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이사야가 환상의 골짜기에서 바라보고 있는 선민의 종말과 성도의 승리”(사22:1-25)
설교일; 주후 2026년 8월 16일 주일
작성자; 손진길 목사(25년 7월 17일 목요일 작성)

본문에서 선지자 이사야는, “1. 환상의 골짜기에 관한 경고라”(사22:1a)고 묵시적인 예언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환상의 골짜기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제2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2. 소란하며 떠들던 성, 즐거워하던 고을이여”(사22:2a).
아모스의 아들인 이사야는 주로 예루살렘에서 동족인 유대왕국의 백성들에게 여호와의 말씀을 예언으로 전한 선지자입니다. 그러므로 환상의 골짜기는 그의 선지자활동의 주무대인 예루살렘성을 달리 말하고 있는 용어로 보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특별히 ‘골짜기’를 언급하고 있으며 그곳에서 이사야가 어떠한 환상을 보고 있다는 것일까요? 두가지로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1) 하나는, 역시 대선지서에 속하는 에스겔 제37장에서 ‘마른 뼈들이 가득한 골짜기’가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겔37:1-2). 그것은 선민들이 소망 없이 죽어 있는 예루살렘의 골짜기 곧 힌놈의 골짜기와 같은 멸망의 장소를 가리키고 있습니다(겔37:11).
(2) 또 하나는, 소선지서 요엘에서 ‘심판의 골짜기’를 말하면서(욜3:14) 그곳이 예루살렘임을 언급하고 있습니다(욜3:16). 그렇다면 선지자 이사야는 본문에서 예루살렘에 닥치게 되는 죽음의 위기를 예고하고자 하며 어떻게 하면 그 소망이 없는 죽음에서 여호와의 구원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를 암시해주고자 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먼저 이사야가 여호와의 말씀 가운데서 파악하고 있는 예루살렘의 당면한 위기와 훗날에 닥치게 되는 멸망에 관한 내용을 본문에서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의 중요한 설명만 찾아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첫째, 당면한 위기는 주전 701년에 이사야의 생전에 만나게 되는 앗수르제국의 예루살렘성 공격입니다. 산헤립 황제가 보낸 군대는 유대왕국의 지방 대부분의 성읍을 파죽지세로 짓밟은 후에 다윗왕조의 수도인 예루살렘성을 함락하고자 골짜기에 진을 치고 있습니다.
1) 그들은 천혜의 요새인 평균고도 790미터의 예루살렘성에서 끈질기게 저항하고 있는 히스기야 왕의 군대를 완전히 쳐부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을 포위하고서 식수가 떨어지고 양식이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형편입니다. 그러므로 선지자 이사야가 “너의 죽임을 당한 자들은 칼에 죽은 것도 아니요, 전쟁에 사망한 것도 아니라”(사22:2b)고 말하는 것은 그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2) 그것도 그럴 것이 마지막 순간에 히스기야 왕이 예루살렘성전에 들어가서 앗수르 군대의 선전관 랍사게 장군이 보내어온 항복을 요구하는 문서를 펼쳐놓고서 그들이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을 감히 멸시하고 조롱하였으니 부디 그들을 징벌하여 달라고 요청하였을 때에 여호와께서 천사를 보내어 앗수르 군인 18만 5천명을 순식간에 죽여버리고 말기 때문입니다(사37:35-36, 왕하19:34-35). 그러므로 예루살렘 성에 거주하고 있던 유대왕국의 왕과 귀족들 그리고 부자들은 무사했던 것입니다(사22:2b).
(2) 둘째, 주전 586년 시드기야 왕 11년이 되면 그것이 아닙니다. 우선 이사야는 히스기야 왕이 살아 있는 주전 687년까지 예루살렘에서 선지자로 활동하고 있습니다(사1:1). 그러므로 그가 개인적으로 신바벨론제국 갈대아군대에 의하여 예루살렘성이 함락되고 백성들이 포로가 되어 바벨론으로 끌려가는 광경을 생전에 목격한 것이 아닙니다(왕하25:1-7, 11-12). 요컨대, 본문에 나타나고 있는 예루살렘성의 멸망에 관한 예언은 선지자 이사야가 여호와의 역사섭리를 묵시로 전하고 있는 먼 미래에 대한 예언 그 자체입니다(사22:3-5).
(3) 셋째, 그런데 본문 제6-14절의 예언의 내용은 상당히 이상합니다. 왜냐하면 그 내용은 단순하게 다윗왕조 유대왕국의 멸망에 관한 역사적인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음과 같은 사실을 손쉽게 지적할 수가 있습니다;
1) 하나, 주전 597년에 신바벨론제국의 황제 느부갓네살이 유대왕국을 치고자 많은 군대를 동원하였을 때에 그 구성이 다음과 같습니다; “2. 여호와께서 그의 종 선지자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과 같이 (신바벨론의) 갈대아의 부대와 아람의 부대와 (기르를 위시한) 모압의 부대와 암몬 자손의 부대를 여호야김에게로 보내 유다를 쳐 멸하려 하시니”(왕하24:2). 그런데 본문 제6절에서는 바사 왕국이 점령하고 있는 엘람 지역의 원주민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참고로, 바사 왕국의 고레스 왕은 훗날 주전 539년에 메대의 다리오 왕과 함께 연합하여 신바벨론제국의 수도인 바벨론성을 함락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들 아리안족의 지배를 받고 있는 엘람의 원주민을 느부갓네살 황제가 동원하고 있다는 것은 주전 586년 예루살렘멸망과는 맞지 않습니다.
2) 둘, 훗날 신바벨론제국을 멸망시킨 고레스 황제가 페르시아제국을 건설하고 바벨론 포로가 되어 있는 유대인들을 해방합니다. 특히 그들 가운데 자원하는 자들에게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성전을 재건하고 고토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습니다(스1:1-4). 그때 다윗왕가의 후손인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가문의 후손인 예수아가 귀국한 동족들과 힘을 합하여 제2성전을 건설하고 예루살렘 성읍을 재건합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유대총독으로 부임한 느헤미야가 백성들과 함께 예루살렘 성벽을 보수합니다. 그 모습이 본문에 기록되고 있습니다; “9. 너희가 다윗 성의 무너진 곳이 많은 것도 보며 너희가 아랫못의 물도 모으며, 10. 또 예루살렘의 가옥을 계수하며 그 가옥을 헐어 성벽을 견고하게도 하며, 11. 너희가 또 옛 못의 물을 위하여 두 성벽 사이에 저수지를 만들었느니라”(사22:9-11a).
그런데 주전 516년에 예루살렘 제2성전을 건설하고 주전 458년에 고토로 돌아온 율법학자 에스라와 주전 444년에 부임한 유대총독 느헤미야의 지도로 예루살렘 성벽을 보수하고 여호와신앙을 새롭게 정비한 유대인들이 그후 신앙생활을 잘하고 여호와의 마음에 흡족하게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간 것일까요?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들이 신봉하고 있는 유대교의 가르침과 그들의 종교생활은 선지자 이사야가 지적하고 있는 선민의 타락상을 재현하고 맙니다.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 한구절만 제시하여도 그러합니다; “13. 주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사29:13).
그때문에 훗날 예수 그리스도가 유대인사회에서 재차 지적하십니다; “7.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 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8.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9.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 도다 하였느니라 하시고”(마15:7-9).
그와 관련하여 본문에서 선지자 이사야가 훗날의 유대교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예언하고 있습니다;
(1) 첫째,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다시 신앙생활하고 있는 유대인들이 세월이 지나가자 여호와신앙에서 이탈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진심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아니하고 그저 외양적으로 의로운 척 행세하는 종교생활에 젖어 들게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사22:11b).
(2) 둘째, 여호와의 영원한 구원을 얻자면 그와 같은 외식적인 종교생활을 청산하고 진심으로 여호와 앞에 나아와서 자신이 죄인임을 실토하며 인간의 힘으로는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없음을 고백하고 여호와의 도우심을 구해야만 합니다. 그리하면 이 세상에 오시는 구원주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와 보혜사 성령님의 내주 역사하심으로 새 언약의 시대를 맞이하고 영생의 천국으로 들어가는 완전한 구원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렘31:33, 욜2:28).
(3) 셋째, 유대교인인 선민들이 사람들 앞에서만 거룩하고 경건한 척 의인행세를 하는데 너무나 익숙하게 되어서 안일하게 종교생활을 영위하며 이기적인 현세주의 사상에 빠져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1) 예루살렘성전에서 대(大)속죄일에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가서 백성들이 지은 죄를 매년 탕감 받아 나오고 있으며 그 혜택을 할례 받은 선민들이 독점적으로 누리고 있으므로 율법에 비추어 여호와의 구원은 따 놓은 당상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러므로 살아 있는 동안에 실컷 부귀영화를 누리면 그만이라고 하는 세속적인 욕심이 유대인 사회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2) 그와 같은 타락한 선민의 미래상을 선지자 이사야가 여호와의 환상으로 미리 보고서 본문에서 경고하고 있습니다; “12. 그날에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명령하사 통곡하며 애곡하며 머리 털을 뜯으며 굵은 베를 띠라 하셨거늘, 13. 너희가 기뻐하며 즐거워하여 소를 죽이고 양을 잡아 고기를 먹고 포도주를 마시면서 내일 죽으리니 먹고 마시자 하는도다!(눅16:19-21, 12:19) 14. 만군의 여호와께서 친히 내 귀에 들려 이르시되, 진실로 이 죄악은 너희가 죽기까지 용서하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사22:12-14).
