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26년 설교문(손진길 목사)

“스스로 구원할 수 없는 인간의 역사가 심판을 받아 사라지고 여호와 하나님이 창조하시는 영원한 구원이 이 땅에 임하게 된다고 이사야가 예언하다”(사25:1-26:21)(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5. 7. 23. 01:37

제목; “스스로 구원할 수 없는 인간의 역사가 심판을 받아 사라지고 여호와 하나님이 창조하시는 영원한 구원이 이 땅에 임하게 된다고 이사야가 예언하다”(25:1-26:21)

설교일; 주후 2026 9 6일 주일

작성자; 손진길 목사(25723일 수요일 작성)

 

이사야는 본문 곧 그의 선지서 제25장과 제26장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역사섭리를 찬송하며 또한 장차 대속의 그리스도가 성취하는 창조주 여호와의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새 시대를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은 선지자 이사야가 생전에 경험하게 되는 것과 그의 사후에 이 세상에 임하게 되는 것으로 대별(大別)할 수가 있습니다;

(1)  첫째, 이사야의 생전에 발생하고 있는 이방인의 나라 다메섹 아람왕국과 선민의 나라 북조 이스라엘왕국의 멸망을 거론하고 있습니다.

(2)  둘째, 그의 사후 150년내에 임하게 되는 앗수르제국 및 신바벨론제국의 멸망 그리고 마지막 남은 선민의 나라 다윗왕조 유대왕국은 물론 그 옛날 여호와의 불심판으로 말미암아 지상에서 완벽하게 사라진 소돔과 고모라 등 4도시국가의 터에 다시 건설된 모압왕국의 멸망까지 말하고 있습니다. 참고로, 이사야는 히스기야 왕이 죽은 해인 주전 687년까지 예루살렘에서 선지자 활동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1:1).

(3)  셋째, 그 뿐만이 아닙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자신이 세상을 떠나고 나서 700년이 지나 비로소 예루살렘과 가나안 땅에 오시는 구원주 그리스도와 보혜사 성령님을  영적으로 미리 만나보고서 창조주 여호와의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은혜에 대하여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측면에서 본문은 대속의 그리스도께서 선민의 터전에 오셔서 여호와신앙을 회복하고자 하는 선민의 남은자와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이방인들을 모두 구원하신다는 이른바 새 언약에 대한 선지자 이사야의 영적인 깨달음의 노래라고 하겠습니다(31:31-34, 2:28-32).

그와 같은 관점에서 본문의 내용을 다시 살펴보면 그 문단의 구성이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1)  하나, 25장 제1-5절에서 선지자 이사야는 자신의 조국인 다윗왕조 유대왕국을 침략한 나라와 제국들의 멸망을 가장 먼저 거론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다메섹의 아람왕국(주전 732년 멸망), 북조 이스라엘왕국(주전 722년 멸망), 앗수르제국(주전 609년 멸망), 그리고 신바벨론제국의 멸망(주전 539)을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2)  , 25장 제6-8절에서는 만민구원 영생구원의 천국복음이 유대인사회에서 장차 선포될 것임을 선지자 이사야가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의 사후 700년이 지나 그 땅에서 발생하게 되는 대속의 그리스도의 복음사역을 영적으로 내다보고서 미리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3)  , 25장 제9-12절에서는 다윗왕조 유대왕국의 멸망과 비슷한 시기에 멸망하게 되는 모압왕국의 멸망에 대하여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선지자 이사야가 모압왕국의 멸망에 대하여 유별나게 가슴 아파하는 이유가 두가지로 보입니다;

1)   하나는, 다윗왕가의 조상 가운데 모압 출신 여인 룻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가나안 원주민 출신 다말과 기생 라합도 다윗왕가의 조상이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선지자 이사야는 선민만의 구원보다는 이방인까지 구원하는 만민구원의 그리스도를 소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2)   또 하나는, 아브라함의 장조카인 롯의 장남이 모압이며 모압자손의 왕국이 자리잡고 있는 사해 동쪽 그 땅에 그 옛날 사라진 소돔과 고모라 등 4성읍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압왕국은 선민의 정통성을 지니고 있는 다윗왕조의 친척이며 동시에 그 옛날 여호와의 불심판을 받아 사라진 그 터에 다시 세워진 나라입니다.

3)   그런데 모압왕국의 왕과 대신들 그리고 백성들이 그 옛날 소돔과 고모라의 주민들처럼 똑같이 자신들의 부를 자랑하고 우상을 섬기며 세상적인 쾌락과 향락을 누리기를 너무나 좋아하고 있습니다. 그에 따라 여호와 하나님의 동일한 역사심판이 그 땅에 다시 임하고 마는 것입니다.

(4)  , 26장에서 선지자 이사야는 비록 다윗왕조 유대왕국이 역사적으로 멸망을 당하지만 그 땅에서 새로운 구원의 복음이 움터 나오고 있다는 사실을 노래하고 있습니다(참조, 11:1, 10).

1)   구체적으로 바벨론으로 끌려간 유대왕국의 백성들이 역사를 섭리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로 예루살렘과 고토로 돌아와서 제2성전을 건설하고 여호와의 율법을 지키는 신앙생활을 재개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기적인 선민사상과 그 옛날 다윗의 제국을 재건하는 메시아사상을 고집하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천국복음을 선포하기 위하여 그 땅에 오신 대속의 그리스도를 유대교의 죄인으로 정죄하고 십자가에 못박고 맙니다.

2)   그로 말미암아 역설적으로 그리스도의 영원한 속죄와 영생의 몸으로 부활하는 사건이 예루살렘에서 발생하게 됩니다(24:44-48). 그때부터 이사야의 뒤를 이은 선지자 예레미야가 규정하고 있는 새언약의 시대가 밝아오고 있습니다(31:33-34). 그와 같은 사실들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 본문 제26장의 내용입니다.

3)   참고로, 본문 제26장은 이사야의 그리스도론의 기반이 되고 있으며(52-53)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다시 창조하시는 새 하늘과 새 땅 그리고 새 예루살렘성에 대한 묵시(65-66)의 원조가 되고 있습니다. 그 점을 사도 요한의 계시록에서도 뚜렷하게 확인할 수가 있다고 하겠습니다(21-22).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에 대한 구절풀이에 들어가겠습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얻은 소중한 교훈과 메시지를 차제에 아울러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첫째로, “1. 여호와여 주는 나의(나에게 친히 임재하시고 말씀으로 영적인 깨달음을 주시는 전능하신 창조주, 15:1, 17:1)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를 높이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오리니, 주는 기사를 옛적에 정하신 뜻대로 성실함과 진실함으로 행하셨음이라(예언의 말씀을 먼저 주시고 그대로 신실하게 성취하시는 여호와의 은혜를 찬양하는 것임, 46:9-10, 48:5-7, 55:8-11). 2. 주께서 성읍을 돌무더기로 만드시며 견고한 성읍을 황폐하게 하시며, 외인의 궁성을 성읍이 되지 못하게 하사 영원히 건설되지 못하게 하셨으므로(이 세상의 제국과 왕국은 모두 멸망의 대상이며 역사 가운데 사라질 뿐임, 25:29. 그리스도가 영생의 몸으로 무덤에서 부활하게 되면 악한 영과 세상의 임금이 쫓겨나고 하나님의 나라가 건설되기 시작하는 것임, 11:20, 24:44-49, 28:18-20, 8:1-4), 3. 강한 민족이 주를 영화롭게 하며 포학한 나라들의 성읍이 주를 경외하리이다(이 세상에서 패권과 제국의 영광을 누리는 것보다는 회개하고서 주님이 건설하시는 영생의 나라에 들어가기를 선호할 것임, 11:6, 21:23-27). 4. 주는 포학자의 기세가 성벽을 치는 폭풍과 같을 때에 빈궁한 자의 요새이시며 환난 당한 가난한 자의 요새이시며, 폭풍 중의 피난처시며 폭양을 피하는 그늘이 되셨사오니(13:20-22, 14:29, 25:40), 5. 마른 땅에 폭양을 제함 같이 주께서 이방인의 소란을 그치게 하시며, 폭양을 구름으로 가림 같이 포학한 자의 노래를 낮추시리이다!(12:12, 14:26-30, 37:34-36) 6.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 산에서 만민을 위하여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포도주로 연회를 베푸시리니, 곧 골수가 가득한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맑은 포도주로 하실 것이며(천국잔치를 의미함, 12:37, 22:18-20, 28-30), 7. 또 이 산에서 모든 민족의 얼굴을 가린 가리개와 열방 위에 덮인 덮개를 제하시며(영적인 눈을 떠서 그리스도가 무덤에서 영생의 몸을 입고 부활하시는 것을 볼 것이며 또한 천국이 이 세상에 임하는 것을 보게 될 것임, 9:27-36, 65:17-18, 살전5:14-17), 8.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65:19-20, 19:14, 21:4).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자기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65:19, 21:4).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9. 그날에 말하기를 이는 우리의 하나님이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그가 우리를 구원하시리로다. 이는 여호와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우리는 그의 구원을 기뻐하며 즐거워하리라 할 것이며(만민에게 영생구원의 은혜를 베푸시는 창조주 여호와를 찬양하는 것임, 66:10-22), 10. 여호와의 손이 이 산에 나타나시리니모압이 거름물 속에서 초개가 밟힘 같이 자기 처소에서 밟힐 것인즉(교만한 나라 모압왕국이 멸망을 당할 것이며, 15:8-9), 11. 그가 헤엄치는 자가 헤엄치려고 손을 폄 같이 그 속에서 그의 손을 펼 것이나여호와께서 그의 교만으로 인하여 그 손이 능숙함에도 불구하고 그를 누르실 것이라(누구나 세상적인 교만을 버리고 여호와 하나님 앞에 회개함으로 나아오지 아니하면 결코 구원을 얻지 못할 것임). 12. 네 성벽의 높은 요새를 헐어 땅에 내리시되 진토에 미치게 하시리라(사람의 지혜와 힘을 의지하는 자는 그 성벽이 무너지지만 여호와 하나님이 보내신 대속자 그리스도의 구원을 의지하는 자는 영생의 나라에 들어가게 되는 것임, 1:12-13, 3:13-17)“(25:1-12); 다음과 같이 3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1. 여호와여 주는 나의(나에게 친히 임재하시고 말씀으로 영적인 깨달음을 주시는 전능하신 창조주, 15:1, 17:1)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를 높이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오리니, 주는 기사를 옛적에 정하신 뜻대로 성실함과 진실함으로 행하셨음이라(예언의 말씀을 먼저 주시고 그대로 신실하게 성취하시는 여호와의 은혜를 찬양하는 것임, 46:9-10, 48:5-7, 55:8-11). 2. 주께서 성읍을 돌무더기로 만드시며 견고한 성읍을 황폐하게 하시며, 외인의 궁성을 성읍이 되지 못하게 하사 영원히 건설되지 못하게 하셨으므로(이 세상의 제국과 왕국은 모두 멸망의 대상이며 역사 가운데 사라질 뿐임, 25:29. 그리스도가 영생의 몸으로 무덤에서 부활하게 되면 악한 영과 세상의 임금이 쫓겨나고 하나님의 나라가 건설되기 시작하는 것임, 11:20, 24:44-49, 28:18-20, 8:1-4), 3. 강한 민족이 주를 영화롭게 하며 포학한 나라들의 성읍이 주를 경외하리이다(이 세상에서 패권과 제국의 영광을 누리는 것보다는 회개하고서 주님이 건설하시는 영생의 나라에 들어가기를 선호할 것임, 11:6, 21:23-27)“(25:1-3);

1)    본문의 주제는 한마디로, 하나님의 창조와 역사섭리에 대한 선지자 이사야의 평가입니다(25:1-3). 창세기 제1장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창조하신 다음에 스스로 총평하고 계십니다; “31.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1:31). 자신이 엿새 동안에 창조한 천지만물과 사람들을 보니 보시기에 참 좋았더라”(very good to see, 히브리어로는 웨힌네 토브 메오드,  וְהִנֵּה־טֹ֖וב מְאֹ֑ד)는 평가입니다.

