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이사야가 선민 유대인에 대한 여호와의 심판과 회복을 절묘하게 표현하다”(사29:1-24)
설교일; 주후 2026년 9월 27일 주일
작성자; 손진길 목사(25년 7월 28일 월요일 작성)

구약상의 선지자들은 어떠한 사람들일까요? 히브리경전의 첫머리를 장식하고 있는 오경을 저술한 자가 주전 15세기의 모세입니다(신34:1-12). 그리고 신약의 마지막인 계시록을 주후 1세기 말엽에 소아시아에서 저술한 인물이 예수 그리스도의 막내사도로서 유일하게 오래 살아남은 노년의 사도 요한입니다(요21:17-25).
무려 1천 5백년의 긴 세월동안 선지서와 묵시록을 저술하여 인류에게 전달하고 있는 그들 선지자들은 도대체 무엇을 자신들의 인생 가운데 보았기에 그것을 인간의 언어로 전달하고자 그토록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와 관련하여 두가지를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1) 하나는, 선지자들은 여호와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상의 변화무쌍한 모습을 바라보면서 그 변화의 법칙이 도대체 무엇인지를 깊이 궁구한 인물들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지혜와 노력으로는 도저히 그 변화의 이치를 파악할 수가 없습니다. 그에 따라 아무쪼록 자신에게 여호와의 영을 부어주어 부디 그 이치를 조금이라도 깨닫도록 해달라고 창조주 여호와께 간구합니다. 그 결과 얻은 말씀과 예언의 조각들을 나름대로 알기 쉽게 사람의 언어로 전달하고 있는 것이 그들이 저술한 선지서와 묵시록이라고 하겠습니다.
(2) 또 하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지자 역시 피조물에 불과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그 역사를 섭리하고 계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과 예언을 전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 결과 그들이 인간의 언어로 전달하고 있는 글들은 난해하며 이해하기가 참으로 힘이 듭니다. 그렇지만 그 속에 마치 보석을 통과하고 나온 광채가 휘황하며 찬란하듯이 그러한 경지의 놀라운 빛이 굴절되어 나타나고 있습니다.
요컨대, 오늘의 본문 이사야 제29장에 기록되어 있는 저자 이사야의 조국인 유대왕국의 패망과 다윗왕조를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만든 무도한 신바벨론제국의 말로에 대한 그의 예언은 전부 이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선지자 이사야는 자신이 내다보고 있는 미래의 역사를 동족들에게 미리 알려주고자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는 사실과 그가 보고 있는 그 미래의 모습이 마치 하나의 조감도와 같다는 사실을 알아챌 수는 있습니다.
이미 선지자 이사야는 여호와의 영의 감동으로 높고도 높은 경지에 올라서서 그의 눈앞에 환상처럼 펼쳐지고 있는 조국 유대왕국의 멸망과 여호와의 도구로 사용된 강대국 신바벨론제국 역시 허무하게 사라지는 미래의 역사를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그것들이 안개처럼 사라지고 나자 그의 눈앞에는 창조주 여호와의 영광만이 빛나고 있습니다.
마치 변화산상과 같은 그러한 환상의 세계가 사라지고 제 자리에 돌아온 이사야는 자신의 선지서를 계속 저술하고자 합니다. 조국을 멸망으로 인도하고 있는 자신과 동족들의 잘못이 무엇인지 방금 깨닫게 된 그 사실을 기록으로 남겨두고 싶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자신의 글을 읽게 되는 남은 자들은 부디 그러한 시행착오를 거듭하지 아니하도록 간절히 선지자 이사야가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이사야의 마음을 생각하면서 본문에서 인상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대목들을 조금만 먼저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첫째, 이사야가 자신이 활동하고 있는 다윗왕조 유대왕국의 수도인 예루살렘을 특이하게 ‘아리엘’이라고 거듭 부르고 있습니다(1-2, 7절). 그 의미가 무엇이기에 그토록 이사야가 ‘아리엘’을 목놓아 외치고 있는 것일까요? 그 의미는 아무래도 선지자 이사야가 영적으로 높은 경지에 올라 조국 유대왕국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한꺼번에 내려다본 결과 그가 선민의 시작이 ‘아리엘’이라고 이해하였기에 그것을 가지고 조국의 멸망의 미래를 가슴 아파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고 하면 예루살렘을 수도로 삼고 있는 선민 유대인들의 조상들이 누구인지를 더듬어 보면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1) 하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들의 조상이 어디에 살고 있었으며 어떠한 신앙생활을 한 자들인지를 정확하게 알고 계십니다. 셈족 중의 셈족인 아르박삿은 큰 두개의 강이 만나서 기름진 평야를 이루고 있는 시날 땅에 자리잡고서 여호와신앙으로 고대문명을 이루고 살아온 족장입니다(창9:26, 10:22-24, 11:11, 31). 그렇지만 무력으로 세상을 정벌하고자 하는 정복자 니므롯이 함족을 이끌고 동진하여 오자 그만 그들의 지배하에 들어갑니다(창10:8-12, 11:2-3). 그러나 함족의 지배가 오래가지 않습니다. 피조물인 인간이 만든 제국의 힘을 마치 창조주 여호와의 힘에 비할 수 있는 것인 양 자신의 패권을 끝없이 자랑하고 있는 교만한 지배자 함족을 여호와 하나님께서 내분으로 자멸하게 만들고 말았기 때문입니다(창11:4-8). 그 결과 셈족인 아르박삿의 후손들이 함족의 지배에서 벗어나고 일부는 동서남북으로 이동하게 됩니다(창11:9). 가장 먼저 족장 욕단이 부족을 이끌고 동쪽으로 떠납니다(창10:25-30). 가장 나중에 족장 데라가 장남 아브람 부부와 장손 롯의 가족을 이끌고 서쪽으로 떠나고 있습니다(창11:31).
2) 둘, 서로 뿔뿔이 흩어지지만 여호와신앙을 지니고 있는 아르박삿의 후손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엘’이라고 부르면서 자신들도 모르게 ‘아리 아리 아라리요’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 의미는 강들이 서로 나뉘어지지만 언젠가는 하나로 다시 만나게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기약 없이 서로 헤어지고 떠나가지만 먼 훗날 다시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께 돌아가서 반갑게 만나게 되기를 소망하고 있는 그들입니다(창47:29-31, 49:29-33, 히11:16). 그와 같은 가장 원초적인 생명의 주인 여호와 하나님께 돌아가는 인생임을 잊지 말라고 하는 선지자 이사야의 외침이 본문의 첫머리에서부터 들려오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2) 둘째, 선지자 이사야는 창조주 여호와의 역사섭리 앞에 선민임을 자랑하던 이스라엘 자손들의 교만한 목소리가 땅에 떨어져 티끌처럼 변하고 선민의 나라를 집어삼킨 제국의 군대 역시 산산이 부서져 세미한 티끌이 되어 공중에 흩날리고 이내 사라지고 만다는 사실을 노래하고 있습니다(4-5절). 그와 같이 허무한 것이 인생이며 제국의 영광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를 섬긴다고 하던 선민의 나라 아리엘이나 그 아리엘을 멸망시킨 제국이나 인간의 역사는 이사야가 창조주 하나님이 주신 영의 눈으로 바라보니 마치 한밤의 꿈과 같으며 그 밤과 함께 환상처럼 사라지고 마는 허망한 것입니다(6-7절).
(3) 셋째, 매일같이 먹고 마셔도 다시 허기가 지고 목이 마른 것이 육신을 입고 있는 사람의 일생입니다(8절). 그리고 그러한 인생이 마치 일장춘몽처럼 사라지고 나면 그 영혼만이 창조주의 품으로 돌아가고 맙니다(10-11절, 전3:21). 그렇지만 이사야는 아직도 육신을 입고 꿈을 꾸고 있는 자신의 동족과 후인들에게 외치고 있습니다; “꿈과 같은 인생과 인간의 역사 가운데 허무한 것들과 영원히 사라지고 마는 것들을 좇아 다니지 말고 영원히 살아 계시며 창조와 재창조의 역사섭리를 가르쳐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일꾼으로 살아 가고자 결단하십시오. 그리하면 인간의 지혜와 총명을 뛰어넘는 여호와 하나님의 지혜와 살아 있는 말씀으로 자신과 이 세상을 볼 수 있는 영적인 안목이 열릴 것입니다. 그와 같은 여호와신앙으로 부디 이 세상의 유혹과 시험을 이기고 많은 영혼을 구원하여 하나님께 인도하는 제사장나라 거룩한 백성으로(사66:20, 출19:4-6)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사29:13-24의역).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에 대하여 구절풀이를 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얻은 소중한 교훈과 메시지를 더불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첫째로, “1. 슬프다. 아리엘(예루살렘성전의 번제단 또는 예루살렘에 수도를 두고 있는 아르박삿의 후손을 의미함)이여 아리엘이여, 다윗이 진 친 성읍(예루살렘성, 삼하5:7)이여 해마다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는, 출23:14) 절기가 돌아오려니와, 2. 내(여호와 하나님)가 (예루살렘과 유대왕국의 교만으로 말미암아) 아리엘을 괴롭게 하리니, 그가 슬퍼하고 애곡하며 내게 아리엘(강줄기가 서로 나누이고 있지만 훗날 바다에서 다시 만나게 되는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처럼 예루살렘의 별명으로 보임)과 같이 되리라(비록 헤어지는 인생들이지만 믿음의 조상들처럼 마침내 창조주 여호와의 품안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는 것임, 창49:29-33, 마8:11, 눅16:23, 히11:16). 3. 내가(여호와의 역사섭리로) 너를 사면으로 둘러 진을 치며 너를 에워 대를 쌓아 너를 치리니(신바벨론 갈대아군대가 쳐들어와서 토산을 쌓아 예루살렘성을 공격할 것임), 4. 네가 낮아져서 땅에서 말하며 네 말소리가 나직이 티끌에서 날 것이라(유대왕국이 패망하고 선민들이 죽임을 당할 것임, 왕하25:2-12) 네 목소리가 신접한 자의 목소리 같이 땅에서 나며 네 말소리가 티끌에서 지껄이리라(여호와신앙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며 무당을 찾아가던 유대인들이 땅의 티끌이 되어 사라지고 마는 것임). 5. 그럴지라도 네 대적의 무리는 세미한 티끌 같겠고 강포한 자의 무리는 날려 가는 겨 같으리니 그 일이 순식간에 갑자기 일어날 것이라(유대왕국을 멸망시킨 신바벨론제국 역시 50년내에 여호와의 역사섭리로 허무하게 사라지고 말 것임). 6.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레와 지진과 큰 소리와 회오리바람과 폭풍과 맹렬한 불꽃으로 그들을 징벌하실 것인즉, 7. 아리엘을 치는 열방의 무리 곧 아리엘과 그 요새를 쳐서 그를 곤고하게 하는 모든 자는 꿈 같이, 밤의 환상 같이 되리니(예루살렘에 이어 모든 패권국과 제국들 역시 여호와의 진노와 심판으로 말미암아 허망하게 역사 가운데 사라지고 말 것임, 렘25:29), 8. 주린 자가 꿈에 먹었을지라도 깨면 그 속은 여전히 비고 목마른 자가 꿈에 마셨을지라도 깨면 곤비하며 그 속에 갈증이 있는 것 같이 시온 산을 치는 열방의 무리가 그와 같으리라(인생이란 한바탕 꿈과 같아서 아무리 먹고 마셔도 다시 배가 고프고 갈증이 나며 그들이 건설한 제국 역시 꿈과 같이 차례로 역사속으로 사라지고 마는 것임)“(사29:1-8);

(1) 이사야의 동족인 다윗왕조 유대왕국의 백성들은 2가지를 믿고서 자칭 선민이라고 생각하며 평안한 삶을 영위하고 있습니다; 본문에 따르면 하나는, ‘아리엘’인데 그것은 이 세상에서 여호와의 백성으로 살다가 훗날 천국에서 만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다윗이 진 친 성읍’인데 그것은 다윗에게 약속한 그대로 여호와의 도우심으로 선민의 영광이 계속된다는 것입니다.