3) 그와 같은 잘못된 선민사상을 어떻게 하면 청산할 수가 있을까요? 그에 대하여 선지자 이사야는 현세적인 영광과 선민의 특혜만을 바라면서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천국복음을 외면하고 살아가는 자의 예표로서 왕궁대신 셉나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사22:15-19, 25). 그 다음에는 선민이 사라지고 그리스도의 제자인 성도들이 예루살렘의 주민과 유다의 집을 구원하며 만민을 구원하여 아버지 하나님의 집으로 들어가서 천국의 영광을 누리는 모습을 힐기야의 아들인 여호와의 종 엘리아김의 모습으로 알기쉽게 보여주고 있습니다(사22:20-24).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에 대한 구절풀이에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얻은 소중한 교훈과 메시지를 더불어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1. 환상의 골짜기(예루살렘 성밖에는 힌놈의 골짜기가 있음. 그곳에서는 몰렉에게 인신제사를 드리고 바알을 섬기며 죽은 자의 시신이 매장되어 있음. 그곳을 선지자 이사야가 여호와의 환상으로 보고 있는 것임)에 관한 경고라(두려운 미래가 다가옴을 알고서 당장 회개하라는 것임). (선민인) 네가 (아직도 두려운 미래를 깨닫지 못하고 우상을 섬기기 위하여 평평한, 렘32:29, 습1:5) 지붕에 올라감은 어찌함인고? 2. 소란하며 떠들던 성, 즐거워하던 고을(예루살렘성)이여, 너의 죽임을 당한 자들은 칼에 죽은 것도 아니요 전쟁에 사망한 것도 아니라(주전 701년에는 여호와께서 천사를 보내어 예루살렘성을 구원하여 주신 것임, 왕상19:34-35). 3. 너의 관원들도 다 함께 도망하였다가 활을 버리고 결박을 당하였고 너의 멀리 도망한 자들도 발견되어 다 함께 결박을 당하였도다(그러나 주전 586년에는 유대왕국이 완전히 멸망하고 백성들이 적군에게 포로가 되고 말 것임, 왕하 25:1-12). 4.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돌이켜 (애통해 하는, 눅19:41, 요11:35) 나를 보지 말지어다. 나는 슬피 통곡하겠노라! 내 딸 백성이 패망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나를 위로하려고 힘쓰지 말지니라(여호와 하나님이 선민의 나라와 그 사회가 회개하여 여호와의 구원을 얻지 아니하고 끝내 멸망 당한 것을 슬퍼한다는 것임, 욘3:4-10). 5. 환상의 골짜기에 주 만군의 여호와께로부터 이르는 소란과 밟힘과 혼란의 날이여 성벽의 무너뜨림과 산악에 사무쳐 부르짖는 소리로다(여호와의 눈 밖에 난 선민의 나라 예루살렘의 붕괴와 유대왕국의 멸망이 도래하는 것임). 6. 엘람 사람(아리안족인 바사인들이 엘람을 정복하고 그들의 바사왕조가 바벨론을 치고자 틈을 엿보고 있으므로 여기서 엘람의 병사들이 예루살렘공격에 나서고 있다는 내용은 신바벨론제국의 시대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님. 그러므로 종말에 이루어지는 마지막 전투의 모습임)은 화살통을 메었고 병거 탄 자와 마병이 함께 하였고 (모압에 속하는) 기르 사람은 방패를 드러냈으니(모압의 군대는 주전 597년에도 느부갓네살 황제의 명령으로 예루살렘을 치고자 동원이 되었음, 왕하24:2), 7. 병거는 네 아름다운 골짜기에 가득하였고 마병은 성문에 정렬되었도다(이미 예루살렘성을 정복한 것으로 보임)”(사22:1-7); 다음과 같이 2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1. 환상의 골짜기(예루살렘 성밖에는 힌놈의 골짜기가 있음. 그곳에서는 몰렉에게 인신제사를 드리고 바알을 섬기며 죽은 자의 시신이 매장되어 있음. 그곳을 선지자 이사야가 여호와의 환상으로 보고 있는 것임)에 관한 경고라(두려운 미래가 다가옴을 알고서 당장 회개하라는 것임). (선민인) 네가 (아직도 두려운 미래를 깨닫지 못하고 우상을 섬기기 위하여 평평한, 렘32:29, 습1:5) 지붕에 올라감은 어찌함인고? 2. 소란하며 떠들던 성, 즐거워하던 고을(예루살렘성)이여, 너의 죽임을 당한 자들은 칼에 죽은 것도 아니요 전쟁에 사망한 것도 아니라(주전 701년에는 여호와께서 천사를 보내어 예루살렘성을 구원하여 주신 것임, 왕상19:34-35). 3. 너의 관원들도 다 함께 도망하였다가 활을 버리고 결박을 당하였고 너의 멀리 도망한 자들도 발견되어 다 함께 결박을 당하였도다(그러나 주전 586년에는 유대왕국이 완전히 멸망하고 백성들이 적군에게 포로가 되고 말 것임, 왕하 25:1-12). 4.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돌이켜 (애통해 하는, 눅19:41, 요11:35) 나를 보지 말지어다. 나는 슬피 통곡하겠노라! 내 딸 백성이 패망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나를 위로하려고 힘쓰지 말지니라(여호와 하나님이 선민의 나라와 그 사회가 회개하여 여호와의 구원을 얻지 아니하고 끝내 멸망 당한 것을 슬퍼한다는 것임, 욘3:4-10)”(사22:1-4);

1) 본문은 환상의 골짜기의 첫번째 교훈으로서 죽음에 이르는 도망과 패망과 결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사야는 다윗왕조 유대왕국의 사람이며 동족인 선민들에게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전하도록 선택 받은 선지자입니다(사1:1, 2:1, 6:1, 8-9). 여호와 하나님이 특별히 이사야를 선택하여 선민들에게 예언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로 세운 이유는 그가 동족을 사랑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사6:10-11a). 겉으로 보면, 하나님의 말씀은 선민들의 불신앙과 잘못을 날카롭게 지적하면서 그로 말미암아 발생하는 하나님의 분노와 처벌의 내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사6:11b-13a).
2) 하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자신의 엄청난 잘못을 회개하고 남은 인생을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살아갔던 다윗의 신앙을 본받으라고 하는 권유의 말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사6:13b, 14:1-2, 37:35). 그와 같은 입장에서 본문을 들여다보면 다음 사실을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①하나, 동족의 구원과 회복을 염원하면서 그들에게 전할 하나님의 메시지를 얻고 있는 이사야이기에 그가 보고 있는 ‘환상’은 역시 그의 동족 선민과 관련된 것입니다. ②둘, 이사야는 유대왕국에서 나고 자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유다의 지리와 환경에 익숙합니다. 그에 따라 그가 보고 있는 환상의 골짜기는 그에게 익숙한 예루살렘의 골짜기라고 하겠습니다.
3) ③셋, 크게 보아 두 개의 골짜기가 연결되어 예루살렘성에 이르고 있습니다; 하나는, 여리고 길입니다. 그것은 지중해 해변 길에서 예루살렘의 동편 감람산에 이르는 골짜기인데 그것이 물자 및 사람의 수송의 통로로 사용이 되고 있습니다. 또 하나는, 평균 해발 790미터의 고지인 예루살렘 성의 동 서 남 삼면에 있는 깊은 골짜기입니다. 힌놈의 골짜기와 멸망의 골짜기가 그곳에 있습니다. 환상의 골짜기에 관한 경고를 하면서 소란하고 떠들던 성을 언급하고 있는 점으로 보아 그 골짜기는 예루살렘으로 통하는 힌놈의 골짜기를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환상의 골짜기’가 주고 있는 첫번째의 교훈이 무엇인지 본문의 구절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4) 첫째, 제1절입니다; “1. 환상의 골짜기에 관한 경고라. 네가 지붕에 올라감은 어찌함인고”(사22:1); 예루살렘은 비가 적은 곳입니다. 그러므로 주택의 지붕이 별로 경사가 없습니다. 편편한 지붕이 많은 곳이므로 유사시에는 지붕으로 몸을 피할 수가 있습니다. 그와 같은 실태를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지적하시고 있습니다; “16. 그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17. 지붕 위에 있는 자는 집안에 있는 물건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며, 18.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지러 뒤로 돌이키지 말지어다”(마24:16-18). 두가지의 풀이가 가능합니다.
5) 하나는, 적들이 습격해오고 있습니다. 미처 주민들이 산으로 대피할 시간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일단 높은 지붕으로 피신하고 있습니다. 지붕에 올라가 있는 주민들을 일일이 끄집어내려서 살해하기에는 시간이 많이 소요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골짜기를 따라서 예루살렘으로 쳐들어 온 적들이 일단 성내의 길거리와 주택의 내부에서 눈에 뜨이는 백성들을 끄집어내고 있습니다. 그들을 먼저 처리한 다음에 시간을 두고서 지붕에 올라가 있는 백성들을 끄집어내려야만 합니다. 그것은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 작업이 될 것입니다.
6) 물론 건조한 날씨의 예루살렘이므로 불을 붙여서 지붕으로 던지면 주민들을 모조리 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적들이 침입한 목적에서 벗어나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점령한 지역의 주택은 장차 그들이 사용할 수 있는 것이며 주민들을 산채로 잡아서 끌고 가야만 돈이 되기 때문입니다. 고대사회에서 가치가 큰 전리품은 노동력의 획득인 것입니다. 그와 같은 일련의 사건의 전개가 지금 이사야의 눈앞에 환상으로 펼쳐지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7) 또 하나는, 평평한 지붕에서 선민 유대인들이 바알을 섬기고 천체를 우상으로 삼아 섬기고 있습니다. 그들은 선민들이므로 예루살렘성전에서 속죄의 제사를 드리며 남자들은 율법에 따라 할례를 받고 있습니다. 그에 따라 그들은 대내외적으로 여호와의 거룩한 백성이며 심판의 와중에서도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자들이라고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의 중심에는 여호와를 두려워하며 그 말씀을 진심으로 지켜 행하고자 하는 생각이 없습니다. 그저 사람들이 보고 있는 앞에서만 율법을 잘 지키는 척 꾸미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두운 구석에서는 현세적인 소원성취를 위하여 우상을 섬기고 무당을 찾아가는 무속신앙에 빠져 있습니다. 그들에게 여호와의 심판이 장차 선민의 나라의 멸망으로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8) 둘째, 제2절입니다; “2. 소란하고 떠들던 성, 즐거워하던 고을이여 너의 죽임을 당한 자들은 칼에 죽은 것도 아니요 전쟁에 사망한 것도 아니라”(사22:2); 인구가 많은 성임을 말해주고 있는 대목이 ‘소란하고 떠들던 성’입니다(사22:2a). 그리고 향락의 도시이며 대표적인 소비도시임을 말해주고 있는 대목이 ‘즐거워하던 고을이여’입니다(사22:2b). 그렇게 항상 즐거움과 쾌락의 세월만이 지속될 것으로 착각하고서 흥청망청 제멋대로 살아온 대표적인 소비도시가 예루살렘입니다. 그러한 그들에게 갑자기 적군이 밀어닥치고 있습니다. 성을 방어하던 군사들이 제일 먼저 죽임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미처 피난하지 못한 백성들이 적군의 칼에 살해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그렇게 전쟁으로 살해되고 있는 자들에 대한 내용이 아니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본문은 과연 무엇에 관한 내용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9) 셋째, 제3절입니다; “3. 너의 관원들도 다 함께 도망하였다가 활을 버리고 결박을 당하였고 너의 멀리 도망한 자들도 발견되어 다 함께 결박을 당하였도다”(사22:3); 적들이 갑자기 쳐들어오는데 대책이 없이 도망을 쳤다가 잡혀서 무장해제를 당하고 결박까지 당하고 있는 관원들과 백성들에 관한 이야기를 이사야가 말하고 있습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는 대목입니다; ①하나, 적의 침입을 예상하거나 평소에 아무런 대비가 없습니다; “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5:8)라고 베드로가 강조할 정도로 영적으로 비상시국인데 성도들이 전혀 무감각합니다. 신앙생활에 아무런 대비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멀리하고 신앙생활의 흉내만 내고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적의 침입을 졸지에 받고 있습니다.
10) ②둘, 적이 기습하였을 때에 이를 격퇴하기 위하여 제대로 싸우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막상 악한 세력의 공격을 받았으면 그때라도 여호와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자 나아가야만 합니다. 니느웨 왕(욘3:6)이나 히스기야 왕의 태도가 그것입니다(왕하19:1). 그런데 그러한 사후조치마저 하지 못하고 있는 신앙의 위험성에 대하여 이사야가 지적하고 있는 대목입니다. ③셋, 무책임하게 자기 한 목숨만 살겠다고 도망치고 있습니다; 백성을 지켜야만 하는 관원들이 먼저 적의 침입을 알게 되자 도망치고 있습니다. 영적인 지도자들도 도망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라와 백성은 누가 지킬 것입니까? 관원과 지도자들이 그러한데 백성들이야 제 한 몸 살겠다고 앞다투어 도망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합니다.
11) ④넷, 모두 적에게 붙잡혀서 무장해제를 당하고 결박까지 당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타락하고 썩어빠진 나라와 백성을 하나님께서 그냥 버려두지 않습니다. 모두 적에게 붙잡히게 하여 꼼짝 없이 결박을 당하게 할 것입니다;

그것이 죄와 사망의 결박에 사로잡혀서 평생을 살아가고 있는 불쌍한 죄인들의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그들을 영적으로 무장시키고 깨어 있는 신앙인으로 일으켜 세울 수가 있을까요? 한마디로, 그리스도와 성령님을 보내셔서 하나님께서 이룩하시는 구원의 역사가 그 해답입니다(롬8:1-2). 이제 이사야의 궁극적인 관심은 그곳으로 마냥 향하고 있습니다.
