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주일날 새벽에 부활하신 예수님의 소식을 가장 먼저 들은 사람들과 영생의 몸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이 가장 먼저 직접 만난 인물”(눅24:1-35)
설교일; 주후 2025년 3월 9일 주일
작성자; 손진길 목사(24년 11월 1일 금요일 작성)
예수 그리스도가 골고다 십자가에 자신을 만민을 위한 속죄의 제물로 희생하고 나자 그 무덤에서부터 영생의 몸으로 부활하는 여호와의 새로운 창조가 준비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무덤에서 3일만에 부활하시자 영생의 몸을 가지셨음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시고(마28:7, 요20:17, 19, 22, 26-29) 또한 이 세상의 모든 권세를 아버지로부터 얻으신 만유의 주님이 되셨음을 선포하십니다(마28:18);
주님은 흩어진 사도와 제자들을 다시 불러모으시고 그들에게 아버지 하나님이 자신을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무엇을 증거하고자 하시는지 설명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공생애를 통하여 그들에게 가르쳐준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천국복음이 구약시대 많은 선지자를 유대사회에 보내어 전해주신 여호와의 모든 메시지의 정확한 뜻임을 예수님의 부활로 증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눅24:44-49).
그리고 40일만에 주님이 감람산에서 승천하시고(눅24:50-53, 행1:9) 오순절이 되자 예루살렘의 다락방에 모여서 끝까지 기도하고 있던 120명의 제자들에게 성령님이 강림하여 내주 역사하시는 놀라운 새 언약의 시대가 시작됩니다(행2:1-4). 그런데 그 일이 조직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아버지 하나님과 주님은 다음 2가지의 조치를 먼저 취하고 계십니다;
(1) 첫째, 지난 주일에 강해한 누가복음 제23장 후반부의 내용을 참조하면, 갈릴리에서 온 여인들과 공회원인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가 골고다언덕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물론 니고데모에 대한 이야기는 누가복음이 아니라 요한복음 제19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대교의 지도자인 그들이 예수님의 숨은 제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예수님의 가족과 친지들에게 당장 두가지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①하나는, 선민만을 구원하는 유대교가 아니라 만민을 구원하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더 옳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②또 하나는, 선민의 제국을 건설하는 메시아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다윗가문의 사람들은 이제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일에 헌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2) 둘째, 오늘 강해할 누가복음 마지막 장인 제24장 전반부에서 볼 수 있듯이 현신한 2천사가 가장 먼저 무덤으로 찾아온 갈릴리에서 온 여인들을 만나 예수님의 부활의 소식을 전하고 있으며(눅24:1-10) 그 다음에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개인적으로 남자들 가운데 엠마오에 살고 있는 글로바를 만나고 있습니다(눅24:13-35). 글로바는 다윗의 자손인 목수 요셉의 동생이라고 알려지고 있습니다;
참고로, 그의 아들인 시므온이 예루살렘교회에서 사도 베드로, 예수의 동생인 장로 야고보에 이어 총회장이 되고 있으며(행15:7, 13-14) 장로 야고보의 사촌동생으로 유명합니다.
그와 같은 두가지 조치가 필요한 이유를 깊이 생각해보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첫째로, 선민의 정통성은 역사적으로 다윗왕조의 유대왕국이 지니고 있습니다. 주전 930년경 다윗과 솔로몬의 이스라엘제국이 두개로 쪼개어져서 북조 이스라엘왕국과 남조 다윗왕조의 유대왕국으로 분열이 되고 말았지만 여호와를 섬기는 신정국가라는 정통성은 여전히 다윗왕조의 유대왕국의 것입니다. 그 이유는 북조 이스라엘왕국은 초대왕 여로보암1세때부터 금송아지를 만들어 여호와라고 산당에서 섬긴 영적인 타락상을 계속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왕상12:26-33, 17:21-23). 그 때문에 이스라엘 10지파가 참여한 북조 이스라엘왕국이 208년이 지나자 주전 722년에 앗수르제국에 의하여 먼저 멸망하고 맙니다(왕하17:1-6).
둘째로, 그로부터 136년이 지나자 남조 다윗왕조의 유대왕국마저 신바벨론제국의 갈대아군대에 의하여 멸망합니다. 그후 다윗왕조는 자신의 왕국을 재건하지 못하고 다윗가문으로 존재하게 됩니다. 하지만 다윗의 후손들의 꿈은 그들 가문에서 메시아가 나타나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 옛날 다윗과 솔로몬의 시대처럼 중동 땅에 다시 한번 선민 이스라엘의 제국을 건설하는 것입니다;
(1) 그런데 다윗의 후손인 목수 요셉의 장자로 호적이 등재되어 있는 나사렛 예수가(눅2:4-7) 30세에 복음사역을 위한 공생애를 살아가면서(눅3:23)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눅4:40-41). 백성들의 모든 질병과 장애를 고쳐주고 귀신을 쫓아내며 죽은 자를 두명이나 살려내고 있습니다(눅7:14-15, 8:54-56). 그것을 보고서 일찍 죽은 목수 요셉의 동생인 엠마오에 살고 있는 글로바와 유대인 마을 아리마대의 유력자인 다윗가문의 수장 요셉의 가슴이 뛰고 있습니다.
(2) 그러나 메시아로 여겨지고 있던 예수가 그만 허무하게 죄인이 되어 십자가처형을 당하고 맙니다. 큰 기대가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고 있습니다. 은근히 기대하고 있던 다윗가문의 어른인 글로바는 크게 실망하여 안식일을 예루살렘에서 지내고 이튿날 고향 엠마오로 돌아가고 있습니다(눅24:13-18). 그러나 히브리경전에 박식한 서기관인 아리마대 요셉은 다릅니다. 그는 동료인 니고데모와 함께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천국복음에 대하여 깊이 연구하고 있습니다.
(3) 그 결과 두사람은 다윗왕조의 회복과 선민의 제국을 재건하는 것이 여호와의 뜻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어 만민을 영생으로 구원하는 것이 목적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요3:10-21). 드디어 행동에 나서고 있습니다. 두사람은 합심하여 대속의 십자가에 자신을 속죄의 제물로 희생하신 예수님의 시신을 거두어 성대하게 장례를 치루어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눅23:50-53, 요19:39-40).
셋째로, 그들의 행동을 보고서 갈릴리에서 온 여인들과 예수님의 동생들이 이제는 마음을 바꾸고 있습니다(요7:3-5, 행1:14). 더 이상 다윗의 가문이 중심이 되어 선민의 제국을 재건하는 정치적인 메시아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뜻에 맞게 이제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 천국복음을 온 세상에 전파하여 만민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 그대로 하나님나라의 건설은 인간의 지혜와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영이 임하여 내주 역사하심으로 가능합니다. 따라서 다윗의 후손들과 기타 예수님의 제자들이 함께 모여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도한 결과 오순절에 성령의 강림과 내주 역사하심이 발생하게 됩니다. 그것이 새언약의 시대 초대교회의 발생입니다(렘31:33, 롬8:1-2, 히9:15).