1) 그런데 이사야는 동족들이 사실은 신앙상의 심각한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이사야가 탄식하고 있습니다; “슬프다 아리엘이여, 다윗이 진 친 성읍이여”(1a). 그렇다면 유대인들이 의지하고 있는 것, 그 2가지가 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일까요?
2) 도대체 그것이 유대인들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기에 이사야의 슬픈 탄식을 자아내고 있는 것일까요? 그 답변이 기록되어 있는 문장이 선지자 이사야가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기록하고 있는 본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그가 기록한 구절을 따라가면서 하나님 말씀의 깊은 의미를 다음과 같이 살펴보고자 합니다;
(2) 첫째, 제1절입니다; “1. 슬프다. 아리엘(예루살렘성전에 있는 번제단을 말함. 그 깊숙한 의미는 그 옛날 모리아산의 아브라함처럼 이 세상에서 이룩한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고 여호와로부터 영생을 얻기를 소원하는 것임, 창21:33, 22:12-14, 요1:29)이여 아리엘이여(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믿음을 상속하지 못하고 있는 동족에 대하여 선지자 이사야가 애타게 부르짖고 있음), 다윗이 진 친 성읍이여, 해마다 절기가 돌아오려니와”(사29:1); 다윗왕조 유대왕국의 수도는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입니다. 모든 왕국의 백성들이 유대교의 성지 예루살렘을 바라보면서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그들은 그 두 가지를 잘 보존하고 있는 이상 하나님의 도우심을 얻어서 모든 적의 침략을 물리치고 선민의 영광을 사해에 떨칠 수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두 가지가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과 다윗의 성입니다.
1) 성전에서는 매일 제물을 번제단에서 태우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매일같이 제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제물을 받으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선민들의 나라를 매일같이 지켜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은 본래 다윗의 성이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다윗이 전체 이스라엘 12지파의 왕이 되자 당시 가나안의 원주민인 여부스 족속이 차지하고 있던 예루살렘 곧 시온산성을 빼앗아 그곳에 다윗의 성을 건설하고 수도로 삼아 천도했기 때문입니다(삼하5:3-12). 다윗은 그때부터 연전 연승하여 작은 이스라엘 왕국을 중동의 패권국(hegemon) 이스라엘제국으로 만든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이 그에게 쏟아졌기 때문입니다.
2) 그러므로 유대왕국의 백성들은 종교적으로 부지런히 예루살렘성전의 번제단인 ‘아리엘’에서 제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군사적으로 다윗이 물려준 예루살렘성을 착실하게 지키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전통과 히브리사상은 그 두 가지를 확실히 한다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언제나 다윗왕조의 유대왕국을 지켜 주신다고 말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왕상9:1-5). 그것이 그들 선민들의 관념입니다. 그것은 마치 매주일 예배에 참석하고 헌금하며 기독교를 인정하고 있는 나라에 살고 있기만 하면 하나님의 도우심을 입어서 언제나 안전을 누리며 평안하게 살 수 있다고 하는 관념과 똑같은 것입니다.
3) 그런데 과연 그러한 것일까요? 성경에서 강조하고 있는 신앙생활이 그러한 수준의 것일까요? 전혀 그러하지 아니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슬퍼하시며 그 탄식이 선지자 이사야의 입을 통하여 처절하게 터져 나오고 있습니다; “슬프다, 다윗 왕조 유대왕국의 백성들조차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지 아니하고 자신들의 안전만을 생각하면서 습관적으로 번제단에 제사나 드리고 다윗의 성을 의지하여 살아가고들 있구나! 해가 지나가도 도대체 하나님의 뜻을 직접 구하지 아니하고 종교적인 행사에만 매어 달리고 있으니 그것이 문제로구나. 그저 조상 다윗을 지켜 주신 하나님께서 자신들이 다윗의 성에 살고 있기만 하면 지금도 계속 지켜 주실 것으로 착각하고 있구나. 어째서 다윗이 발견한 하나님을 그 후손들이 찾지 아니하고 조상의 족보와 그의 성만을 의지하여 살아가고들 있는가? 참으로 슬픈 현상이구나!”(사29:1 의역).
(3) 둘째, 제2절입니다; “2. 내가 아리엘(예루살렘의 별칭)을 괴롭게 하리니 그가 슬퍼하고 애곡하며 내게 아리엘(번제단이 있는 예루살렘성전)과 같이 되리라”(사29:2); 선민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성전에서 열심히 제사를 드리고 있지만 이방인들의 침입으로 큰 환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호해주시지 아니하실까요? 주전 8세기말 이사야 시대부터 메시아가 그 땅에 오시는 주후 1세기초까지 700년 기간 동안에 그 땅을 크게 침탈하거나 지배하게 되는 제국을 손꼽아보더라도, 앗수르, 신바벨론, 페르시아, 헬라, 그리고 로마 등 5개나 됩니다(요4:18). 700년 동안에 5제국에게 시달리고 있는 역사는 참으로 세상에서 그 유례를 찾아보기가 힘듭니다. 도대체 하나님께 제사를 잘 드리기로 유명한 유다 족속이 왜 그러한 환난을 당하고 있는 것일까요?

1) 그 대답을 하나님께서 이사야의 입을 통하여 다음과 같이 해주시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번제단에 희생제물을 드리는 것으로 제사장나라의 역할을 다 수행하고 있다고 믿고서 살고 있는 그들에게 나 여호와가 깨달음을 주기 위하여 그 번제단과 함께 성전을, 그리고 예루살렘성까지 무너뜨려버리고 말겠다. 번제나 성전 그리고 시온 성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속죄의 제사의 의미를 알고서 여호와 앞에 직접 나아와야만 할 것이다. 나 여호와의 뜻대로 인생을 살아가지 아니하고 있는데 그 제물과 시온의 선민의 영광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사29:2 의역).
2) 그와 같은 맥락에서 다음과 같은 이사야의 예언이 나타나고 있음을 차제에 함께 음미하시기를 바랍니다; “11.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12.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사1:11-12), “6.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사58:6).
3) 요컨대, 하나님을 찾지 아니하고 또한 그 뜻대로 실천하지 아니하면서 그저 제사를 드리는 것으로 모든 것을 대신하고 있으니 그와 같은 형식적인 종교행위가 어떻게 하나님께 열납(悅納, 기쁘게 받아 들여짐)되고 그 보호하심을 얻을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해마다 그와 같은 일을 되풀이하고 있으니 마침내 하나님께서 그것을 근절시켜 버리신다는 예언입니다. 번제단과 더불어 유다의 백성들을 흩어 버리시겠다는 예언의 말씀입니다(사29:2).
4) 그와 같은 하나님의 뜻은 선민들의 조상인 야곱의 일생을 살펴보아도 이미 다음과 같이 밝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하나, 야곱이 얍복 시내에서 하나님이 인정하는 믿음의 대 족장 ‘이스라엘’이라는 칭호를 얻었지만(창32:28) 그 다음 그의 행보는 하나님을 실망시키고 있습니다. 그가 여호와 하나님에게 제단을 쌓겠다고 서원한 장소 벧엘로(창28:18-22) 직행한 것이 아닙니다. 요단 강을 건너기 전에 얍복 시냇물이 흘러 들어가고 있는 그곳 물이 풍부하고 풀이 무성한 ‘숙곳’에서 양을 실컷 쳤습니다(창33:17);

5) 둘, 목축으로 더 부자가 된 야곱이 요단 강을 건너 가나안 땅으로 들어갑니다. 이제는 벧엘이 있는 곳으로 남하하여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켜야만 합니다. 그러나 그는 정반대로 북상합니다. 왜냐하면 부자가 된 그가 인생을 즐기기 위하여 번화한 도시 세겜으로 간 것입니다(창12:6, 33:18-19). 그곳에 정착한 그는 여호와를 자신의 우상으로 섬기기 위하여 제단을 마련합니다(창33:20). 셋, 그 모습을 보시고 크게 실망하신 하나님께서는 소위 ‘세겜 사건’을 통하여 야곱을 혼내십니다(창34:24-30).
6) 마찬가지로 본문에서는 유다의 백성들을 나라의 멸망과 예루살렘성전의 멸망으로 혼을 내실 것입니다. 그 결과 창세기에서는 그들 선민들의 조상인 야곱이 살 길을 찾아 하나님의 명령을 쫓아서 벧엘로 들어갑니다(창35:1-6). 그곳에서 애초에 그가 서원한 대로 실천합니다. 그때 야곱은 비로소 전능하신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만나게 됩니다. 약속의 장소 벧엘에서 직접 하나님을 만났기에 야곱은 ‘엘벧엘’(벧엘에서 만난 하나님)의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창35:7). 그리고 그곳에서 정식으로 믿음의 대 족장 ‘이스라엘’로 세움 받게 됩니다(창35:10).
