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26년 설교문(손진길 목사)

“예수를 심문하고 희롱하는 분봉왕 헤롯과 정치적 타협으로 예수를 십자가형에 처하고 마는 빌라도 총독의 잘못된 선택”(눅23:1-25)(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4. 10. 22. 11:51

제목; “예수를 심문하고 희롱하는 분봉왕 헤롯과 정치적 타협으로 예수를 십자가형에 처하고 마는 빌라도 총독의 잘못된 선택”(23:1-25)

설교일; 주후 2025 2 23일 주일

작성자; 손진길 목사(24 10 22일 화요일 작성)

 

출애굽기의 하나님은 애굽제국의 압제에서 신음하고 있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해방하여 시내 광야에서 제사장나라 거룩한 백성으로 만들고자 모세를 호렙 산으로 불러 사명자로 세우고 그의 동족들이 살고 있는 애굽의 고센 땅으로 들여보냅니다. 그곳에서 모세는 친형 아론을 만나 그와 함께 애굽제국의 황제인 바로를 찾아갑니다.

바로를 만난 모세와 아론은 여호와의 명령을 그와 그의 신하들에게 전달하지만 그들은 완강하게 그 요구를 거절합니다.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하고 있는 이스라엘 자손들의 수호신에 불과한 여호와의 명령을 지배자인 그들이 따를 필요가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진노하신 여호와께서는 애굽인들에게 신위적인 10가지 재앙을 연이어 내리고 있습니다. 그 결과 유월절 밤에 마지막 10번째 재앙이 발생하고 있는데 그것이 유월절 어린양의 피가 그 대문에 발라져 있지 아니한 모든 애굽인들의 집에서 초상이 발생한 것입니다.

그동안 9차례 여호와의 재앙에도 불구하고 완강했던 바로와 신하들이 자신들의 장남과 가축의 초태생이 그날 밤에 한꺼번에 몰살당하는 대참사를 맞이하자 더 이상 여호와의 요구를 거절할 수가 없습니다. 이번에도 거절하게 되면 다음번에는 장남이 아니라 바로와 신하들 자신의 목숨이 도륙이 되고 말 것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바로와 신하들의 무조건 항복으로 모세와 아론은 이스라엘 자손들의 이끌고 애굽을 떠나 광야로 들어와서 일단 홍해 가에 머물고 있습니다. 그때 이스라엘 자손들을 잡아오기 위하여 추격한 바로의 군대가 접근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보자 홍해 가에서 여호와의 기적이 다시 발생합니다. 먼저 모세를 통하여 여호와는 홍해를 갈라지게 하고 이스라엘 자손들로 하여금 마른 바닷길을 걸어서 반대편으로 이동하게 합니다. 그 다음에는 추격하는 애굽의 군대가 홍해의 바닷길로 들어서자 모세로 하여금 바닷물을 합쳐지게 만들어 그들을 완전히 수장하고 맙니다.

그러한 우여곡절을 겪은 후 몇번의 시행착오를 거쳐서 마침내 이스라엘 자손들이 시내 광야에 들어서자 그때 여호와께서 시내 산 정상에 강림하시고 모세에게 율법을 주어 인류최초로 여호와를 왕으로 모시는 신정국가를 탄생시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기록하고 있는 출애굽기 제19장의 내용을 참조하면, 당시 이스라엘 자손을 자신의 백성으로 삼으면서 여호와께서는 그들을 제사장나라 거룩한 백성이 될 것이라고 그 포부를 밝히고 계십니다(19:4-6). 그러나 이스라엘의 역사를 살펴보면 여호와의 뜻을 선민들이 완전히 외면하고 끝까지 실천하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사실 구약인 히브리정경을 참조하면, 거룩한 백성은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뒤를 이어서 소돔과 고모라와 같이 여호와의 진노와 심판을 받게 되는 성읍과 그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중보의 기도를 드리는 거룩한 선지자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18:23-32). 그리고 회개하는 이방인들을 위하여 속죄의 제사를 여호와께 드리는 제사장나라의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20:7, 17, 42:7-10).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랑하고 있는 선민 이스라엘 자손들이 전혀 그들의 책무를 실행하지 아니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에 따라 여호와께서는 변방 갈릴리 출신의 선지자 요나를 억지로 회심하게 만들고 티크리스 강 상류에 자리잡고 있는 이방인 도시 니느웨로 보내어 40일내에 회개하지 아니하면 멸망을 당한다는 여호와의 말씀을 선포하게 합니다(2:9-3:4).

그 결과 놀랍게도 왕과 신하들 그리고 백성들이 모두 여호와 앞에 나아와서 회개를 합니다(3:5-8). 그것을 보고서 여호와는 멸망 대신에 구원을 베푸십니다(3:10). 그 광경을 보고서 선민출신인 선지자 요나는 마음이 상해서 고향으로 돌아가지 아니하고 니느웨 근교의 동산에서 머물고 있습니다(4:1-5). 왜냐하면, 다시 이방인인 니느웨 주민들이 여호와께 죄악을 범하고 결국 멸망을 당하는 모습을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고 싶기 때문입니다(4:5, 9-11).

어쨌든 선민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 억지로라도 이방도시에 여호와의 예언의 말씀을 전달한 유일한 선지자가 요나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선민 유대인들에게 그 사실을 명심하라고 2차례나 강조하고 있습니다(12:39-41, 16:4, 11:29-32).