그와 관련하여 참고삼아 다윗가문이 선민의 정통성을 가지게 되는 이스라엘의 역사와 특히 선지자 엘리야에게 주시는 여호와의 예언의 말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아주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주전 1,446년 4월에 애굽제국에 대한 여호와의 역사개입으로 해방을 맞이하고 6월에 시내광야에 도착한 이스라엘 자손들은 시내산에 강림하시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인류역사상 처음으로 여호와의 백성으로 선포가 되고 여호와를 섬기는 신정국가의 백성이 됩니다(출19:4-6).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을 신정국가의 백성 답게 만들기 위하여 먼저 출애굽의 지도자 모세를 시내산으로 불러 올려서 그를 교육시킵니다. 모세는 시내산에서 교육받은 그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호와의 말씀을 알기 쉽게 율법으로 전하고 그 말씀을 지키도록 만듭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명령으로 성막을 건설하여 속죄와 화목의 제례의식을 행하도록 합니다.
(2) 광야생활 40년에 접어들자 여호와의 명령으로 모세는 새로운 세대로 구성되어 있는 이스라엘 군대를 지휘하여 반년만에 요단강 동편의 아모리 족속의 2왕국을 점령합니다. 그리고 싯딤 지역에서 군사를 재정비하고 정권교체를 합니다. 그는 자신의 뒤를 이어 시종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요단강을 건너가 서편에 펼쳐져 있는 약속의 땅을 점령하도록 준비한 것입니다. 주전 1,390년경 여호수아와 갈렙은 요단강 서편의 가나안 땅 그리고 그 동편의 아모리 땅을 12지파에게 배분하는 일을 끝냅니다.
(3) 주전 1,376년경 여호수아가 110세를 일기로 별세하고 나자 이스라엘 12지파는 최고지도자를 선출하지 아니하고 제각각 군대를 보유하고서 12개의 부족국가로 존재하게 됩니다. 그때문에 주변의 강한 왕국으로부터 개별적으로 침탈을 당하게 되는 역사가 오래 전개되는 것입니다. 물론 많은 땅을 빼앗기게 되는 경우에는 여호와의 역사개입으로 대사사가 나타나서 적들을 물리치기도 하지만 12개 지파로 이스라엘 군대가 나누어져 있기에 안보상의 문제가 심각합니다. 대사사가 통합군을 만들어 대처하는 것이 늦어지기 일쑤이고 각 지파의 이해관계 때문에 가급적 군사를 보내지 아니하고 있는 것입니다.
(4) 마침내 주전 1,050년경 신정국가 이스라엘의 12지파가 베냐민 지파의 사울을 초대왕으로 옹립하고 왕정국가로 변모하게 됩니다. 사울왕은 12지파의 군사를 끌어 모아 상비군을 만들어 주변의 강한 적들의 침입을 물리치지만 그의 왕국은 여호수아 시대에 얻은 기업을 겨우 지켜내는 정도입니다. 그러나 주전 1,003년경 유다지파의 왕 다윗이 전체 이스라엘 12지파의 왕이 되자 여호와의 도우심으로 놀라운 역사가 전개됩니다. 주전 990년경 중동의 지역패권국 이스라엘제국이 건설된 것입니다. 주전 970년에 즉위한 그의 후계자 솔로몬이 약간의 영토를 더 얻게 되어 이스라엘의 역사상 가장 번영을 누린 다윗과 솔로몬의 제국시대로 기록이 되고 있습니다.
(5) 그러나 40년간 이스라엘제국을 다스린 솔로몬대왕의 통치가 전반기에는 여호와를 의지하여 융성하지만 후반기에는 우상을 섬기고 세상영광을 추구하게 됨으로써 그가 죽고 나자 이듬해 주전 930년경 이스라엘제국이 남조 유대왕국과 북조 이스라엘왕국으로 분열되고 맙니다. 구체적으로, 이스라엘 10지파는 억압정책을 계속하고 있는 다윗왕조를 버리고 에브라임 지파 출신인 여로보암을 초대왕 여로보암1세로 삼고 북조 이스라엘왕국을 출범시키고 만 것입니다. 여로보암1세는 유대교인인 왕국의 백성들이 종교적 절기에 솔로몬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떠나는 것이 정치적으로 너무나 불안합니다(왕상12:26-27). 그에 따라 그는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자손들이 시내광야에서 그러한 것처럼 금송아지 둘을 만들어 하나는 남쪽 국경도시 벧엘에 두고 또 하나는 북쪽 국경도시 단에 두고서 백성들로 하여금 그것을 여호와의 형상으로 알고서 섬기도록 조치합니다(왕상12:28-30). 북조 이스라엘왕국의 백성들은 멀리 예루살렘성전까지 가지 아니하여도 되기에 그러한 조치를 환영하고 있습니다.
(6) 한편, 여호와를 성전에서 섬기기를 좋아하는 제사장을 위시한 레위인들은 그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모세시대에 금송아지를 섬긴 기타 지파를 여호와의 편에 서서 칼로 징벌한 레위지파의 자손들입니다(출32:26-28). 따라서 그들은 한꺼번에 이스라엘왕국을 탈출하여 유대왕국으로 들어가고 맙니다(대하11:13-17). 여로보암1세는 레위인이 아니라 일반백성을 제사장으로 임명하여 금송아지 우상을 계속 섬기도록 조치합니다(왕상12:31, 13:33). 그와 같은 여로보암1세의 금송아지 숭배정책은 여러 번 왕가가 바뀌고 있지만 변함없이 시행이 됩니다. 그 결과 주전 722년에 마침내 북조 이스라엘왕국이 역사 가운데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7) 그런데 북조 이스라엘왕국에서는 주전 871년경 오므리의 뒤를 이어 그 아들 아합이 일곱번째 왕이 됩니다. 그의 아내가 그 유명한 이세벨 왕비입니다. 그녀의 부친은 시돈의 왕 옛바알인데 옛바알은 국왕이면서 동시에 바알을 섬기는 대제사장의 칭호입니다. 그러므로 이세벨은 남편을 설득하여 바알신을 섬기고 여호와를 배척합니다. 북조 이스라엘왕국의 역사에 있어서 영적으로 가장 캄캄한 시대가 도래한 것입니다. 여호와는 시골 출신 엘리야를 선지자로 불러서 크게 사용하십니다. 그렇지만 이세벨 왕비가 군대를 보내어 그를 해치우려고 하자 엘리야는 의지할 곳이 없어서 조국을 탈출하여 유대왕국의 남부지역 브엘세바로 들어갑니다. 반(半)사막성 네게브 지역에서 조국의 우상화에 절망하고 살길마저 막막해진 엘리야는 기진맥진하여 그만 깨끗한 죽음을 맞이하고자 여호와께 기도합니다(왕상19:3-4).