2)    창조주 하나님의 절대평가가 very good’(טֹ֖וב מְאֹ֑ד)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아름답고 좋은 세상이 그만 타락하고 부패가 되고 있습니다. 생명을 돌보고 살리는 것이 아니라 죽이고 망하게 하는 사회와 환경이 조성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세상의 경영을 위임 받은 사람들이 그만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제멋대로 자신들의 이익과 욕심을 이루기 위하여 살아갔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를 존중하고 그 말씀의 뜻을 좇아서 살아갔더라면 피조세계는 여전히 살기에 좋은 세상이었을 것입니다.

3)    그렇게 타락하고 부패해진 세상을 장차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처벌하고 다시 심히 좋은 새로운 세상을 만드실까요? 그것이 선지자 이사야의 궁극적인 관심 사항이며 그의 대 선지서의 주제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는 이사야에게 골짜기의 환상을(22) 보여주시고 역사섭리의 말씀을 들려줌으로써 그 대답을 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사야가 깨달은 진리의 말씀을 동족인 선민 유대인들에게 전달해주라고 하십니다(1:1, 2:1, 6:8-13).

4)    그 가운데 특히 이사야는 먼 훗날 이 땅에 강림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종말심판과 구원에 대한 내용까지 미리 알게 되자 그 내용을 제24장에 일종의 종말 묵시로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25장에서는 하나님의 역사섭리와 종말심판 및 구원의 계획에 대하여 이사야 나름대로의 평가를 내리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제 그 평가의 내용이 어떠한지를 자세히 살펴보기 위하여 본문의 말씀을 다음과 같이 한 절씩 묵상해보고자 합니다;

5)    첫째, 1절입니다; “1. 여호와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를 높이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오리니, 주는 기사(奇事, 기이한 일)를 옛적에 정하신 뜻대로 성실함과 진실함으로 행하셨음이라”(25:1); 이사야가 여기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가 이 대목에서 여호와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25:1a)고 고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흔히 볼 수 있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21:10, 22:15, 23:9, 24:15)라고 하는 선민들의 집단적인 신앙고백이 아닙니다.  

6)    그것은 굉장히 개인적인 고백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의 생명의 창조주이시며 지금도 자신의 인생을 주권적으로 섭리하고 계신다고 하는 깨달음 위에 서있는 신앙 고백입니다. 그와 같은 개인적인 신앙고백은 귀하고도 드문 것입니다. 예를 들면, 대 선지서인 이사야에 있어서도 겨우 5차례 나타나고 있을 뿐입니다(7:13, 25:1, 49:4, 5, 61:10). 그렇다면 이사야는 왜 하나님을 자신의 생명의 주인이며 자신의 인생의 목적이며 동시에 자신이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이유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 근거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 바로 본문입니다.

7)    이사야는 선민과 이방인 그리고 해양국가와 대륙국가의 흥망성쇠와 그 장래의 역사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환상과 말씀을 통하여 이미 살펴본 선지자입니다. 그 결과 그는 이제 그와 같은 역사적인 환경 가운데에서 자신의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만 하는지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때서야 그는 위대한 깨달음을 얻고 있습니다. 그 요체는 환경과 역사가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생명과 인생이 더 중요한 문제라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인생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어떠한 신앙고백을 하고서 남은 인생을 살아가야만 하는가? 이제 본문에서 그 점에 대한 자신의 깨달음을 기록함으로써 종말 묵시에 대한 결론을 맺고 있는 것입니다.

8)    이사야의 개인적인 신앙고백은 철저하게 여호와 하나님이 누구신가?에 대한 자신의 깨달음과 그 평가 위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이 주는 기사(奇事) 옛적에 정하신 뜻대로 성실함과 진실함으로 행하셨음이라”(25:1d)는 것입니다. 그 뜻이 다음과 같습니다; 이사야가 보기에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2가지 일이 참으로 기이합니다; 하나는, 자신을 포함하여 창조되어 있는 세상 모두가 놀랍고 경이로운 것입니다. 사람의 힘과 지혜로 도저히 그렇게 만들 수 없는 세상입니다. 흔히 사람들이 말하듯이 그저 자연이 빚어놓은 신기한 세상이라고 그렇게 수긍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묵시와 계시를 통하여 이사야가 얻은 결론은 우연이 아니라 전지전능하신 창조주가 의도적으로 만들어 놓은 놀라운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내가 주를 높이고”(25:1b).

9)    또 하나는, 자연의 질서를 유지하고 인간의 역사를 섭리하며 이사야 자신의 인생을 주관하고 계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경영하심과 일하심이 실로 경이롭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단지 세상을 만들어놓는데 그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운영되도록 끊임없이 감찰하고 또한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계십니다(19:22).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죄악이 도를 넘고 있을 때에는 역사적인 심판을 행하십니다(15:16, 왕하21:11-13). 마지막에는 종말심판을 행하시고 동시에 자신의 인생을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 살아간 성도들을 구원하십니다(24:14-15).

10)  창조주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과연 믿을 수 있을까요? 이사야는 그 점에 대하여 절대적인 신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주는 기사를 옛적에 정하신 뜻대로 성실함과 진실함으로 행하셨기 때문이라”(25:1d)는 것입니다. 아무리 형편과 상황이 변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선포하신 내용 그대로 역사를 섭리하시고 구원을 행하시고 있다는 뜻입니다. 약속을 어기지 아니하시고 절대적으로 지키시는 그것이 진리이며 신실함입니다. 히브리어로 헤세드’(חסד)입니다. 요컨대, 사람들은 변절하고 자신의 이익을 좇아서 거짓말하지만 창조주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이 이사야의 평가 곧 자신이 깨닫고 있는 하나님과 그 역사하심에 대한 평가입니다. 그러므로 이사야는 자신의 하나님을(25:1a) 높이고 있습니다(25:1b). 그리고 자신의 이름으로 말씀하신 바를 반드시 하나님께서 스스로 지키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25:1c)하고 있는 것입니다.

11)  둘째, 2절입니다;2. 주께서 성읍을 돌무더기로 만드시며 견고한 성읍을 황폐하게 하시며 외인의 궁성을 성읍이 되지 못하게 하사 영원히 건설되지 못하게 하셨으므로”(25:2); 사람이 살고 있는 성읍을 돌무더기로 만들고 황폐하게 하시는 것은(25:2a) 하나님의 역사적인 심판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심판은 선민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동일하게 임하고 있습니다(25:29). 그래서 이사야가 외인의 궁성’(25:2b)을 여기서 특별히 언급하고 있습니다.

12)  더구나 창조주 하나님을 섬기지 아니하고 제멋대로 살고 있는 이방인들은 더 이상 자신들의 역사를 이어갈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왕국이 망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들의 나라가 다시는 건설되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역사를 섭리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25:2c). 따라서 이방나라들이 때가 되면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될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섬기기로 결단하고 구원을 받을 것인지 아니면 제멋대로 살다가 종말의 심판을 받을 것인지 그것을 결정해야만 합니다”. 그와 같은 인류역사의 종말을 이사야가 영적으로 바라보고서 간절하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과연 그의 간구의 내용이 무엇일까요?  

13)  셋째, 3절입니다; “3. 강한 민족이 주를 영화롭게 하며 포학한 나라들의 성읍이 주를 경외하리이다”(25:3); 이사야는 인류역사의 종말에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이 임하고 있음을 내다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사야는 동족들에게 외치고 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외면하고 세상적인 방법으로 우상을 섬기고 기복적인 종교행위를 계속하게 되면 선민이라고 하더라도 종말론적인 심판을 당하게 된다는 것입니다(24:16b-20). 그것은 사탄과 함께 영벌에 들어가는 심판입니다(24:21-23). 따라서 이사야는 동족들에게 회개를 종용하고 있습니다.

14)  이사야는 자신의 동족의 구원만을 소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선민을 역사적으로 괴롭히고 있는 이방인 강대국들에 대해서도 함께 구원받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가 그와 같이 소원하고 있는 이유는 역사를 섭리하고 계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선민 뿐만 아니라 이방인까지 모든 인류를 만드신 창조주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들 모두가 영원한 심판이 아니라 영생의 구원을 받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이사야와 같은 선지자를 세워서 하나님의 역사섭리의 방향과 종말심판의 두려움을 보고 깨닫고 전하게 하시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15)  선지자 이사야는 만민구원을 원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메시아가 무엇 때문에 이 세상에 태어나시는지 그리고 어떠한 나라를 건설하시는지를 그가 예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11:1-9). 그러므로 이사야는 자신 있게 이방인까지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습니다; “강한 민족이 주를 영화롭게 하며 포학한 나라들의 성읍이 주를 경외하리이다”(25:3). 여기서 유대왕국을 둘러싸고 있는 강한 민족과 포학한 민족들은 이사야 당시에 있어서는 앗수르제국과 애굽제국이라고 하겠습니다(19:25).