이상에서 알 수 있는 사실이 둘입니다;

(1)  하나는, 그 옛날 여호와께서는 모세를 보내어 이스라엘 자손을 출애굽하게 하여 시내 산 아래에서 자신의 백성으로 삼고 제사장나라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가도록 했지만 그 사명을 선민들이 외면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2)  또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는 요나의 사건을 강조하면서 앞으로 제사장나라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가는 자를 선민 이방인 구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는다는 이른바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천국복음을 선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천국복음을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의 뜻이라고 선포하시는 예수님의 복음사역에 대하여 대제사장을 위시한 유대교지도자들의 태도는 차갑기만 합니다(7:30, 11:32, 20:14-26)

그 이유는 유대교의 기본이념이 출애굽 당시처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선민만 구원하고 이방인은 멸망시키며 메시아를 보내어 하나님의 능력으로 외세를 물리치고 선민의 제국을 건설하는 것인데 나사렛 예수의 사상은 그와 정반대이기 때문입니다(11:47-57).

그에 따라 결국 나사렛 예수는 스스로 전현직 대제사장이 보낸 체포조에게 붙들려 가서 심문을 당하고 산헤드린 대공회에서 정죄가 되고 맙니다(22:53-54, 66-71). 그들은 사형집행의 권한을 보유하고 있는 로마총독 본디오 빌라도에게 예수를 끌고가서 십자가 처형을 요구합니다(23:1-5, 20-25, 18:28-31).

빌라도 총독은 예루살렘과 유대지역 그리고 사마리아지역을 다스리고 있는 로마군정의 책임자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비록 해안가 가이샤라에 주둔하고 있지만 예루살렘을 비롯한 유대인사회 내부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고 있습니다. 그가 감찰한 정보에 의하면 나사렛 출신의 선지자 예수는 로마황제에게 반역할 생각이 조금도 없는 인물입니다(20:25);

왜냐하면, 예수는 선민 이방인 구별하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들이 여호와 앞에 죄인이므로 누구나 회개하고서 여호와를 섬기며 살아가야 한다고 만민구원사상을 외치고 있기 때문입니다(8:10-13). 게다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외세를 물리치고 선민의 나라를 건설하고자 하는 생각이 전혀 없는 인물입니다(5:44-48).

그와 같이 유대사회의 정보를 수집하여 분석하고 있는 빌라도 총독은 그의 신변을 교묘하게도 갈릴리의 분봉왕인 헤롯 안디바에게 인계합니다(23:6-7). 그 이유가 그럴듯합니다. 갈릴리 나사렛 출신인 예수를 헤롯왕이 심문하고 처리하는 것이 옳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고 싶지 아니한 것입니다(27:24).

헤롯 안디바가 나사렛 예수에게 몇가지 질문을 해보았지만 별다른 반응이 없습니다(23:8-9). 예수는 그 옛날 세례 요한과 같은 행동을 하지 않습니다. 헤롯왕이 율법을 위반했다고 질책하지 않는 것입니다(14:3-4). 그리고 유대인을 선동하여 헤롯왕가를 몰아내고자 하는 시도를 결코 하지 않습니다.

맥이 빠진 헤롯왕은 낡은 왕복을 하나 예수에게 걸쳐주고서 부하들을 시켜 그를 희롱한 다음에 다시 빌라도 총독에게 돌려보내고 맙니다(23:11). 공은 다시 로마총독 빌라도에게 넘어갑니다. 그는 어떻게 해서든지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고 싶지 않으며 교활한 유대교지도자들의 종교분쟁에 휘말리지 아니하려고 발버둥을 치게 됩니다.

따라서 그는 예수를 심문하면서 로마황제에게 역심을 품고 있는지를 묻고 있지 않습니다. 그저 자신의 호기심을 만족하고자 몇가지 질문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태형만 가하고 그를 풀어주고자 합니다(23:14-16). 그러나 유대교인들을 동원하여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아우성을 치고 있습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하여 달라는 요구입니다.

마지막으로 빌라도 총독이 선택하고 있는 해결방안이 바로 무장반란혐의로 구속되어 있는 바라바와 선지자 예수 가운데 한사람을 풀어줄 것이니 선택하라고 유대인들에게 물어보는 것입니다(27:15-18). 그의 생각으로는 속국의 백성인 유대인들이 감히 로마황제에게 반란을 획책한 바라바를 풀어달라고 요구하지는 아니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엄청난 부담을 감수하면서까지 대제사장과 유대교지도자들은 백성들을 동원하여 큰소리를 치고 있습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하고 그 대신 바라바를 석방하여 달라는 것입니다(23:18, 21, 27:20-21). 더구나 로마황제에게 대항하기 위하여 백성들을 선동하고 있는 예수를 두둔하게 되면 로마총독마저 역심을 품고 있다는 유대교지도자들의 주장에 그만 정치적인 타협을 하고 맙니다(19:12);

그는 주후 6년경 유대교지도자들의 호소로 로마황제가 예루살렘과 유다 그리고 사마리아지역을 다스리고 있던 헤롯 아켈라오를 폐위한 일이 있음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유대교지도자들과 반목하는 것은 로마총독의 입장에서도 바람직한 것이 아닙니다. 