(8) 그러나 여호와의 뜻은 그것이 아닙니다. 그의 기력을 회복시키고 그 옛날 모세를 불러서 사명자로 세운 그곳 호렙산으로 들어가게 합니다(왕상19:5-8). 그곳에서 여호와는 엘리야를 다시 사명자로 세우고 그에게 중요한 예언의 말씀을 주십니다; “나 여호와는 북조 이스라엘의 암흑기에 7천명의 여호와신앙인을 남겨서 그 왕국의 멸망을 막을 것이다”(왕상19:18 의역). 믿음의 조상이 되고 있는 아브라함 시대의 이야기를 참조하면, 소돔성의 멸망을 막기 위하여 최소한 의인 10명이 필요합니다(창18:32). 그렇다면 아합왕 당시 북조 이스라엘왕국에는 그 성읍의 수가 700개를 넘지 못합니다. 생각해보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는 영이신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합니다. 예수님 당시 가나안 땅 유대인사회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천국복음을 영접하고 있는 유대인의 수가 7천명은 된다고 하겠습니다;
(9) 그들 가운데 상당부분이 예루살렘에서 주님이 부활하고 승천하신 다음에 오순절날 성령님이 강림하여 성도들에게 내주 역사하심으로 인하여 사도 베드로의 강력한 설교가 나타나자 스스로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고 초대교회의 성도가 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행2:37-47). 오랜 세월 선민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신 여호와의 뜻을 저버리고 살아오고 있습니다. 이방인들에게 여호와신앙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그들의 구원을 위하여 중보 기도하며 회개하고 돌아오는 자들을 위하여 제사장나라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가라고 했더니(출19:6) 그와 반대로 신앙생활을 영위한 것입니다. 곧 선민만의 구원을 원하고 선민의 제국을 재건하는 메시아의 오심을 소원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영적으로 캄캄한 시대에 예수님이 아버지 하나님의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천국복음을 그들에게 전파하신 것입니다. 그 결과 7천명의 성도들이 나타나서 선민사회의 멸망을 예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유대교지도자들의 기독교인 탄압이 발생하자 마침내 주후 70년에 유대 땅에 멸망의 역사가 도래하고 만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한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얻은 소중한 교훈과 메시지를 더불어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1. 안식 후 첫날 새벽에(예수님의 장례가 끝나고 어두워지자 드디어 16일 토요일 안식일이 시작됨. 안식일이 지나고 다시 어두워지자 17일 주일이 시작됨. 그리고 새벽이 되자 바깥출입이 가능해진 것임) 이 여자들이(10절을 참조하면, 일단은 실명으로 막달라 마리아와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 그리고 구사의 아내 요안나임, 눅8:2-3. 그리고 요19:25절을 참조하면 그들과 함께한 다른 여자들은 이모인 살로메와 숙모인 마리아임) 그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눅23:56) 무덤에 가서, 2. 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겨진 것을 보고(마27:60-66절을 참조하면, 예수님의 시신을 안치한 바위굴 입구는 큰 돌을 굴려서 막고 있으며 그것을 대제사장의 수하들이 돌을 인봉하고 굳게 지키고 있는 것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큰 돌이 입구에서 벗어나 있다고 하는 것은 경천동지할 일인 것임), 3. 들어가니 주 예수의 시체가 보이지 아니하더라(그 옛날 모세나 엘리야의 경우처럼 시신을 발견할 수가 없음, 신34:6, 유1:9, 왕하2:17). 4. 이로 인하여(대제사장의 수하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도적질한 것이 아닌가하여, 마27:64 반대해석) 근심할 때에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현신한 천사 둘이 여인들의) 곁에 (갑자기 유령처럼 나타나서) 섰는지라. 5. (피조물에 불과한) 여자들이 (영적인 존재를 보았으므로 목숨의 위기를 느끼고)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그 얼굴을 보지 아니하기 위하여, 출33:20) 두 사람이(현신한 2천사가) 이르되,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6.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눅9:22, 예수님이 이미 제자들에게 예언하신 그대로 무덤에서 영생의 몸으로 3일만에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2천사가 현신하여 실제상황임을 처음으로 밝히고 있는 대목임)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눅9:22, 44,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인 다음 갈릴리 북부에서 예수님이 사도들에게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관하여 2차례 예언하신 것임). 7. 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한대(눅9:22), 8. 그(여인)들이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9. 무덤에서 돌아가 이 모든 것을 (가룟 유다가 없어지고 남은) 열한 사도와 다른 모든 이(기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알리니, 10. (이 여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라. 또 그들과 함께한 다른 여자들도 이것을 사도들에게 알리니라). 11. 사도들은 그들의 말이 (여자들의 증언이므로 증거력이 미흡하고 또한 상식에서 크게 벗어나고 있어)허탄한 듯이 들려 믿지 아니하나, 12. 베드로는 일어나 무덤에 달려가서 구부려 들여다 보니 세마포만 보이는지라. 그 된 일을 놀랍게 여기며 집으로 돌아가니라”(눅24:1-12); 다음과 같이 2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1. 안식 후 첫날 새벽에(예수님의 장례가 끝나고 어두워지자 드디어 16일 토요일 안식일이 시작됨. 안식일이 지나고 다시 어두워지자 17일 주일이 시작됨. 그리고 새벽이 되자 바깥출입이 가능해진 것임) 이 여자들이(10절을 참조하면, 일단은 실명으로 막달라 마리아와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 그리고 구사의 아내 요안나임, 눅8:2-3. 그리고 요19:25절을 참조하면 그들과 함께한 다른 여자들은 이모인 살로메와 숙모인 마리아임) 그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눅23:56) 무덤에 가서, 2. 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겨진 것을 보고(마27:60-66절을 참조하면, 예수님의 시신을 안치한 바위굴 입구는 큰 돌을 굴려서 막고 있으며 그것을 대제사장의 수하들이 돌을 인봉하고 굳게 지키고 있는 것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큰 돌이 입구에서 벗어나 있다고 하는 것은 경천동지할 일인 것임), 3. 들어가니 주 예수의 시체가 보이지 아니하더라(그 옛날 모세나 엘리야의 경우처럼 시신을 발견할 수가 없음, 신34:6, 유1:9, 왕하2:17). 4. 이로 인하여(대제사장의 수하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도적질한 것이 아닌가하여, 마27:64 반대해석) 근심할 때에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현신한 천사 둘이 여인들의) 곁에 (갑자기 유령처럼 나타나서) 섰는지라. 5. (피조물에 불과한) 여자들이 (영적인 존재를 보았으므로 목숨의 위기를 느끼고)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그 얼굴을 보지 아니하기 위하여, 출33:20) 두 사람이(현신한 2천사가) 이르되,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6.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눅9:22, 예수님이 이미 제자들에게 예언하신 그대로 무덤에서 영생의 몸으로 3일만에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2천사가 현신하여 실제상황임을 처음으로 밝히고 있는 대목임)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눅9:22, 44,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인 다음 갈릴리 북부에서 예수님이 사도들에게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관하여 2차례 예언하신 것임). 7. 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한대(눅9:22)”(눅24:1-7);
1) 대속의 십자가에 자신의 몸을 속죄의 제물로 희생하신 예수님을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이 영생의 몸으로 부활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것이 여호와의 새로운 창조 행위이며 그 옛날 예레미야와 요엘 선지자가 예언한 새 언약 시대의 도래를 말하고 있습니다(렘31:33, 욜2:28, 히9:15, 롬8:1-4). 그와 같은 놀라운 사건을 실제상황으로 직면하게 된 자들이 예수님을 따라 갈릴리에서 온 여인들과 재정적으로 예수님의 공생애를 도운 여인들임을 의사 누가가 본문에서 밝히고 있습니다(1절과 10절, 눅8:2-3). 차제에 본문의 구절을 한번 알기 쉽게 체계적으로 풀이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2) 첫째, 예수님이 안식일을 앞두고 준비일 끝 무렵에 십자가에서 운명하십니다. 그것을 보고서 공회원이며 유대인 마을 아리마대의 유력인사인 요셉이 빌라도 총독을 방문하여 예수님의 장례를 치를 수 있도록 시신을 인도하여 달라고 요청합니다(눅23:52). 빌라도는 수하를 시켜 나사렛 예수가 이미 운명하였다는 사실을 확인한 다음에 쾌히 허락합니다(막15:44-45). 그 이유는 자신이 잘못 판결한 증거물을 빨리 사람들의 눈에 뜨이지 아니하도록 무덤속에 집어넣어버리는 것이 바람직하기 때문입니다(눅23:22-25).