(2)  4. 주는 포학자의 기세가 성벽을 치는 폭풍과 같을 때에 빈궁한 자의 요새이시며 환난 당한 가난한 자의 요새이시며, 폭풍 중의 피난처시며 폭양을 피하는 그늘이 되셨사오니(13:20-22, 14:29, 25:40), 5. 마른 땅에 폭양을 제함 같이 주께서 이방인의 소란을 그치게 하시며, 폭양을 구름으로 가림 같이 포학한 자의 노래를 낮추시리이다!(12:12, 14:26-30, 37:34-36) 6.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 산에서 만민을 위하여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포도주로 연회를 베푸시리니, 곧 골수가 가득한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맑은 포도주로 하실 것이며(천국잔치를 의미함, 12:37, 22:18-20, 28-30), 7. 또 이 산에서 모든 민족의 얼굴을 가린 가리개와 열방 위에 덮인 덮개를 제하시며(영적인 눈을 떠서 그리스도가 무덤에서 영생의 몸을 입고 부활하시는 것을 볼 것이며 또한 천국이 이 세상에 임하는 것을 보게 될 것임, 9:27-36, 65:17-18, 살전5:14-17), 8.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65:19-20, 19:14, 21:4).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자기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65:19, 21:4).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25:4-8);

1)    본문은 이사야가 강한 민족과 포학한 나라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말하고 있습니다(25:4-5).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은 2가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나는, 방어적인 능력입니다. 그것은 강한 민족과 포학한 나라의 공세를 피할 있는 요새와 피난처가 되어 주시는 능력입니다(25:4). 하나는 공격적인 능력입니다. 그것은 상대가 아무리 강하고 포학하다고 하더라도 적의 공격을 단숨에 꺾어 버리시는 능력입니다(25:5). 본문의 구절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2)    첫째, 4절입니다; “4. 주는 포학자의 기세가 성벽을 치는 폭풍과 같을 때에 빈궁한 자의 요새이시며, 환난 당한 가난한 자의 요새이시며, 폭풍 중의 피난처시며, 폭양을 피하는 그늘 되셨사오니”(25:4); 강한 민족이 약한 민족을 정복하고자 달려오고 있습니다. 이사야는 군대의 위력을 폭풍과 같다고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보통의 폭풍이 아닙니다. 상대방을 집어삼키고자 달려오는 사탄의 모습과 같은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의미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5:8).

3)    성도들은 비록 약자이지만 공세로부터 이김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8:36-39). 이유는 자신들의 힘이 강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의 능력이 막강하시기 때문입니다. 능력을 이사야는 요새, 피난처, 그늘 등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25:4). 구체적으로, 강하고도 포학한 나라가 성을 공격할 때에 피난성을 강력하게 지켜 주십니다(25:4a). 그래서 약자와 가난한 자들이 땅에서 삶을 이어갈 수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생활에 있어서 성도가 환난을 당할 때에도 지켜 주십니다(25:4b). 그와 같은 하나님의 크신 능력이 보호하심으로 함께 하지 아니하시면 성도들과 믿음의 나라가 적의 공세 가운데 도저히 살아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25:4cd);

4)    둘째, 5절입니다; “5. 마른 땅에 폭양을 제함 같이 주께서 이방인의 소란을 그치게 하시며 폭양을 구름으로 가림 같이 포학한 자의 노래를 낮추시리이다”(25:5); 하나님의 능력이 위와 같은 방어적인 능력으로만 발휘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공격이 가장 좋은 수비라고 하는 말이 있듯이 하나님께서는 강한 민족과 포학한 나라가 자신들의 잘못을 깨닫지 아니하고 계속 약한 자와 성도를 공격할 때에는 특단의 조치를 취하십니다. 그것이 엄청난 공격입니다. 그리스도가 광풍과 노한 바다를 잔잔하게 하시던 능력이 발휘되는 것입니다(4:39). 본문 5절이 사실을 생생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5)    셋째, 6절입니다; “6. 만군의 여호와께서 산에서 만민 위하여 기름진 오래 저장하였던 포도주 연회 베푸시리니, 골수가 가득한 기름진 오래 저장하였던 맑은 포도주 하실 것이며”(25:6). 천국잔치에 사용되고 있는 포도주는 만민을 위한 포도주입니다. 그것은 2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만민의 생명을 구하기 위하여 흘리시는 예수님의 보혈입니다(6:53, 고전11:25-26). 하나는, 예수님이라는 포도나무에 가지로 붙어있는 제자들이 만들어내는 포도열매로 제조한 포도주를 말하고 있습니다(15:1-5). 성도들이 그리스도가 맡기신 복음사역을 열심히 하여 주님의 제자를 많이 길러내고 하나님나라를 확장하는 것입니다(28:18-20).

6)    포도주를 사용하여 천국잔치를 것이라고 예수님이 최후의 만찬에서 다음과 같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24. 이르시되,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언약의 피니라. 25.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것을 하나님나라에서 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14:24-25). 본문에서 만민을 위하여 준비하고 있는 골수가 가득한 기름진 ’(25:6) 무엇을 상징하고 있는 것일까요? 대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여호와께서 선지자 에스겔에게 보여주신 해골 골짜기 가볼 필요가 있습니다;

7)    11. 내게 이르되, 인자야 뼈들은 이스라엘 족속이라. 그들이 이르기를, 우리의 뼈들이 말랐고 우리의 소망이 없어졌으니 우리는 멸절되었다 하느니라. 12. 그러므로 너는 대언하여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에서 나오게 하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게 하리라. 13.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에서 나오게 한즉,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14. 내가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가 살아나게 하고, 내가 너희를 너희 고국 땅에 두리니, 여호와가 일을 말하고 이룬 줄을 너희가 알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37:11-14). 마른 뼈들이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서 천국의 잔치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골수가 가득한 기름진 것을 준비하시고 있습니다(25:6). 이제 마른 뼈와 같은 믿음의 조상들이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의 골수를 먹고 튼튼한 하나님의 용사들로 거듭날 것입니다. 골수가 바로 의미상으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생명의 떡이라고 하겠습니다(6:47-59).

8)    주전 21세기의 사람인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부부, 그의 아들 이삭의 부부, 그리고 야곱과 레아가 헤브론 막벨라 굴에서 주님이 오시기를 2천년 동안이나 기다리고 있습니다(49:29-33, 8:56). 구약상의 많은 선지자들과 믿음의 용사들도 그러합니다(11:13-16, 26). 부활의 주님이 오셔야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서 천국잔치에 들어갈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5:24-29). 그들의 믿음에 화답하듯이 훗날 예수 그리스도가 스스로 능력의 소유자이심을 밝히고 있습니다(11:25-26). 구체적으로, 능력을 일부 보여주신 장소가 바로 베다니 나사로의 집입니다.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신 것입니다(11:43-44).

9)    그와 같은 의미에서 히브리서의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구약상의 믿음의 선진들이 땅의 고향으로 되돌아가기를 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나은 영원한 생명의 본향 천국으로 들어가기를 소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소원을 이루어 메시아의 오심을 고대하면서 그들이 무덤 속에서 오랜 세월 기다리고 있습니다”(11:13-16의역). 그들을 부활시켜 천국으로 인도하기 위하여 그리스도가 땅에 오신 것입니다; “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나를 믿으라. 2.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3.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14:1-3).

10)  넷째, 7-8절입니다; “7. 산에서 모든 민족의 얼굴을 가린 가리개 열방 위에 덮인 덮개 제하시며, 8. 사망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 씻기시며 자기 백성의 수치 천하에서 제하시리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25:7-8).  선지자 이사야는 3절에서 강한 민족과 포학한 나라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또한 영화롭게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유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여기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간략하게 풀이해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11)  하나, 세상 모든 민족의 얼굴을 가리고 있는 가리개 있습니다. , 모든 국가를 뒤덮고 있는 덮개 있습니다. 전자 가리개 자기 민족이 최고라고 하는 자아도취로서 일종의 민족 우월주의 사상입니다. 후자 덮개 자신들의 국가를 최고의 가치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모든 백성들은 강한 국가를 만들기 위하여 헌신하고 봉사해야만 한다는 전체주의 사상입니다. 좀더 설명을 해봅니다; 전자는 민족우월주의라는 가리개입니다. 일단 자신의 민족이 최고라고 하는 사상을 지니게 되면 민족을 깔보고 차별하게 됩니다. 선민이라고 하여 예외가 아닙니다.

12)  선민들은 창조주 하나님이 자신들만 보호하고 구원하는 조상들의 하나님이라고 믿고 있습니다(3:13, 15). 그래서 선민을 괴롭히고 있는 애굽과 같은 제국을 하나님의 섭리로 모두 멸망시켜달라고 간구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소원을 성취해주기 위하여 땅에 오시는 다윗의 후계자가 바로 메시아라고 그들이 믿고 있습니다. 후자는 국가주의라고 하는 덮개입니다. 국가라고 하는 가치가 최고의 가치입니다. 그러므로 국가이익을 최우선으로 생각합니다. 국가이익을 도모하기 위하여 정치도 종교도 모두 하나가 되어야만 합니다. 따라서 국론의 분열을 일으키는 어떠한 사상이나 이념도 단죄의 대상이 됩니다.

13)  예를 들면, 예수 그리스도의 사상이 유대교의 교리와 충돌을 일으키자 국론분열을 막기 위하여 그를 제거해야만 한다는 논리입니다; “47. 이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모으고 이르되, 사람이(나사렛 예수가) 많은 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 48. 만일 그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그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하니, 49. 중의 사람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그들에게 말하되, 너희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도다. 50.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 도다 하였으니”(11:47-50). 그에 따라 메시아로 유대인사회에 오신 나사렛 예수가 유대교의 선민우월사상을 반대하고 로마제국과 같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주장했기 때문에 죽음을 맞이하고 있습니다(5:43-48, 22:17-22).

14)  그렇게 그리스도 예수를 사망으로 이끌고 있는 것이 바로 선민들의 가리개이며 국론통일이라는 덮개입니다. 그들의 가리개와 덮개가 벗겨지는 사건이 역사 가운데 발생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창조주의 능력으로 무덤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다시 살리시기 때문입니다(25:8, 27:53-55, 2:32). 따라서 예수님의 부활은 민족우월주의와 국가제일주의사상에 대하여 일대 철퇴를 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죽음에서 부활시키신 창조주 하나님의 뜻은 선민우월주의를 버리고 만민구원사상을 받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국가와 민족의 이익을 하나님처럼 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15)  그렇게 전체주의와 집단이기주의라는 이념으로 바벨탑을 쌓게 되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반드시 붕괴시켜 버리신다고 하는 역사적인 섭리가(11:4-9) 현실적으로 창조주의 부활의 능력으로 다시 터져 나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민족은 민족우월주의사상을 버리고 이웃민족을 자신과 같이 사랑해야만 합니다(12:31). 모든 나라는 국가지상주의를 버리고 창조주의 뜻을 받드는 집단으로 거듭나야만 합니다(12:30). 집단을 위하여 개인을 희생시키지 말고 백성들이 구원과 영생을 얻을 있도록 모두가 도와주어야 합니다(25:8). 창조주의 살아 계심과 부활의 능력,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분명하게 알게 되자 모든 민족과 나라가 자신들의 강함과 포학함을 내려놓고 있습니다. 결과 모든 나라와 민족들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창조주의 영광을 높이고 있는 것입니다(25:3).

16)  또한 본문에서 선지자 이사야는 시온 산에서 천국의 잔치가 벌어지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25:7-8); “시온 산에서 천국의 잔치가 벌어지는 이유는 그곳에 예루살렘성전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무너진 터를 다시 보수하시고 있습니다(58:12). 그리고 아브라함과 이삭 그리고 야곱 믿음의 조상들의 신앙심을 재건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보기에 따라서는 선민 유대인들의 영광을 회복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이미 선민우월사상을 주장하던 유대교가 그리스도의 부활사건으로 말미암아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이제 현존하는 하늘과 땅이 사라지고 하늘과 땅이 창조가 되며 위에 하늘에서부터 새로운 예루살렘이 시온 산으로 내려오게 것입니다(65:17-25, 21:1-8).

