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다니엘의 예언이 다음과 같습니다; “43. 왕께서 쇠와 진흙이 섞인 것을 보셨은즉, 그들이 다른 민족과 서로 섞일 것이나 그들이 피차에 합하지 아니함이 쇠와 진흙이 합하지 않음과 같으리이다”(단2:43);

4) ②제국 뿐만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인간의 지혜와 지식으로 그리고 각종 술법과 우상문화로 건설해 놓은 그 모든 문명도 영원히 지속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역사 가운데 ‘뜨인 돌’을 보내셔서 그 모든 것을 부수어 흩어버리고 말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학문과 술법으로 사람들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역시 다니엘이 다음과 같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34. 또 왕이 보신즉, 손대지 아니한 돌이 나와서 신상의 쇠와 진흙의 발을 쳐서 부서뜨리매, 35. 그때에 쇠와 진흙과 놋과 은과 금이 다 부서져 여름 타작마당의 겨같이 되어 바람에 불려 간 곳이 없었고 우상을 친 돌은 태산을 이루어 온 세계에 가득하였나이다”(단2:34-35).
결론적으로, 모세가 말하고 있는 모리아산, 호렙 산, 시내 산, 그리고 느보 산의 의미에 대하여 알아보는 것으로 결론을 대신하고자 합니다;
(1) 모리아 산은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적장자 약속의 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고자 올라간 예루살렘의 산입니다(창22:2). 그곳에서 그는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결코 ‘인신제사’(人身祭祀, 사람의 몸을 희생제물을 삼는 제사)를 원하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상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생명을 살리기 위하여 스스로 어린양을 제물로 준비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입니다(창22:13-14). 아브라함은 이미 브엘세바에서 그러하듯이 이제는 모리아산에서 영생의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여호와를 경배합니다(창21:33, 22:12-19).
(2) 호렙 산은 미디안 변방에 있는 높은 산입니다. 미디안 광야에서 장인 이드로의 양치기로 살고 있던 모세가 그 산에서 타고 있는 불을 발견하게 됩니다(출3:1-3). 그곳에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고 출애굽의 지도자로 세움을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호렙 산은 사명을 부여해주는 산입니다.
(3) 출애굽한 이스라엘 자손을 모세가 시나이 반도 최남단에 위치하고 있는 시내 산으로 인도합니다(출19:1-3). 그곳에서 창조주 하나님을 만나고 율법을 받아서 백성들에게 전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시내 산은 율법을 전수받은 산입니다.
(4) 느보 산에 올라서 모세는 젖과 꿀이 흐른다는 약속의 땅을 내려다보게 됩니다(신34:1-4). 그리고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자신이 돌아가야만 하는 고향은 결코 풍요로운 이 세상의 낙원이 아닙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영생의 기운이 흐르고 있는 천국임을 알게 됩니다(히11:16). 따라서 모세는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의 손에 맡기고 편안히 눈을 감게 됩니다. 훗날 구원자로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시면 그를 부활시켜서 천국으로 인도할 것입니다(요8:56, 히11:26).
그러므로 성도는 믿음의 선진인 아브라함이나 모세처럼 세상의 지혜 ‘느보’를 넘어서는 하나님의 지혜와 영생을 추구해야만 합니다. 그것이 구원자 그리스도를 만나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방법입니다(마7:7-11, 요17:3). 아무쪼록 그와 같은 깨달음과 은혜가 저와 여러분에게 항상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