3) 둘째, 예수님의 장례는 부자이며 종교적 신분이 높은 아리마대 요셉과 그의 동료인 니고데모에 의하여 성대하게 치루어지고 요셉이 마련해 놓은 인근 바위굴 묘택에 그 시신이 안치가 되었음을 갈릴리에서 온 여인들이 유심히 관찰하고 있습니다(눅23:50-55, 요19:39-42). 그들 중 일부는 인근의 상점을 방문하여 향품과 향유를 미리 구해놓고 있습니다(눅23:56). 그 이유는 안식일이 지나고 주일이 밝아오면 무덤을 찾아가서 예수님의 시신에 자신들도 향품 처리를 해주고 싶기 때문입니다(눅24:1).
4) 셋째, 날이 완전히 어두워지고 안식일 이튿날이 시작되자 여인들은 이제 새벽이 밝아 오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새벽 일찍 골고다 언덕 인근동산에 위치하고 있는 그 바위굴 묘실을 찾아가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녀들은 자신들의 손으로 그 굴속에 안치되어 있는 예수님의 시신에 향품과 향유를 발라주고 싶어합니다(1절). 그러나 무덤을 방문한 그녀들은 자신들의 뜻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누군가 그 거대한 입구의 바위 돌을 옮겨 놓았기에 얼른 안으로 들어가보니 예수님의 시신을 도저히 찾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2-3절).
5) 넷째, 그녀들은 상심이 큽니다(4a). 틀림없이 그 바위굴을 지키고 있던 대제사장의 수하들이 입구의 돌을 힘들게 옮기고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가 버린 것으로 짐작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녀들의 생각은 대제사장의 생각과는 전혀 다릅니다. 그 이유는 유대교지도자들은 예수의 제자들이 그 시신을 훔쳐서 숨겨버리고 의도적으로 예수가 부활하였다고 선전할 가능성이 있다고 매우 염려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마27:62-66).
6) 다섯째, 여인들은 갑자기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난 2천사의 말을 듣고 2번이나 깜짝 놀라고 있습니다(4b-7절); 하나는, 아무리 사람의 모습으로 꾸며서 나타났다고 하지만 역시 천사들은 영체이기 때문입니다. 피조물에 불과한 연약한 인간들이 갑자기 영체를 만나게 되면 본능적으로 엄청난 영적인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입니다(5절, 눅1:11-12, 30, 출33:20).
7) 또 하나는, 두 천사가 전하고 있는 소식을 듣고서 더욱 놀라고 있습니다. 그 내용이 바로 갈릴리에서 예수님이 예언한 그대로 무덤에서 3일만에 부활하셨다는 소식이기 때문입니다(6-8절). 이제 그녀들은 그 놀라운 소식을 예루살렘의 다락방에 모여 있는 예수님의 사도와 제자들에게 알려주어야 합니다(9절). 그녀들의 마음이 급해지고 있습니다.
(2) “8. 그(여인)들이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9. 무덤에서 돌아가 이 모든 것을 (가룟 유다가 없어지고 남은) 열한 사도와 다른 모든 이(기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알리니, 10. (이 여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라. 또 그들과 함께한 다른 여자들도 이것을 사도들에게 알리니라). 11. 사도들은 그들의 말이 (여자들의 증언이므로 증거력이 미흡하고 또한 상식에서 크게 벗어나고 있어)허탄한 듯이 들려 믿지 아니하나, 12. 베드로는 일어나 무덤에 달려가서 구부려 들여다 보니 세마포만 보이는지라. 그 된 일을 놀랍게 여기며 집으로 돌아가니라”(눅24:8-12);
1) 예수님의 무덤을 주일 새벽에 찾아간 여인들은 천사의 전언만 들었을 뿐 실제로 부활한 주님을 만난 것이 아닙니다(4-8절). 그렇지만 그녀들은 그 놀라운 천사들의 이야기를 예루살렘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있는 예수님의 사도들과 기타 제자들에게 알려주고 싶어합니다(9절). 일단 사도들이 빨리 현지를 방문하여 빈무덤을 확인해야 하기 때문입니다(10-11절). 참고로, 그곳 다락방에는 원로인 글로바와 그의 아들인 시므온도 함께 있었다는 사실을 의사 누가가 후술하여 기록으로 남기고 있습니다(22-23절).
2) 실제로 여인들의 이야기를 듣고서 무덤으로 곧장 달려간 사도가 시몬 베드로라고 의사 누가가 기록하고 있습니다(12절). 그러나 사도 요한은 자신도 베드로와 함께 행동했다고 그의 복음서에 기록하고 있습니다(요20:3-10). 그들 사도들 역시 빈 무덤만을 보고서 돌아옵니다;
그렇지만 대제사장이 수하를 시켜서 스승님의 시신을 훔쳐가 숨겨버린 것으로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불리한 조치이기 때문입니다(마27:64). 그러므로 결론은 천사들의 전언 그대로 스승 예수님이 벌써 예언하신 그대로 무덤에서 3일만에 부활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그들의 결론임을 의사 누가가 후술하고 있습니다(33-34절).