그 결과 로마총독 빌라도는 선민 뿐만 아니라 헬라인과 로마인 등 모든 이방인까지 전부 회개하게 하고 영생으로 구원하겠다고 부르짖고 있는 선지자 예수를 로마황제에게 반역하는 주모자로 간주하여 십자가에 처형하는 판결을 행하고 맙니다(23:23-25).

그에 따라 그가 아무리 그 잘못된 판결의 책임을 유대교지도자들의 요청에 의하여 부득이 행한 것이라고 발뺌을 하더라도 그 책임에서 결코 지금까지 자유롭지가 못한 것입니다. 물론 모든 책임을 로마총독에게 돌리고 있는 교활한 유대교지도자들의 책임은 더욱 무겁습니다(27:25). 그 점을 예수님이 단 한마디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준 자의 죄는 더 크다 하시니라”(19:11b).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한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얻은 소중한 교훈과 메시지를 차제에 아울러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첫째로,1. (산헤드린 대공회에서 재판에 참여한 모든) 무리가 다 일어나 예수를 (18:31, 당시 사형집행권한을 보유하고 있는) 빌라도에게 끌고 가서, 2. 고발하여 이르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우리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하며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하더이다 하니(20:25절에 비추어보면 순전히 거짓말로 이루어진 고발사건임을 알 수 있음), 3. 빌라도가 예수께 물어 이르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 말이 옳도다(상당히 형식적인 심문과 답변으로 보임). 4. 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무리에게 이르되,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 죄가 없도다 하니(로마의 군정을 받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그들의 왕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반란의 계기가 됨. 그러나 빌라도 총독은 예수를 유대인의 왕으로 인정하지 아니하고 있으며 예수는 외세를 몰아낼 생각이 추호도 없는 만민구원사상의 주창자임을 자신의 정보수집에 의하여 사전에 너무나 잘 파악하고 있는 것임, 7:9, 20:25, 8:10-13, 5:43-48), 5. (유대교지도자들이 동원한) 무리가 더욱 강하게 말하되, 그가 온 유대에서 가르치고 갈릴리에서부터 시작하여 여기(예루살렘)까지 와서 백성을 소동하게 하나이다. 6. 빌라도가 듣고 그가 갈릴리 사람이냐? 물어, 7. (예수의 고향 나사렛이) 헤롯의 관할에 속한 줄을 알고 (갈릴리의 분봉 왕인) 헤롯(안디바)에게 보내니, 그때에(마침 유월절 기간이므로 유대교인헤롯이 예루살렘에 있더라. 8. 헤롯이 예수를 보고 매우 기뻐하니 이는 그의 소문을 들었으므로 보고자 한 지 오래였고(9:9), 또한 무엇이나 이적 행하심을 볼까 바랐던 연고러라(헤롯 안디바 역시 사전정보수집에 의하여 예수가 결코 헤롯왕가를 몰아낼 생각이 없는 인물임을 익히 파악하고 있는 것임). 9. 여러 말로 물으나 아무 말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14:10, 9:9, 세례 요한을 참형에 처한 그와는 별로 말하고 싶지 아니하신 예수님임), 10.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14:5, 10-12, 역시 사형집행권한을 보유하고 있는 헤롯왕을 방문하여 예수를 반란의 수괴로 만들어 처형하고자) 서서 힘써 고발하더라. 11. 헤롯이(유대교지도자들의 거짓고발에 전혀 흔들리지 아니하고) 그 군인들과 함께 (헤롯왕이) 예수를 업신여기며 희롱하고, 빛난 옷(붉은 색의 낡은 왕복)을 입혀 빌라도에게 도로 보내니, 12. 헤롯과 빌라도가 전에는 (속국의 백성 유대인들을 나누어서 다스리고 있기에 관할권 분쟁 등으로) 원수였으나(서로 사이가 좋지 아니하였으나) 당일에 서로 친구가 되니라(사전에 나사렛 예수에 대하여 철저하게 정보수집을 한 결과에 따라 서로의 입장이 같아진 것임)”(23:1-12); 다음과 같이 2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1. (산헤드린 대공회에서 재판에 참여한 모든) 무리가 다 일어나 예수를 (18:31, 당시 사형집행권한을 보유하고 있는) 빌라도에게 끌고 가서, 2. 고발하여 이르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우리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하며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하더이다 하니(20:25절에 비추어보면 순전히 거짓말로 이루어진 고발사건임을 알 수 있음), 3. 빌라도가 예수께 물어 이르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 말이 옳도다(상당히 형식적인 심문과 답변으로 보임). 4. 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무리에게 이르되,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 죄가 없도다 하니(로마의 군정을 받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그들의 왕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반란의 계기가 됨. 그러나 빌라도 총독은 예수를 유대인의 왕으로 인정하지 아니하고 있으며 예수는 외세를 몰아낼 생각이 추호도 없는 만민구원사상의 주창자임을 자신의 정보수집에 의하여 사전에 너무나 잘 파악하고 있는 것임, 7:9, 20:25, 8:10-13, 5:43-48), 5. (유대교지도자들이 동원한) 무리가 더욱 강하게 말하되, 그가 온 유대에서 가르치고 갈릴리에서부터 시작하여 여기(예루살렘)까지 와서 백성을 소동하게 하나이다. 6. 빌라도가 듣고 그가 갈릴리 사람이냐? 물어, 7. (예수의 고향 나사렛이) 헤롯의 관할에 속한 줄을 알고 (갈릴리의 분봉 왕인) 헤롯(안디바)에게 보내니, 그때에(마침 유월절 기간이므로 유대교인헤롯이 예루살렘에 있더라”(23:1-7);