7) 그때부터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남은 인생을 선지자이며 제사장인 위대한 대 족장 ‘이스라엘’로서의 삶을 끝까지 살아가게 됩니다(창35:11-15, 46:1-4, 47:7-10, 29-31, 48:5, 49:1-32).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훗날 ‘세겜’을 정복하게 된 것은 일종의 보너스라고 하겠습니다(창48:22). 작은 결론을 맺어보자면, 하나님께서는 다윗왕조 유대왕국을 멸망시키고 그 백성들을 온 세상에 흩어 버리실 것입니다(사29:2). 번제단과 함께 예루살렘성전도 무너뜨려 버리실 것입니다. 그리하면 먼 훗날에 선민들이 오랜 세월 자신들의 종교적인 행사에만 그친 신앙생활을 크게 회개하고서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직접 만나게 되는 놀라운 사건이 발생할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야곱이 벧엘에서 하나님을 직접 만나게 된 것과 같은 구원의 은총이라고 하겠습니다.
(4) 셋째, 제3절입니다; “3. 내가 너를 사면으로 둘러 진을 치며, 너를 에워 대를 쌓아 너를 치리니”(사29:3); 선민들이 천혜의 요새라고 믿고 있는 다윗의 성입니다. 해발 평균 790미터의 고지에 깎아지른 듯한 절벽 위에 서있는 예루살렘성입니다. 다윗의 영광이 빛나고 있는 그 성을 누가 감히 정복할 수가 있겠습니까? 더구나 매일 번제물을 하나님께 바치고 있는 성전이 그 가운데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만군의 여호와께서 틀림없이 지켜 주실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1) 선민들의 믿음을 강화해주고 있는 가장 가까운 사례가 이사야 생전에 발생하고 있습니다. 이름하여 ‘히스기야의 기적’입니다. 하나만 예를 들어봅니다; 주전 701년 앗수르 산헤립 황제의 군대가 유대왕국을 초토화하면서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성을 포위공격하고 있습니다(왕하18:17).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내신 천사에 의하여 하룻밤 사이에 적군 18만 5천명이 몰살당하고 맙니다(왕하19:35). 단지 히스기야 왕이 성전에 들어가서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앗수르 황제의 조롱과 적군의 횡포에 대하여 상세히 아뢰고 부디 살려달라고 부르짖기만 했어도 그와 같은 기적이 나타난 것입니다(왕하19:14-19, 34-35).
2) 그러므로 예루살렘성에 살고 있는 유다 사람들은 자신이 있습니다. 급하게 되면 성전에 들어가서 살려달라고 부르짖기만 해도 구원함을 다시 받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그러할까요? 이사야는 그렇지 아니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성을 쭉 둘러가면서 적군들이 높은 토성을 쌓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적들이 공성작전(攻城作戰)을 구사하게 되면 다윗의 성이 무너질 것이라는 예언입니다(사29:3).
(5) 넷째, 제4절입니다; “4. 네가 낮아져서 땅에서 말하며, 네 말소리가 나직이 티끌에서 날 것이라. 네 목소리가 신접한 자의 목소리 같이 땅에서 나며, 네 말소리가 티끌에서 지껄이리라”(사29:4); 다윗의 성이 함락되고 나면 선민들이 이방인의 포로가 되는 수치가 찾아올 것입니다. 높은 성 예루살렘에 살고 있던 유다의 백성들이 골짜기로 끌려 내려가게 됩니다. 유다 사람들이 이방인들의 땅에서 포로생활을 하면서 비로소 자신들이 무엇을 잘못했으며 하나님 앞에 무엇과 같은 존재인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 깨달음은 다음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1) 창조주 하나님을 이사야처럼 직접 만나고(사6:1-8) 그 뜻을 정확하게 실천하는 인생을 살지 아니하면 모두가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성전에서 매일같이 제사를 드리고 다윗의 성을 시온의 영광으로 선민들이 노래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단지 이방인들과 똑같은 이기적인 민족우월 사상이며 우상을 섬기는 종교행사에 불과할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성과 성전을 적에게 내어 주시는 것을 보고서 선민들이 비로소 깨닫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영적으로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사람들이 하고 있는 모든 수고와 종교행사가 헛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에 따라 부디 메시아를 보내주시고 성령님을 보내 달라고 구원을 호소하게 됩니다(사29:4, 렘31:31-34).
2) 일찍이 이스라엘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고백과 같습니다; “27. 아브라함이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티끌이나 재와 같사오나 감히 주께 아뢰나이다”(창18:27), “32. 아브라함이 또 이르되, 주는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더 아뢰리이다. 거기서 10명을 찾으시면 어찌하려 하시나이까? 이르시되, 내가 10명으로 말미암아 멸하지 아니하리라”(창18:32). 선민이라고 하더라도 창조주 하나님 앞에 티끌과 같이 미미한 피조물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영이 임하시면 아브라함과 같이 중보의 간구를 하나님께 올려드릴 수가 있습니다. 이제는 이방인의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만민의 구원을 위하여 제사장나라 거룩한 백성으로 다시 살아가고자 합니다(사29:4). 그와 같은 먼 훗날의 변화를 이사야가 소망 가운데 바라보면서 그의 예언의 한 자락을 마무리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6) 다섯째, 제5-6절입니다; “5. 그럴지라도 네 대적의 무리는 세미한 티끌 같겠고 강포한 자의 무리는 날려 가는 겨 같으리니 그 일이 순식간에 갑자기 일어날 것이라. 6.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레와 지진과 큰 소리와 회오리바람과 폭풍과 맹렬한 불꽃으로 그들을 징벌하실 것인즉”(사29:5-6); 여호와의 말씀에 대한 깨달음을 얻지 못한 자들은 세상적인 지혜와 강한 군사력을 의지하여 세상을 지배하고자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선민들을 미워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선민들이 그들의 우월한 지위를 자랑하고 동시에 이방인을 차별하며 멸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아니꼬운 제사장나라 유대왕국을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유대왕국을 정벌합니다. 그 결과 깨달음이 없는 강대국과 그 백성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징계를 다음과 같이 당하고 맙니다;
1)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들의 존재를 ‘세미한 티끌’, 곧 티끌보다도 더 못한 가장 하찮은 것으로 자리매김을 하고 맙니다(사29:5a). 교만하게도 겁도 없이 제사장의 나라까지 정복하는 그들 ‘강포한 제국’을(사29:5b) 하나님께서 순식간에 쳐 버리실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이사야의 시대부터 700년 동안에 앗수르, 신바벨론, 페르시아, 헬라 등의 여러 제국이 유다 땅을 침략하거나 점령했다가 정말 빠른 속도로 망하고 맙니다. 이사야의 예언 그대로 그 막강한 패권국들의 신세가 마치 ‘날려가는 겨’와 같습니다(사29:5c).
2) 여호와의 말씀은 세미한 음성으로 선지자의 귀에 들려오고 있습니다(출19:19, 왕상19:12-13). 그러나 그것이 창조주의 음성이기 때문에 그 능력은 피조물의 상상을 초월하고 맙니다. 그것은 새로운 창조의 능력이며 모든 피조된 것들을 제압하고 다스리는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약한 인간의 음성으로 전달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말씀의 이치는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결코 무시할 수가 없으며 경솔하게 흘려 들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다음 역사의 향방을 미리 말해주는 예언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사48:6-7).
3) 그와 같은 의미에서 이사야가 다음과 같이 예언하고 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레와 지진과 큰 소리와 회오리바람과 폭풍과 맹렬한 불꽃으로 그들을 징벌하실 것인즉”(사29:6). 엄청난 하나님의 강력(强力, strong power)이 예언의 말씀 그대로 역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 그대로 이사야의 시대에 앗수르의 원정군 18만 5천명을 하룻밤 사이에 천사를 보내어 전멸시켜 버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사37:36).
(7) 여섯째, 제7-8절입니다; “7. 아리엘을 치는 열방의 무리 곧 아리엘(번제단이 있는 성전)과 그 요새(예루살렘성)를 쳐서 그를 곤고하게 하는 모든 자는 꿈 같이, 밤의 환상 같이 되리니, 8. 주린 자가 꿈에 먹었을지라도 깨면 그 속은 여전히 비고 목마른 자가 꿈에 마셨을지라도 깨면 곤비하며 그 속에 갈증이 있는 것 같이 시온 산을 치는 열방의 무리가 그와 같으리라”(사29:7-8); 본문은 예루살렘을 치는 자에게 임하는 재앙에 대하여 예언하고 있습니다.
1) ‘일장춘몽’(一場春夢, just a dream of one night)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세상의 영화와 영광이 아무리 화려하고 드높아도 깨고 나면 한바탕의 꿈과 같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용어입니다. 그렇습니다. 피조된 것들의 역사의 결말이 그렇게 허망한 것입니다. 영생하시는 창조주 하나님 앞에 서게 되면 세상의 강대국이요 지역의 패권국이라고 하더라도 그 역사와 위업이 마치 하룻밤의 꿈과 같은 것입니다;

2) 이사야는 특별히 창조주 하나님께서 눈여겨보고 계시는 성전과 다윗의 성이 있는 예루살렘을 함락하게 되는 세상나라의 운명이 일장춘몽이 되고 말 것이라고 본문에서 강력하게 경고하고 있습니다(사29:7). 그 의미가 제8절에서 확장되고 있습니다; 제사장나라를 점령한 강대국의 운명에 국한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이사야의 설명입니다. 무릇 세상적인 힘으로 하나님의 기업을 무너뜨리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같은 보응을 받고 말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3) 쉽게 말하자면, 영적인 삶을 버리고 육신적인 삶에 탐닉하고 있는 인생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아무리 세상 것을 많이 차지하고 좋은 것을 많이 먹고 마시면서 나름대로 대리만족을 얻으려 하지만 그 영의 기갈과 기근은 극심해지고 있습니다. 창조주를 떠나서 피조물이 제멋대로 살아가고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책벌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4) 훗날 이 땅에 오시는 메시아가 사마리아 여인에게 우물가에서 알기 쉽게 말씀해주시고 있습니다; “1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우물)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14.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4:13-14).