둘째로, “13. 그 날(안식일을 지낸 다음날 오후)에 그(예수님의 제자)들 중 둘(글로바와 그 아들 시므온)이 예루살렘에서 25리 되는 (자신들의 집이 있는) 엠마오라 하는 마을로 가면서, 14. 이 모든 된 일(예수님의 십자가처형과 장례식 등)을 서로 이야기하더라. 15.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무덤에서 그날 새벽에 부활하신)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16.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창15:5-6, 17:1, 그들은 여호와의 전능하신 창조의 능력을 믿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적인 경험과 상식을 확고하게 믿고 있음. 더구나 예수님의 장례까지 끝났으므로 죽은 선지자가 무덤에서 살아나온 일이 없으므로 그것을 철석같이 믿고 있는 것임, 눅23:35-37)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요20:14, 실제로 막달라 마리아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고 있음. 그 이유는 무덤에서 영생의 몸으로 부활하신 것이기에 예수님의 용모가 그 옛날 변화산의 그때처럼 상당히 변화하여 있는 것임, 요20:14, 눅9:29),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 18. 그 한 사람인 글로바라 하는 자가(글로바가 목수 요셉의 형제라고 알려지고 있는데 그 이유는 그의 아내 마리아가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님 가까이에서 그것을 끝까지 지켜본 여인들 가운데 들어 있기 때문임. 그 순서가 사도 요한의 기록에 따르면,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 이모, 그 다음 숙모의 서열인 것임, 요19:25) 대답하여 이르되, 당신이 예루살렘에 체류하면서도 요즘 거기서 된 일을 혼자만 알지 못하느냐? 19. (부활하신 예수님이 글로바에게) 이르시되, 무슨 일이냐? 이르되, 나사렛 예수의 일이니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앞에서 (눅4:15, 천국복음의 이치를 설명하고 가르치는) 말과 (눅4:38-41, 백성들의 질병과 장애를 고치며 귀신을 쫓아내는) 일에 능하신 선지자이거늘, 20.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리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 주어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21.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이스라엘을 외세의 압제에서 구원하여 줄 정치적인 메시아로 믿은 것임). 이 뿐 아니라 이 일이 일어난 지가 사흘째요(준비일에 운명하여 장례가 치루어지고 안식일을 지나 이제는 주일이 된 것임, 1절과 13절), 22. 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1-2절), 23.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아나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3-11절). 24. 또 우리와 함께 한 자 중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 과연 여자들이 말한 바와 같음을 보았으나,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 하거늘(12절에서는 사도 베드로의 이름만이 기록되어 있음. 그러나 사도 요한은 자신이 베드로와 함께 무덤을 찾아가서 그 사실을 확인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음, 요20:3)”(눅24:13-24); 역시 다음과 같이 2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1) “13. 그 날(안식일을 지낸 다음날 오후)에 그(예수님의 제자)들 중 둘(글로바와 그 아들 시므온)이 예루살렘에서 25리 되는 (자신들의 집이 있는) 엠마오라 하는 마을로 가면서, 14. 이 모든 된 일(예수님의 십자가처형과 장례식 등)을 서로 이야기하더라. 15.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무덤에서 그날 새벽에 부활하신)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16.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창15:5-6, 17:1, 그들은 여호와의 전능하신 창조의 능력을 믿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적인 경험과 상식을 확고하게 믿고 있음. 더구나 예수님의 장례까지 끝났으므로 죽은 선지자가 무덤에서 살아나온 일이 없으므로 그것을 철석같이 믿고 있는 것임, 눅23:35-37)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요20:14, 실제로 막달라 마리아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고 있음. 그 이유는 무덤에서 영생의 몸으로 부활하신 것이기에 예수님의 용모가 그 옛날 변화산의 그때처럼 상당히 변화하여 있는 것임, 요20:14, 눅9:29),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눅24:13-24);
1) 어째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12사도보다 원로 글로바를 먼저 만나고자 엠마오로 가고 있는 그와 그의 아들 시므온 앞에 나타나고 있는 것일까요?(13-15절, 18a) 그 이유는 글로바가 지니고 있는 두가지 신분의 특징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는, 글로바가 목수 요셉의 형제로서 집안의 어른이기 때문입니다(요19:25). 또 하나는, 다윗가문의 직계에 속하고 있는 글로바이기에 정치적인 메시아가 그들의 가문에서 나타나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외세를 물리치고 그 옛날 다윗의 제국을 재건하여 주기를 간절하게 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21a). 그러나 글로바의 희망은 메시아로 여겨지고 있던 조카 예수가 어이없이 십자가처형을 당하고 말자 수포로 돌아가고 만 것입니다(19-20절, 21b).
2) 그러므로 부활하신 예수님은 빨리 숙부 글로바를 만나서 그에게 새로운 소망을 주고 싶습니다. 그것이 두가지입니다; 하나는, 피조물에 불과했던 인자(人子, son of man) 예수가 대속의 십자가에 자신을 속죄의 제물로 희생하고 그 결과 아버지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이제는 영생의 몸을 입고 부활한 것입니다(고전15:44). 앞으로 진리의 보혜사 성령님이 강림하여 모든 성도에게 임재하여 내주 역사하시게 되면 그 성령의 전에 주님이 영적으로 임재하여 믿는 자를 영생 구원하여 천국으로 인도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요14:1-3, 16-20, 5:24-29). 또 하나는, 그와 같은 새언약의 시대가 시작되고 있으므로 이제는 다윗가문의 사람들도 헛된 세상제국 선민의 나라를 건설하고자 하는 희망을 버리고 그 대신에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천국복음을 땅끝까지 전파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데 앞장을 서라는 것입니다.
3) 그 일에 아리마대 요셉이 벌써 앞장서고 있으므로(눅23:51) 이제는 숙부 글로바와 그의 아들 시므온도 참여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글로바와 시므온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전혀 알아보지 못하고 있습니다(16절). 그 이유가 둘입니다; 첫째, 그들의 생각이 완전히 세상적인 상식과 경험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의 역사와 경전의 기록 가운데 지금까지 무덤에서 살아나온 선지자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나사렛 예수 역시 십자가에서 운명하고 그 장례절차까지 마쳤으므로 부활하는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둘째, 유한한 육신과 목숨을 가지고 살아가던 인자 곧 사람의 아들 예수와 이제 무덤에서 영생의 몸으로 부활하신 주님은 그 용모가 상당히 다릅니다. 그에 따라 예수님의 무덤을 방문한 막달라 마리아가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습니다(요20:14).