1)   나사렛 예수가 주후 32 4월 유월절을 앞두고 나귀새끼를 타고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자 그를 환영하는 주민들과 순례객들의 환호소리가 너무나 큽니다(19:35-40). 선민 유대인들의 이목이 그에게 쏠리고 있습니다. 그것을 보고서 대제사장을 비롯한 산헤드린 대공회원들이 엄청난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가 주장하고 있는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천국복음이라는 것이 한마디로, 유대교지도자들이 주장하고 또한 유대교인인 백성들이 철석같이 믿고 있는 전통적인 선민만의 구원과 메시아에 의한 현세적인 선민의 제국의 건설이라는 유대교사상과 정반대이기 때문입니다.

2)   그에 따라 그들은 함께 모여서 논의에 논의를 거듭하고 있습니다. 그 의제는 당연히 예수를 조속히 체포하여 유대교를 해치는 이단으로 정죄하고 로마총독의 사형집행권한을 빌리기 위하여 그를 로마의 반역자로 만들어 깔끔하게 십자가에 처형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월절이 가까워질수록 국내외에서 더 많은 순례객들이 예루살렘으로 몰려들고 있습니다. 그들이 보고 있는 앞에서 화제의 인물 예수를 체포한다고 하는 것은 너무나 위험합니다. 큰 소동이 발생하고 폭동이라도 발생하게 되면 유대교지도자들의 신변이 위험할 것으로 판단이 되기 때문입니다.

3)   그 결과 그들은 유월절 순례객들이 예루살렘을 떠난 다음에 예수를 체포하고자 뜻을 모으고 있습니다(19:47-48, 14:1-2). 그런데 큰 변수가 갑자기 발생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신임을 크게 받고 있는 가룟 유다가 그들을 찾아와서 한밤중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홀로 기도하고 있는 예수를 지목하여 넘겨줄 것이니 자신을 유대교지도자들이 인정하는 선지자로 삼아 달라는 요구입니다(22:1-6). 개인적으로 볼 때, 가룟 유다는 자신의 출세와 입신양명을 위하여 3 6개월이나 모시던 스승을 배신하고 말을 갈아타려고 하는 배은망덕한 인간입니다. 그러나 그의 도움은 절실한 실정입니다.

4)   따라서 노회하고 교활한 대제사장과 장로들은 가룟 유다의 상상을 뛰어넘는 권모술수를 사용하고자 합니다. 그것은 일단 가룟 유다의 요구를 들어주는 척하면서 먼저 예수를 체포하여 전격적으로 대공회에서 정죄하고 곧바로 빌라도 총독에게 넘기는 것입니다. 군중을 동원하여 예수를 로마의 반역자로 만들어  십자가에 처형한 다음에는 자신들이 유다의 요구를 묵살하여도 아무런 뒤탈이 없다고 하는 기막힌 방안을 선택하고 있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을 위시한 유대교지도자들의 계책 그대로 일이 진행이 되자 가룟 유다는 그들로부터 배신을 당하고 맙니다. 절망에 빠진 그는 자살을 선택하고 마는 것입니다(27:3-8, 1:16-19).

5)   한편 산헤드린 대공회에서 일방적으로 나사렛 예수를 여호와모독죄로 정죄한 대제사장과 장로들은 그를 로마총독 빌라도에게 끌고가서 십자가 처형을 요구합니다(23:1, 21). 명분은 로마황제에 대한 반역을 도모하기 위하여 예수가 스스로 유대인의 왕이라고 참칭하면서 백성들을 선동하고 규합하였다는 것입니다(23:2). 특히 유대인들이 대거 집결하고 있는 유월절에 예루살렘에서 대규모 집회를 열고 있으므로 결코 좌시할 수가 없어서 그를 체포하여 끌고 왔으니 즉시 로마의 반역자에게 가하는 십자가처형을 선고하여 달라는 요청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생각보다 빌라도 총독은 훨씬 똑똑한 통치자입니다;

6)   비록 로마총독부가 로마시로 가기에 편리한 지중해 연안 가이샤라에 자리잡고 있다고 하지만(23:33) 평소에 빌라도는 많은 정탐꾼을 풀어서 예루살렘과 유대지방의 유대인의 움직임을 면밀하게 살피고 있는 부지런한 총독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정밀한 정보수집에 따라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천국복음을 전파하고 있는 나사렛 예수는 결코 외세를 몰아내고자 하는 인물이 아닙니다(20:25). 그는 만민의 평등과 평화공존을 주장하고 있으므로 반골인 유대교인들보다는 로마제국에 훨씬 이로운 사상가입니다. 그러므로 형식적으로 예수에게 진짜 유대인의 왕이 되고자 하느냐고 한차례 슬쩍 물어볼 따름입니다(23:3a);

7)   빌라도 총독은 그 대답에 무신경하게(3b) 자신이 보기에 예수는 혐의가 없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4). 그러나 대제사장을 위시한 장로들이 반발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혐의가 확실하기에 자신들이 그를 체포하여 로마총독에게 끌고 왔다는 것입니다(5a). 그러므로 갈릴리에서 활동한 내용과 이곳 예루살렘까지 들어와서 순례객들을 모아 집회를 하면서 로마의 군정을 반대한 내용을 전부 살펴서 그를 사형에 처해달라는 강력한 요구를 계속하고 있습니다(5b). 빌라도 총독으로서는 얼른 그 자리를 모면하고 싶습니다.