둘째로, “9. 너희는 놀라고 놀라라. 너희는 맹인이 되고 맹인이 되라. 그들의 취함이 포도주로 말미암음이 아니며 그들의 비틀거림이 독주로 말미암음이 아니니라. 10. 대저 여호와께서 깊이 잠들게 하는 영을 너희에게 부어 주사 너희의 눈을 감기셨음이니, 그가 선지자들과 너희의 지도자인 선견자들을 덮으셨음이라(창조주 여호와께서 계시의 영을 주시지 아니하면 여호와의 역사섭리와 영적인 비밀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선민이거나 선지자이거나 마찬가지라는 것임). 11. 그러므로 모든 계시가 너희에게는 봉한 책의 말처럼 되었으니(여호와께서 사람에게 영적인 눈을 주지 아니하시면 결코 하나님의 역사섭리를 기록한 그 책을 읽을 수가 없다는 것임) 그것을 글 아는 자(세상학문을 공부한 사람)에게 주며 이르기를 그대에게 청하노니 이를 읽으라 하면 그가 대답하기를 그것이 봉해졌으니 나는 못 읽겠노라 할 것이요(하나님이 신성문자로 기록한 역사섭리는 진리의 성령님의 계시를 받은 선지자만이 비로서 읽고 그 뜻을 이해할 수가 있다는 것임). 12. 또 그 책을 글 모르는 자에게 주며 이르기를 그대에게 청하노니 이를 읽으라 하면 그가 대답하기를 나는 글을 모른다 할 것이니라. 13. 주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마15:8),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그 옛날 아브라함처럼 자신이 이룩한 모든 것을 바쳐서 여호와의 종으로 살아가며 오로지 영생만은 얻고자 소원한다면 하나님 경외자로 인정을 받고 여호와의 진리의 말씀을 깨닫는 영적인 안목을 얻을 수 있을 것임, 창21:33, 22:12, 요8:56, 마8:11, 눅16:23, 히11:16-19). 14. 그러므로 내가 이 백성 중에 기이한 일 곧 기이하고 가장 기이한 일을 다시 행하리니, 그들 중에서 지혜자의 지혜가 없어지고 명철자의 총명이 가려지리라(사6:9-10, 선민의 나라 유대왕국에서 여호와의 선지자를 물리치고 거짓선지자의 말을 따라 정책을 결정한 결과 패망의 역사를 자초하고 마는 것임, 렘28:2-17, 38:17-24)“(사29:9-14); 본문에서 선지자 이사야는 이방인들의 죄와 하나님의 벌에 대하여 예언하고 있습니다. 다음과 같이 구절풀이를 해봅니다;
(1) 첫째, 제9-10절입니다; “9. 너희는 놀라고 놀라라. 너희는 맹인이 되고 맹인이 되라. 그들의 취함이 포도주로 말미암음이 아니며 그들의 비틀거림이 독주로 말미암음이 아니니라. 10. 대저 여호와께서 깊이 잠들게 하는 영을 너희에게 부어주사 너희의 눈을 감기셨음이니, 그가 선지자들과 너희의 지도자인 선견자들을 덮으셨음이라”(사29:9-10); 이사야는 하나님의 영적인 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상세하게 예언하고 있습니다;
1) 이방인들이 힘의 논리로 제국을 형성했지만 큰 어려움에 봉착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진노하셔서 재앙을 내리셨기 때문입니다. 흉작이 거듭되어 백성들이 먹을 것이 없으며 역병이 창궐하여 마실 물조차 부족합니다. 그 문제의 해결은 군사력으로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해결책을 찾고자 천하의 지혜자들을 찾고 있습니다.
2) 그러나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지혜자를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훗날 다니엘의 사례에서 보듯이 세상을 구하는 지혜는 창조주 하나님의 계시로부터 말미암고 있기 때문입니다(단2:19-24, 27-28). 창세기에 기록된 애굽 총리 요셉의 일대기도 마찬가지입니다(창41:16, 25, 28, 38). 그런데 이방인의 강대국은 오랜 세월 하나님을 무시하고서 제멋대로 살아왔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지혜를 가진 자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백성들도 모두 사라진 것입니다.
3) 그와 같은 참상을 이사야는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인 되심을 인정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기업을 제 마음대로 취득한 자는 놀라운 하나님의 처벌을 받게 될 것이다. 제일 먼저 하나님을 보는 안목이 사라질 것이다. 그 다음에는 사람의 영을 잠재우고 비틀거리게 하는 악한 영들이 계속 그들을 지배하도록 하나님이 내버려둘 것이다(롬1:24). 그 결과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선지자와 하나님의 이치를 깨닫는 선견자들이 그들의 사회에서 사라져버릴 것이다”(사29:9-10 의역).
(2) 둘째, 제10-12절입니다; “10. 대저 여호와께서 깊이 잠들게 하는 영을 너희에게 부어주사 너희의 눈을 감기셨음이니, 그가 선지자들과 너희의 지도자인 선견자들을 덮으셨음이라. 11. 그러므로 모든 계시가 너희에게는 봉한 책의 말처럼 되었으니, 그것을 글 아는 자에게 주며 이르기를, 그대에게 청하노니 이를 읽으라 하면 그가 대답하기를, 그것이 봉해졌으니 나는 못 읽겠노라 할 것이요. 12. 또 그 책을 글 모르는 자에게 주며 이르기를, 그대에게 청하노니 이를 읽으라 하면 그가 대답하기를, 나는 글을 모른다 할 것이니라”(사29:10-12); 이사야는 가장 두려운 벌에 대하여 마지막으로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그들에게서 거두어 버리신다는 것입니다(사29:10-12). 하나님의 말씀이 없어지게 되면 자연히 구원과 회복의 역사에서 제외되고 맙니다. 구원의 기회가 영영 사라져버린다고 하는 것이 모든 인생과 인간의 역사에 있어서 가장 두려운 창조주의 벌임을 새삼 깨닫게 해주고 있는 대목이 바로 본문 제10-12절에 기록되어 있는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의 말씀인 것입니다.
(3) 셋째, 제13절입니다; “13. 주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사29:13); 선민들의 잘못과 그에 대한 여호와의 벌을 알기 쉽게 이사야가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점을 다음과 같이 분설하여 보고자 합니다;

1) 하나, “13. 주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사29:13a); 사람들이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사야는 본문에서 판연히 다른 2가지 종류가 있음을 은연중에 전제하고서 그의 설명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 두 가지는 먹고 사는 문제의 해결을 위함인가? 아니면 영적으로 자신의 삶의 목적과 이유를 발견하기 위함인가? 라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이사야는 다윗왕조 유대왕국의 백성들이 단지 입으로 먹고 사는 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있다고 갈파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풍년을 기원하기 위하여 농사의 신 바알과 다산(多産)의 미(美)의 신 아스다롯(또는 아세라)을 함께 우상으로 섬기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왕상16:31-33).
2) 그것이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올바른 방법이 아니라는 사실을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이 갈릴리의 백성들에게 다음과 같이 정확하게 보여주시고 계십니다; “13. 이에 거두니 보리떡 5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12바구니에 찼더라. 14. 그 사람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15.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요6:13-15). 메시아는 백성들에게 먹을 수 있는 떡을 나누어 주기 위하여 오신 분이 아닙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그 때문에 이 세상에 오셨다고 한다면 매일같이 오병이어의 기적과 칠병이어의 기적을 베풀어 주었을 것입니다.
3) 그리고 매년 풍년이 들게 해달라고 하나님 아버지께 큰 소리로 기도하라고 제자들에게 지시했을 것입니다. 나아가서 백성들에게 그러한 목적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라고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그 대신에 그리스도께서 진정으로 제자들과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고자 하신 떡은 전혀 그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생명의 떡입니다(요6:48-51). 곧 믿는 자에게 죄 사함의 은혜를 줄 수 있는 십자가의 대속의 제사입니다. 그리고 성도들에게 완전한 구원과 영생을 줄 수 있는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 성령님의 내주 역사하심, 그리고 죽은 다음의 부활과 승천 등입니다.
4) 둘,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사29:13b); 이사야는 백성들이 말하는 것과 실제로 그들의 속마음이 다르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백성들이 여호와를 공경한다고 말하면서 하나님을 전심으로 섬기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신명기 제6장에 기록되어 있는 ‘쉐마’ 그대로 행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사람의 눈으로 평가하자면, 분명히 선민 유대인들은 율법을 준수하고 절기와 제사를 성전에서 잘 지내고 있는 민족입니다. 그런데 그 목적이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5) 한마디로, 신명기 제28장 전반부에 기록되어 있는 세상적인 축복을 풍성하게 받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복을 얻기 위해서는 억지로라도 율법생활을 해야만 합니다. 당장 싫고 손해가 나더라도 더 큰 것을 얻기 위해서 웃으면서 그렇게 헌신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속마음과 달리 애쓰고 있는 그들의 종교행위는 오로지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의 중심을 보고 계시는 하나님의 눈으로 보자면 불합격입니다(삼상16:7). 요컨대, 속마음에서 우러나오지 아니하고 있는 사탕발림의 신앙고백, 그리고 형식적인 제사와 남의 눈만 의식하는 율법의 준수가 타락한 유대인들의 신앙생활의 현주소라고 하는 이사야의 지적입니다. 그것을 훗날 예수님은 ‘바리새인의 외식이며 누룩’이라고 알기 쉽게 규정하고 있습니다(마16:6, 23:13).
6) 셋,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사29:13c); 출애굽기 제19장에서부터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율법으로 전달해주고 있습니다(출19:7-8). 그 율법은 여호와를 섬기는 신정국가 제사장나라에서 거룩한 백성들이 지켜야만 하는 법률과 같은 것입니다. 출애굽기 제20장에서는 그 법률의 취지와 대강이 하나님의 십계명으로 먼저 선포되고 있습니다(출20:1-17). 그러므로 거룩한 백성들은 사람의 계명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한마디로, 하나님의 계명을 생각하면서 그 취지에 따라 율법을 생활화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7) 그런데 선민사회에서 문제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십계명의 취지를 윤색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은 분명히 피조물의 형상으로 창조주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말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출20:4-5).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론과 백성들은 애굽에서 배운 그대로 그들의 경험을 쫓아서 금송아지 형상을 만들어놓고서 그것을 출애굽의 신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부르면서 제사를 드리고 축제를 벌이고 있는 것입니다(출32:4-6).
8) 그들의 잘못은 그 정도에서 끝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생활의 세부적인 규정을 마련함에 있어서 2가지의 잘못을 범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선민생활의 규범이 되고 있는 율법이 그렇게 상세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들 공동체의 생활이 좀더 복잡해지자 시행세칙과 규칙을 만들게 됩니다. 그렇다면 그때에 하나님의 계명과 율법의 취지를 그대로 하위규정에 반영하면 오죽이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시행규정과 규칙을 정함에 있어서 자신들의 편의를 마음껏 반영하고 있습니다. 선민들인 자신들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율법의 세칙을 정하고 있습니다.
9) 반대로, 그러한 세칙은 이방인들에게는 불이익을 많이 초래하게 됩니다. 요컨대, 율법의 세칙으로 선민을 우대하고 이방인을 차별한 것입니다. 예를 들면, 히브리 종의 해방이 안식년(安息年, 7년에 한번씩 땅을 쉬게 하고 사람들도 안식을 누림)에서 희년(禧年, 50년에 한번 기업을 무르고 종이 해방될 수 있음)으로 은연중에 바뀌고 있으며 이방인 종에 대해서는 희년의 해방조차 배제되고 있는 것이 그러한 경우라고 하겠습니다(출21:2, 레25:39-46).