4) 그와 같은 사실은 변화산에서 발생한 예수님의 용모의 변화에서 벌써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눅9:29).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기에 글로바와 시므온은 아직도 슬픈 기색을 보이고 있습니다(24b). 그들이 예수님의 사도와 제자들 그리고 아직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친지들과 헤어져서 고향 엠마오를 향하여 30리길을 천천히 걸아가고 있으면서도 그 표정이 슬프기 그지 없습니다. 그와 같은 안색을 살피면서 예수님이 그들에게 예루살렘에서 발생한 일에 대하여 일부러 묻고 있는 것입니다(24a). 사실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가는 그 길은 소년시절부터 예수님에게 익숙합니다. 유월절에 부모님과 함께 예루살렘에 왔다가 고향 나사렛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모두들 그 길을 함께 걸어가서 숙부 글로바의 집에 하루 머문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눅2:43-45).
(2) “18. 그 한 사람인 글로바라 하는 자가(글로바가 목수 요셉의 형제라고 알려지고 있는데 그 이유는 그의 아내 마리아가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님 가까이에서 그것을 끝까지 지켜본 여인들 가운데 들어 있기 때문임. 그 순서가 사도 요한의 기록에 따르면,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 이모, 그 다음 숙모의 서열인 것임, 요19:25) 대답하여 이르되, 당신이 예루살렘에 체류하면서도 요즘 거기서 된 일을 혼자만 알지 못하느냐? 19. (부활하신 예수님이 글로바에게) 이르시되, 무슨 일이냐? 이르되, 나사렛 예수의 일이니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눅4:15, 천국복음의 이치를 설명하고 가르치는) 말과 (눅4:38-41, 백성들의 질병과 장애를 고치며 귀신을 쫓아내는) 일에 능하신 선지자이거늘, 20.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리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 주어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21.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이스라엘을 외세의 압제에서 구원하여 줄 정치적인 메시아로 믿은 것임). 이 뿐 아니라 이 일이 일어난 지가 사흘째요(준비일에 운명하여 장례가 치루어지고 안식일을 지나 이제는 주일이 된 것임, 1절과 13절), 22. 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1-2절), 23.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아나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3-11절). 24. 또 우리와 함께 한 자 중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 과연 여자들이 말한 바와 같음을 보았으나,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 하거늘(12절에서는 사도 베드로의 이름만이 기록되어 있음. 그러나 사도 요한은 자신이 베드로와 함께 무덤을 찾아가서 그 사실을 확인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음, 요20:3)”(눅24:13-24);
1) 글로바가 대답을 겸하여 설명하고 있는 말 가운데 다음 4가지 내용이 담기어 있습니다; 첫째, 그가 가형(家兄, 집의 형님) 목수 요셉의 장남으로 호적에 올라 있는 장조카 예수에게서 그동안 무엇을 기대하고 있었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글로바는 예수를 여호와가 이스라엘을 외세의 지배에서 해방하고 다시 다윗의 제국에서 영광 가운데 살게 만들어 줄 메시아로 이 세상에 보내준 인물로 믿고 있었다는 것입니다(21절).
2) 둘째, 그의 바램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가 대제사장을 위시한 유대교지도자들의 배척을 받고 십자가처형을 당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20절). 죽은 자가 무엇을 더 성취할 수가 있겠습니까? 기대가 컸기에 큰 실망을 하고서 자신과 아들은 고향 엠마오로 돌아가고 있다는 설명입니다.
3) 셋째, 아침에 한가지 참으로 이상한 소문을 들었다고 말합니다. 여자분들 곧 예수의 모친과 집안의 어른들 그리고 막달라 마리아 등이 새벽 일찍 예수의 무덤을 찾아갔다가 빈무덤을 보고 와서 예수님이 부활하였다는 두 천사의 말을 들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22-23절). 성격이 급한 베드로가 달려가서 무덤을 확인한 결과 역시 스승 예수의 시신을 보지 못했다고 합니다(24절). 과연 예수의 시신은 누가 훔쳐서 숨겨버린 것일까요? 그것이 의문이지마는 확실한 정보가 없기에 자신들은 더 이상 예루살렘에 머물지 아니하고 고향집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답변인 것입니다(13-14절).
4) 넷째, 글로바가 예수의 진면목을 파악하지 못한 채 그의 질문이 상당히 이상하여(18a)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예루살렘에 체류하면서도 요즘 거기서 된 일을 혼자만 알지 못하느냐? 19. (부활하신 예수님이 글로바에게) 이르시되, 무슨 일이냐? 이르되, 나사렛 예수의 일이니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눅4:15, 천국복음의 이치를 설명하고 가르치는) 말과 (눅4:38-41, 백성들의 질병과 장애를 고치며 귀신을 쫓아내는) 일에 능하신 선지자이거늘”(18b-19절). 요즘 예루살렘에서 발생한 사건 가운데 가장 큰 일이 갈릴리의 선지자 예수가 십자가처형을 당한 것인데 그 일을 전혀 알지 못한 채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길을 가고 있다니 그것이 알다 가도 모를 일이라는 글로바의 말입니다.
셋째로, “25. (부활하신 예수님이)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글로바와 그 아들 시므온)이여! 26. (예수가 사도와 제자들에게 이미 예언한 그대로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을 이루기 위한 대속의 제물이 되기 위하여, 눅9:22, 44)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27.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44-45절). 28. 그들이 가는 마을(예루살렘에서 서북쪽으로 11km지점인 엠마오, 13절)에 가까이 가매 예수는 더 가려 하는 것 같이 하시니, 29. 그들이 강권하여 이르되,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 때가 저물어가고 날이 이미 기울었나이다 하니(그것이 인정 어린 고대사회의 풍습임), 이에 (못이기는 척하면서) 그들과 함께 유하러(하룻밤 신세를 지기 위하여) 들어가시니라. 30.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먼 길을 걸어왔기에 시장기를 느끼고 또한 손님을 대접하기 위하여 일찍 차린 만찬으로 보임)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손님이 떡을 떼어 축사하는 광경은 선지자임을 말하고 있음, 눅9:16. 그리고 그 모습은 성찬식과 같은 것임, 눅22:19), 31. (그 성찬식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 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영생의 몸으로 부활하신 주님이시기에 이미 시공간을 초월하고 있는 것임, 요4:24, 20:19). 32.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44-45절)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심령속에서 깨달음의 희열로 역사하고 있는 것임) 하고, 33. 곧 그 때로 일어나(비록 어두워지고 있는 시간이지만)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11 제자 및 그들과 함께 한 자들이 모여 있어(아마도 마가의 다락방인 것으로 보임, 눅22:12-13, 행1:13-15), 34.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보이셨다! 하는지라(12절, 그렇지만 요한복음에 의하면 사도 베드로와 요한이 함께 무덤으로 가서 확인한 결과임, 요20:2-9). 35. 두 사람(글로바와 시므온)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예수님의 부활의 증거가 더욱 풍성해진 것임. 훗날에는 영안으로 본 사도 바울의 간증도 나타나고 있음, 행9:4-5, 고전15:8)”(눅24:25-35); 다음과 같이 3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1) “25. (부활하신 예수님이)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글로바와 그 아들 시므온)이여! 26. (예수가 사도와 제자들에게 이미 예언한 그대로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을 이루기 위한 대속의 제물이 되기 위하여, 눅9:22, 44)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27.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44-45절)”(눅24:25-27);
1) 부활하신 예수님이 글로바의 설명을 자세히 들어보고 있습니다. 그 결과 다음 3가지 사실을 확인합니다; 첫째, 2천사로부터 예수가 무덤에서 부활하였다는 사실을 듣고서도 여자분들이 반신반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2) 둘째, 여자분들의 말이 현실타당성이 없고 또한 증거능력이 없다고 판단하여 베드로가 직접 무덤에 가서 확인한 결과 역시 예수의 시신이 사라지고 없다는 것입니다. 누가 스승의 시신을 훔쳐간 것인지 설왕설래를 할 뿐 진정으로 예수의 부활을 믿는 제자가 없습니다.