(3)  9. 그날에 말하기를 이는 우리의 하나님이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그가 우리를 구원하시리로다. 이는 여호와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우리는 그의 구원을 기뻐하며 즐거워하리라 할 것이며(만민에게 영생구원의 은혜를 베푸시는 창조주 여호와를 찬양하는 것임, 66:10-22), 10. 여호와의 손이 이 산에 나타나시리니모압이 거름물 속에서 초개가 밟힘 같이 자기 처소에서 밟힐 것인즉(교만한 나라 모압왕국이 멸망을 당할 것이며, 15:8-9), 11. 그가 헤엄치는 자가 헤엄치려고 손을 폄 같이 그 속에서 그의 손을 펼 것이나여호와께서 그의 교만으로 인하여 그 손이 능숙함에도 불구하고 그를 누르실 것이라(누구나 세상적인 교만을 버리고 여호와 하나님 앞에 회개함으로 나아오지 아니하면 결코 구원을 얻지 못할 것임). 12. 네 성벽의 높은 요새를 헐어 땅에 내리시되 진토에 미치게 하시리라(사람의 지혜와 힘을 의지하는 자는 그 성벽이 무너지지만 여호와 하나님이 보내신 대속자 그리스도의 구원을 의지하는 자는 영생의 나라에 들어가게 되는 것임, 1:12-13, 3:13-17)“(25:9-12);

1)    본문은 천국잔치에 참여하는 자와 모압의 밟힘에 참여하는 자를 말하고 있습니다(25:9-12).여호와께서 모압을 벌하시리라 하는 제목을 붙이고 있는 본문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2가지의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수가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고 인생을 살고 있는 자를 여호와 하나님께서 구원하실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믿음으로 기쁘게 살아가라고 하는 격려의 말씀입니다(25:9). 하나는, 교만하게도 자기 힘으로 스스로 구원을 얻으려고 몸부림을 치고 있는 자들은 모압처럼 역사적으로 밟힘을 당할 것이며 결국 흙으로 돌아가고 만다는 경고입니다(25:10-10-12). 그러므로 후자처럼 살지를 말고 전자처럼 살아가라고 하는 권면의 말씀을 예언 가운데 이사야가 담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와 같은 안목을 가지고 이제부터 구절에 대하여 검토하면서 의미를 다음과 같이 묵상해보고자 합니다;

2)    첫째, 9절입니다;9. 그날에 말하기를 이는 우리의 하나님이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그가 우리를 구원하시리로다. 이는 여호와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우리는 그의 구원을 기뻐하며 즐거워하리라 것이며”(25:9); 문장 가운데 3가지의 뜻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 구원을 얻을 있는 최소한의 요건을 말하고 있습니다. , 구원자의 이름을 하나님의 이름 여호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 언제 그의 구원을 기뻐하며 즐거워하는지 시점에 대하여 생각해보아야만 합니다. 이제 하나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3)    인생이 구원을 얻을 있는 최소한의 자격은 그의 구원을 기다릴 아는 것입니다(25:9a). 사람이 인생 가운데 스스로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구원을 얻을 있는 것이 아님을 먼저 인정해야만 합니다. 그러한 겸손한 깨달음 위에서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구원의 계획을 믿고서 그것이 자신에게 이루어지도록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한마디로, 인생 가운데 구원을 얻을 있는 신앙인의 자세라고 하겠습니다.  

4)    구원자의 이름을 하나님의 이름인 여호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25:9b). ‘여호와 뜻은 스스로 있는 입니다(3:14). 크게 보아 2가지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용어입니다; 하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창조주입니다. 무엇에 의하여 만들어진 존재가 아닙니다(1:3). 당연히 피조물인 무엇보다도 먼저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이름하여 창조주의 선재성’(先在性, 1:30, pre-existence)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스스로 구원을 계획하고 또한 성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구원은 피조물인 사람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러므로 자력구원’(自力救援, self-salvation) 주장하는 것은 창조주의 구원계획에서 이탈하고 있는 것입니다(1:12-18, 3:13-17, 4:12).

5)    구원과 영생은 죽은 다음에 이루어지는 것일까요? 부활의 영광은 반드시 숨이 끊어진 다음에 누릴 있는 것일까요? 그것이 아니라는 점을 이사야의 예언이 강하게 시사해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우리는 그의 구원을 기뻐하며 즐거워하리라 것이며”(25:9c). 쉽게 풀이해보자면, 창조주의 구원을 믿는 믿음이 강력해지면 확실한 소망이 세상에서 성도가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에 기쁨과 즐거움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부활은 죽은 다음에 찾아올지 몰라도 확실한 부활의 신앙은 성도가 남은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에 이미 영적인 능력으로 역사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진리의 보혜사 성령님을 성도들에게 임재하여 내주 역사하게 하시는 이유입니다.

6)    이사야의 예언과 같은 맥락에서 예수님이 다음과 같이 부활신앙에 대하여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11:25-26). 부활신앙은 미래적인 것이 아니라 현재적인 것임을 힘있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현재적인 것이기에 육신을 이기는 영적인 삶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부활의 기쁨과 소망으로 성도들의 남은 인생 가운데 터져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을 사도 바울이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8:2).

7)    둘째, 10절입니다; “10. 여호와의 손이 산에 나타나시리니, 모압이 거름물 속에서 초개가 밟힘 같이 자기 처소에서 밟힐 것인즉”(25:10); 모압은 동쪽에서 사해에 인접하고 있는 나라입니다. 깊은 사해 골짜기로 평지의 시냇물이 많이 흘러 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내 주변에는 물이 풍족하여 농사가 되고 있습니다. 고대 농업 사회이므로 자연비료로서 퇴비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퇴비를 만들어 밭에 뿌려주어야 식물이 자라고 열매를 충실하게 맺는 것입니다. 그런데 농촌에서 퇴비를 만들기 위해서는 풀을 많이 베어 저장하면서 위에 인분 등의 거름을 부어서 썩도록 해야만 합니다. 따라서 그것이 썩는 동안에 냄새가 코를 찌르고 있습니다.

8)    그러므로 고대나 근대화 이전의 농촌사회에 있어서 거름 통이나 퇴비 만드는 저장소 또는 똥통에 사람이 빠졌다고 하면 그것이 곤욕입니다. 썩은 냄새가 코를 찌르며 사람이 온갖 병균에 전염되어서 마치 병원균과 같은 취급을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은 배경을 비유로 사용하여 이사야가 실감나게 다음과 같이 예언하고 있습니다; “시온 산에 임하실 새로운 예루살렘 성과 하나님의 임재를 고대하고 있는 성도들과 달리 모압의 우상신앙을 좇는 자들은 크게 낭패를 당할 것입니다”(25:10a의역). 남은 인생을 모압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구원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사는 자들은 마치 거름 통에 빠진 퇴비와 같습니다(25:10b). 농부가 하는 일은 퇴비를 거름 속에서 푹푹 썩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농부이신 하나님께서는(15:1) 우상을 섬기며 힘으로 구원을 이루고자 하는 자들을 밟아서 거름 속에 퇴비처럼 던져 버리시는 것입니다(25:10c).

9)    셋째, 11절입니다; “11. 그가 헤엄치는 자가 헤엄치려고 손을 폄같이 속에서 그의 손을 것이나, 여호와께서 그의 교만으로 인하여 손이 능숙함에도 불구하고 그를 누르실 것이라”(25:11); 본래 하나님의 섭리와 조치에 대하여 저항하고 대적하는 자들이 ()신앙인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성취하시는 구원을 바라보는 신앙인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고 자신들의 지혜와 힘을 믿고서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구원도 자신들의 힘으로 스스로 이루고자 합니다. 그러한 자력구원을 이루고자 하는데 있어서는 단지 우상이 필요할 따름입니다. 그러나 결과는 허망합니다. 이유를 이사야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그들이 교만하고 세상살이에 능숙하다고 하더라도 뜻대로 구원을 쟁취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구원을 있는 창조주께서 그들을 억누르실 것이기 때문입니”(25:11 의역).

10)  넷째, 12절입니다;12. 성벽의 높은 요새를 헐어 땅에 내리시되, 진토에 미치게 하시리라”(15:12);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의지하지 아니하는 자는 2가지 불이익을 당하게 됩니다; 하나는, 죽은 다음에 생명의 부활로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5:29). 하나는,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에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보호하심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8:39). 그와 같은 사실을 이사야가 다음과 같이 예언하고 있습니다; 하나, 비록 자신들의 힘으로 견고한 아성을 짓고 세상에 군림한다고 하더라도 권세를 하나님께서 반드시 꺾어 버리시는 것입니다; “12. 성벽의 높은 요새를 헐어 땅에 내리시되”(15:12a)입니다. , 흙으로 지어진 몸은 썩어서 다시 진토로 돌아가더라도 영혼만은 생명의 주인이신 창조주에게 되돌아가야 합니다. 생명의 부활을 누려야만 합니다(5:29). 그런데 권리가 사라지고 있음을 이사야가 예언하고 있습니다; “진토에 미치게 하시리라”(25:12b).