10) 또 하나는, 장로들의 경험과 지식을 너무 많이 반영하고 있습니다. 백성들의 실제생활과 직결되고 있는 율법의 세칙들이기 때문에 그들의 경험이 중요한 것은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본래 계명의 취지와 어긋나고 있다고 한다면 과감하게 삭제해야만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들이 좀더 많은 자유와 쾌락을 추구하기 위한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이혼증서의 발급조건을 세칙으로 규정하고 그것을 실제로 운영함에 있어서는 훨씬 더 융통성을 두고 있는 관례가 그러한 것입니다(신24:1, 마5:31-32, 19:7-9).
(4) 넷째, 제14절입니다; “14. 그러므로 내가 이 백성 중에 기이한 일, 곧 기이하고 가장 기이한 일을 다시 행하리니, 그들 중에서 지혜자의 지혜가 없어지고 명철자의 총명이 가려지리라”(사29:14); 이스라엘 백성들은 역사 가운데 참으로 기이한 일을 많이 경험하고 있습니다. 200만명이 넘는 이스라엘 족속이 동시에 출애굽을 하게 되고 광야에서 40년간 생존한 일이 기적입니다. 적들을 섬멸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천체의 움직임을 중지시킨 경우도 있습니다(수10:13). 모세가 손을 들고 기도하면 전투에서 승리하고 있는 것이 그러합니다(출17:11). 더구나 이사야는 생전에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셔서 앗수르 원정군 18만 5천명을 전멸시키는 기적을 경험하게 됩니다(사37:36).
1)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이사야의 입을 통하여 장차 더욱 기이한 일이 발생할 것이라고 계시하십니다. 그 일이 무엇일까요? 그 어떤 세상의 지혜자나 총명한 명철자라고 하더라도 꿈도 꿀 수가 없었던 일이 발생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 행위입니다;
2) 하나, 메시아의 십자가 죽음과 무덤 속에서 영생의 몸으로 부활하는 사건입니다(사52:13-53:12). 그것은 가장 처참한 실패가 가장 위대한 승리를 몰고 오는 것입니다. 메시아의 죽으심이 자신의 죄를 대속하는 속죄의 제사라는 사실을 믿고 회개하는 자에게는 선민이거나 이방인이거나 차별 없이 누구에게나 죄 사함과 구원의 은혜가 임한다는 선언입니다(요3:13-15, 행2:37-42). 그리고 남은 인생을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살아가게 되면 부활의 영광이 찾아오는 것입니다(롬6:4).
3) 둘, 오순절 성령님의 강림과 내주 역사입니다(사11:1-2, 욜2:28-29, 행2:1-4). 하나님의 영이 성도에게 임하여 평생 동안 내주하여 역사하신다고 하는 일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은혜입니다. 선지자들도 그와 같은 영원한 성령님의 내주하심의 은혜를 얻지 못했습니다. 사울 왕과 다윗 왕 그리고 솔로몬 왕의 일대기를 보더라도 분명히 그러합니다(삼상16:14, 삼하12:11-15, 왕상11:2-11). 그런데 이스라엘의 왕들보다 더 큰 은혜를 성도들이 누리게 되는 것이 기적입니다(벧전2:9).
4) 셋, 여호와 하나님께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실 것입니다(사65:17, 계21:1). 그리고 새 예루살렘성을 하늘에서 이 땅으로 임하게 할 것입니다(사65:18-19, 계21:2). 창조주께서 사탄과 악한 영들을 모두 처벌하시고 성도들에게 새 예루살렘성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영생을 누리게 해 주신다고 하는 것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가장 기이한 일입니다(요1:12-13, 12:31, 14:1-3, 계21:7, 26-27).
셋째로, “15. 자기의 계획을 여호와께 깊이 숨기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의 일을 어두운 데에서 행하며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보랴? 누가 우리를 알랴? 하니(사람의 눈만 피하면 여호와의 눈도 속일 수가 있다고 믿고 있는 범죄한 카인과 같은 어리석은 사람들임, 창4:7-11, 39:9, 삼상16:7, 히4:13), 16. 너희의 패역함(아버지 하나님에게 패륜하고 창조주 하나님께 반역하는 것을 말함,사14:13-15)이 심하도다. 토기장이를 어찌 진흙 같이 여기겠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어찌 자기를 지은 이에게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나를 짓지 아니하였다 하겠으며, 빚음을 받은 물건이 자기를 빚은 이에게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총명이 없다 하겠느냐?(욥42:1-6, 렘18:3-6, 토기장이 비유임) 17. 오래지 아니하여 레바논이 기름진 밭으로 변하지 아니하겠으며 기름진 밭이 숲으로 여겨지지 아니하겠느냐?(여호와의 역사섭리로 해상왕국 페니키아가 번성하다가 나중에는 쇠퇴하고 말 것임) 18. 그날에 못 듣는 사람이 책의 말을 들을 것이며 어둡고 캄캄한 데에서 맹인의 눈이 볼 것이며(먼 훗날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소경의 눈을 뜨게 하고 천국의 복음을 알려줄 것임), 19. 겸손한 자에게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쁨이 더하겠고 사람 중 가난한 자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니(그리스도의 산상수훈을 벌써 예언하고 있음. 창조주 여호와 앞에 겸손한 자가 구원을 얻으며 마음이 가난한 자가 천국복음을 듣고 기뻐할 것임, 마5:3-12), 20. 이는 강포한 자가 소멸되었으며 오만한 자가 그쳤으며 죄악의 기회를 엿보던 자가 다 끊어졌음이라(그리스도의 천국복음이 선포되면 역사의 종말이 찾아오게 되는 것임, 마4:11, 23). 21. 그들은(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종말을 맞이하게 되는 자들은) 송사로 사람에게 죄를 씌우며 성문에서 판단하는 자를 올무로 잡듯 하며 헛된 일로 의인을 억울하게 하느니라(빈익빈 부익부의 사회를 만든 자들임). 22. 그러므로 아브라함을 구속하신 여호와께서 야곱 족속에 대하여 이같이 말씀하시되, 야곱이 이제는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겠고 그의 얼굴이 이제는 창백해지지 아니할 것이며(그 옛날 아브라함처럼 사라지는 이 세상의 영광보다 창조주 여호와가 주시는 영생을 얻기를 소망한 자들은 대속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원한 천국의 구원을 얻을 것임, 요3:13-17, 5:24-29), 23. 그의 자손은 내 손이 그 가운데에서 행한 것을 볼 때에 내 이름을 거룩하다 하며 야곱의 거룩한 이를 거룩하다 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경외할 것이며(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여호와신앙을 계승하는 성도들을 말함, 출3:15. 특히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자손을 말함, 요1:12-13, 롬4:16), 24. 마음이 혼미하던 자들도 총명하게 되며 원망하던 자들도 교훈을 받으리라 하셨느니라(창조주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여호와는 지혜를 주시며 지식과 명철을 그 입에 넣어 주시는 것임, 잠2:5-6)“(사29:15-24);
(1) 첫째, 제15-16절입니다; “15. 자기의 계획을 여호와께 깊이 숨기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의 일을 어두운 데에서 행하며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보랴? 누가 우리를 알랴? 하니, 16. 너희의 패역(悖逆, 패륜과 반역)함이 심하도다. 토기장이를 어찌 진흙같이 여기겠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어찌 자기를 지은 이에게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나를 짓지 아니하였다 하겠으며 빚음을 받은 물건이 자기를 빚은 이에게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총명(聰明, 이치를 밝혀내는 지혜)이 없다 하겠느냐?”(사29:15-16). 여기서 이사야는 행악자(行惡者, 악을 행하는 사람)의 근본적인 사고방식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다음과 같이 분설하고자 합니다;

1) 하나, “15. 자기의 계획을 여호와께 깊이 숨기려 하는 자들”(사29:15a)에 대하여 그 근원을 밝혀보자면 창세기 제4장에 기록되어 있는 ‘카인’(Cain)의 범죄사건을 먼저 살펴보아야만 합니다. 그 이유는 카인의 범죄 가운데 그러한 죄악의 원형이 다음과 같이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의 제사를 열납(悅納, 바친 것을 기쁘게 받아들임)하지 아니하고 동생 아벨의 제사만을 받아들이신 여호와 하나님에게 대하여 원망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습니다(창4:5). 하지만 피조물인 카인에게는 창조주이신 하나님께 앙갚음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불타는 적개심을 친동생인 아벨에게 돌리게 됩니다.
2) 그와 같은 카인의 범죄심리를 하나님께서 이미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강력하게 사전경고하고 있습니다;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창4:7b). 그러나 카인은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합니다. 그 이유는 그가 동생 아벨을 완전범죄로 살해할 수 있는 계획을 이미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카인은 자신 있게 시나리오대로 다음과 같이 완벽한 방법으로 아벨을 살해하여 암매장을 하고 있습니다; “사면이 확 트인 들판 한가운데로 동생을 불러냅니다. 주위에 보는 눈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거듭 확인합니다. 그 다음에 무슨 중요한 논의를 하는 것처럼 동생의 시선을 끌다가 순식간에 숨겨온 무기로 동생의 머리를 박살을 내고 맙니다. 그리고 사체를 땅속 깊이 암매장한 것입니다”(창4:8의역).
3) 둘, “그들의 일을 어두운 데에서 행하며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보랴? 누가 우리를 알랴? 하니”(사29:15b); 카인은 자신이 행한 암살과 암매장이 어두운 데서 행한 완전범죄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카인의 생각은 다음과 같은 이치 때문에 가장 어리석은 것입니다; “한마디로, 카인은 아무도 본 사람이 없으므로 완전범죄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의 눈만 의식한 피조물의 판단입니다.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는 사람의 육신의 모집단인 땅이 살아서 말을 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창2:7, 4:11, 눅3:8, 19:40). 그리고 사람이 흘린 피도 살아서 생명을 잃게 된 억울함을 호소할 수 있는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창4:10)”.
4) 더구나 어두움과 밝음 그 모두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사45:7) 양쪽을 전부 볼 수 있는 눈을 지니고 계십니다. 창세기 제1장을 보면 어두움의 세계에 빛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창1:3). 그런데 그 빛을 일부 제한하면서 밤을 창조하십니다(창1:4-5). 그것은 완전한 어두움이 아니며 어디까지나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수면을 편히 취할 수 있는 상대적인 어두움의 환경을 만들어 주신 것에 불과합니다. 그 시간대에는 사람의 눈으로 가시광선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에게만 어두움으로 느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가시광선 뿐만 아니라 불가시광선까지 전부 보고 계십니다.