8)   빌라도의 귀에 그들이 항변하고 있는 내용 가운데 갈릴리지역이라는 말이 쏙 들어옵니다. 즉시 빌라도는 예수가 갈릴리출신인지 묻습니다(6). 나사렛에서 성장하였으니 당연히 갈릴리가 고향입니다. 그렇다면 관할권을 따져서 유월절을 맞이하여 예루살렘을 방문하고 있는 갈릴리의 분봉왕 헤롯 안디바에게 나사렛 출신 예수의 신변을 인도해버리면 그만입니다(7a&c). 헤롯왕 역시 갈릴리의 주민에 대해서는 사형집행권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총독 빌라도는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그것이 묘수입니다. 즉시 그렇게 예수를 예루살렘에 있는 헤롯의 거처로 보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7b).   

(2)  “8. 헤롯이 예수를 보고 매우 기뻐하니 이는 그의 소문을 들었으므로 보고자 한 지 오래였고(9:9), 또한 무엇이나 이적 행하심을 볼까 바랐던 연고러라(헤롯 안디바 역시 사전정보수집에 의하여 예수가 결코 헤롯왕가를 몰아낼 생각이 없는 인물임을 익히 파악하고 있는 것임). 9. 여러 말로 물으나 아무 말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14:10, 9:9, 세례 요한을 참형에 처한 그와는 별로 말하고 싶지 아니하신 예수님임), 10.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14:5, 10-12, 역시 사형집행권한을 보유하고 있는 헤롯왕을 방문하여 예수를 반란의 수괴로 만들어 처형하고자) 서서 힘써 고발하더라. 11. 헤롯이(유대교지도자들의 거짓고발에 전혀 흔들리지 아니하고) 그 군인들과 함께 (헤롯왕이) 예수를 업신여기며 희롱하고, 빛난 옷(붉은 색의 낡은 왕복)을 입혀 빌라도에게 도로 보내니, 12. 헤롯과 빌라도가 전에는 (속국의 백성 유대인들을 나누어서 다스리고 있기에 관할권 분쟁 등으로) 원수였으나(서로 사이가 좋지 아니하였으나) 당일에 서로 친구가 되니라(사전에 나사렛 예수에 대하여 철저하게 정보수집을 한 결과에 따라 서로의 입장이 같아진 것임)”(23:8-12);

1)   예수가 예루살렘에 있는 헤롯의 거처로 끌려오자 처음에 헤롯왕은 빌라도의 처분이 고맙습니다. 왜냐하면, 진작부터 나사렛 예수를 한번 만나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8a). 혹시 자신이 갈릴리의 감옥에서 죽여버린 세례 요한이 다시 살아난 것이 아닌가 그 점을 우려했기 때문입니다(9:9). 그러나 세월이 지나도 나사렛 예수는 세례 요한처럼 헤롯 안디바 자신에게 대들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2)   구체적으로 예수는 헤롯왕이 이복동생의 아내를 취한 일에 대하여 율법위반이라고 책망하는 일이 없습니다(14:3-4). 그에 따라 헤롯 안디바는 예수의 동향에 대하여 정보수집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그 결과 그는 나사렛 예수가 세례 요한과는 전혀 다른 사상을 지닌 선지자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예수의 능력은 세례 요한보다 월등합니다. 죽은 자를 살리는 하나님의 능력까지 보여주고 있다고 합니다.

3)   예수를 만난 김에 한번 그 점을 확인하고 싶어합니다(8b). 그에 따라 헤롯 안디바는 심문을 빙자하여 자신의 관심사를 질문합니다(9a). 그러나 예수는 들은 척 만 척입니다(9b). 그의 내심은 선지자 세례 요한을 참형에 처한 헤롯 안디바가 전혀 마음에 들지 아니하기 때문입니다. 헤롯왕은 예수로부터 모욕을 받은 것으로 여깁니다.

4)   따라서 헤롯 안디바는 로마에 반역하고 있는 예수를 처형하여 달라는 대제사장을 비롯한 바리새인 지도자들의 강력한 요구에 대하여(10) 일체 반응하지 아니하고 오로지 예수를 업신여기고 그를 희롱하는 일에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11a). 종래는 자신이 입다가 버리고 있는 낡은 왕복을 예수의 몸에 걸쳐주고서(11b) 자칭 유대인의 왕을 로마총독 빌라도가 처형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면서 자신의 호위군사들에게 예수를 끌고가서 빌라도 총독에게 넘기라고 명령하고 마는 것입니다(11c).

5)   요컨대, 교활한 여우와 같은 헤롯 안디바 역시 갈릴리 백성들의 민심을 얻고 있는 나사렛 예수를 자신의 손으로 처형하고 싶지 아니한 것입니다. 두사람은 유대인들이 살고 있는 지역을 양분하여 다스리고 있습니다. 한 산에 두 마리의 호랑이가 군림하고 있으니 자연히 이해충돌이 생기고 사이가 좋지 않습니다. 그러나 금번 예수를 재판하는데 있어서는 서로 핑퐁게임을 하면서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지 아니하고 싶어한다는 사실에 있어서는 두사람이 마치 동무처럼 닮아 있다고 하겠습니다(12).  