둘째로, “1. 그날에 유다 땅에서 이 노래를 부르리라. 우리에게 견고한 성읍이 있음이여여호와께서 구원을 성벽과 외벽으로 삼으시리로다!(해발 평균고도 790M 산지에 건설된 예루살렘성은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내성과 외성으로 성벽이 이중구조임. 그러한 철옹성 예루살렘성의 견고함을 자랑하여도 역사적으로 외적의 침입을 완전히 막을 수가 없음. 그러나 선민 유대인들이 진정으로 회심하여 우상문화를 철폐하고 여호와께 돌아오면 예루살렘성의 구원은 영원할 것임, 37:35-36) 2. 너희는 문들을 열고 신의를 지키는 의로운 나라(그리스도가 아버지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메시아의 나라 곧 하나님의 나라를 말함, 6:13, 고전15:24)가 들어오게 할지어다! 3.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24:36, 8:37-39),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함이니이다! 4. 너희는 여호와를 영원히 신뢰하라. 주 여호와는 영원한 반석이심이로다!(7:24-25) 5. 높은 데에 거주하는 자를 낮추시며(교만한 자를 치시는 여호와, 2:12, 28:3) 솟은 성을 헐어 땅에 엎으시되 진토에 미치게 하셨도다! 6. 발이 그것을 밟으리니 곧 빈궁한 자의 발과 곤핍한 자의 걸음이리로다!(지배자와 피지배자의 처지가 바뀌어지는 것이 여호와의 역사섭리의 이치임, 25:23) 7. 의인의 길은 정직함이여 정직하신 주께서 의인의 첩경을 평탄하게 하시도다!(여호와 앞에서 정직하게 신앙 생활하는 자를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보호하심, 12:1-5, 15:1, 17:1) 8. 여호와여 주께서 심판하시는 길에서 우리가 주를 기다렸사오며, 주의 이름을 위하여 또 주를 기억하려고 우리 영혼이 사모하나이다!(8:56, 19:25-27) 9. 밤에 내 영혼이 주를 사모하였사온즉 내 중심이 주를 간절히 구하오리니, 이는 주께서 땅에서 심판하시는 때에 세계의 거민이 의를 배움이니이다!(그리스도는 창조주 여호와의 공의의 정신을 몸소 실천하고 그 모범을 보여주시는 것임, 11:2-5, 53:10-12, 1:14-18) 10. 악인은 은총을 입을지라도 의를 배우지 아니하며 정직한 자의 땅에서 불의를 행하고 여호와의 위엄을 돌아보지 아니하는도다!(악인의 세상적인 형통은 영벌로 들어가는 첩경인 것임, 25:46, 5:29) 11. 여호와여 주의 손이 높이 들릴지라도 그들이 보지 아니하오나(65:1-2, 3:13-15), 백성을 위하시는 주의 열성을 보면(9:7, 37:32, 2:17, 고후11:2) 부끄러워할 것이라. 불이 주의 대적들을 사르리이다(20:9-10). 12. 여호와여 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평강을 베푸시오리니(41:10), 주께서 우리의 모든 일도 우리를 위하여 이루심이니이다(우리의 행복을 위하여 율법을 지키라고 주심, 10:13, 8:1-4). 13.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시여 주 외에 다른 주들이 우리를 관할하였사오나, 우리는 주만 의지하고 주의 이름을 부르리이다(죄와 사망의 땅에서 여호와의 구원을 소망함, 7:24-8:2). 14. 그들은 죽었은즉 다시 살지 못하겠고 사망하였은즉 일어나지 못할 것이니, 이는 주께서 벌하여 그들을 멸하사 그들의 모든 기억을 없이하셨음이니이다(새 언약 곧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와 보혜사 성령님의 내주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영원히 구원하신 것임, 31:33, 3:23-26). 15. 여호와여 주께서 이 나라를 더 크게 하셨고 이 나라를 더 크게 하셨나이다. 스스로 영광을 얻으시고 이 땅의 모든 경계를 확장하셨나이다(선민만을 구원한다고 유대인들이 믿은 다윗의 제국 예루살렘보다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로 얻은 하나님의 나라의 수도인 새 예루살렘이 더 광대하며 모든 피조물을 영생으로 구원할 수 있는 규모임, 21:16)“(26:1-15); 다음과 같이 2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1) “1. 그날에 유다 땅에서 이 노래를 부르리라. 우리에게 견고한 성읍이 있음이여여호와께서 구원을 성벽과 외벽으로 삼으시리로다!(해발 평균고도 790M 산지에 건설된 예루살렘성은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내성과 외성으로 성벽이 이중구조임. 그러한 철옹성 예루살렘성의 견고함을 자랑하여도 역사적으로 외적의 침입을 완전히 막을 수가 없음. 그러나 선민 유대인들이 진정으로 회심하여 우상문화를 철폐하고 여호와께 돌아오면 예루살렘성의 구원은 영원할 것임, 37:35-36) 2. 너희는 문들을 열고 신의를 지키는 의로운 나라(그리스도가 아버지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메시아의 나라 곧 하나님의 나라를 말함, 6:13, 고전15:24)가 들어오게 할지어다! 3.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24:36, 8:37-39),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함이니이다! 4. 너희는 여호와를 영원히 신뢰하라. 주 여호와는 영원한 반석이심이로다!(7:24-25) 5. 높은 데에 거주하는 자를 낮추시며(교만한 자를 치시는 여호와, 2:12, 28:3) 솟은 성을 헐어 땅에 엎으시되 진토에 미치게 하셨도다! 6. 발이 그것을 밟으리니 곧 빈궁한 자의 발과 곤핍한 자의 걸음이리로다!(지배자와 피지배자의 처지가 바뀌어지는 것이 여호와의 역사섭리의 이치임, 25:23) 7. 의인의 길은 정직함이여 정직하신 주께서 의인의 첩경을 평탄하게 하시도다!(여호와 앞에서 정직하게 신앙 생활하는 자를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보호하심, 12:1-5, 15:1, 17:1) 8. 여호와여 주께서 심판하시는 길에서 우리가 주를 기다렸사오며, 주의 이름을 위하여 또 주를 기억하려고 우리 영혼이 사모하나이다!(8:56, 19:25-27) 9. 밤에 내 영혼이 주를 사모하였사온즉 내 중심이 주를 간절히 구하오리니, 이는 주께서 땅에서 심판하시는 때에 세계의 거민이 의를 배움이니이다!(그리스도는 창조주 여호와의 공의의 정신을 몸소 실천하고 그 모범을 보여주시는 것임, 11:2-5, 53:10-12, 1:14-18) 10. 악인은 은총을 입을지라도 의를 배우지 아니하며 정직한 자의 땅에서 불의를 행하고 여호와의 위엄을 돌아보지 아니하는도다!(악인의 세상적인 형통은 영벌로 들어가는 첩경인 것임, 25:46, 5:29)“(26:1-10);

1)    만민을 영생으로 구원하는 하나님나라의 성벽이 예루살렘성을 닮아 있다는 사실을 선지자 이사야가 영적인 깨달음으로 노래하고 있습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유다 시온에 새로운 예루살렘 성읍이 세워질 것이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26:1a). 그리고 성읍에는 4가지 특징이 있을 것임을 차례대로 예언하고 있습니다. 내용이 무엇인지 이제부터 구절을 따라가면서 살펴보고 의미에 대하여 묵상해보고자 합니다;

2)    첫째, 1절입니다;1. 그날에 유다 땅에서 노래를 부르리라. 우리에게 견고한 성읍이 있음이여, 여호와께서 구원을 성벽 외벽으로 삼으시리로다”(26:1); 여호와께서 새로 창조하시는 예루살렘성은 구원과 영생의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런데 성에는 내벽과 외벽이 있습니다. 내성과 외성을 하나님께서 확실하게 지켜 주시기 때문에 성이 구원의 성이 수가 있다고 이사야가 밝히고 있습니다. 그것이 첫번째 특징입니다. 만약 여호와께서 성곽을 견고하게 지켜주지 아니하시면 구원과 영생의 예루살렘성은 세상에 존재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3)    사실이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에 이사야는 내용을 노래로 만들어서 그날에 부르게 것이라고 그의 선지서에 싣고 있습니다. 의미는 노래를 동족들이 자손대대로 부르면서 신앙생활을 했으면 좋겠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내벽과 외벽의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요? 개념이 과연 무엇이기에 구원에 있어서 그토록 중요한 것일까요? 설명이 다음 구절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4)    둘째, 2절입니다; “2. 너희는 들을 열고 신의를 지키는 의로운 나라가 들어오게 할지어다”(26:2); 예루살렘성에는 내벽과 외벽에 각각 성문을 가지고 있습니다(26:2a). 성문을 모두 통과하여 영생의 성에 들어올 있는 자들의 특징을 이사야가 그의 예언 가운데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특징은 신의를 지키는 의로운 나라” (26:2b)입니다. 말의 뜻은 하나님의 말씀을 항상 옳다고 믿고서 언제나 편에 서주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들만 예루살렘 성안으로 들어갈 있다고 하는 것이 두번째의 특징입니다.

5)    그와 같은 사람들의 모습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믿음과 의리를 지키는 종의 모습이라고 하겠습니다(17:10, 6:66-71). 그들의 이름이 이른바 생명 기록되어 있다고 훗날 사도 요한이 기록하고 있습니다(21:27). 반대로 해석을 해봅니다. 만약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고 틀릴 수도 있다고 생각하여 자신의 지혜와 경험을 따라서 행동하게 되면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 편을 수가 없게 되고 맙니다. 경우에는 혹시 외벽의 성문을 통과할 있을지는 몰라도 내벽의 성문까지 통과하여 확실하게 천국으로 입장할 수가 없게 되고 것입니다. 점을 경계하고 있는 예언으로 새겨볼 수가 있습니다.

6)    셋째, 3절입니다; “3.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함이니이다”(26:3); 성도들은 너나없이 하나님의 말씀이 항상 옳다고 믿고서 믿음의 길을 평생동안 완주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환난과 핍박이 한꺼번에 몰려올 때에는 끝까지 견디지 못하고 넘어지고 쓰러집니다(13:21). 뿐만 아니라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도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믿음생활을 영위하는 것을 힘들게 만들고 있습니다(13:22). 그래서 사도 바울과 같은 믿음의 용사도 신앙생활 가운데 부르짖고 있습니다; “22.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 지체 속에서 다른 법이 마음의 법과 싸워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 도다. 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7:22-24).

7)    한마디로, 마음의 소원을 들어달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신앙심과 능력으로는 도저히 자신 속에 잠재되어 있는 육신적인 욕구와 죄의 소원을 모두 다스릴 수가 없으니 도와달라고 하는 호소입니다. 간절한 기도를 들어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7:25, 8:1-2) 이사야가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습니다; “주님을 신뢰하는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한 , 마음 의지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를 그토록 원하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는 자를 주님이 강하게 지켜 주실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이 도와줄 알고 신뢰함으로 정직하게 호소하는 자를 결코 외면하지 아니하시고 평강 회복하도록 역사해주시는 하나님을 굳건하게 믿으시기를 바랍니다”(26:3 의역).

8)    따라서 성도들이 천국을 의미하고 있는 예루살렘 성안으로 들어가서 영생을 누리는 것만이 아니라 땅에서도 하나님의 도우심을 크게 경험하고 있습니다(8:1-4, 37-39). 위와 같이 성도들이 남은 인생 가운데 있어서 완전히 쓰러지지 아니하고 믿음의 승리를 얻을 있도록 하나님께서 강하게 역사해주시고 있습니다. 그러한 사실을 상징적으로 시사해주고 있는 대목을 구태여 찾아보자면 여호와께서 지키시는 구원의 외벽”(26:1c)입니다. 예루살렘성은 천국을 의미하는 하늘의 성이지만 그것은 동시에 장차 시온에 임하는 성입니다. 그리고 성도가 내벽의 성문을 통과하여 성으로 완전히 들어가기 전에 세상에서 남은 신앙생활 가운데 하나님의 보호를 받을 있도록 외성이 크게 확장되고 있는 특징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때문에 성도들은 세상에서도 믿음생활 가운데 하나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평강을 회복하고 만족하게 평강을 누릴 수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9)    넷째, 4절입니다; “4. 너희는 여호와를 영원히 신뢰하라. 여호와는 영원한 반석이심이로다”(26:4); ‘반석 뜻은 시몬 베드로의 이름과 그의 신앙고백에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의 반석이 된다는 뜻으로 주님이 그를 반석’(셈어인 히브리어로 게바’, 헬라어로 베드로’, 라틴어로 페테로스)으로 부른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16:16)이라는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같은 성도들의 신앙고백 위에 장차 교회가 세워질 것이라는 의미에서 차례 반석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16:18).