12) 넷째, 제4절입니다; “4.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돌이켜 나를 보지 말지어다. 나는 슬피 통곡하겠노라. 내 딸 백성이 패망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나를 위로하려고 힘쓰지 말지니라”(사22:4); 예루살렘의 선민들이 과연 장차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성령님의 역사에 동참할 수가 있을까요? 선지자 이사야의 눈에는 그러하지 못한 광경이 ‘환상의 골짜기’의 모습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13) 그래서 이사야는 참혹한 예루살렘의 멸망을 환상 가운데 바라보면서 아버지 하나님의 심정으로 울부짖고 있습니다; “여호와신앙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며 이방족속처럼 타락해버린 유대왕국이 멸망을 당하고 마는구나. 다시 그들 유민들에게 그리스도를 보내어 주시지만 그 마저도 배척하고 마는구나. 나는 주님처럼 그 환상을 더 이상 볼 수가 없어서 몸을 돌려 눈물만 흘리고 통곡하게 되는구나. 그 때문에 내 동족이 후일에 당하는 처참한 살육의 현장을 미리 보게 되니 할 말이 없구나. 세상에서는 이미 위로와 소망이 없으므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부디 살 길을 열어주십시오!”.
(2) “5. 환상의 골짜기에 주 만군의 여호와께로부터 이르는 소란과 밟힘과 혼란의 날이여 성벽의 무너뜨림과 산악에 사무쳐 부르짖는 소리로다(여호와의 눈 밖에 난 선민의 나라 예루살렘의 붕괴와 유대왕국의 멸망이 도래하는 것임). 6. 엘람 사람(아리안족인 바사인들이 엘람을 정복하고 그들의 바사왕조가 바벨론을 치고자 틈을 엿보고 있으므로 여기서 엘람의 병사들이 예루살렘공격에 나서고 있다는 내용은 신바벨론제국의 시대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님. 그러므로 종말에 이루어지는 마지막 전투의 모습임)은 화살통을 메었고 병거 탄 자와 마병이 함께 하였고 (모압에 속하는) 기르 사람은 방패를 드러냈으니(모압의 군대는 주전 597년에도 느부갓네살 황제의 명령으로 예루살렘을 치고자 동원이 되었음, 왕하24:2), 7. 병거는 네 아름다운 골짜기에 가득하였고 마병은 성문에 정렬되었도다(이미 예루살렘성을 정복한 것으로 보임)”(사22:5-7);
1) 본문은 환상의 골짜기의 두번째 교훈으로서 전쟁의 유혹에 물드는 예루살렘에 대하여 예언하고 있는 대목입니다. 제사장나라 이스라엘을 창건한 자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모세입니다. 그는 백 년 이상 애굽제국에서 노예와 같은 중노동의 삶을 영위하고 있던 이스라엘 자손들을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해방시켰습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지시하신 산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율법으로 전함으로써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신정국가 곧 제사장나라를 출범시킨 주인공입니다. 그 산이 처음에는 미디안 땅 서부에 있는 호렙 산이지만(출3:12, 17:6) 나중에는 시나이반도 남단에 있는 시내 광야의 시내산으로 변경되고 있습니다(출19:1-2, 4-12). 따라서 모세를 선민의 나라 이스라엘의 ‘국부’(國父, 나라의 아버지)라고 부를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구약의 역사에서 가장 명예스러운 인생을 살다 간 모세입니다.
2) 그런데 그가 사랑하는 동족들을 위하여 죽기 전에 남긴 말은 이스라엘의 영광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그 대신에 그는 다음과 같이 여호와신앙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에 관하여 그의 깨달음을 동족들에게 남기고 있습니다; “19. 내가 오늘 하늘과 땅을 불러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20.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청종하며 또 그를 의지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이시니 여호와께서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주하리라”(신30:19-20). 간략하게 풀이를 해보자면, 인생길에는 항상 여호와 하나님께서 생명과 사망, 또는 복과 저주라는 상반된 가치를 쌍쌍으로 사람들에게 제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어느 것을 선택하느냐?에 따라서 당사자가 영생을 얻느냐 아니면 영벌에 처해지느냐?가 결정된다는 말씀입니다.
3) 자신의 인생에 큰 손해가 발생하는 줄 번연히 알면서도 아버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을 그 말씀 따라 선택하여 시행하게 되면 영생을 얻게 되겠지만 반대로 행동한다면 그것은 복이 아니라 저주가 된다는 뜻입니다(마25:31-46). 사람들의 인생만 그러할까요? 그렇지가 않습니다. 나라의 운명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선민의 나라이거나 이방인의 나라이거나 상관이 없습니다. 인류의 미래가 그러하다는 사실을 선지자 이사야가 ‘환상의 골짜기’에서 정확하게 꿰뚫어보고서 증거해주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입장에서 본문의 말씀을 다음과 같이 한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4) 첫째, 제5절입니다; “5. 환상의 골짜기에 주 만군의 여호와께로부터 이르는 소란과 밟힘과 혼란의 날이여, 성벽의 무너뜨림과 산악에 사무쳐 부르짖는 소리로다”(사22:5); 환상의 골짜기에 엄청난 규모의 적군이 쳐들어 오고 있습니다. 그들의 목표는 제사장나라 유대왕국을 정복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이르기까지 이미 골짜기 통로의 주위에 있는 요새지를 모두 점령했습니다. 이제는 적군이 온갖 ‘공성장비’(攻城裝備, 성을 공격하는 장비)를 앞세우고 예루살렘성을 공략하고 있는 중입니다(사22:5ac).
5) 그런데 이사야는 그 적군의 공격이 우연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선민 이스라엘에게 들이대시고 있는 일종의 시험문제라고 보고 있습니다(신30:19a). 그래서 “여호와께로부터 이르는 소란과 밟힘과 혼란의 날이여”(사22:5b)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선민들이 어떻게 그 시험을 통과하는지를 보고 싶어 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드러나 있는 창조주의 생명살림의 뜻을 따라 대응할 것인지 아니면 세상적인 방법 곧 적군과 똑같은 방식으로 맞대응을 할 것인지를 눈여겨보시는 것입니다.
6) 당연히 그 취사선택에 따라서 여호와 하나님의 개입여부가 결정될 것입니다(신30:19b). 여호와 하나님께 맡기고 말씀을 의지하게 되면 하나님의 능력이 발생하고 새로운 복음의 역사가 임하게 될 것입니다(신30:20, 사37:34-38). 반대로 군사력에 의존하여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면 서로 죽고 죽이는 역사가 반복될 따름입니다. 결국 ‘공영’(共榮)이 아니라 ‘공멸’(共滅)의 종말을 맞이하고 말 것입니다;

7) 둘째, 제6절입니다; “6. 엘람 사람은 화살통을 메었고 병거 탄 자와 마병이 함께 하였고 기르 사람은 방패를 드러냈으니”(사22:6); 이사야가 환상 가운데 미래에 예루살렘을 공격하고 있는 군사들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는 적병의 정체를 ‘엘람 사람과 기르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의미가 무엇일까요? 그리고 구체적으로 어느 시대 어느 제국의 예루살렘 침략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①하나, 이사야가 특이하게도 ‘바사’가 아니라 ‘엘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훗날의 역사를 보면 카스피 해에서 남하를 한 세력이 이란 북부 원주민의 나라 ‘엘람’을 무너뜨리고 자신들의 왕조를 건설하기 때문입니다.
8) 그것이 소위 ‘바사의 왕가’입니다. 훗날 바사 왕가의 고레스가 등장하여 주전 539년에 신바벨론제국을 무너뜨리고 메대의 다리오 왕을 물리치고서 페르시아제국을 건설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만약 이사야가 ‘엘람’이 아니라 ‘바사’라고 말했더라면 그 군대는 페르시아제국의 군대일 것입니다. 하지만 ‘엘람’이라고 말했기에 신바벨론제국의 군대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엘람의 원주민들을 벌써 바사 왕가가 지배하고 있기에 엘람의 군대가 신바벨론을 도와 출병하는 일은 여전히 성립되기가 힘들다고 하겠습니다;

9) ②둘, 여기서 선지자 이사야가 ‘기르 사람’을 동시에 언급하고 있습니다. ‘기르’(Kir)는 모압왕국의 수도인 ‘아르’(Ar)의 남서쪽에 있는 큰 성읍이며 군사 도시입니다. 그렇다면 신바벨론제국의 느부갓네살 황제가 모압 사람의 군대를 동원했다고 보아야만 하는데 그것이 가능한지를 역사적으로 검토해야 합니다; 역사적으로, 느부갓네살 황제는 주전 586년에 유다 왕국을 먼저 정벌하고 나서 4년 후에 모압을 정복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압의 군대를 쉽게 동원할 수는 없습니다.
10) 그렇지만 열왕기하 제24장의 기록을 살펴보면 주후 597년에 느부갓네살 황제가 모압의 군대를 동원하여 유대왕국을 치려고 합니다(왕하24:2). 그러므로 기르의 군사를 상정하면 본문은 신바벨론제국이 유대왕국을 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엘람의 군사를 함께 동원하고 있다고 이사야가 예언하고 있으므로 본문은 주전 586년 신바벨론제국이 동원한 군대에 의하여 다윗왕조 유대왕국이 멸망한 사건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에 따라 그보다 훨씬 나중에 발생하게 되는 이란과 이스라엘의 전쟁이라는 종말론적인 세계대전이 가나안 땅에서 발생할 것이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입니다.
11) 셋째, 제7절입니다; “7. 병거는 네 아름다운 골짜기에 가득하였고, 마병은 성문에 정렬되었도다”(사22:7); 적군의 병거가 예루살렘 골짜기에 가득합니다. 이에 맞서고자 유대왕국의 기마대가 성문 안에서 정렬하고 있습니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으로 보복하고자 합니다. 바야흐로 제국의 군대에 맞서서 유대왕국의 정예 기마대가 출병하려고 합니다. 그 광경이 이사야의 눈앞에 생생하게 환상으로 펼쳐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 전쟁의 결과는 어떻게 될까요? 패전의 참상이 다시 이사야의 목전에 전개되고 있습니다. 이사야는 목놓아 통곡하고 싶습니다(사22:4, 12).
12) 그런데 본문에 대한 또 하나의 해석이 가능합니다. 그것은 적들의 군대가 벌써 예루살렘성을 함락하고 그들의 기병대가 성내에 입장하여 도열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완전한 예루살렘성의 붕괴는 주후 70년에 로마대군의 침입으로 실제로 발생하게 됩니다. 그와 같이 풀이할 경우에는 본문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끝까지 외면한 유대교인들의 예루살렘과 유대 땅이 여호와의 역사섭리로 완전히 붕괴되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고 하겠습니다(눅19:41-44). 자세한 내용은 구절풀이에 대한 괄호안의 내용을 참조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8. 그가(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창15:1a) 유다에게 덮였던 것을 벗기매(선민의 나라의 멸망이유를 영적인 안목으로 깨닫고 보니), 그 날에야 네가 수풀 곳간의 병기를 바라보았고(결코 군비가 부족하여 멸망 당한 것이 아님을 알았고), 9. 너희가(바벨론 포로생활에서 해방되어 고토로 돌아온 유대인들이) 다윗 성의 무너진 곳이 많은 것도 보며, 너희가 아랫못의 물도 모으며, 10. 또 예루살렘의 가옥을 계수하며 그 가옥을 헐어 성벽을 견고하게도 하며(예루살렘을 재건하며 성벽을 보수하고), 11. 너희가 또 옛 못의 물을 위하여 두 성벽 사이에 저수지를 만들었느니라(예루살렘성전을 재건하고 유월절 제사를 드리는 등 외적으로는 여호와신앙을 회복하는 것으로 보였음). 그러나 너희가 이를 행하신 이를 앙망하지 아니하였고 이 일을 옛적부터 경영하신 이를 공경하지 아니하였느니라(그렇지만 마음속으로는 여호와를 진정 경외한 것이 아니라는 지적임, 사29:13). 12. 그날에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명령하사 통곡하며 애곡하며 머리 털을 뜯으며 굵은 베를 띠라(회개의 마당으로 나아오라, 욘3:4-10) 하셨거늘, 13. (이방인 니느웨 백성들과 달리 선민인, 마12:39-41) 너희가 기뻐하며 즐거워하여 소를 죽이고 양을 잡아 고기를 먹고 포도주를 마시면서 내일 죽으리니 먹고 마시자 하는도다(마치 히스기야 왕처럼 이기적 현세주의에 빠져서 욕심껏 살아가고 마는 것임, 사39:4-8). 14. 만군의 여호와께서 친히 내 귀에 들려 이르시되, 진실로 이 죄악은 너희가 죽기까지 용서하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그와 같이 세속적인 탐욕에 사로잡혀서 이기적으로 살아가면 결코 영생의 구원을 얻지 못한다는 것임, 눅16:19-21).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불변의 진리라는 선언임)”(사22:8-14); 역시 다음과 같이 2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1) “8. 그가(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창15:1a) 유다에게 덮였던 것을 벗기매(선민의 나라의 멸망이유를 영적인 안목으로 깨닫고 보니), 그 날에야 네가 수풀 곳간의 병기를 바라보았고(결코 군비가 부족하여 멸망 당한 것이 아님을 알았고), 9. 너희가(바벨론 포로생활에서 해방되어 고토로 돌아온 유대인들이) 다윗 성의 무너진 곳이 많은 것도 보며, 너희가 아랫못의 물도 모으며, 10. 또 예루살렘의 가옥을 계수하며 그 가옥을 헐어 성벽을 견고하게도 하며(예루살렘을 재건하며 성벽을 보수하고), 11. 너희가 또 옛 못의 물을 위하여 두 성벽 사이에 저수지를 만들었느니라(예루살렘성전을 재건하고 유월절 제사를 드리는 등 외적으로는 여호와신앙을 회복하는 것으로 보였음). 그러나 너희가 이를 행하신 이를 앙망하지 아니하였고 이 일을 옛적부터 경영하신 이를 공경하지 아니하였느니라(그렇지만 마음속으로는 여호와를 진정 경외한 것이 아니라는 지적임, 사29:13)”(사22:8-11);

1) 본문은 환상의 골짜기의 세번째 교훈으로서 여호와 하나님을 배제한 세상적인 전쟁의 준비에 대한 내용입니다.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는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고 선지자로 세움을 받은 사람입니다(사6:1-8). 그는 당시 참으로 이상한 계시의 말씀을 위탁 받게 됩니다;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10.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하시기로, 11. 내가 이르되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하였더니 주께서 대답하시되, 성읍들은 황폐하여 주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토지는 황폐하게 되며, 12. 여호와께서 사람들을 멀리 옮기셔서 이 땅 가운데에 황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사6:9b-12).