둘째로,13. 빌라도가 (예수를 심문한 결과 이제는 판결을 내리기 위하여 절차에 따라 원고인) 대제사장들과 (총독의 재판을 보좌하고 있는) 관리들과 (유대교지도자들을 비롯한) 백성을 불러 모으고, 14. 이르되 너희가 (피고인) 이 사람이 백성을 미혹하는 자라 하여 내게 끌고 왔도다. 보라 내가 너희 앞에서 심문하였으되 너희가 고발하는 일에 대하여 이 사람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고(혐의가 없다는 것임), 15. 헤롯이 또한 그렇게 하여 그를 우리에게 도로 보내었도다(헤롯왕의 재판결과도 그러하다는 것임). 보라 그가 행한 일에는 죽일 일이 없느니라. 16. 그러므로 때려서 놓겠노라(무혐의이면 무조건 석방해야 함.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형을 가하겠다는 것은 원고인 유대교지도자들의 입장을 완화하고자 하는 빌라도의 약은 속셈임). 17. (없음) 18. (27:15-18절의 기록에 따르면, 유대교명절에 로마총독은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사면령을 내리는 관례가 있음. 그 관례를 이용하여 빌라도가 예수를 석방하고자 약은 수를 사용함. 그 방법이 도저히 석방대상이 되지 못하는 죄수 곧 로마황제에 대한 반란의 주모자로 구금되어 있는 바라바를 들러리로 세운 것임. 그것은 일종의 위험한 도박임, 19) 무리가 일제히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을 없이하고 바라바를 우리에게 놓아 주소서 하니(그런데 빌라도 총독의 예상이 완전히 빗나가고 만 것임), 19.  바라바는 성중에서 일어난 민란과 살인으로 말미암아 옥에 갇힌 자러라. 20. 빌라도는 (하도 어이가 없어서 재차) 예수를 놓고자 하여 다시 그들에게 말하되, 21. 그들은 소리 질러 이르되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22. 빌라도가 세 번째 말하되,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나는 그에게서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나니 때려서 놓으리라 하니(자신의 판결을 고수하고자 하는 빌라도 총독의 마지막 노력임), 23. 그들이 큰 소리로 재촉하여 십자가에 못 박기를 구하니, 그들의 소리가 이긴지라(빌라도가 정치적인 타협을 하고 만 것임. 로마황제에게 반역한 바라바를 석방하는 자신의 잘못을 유대교지도자들이 눈감아 주는 대신에 죄가 없는 예수를 반역자로 조작하여 처형하는 책임을 유대교지도자들에게 돌린다는 것임, 27:24-26). 24. 이에 빌라도가 그들이 구하는 대로 하기를 언도하고(일단 정치적으로 타결이 되었기에 그 다음 일정은 일사천리임), 25. 그들이 요구하는 자 곧 민란과 살인으로 말미암아 옥에 갇힌 자(바라바)를 놓아 주고 예수는 넘겨 주어 그들의 뜻대로 (로마황제에게 반역한 자에게 적용하는 극형인 십자가에 처형)하게 하니라”(23:13-25); 다음과 같이 3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1)  13. 빌라도가 (예수를 심문한 결과 이제는 판결을 내리기 위하여 절차에 따라 원고인) 대제사장들과 (총독의 재판을 보좌하고 있는) 관리들과 (유대교지도자들을 비롯한) 백성을 불러 모으고, 14. 이르되 너희가 (피고인) 이 사람이 백성을 미혹하는 자라 하여 내게 끌고 왔도다. 보라 내가 너희 앞에서 심문하였으되 너희가 고발하는 일에 대하여 이 사람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고(혐의가 없다는 것임), 15. 헤롯이 또한 그렇게 하여 그를 우리에게 도로 보내었도다(헤롯왕의 재판결과도 그러하다는 것임). 보라 그가 행한 일에는 죽일 일이 없느니라. 16. 그러므로 때려서 놓겠노라(무혐의이면 무조건 석방해야 함.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형을 가하겠다는 것은 원고인 유대교지도자들의 입장을 완화하고자 하는 빌라도의 약은 속셈임). 17. (없음)”(23:13-17);

1)    예수님의 공생애 당시는 로마제국이 군정으로 유대인들을 다스리고 있는 시대입니다. 로마황제로부터 통치권을 위임 받고 있는 총독 빌라도가 정식으로 판결을 내리기 위하여 원고와 피고 쌍방을 재판정에 불러모으고 관리들로 하여금 기록하도록 조치하고 있습니다(13). 그 자리에서 엄숙하게 선언합니다. 피고를 심문한 결과 원고들이 주장하고 있는 혐의를 일체 발견할 수가 없으므로 석방조치를 취하겠다는 것입니다(14).

2)    더구나 예수가 갈릴리 출신이므로 갈릴리의 분봉왕 헤롯에게 먼저 판결하도록 요청한 결과 그의 결론도 그와 같다는 것입니다(15). 그렇지만 빌라도 총독은 원고측이 유대인들의 종교적 지도자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들의 체면을 생각하여 비록 무죄이지만 피고인 예수에게 태형을 가한 다음에 석방 조치할 것이라고 판결을 내리고 있습니다(16).