10)  그런데 본문에서는 영원한 반석’(26:4)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인 예루살렘성의 기초석 되고 있는 반석을 의미하고 있다고 있습니다(21:14a). 성의 성곽에는 12기초석이 있는데 위에 12사도의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21:14b). 그렇다면 본문의 뜻은 여호와 하나님을 영원히 신뢰하는 자가 바로 12사도와 같은 성도들이며 그들이 천국의 돌에 이름자를 새기는 스타가 있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그것은 다음과 같은 확실한 믿음생활의 승리의 비결을 정확하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승리의 비결은 말씀이 현실에 정확하게 맞는지 않는지를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생명의 주인이신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창조주를 신뢰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실천하는 청지기로 그리고 신실한 종으로 평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끝에 부활이 있고 천국에의 입성이 주어질 따름입니다”.

11)  5-10절에서는 악인의 행태와 종말, 그것을 바라보는 의인의 기도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유는 구절의 순서가 뒤섞여 있기 때문입니다. 논리적인 진술을 위하여 구절을 재배치해보면 다음과 같을 것입니다; 악인의 정의 행태(26:10). 악인의 종말에 관한 예언(26:5-6). 의인의 정의 행태(26:7-8). 의인의 기도의 내용(26:9). 이제 위와 같은 순서로 본문의 깊은 내용을 다음과 같이 묵상해보고자 합니다;

12)  다섯째, 10절입니다; “10. 악인 은총 입을지라도 배우지 아니하며 정직 자의 땅에서 불의를 행하고 여호와의 위엄 돌아보지 아니하는 도다”(26:10); 이사야는 악인의 특징 3가지를 다음과 같이 정확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 악인은 하나님의 은총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은총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을 배우지 못하고 있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이 무엇인지 쉽게 달리 표현하자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만민에게 주고 계시는 복입니다(1:26-31). 하나님께서 복을 공평하게 주고 계시기 때문에 피조물인 사람들이 땅에서 빛을 쪼이고 산소를 호흡하며 기쁨으로 생명을 누리고 만물의 영장으로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13)  하나님께서는 만민을 차별하지 아니하시고 복을 부어 주십니다(12:3, 2:28-29). 그런데 악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복은 모두 자신들만 위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타인에게는 적게 나누어 주고 자신이 많이 가지려고 합니다. 자신만의 혹은 자신들만의 정의를 내세우면서 타인이나 집단의 권리를 침해하고서 상대적인 이익을 많이 취하며 살아가고자 합니다. ,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았다고 정직하게 인정하는 것이 신앙생활의 첫걸음입니다. 그래서 복을 주심에 감사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따라서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하게 살아가는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14)  그런데 악인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복을 자신이 만들었다고 주장하기 일쑤입니다. 설혹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누구에게나 자연적으로 주어지고 있는 혜택이므로 갚을 필요가 전혀 없는 것이라고 강변합니다. 그렇게 억지주장을 계속하다가 보면 자신도 모르게 그만 거짓을 행하며 은혜를 모르는 배은망덕한 불의한 자의 삶을 끝까지 영위하게 되는 것입니다. , 피조물인 인간은 창조주 앞에서 자신이 피조물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것이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위엄을 높여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악인은 사실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언제나 동원할 있는 하나의 우상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15)  우상은 마치 알라딘의 램프의 거인 같은 것입니다. 그저 주문만 외우면 램프의 거인이 나타나서 소원을 들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창조주로 섬기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 자기에게 복을 가져다 주는 존재 또는 어떤 것이든지 자신의 소원을 이루어 주는 한갓 능력이 많은 종으로 치부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기복 신앙이며 우상 문화입니다. 그러한 불의한 자의 신앙의 모습은 고양이든지 검은 고양이든지 상관없이 무조건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해 주는 것이 최선이라고 하는 현대인들의 도구주의 실용사상에 매우 가까운 것입니다. 따라서 어처구니가 없게도 찬란한 과학문명을 자랑하고 있는 오늘날에도 전세계적으로 기복적인 우상종교와 문화가 만연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16)  여섯째, 5-6절입니다;5. 높은 데에 거주하는 낮추시며 솟은 헐어 땅에 엎으시되, 진토 미치게 하셨도다. 6. 발이 그것을 밟으리니 빈궁한 발과 곤핍한 걸음이리로다”(26:5-6); 묘하게도 대조적인 방법을 이중으로 사용하여 의미의 전달을 명료하게 해주고 있는 문장입니다; 우선, ‘높은 데에 거주하는 빈궁한 대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솟은 곤핍한 대조하고 있습니다(26:5-6). ‘빈궁한 대조가 되고 있으므로 자연히 높은 데에 거주하는 좋은 주거지 uptown 살고 있는 경제적으로 부유한 자임을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솟은 곤란한 경우를 당하지 아니하고 있는 자들로서 도시의 상층부 특권층입니다. 특히 정치적 권력을 지니고 있는 귀족들이라고 하겠습니다.

17)  악인들의 말로에 대하여 이사야는 하나님의 역사섭리로 그들의 세상나라가 다음과 같이 망하게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왕국이 망하고 세상임금이 쫓겨나고 있습니다. 아울러 부자와 귀족들의 특권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착취를 당하고 짓밟히고 있던 가난한 자와 하층민들이 이제는 자신들의 권리를 되찾고 억압자들인 악인들을 도리어 짓밟고 있습니다”(26:5-6 의역). 다음으로, ‘거주한 ’(, castle or city) 대조하고 있습니다(26:5). 전자는 개인을 말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후자인 집단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개인적으로 부유하다고 하여 자신의 경제적인 능력으로 가난한 자를 업신여기고 차별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치적인 권력을 독점하여 집단적인 특권계층이나 귀족층을 형성하고 많은 다수의 권리를 침해하는 행위 역시 하나님의 역사적인 심판을 초래하게 된다고 선지자 이사야가 예언하고 있습니다.

18)  또한 낮추시며 진토에 미치게 하셨다 의미상으로 대조하고 있습니다(26:5). 하나님께서는 경제적인 부로써 가난한 자를 억누르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따라서 그와 같은 악인의 부를 없애 버리십니다. 한편, 특권층이 구조적으로 하층민을 양산해놓고서 대대로 지배하는 사회에 대해서는 강력한 처벌을 하십니다. 그것이 세상에서 처벌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들을 모두 영원한 죽음으로 보내어 버리신다는 것입니다. 표현이 진토라는 무덤의 용어 속에 담기어 있다고 하겠습니다.

19)  일곱째, 7-8절입니다; “7. 의인 길은 정직함이여, 정직하신 께서 의인의 첩경을 평탄하게 하시도다. 8. 여호와여 주께서 심판하시는 길에서 우리가 기다렸사오며, 주의 이름 위하여 기억하려고 우리 영혼이 사모하나이다”(26:7-8); 7절에서 정직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8절에서는 주의 이름 라는 용어가 달리 사용되고 있습니다. 의미를 자세히 알아보고자 합니다; 하나의 문장에 같은 용어가 두번이나 사용되고 있는 것은 마디로 강조 용법입니다.

20)   뜻은 하나님께서 성품이 정직하시기 때문에 형상을 닮아 있는 의인도 자신의 인생을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인생길이 평탄해질 있도록 하나님께서 적극 도와 주신다는 선지자 이사야의 설명입니다. 예를 들면, 창세기 3장에서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의 부부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을 곳을 찾고 있습니다(3:10). 정직하게 앞에 서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리고 제멋대로 자신의 탐욕과 이익을 위하여 살아가고 있는 인생의 특징입니다. 그것은 의인의 길을 떠난 사람의 행태입니다.

21)  인생길 가운데 의인은 하나님의 심판을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자신이 세상을 심판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반대로 악인은 자신들이 바로 세상을 심판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의미를 담고 있는 문장이 8. 여호와여 주께서 심판하시는 길에서 우리가 주를 기다렸사오며”(26:8a)입니다. 그리고 주의 이름 위하여 기억하려고 우리 영혼이 사모하나이다”(26:8b) 대하여 알아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이름 여호와이며 뜻은 스스로 있는 입니다(3:14). 스스로 있는 자이기 때문에 피조물인 사람들이 어찌할 없는 창조주입니다(1:1, 1:1-3). 그리고 현재 지금 여기’(now here) 살고 있는 인간들의 공간적인 제약성을 훌쩍 뛰어넘고 있는 영이신 하나님이십니다(4:24).

22)  이상 2가지의 차이 때문에 세상에서 제한적인 인생을 살고 있는 인간의 입장에서는 창조주 하나님의 존재 영적인 실체가 가물가물한 법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에 의지하여 창조주의 존재를 파악하고 분을 의지할 있을까요? 방법이 유일하게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스스로 자신의 이름으로 말씀을 계시해주지 아니하시면 도저히 사람들이 정확하게 하나님의 뜻과 존재하심을 수가 없습니다(15:1, 11:27). 따라서 말씀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찾으려고 합니다. 나아가서 창조주를 직접 만날 있기를 우리들의 영혼이 간절히 소망하고 있다는 사실을 본문에서 선지자 이사야가 노래하고 있습니다;

23)  여덟째, 9절입니다;9. 영혼이 주를 사모하였사온즉, 중심이 주를 간절히 구하오리니, 이는 주께서 땅에서 심판하시는 때에 세계의 거민이 배움이니이다”(26:9); 인생이 캄캄한 밤을 지날 때에 더욱 하나님을 찾고 의지하게 됩니다(26:9a). 악인들이 성도들을 많이 탄압하는 시절이 특히 그러합니다. 그러한 때에 간절히 기도해야만 하는 이유와 내용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 땅에 악이 만연하여 주께서 심판을 행하시는 그때에 부디 완전한 심판이 아니라 한번의 기회를 주시기를 원합니다. 왜냐하면, 혹독한 심판 가운데 비로소 창조주의 살아계심을 깨닫고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며 하나님께 돌아오는 악인들이 많기 때문입니다”(26:9b 의역). 그와 같은 의인들의 기도에 응답하여 하나님께서 구주 그리스도를 땅에 보내어 주실 것이라고 선지자 이사야는 굳게 믿고 있다고 하겠습니다(12:1-6).