2) 간략하게 풀이를 해보자면, 이사야의 동족인 선민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행태가 여호와신앙에서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 것인지를 모르고서 종교생활을 하며 정책결정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침내 무엇이 잘못되어 있는지 아는 때가 오게 되는데 그때에는 눈에 씌워져 있던 것이 벗겨진 것과 같다는 의미입니다(사6:10, 22:8). 그렇게 자신을 볼 수 있게 되는 때에 과연 선민들은 무엇을 보고 무엇을 깨닫게 되는 것일까요? 본문에서 이사야가 그 점에 대하여 환상의 골짜기를 통하여 답을 얻고 있습니다. 이제 구절을 따라가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3) 첫째, 제8절입니다; “8. 그가(하나님께서) 유다에게 덮였던 것을 벗기매 그 날에야 네가 수풀 곳간(지방 무기고)의 병기를 바라보았고”(사22:8); 하나님께서 오랜 세월 선민 유대인들이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있던(사6:9-10) 그들의 신앙의 상태에 대하여 이제는 볼 수 있도록 덮였던 것을 벗겨 주시고 있습니다. 그와 유사한 표현이 사도 바울의 글에 다음과 같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15.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그 마음을 덮었도다. 16.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고후3:15-16).
4) 이제 영적으로 눈이 떠져서 자신을 바라보니(사22:8a) 가장 먼저 선민들이 발견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수도인 예루살렘 뿐만 아니라 전국 방방곡곡에 무기고를 만들고 그곳에 비치해 놓은 엄청난 양의 병기들입니다(사22:8b). 일찍이 다윗과 솔로몬 시대 곧 이스라엘제국시대에 선민들은 중동의 패권국이었습니다. 그 위신과 지위를 지키기 위하여 솔로몬대왕이 40년 동안의 통치기간 내내 얼마나 노력했는지 모릅니다. 구체적으로, 수도인 예루살렘 뿐만 아니라 지방의 주요도시에 이르기까지 병기고를 설치하고 도시 자체를 모두 요새로 만들었습니다(왕상9:19).
5) 그와 같은 국방정책은 군사력으로 선민의 지위를 유지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지혜의 대왕 솔로몬의 의도와 전혀 다르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제국이 유지된 것이 아니라 도리어 남북으로 쪼개어져 버린 것입니다(왕상12:15-20). 솔로몬의 치하에서 오랜 세월 중노동과 중과세에 시달린 10지파가 세겜에서 독립을 선언한 것입니다. 이제 그 사실을 유대인들이 깨닫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사력을 키워서 적을 격퇴하고자 하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6) 출애굽 당시 광야에서 아말렉 족속의 기습을 경험한 이스라엘 자손들입니다(출17:8). 적들을 격퇴한 것은 겉으로 보면, 여호수아가 지휘하고 있는 이스라엘 장정들로 보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다릅니다. 산 위에서 모세가 손을 들고서 여호와 하나님에게 기도할 때에 승리가 찾아오고 있습니다(출17:9-13). 팔을 내리게 되면 패전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 일을 통하여 하나님은 철저하게 전쟁의 승리가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는다고 하는 사실을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인식시키고 있습니다(출17:14-15).
7) 더구나 그와 같은 하나님의 전쟁은 대대로 계속될 것이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16. 이르되, 여호와께서 맹세하시기를 여호와가 아말렉과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 하셨다 하였더라”(출17:16). 그러나 그와 같이 하나님의 백성을 돕고 대신하여 싸우고 계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잊어버리고서 선민들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 대신에 자신들의 군대를 의지하고 있습니다. 그 사실을 재삼 깨닫게 해주고 있는 현장이 바로 이사야가 바라보고 있는 이른바 ‘환상의 골짜기’라고 하겠습니다(사22:8-11).
8) 둘째, 제9절입니다; “9. 너희가 다윗 성의 무너진 곳이 많은 것을 보며 너희가 아랫못의 물도 모으며”(사22:9); 신흥 패권국 앗수르제국이 주전 722년에 북조 이스라엘왕국을 멸망시키고 이사야 당시에 남조 유대왕국을 침입할 틈을 노리고 있습니다. 국가적 위기를 크게 느낀 히스기야 왕이 대비태세를 점검하고 있습니다. 먼저 천연의 요새인 다윗의 성이 완전하지가 못합니다. 허물어진 곳이 눈에 뜨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선적으로 성벽을 정비하고자 합니다. 더구나 예루살렘은 해발 790미터의 고지대이므로 유사시 마실 물을 확보하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적에게 오래 포위를 당하게 되면 물부족이 심각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밖의 물을 안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시설을 갖추려고 합니다.
9) 구체적에게 바깥으로 노출되지 아니하고 지하수로를 만들어서 샘물을 끌어와야만 합니다. 그리하여야 적의 정찰로부터 안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정교한 공사기법이 무엇일까요? 탐사와 연구를 거듭한 결과 바위 사이를 흐르고 있는 지하수맥을 찾아내고 있습니다. 그 물길을 따라서 성 바깥과 안쪽에서 동시에 굴을 파고 있습니다. 물줄기가 하나이듯이 굴도 중간에서 하나로 만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적과 같은 히스기야 왕의 지하수로가 역사적으로 완공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겉으로 보면 엄청난 쾌거입니다. 그러나 생명수가 되시는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의지하지 아니하고 오로지 사람의 지혜와 노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시도한 것이므로 신앙상의 문제를 초래하고 맙니다. 무엇보다 사람의 중심을 꿰뚫어보고 계시는 하나님 앞에서 실로 부끄러운 일이라고 하겠습니다(삼상16:7. 히4:12).
10) 그 결과 히스기야 왕은 앗수르 군대를 막아내지 못하고 마침내 예루살렘 성에 갇혀서 물만 마시면서 생존하게 되는 비극을 맞이하고 맙니다. 그때서야 그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조금 깨닫고 있습니다. 히스기야 왕이 뒤늦게 살려달라고 여호와 하나님께 성전을 찾아가서 부르짖고 있습니다(왕하19:14-19).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마저 들어 긍정적으로 응답하시고 앗수르의 군대를 신위적인 능력으로 물리치십니다(왕하19:32-36). 하지만 그 다음 발생하고 있는 히스기야 왕과 신하들 그리고 백성들의 타락상은 전보다 더 부패한 것입니다. 지나친 선민의 자랑에 사로잡혀서 더 큰 국가적 위기를 초래하고 있는 것입니다(왕하20:12-21:9, 사39:4-8).
11) 히스기야의 아들 므낫세 왕의 엄청난 잘못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아예 선민의 왕국을 없애 버리시겠다고 공언하실 정도입니다; “11. 유다 왕 므낫세가 이 가증한 일과 악을 행함이 그 전에 있던 아모리 사람들의 행위보다 더욱 심하였고 또 그들의 우상으로 유다를 범죄하게 하였도다. 12.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이제 예루살렘과 유다에 재앙을 내리리니 듣는 자마다 두 귀가 울리리라. 13. 내가 사마리아를 잰 줄과 아합의 집을 다림 보던 추를 예루살렘에 베풀고 또 사람이 그릇을 씻어 엎음 같이 예루살렘을 씻어버릴지니”(왕하21:11-13).
12) 셋째, 제10절입니다; “10. 또 예루살렘의 가옥을 계수하며 그 가옥을 헐어 성벽을 견고하게도 하며”(사22:10); 예루살렘 성벽은 내성과 외성 두 겹으로 되어 있습니다. 한꺼번에 두 성벽을 모두 보수하고자 하므로 자재가 모자라고 있습니다. 따라서 예루살렘의 일반가옥 가운데 튼튼한 자재로 지어진 것을 헐어서 그 돌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왕국이 전란에서 살아남자면 백성들의 희생이 불가피합니다. 그들의 재물도 전쟁물자로 공출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대목은 다른 뉘앙스를 지니고 있습니다. 왕국의 입장에서 보면, 어쩔 수 없고 당연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시각에서 보면,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13) 왜 그러할까요? 모세의 다음 글귀가 참고가 됩니다; “12.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13.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신10:12-13). 간략하게 풀이해보자면, 모든 것을 바쳐서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먼저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실로 행복을 얻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14) 그런데 그와 달리 모든 것을 바쳐서 히스기야 왕은 선민의 왕국을 지키고 섬기라고 합니다. 과연 다윗의 왕조와 유대왕국을 섬기고 지키는 것에 백성들이 모든 것을 걸어야만 하는 것일까요? 민족국가 시대에 있어서 실로 당연하게 여겨지고 있는 그 일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그 이전에 창조주 하나님을 섬기고 그가 창조한 생명을 돌보라고 명령하시고 있습니다(사11:4-9, 마5:44-48, 눅6:9). 사실 그것이 성경이 말하고 있는 하나님 말씀의 본래 뜻이며 정확한 율법의 취지라고 하겠습니다(출19:4-6, 20:3-26).
15) 넷째, 제11절입니다; “11. 너희가 옛 못의 물을 위하여 두 성벽 사이에 저수지를 만들었느니라. 그러나 너희가 이를 행하신 이를 앙망하지 아니하였고 이 일을 옛적부터 경영하신 이를 공경하지 아니하였느니라”(사22:11); 신앙이란 무엇일까요? 이사야는 환상의 골짜기에서 하나님이 계시하시는 말씀 가운데 그 해답이 들어 있다고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에 물을 공급할 수 있도록 샘물이 솟아나게 하시고 그 물들이 모여서 두 개의 저수지를 이루도록 섭리해주신 창조주 하나님을 알고 있느냐? 그 하나님을 발견하고 찬송하며 의지하고 섬길 수 있는 마음의 자세가 바로 올바른 여호와신앙이다”(사22:11b 의역).