3)    그와 같이 정치적인 정상참작을 하고 있는 빌라도의 유약한 태도가 눈치 빠른 대제사장과 유대교지도자들에게 하나의 빌미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백성들을 많이 동원하고 빌라도의 약점을 찾아내어 일시에 강하게 밀어 부치면 자신들의 뜻을 이룰 수가 있다고 하는 판단입니다. 실제로 그 일이 그날 총독의 재판정에서 발생하게 됩니다.   

(2)  18. (27:15-18절의 기록에 따르면, 유대교명절에 로마총독은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사면령을 내리는 관례가 있음. 그 관례를 이용하여 빌라도가 예수를 석방하고자 약은 수를 사용함. 그 방법이 도저히 석방대상이 되지 못하는 죄수 곧 로마황제에 대한 반란의 주모자로 구금되어 있는 바라바를 들러리로 세운 것임. 그것은 일종의 위험한 도박임, 19) 무리가 일제히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을 없이하고 바라바를 우리에게 놓아 주소서 하니(그런데 빌라도 총독의 예상이 완전히 빗나가고 만 것임), 19.  바라바는 성중에서 일어난 민란과 살인으로 말미암아 옥에 갇힌 자러라. 20. 빌라도는 (하도 어이가 없어서 재차) 예수를 놓고자 하여 다시 그들에게 말하되, 21. 그들은 소리 질러 이르되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22. 빌라도가 세 번째 말하되,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나는 그에게서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나니 때려서 놓으리라 하니(자신의 판결을 고수하고자 하는 빌라도 총독의 마지막 노력임)”(23:18-22);

1)    17절의 내용이 생략된 채 제18절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제16절의 내용과 제18절의 내용 사이에 비약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16절에서는 총독 빌라도가 무혐의인 피고 예수를 곧바로 석방하지 아니하고 원고인 유대교지도자들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태형을 가한 다음에 풀어줄 것이라고 판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빌라도는 그의 뜻을 이루지 못합니다. 그 이유가 제17절에 기록되어 있지는 아니하지만 틀림없이 대제사장을 위시한 유대교지도자들이 백성들을 동원하여 한 목소리로 그 제안을 거절했기 때문입니다.

2)    그에 따라 빌라도는 유대인들이 도저히 예수의 석방에 동의하지 아니할 수 없는 묘안을 사용합니다. 그것이 바로 유대인들의 종교적 명절을 축하하기 위하여 로마총독이 죄인 한사람을 방면하는 관례인 것입니다. 이번에는 로마황제에게 반역한 죄인 바라바를 석방하는 것과 나사렛 예수를 석방하는 것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면 됩니다. 만약 유대인들이 반역죄로 수감중인 바라바의 석방을 원한다고 하면 그것은 로마황제에 대한 반역에 가담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와 같은 위험한 선택을 하지 아니할 것으로 빌라도 총독이 지레짐작하고서 그와 같은 제안을 하고 있습니다;

3)    그러나 그 제안이 마침내 빌라도의 발등을 찍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관례를 따른다고 하더라도 로마의 반역자를 석방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그 경우 로마총독도 황제에게 반역하는 무리로 간주가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일종의 도박과 같습니다. 아주 위험한 제안입니다. 그 허점을 노회한 대제사장을 위시한 유대교지도들이 파고들어서 감히 백성들을 동원하여 목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 “18. 무리가 일제히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을 없이하고 바라바를 우리에게 놓아 주소서 하니(그런데 빌라도 총독의 예상이 완전히 빗나가고 만 것임), 19.  바라바는 성중에서 일어난 민란과 살인으로 말미암아 옥에 갇힌 자러라”(23:18-19).

4)    예상이 완전히 빗나갔으며 빌라도의 꾀가 이제는 자신의 발목을 잡고 있습니다. 그는 그 올무를 벗어나기 위하여 한번 더 유대교지도자들의 의사를 타진하고 있습니다(20).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동일합니다(21). 마지막으로 빌라도 총독은 유대교지도자들의 선택이 실로 위험천만한 것임을 일깨워주면서 그들의 의견을 다시 묻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아는 대로 바라바는 로마황제에게 반역을 도모한 중죄인이다. 그의 석방을 소원한다고 하면 그것은 황제에 대한 반역의 죄를 나누어지겠다고 하는 의미이다. 그래도 좋겠는가? 내가 알기로 나사렛 예수는 전혀 로마황제에게 죄를 지은 적이 없다. 그러므로 너희들은 내가 태형만 가하고 예수를 석방해줄 것이니 그 쪽을 선택하는 것이 안전하다. 이제 어떻게 하겠는가?”(22절 의역);

(3)  23. 그들이 큰 소리로 재촉하여 십자가에 못 박기를 구하니, 그들의 소리가 이긴지라(빌라도가 정치적인 타협을 하고 만 것임. 로마황제에게 반역한 바라바를 석방하는 자신의 잘못을 유대교지도자들이 눈감아 주는 대신에 죄가 없는 예수를 반역자로 조작하여 처형하는 책임을 유대교지도자들에게 돌린다는 것임, 27:24-26). 24. 이에 빌라도가 그들이 구하는 대로 하기를 언도하고(일단 정치적으로 타결이 되었기에 그 다음 일정은 일사천리임), 25. 그들이 요구하는 자 곧 민란과 살인으로 말미암아 옥에 갇힌 자(바라바)를 놓아 주고 예수는 넘겨 주어 그들의 뜻대로 (로마황제에게 반역한 자에게 적용하는 극형인 십자가에 처형)하게 하니라”(23:23-25);