(2)   11. 여호와여 주의 손이 높이 들릴지라도 그들이 보지 아니하오나(65:1-2, 3:13-15), 백성을 위하시는 주의 열성을 보면(9:7, 37:32, 2:17, 고후11:2) 부끄러워할 것이라. 불이 주의 대적들을 사르리이다(20:9-10). 12. 여호와여 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평강을 베푸시오리니(41:10), 주께서 우리의 모든 일도 우리를 위하여 이루심이니이다(우리의 행복을 위하여 율법을 지키라고 주심, 10:13, 8:1-4). 13.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시여 주 외에 다른 주들이 우리를 관할하였사오나, 우리는 주만 의지하고 주의 이름을 부르리이다(죄와 사망의 땅에서 여호와의 구원을 소망함, 7:24-8:2). 14. 그들은 죽었은즉 다시 살지 못하겠고 사망하였은즉 일어나지 못할 것이니, 이는 주께서 벌하여 그들을 멸하사 그들의 모든 기억을 없이하셨음이니이다(새 언약 곧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와 보혜사 성령님의 내주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영원히 구원하신 것임, 31:33, 3:23-26). 15. 여호와여 주께서 이 나라를 더 크게 하셨고 이 나라를 더 크게 하셨나이다. 스스로 영광을 얻으시고 이 땅의 모든 경계를 확장하셨나이다(선민만을 구원한다고 유대인들이 믿은 다윗의 제국 예루살렘보다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로 얻은 하나님의 나라의 수도인 새 예루살렘이 더 광대하며 모든 피조물을 영생으로 구원할 수 있는 규모임, 21:16) “(26:11-15);

1)      본문은 주의 심판의 손을 바라보지도 아니하고 있는 불쌍한 인간들에게 마지막으로 주어지고 있는 구원의 방법에 관한 이사야의 예언입니다.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는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 동족 유대인들에게 전할 예언의 말씀을 위탁 받은 선지자입니다(1:1, 2:1, 6:1-8). 그가 동족들에게 전한 예언의 말씀을 기록으로 남긴 것이 대선지서 이사야입니다. 그 주요 내용은 동족인 유대왕국의 백성은 물론 모든 이웃나라와 이방인들의 미래와 그 종말에 관한 메시지입니다. 그런데 그 예언의 말씀을 이사야에게 위탁하실 때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이상한 말씀을 하시고 계십니다;

2)      하나, 이사야가 전할 예언의 말씀에 대하여 선민들조차 그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믿지 아니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6:9-10). , 그러자 마음이 답답해진 이사야가 하나님께 질문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언제 선민들이 하나님 말씀의 뜻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까?”(6:11). , 하나님의 대답은 제사장나라가 망하고 또 거룩한 백성들의 사회가 깨어지고 그들의 후손이 이방세계를 떠돌면서 고생을 엄청 한 후에 비로소 하나님 말씀의 씨를 다시 신앙의 그루터기로 삼게 될 것이라는 답변입니다(6:11-13). 따라서 이사야는 동족들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그 이상한 대화의 내용을 늘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대화의 의미를 점점 깨닫고 있습니다. 특히 본문 가운데 그의 깨달음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과연 그 깨달음의 내용이 무엇인지 다음과 같이 구절을 따라가면서 깊은 묵상을 통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3)      첫째, 11절입니다; “11. 여호와여 주의 손이 높이 들릴지라도 그들이 보지 아니하오나 백성을 위하시는 주의 열성을 보면 부끄러워할 것이라. 불이 주의 대적을 사르리이다”(26:11); 악인들에게 마지막으로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하는 것이 이사야의 중보기도의 내용입니다. 그 기도가 상달되고 있습니다. 마치 그 기도에 응답이라도 하듯이 하나님의 만민구원의 방법론이 복음의 내용으로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백성을 위하시는 주의 열성을 보면 (악인들조차) 부끄러워할 것이라”(26:11b)는 내용입니다. 그 구원의 방법론은 정확하게 메시아의 열심과 고난’(Passion of Christ)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4)      하나님을 떠나 살면서 그것이 심판받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의 모습인지도 모르고 있는 그들이 너무나 불쌍하여 자신을 대속의 희생제물로 바치기까지 하시는 그리스도의 열심과 고난이 창조주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이 무엇인지를 백성들에게 가장 분명하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죄인과 악인들은(3:9-12) 부끄러움을 느끼고 마지막으로 회개해야만 합니다. 그것이 종말의 시기를 살고 있는 인생들에게 주어지고 있는 단 한번의 마지막 구원의 기회입니다.

5)      그와 같은 마지막 구원의 기회를 전후하여 어떤 일들이 있거나 발생하는지를 이사야가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높이 손을 드시고 역사적으로 여러 번 심판을 행하고 있지만 그 징계의 방법으로는 사람들이 회개하지 아니하고 있습니다(26:11a). 그러므로 마지막 남은 방법은 직접 징계가 아니라 메시아를 대속의 제물로 대신 징계하는 것입니다. 그 마지막 대속의 징계를 보고서도 부끄러움을 느끼지 아니하고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지 아니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불 심판이 임하고 영벌에 처해지게 될 것입니다(26:11c).

6)      둘째, 12절입니다;12. 여호와여 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평강을 베푸시오리니 주께서 우리의 모든 일도 우리를 위하여 이루심이니이다”(26:12); 하나님께서 메시아를 대속의 제물로 삼으시고 그로 말미암아 회개하는 자를 구원하신다고 하는 것은 일종의 귀책사유의 전가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평강의 회복의 방법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인간의 잘못이 그리스도에게 전가될 수 있을까요? 그 해답을 구하기 위해서는 창세기 제3장의 내용을 되돌아보아야만 합니다.

7)      사탄의 화신으로 보이는 간교한 뱀이 아담부부의 욕심을 충동질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선악과를 따먹도록 종용했습니다(3:1-7). 그 결과 영생의 하나님과 사람과의 화목한 관계 곧 평강이 깨어지고 불화가 찾아오게 됩니다. 쉽게 말하자면,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에 이르게 되는데(1:15) 그 사망의 빌미를 사탄이 제공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불화의 근본원인인 사탄의 세력을 쳐부숨으로써 그 지배를 받고 있는 인간을 구원하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그 계획의 시작을 창세기 제3장에서 다음과 같이 예언하고 있습니다; “여자의 후손(메시아)은 네(사탄의 화신인 뱀)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3:15b).

8)      셋째, 제13절입니다;13.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시여 주 외에 다른 주들이 우리를 관할하였사오나 우리는 주만 의지하고 주의 이름을 부르리이다”(26:13); 모세는 일찍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다음과 같이 권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다른 신들을 섬기게 되면) 생명과 사망, 복과 저주가 인생 길에 더불어 닥칠 것입니다. 그 가운데 오로지 여호와 하나님만 선택하여 그를 의지하고 섬겨야만 합니다. 그 이유는 여호와 하나님만이 영원한 생명과 진정한 장수의 복을 주실 수 있는 유일한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30:19-20 의역). 이사야가 본문 이 대목에서 말하고 있는 내용이 모세의 권면과 동일한 것입니다. 진정한 죄 사함과 구원과 영생 곧 하나님과의 평강의 회복이 오로지 그리스도의 고난과 대속의 은혜 안에서 가능함을 알게 되었기에 이제는 주만 의지하고 주의 이름을 부르겠다는 놀라운 신앙의 고백입니다.

9)      넷째, 제14절입니다;14. 그들은 죽었은즉 다시 살지 못하겠고 사망하였은즉 일어나지 못할 것이니 이는 주께서 하여 그들을 하사 그들의 모든 기억을 없이하셨음이니이다”(26:14); 그렇다면 우상과 그 우상을 숭배하던 자들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그 종말론적인 처벌의 내용을 이사야가 다음과 같이 예언하고 있습니다; 이사야의 예언은 임종을 맞이하여 죽음의 잠을 자게 되는 사람들이 반드시 이를 깨우러 오시는 메시아를 만나게 된다는 사실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5:24-29, 11:11-14).

10)   사람들이 말하고 있는 죽음 다음에 부활과 심판이 있으며 그 결과에 따라서 영원한 구원과 생명이냐 아니면 완전한 사망이냐가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우상과 그 우상을 섬기는 삶으로 일관한 사람들은 모두가 한번 죽게 되면 다시 깨어난다고 하더라도 구원을 얻지 못하고 완전한 사망으로 처리되고 맙니다(26:14a).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영벌로써 그들을 멸하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들의 모든 기억을 지워 버리시는 형벌입니다(26:14b). 그러면 그 영혼까지 완전히 소멸되고 말 것입니다(10:28).

11)   다섯째, 제15절입니다;15. 여호와여 주께서 이 나라를 더 크게 하셨고 이 나라를 더 크게 하셨나이다. 스스로 영광을 얻으시고 이 땅의 모든 경계를 확장하셨나이다”(26:15);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은 스스로 창조하시는 창조주의 영광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환언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피조물인 사람들의 능력으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창조주의 능력으로 만드는 것이기에 그 규모와 범위는 사람들이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12)   구체적으로 이사야는 그의 선지서 제65장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의 개념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설명을 해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처음 하늘과 땅을 멸하시고 새로이 창조하시는 하늘과 땅입니다(65:17). 그리고 새로운 예루살렘의 건설입니다(65:18). 그곳에서는 언제나 하나님께서 백성들과 함께 하시며 생명의 기운이 흘러 넘치고 모든 생명을 살리고 돌보시는 하나님의 공의가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65:19-25). 그리고 새 예루살렘성의 광대한 규모에 대해서는 훗날 사도 요한이 계시록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21:16);

셋째로, “16. 여호와여 그들이 환난 중에 주를 앙모하였사오며, 주의 징벌이 그들에게 임할 때에 그들이 간절히 주께 기도하였나이다(2:23, 3:4-8). 17. 여호와여 잉태한 여인이 산기가 임박하여 산고를 겪으며 부르짖음 같이 우리가 주 앞에서 그와 같으니이다(24:19, 12:2). 18. 우리가 잉태하고 산고를 당하였을지라도(모든 노력과 지혜를 다하였지만) 바람을 낳은 것 같아서(허망하여서), 땅에 구원을 베풀지 못하였고(구원은 사람의 힘과 지혜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깨닫고 있는 것임, 4:12) 세계의 거민을 (만민을 영생의 구원으로) 출산하지 못하였나이다. 19.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그들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37:10). 티끌에 누운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들을 내놓으리로다(20:13). 20. 내 백성아 갈지어다. 네 밀실에 들어가서 네 문을 닫고 분노가 지나기까지 잠깐 숨을지어다(영생의 부활의 주님이 찾아오실 때까지 음부의 세계에 잠시 머물라는 것임, 9:22, 24:46). 21. 보라 여호와께서 그의 처소에서 나오사 땅의 거민의 죄악을 벌하실 것이라(12:12). 땅이 그 위에 잦았던 피를 드러내고(4:10-11) 그 살해 당한 자를 다시는 덮지 아니하리라(5:24-29, 20:13, 21:1-4)“(26:16-21);

(1)  본문은 이사야의 예언이 시사하고 있는 구원과 영생으로 나아가는 3단계의 기도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26:16-21). 선지자 이사야는 창조주 하나님의 역사심판과 구원 그리고 종말심판과 영생을 예언하고 있는 선지자입니다. 물론 역사심판 가운데 구원을 받지 못하는 그리고 종말심판 가운데 영생을 얻지 못하고 영벌에 처해지는 자에 대해서도 예언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동족 모두가 심판보다는 구원을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진노와 징벌에서 벗어나 구원과 영생으로 나아가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이사야는 분명히 그러한 마음가짐을 가지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구원과 영생으로 나아갈 있는 3가지의 단계적 기도의 내용에 대하여 말해주고 있습니다. 내용이 무엇인지 구절을 따라가면서 살펴보고 또한 깊은 의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묵상해보고자 합니다;

(2)  첫째, 16절입니다; “16. 여호와여 그들이 환난 중에 주를 앙모하였사오며, 주의 징벌이 그들에게 임할 때에 그들이 간절히 주께 기도하였나이다”(26:16); 대목은 이미 살펴본 9절과 같은 내용입니다. 그렇게 있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1)      9. 밤에 영혼이 주를 사모하였사온즉”(26:9a) 구절에서 환난 상징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내용은 환난 중에 주를 앙모하였사온즉”(26:16a)이라는 말로 바꾸어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중심이 주를 간절히 구하오리니, 이는 주께서 땅에서 심판하시는 때에 세계의 거민이 의를 배움이니이다”(26:9b)라는 구절은 의미상 주의 징벌이 그들에게 임할 때에 그들이 간절히 주께 기도하였다”(26:16b) 내용과 같습니다. 다만 문장을 도치해 놓은 것입니다.