16)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민 유대인들이 창조주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와 섭리를 모조리 잊어버리고 자신들이 행한 인공적인 업적만을 자랑하고 있습니다(사22:11a). 지하수로를 마련하여 성밖의 물을 성안으로 끌어들여왔으니 얼마나 큰 일을 행한 것이냐 하는 만족감입니다. 이제는 적이 예루살렘성을 포위한다고 하더라도 넉넉하게 버틸 수가 있다고 하는 안도감입니다.
17) 그러나 그것은 착각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잠시 지켜 주셨기에 앗수르의 대군이 물러갔습니다마는 훗날 신바벨론 제국의 군대가 몰려 왔을 때에는 선민의 왕국이 멸망을 맞이하게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배은망덕한 선민들을 더 이상 지켜주지 아니하시기로 작심하셨기 때문입니다(왕하21:11-15). 이사야는 ‘환상의 골짜기’에서 그 장면까지 바라보고서 동족들을 위하여 통곡을 시작하고 있습니다(사22:12).
(2) “12. 그날에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명령하사 통곡하며 애곡하며 머리 털을 뜯으며 굵은 베를 띠라(회개의 마당으로 나아오라, 욘3:4-10) 하셨거늘, 13. (이방인 니느웨 백성들과 달리 선민인, 마12:39-41) 너희가 기뻐하며 즐거워하여 소를 죽이고 양을 잡아 고기를 먹고 포도주를 마시면서 내일 죽으리니 먹고 마시자 하는도다(마치 히스기야 왕처럼 이기적 현세주의에 빠져서 욕심껏 살아가고 마는 것임, 사39:4-8). 14. 만군의 여호와께서 친히 내 귀에 들려 이르시되, 진실로 이 죄악은 너희가 죽기까지 용서하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그와 같이 세속적인 탐욕에 사로잡혀서 이기적으로 살아가면 결코 영생의 구원을 얻지 못한다는 것임, 눅16:19-21).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불변의 진리라는 선언임)”(사22:12-14);
1) 본문은 환상의 골짜기의 네번째 교훈으로서 한세상 잘 먹고 잘 살면 그만이라는 생각에 대한 강력한 경고입니다. 사람이 죽기까지 용서받을 수 없는 죄악이 무엇일까요? 특히 인생을 불쌍히 여기시고 잘못된 선택에 대하여 긍휼을 베푸셔서 살길을 열어주고 계시는 인자하신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의 입장에서조차(출33:19) 가장 용서하기 힘든 사람의 잘못이 무엇일까요? 이제 그 질문에 대하여 이사야가 ‘환상의 골짜기’에서 보고 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백성들에게 대답해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본문에서 나타나고 있는 내용이며 가히 골짜기 환상의 절정이라고 하겠습니다. 비록 짤막한 구절이지만 한 대목씩 살펴보면서 깊은 묵상을 해보고자 합니다;
2) 첫째, 제12절입니다; “12. 그날에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명령하사 통곡하며 애곡하며 머리털을 뜯으며 굵은 베를 띠라 하셨거늘”(사22:12); 제사장나라가 이방나라 제국의 침략으로 멸망을 당하고 있습니다. 선지자 이사야가 환상의 골짜기에서 영적인 눈으로 생생하게 보고 있는 미래가 그러합니다. 스스로 거룩한 백성이며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하게 선택 받은 민족이라고 자랑하고 있는 다윗왕조의 유대왕국 백성들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세상적인 방법으로 모든 문제를 풀어나가고자 애쓴 결과가 그렇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아니하고 세상적인 힘과 꾀를 숭상한 모든 사람이 맞이하고 있는 인생의 종말이며 동시에 그러한 나라와 민족이 맞이하고 있는 역사적인 종말입니다.
3)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사야에게 환상의 골짜기에서 그와 같은 인생의 결말과 역사의 종말을 미리 보여주시면서 한말씀을 하시고 계십니다; “그와 같은 미래를 깨닫게 된 자는 이제부터 그 미래의 참혹함에 대하여 통곡하며 애곡하라는 것입니다”(사22:12a&b). 영원한 지옥의 형벌이 기다리고 있으니 그 일을 어찌하면 좋습니까? 자신과 자기가 사랑하는 모든 이들이 함께 그 불길 속에서 영원히 고통 당할 것을 생각하니 통곡과 애곡만으로도 부족합니다.
4) 그러므로 “자신의 머리털을 뜯으며 굵은 베를 띠고서”(사22:12c) 하나님께 죄를 청하기 위하여 나아가야만 합니다. 석고대죄(席藁待罪, 머리를 풀고 흰옷을 입고서 바깥에 꿇어 앉아 죄를 청하는 것)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그와 같은 모습으로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나아오는 자들의 모습이 니느웨 왕과 백성들의 모습과 같습니다(욘3:4-10). 훗날 예수님은 선민들에게 그렇게 회개한 니느웨 백성들을 본 받으라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마12:41);

5) 둘째, 제13절입니다; “13. 너희가 기뻐하며 즐거워하며 소를 죽이고 양을 잡아 고기를 먹고 포도주를 마시면서 내일 죽으리니 먹고 마시자 하는도다”(사22:13); 그런데 그와 같은 애통함과 석고대죄를 찾아보기가 힘든 것이 이 세상입니다. 그 이유는 인생이라고 하는 것이 한번 죽고 나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하는 허무주의가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차피 죽고 나면 그만인 세상이니 지금 살아 있는 동안에 실컷 먹고 마시고 쾌락을 누리는 것이 최선이라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있다고 자랑하고 있는 유대인들도 그러합니다.
6) 그와 같은 세상에 훗날 그리스도가 오셔서 다음과 같은 이상한 비유의 말씀을 하시고 있습니다; “4. 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이렇게 하면 직분을 빼앗긴 후에 사람들이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리라 하고, 5. 주인에게 빚진 자를 일일이 불러다가 먼저 온 자에게 이르되, 네가 내 주인에게 얼마나 빚졌느냐? 6. 말하되, 기름 백 말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빨리 앉아 오십이라 쓰라 하고, 7. 또 다른 이에게 이르되, 너는 얼마나 빚졌느냐? 이르되, 밀 백 석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팔십이라 쓰라 하였는지라. 8.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눅16:4-8).
7) 그 의미를 간추려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①하나, 사람들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이 세상에서 해야만 하는 임무가 있다는 것입니다. ②둘, 평소 자신의 임무를 게을리 한 종이 직분을 빼앗길 위기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살 궁리를 하고 있습니다. ③셋, 그 궁리가 바로 주인에게 빚진 자를 탕감해주는 것입니다. 주인에게 내쳐지더라도 그들 채무자들이 자신을 살려줄 것으로 판단한 것입니다. ④넷, 어이가 없게도 주인이 그 옳지 않아 보이는 청지기를 칭찬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⑤다섯,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 진 사람들의 빚은 탕감해주는 것이 하나님 청지기의 사명이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인생을 살고 있는 동안에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그 일에 매진하는 것이 천국의 자녀들도 부러워하는 일이라는 설명입니다.
8) 훗날 이 땅에 오시는 그리스도의 설명을 듣고 보면, 한 평생을 아무렇게나 살아갈 일이 아닙니다. 사명감당의 삶을 살아가야만 합니다. 그러하지 못한 인생을 사는 부자에 대하여 어떻게 말씀하고 계시는지도 차제에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19.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20.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21.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富饒, 많고 넉넉함)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눅12:19-21).
9) 셋째, 제14절입니다; “14. 만군의 여호와께서 친히 내 귀에 들려 이르시되, 진실로 이 죄악은 너희가 죽기까지 용서하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사22:14);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사야에게 사람이 자신의 죽음으로써 비로소 하나님께로부터 용서를 받을 수밖에 없는 가장 무서운 죄악이 이 세상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해주고 있는 장면입니다. 그 죄악이 바로 영생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며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종말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저 한평생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그리고 넉넉하게 쾌락을 누리며 살 수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한다는 이른바 현세주의 사상입니다;

10) 현세주의자에게는 내세가 없으며 죽음 다음의 세계관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영생의 창조주가 별로 필요하지가 않습니다. 오로지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이 땅에서 줄 수 있는 존재가 바로 자신의 우상이며 신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지자가 자신들의 행태에 대하여 그것을 천박한 현세주의, 배금주의, 또는 향락지상주의 사고방식이라고 비난하며 질책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귀담아 들을 이유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11) 구체적으로, 이 세상에서의 쾌락을 최상의 가치로 추구하고 있는 현세주의자를 회개시키기 위해서는 두가지의 장치가 필요합니다; “첫째는, 죽음 다음의 세계가 존재하고 있으며 자신의 영혼이 그곳에서 영원한 생명이냐? 아니면 영원한 처벌이냐?를 받도록 예정되어 있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둘째는, 지금까지 이 세상에서 지은 모든 죄악을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기 위해서는 당사자의 회개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사실입니다”.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이사야에게 계시하고 있는 말씀 그대로 죽음으로 사죄해야만 합니다. 반드시 죽어야만 용서를 받을 수가 있습니다.
12)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셔서 백성들에게 가르쳐주고 있는 진리가 전자에 관한 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의 뜻이 그것이라고 3년 6개월 공생애 기간 동안에 끊임없이 외치고 있습니다.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한 대목을 보더라도 명백하게 그러합니다; “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3.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14:1-3).
13) 다음으로 후자와 관련하여, 사람들이 자신들의 죽음으로 하나님께 용서를 구할 수밖에 없는 그것을 대신 속죄하기 위하여 그리스도가 대속의 십자가 죽음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그리스도의 죽음이 자신의 죽음을 대신하고 있음을 깨닫고 그로 말미암아 자신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용서를 회개의 눈물로 받아들이는 자들에게는 거듭난 삶이 열리게 됩니다(롬6:4-14). 그리스도의 제자로 남은 인생을 신실하게 살아간 다음에는 천국에서 주님을 뵙게 될 것입니다.