3) 셋째, 예수는 히브리경전에 기록되어 있는 선지자들의 예언 곧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와서 대속의 십자가에 자신을 속죄의 제물로 희생할 것이며 부활 승천하여 여호와의 보좌 오른쪽에 주님으로 좌정할 것이라는 사실을 창조주의 역사섭리로 전혀 믿지 아니하고 있는 한심한 제자들에 대하여 실망이 너무 큽니다; “25. (부활하신 예수님이)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글로바와 그 아들 시므온)이여!”(25절);
4) 그에 따라 승천하기 전에 다음과 같은 두가지 조치를 우선적으로 취하고자 합니다; 하나는, 히브리경전에 기록되어 있는 메시아에 관한 선지자들의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십자가 희생으로 말미암아 이제는 성취가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곧 진리의 보혜사 성령님이 이 세상에 오시게 되면 성도들에게 내주하여 역사하는 새언약의 시대가 전개된다는 사실을 먼저 글로바와 그의 아들 시므온에게 설명하고자 하십니다(26-27절).
5) 또 하나는, 사도와 제자들을 찾아가서 동일한 내용을 이야기하고 보혜사 성령님이 오시기를 기도하라고 말할 것입니다(44-49절). 그리고 성령님의 권능을 받아 예수님의 천국복음을 온세상에 전파하고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가라고 당부한 다음에 부활하신 예수님은 승천하실 생각입니다(50-53절, 행1:8-11).
(2) “28. 그들이 가는 마을(예루살렘에서 서북쪽으로 11km지점인 엠마오, 13절)에 가까이 가매 예수는 더 가려 하는 것 같이 하시니, 29. 그들이 강권하여 이르되,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 때가 저물어가고 날이 이미 기울었나이다 하니(그것이 인정 어린 고대사회의 풍습임), 이에 (못이기는 척하면서) 그들과 함께 유하러(하룻밤 신세를 지기 위하여) 들어가시니라. 30.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먼 길을 걸어왔기에 시장기를 느끼고 또한 손님을 대접하기 위하여 일찍 차린 만찬으로 보임)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손님이 떡을 떼어 축사하는 광경은 선지자임을 말하고 있음, 눅9:16. 그리고 그 모습은 성찬식과 같은 것임, 눅22:19), 31. (그 성찬식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 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영생의 몸으로 부활하신 주님이시기에 이미 시공간을 초월하고 있는 것임, 요4:24, 20:19). 32.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44-45절)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심령속에서 깨달음의 희열로 역사하고 있는 것임) 하고”(눅24:28-32);
1) 해외에 교민이 되어 오래 살다가 보면 2가지 종류의 동포를 만나게 됩니다; 하나는, 고국에서 잠시 해외방문을 한 친지나 동포입니다. 또 하나는, 영주할 목적으로 와서 함께 살아가고 있는 동포입니다. 그저 방문자에 불과한 동포에 대해서는 그들이 가까운 친지이거나 동족이므로 현지에서 교민들이 잘 대해주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근본적으로 한가지 뚜렷한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늘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그것은 방문자가 느끼고 있는 것과 현지에서 오래 살아가고 있는 자신들이 현지에서 생활하면서 경험하고 있는 것이 상당히 다르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실제로 잠깐 손님으로 지나가는 경우에는 현지의 삶에 대하여 온전히 파악할 수가 없습니다. 방문자는 숙박비와 교통비 그리고 음식값이 어느 정도인지를 주로 경험하면서 조국과의 물가의 차이를 따질 따름입니다. 그와 달리 현지에서 생활하고 있는 교민의 경우에는 세금부담과 보험료부담 그리고 연봉의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렌트비나 집값의 부담이 엄청나므로 그것을 매일 느끼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현지에서 생활하고 있는 교민의 애로사항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방문객에 그쳐서는 안됩니다. 반드시 그들과 함께 현지에서 생활하는 상당한 기간이 필요합니다.
3) 그와 같은 맥락에서 구약시대에 주로 선지자를 현지에 보내어 여호와의 말씀을 대언하도록 하시던 여호와께서 신약시대에 어째서 여호와의 독생자를 이 세상에 사람의 아들인 인자로 태어나게 하시고 30세가 되자 비로소 천국복음을 전파하는 공생애를 3년 6개월 동안이나 수행제자인 사도들과 함께 살아가게 하셨는지가 이해됩니다. 그 이유는 한마디로, 사람들의 고통을 깊이 체험적으로 이해하여 심판에 있어서 정상참작을 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와 같은 사실을 예수님이 참으로 알기 쉽게 말씀하십니다; “27. 또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느니라”(요5:27).
4) 그 사실을 익명의 히브리서저자가 더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14.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 지어다. 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16.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4:14-16). 그 말씀의 의미 그대로입니다.
5) 부활하신 예수님이 숙부인 글로바와 종제인 시므온에게 함께 길을 가면서 아무리 히브리경전에 기록되어 있는 메시아에 관한 선지자들의 예언의 말씀과 요즈음 예루살렘에서 발생한 그리스도 예수의 대속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그 예언이 성취되고 있음을 설명하여도 별로 효과가 없습니다. 드디어 글로바의 집이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실망하신 예수님은 거기서 그들과 헤어지고자 하십니다(28절). 그러나 인정이 많은 고대사회입니다. 특히 다윗의 자손인 글로바는 나그네 대접함에 소홀함이 없습니다(신14:29). 그가 부활하신 예수님의 정체를 알지도 못하면서 인정상 그의 옷소매를 자신의 집으로 잡아 끌고 있습니다(29a). 예수님이 못이기는 체하면서 그 집으로 들어가자(29b) 먼저 손님을 대접하기 위하여 만찬부터 글로바와 시므온이 준비합니다(30a).