1)    의사 누가가 간단하게 유대인들의 목소리가 강경하기에 로마총독 빌라도가 자신의 의견을 철회한 것으로 제23절에 기록하고 곧바로 제24절에서 빌라도 총독이 유대교지도자들의 뜻을 따라 나사렛 예수에게 십자가처형을 언도한 것으로 적고 있습니다(23-24). 그러나 그것은 주후 26년부터 벌써 6년이나 유대총독으로 근무하고 있는 빌라도 총독의 정치적인 역량을 소홀하게 다룬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2)    군정의 최고책임자는 이민족을 힘으로 다스리는 통치자이므로 아무런 대책도 없이 무방비로 피지배 족속의 뜻에 굴복하여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않습니다. 반드시 무언가 양자사이에 주고 받는 것이 그 사이에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빌라도 총독이 유대교지도자들로부터 받고자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다소 위험하지만 바라바를 풀어주는 대신에 나사렛 예수를 그보다 더한 위험인물이라고 쌍방이 합의하여 당장 십자가에 처형하도록 빌라도가 최종언도를 하는 것입니다(25b).

3)    차제에 빌라도 총독은 두가지의 약속을 유대교지도자들로부터 더 받아내고 있습니다; 하나는, 바라바의 석방에 대해서는 그 소문이 로마시에 들어가지 아니하도록 대제사장을 위시한 유대교지도자들이 철저하게 함구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25a). 또 하나는, 무죄한 예수를 로마의 반역자인 유대의 왕으로 만들어 십자가에 처형한 모든 책임을 향후 유대교지도자들이 진다는 것입니다(27:25-26). 그 점을 확인하면서 빌라도 총독이 자신의 손을 씻고 있다고 하겠습니다(27:24).

4)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성도들이 암송하고 있는 사도신경에는 오직 예수님이 로마총독 빌라도에게서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처형이 되셨다는 내용만이 담겨 있습니다. 그 일을 야기한 당사자인 대제사장과 유대교지도자들의 잘못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습니다. 그것이 참으로 이상합니다. 그 이유는 아무래도 초대교회에서 유대주의자들이 사도신경을 만들어 널리 보급하였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물론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선민 유대인들의 헌신이 교회의 역사에 있어서 대단합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역사를 윤색하고 각색하는 것은 27:2519:11에 비추어 큰 죄악이라고 하겠습니다;

     

결론적으로, 선민만의 구원은 물론 하나님의 능력을 행사하여 외세를 물리치고 선민의 제국을 건설하여 주는 정치적 메시아를 달라고 여호와께 간구하는 선민 유대인들의 소원이 역사 가운데 과연 이루어지는 것일까요?...

유대교의 지도자들인 대제사장과 장로들은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천국복음이 여호와의 계시의 본질이라고 선민 유대인들에게 밝히고 있는 나사렛 예수만 해치우고 나면 자신들의 소원이 역사 가운데 성취가 될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엄청난 착각입니다. 유대교의 근간을 흔들고 있다고 생각하여 나사렛 예수를 로마총독의 사형집행권을 빌려서 십자가에 처형한 결과 38년후에 로마대군의 침입으로 유대교의 총본산인 예루살렘성전이 붕괴되고 선민 유대인 110만명이 희생되며 남은 자들이 전부 약속의 땅에서 쫓겨나고 만 것입니다.

만민평등과 평화공존을 주장하고 있는 예수를 처단하고 로마황제에게 반역한 무장투쟁노선의 지도자인 바라바를 선택한 결과 주후 60년대 후반에 그 영향으로 로마제국에 대한 유대인들의 반란이 발생합니다. 시리아총독이 그 지역에 주둔한 군단으로 진압에 나섰으나 성공하지 못합니다. 그 결과 로마의 대군이 진입하여 유대인사회를 멸망시키고 만 것입니다.

그 반면에 대속의 십자가에 자신을 속죄의 제물로 희생한 예수 그리스도의 천국복음은 예수가 무덤에서 영생의 몸으로 부활하자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부활의 신앙으로 무장한 사도와 제자들이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능력을 받아 하나님의 새역사를 온세상에 나아가서 증거하기를 시작한 것입니다(24:44-49, 1:8, 2:1-4).

그 결과 주후 324년에는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받아들여집니다. 오늘날에도 대속의 십자가에 자신을 속죄의 제물로 희생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서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천국복음을 땅끝까지 전파하고 있습니다(28:18-20).

그것은 세속적인 이익과 현세적인 소원성취에 찌들려 있는 인간을 구원하여 영생의 천국에 함께 들어가고자 하는 새 역사 창조의 방법론이며 여호와의 지혜를 담고 있는 유일한 구원론입니다.

그 이상의 세상구원의 방법론이 없습니다. 그 점을 확신하시고 아무쪼록 남은 인생을 주님의 제자로 힘있게 끝까지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모두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