14) 그 사실을 미리 보여주고 있는 대목이 다음과 같습니다; “1.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2.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3. 그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와 더불어 말하는 것이 그들에게 보이거늘”(마17:1-3). 이미 죽은 구약의 인물 모세와 엘리야도 죽음의 잠에서 깨어나 부활하여 구원주 그리스도를 천국에서 만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약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죽음 다음에 부활하여 천국에서 주님을 만나지 못할 이유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셋째로, “15.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가서 그 국고를 맡고 왕궁 맡은 자 셉나(궁내대신 셉나가 선민의 예표로 등장하고 있음. 마치 훗날의 재정을 맡은 자 가룟 유다와 같음, 요12:4-6)를 보고 이르기를, 16. 네가 여기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 여기에 누가 있기에 여기서 너를 위하여 묘실을 팠느냐? 높은 곳에 자기를 위하여 묘실을 팠고 반석에 자기를 위하여 처소를 쪼아내었도다(세속적인 출세와 영광만을 추구하며 묘실에는 신경을 쓰지만 영생의 구원을 베푸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실천하는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음을 지적하고 있음). 17. 나 여호와가 너를 단단히 결박하고 장사 같이 세게 던지되(그러므로 현세에서도 편히 눈을 감지 못할 것이며), 18. 반드시 너를 모질게 감싸서 공 같이 광막한 곳에 던질 것이라. 주인(신정국가의 주권자인 창조주 여호와를 말함, 출19:4-6)의 집에 수치를 끼치는 너여, 네가 그 곳에서 죽겠고 네 영광의 수레도 거기에 있으리라(영생의 구원을 얻지 못하고 영벌에 처해지고 말 것임, 요5:24-29). 19. 내가 너를 네 관직에서 쫓아내며 네 지위에서 낮추리니(요12:31-32), 20. 그 날에 내가 힐기야의 아들 내(여호와의) 종 엘리아김(그리스도의 제자인 성도의 상징임)을 불러, 21 네 옷을 그에게 입히며 네 띠를 그에게 띠워(이제는 선민 대신 그리스도의 제자인 성도를 동원하여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복음을 온세상에 전파하겠다는 것임, 마28:18-30) 힘 있게 하고 네 정권을 그의 손에 맡기리니 그가 예루살렘 주민과 유다의 집의 아버지가 될 것이며(이기적인 선민구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를 실천하는 만민구원의 새시대를 열어갈 것임, 마16:24, 눅22:28-30), 22. 내가 또 다윗의 집의 열쇠를 그의 어깨에 두리니, 그가 열면 닫을 자가 없겠고 닫으면 열 자가 없으리라(천국의 열쇠를 지닐 것임, 마16:19, 눅22:28-30). 23 못이 단단한 곳에 박힘 같이 그를 견고하게 하리니 그가 그의 아버지 집에 영광의 보좌가 될 것이요(새 예루살렘에 들어가서 아버지 하나님 앞에서 면류관을 얻을 것임. 사65:17-18, 66:20-21, 눅22:28-30, 요14:1-3, 16-20, 계21:22-27). 24. 그의 아버지 집의 모든 영광이 그 위에 걸리리니, 그 후손과 족속 되는 각 작은 그릇 곧 종지로부터 모든 항아리까지니라(이 세상에서의 빈부귀천에 상관없이 그리스도의 제자로 신실하게 살아가는 성도들은 누구나 천국잔치에 참여하게 되는 것임). 25.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날에는 단단한 곳에 박혔던 못이 삭으리니, 그 못이 부러져 떨어지므로 그 위에 걸린 물건이 부서지리라 하셨다 하라(이 세상의 임금은 쫓겨나게 되고 그 위업이 새 하늘과 새 땅이 창조될 때에 모조리 사라지고 말 것임, 요12:31-32).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이미 천국에서 확정된 창조주의 말씀이며 하나님의 역사섭리의 방향이라는 것임)“(사22:15-25); 선민을 대표하고 있는 셉나에게 경고하고 있는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입니다. 이것 역시 2부분으로 나누어서 상세하게 살펴보고자 합니다;

(1) “15.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가서 그 국고를 맡고 왕궁 맡은 자 셉나(궁내대신 셉나가 선민의 예표로 등장하고 있음. 마치 훗날의 재정을 맡은 자 가룟 유다와 같음, 요12:4-6)를 보고 이르기를, 16. 네가 여기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 여기에 누가 있기에 여기서 너를 위하여 묘실을 팠느냐? 높은 곳에 자기를 위하여 묘실을 팠고 반석에 자기를 위하여 처소를 쪼아내었도다(세속적인 출세와 영광만을 추구하며 묘실에는 신경을 쓰지만 영생의 구원을 베푸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실천하는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음을 지적하고 있음). 17. 나 여호와가 너를 단단히 결박하고 장사 같이 세게 던지되(그러므로 현세에서도 편히 눈을 감지 못할 것이며), 18. 반드시 너를 모질게 감싸서 공 같이 광막한 곳에 던질 것이라. 주인(신정국가의 주권자인 창조주 여호와를 말함, 출19:4-6)의 집에 수치를 끼치는 너여, 네가 그 곳에서 죽겠고 네 영광의 수레도 거기에 있으리라(영생의 구원을 얻지 못하고 영벌에 처해지고 말 것임, 요5:24-29). 19. 내가 너를 네 관직에서 쫓아내며 네 지위에서 낮추리니(요12:31-32)”(사22:15-19);
1) 본문은 셉나와 같이 자신의 영광만을 추구하는 종에 대한 처벌의 예언입니다. 아모스의 아들인 이사야는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서 선지자로 세움을 받았으며(사1:1, 6:1-8) 또한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받아서 동족인 유다 왕국의 백성들에게 전하고 있는 인물입니다(사6:9-13). 그런데 그는 특히 ‘환상의 골짜기’에서 보고 들은 여호와의 예언의 말씀을 제22장에서 전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후반부인 제15절부터 제25절까지의 말씀은 참 이상합니다. 왜냐하면, ‘셉나’와 ‘힐기야의 아들 엘리아김’이라고 하는 두 사람의 실명(實名, 실제 이름)을 사용하여 ‘교만한 종과 신실한 종의 차이’에 관하여 설명하면서 그들의 미래를 예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2)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질문이 기본적으로 발생하고 있습니다; ①하나, 두 사람의 이름이 선지자 이사야와 동족인 유대인들에게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일까요? ②둘, 그들은 성경상 유대왕국 어느 시대의 인물일까요? ③셋, 그들의 당시의 신분과 ‘환상골짜기’에서 예언하고 있는 신분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으며 그 의미는 무엇일까요? 위 3가지 질문에 대하여 답을 얻기 위하여 먼저 묵상한 다음에 오늘의 본문말씀을 한 구절씩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3) 첫째, ‘셉나’ 그리고 ‘힐기야의 아들 엘리아김’이라는 두 사람의 이름이 선지자 이사야와 동족인 유대인들에게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일까요? 성경에서 일반적으로 아버지의 이름과 아들의 이름을 함께 거론하고 있는 것은 그 지위와 신분의 상속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대체로 좋은 가문 훌륭한 가문의 사람이라는 의미까지 지니고 있습니다.
4) 그런 의미에서 ‘셉나’라고 하는 당사자의 이름만 제시되고 있는 경우와 ‘힐기야의 아들 엘리아김’이라고 말하고 있는 경우가 차이 나고 있으며 백성들에게 다음과 같이 비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셉나’는 유다 왕국의 백성 누구나 알고 있는 훌륭한 가문의 후계자가 아니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반면에 ‘엘리아김’은 백성들에게 유명한 ‘힐기야’의 자랑스러운 아들입니다. 그러므로 ‘셉나’는 입신양명한 신하입니다. 따라서 자신의 능력으로 끝까지 위로 치솟아 오르려고 하는 야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5) 그러나 ‘엘리아김’은 다릅니다. 아버지 힐기야와 그가 물려받은 가문에 대하여 누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인물입니다. 그러므로 처신에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 신분과 지위에 어울리는 합당한 행위만을 충실하게 하고자 애쓰고 있는 자가 바로 ‘힐기야의 아들 엘리아김’이라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선지자 이사야를 비롯하여 유대왕국의 백성들은 ‘힐기야의 아들 엘리아김’을 겸손하고 신실한 신하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셉나’는 권력욕이 강하고 백성들 위에 군림하는 두려운 인물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6) 둘째, 셉나와 힐기야의 아들인 엘리아김은 성경상 유대왕국 어느 시대의 인물들일까요? 역사서인 열왕기하와 대선지서인 이사야에 그들의 이름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17. 앗수르 왕이 다르단과 랍사리스와 랍사게로 하여금 대군을 거느리고 라기스에서부터 예루살렘으로 가서 히스기야 왕을 치게 하매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니라. 그들이 올라가서 윗못 수도 곁 곧 세탁자의 밭에 있는 큰 길에 이르러 서니라. 18. 그들이 왕을 부르매 힐기야의 아들로서 왕궁의 책임자인 엘리야김과 서기관 셉나와 아삽의 아들 사관 요아가 그에게 나가니”(왕하18:17-18).
7) 히스기야 왕 시대 왕궁의 책임자가 힐기야의 아들인 엘리야김입니다. 그리고 그를 보좌하고 있는 서기관이 셉나입니다. 그들의 이름은 열왕기하 제18장과 제19장에 3번이나 더 등장하고 있습니다(왕하18:26, 37, 19:2). 그리고 똑같은 문장이 대선지서 이사야에 또 4차례나 반복되고 있습니다(사36:3, 11, 22, 37:2). 그렇게 도합 8차례나 기재되고 있으므로 그것은 역사적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는 성경의 기록상 변함이 없는 진리하고 하는 의미입니다. 즉, 힐기야의 아들 엘리아김이 주장이며 셉나가 보좌역입니다.
8) 그리고 그들은 모두 히스기야 왕의 신하들입니다. 그 신분과 지위에 변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사실을 선지자 이사야 역시 잘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히스기야 왕의 심부름으로 자신을 찾아온 두사람을 이미 만난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왕하19:2, 사37:2). 그렇게 익숙한 두사람의 실제 이름을 가지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다른 의미를 담아서 이제부터 환상 가운데 이사야에게 예언의 말씀을 계시하시고 있습니다. 항목을 달리하여 그 점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9) 셋째, 셉나와 힐기야의 아들 엘리아김의 당시의 신분과 ‘환상골짜기’에서 예언하고 있는 신분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으며 그 의미는 무엇일까요? 히스기야 왕 당시의 신분은 힐기야의 아들 엘리아김이 왕궁의 책임자이며 셉나는 서기관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환상 골짜기에서는 전혀 다릅니다. 셉나가 왕궁의 책임을 맡고 있는 궁내대신일 뿐만 아니라 놀랍게도 국고의 출입까지 모두 관장하고 있는 재무대신으로 등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사22:15). 셉나는 한 손에 왕의 신변 및 나라의 살림을 모두 쥐고 있는, 소위 엄청난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신하입니다. 왕이라고 하더라도 그를 함부로 할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한마디로, 셉나는 상관이었던 힐기야의 아들 엘리아김을 진작에 밟고 올라섰으며 이제는 왕까지 좌지우지할 수 있는 권신(權臣, 권세가 대단한 신하)이 된 것입니다.
10) 넷째, 셉나의 잘못을 지적하고 있는 말씀 곧 “15.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가서 그 국고를 맡고 왕궁 맡은 자 셉나를 보고 이르기를, 16. 네가 여기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 여기에 누가 있기에 여기서 너를 위하여 묘실을 팠느냐? 높은 곳에 자기를 위하여 묘실을 팠고 반석에 자기를 위하여 처소를 쪼아 내었도다”(사22:15-16)의 의미가 도대체 무엇일까요? 다음과 같이 차근차근하게 알아보고자 합니다; 먼저 셉나의 신분이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재무대신과 궁내대신을 겸하고 있습니다. 그 두 관직은 본래 서로 견제함으로써 왕의 권력을 보호하도록 되어 있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그 두 자리를 셉나가 모두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왕국 내에서 셉나를 견제할 수 있는 장치가 사라지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11) 훗날 그리스도 예수가 12수행제자인 남자사도와 함께 공생애를 지내고 있을 때의 일입니다. 열 둘 가운데 한 제자가 배신하고 있습니다. 그가 바로 재정을 책임지고 관리하던 가룟 유다입니다. 그는 유대교지도자들에게 스승을 팔아버리고 그 반대급부로 자신의 출세를 도모하고 있습니다(마26:14-16, 요12:6). 똑같은 일이 유다 왕국에서 발생할 것임을 시사해주고 있습니다. 셉나가 자신의 신분을 망각하고 권한을 남용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국가 재정을 엄청 사용하여 묘실을 파고 있습니다. 바위굴을 파서 화려하게 묘실을 꾸미고 있습니다.
12) 그런데 그것이 왕의 묘실이 아닙니다(사22:16a). 자신을 위한 묘실입니다(22:16b). 더구나 그 묘실은 왕의 묘실만큼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습니다(사22:16c).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묘실은 비단 무덤만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영화를 누리며 살아갈 수 있는 ‘처소’까지를 포괄하고 있는 용어입니다(사22:16d). 그런데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세상에서 온갖 영화를 누리겠다고 셉나가 대저택을 짓는 것이 마치 자신의 무덤을 크게 짓는 것처럼 미련하게 보이고 그것이 어리석다는 것입니다.
13) 그렇게 어리석은 일을 셉나가 국왕의 신하인 자신의 신분을 망각하고 자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셉나의 잘못이 왜 용서함을 받을 수 없는 것일까요? 한마디로, 종이 자신의 신분을 망각하고 주인의 권리를 침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연장선상에 하나님에 대한 패역함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종이 자신의 보좌를 창조주의 자리까지 높이고자 하는 교만함입니다. 천사나 피조물의 그와 같은 패역함에 대해서는 용서함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이사야는 이미 제14장에서 그것이 불변의 진리라는 사실을 언급하면서 상세하게 설명한 바가 있습니다.