5) 그러므로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는 어두움이 없습니다. 그 사실을 어리석게도 어두운 환경 가운데서 범죄를 한 인간들이 깨닫지 못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이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5.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요1:5). 어두운 구석에 있는 모든 것까지 창조주의 눈 앞에 마치 벌거벗은 것처럼 속속들이 드러날 따름입니다(히4:13). 놀랍게도 젊은 나이에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하고 있는 요셉이 그 사실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습니다(창39:9). 그것이 그의 형통함의 비밀일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시커먼 속도 모두 보고 계시는 것입니다(히4:12).
6) 셋, “16. 너희의 패역(悖逆, 패륜과 반역)함이 심하도다”(사29:16a); 이사야는 위와 같은 행악자들의 행태는 패역함이 심하기 때문에 발생하고 있는 것이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가 말하고 있는 패역함이라고 하는 것은 ‘패륜과 반역’이라는 두 가지의 의미를 합성한 용어입니다; 먼저, ‘패륜’은 피조물인 인간들이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를 업신여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창조의 질서는 자식이 아버지를 공경하고, 종이 주인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가장 기본적인 윤리가 땅에 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7) 다음으로, ‘반역’은 종이 주인의 자리를 차지하고자 힘으로 반란을 일으키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이사야 제14장의 기록이 그러합니다; 이사야는 히브리전승, 곧 미의 천사장 ‘루시엘’이 그 보좌를 창조주의 자리까지 높이려고 하다가 벌을 받아 이 땅에 떨어져 사탄인 ‘루시퍼’가 되었다고 하는 히브리전승을 원용하여 바벨론의 멸망을 예언하고 있습니다(사14:4, 11-20). 그리고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의 ‘포도원 농부의 비유’가 또한 그러합니다; 농부들이 주인의 포도원을 차지하고자 그 상속자인 아들을 살해하고 만다는 이야기입니다(마21:38-39).
8) 넷, “토기장이를 어찌 진흙같이 여기겠느냐?”(사29:16b); 사람들이 하나님께 대하여 패역을 행하기 때문에 행악자가 되고 있습니다. 그들이 패역한 행위를 일삼을 수 있는 기본인식을 이사야는 3가지로 나누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첫번째 인식에 대하여 이 대목에서 알기 쉽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 내용은 사람들이 교만하게도 창조주를 한갓 피조물로 여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피조물인 인간들이 보지 못하는 어두운 곳에서 은밀하게 행한 살인사건을 창조주이신 하나님도 인지할 수가 없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죄입니다.
9) 다섯, “지음을 받은 물건이 어찌 자기를 지은 이에게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나를 짓지 아니하였다 하겠으며”(사29:16c); 피조물이 주제넘게도 자신이 “스스로 존재하고 있는 자”(출3:14)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자신은 자연히 이 세상에 태어난 존재이지 결코 어떠한 창조주에 의하여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주장이 왜 잘못된 것인지 다음과 같이 살펴보고자 합니다; 성경은 이 세상에 스스로 존재하는 자는 여호와 하나님 한 분 뿐이시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출3:14).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이 창조주이시며 그 다음에 존재하게 된 것은 전부 창조주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물들입니다(창1:1-2:25, 요1:1-5).
10) 인류 역시 창조주 하나님께서 손수 만드신 피조물입니다. 창세기 제1장 제26-27절 그리고 제2장 제7절과 제22절에서 정확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창조주의 ‘선재성’(先在性, pre-existence)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30.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요1:30). 그리고 의사 누가는 알기 쉽게 예수님의 족보를 추적하면서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38. 그 위는 에노스요, 그 위는 셋이요, 그 위는 아담이요, 그 위는 하나님이시니라”(눅3:38).
11) 스스로 창조물이 아니라고 우기는 것은 창조주의 존재를 부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유신론이 아니고 유물론적인 사고방식입니다. 그 사고방식이 오늘날까지 큰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창조주의 존재를 부인하고자 종의 자연발생론과 진화론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과학적인 방법론으로서 존재론적 인식론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나아가서 ‘자력구원’(自力救援)과 스스로 신이 될 수가 있다고 하는 종교사상을 널리 퍼뜨리고 있습니다.
12) 여섯, “빚음을 받은 물건이 자기를 빚은 이에게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총명(聰明, 이치를 밝혀내는 지혜)이 없다 하겠느냐?”(사29:16d); 흔히 세상에서 성공하고 이익을 크게 얻자면, 하나님의 말씀이나 그리스도의 방법론보다는 사람들이 추구하고 있는 세상적인 방법론과 지혜가 훨씬 쓸모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그것은 잘못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피조물이 감히 창조주이신 하나님에게 지혜가 없고 문제해결의 능력이 없다고 언급하는 것은 전혀 이치에 맞지 않는 주장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현실적으로는 이사야의 주장보다 사람들의 주장이 더 현실타당성과 설득력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 이유가 도대체 무엇일까요?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합니다;
13) 창조주와 피조물은 그 시야가 다릅니다; 창조주는 자신이 만든 천하만민과 만물을 모두 골고루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부모님이 자식을 사랑하고 있는 ‘내리사랑’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두의 생명을 살리고 돌보고자 합니다. 그것은 모두의 생명을 살리기를 원하고 있는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입니다. 반면에 인간의 사랑은 무척 제한적인 것입니다. 자기자신과 가족 또는 이웃과 동족 까지가 그 한계입니다. 적대국이 아니라 자국을 살리고자 합니다. 이웃나라의 이익이 아니라 자국의 이익이 우선입니다. 남이 먼저가 아니라 자기와 가족이 우선입니다. 그러므로 도저히 이웃과 원수를 위하여 자신을 희생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현실이므로 자연히 세상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방법론과 출세 지향적인 지혜가 쓸모 있는 것입니다.
14) 절대적인 사랑과 헌신 그리고 이웃과 원수까지 사랑하고 구원하라고 하는 창조주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과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삶은 세상사람들에게 애초부터 고려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이 행한다면 자신과 가족의 희생이 그만큼 커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땅에 오신 메시아 때문에 이사야의 설명과 예언이 힘을 얻고 있습니다. 선민구원이 아니라 만민구원을 위하여 자신을 죄사함의 제물로 십자가에서 희생했기 때문에 무덤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영생의 몸으로 부활하여 승천하게 되는 새 역사가 발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새로운 시대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시며 새로운 언약을 세우신다는 의미입니다. 일찍이 선지자 이사야로 하여금 예언하고 외치라고 했던 메시아의 이야기가 현실화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피조물인 인간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내려놓고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님의 행적과 교훈을 되새겨보아야만 합니다.
(2) 둘째, 제17절입니다; “17. 오래지 아니하여 레바논이 기름진 밭으로 변하지 아니하겠으며, 기름진 밭이 숲으로 여겨지지 아니하겠느냐?”(사29:17); 이사야가 이방나라의 대표로서 ‘레바논’을 거론하고 있습니다(사29:17b). 그 이유는 레바논 땅에서 페니키아왕국이 발전했는데 그 중심도시가 우상을 크게 섬긴 시돈과 두로이기 때문입니다;

1) 북조 이스라엘왕국의 역사만 살펴보더라도 아합 왕의 아내가 그 유명한 이세벨입니다. 그녀는 시돈의 제사장이며 왕인 옛바알의 딸입니다(왕상16:31).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바알 신을 섬기는 무당 옛바알이 시돈의 왕권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시돈은 우상 바알의 나라입니다. 그리고 시돈이 개척한 무역항이 바로 두로입니다. 여기서 이사야가 ‘기름진 밭’(사29:17c)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은 예수님의 ‘씨 뿌리는 비유’를 참고하면, 복음을 받아들여서 싹을 틔울 수 있는 옥토(沃土, 비옥한 토지)인 ‘좋은 마음 밭’을 의미하고 있습니다(마13:18-24).
2) 따라서 오래지 아니하여(사21:17a) 700년 후가 되면 메시아가 두로와 시돈을 다니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복음으로 전하게 될 것입니다(마15:21-28). 그러면 이방인이며 바알 우상을 크게 섬기던 두로와 시돈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게 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마11:21-22). 반면에 선민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배척할 것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던 옥토 제사장나라가 사라지고 척박한 ‘숲’으로 변하고 마는 것입니다(사29:17d).
(3) 셋째, 제18절입니다; “18. 그날에 못 듣는 사람이 책의 말을 들을 것이며, 어둡고 캄캄한 데에서 맹인의 눈이 볼 것이며”(사29:18);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제사장나라 거룩한 백성으로 삼으신 뜻은 그들 선민들이 이방나라에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선지자로서의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창12:1-4, 20:7, 23:6). 그런데 이스라엘 자손들은 선민만의 구원과 민족적인 우월사상에 빠져서 이방인들을 멸시하고 차별했습니다. 이방나라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아니했으며 그들 선민들이 창조주 하나님의 구원과 복을 독점하고자 했습니다.
1) 그 모습을 웅변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선지서가 바로 ‘요나’입니다(욘1:2, 3:2-10). 그래서 훗날 메시아는 자칭 선민인 유대인들에게 요나의 표적과 교훈 밖에는 보여줄 것이 없다고 단언하고 계십니다(마12:39-41, 16:4). 그와 같은 맥락에서 선지자 이사야는 구약시대 하나님의 말씀을 전혀 듣지 못하고 있던 이방나라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될 것임을 예언하고 있습니다(사29:18a). 그들이 히브리정경의 말씀을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하여 알아 듣고서 영적인 무지를 벗어나게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영적인 눈을 뜨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이사야의 표현이 절묘하며 그 의미가 매우 인상적입니다; “어둡고 깜깜한 곳에서는 맹인이나 정상인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눈을 뜨게 되면 그 어두움이 사라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새로운 세상을 보게 됨으로써 믿음의 삶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축복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믿음의 인생을 살아가게 된다는 뜻입니다”(사29:18b 의역)
(4) 넷째, 제19절입니다; “19. 겸손한 자에게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쁨이 더하겠고, 사람 중 가난한 자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니”(사29:19); 이방사람이라고 하여 모두가 우상을 섬기고 무신론(無神論)에 빠져 있는 오만한 자들이 아닙니다. 그 가운데에는 창조설을 믿으며 창조주의 존재를 찾고 있는 구도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창조주 앞에 겸손하게 서고자 하는 자들입니다. 그러한 자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면 메시아를 이 세상에 구원주로 보내어 주신 창조주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방인이지만 구원을 받게 되는 겸손한 자들이 얼마나 기뻐하게 될지 모릅니다(사29:19a).
1) 그리고 이 세상에서 가진 것이 별로 없는 자가 ‘가난한 자’ (사29:19b)입니다. 약육강식의 사회에서 가난한 자는 강자에 의하여 짓밟히고 사회적으로 인간대접을 받지 못하고 소외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사야는 그 가난한 자들이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 곧 여호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와 같은 변화가 오게 될까요? 구약이나 신약이나 하나님의 말씀의 뜻은 동일합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선민들에게 애굽에서의 긴 나그네생활과 노예생활을 생각하면서 너희들은 율법을 준수하라고 하십니다.