2)      따라서 9절이나 16절의 의미는 동일하며 다음과 같습니다; “환난 중에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징계와 심판을 당할 때에 비로소 주께 구원을 간구하게 됩니다”. 그와 같이 선지자 이사야가 동일한 내용을 차례나 진술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고난과 심판 가운데 하나님을 찾게 되는 것이 구원으로 나아가는 첫번째 단계이며 기도가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세상살이에 있어서 고난과 환난이 있을지라도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께 구원을 호소하고 나아갈 수만 있다면 그것은 축복일 수가 있다는 강한 시사를 해주고 있는 대목입니다.

(3)  둘째, 17절입니다; “17. 여호와여 잉태한 여인이 산기가 임박하여 산고를 겪으며 부르짖음 같이 우리가 앞에서 그와 같으니이다”(26:17); 이사야는 참으로 뛰어난 비유를 선택하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당하고 있는 고난과 환난이 마치 옥동자의 분만을 앞두고 있는 임산부의 산고와 같다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께 구원해달라고 손을 들고 나아가게 되면 놀라운 미래를 맞이하게 것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을 찾지 아니하고 다른 방법으로 고난을 이기고자 애를 때에는 처참한 미래를 맞이하게 것입니다. 가지 경우에 대한 설명이 이하 구절에서 나타나고 있으므로 항목을 달리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4)  셋째, 18절입니다; “18. 우리가 잉태하고 산고를 당하였을지라도 바람을 낳은 같아서 땅에 구원을 베풀지 못하였고, 세계의 거민을 출산하지 못하였나이다”(26:18);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아니하고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고난과 환난 그리고 심판의 시기를 마치 애굽의 바로처럼 완악한 방법으로 이겨내려고 합니다(7:10-11, 8:6-7, 15). 그렇게 되면 결과는 바람이 생겨서 흩어지는 것과 같이 허망합니다(26:18a). 고생과 고난은 점점 가중이 됩니다. 환난은 커진 재앙과 더불어 계속 닥치고 있습니다. 구원에서 점점 멀어지고 미래는 암담해지고 맙니다(26:18b).

(5)  넷째, 19절입니다; “19. 주의 죽은 자들이 살아나고 그들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누운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들을 내놓으리로다”(26:19);

기적을 베푸시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고난을 통하여 새로운 미래를 창조해 주십니다(8:17-18). 사실을 믿고서 고난 가운데 구원을 호소하게 되면 놀라운 미래가 찾아오게 됩니다. 마치 산고를 치르고 옥동자를 주님 안에서 분만하는 것과 같습니다. 새로운 미래는 생명의 부활입니다. 그것이 바로 영생을 얻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2가지의 기도를 해야 합니다; 하나는, 고난과 환난 그리고 심판을 당할 때에는 구원해달라는 기도를 하나님께 올려야만 합니다. 하나는, 고난과 고통을 이기게 하시고 끝에 있는 영광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영광은 부활과 영생의 영광입니다. 소망을 가지고 성도가 기도할 때에 구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성령께서 임재하여 내주하시며 끝까지 떠나지 아니하시는 은혜를 맛볼 수가 있습니다.

(6)  다섯째, 20절입니다;20. 백성아 갈지어다. 밀실에 들어가서 문을 닫고 분노가 지나기까지 잠깐 숨을지어다”(26:20);

부활과 영생의 미래를 바라보면서 남은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성도들에게 어떠한 기도가 필요할까요? 선지자 이사야는 마치 시편에 실려 있는 다윗의 기도와 비슷한 기도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20절에서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고 있을 때에 어디로 피신하면 될까요? 다윗은 산성이며 피난처이며 요새가 되시는 주님께 피난하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3:3-8, 18:2-3). 모세는 어린양의 피가 뿌려져 있는 집안으로 들어가라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12:5-14). 같은 의미에서 선지자 이사야는 너의 밀실로 들어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26:20). 밀실은 기도하는 공간이며 동시에 그리스도의 피가 뿌려져 있는 곳입니다. 그리고 의미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에게 보호를 요청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거듭난 성도가 평생 동안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해야만 하는 이유입니다. 기도로써 주님처럼 세상을 이기는 것입니다(6:9-15, 16:33, 7:24-8:4).

(7)  여섯째, 21절입니다;21. 보라 여호와께서 그의 처소에서 나오사 땅의 거민의 죄악을 벌하실 것이라. 땅이 위에 잦았던 피를 드러내고 살해 당한 자를 다시는 덮지 아니하리라”(26:21); 사람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성도의 삶을 살지 아니하면 어떻게 될까요? 그리스도 안에서 이름으로 보호함을 받을 수가 없게 되고 맙니다(8:1-2).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므로 땅의 거민의 죄악을 벌하실 때에 함께 처벌되고 것입니다(26:21a). 자신의 죄악을 그리스도의 대속의 피로 속죄하지 아니했기에 땅에서 죄악이 드러날 것입니다(26:21b). 죄악을 덮어줄 어린 양의 피가 없으므로 영벌의 심판에 들어가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사야는 인류역사의 종말을 내다보면서 하나님 심판의 두려움을 동족들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 예언의 목적은 그의 동족들이 더 이상 우상을 섬기며 세상적인 방법으로 살지 말고 제사장나라 거룩한 백성 답게 살 수 있도록 부디 삶의 방법을 돌이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선지자 이사야는 이방인들에게도 자신의 기록이 전달되기를 소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선민과 이방인을 차별하지 아니하시고 공평하게 다루시는 공의의 하나님을 그가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는 창조주이십니다. 선민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까지 모두 창조하신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만민이 하나님을 창조주로 높여야만 합니다(25:1b). 그리고 인생을 살아가는 자는 누구나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야만 합니다(25:1c). 왜냐하면, 선민의 나라 이방인의 나라가 문제가 아니라 개인적인 삶의 결산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각자의 인생 끝에 심판을 행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사야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면서 하나님의 역사에 대하여 평가하고 있습니다;

(1)  남과 하나님과의 문제보다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 중요합니다. 내 민족 내 나라가 하나님 앞에 장차 어떻게 되는가?의 문제보다 사실은 내가 하나님 앞에 어떤 모습으로 서있는가?가 더 우선적인 문제입니다. 결국 한마디로, 이사야는 환경과 상황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 중요하다는 깨달음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아니라 나의 하나님이심을 본문에서 먼저 고백하고 있습니다(25:1a).

(2)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을 이사야가 경이롭게 보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의 지혜와 능력에 의하여 만들어진 세상이 아닙니다. 그리고 자연이 빚어놓은 우연의 산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창조해 놓으신 세상임을 깨닫고 있습니다. 그래서 창조주 하나님을 높이고 있습니다(25:1b).

(3)  피조물인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저버리고 제멋대로 살고들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다르십니다. 자신의 이름으로 맹세하고 약속하신 내용을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하게 지키고 계십니다. 그와 같이 언약에 신실하신 헤세드하나님의 이름을 이사야가 찬송하고 있습니다(25:1c).

(4)  선민과 이방인을 차별하지 아니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이사야가 믿고 있습니다.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메시아가 탄생하시며 메시아가 건설하시는 영원한 나라의 속성에 대하여 이사야가 계시를 받고서 예언한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11:1-9). 그러므로 이사야는 선민이거나 이방인이거나 상관없이 하나님 앞에 진심으로 돌아오는 자는 모두가 종말의 심판을 면하고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선포하고 있습니다(19:25).

(5)  그와 같은 내용을 개인의 차원 뿐만이 아니라 민족과 국가적인 차원으로 확장하여 다음과 같이 예언하고 있습니다; “3. 강한 민족이 주를 영화롭게 하며 포학한 나라들의 성읍이 주를 경외하리이다”(25:3). 심판이 아니라 구원을 베풀기를 원하시는 창조주 하나님께 다시 한번 영광을 돌립니다.

다음으로 선지자 이사야는 구원과 영생으로 나아가는 단계의 기도생활에 대하여 본문의 예언 가운데 알기 쉽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1)   첫째는 고난과 환난을 당할 때에 자신의 꾀와 방법으로 극복하려고 하지말고 먼저 하나님께 구원을 호소하라는 것입니다. 회개를 통하여 구원으로 나아갈 있도록 하나님께서 고난과 환난 그리고 역사적인 심판을 사용하시는 것으로 이사야는 보고 있습니다.

(2)   둘째는, 옥동자를 분만하기 위하여 산모가 산고를 치르듯이 부활과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고난 가운데 기도해야만 합니다. 산고가 없으면 새로운 생명의 탄생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죽음의 고난을 이겨내야 합니다. 참고로, 하나님 아버지에게 기도하여 세상과 죽음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16:33). 그러므로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역시 하나님께 기도를 드려야만 합니다. 그것이 영생으로 나아가는 기도입니다.

(3)   셋째로,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면 될까요?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야만 합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로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세상적인 어려움을 이겨내었는지를 묵상하고서 방법 그대로 자신도 세상을 이겨낼 있도록 하나님께 간구드려야만 합니다. 기도는 능력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선례가 확실하므로 동일한 사례에 있어서 같은 하나님의 구원하심의 역사가 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가지 말씀을 드리자면, 선지자 이사야는 옛날 애굽에서 장자의 죽임이 임할 때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어린양의 피를 대문에 뿌린 집안에서 구원을 얻은 유월절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그것이 그리스도라는 밀실 들어가서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는 방법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26:20).

그러므로 남은 인생 동안 성도들은 그리스도라는 밀실 가지고 살아가야만 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처럼 생각하며 기도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모두 그리스도의 제자 답게 주님과 같은 인생을 살아갈 있도록 간구를 한다는 의미입니다.

요컨대,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보호하심과 구원과 영생을 모두 받아 누리는 확실한 기도의 방법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아무쪼록 그와 같은 주님의 말씀에 대한 깨달음과 더불어 감사와 맡김의 기도로써 세상을 이기는 저와 여러분들이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