14) 다섯째, 엄청난 잘못을 범한 셉나를 처벌하는 내용이 3가지로 예언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17. 나 여호와가 너를 단단히 결박하고 장사같이 세게 던지되”(사22:17)라고 먼저 조치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창조주 하나님의 주권에 도전하고 있는 세력이 셉나 뿐만이 아닙니다. 일찍이 천사장 루시엘이 그러했습니다. 그가 천상에서 쫓겨나서 하나님께 대적하는 사탄의 효시가 되고 있습니다(사14:12-15, 계12:7-8). 그리고 이 땅에서 자신의 세력을 만들기 위하여 천하를 꾀고 있는 자 마귀가 되고 있습니다(계12:9).
15) 마귀에게 동조하고 있는 적 그리스도의 세력과 거짓선지자들도 이세상에 넘쳐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제사장나라를 무너뜨리려고 하는 바벨론과 같은 세상의 제국과 세상임금도 끊임없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들이 서로 연합하여 하나님께 대항하고 있으므로 그 힘이 상당합니다(엡2:2, 6:12, 계13:7). 따라서 그들을 다룰 때에는 꼼짝할 수 없도록 단단하게 결박해야만 합니다. 어설프게 다루었다가는 오히려 반격을 당할 수가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벧전5:8-9).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을 할 때 그리고 영적인 전쟁을 할 때에도 단호하고 확실해야만 합니다. 단단하게 악한 세력을 결박해야만 할 것입니다(엡6:10-20).
16) 여섯째, 그 다음 조치 곧 “18. 반드시 너를 모질게 감싸서 공같이 광막한 곳에 던질 것이라. 주인의 집에 수치를 끼치는 너여, 네가 그곳에서 죽겠고 네 영광의 수레도 거기에 있으리라”(사22:18)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 세상이 공 같은 모양으로 되어 있습니다(사22:18b). 원심력과 구심력이 동시에 작용하고 있으므로 우주도 지구도 모두 공 모양을 이루고 있습니다. 모든 물질의 기본인 원자도 일정한 궤도를 돌고 있는 전자들로 인하여 공 모양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핵 자체도 둥근 모양으로 중성자와 양성자가 단단히 결합되어 있습니다.
17) 그 공 모양이 깨어져서 태초의 무질서 곧 혼돈의 세계로 돌아가지 아니하도록 창조주 하나님의 힘이 그 바깥에 마치 물의 막처럼 역사하고 있습니다(창1:2). 그리고 하나님의 억지력을 전달하고 있는 그 물이 궁창을 감싸고 있습니다(창1:6-7, 사22:8a). 그 안에 공중의 권세를 잡고 있는 악한 영들이 갇혀 있습니다(엡2:2, 6:12). 그들 악한 영들에 대하여 창조주 하나님께서 본문과 같이 선고하고 있습니다; “주인의 집에 수치를 끼치는 너여, 네가 그곳에서 죽겠고 네 영광의 수레도 거기에 있으리라”(사22:18c). 그 가운데 악한 영의 지배를 받고 있는 셉나가 위치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 세상에서 주인이신 창조주의 영광을 위하여 일하지 아니하고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일한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18) 일곱째, 마지막 조치 곧 “19. 내가 너를 네 관직에서 쫓아내며 네 지위에서 낮추리니”(사22:19)가 의미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셉나와 같이 신하가 왕의 영광을 탐하게 되면 그 관직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그리고 죽임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셉나의 지위를 낮추시겠다는 정도의 경미한 처벌을 동시에 밝히고 있습니다. 그 의미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사람인 셉나와 악한 영인 사탄을 분리시키고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는 사탄에 대해서는 용서함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사탄과 같은 악한 영은 단단히 결박하여 하나님의 능력이 억제하고 있는 영원한 불꽃 속으로 던져버릴 것입니다(계19:20, 20:10, 14, 21:8);

19) 그것은 영원한 처벌을 말하고 있는 영벌입니다. 그런데 셉나에 대해서는 약간 다르게 말하고 계십니다. 교만한 자리에서 내려오게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만약 잘못을 크게 회개하고 다시 겸손하게 여호와 하나님께 돌아온다면 죄사함의 기회를 제공하겠다는 의도입니다. 그와 같은 일이 가능하도록 대속자이며 구원자로 이 세상에 그리스도를 보내어 주시는 것입니다(마12:31-32, 요1:29, 3:13-17). 이사야가 바라보고 있는 환상의 골짜기 역시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2) “20. 그 날에 내가 힐기야의 아들 내(여호와의) 종 엘리아김(그리스도의 제자인 성도의 상징임)을 불러, 21 네 옷을 그에게 입히며 네 띠를 그에게 띠워(이제는 선민 대신 그리스도의 제자인 성도를 동원하여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복음을 온세상에 전파하겠다는 것임, 마28:18-30) 힘 있게 하고 네 정권을 그의 손에 맡기리니 그가 예루살렘 주민과 유다의 집의 아버지가 될 것이며(이기적인 선민구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를 실천하는 만민구원의 새시대를 열어갈 것임, 마16:24, 눅22:28-30), 22. 내가 또 다윗의 집의 열쇠를 그의 어깨에 두리니, 그가 열면 닫을 자가 없겠고 닫으면 열 자가 없으리라(천국의 열쇠를 지닐 것임, 마16:19, 눅22:28-30). 23 못이 단단한 곳에 박힘 같이 그를 견고하게 하리니 그가 그의 아버지 집에 영광의 보좌가 될 것이요(새 예루살렘에 들어가서 아버지 하나님 앞에서 면류관을 얻을 것임. 사65:17-18, 66:20-21, 눅22:28-30, 요14:1-3, 16-20, 계21:22-27). 24. 그의 아버지 집의 모든 영광이 그 위에 걸리리니, 그 후손과 족속 되는 각 작은 그릇 곧 종지로부터 모든 항아리까지니라(이 세상에서의 빈부귀천에 상관없이 그리스도의 제자로 신실하게 살아가는 성도들은 누구나 천국잔치에 참여하게 되는 것임). 25.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날에는 단단한 곳에 박혔던 못이 삭으리니, 그 못이 부러져 떨어지므로 그 위에 걸린 물건이 부서지리라 하셨다 하라(이 세상의 임금은 쫓겨나게 되고 그 위업이 새 하늘과 새 땅이 창조될 때에 모조리 사라지고 말 것임, 요12:31-32).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이미 천국에서 확정된 창조주의 말씀이며 하나님의 역사섭리의 방향이라는 것임)“(사22:20-25);
1) 본문은 ‘힐기야의 아들 엘리아김’의 정체에 대하여 먼저 설명하고 있습니다(사22:20). 그러므로 먼저 ‘힐기야의 아들 엘리아김’의 정체에 대하여 좀더 알아본 다음에 그 다음 내용을 한구절씩 검토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일각에서 ‘힐기야의 아들 엘리아김’을 ‘요시야 왕의 아들인 엘리아김’으로 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보는 경우에는 본문의 해석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역사적인 관점과 성경적인 관점에서 과연 ‘힐기야의 아들 엘리아김’의 정체를 어떻게 파악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인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살펴보고자 합니다;
2) 본문에서 이사야는 여호와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전달하면서, “20. 그날에 내가 힐기야의 아들 내 종 엘리아김을 불러”(사22:20)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역사서에서 ‘엘리아김’을 찾아보면 요시야 왕의 아들 중 하나로 나타나고 있습니다(왕하23:34, 대하36:4). 다음으로 ‘힐기야의 아들 엘리아김’을 찾아보면 히스기야 왕 때 궁내대신을 맡고 있는 ‘힐기야의 아들 엘리야김’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왕하18:18, 26, 37, 19:2). 그런데 똑같은 기록을 반복하고 있는 대선지서 이사야의 내용을 살펴보면, 히스기야 왕 때 궁내대신을 맡고 있는 자는 ‘힐기야의 아들 엘리아김’이라고 적고 있습니다(사36:3, 11, 22, 37:2).
3) 선지자 이사야가 ‘엘리야김’을 ‘엘리아김’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것은 발음상 음편주의에 의한 것이며 본질적인 차이를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본질적인 차이는 ‘힐기야의 아들 엘리아김’이 과연 ‘요시야 왕의 아들 엘리아김’이 될 수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고대의 유대사회에서 사람들이 두 개의 이름을 지니고 있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예를 들면, ‘여호야긴’ 왕의 이름이 ‘여고냐’입니다(왕하24:6, 대상3:16). 그리고 시몬 베드로의 아버지의 이름이 ‘요나’(마16:17) 또는 ‘요한’(요21:15)입니다. 그러므로 ‘힐기야’가 ‘요시야 왕’의 또다른 이름으로 보고서 ‘힐기야의 아들 엘리아김’이 바로 ‘요시야 왕의 아들 엘리아김’이라고 주장을 하기도 합니다.
4) 그런데 그 주장은 다음 몇가지 점에서 성립되기가 힘듭니다; ①하나, ‘요시야 왕’의 이름을 ‘힐기야’라고 적고 있는 구절이 성경의 기록상 존재하지 아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②둘, ‘요시야 왕의 아들 엘리아김’은 애굽의 황제인 바로 느고에 의하여 일종의 괴뢰정권의 수장으로서 유다 왕이 된 인물입니다(왕하23:34). 더구나 바로에 의하여 그의 이름 ‘엘리아김’마저 ‘여호야김’으로 개명이 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윗왕조의 수치입니다;

5) ③셋, 요시야 왕이 죽자 신하들과 유다 백성들이 스스로 세운 왕이 ‘여호아하스’ 입니다. 엘리아김은 그보다 못한 왕자였기에 배제가 된 인물입니다. 나아가서 여호아하스 왕을 애굽의 바로가 폐위하고 세운 여호야김 왕이므로 그를 훌륭한 왕이라고 보기가 힘듭니다. ④넷, 역사서에서 여호야김 왕의 통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37. 여호야김이 그의 조상들이 행한 모든 일을 따라서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더라”(왕하23:37). 그러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힐기야의 아들 엘리아김을 중용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사22:20-25)
6) 첫째, 하나님께서는 어째서 유대왕국의 권력을 한 손에 움켜쥐고 있는 실권자 셉나를 버리고 그 대신에 일개 여호와 하나님의 종에 불과한 힐기야의 아들 엘리아김을 중용하시는 것일까요? 그 이유에 대하여 답하고 있는 구절이 본문입니다. 먼저 그 이유를 잠시 살펴보자면, ‘환상의 골짜기’에서 이사야가 상징과 비유 가운데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왕에 버금가는 권력을 장악하여 유대왕국을 좌지우지 하고 있던 권력자 셉나의 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시대가 열릴 것입니다. 새로운 시대는 힐기야의 아들 엘리아김처럼 하나님의 종으로서 신실하게 살아가고 있는 자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시대가 될 것입니다”.
7) 관련구절을 살펴보면, 다윗의 왕조가 하나님을 떠나게 되자 그 왕국을 유지하고 있던 기둥의 못이 삭아서 부서지고 왕국 자체가 붕괴되고 맙니다(사22:25). 따라서 예루살렘 주민과 유다의 남은 백성들은 신실한 레위인들 곧 대제사장 힐기야와 선지자 예레미야의 뒤를 잇고 있는 여호와의 종들에 의하여 올바른 하나님신앙을 회복하게 될 것입니다(사22:20-21). 여호와 하나님의 종과 백성들이 이루는 새로운 나라는 훗날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이 건설하고 있는 하나님나라와 맥이 닿아 있습니다(사22:24). 그리스도가 제자들에게 주고자 하시는 교회의 열쇠(마16:18-19) 그리고 천국에서의 생명의 면류관과 그 보좌의 의미에 대하여(마19:28, 눅22:30, 딤후4:8) 이사야가 이미 언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사22:22-23);

8) 둘째, 훗날 그리스도가 유대인사회에 오시게 되면 선민들은 큰 충격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유대인들이 기대하고 있던 메시아의 역할과 실제로 구원자 그리스도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의 사역이 다음과 같이 정반대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먼저 유대인들이 고대하고 있는 정치적인 메시아의 역할입니다; “선민 유대인들은 오랜 세월 다윗의 후계자로 오시는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다윗의 후계자라고 강조하고 있는 이유는 메시아가 유대 땅에 오시게 되면 무엇보다도 외세를 물리치고 중동 땅에 다시 이스라엘제국을 건설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하면 그 옛날 다윗대왕의 시대처럼 패권국인 이스라엘의 영광이 사해에 미치며 여호와 하나님께서 선민의 제국을 통하여 크게 영광을 받으시게 되는 것입니다”.