2) 그 뜻은 압제자 애굽 사람들처럼 행동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사람을 노예로 부리지 말고 인간대접을 해주며 사회적으로 고아와 과부 등 가난한 자를 돌보아주고 살길을 마련해주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출22:21-27, 신14:29). 그와 같은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라고 메시아가 훗날 유대 땅에 오셔서 똑같이 강조하고 있습니다(마25:40). 그런데 유대인들보다 이방인들이 먼저 메시아의 복음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방인사회에 살고 있는 가난한 자들에게 즐거운 복이 먼저 임하고 있는 것입니다(사29:19c).
(5) 다섯째, 제20-21절입니다; “20. 이는 강포한 자가 소멸되었으며, 오만한 자가 그쳤으며, 죄악의 기회를 엿보던 자가 다 끊어졌음이라. 21. 그들은 송사로 사람에게 죄를 씌우며, 성문에서 판단하는 자를 올무로 잡듯 하며, 헛된 일로 의인을 억울하게 하느니라”(사29:20-21); 하나님께서는 메시아의 복음이 이방인사회에 먼저 전파되게 함으로써 장차 새로운 사회가 그곳에 형성되도록 할 것입니다.
1) 그 사회의 모습을 이사야가 이미 예언한 바 있습니다; “4. 공의로 가난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의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그의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사11:4), “9.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사11:9). 이사야는 이미 제11장에서 예언한 것 곧 메시아의 복음이 살아 숨쉬는 사회의 모습을 제29장 본문에서 다시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두 가지 예언 사이의 공통점을 다음과 같이 살펴보고자 합니다;
2) 하나, “20. 이는 강포한 자가 소멸되었으며”(사29:20a); 강포한 자는 어떠한 사람일까요? 그 특징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폭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자입니다. 또 하나는, 부와 권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자입니다. 복음이 사회적으로 살아 숨쉬게 되면 먼저 폭력의 시대가 사라지게 됩니다. 그 다음에는 평등의 사회가 도래하게 됩니다. 그 평등사회에서는 부와 권력을 가진 자가 송사를 통하여 약자에게 죄를 덮어 씌우게 되는 현상이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사29:21a 반대해석). 그것이 하나님의 공의로 가난한 자를 심판하는 것입니다(사11:4a).
3) 둘, “오만한 자가 그쳤으며”(사29:20b); 오만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무시하는 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의 취지 대신에 무엇을 내세우고 있을까요? 그것이 바로 공동체의 다수 의견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모든 생명을 살리고자 하시는 창조주의 말씀을 버리고 자신들의 다수의 의견이 더 옳다고 상대적인 정의를 내세우고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 당시에 그러한 다수의 의견은 어디에서 결정되는 것일까요? 보통 그 장소가 성문(城門, the gate of castle)입니다;

4) 그러므로 이사야가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오만한 자는) 성문회의를 통하여 결정된 다수의견을 가지고 선지자 곧 하나님 말씀으로 세상의 잘못을 책망하고 있는 자를 죄인으로 몰아 정죄하고 있다”(사29:21b 의역). 요컨대, 복음이 제대로 사회에 정착하게 되면 그러한 오만한 전체주의 사고방식이 그칠 것이라고 하는 이사야의 예언입니다. 그와 같은 사회에서는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서있는 자, 겸손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자가 리더의 역할을 담당하게 될 것입니다(사11:4b).
5) 셋, “죄악의 기회를 엿보던 자가 다 끊어졌음이라”(사29:20c); 죄악의 기회를 엿보던 자가 누구일까요? 제11장 제4절의 말씀에 비추어 보게 되면, “세상의 권세를 잡은 자이며 악인”입니다(사11:4c). 그리고 제29장 제21절을 참고하면, “거짓말로 의인을 잡아 죽이려고 하는 자”들입니다(사29:21c). 그들이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이사야의 예언입니다. 그 이유는 메시아가 무덤에서 부활하심으로 천하의 권세를 가지시게 되기 때문입니다(마28:18). 그 결과 세상의 임금이 쫓겨나며 죄악의 기회를 엿보던 자들이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요12:31). 참고로, 그리스도가 승천하심에 따라 성령님이 강림하셔서 그 일을 계속하실 것입니다(요16:8, 11).
(6) 여섯째, 제22절입니다; “22. 그러므로 아브라함을 구속하신 여호와께서 야곱 족속에 대하여 이같이 말씀하시되, 야곱이 이제는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겠고 그의 얼굴이 이제는 창백해지지 아니할 것이며”(사29:22); 이사야의 관심은 자신의 동족인 야곱 족속이 어떻게 구원을 받게 될 것인가에 집중되고 있습니다. 그는 모세가 기록한 창세기의 내용을 염두에 두고서 자신 있게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예언으로 동족들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을 구속하신 하나님께서는 이제 아브라함처럼 야곱 족속들이 살아가고자 결단만 한다면(창12:1-4) 똑같은 구원을 주실 수가 있습니다. 그 이치는 일찍이 아브라함을 위하여(창19:29) 그의 장조카 롯의 집안을 심판에서 구원해주신 것과 동일합니다”(창12:1-4, 19:29, 사29:22-23).
1)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처럼 유대인들이 살아갈 수가 있을까요? 아브라함처럼 이방세계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그 말씀 따라 선지자로 살아가는 모범을 보일 수가 있을까요? 결코 쉽지 아니할 것입니다. 그들은 뿌리깊은 선민우월사상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훗날 메시아를 보내셔서 반드시 모든 원수를 쳐부수시고 선민을 구원하여 이스라엘의 영광을 온세상에 떨치게 하실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어떻게 아브라함처럼 선교의 일꾼으로 이방세계로 나설 수가 있겠습니까?
2) 따라서 이사야는 동족들에게 조상 야곱이 어떻게 이스라엘로 변화가 되었는지를 생각해보라고 권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부끄러운 인생을 살았고 그 때문에 생사의 위기에 여러 번 내몰렸던 야곱입니다. 그러했던 그가 크신 하나님의 구원의 뜻을 깨닫고 새로운 인생 이스라엘로 살아가게 됩니다. 잠시 몇 가지만 살펴보고자 합니다; 야곱이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부끄러운 일을 행한 것은(22b) 아버지 이삭과 형 에서를 속인 사건입니다; 형의 장자권과 장자에게 주는 아버지 이삭의 영적인 축복을 가로채고자 음모를 꾸민 야곱입니다(창25:31-34, 27:18-30).
3) 아버지의 축복을 얻기 위해서는 어머니 리브가의 의견을 따르는 방법을 선택한 야곱입니다. 간교하게도 복은 자신이 받고 저주는 어머니가 받게 되는 방법을 못이기는 척 받아들인 야곱입니다(창27:11-14). 물론 명분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차남인 자신을 영적인 장자로 세우실 것이라고 벌써 예언하신 바가 있기에 그 뜻대로 실천한다는 것입니다(창25:23). 겉으로 보면, 하나님의 예언을 실현하기 위하여 엄청난 위험을 감수하는 희생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 속을 들여다보면, 개인적인 이기심과 간교함이 꿈틀거리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부끄러운 사기꾼이 바로 야곱입니다.
4) 창백해진다고 하는 것은(22c) 죽음의 위기에 빠져들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세상적인 방법으로는 도저히 빠져나올 수가 없는 구멍입니다. 그때 가서야 살려달라고 하나님께 매어 달리게 됩니다. 야곱의 경우 여러 번 그러합니다; ①형 에서의 축복을 가로채었기 때문에 야곱은 훗날 에서가 족장이 되면 죽을 운명에 빠져들게 됩니다(창27:41-45). 그래서 부모님의 도움으로 겨우 외가로 피신하게 됩니다. ②외삼촌 라반의 집에서도 재산을 이루기 위하여 편법을 사용합니다(창30:37-43). 물론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방법을 따르고 있기는 하지만 라반의 입장에서는 억울한 처방입니다(창31:7-13). 그 때문인지 장인과 처남으로부터 맞아 죽을 처지가 되고 맙니다(창31:1-2).
5) ③그래서 처자식을 이끌고 양떼를 몰고서 야반도주하고 있습니다. 일주일 만에 붙잡히게 되어 목숨이 위험합니다(창31:23). 하지만 하나님께서 도와 주셔서 겨우 그 고비를 벗어납니다(창31:24). 그 다음 죽을 고비가 또 두 차례나 찾아옵니다; ④먼저 얍복 나루터에서 숙적 에서와 만나게 됩니다(창32:6-7). 그것은 자업자득의 위기이지만 하나님께서 구해 주십니다(창32:26-30). ⑤또 세겜 사건을 경험하게 됩니다(창34:25-31). 벧엘로 돌아가 하나님께 제단을 쌓겠다는 약속을 헌신짝처럼 버린 야곱에게 발생하고 있는 위기상황입니다(창28:12-22, 33:17-20). 마침내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야곱이 살려달라고 매어 달립니다.
6) 하나님의 답변은 애초의 약속대로 벧엘로 돌아가서 제단을 쌓고 하나님의 뜻만 따르는 믿음생활을 평생동안 하라는 것입니다(창35:1-7); 그렇게 자신의 세상적인 이익과 편법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방법으로 변화된 인생을 살아가는 자의 이름이 ‘이스라엘’입니다(창32:28, 35:10). 그 뜻은 야곱의 방법을 버리고 이제는 하나님과 동행하며 그 뜻을 행하는 믿음의 대 족장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거듭난 인생을 살아간 자가 이스라엘이며 그의 자손들이 바로 선민들입니다. 그러므로 이사야는 동족들에게 야곱으로 살지 말고 이스라엘 답게 살아갈 때에 구원의 길이 열린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사29:22-23);

(7) 일곱째, 제23절입니다; “23. 그의 자손은 내 손이 그 가운데에서 행한 것을 볼 때에 내 이름을 거룩하다 하며, 야곱의 거룩한 이를 거룩하다 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경외할 것이며”(사29:23); 사기꾼과 같은 야곱을 믿음의 대 족장 이스라엘로 변화시키신 하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the holy God)이십니다. 그와 같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도 새로운 ‘거룩한 인생’(a holy life)을 살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실 것입니다.
1) 그 사실을 이사야가 굳게 믿고서 다음과 같이 예언하고 있습니다; “23. 그의 자손은 내 손이 그 가운데에서 행한 것을 볼 때에 내 이름을 거룩하다 하며, 야곱의 거룩한 이를 거룩하다 하며”(사29:23a). 이사야는 또한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는’(창22:12, you fear God) 놀라운 변화가 선민들에게 훗날 발생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사29:23b).