6) 예수님은 습관이 되어서 그런지 우선 떡을 들고서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린 다음에 두사람에게 떼어주고 있습니다(30b). 그것은 며칠 전 예수님이 예루살렘 마가의 다락방에서 유월절 만찬을 사도들과 함께 가지시면서 제정한 성찬식이(눅22:19) 엠마오 글로바의 집에서 처음으로 실시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순간 떡을 받아 먹는 글로바와 시므온의 영안이 열리고 있습니다(31a). 예수님의 대속의 은혜를 그 떡으로 받아서 씹어먹고 있으니 어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 고난의 땀과 눈물이 세속의 삶에 푹 절어 있는 죄인들의 마음을 돌이키지 아니할 수가 있겠습니까?;
7) 특히 예수님은 지난 세월을 글로바의 조카로 그리고 시므온의 종형으로 살아온 사람입니다. 지나간 세월의 기억이 되살아나면서 대속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예수가 이제는 생명의 주인이며 부활의 주님이 되셨다는 사실이 명확해지고 있습니다(31a). 그러나 그 순간 영생의 몸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두사람의 눈앞에서 자취를 감추고 맙니다(31b). 주님은 사라지고 없지만 두사람의 심령속에서는 예수님과 동행하면서 들었던 말씀이 이제는 살아서 역사하는 뜨거운 영적인 감동으로 되살아나고 있습니다(32절). 두사람은 이제 어찌해야 할까요?...
(3) “33. 곧 그 때로 일어나(비록 어두워지고 있는 시간이지만)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11 제자 및 그들과 함께 한 자들이 모여 있어(아마도 마가의 다락방인 것으로 보임, 눅22:12-13, 행1:13-15), 34.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보이셨다! 하는지라(12절, 그렇지만 요한복음에 의하면 사도 베드로와 요한이 함께 무덤으로 가서 확인한 결과임, 요20:2-9). 35. 두 사람(글로바와 시므온)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예수님의 부활의 증거가 더욱 풍성해진 것임. 훗날에는 영안으로 본 사도 바울의 간증도 나타나고 있음, 행9:4-5, 고전15:8)”(눅24:33-35);
1) 남의 경험을 이야기로 듣는 것과 자신의 체험을 이야기로 나누는 것과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전자는 간접경험이 되고 후자는 직접경험이므로 그만큼 마음속 확신에 있어서 차이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직접체험이 훨씬 중요한 것입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본문에서 볼 수 있듯이, 엠마오의 자기 집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과 만찬을 하다가 그가 축사하고서 떼어주는 떡을 받아 먹었던 글로바와 시므온은 참으로 신기한 체험을 하게 됩니다.
2) 집에 오는 도중에 길에서 부활한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었던 그것이 그 순간 영적인 떡으로 변하여 그들의 심령을 감동의 도가니로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32절). 예수님은 그 순간 사라지고 없지만(31b) 그들은 그 신기한 체험을 예수님의 제자들과 나누기 위하여 당장 예루살렘으로 달려가고 있습니다(33a). 어두워지고 있는 시간이지만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그곳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있던 사도들로부터 베드로가 확인한 결과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으로 믿어진다는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33b-34).
3) 그러나 두사람은 자신들의 체험이 더 확실합니다. 따라서 그 자리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난 체험을 간증하게 되는 것입니다(35절). 동일한 관점에서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무덤을 방문하였을 때 개인적으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다고 하는 간증을 다시 음미할 필요가 있습니다(막16:9-11, 요20:14-18). 그녀의 간증은 글로바와 시므온의 간증만큼이나 소중한 직접 체험의 신앙이며 예수님의 부활을 이 세상에 가장 먼저 알리고 있는 것입니다.
4) 참고로, 그 옛날 출애굽한 이스라엘 자손들이 시내 광야에서 두려움 가운데 시내 산 정상에 강림하시는 여호와의 모습을 짙은 구름 속에서 바라본 적이 있습니다(출19:16). 그때 비록 사람의 음성으로 말씀하고 계시지만 창조주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이 두렵기만 합니다. 만약 그 진면목을 보게 되면 당장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공포가 엄습하고 있습니다(신5:4-5a). 그때 백성들이 장로들을 최고지도자 모세에게 보내어 요청합니다. 부디 당신 혼자 시내산에 올라가서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하산하여 자신들에게 가르쳐달라는 것입니다(출20:18-19).
5) 그리하면 그대로 지키겠다는 철석 같은 약속입니다(신5:5b). 그렇지만 그들 백성들은 여호와를 만나 체험적인 직접신앙을 얻을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를 상실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여호와의 선지자로 거듭나는 귀한 기회를 상실한 채 모세가 전하여 주는 말씀을 율법으로 삼아 신정국가의 백성이 되어 살아갈 따름입니다. 그들은 직접 영적인 체험과 깨달음이 결여되어 있기에 율법의 준수가 무거운 짐으로 다가올 따름입니다. 그와 같은 간접신앙의 시대가 계속되었기에 이스라엘사회에서 여호와의 부름을 받아 선지자로서의 사명을 감당하는 자들이 극소수에 그치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히브리정경인 오경에서 모세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29. 모세가 그(시종인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네가 나를 두고 시기하느냐? 여호와께서 그의 영을 그의 모든 백성에게 주사 다 선지자가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민11:29).
모세의 그 소원이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성도들에게 이루어지게 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승천하기 전에 아버지께 요청하여 진리의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어주겠다고 제자들에게 약속하고 계십니다(눅24:49).
성도들의 심령속에 성령님이 내주하여 역사하시게 되면 영적인 직접체험과 깨달음의 시대가 새언약으로 이루어지게 됩니다(렘31:33, 요14:16-20, 롬8:1-4, 히9:15);
그와 같은 맥락에서 예수님의 빈 무덤만을 확인한 베드로보다 엠마오 집으로 가는 도중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나 그 말씀을 듣고 성찬식을 가진 글로바와 시므온이 더 행운아입니다. 그리고 여자로서는 막달라 마리아가 동일한 은혜를 누리고 있습니다.
오늘날 성찬식에 참여하면서 성도들이 보혜사 성령님의 내주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아 진리의 말씀에 대한 영적인 확신을 마음속에 얻고 있다는 것이 참으로 큰 새 언약 시대의 은혜입니다.
특히 성령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주님의 살아 계심을 언제나 증거하여 주십니다. 그러므로 진리의 보혜사 성령님의 깨달음의 은혜를 영적으로 누리고 있는 성도들은 그 옛날 글로바와 시므온 그리고 막달라 마리아와 같은 행운아들이라고 하겠습니다.
아무쪼록 그 영적인 은혜를 깨닫고 예수님의 생애와 교훈을 살아있는 능력의 말씀으로 직접 만나고 주님의 제자로 신실하게 끝까지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