9) 그런데 메시아로 이 세상에 오시는 예수님은 전혀 그러실 생각이 없습니다. 오히려 세상임금이 쫓겨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요12:31). 한 마디로, 임금이 다스리고 있는 세상을 원하지 아니하고 계십니다. 그것은 그 옛날 대 사사 사무엘을 통하여 왕정을 선호하고 있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말씀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뜻과 동일합니다; “4. 이스라엘 모든 장로가 모여 라마에 있는 사무엘에게 나아가서, 5.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당신은 늙고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니 모든 나라와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 한지라. 6. 우리에게 왕을 주어 우리를 다스리게 하라 했을 때에 사무엘이 그것을 기뻐하지 아니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매, 7.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이는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삼상8:4-7).
10) 그리스도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직접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려고 하십니다(마4:17, 눅10:24, 요16:11). 그 나라는 왕이 나라의 주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임금과 백성이 하나가 되어서 하나님의 뜻을 그대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참고로, 하나님의 뜻이 다음과 같습니다; “40.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마25:40). 그와 같은 놀라운 변화가 있을 것임을 이미 선지자 이사야가 ‘환상의 골짜기’에서 내다보고서 본문의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과연 그러한지 한번 구절을 따라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11) 셋째, 제20-21절입니다; “20. 그날에 내가(여호와가) 힐기야의 아들 내 종 엘리아김을 불러, 21. 네(권력자 셉나) 옷을 그(엘리아김)에게 입히며 네 띠를 그에게 띠워 힘있게 하고 네 정권을 그의 손에 맡기리니, 그가 예루살렘 주민과 유다의 집의 아버지가 될 것이며”(사22:20-21); 새로운 예루살렘과 유대나라의 국부(國父, 나라의 아버지)가 되는 자가 힐기야의 아들 엘리아김입니다. 그는 도대체 누구일까요?
12) 언뜻 보면, 유대왕국에서 이름있는 사람 힐기야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종으로 불리고 있는 자입니다. 그와 같은 인물이 유대왕국의 역사 가운데 과연 존재하고 있는 것일까요? 혹자는 성군 요아스의 아들이며 훗날 여호야김 왕으로 불리게 되는 엘리아김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만한 위인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이미 상세하게 말씀 드린 바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힐기야의 아들 하나님의 종 엘리아김’에 대해서 좀 다른 차원에서 깊은 묵상을 해보아야만 합니다. 묵상의 결과가 다음과 같습니다;
13) 힐기야라는 이름을 가진 유명인사가 유다 왕국에 여러 명 있습니다(왕하22:4, 대상6:13, 45, 대하35:8).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사람은 성군 요시야 왕 때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율법 책을 발견한 바 있는 대제사장 힐기야입니다(왕하22:4-8). 제사장 힐기야 또는 유력한 레위인 힐기야의 아들로 성경에 나타나고 있는 인물이 여러 명 있습니다(스7:1, 느8:4, 11:11, 12:7, 렘1:1). 그 가운데 가장 뛰어난 인물이 선지자 예레미야입니다(렘1:1-3). 따라서 ‘힐기야의 아들이며 하나님의 종 엘리아김’이라고 볼 수 있는 사람은 그 의미에 있어서 선지자 예레미야와 같은 훌륭한 하나님의 종 레위인이라고 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
14) 넷째, 제22절입니다; “22. 내가 또 다윗의 집의 열쇠를 그의 어깨에 두리니, 그가 열면 닫을 자가 없겠고 닫으면 열 자가 없으리라”(사22:22); 다윗의 집의 열쇠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언뜻 보면, 다윗왕조의 왕좌를 차지하는 임금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가 열면 닫을 자가 없겠고 닫으면 열 자가 없으리라”(사22:22b)는 말씀이 뒤따르고 있으므로 그것은 사도 베드로와 같은 위대한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교회의 지도자를 말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마16:18-19);

15) 다섯째, 제23절입니다; “23. 못이 단단한 곳에 박힘 같이 그를 견고하게 하리니 그가 그의 아버지 집에 영광의 보좌가 될 것이요”(사22:23); 교회를 튼튼히 하며 하나님나라를 확장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천국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예비된 보좌를 차지할 것입니다(마19:28, 눅22:30). 그러므로 힐기야의 아들인 엘리아김은 제사장나라가 망하고 난 후 백성들을 교회에서 양육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이라고 하겠습니다.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에게 천하의 권세를 주셔서 사도들과 제자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일을 든든하게 뒷받침하도록 역사를 섭리하실 것입니다(마28:18-20).
16) 여섯째, 제24절입니다; “24. 그의 아버지 집의 모든 영광이 그 위에 걸리리니, 그 후손과 족속 되는 각 작은 그릇 곧 종지로부터 모든 항아리까지니라”(사22:24);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 하나님나라를 확장하는 일은 힐기야와 같은 선민 유대인의 제사장 또는 그의 아들 엘리아김과 같은 유대인 선지자에게만 위탁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이방인출신 그리스도인들이, 작은 족속 큰 족속 상관없이, 모두 하나님나라를 확장하는 영광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17) 일곱째, 제25절입니다; “25.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날에는 단단한 곳에 박혔던 못이 삭으리니, 그 못이 부러져 떨어지므로 그 위에 걸린 물건이 부서지리라 하셨다 하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사22:25); 그리스도의 복음이 선민의 울타리를 뛰어넘어서 이방세계로 전파되기 전에 어떠한 현상이 발생할 것인지를 예언해주고 있는 대목입니다. 선민사상에 기반을 두고 있던 지상 마지막 제사장나라 다윗왕조의 유대왕국이 마치 못이 삭아버려서 건물이 무너지듯이 그렇게 붕괴되고 말 것입니다. 유대왕국의 멸망과 더불어 사실상 선민들이 유민들이 되어 온 세계를 떠돌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건물이 무너질 때 그 위에 있던 물건들이 함께 무너져내려 흩어지는 것과 같은 현상입니다;

18) 그것은 마치 그 옛날 바벨탑이 무너진 것과 같습니다. 인본주의 사상으로 무장하여 제국의 탑을 하늘높이 쌓아 올리고자 했던 인간들의 시도는 여호와 하나님의 역사섭리에 의하여 무참하게 붕괴되고 맙니다(창11:1-9). 그 대신에 온 세상으로 흩어진 그들 백성들에 의하여 새로운 신본주의 사상이 증거되기를 시작하고 있습니다(창11:31-12:5). 마찬가지로, 인본주의로 흐르고 있던 제사장나라 유대왕국이 붕괴됩니다. 그때부터 그 왕국의 유민들이 가는 곳마다 회당이 세워지고 훗날 그 회당을 활용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기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사야는 본문을 통하여 나라와 사람이 망하는 것은 전쟁이라기 보다는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불신앙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사실을 그는 골짜기의 환상을 가지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선민인 동족 유대인들의 미래가 한마디로 환상의 골짜기의 내용과 같습니다.
훗날 유대인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지 아니하고 제멋대로 선민들에게 유리한 집단 이기적인 종교행위만을 일삼다가 결국에는 만민을 구원하고자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까지 배척하여 십자가에 못을 박아버립니다. 그 때문에 주후 70년에 예루살렘이 철저하게 파괴되고 백성들이 그 땅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앞으로 그들에게 어떠한 소망이 남아 있을까요?
마치 이사야의 질문에 화답하듯이 훗날 사도 바울이 마지막 남아 있는 소망을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습니다; “30. 너희가 전에는 하나님께 순종하지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 31.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니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그들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32.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33.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34.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롬11:30-36).
요컨대, 완전 절망의 그곳에서도 창조주 하나님의 역사섭리와 생명을 살리는 새로운 창조를 믿고서 아버지 하나님의 그 손을 마지막 신앙심으로 꼭 잡으라고 하는 소망의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이사야는 환상 가운데 전개되고 있는 예루살렘 골짜기의 전쟁의 역사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구태여 환상이라고 표현하고 있으며 경고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그 광경이 미래의 역사 가운데 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선민인 동족들이 참으로 여호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서 새로운 인생을 살겠다고 결심하지 아니하면 환상 그대로 예루살렘 골짜기는 피로 물들고 말 것입니다.
이사야는 제사장나라 유대왕국을 건설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뜻은 전쟁에 전쟁으로 맞서라고 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그 대신에 그들 이방인들과 세상제국에 여호와신앙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힘으로 맞서게 되면 참패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맡기고 창조주의 새 역사를 믿고서 나아가게 되면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사람이 자신의 죽음으로 하나님께 용서를 청할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현세주의 및 향락주의 사고방식입니다. 그 이유는 내세를 부정하며 영생하시는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아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죽고 나면 아무 것도 없다고 하는 허무주의 사고방식이 권력지상주의, 황금만능주의, 물질적인 인간관계를 만연시키며 인간의 존엄성을 해치고 있습니다(사22:13).
요컨대, 선지자 이사야가 ‘환상의 골짜기’에서 바라보고 있는 마지막 광경이 그와 같은 사고방식으로 일관하고 있던 제사장나라 거룩한 백성들의 비참한 말로입니다. 그것은 인생의 죽음과 나라의 역사적인 종말로서 용서를 구할 수밖에 없는 불신앙의 모습이라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사야에게 일깨워 주시고 있습니다(사22:14).
따라서 이사야는 하나님의 말씀처럼 동족인 선민들에게 이제는 비참한 종말이 예정되어 있으니 통곡하며 애곡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옛날 니느웨의 왕과 백성들처럼 자기 머리 털을 뜯으며 굵은 베를 띠고서 하나님 앞에 용서를 구하자고 제의하고 있습니다.
이사야의 부르짖음은 훗날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열매 맺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죽음으로 사죄하는 일을 감당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가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부활로써 내세와 천국이 있음을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현세주의 사고방식이야 말로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가장 큰 불신앙의 모습이라고 하겠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이사야와 유다의 백성들에게 익숙한 히스기야 왕의 2신하의 이름을 사용하여 교훈을 주시며 미래에 대한 예언을 계시해주고 있습니다. 셉나와 힐기야의 아들인 엘리아김입니다. 국난의 시대 히스기야 왕 때 적장 랍사게를 상대하여 교섭을 벌인 신하들이 그들입니다. 엘리아김이 궁내대신이며 셉나는 그를 보좌하고 있던 서기관입니다.
그런데 환상 골짜기에서는 달리 말하고 있습니다. 셉나가 궁내대신과 재무대신의 직을 겸하여 그 권세가 왕에 못지 아니하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그는 자신의 영광을 왕의 영광만큼 높이고 있는 권신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셉나와 같이 자신의 종 된 신분을 망각하고 주인의 영광과 권리를 침해하는 자는 그 자리에서 쫓겨나고 처벌을 받게 된다고 이사야가 예언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가지 위로의 말씀이 함께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를 교만한 자리에서 내려오게 할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훗날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크게 회개하고 죄사함을 받아 거듭난 인생을 살아가게 된다면 구원의 기회를 얻을 수도 있다는 여운을 남기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인류역사의 지평선과 전환점을 미리 내다보면서 이사야는 제66장에 이르도록 예언의 말씀을 소망가운데 계속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아무쪼록 이해하기 힘든 묵시록에 속하고 있는 본문의 말씀을 깊이 음미하시면서 많은 내밀한 말씀의 기쁨과 실천의 은혜를 얻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