2) 도대체 ‘거룩하신 하나님’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어떠한 차이와 관련성을 가지고 있는 개념일까요? 이사야는 그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무엇을 예언하고 싶어하는 것일까요? 이제 항목을 바꾸어서 ‘거룩하신 하나님’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의 개념풀이를 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제24절이 말하고 있는 내용 곧 ‘지혜를 주시는 하나님’에 대하여도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합니다.
(8) 여덟째, 제24절입니다; “24. 마음이 혼미하던 자들도 총명하게 되며, 원망하던 자들도 교훈을 받으리라 하셨느니라”(사29:24); ‘거룩하신 하나님’은 속세를 떠나 하늘에 계시는 창조주 하나님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성자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메시아로 이 땅에 태어나십니다. 하지만,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고 무덤에서 영생의 몸으로 부활하여 승천하시면 하늘 보좌로 되돌아가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사람의 아들이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비록 사람들과 친밀하지만 부활과 영생을 줄 수 있는 분으로서 경외의 대상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의 본질적인 개념풀이가 될 것입니다.
1) 그리고 제24절이 말하고 있는 내용 곧 ‘지혜를 주시는 하나님’은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와 그 역할을 아는 것이 구원을 얻는 신앙입니다. 그러한 사실을 말하고 싶었는지 이사야가 본문에서 그와 같은 뉘앙스를 기록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좀더 쉽게 그러나 체계적으로 본문을 이해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사도 바울의 사례를 들어보고자 합니다;
2) 일찍이 랍비였던 사울은 히브리경전을 두루 깊이 공부한 젊은 랍비이며 율법학자입니다(행9:1-2). 그는 총명한 청년이었기에 히브리어로 기록되어 있는 히브리경전(미크라)은 물론 말로 전승되고 있는 경전들(미쉬나)과 바리새인들이 자랑하고 있는 주석들(미드라쉬)도 전부 공부하고 모든 히브리사상에 밝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교포 유대인입니다. 소아시아 길리기아 성의 수도이며 교육도시인 다소 출신이므로(행22:3a) 당연히 헬라어와 철학에 대해서도 능통합니다.
3) 그렇지만 사울은 어린 시절부터 예루살렘에 유학하여 당대 최고의 율법학자인 가말리엘에게 사숙했기 때문에(행22:3b) 유대교의 가르침인 유일신론만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쉐마’에 적혀 있는 내용 그대로입니다; “4.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5.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6:4-5). 유대교에서 말하고 있는 하나님 여호와는 한 마디로, ‘거룩하신 하나님’(the holy God)입니다. 그 의미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며 우주 바깥 하늘에 보좌를 펴고 계시는 창조주이시라는 것입니다(창1:1-2, 왕상8:27, 시113:4-5).
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계시는 그 거룩한 장소를 피조물인 인간이 감히 범접할 수가 없습니다. 그 앞에 함부로 서는 자는 모두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출33:20). 일찍이 모세도 그 신발을 벗어야만 했습니다(출3:5). 그런데 거룩하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구주로 이 세상에 메시아를 보내고 계십니다. 독생자의 영광을 지니신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사람으로 태어나서 구원주로 오신 것입니다(요1:14-18). 그것이 성육신입니다. 그리고 나이 30이 되자(눅3:23) 제자들과 함께 공생애를 사시면서 복음사역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5)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통하여 사람들이 기이하게도 하나님을 보게 되는 영광을 얻게 됩니다(요1:18, 14:7, 9). 그리고 예수님의 대속의 죽으심과 영생의 부활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을 맛보게 됩니다. 따라서 사도 요한이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요17:3). 열두 제자가 스승이신 예수님과 공생애를 함께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속의 죽으심과 부활사건을 경험하자 그 분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지니신 분임을 깨닫게 됩니다.
6) 부활과 영생의 하나님이심을 알고 경배하며 경외하게 됩니다(마28:16-20, 눅24:49-53). 비록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으나 창조주의 한 위격이심을 인정한 것입니다. 그 진리를 깨닫는 자에게 구원이 입체적으로 임하게 된다는 사실을 사도 요한이 ‘요17:3’ 절에서 갈파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랍비 사울의 경우에는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영광을 가지고 영적으로 그에게 임하였을 때에(행9:3-19) 무엇을 깨달었을까요? 그는 구원주로 오신 그리스도를 창조주의 한 위격으로 경배하고 경외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사실을 체험적으로 깨달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롬1:16-17).
7) 그리고 그는 남은 평생을 이방인 사도로 살아가게 됩니다(행22:21). 성령님의 인도를 따라 그 지혜의 도움을 받아서 전도와 선교의 일생을 살아간 것입니다. 그와 같은 자신의 변화와 경험을 바탕으로 사도 바울이 새로운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6.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엡4:6). 그 의미를 간략하게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①성부 하나님께서 만유 위에 계십니다(엡4:6a). 그러므로 ‘거룩하신 하나님’이십니다;

8) ②성자 하나님께서는 메시아로 이 세상에 오셔서 사람들과 함께 사셨습니다(엡4:6b). 그러나 부활 승천하셔서 주님이 되셨습니다. 장차 심판주로 이 세상에 오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경외의 대상’입니다. ③성령 하나님께서는 강림하셔서 성도들의 심령 속에 내주 역사하십니다(엡4:6c). 영적인 믿음의 삶이 가능하도록 그 앞길을 ‘하나님의 지혜’로 인도해 주십니다. 그 사실을 이사야가 다음과 같이 예언하고 있습니다; “24. 마음이 혼미하던 자들도 총명하게 되며, 원망하던 자들도 교훈을 받으리라 하셨느니라”(사29:24).
결론적으로, 선민들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번제를 드리고 예루살렘을 명절 때마다 방문하는 것으로 구원을 받기에 합당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자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전하면서 그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적들의 공성작전으로 예루살렘이 망하고 성전이 무너지며 선민들이 이방인들에게 끌려가서 참담한 생활을 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먼 훗날 그들에게 찾아올 것임을 또한 예언하고 있습니다;
즉, 죄임임을 비로소 깨닫고서 이방인들의 땅에서 유다 사람들이 창조주 하나님을 찾게 되는 역사가 있을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티끌과 같이 비천한 피조물에 불과하지만 그 속에 하나님의 영이 임하여 그 옛날 아브라함처럼 중보자로서의 삶을 살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설명을 덧붙이자면, 그 모든 변화는 메시아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유대 땅에서 시작될 것입니다.
이사야의 본문 예언은 오늘날 주일예배와 교회생활에만 만족하고 있는 형식적인 신앙인의 모습을 되돌아보게 해주고 있습니다. 높은 성 교회에 살고 있다는 것을 자랑할 것이 아니라 낮은 땅 티끌과 같은 자신의 모습을 창조주 앞에서 발견하게 되는 눈이 열려야 할 것입니다.
그곳에서부터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직접 만나고 이사야와 같은 선지자로서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은혜가 임할 것입니다. 이사야는 장차 예루살렘이 망하게 되는 미래지사를 내다보고 있습니다. 선민의 나라가 망하게 됨으로써 2가지의 역사가 발생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선민의 지위를 잃어버리고 이방인처럼 살게 되는 유대인들이 훗날 메시아의 복음을 믿고서 하나님께 돌아오는 역사가 있을 것입니다. 높은 성 예루살렘이 망하자 자신들의 미천함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티끌과 같은 자신의 입술로 하나님 앞에 회개하면서 새로운 인생을 살고자 합니다.
또 하나는, 제사장나라를 무너뜨리고 자신들의 군사력을 과신하고 있는 강대국들의 종말에 대한 예언입니다. 하나님을 업신여기고 하나님의 기업조차 망가뜨리고 있는 그들을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티끌만도 못하게 만들어 버리실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사야는 한가지 예언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하늘에까지 닿을 수 있는 바벨탑을 쌓을 수 있다고 자만하면서 창조주를 무시하면서 한세상을 제멋대로 살아가는 자들이 당하게 되는 결국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적인 것으로 결코 채울 수 없는 그 영적인 갈급함을 하나님께서 채워주어야 하는데 그것을 부수어 버린 그들입니다. 그러므로 죽을 때까지 그들이 겪게 되는 영적인 고통이 어떠하겠습니까?
이사야가 알기 쉬운 문장으로 다음과 같이 말해주고 있습니다; “8. 주린 자가 꿈에 먹었을지라도 깨면 그 속은 여전히 비고, 목마른 자가 꿈에 마셨을지라도 깨면 곤비하며 그 속에 갈증이 있는 것같이, 시온 산을 치는 열방의 무리가 그와 같으리라”(사29:8).
제사장나라 거룩한 백성들도 타락하고 있습니다. 입술로는 하나님을 경배하고 있으나 그 마음은 점점 멀어지고 있습니다(사29:13b). 구원과 영생이 인생의 목적이며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처럼 이웃나라와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로서의 삶을 살아가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그 대신에 단지 이 세상에서 선민으로 존경을 받으며 평생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최고라고 믿고 있습니다(사29:13a).
그러므로 율법생활도 남의 눈을 의식하는 겉치레가 되고 있습니다. 제사와 절기에의 참여도 형식적인 종교행위가 되고 있습니다. 오로지 신명기 제28장 전반부에 기록되어 있는 세상적인 복을 얻기 위한 종교적인 기복신앙에 머무르게 됩니다. 따라서 사람의 마음속 중심을 들여다보시는 하나님의 눈 밖에 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사야는 하나님의 벌이 다음과 같이 임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1) 첫째, 사람의 계명이나 장로들의 경험과 지식으로 율법의 세칙을 만들어서 종교행위를 하고 있으니 여호와께서 그들의 제사를 열납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사29:13c).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아니하시고 있으므로 비록 그것은 요란하고 화려하지만 성전의 마당만 밟고 마는 종교행사라고 하겠습니다(사1:12).
(2) 둘째,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와 메시아의 사역을 볼 수 있는 영적인 눈이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사29:14). 그 결과 선민구원과 민족우월사상만 고수하다가 유대교지도자들이 만민구원을 부르짖는 메시아를 죽여버리는 잘못을 범하게 될 것입니다. 그 결과는 구원과 영생의 복음이 이방 땅으로 넘어가게 되고 예루살렘 성과 성전에 멸망이 찾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날에도 살아있고 운동력이 있는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히4:12). 이사야가 전해주는 그 예언 앞에 우리들의 현실을 비추어 보면서 다시 한번 옷깃을 여미고 진정과 신령으로 예배인생을 살아가야만 하겠습니다. 그 은혜가 저와 여러분에게 이 시간 충만하게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