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주님과 동행하는 인생의 충만함과 주님을 떠난 인생의 비참함”(눅22:35-71)
설교일; 주후 2025년 2월 16일 주일
작성자; 손진길 목사(24년 10월 18일 금요일 작성)
예수님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예루살렘 성안에서 수행제자인 12사도와 함께 유월절만찬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을 방문하면 예수님 일행은 성내에서 숙식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그날의 일정을 일찍 끝내고 해가 지기 전에 동문 밖으로 나가 감람산 남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가난한 동네 베다니 마을에서 민박하면서 숙식을 해결했습니다.
그것이 재정이 약한 그들에게 경제적으로 큰 도움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날 한밤중에 전현직 대제사장이 보낸 무리들에 의하여 불법적으로 체포를 당하게 될 자신의 운명을 뻔히 알고 계시는 예수님은 금번 유월절 양 잡는 날에는 그렇게 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날만은 베다니로 가지 아니하고 예루살렘 성내에서 유월절 만찬을 12사도와 함께 가지면서 여러가지 유언의 말을 남기고 싶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일에 강해설교를 통하여 말씀드린 누가복음 제22장 전반부의 내용 가운데 재정을 맡고 있는 가룟 유다의 배신은 물론 수제자로 불리고 있는 시몬 베드로가 새벽닭이 울기 전에 스승 예수를 모른다고 3번이나 부인하게 된다는 사실이 들어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성찬식(聖餐式, Communion Service)을 처음 실시하면서 이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대속의 희생의 의미를 반추하라고 말했습니다.
물론 제4복음서로 불리고 있는 요한복음에서는 유월절 만찬 도중에 예수님이 손수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세족식(洗足式, Maundy) 장면이 들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막내사도로 불리고 있는 요한이 주후 90년대초에 소아시아 에베소에서 옛날의 기억을 되살려서 공관복음에 빠진 내용을 그렇게 보완해 놓은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강해설교에 있어서는 다른 이슈 하나가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유월절 만찬자리에서 마지막으로 12사도에게 주고 있는 말씀이 그것인데 정확하게는 누가복음 제22장 제35-38절에 담겨 있는 내용입니다. 그 이슈는 사실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제32절의 내용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제32절을 참조하면, 예수님은 수행제자인 12사도의 믿음이 약해지지 아니하도록 언제나 기도해 주었으며 그 덕분에 사도들은 세상의 유혹과 시험을 이겨낼 수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유대교지도자들이 은밀하게 보내는 무리들에 의하여 예수님이 체포를 당하시고 새벽에는 산헤드린 대공회에서 정죄가 되며 로마총독의 협조로 아침에는 골고다로 끌려가서 십자가처형을 받게 될 운명입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은 무덤속에 들어가서 영생의 부활을 소망하며 잠을 자게 될 것입니다. 그에 따라 예수님이 영생의 몸으로 부활하여 다시 제자들을 찾아가는 그때까지 그들을 기도로 붙들어줄 수 없는 기간이 분명히 존재하게 됩니다. 그러한 시기에는 제자들이 어떻게 지내야 하는 것일까요?...
누가복음 제9장에서 예수님은 12사도가 스승을 떠나 갈릴리의 여러 마을에 흩어져서 독자적으로 복음사역을 할 수 있도록 필요한 조치를 취한 적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천국복음을 전파할 수 있는 권한과 병자와 장애자를 신위적으로 고치는 능력 그리고 귀신을 쫓아내는 축사의 권세까지 부여했으며 전도지역에서 물심양면의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제반조치를 사전에 취해준 것입니다.
그 모든 일들이 가능했던 이유는 예수님이 그들에게 권능을 위임하고 동시에 그들의 전도여행에 있어서 어려움이 없도록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로 요청하였기 때문입니다. 똑같은 전도자의 파송이 누가복음 제10장에서는 특별히 선발한 70인의 제자들을 대상으로 하여 사마리아지역에서 발생하고 있습니다.
2인1조가 되어 70명의 제자들이 동시에 35개의 마을에 들어가서 전도여행을 시작하게 되자 사마리아지역에서 큰 성과를 내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언제나 그들의 배후에서 기도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난 3년 6개월 동안의 복음전파를 위한 공생애와는 달리 이제는 스승인 예수님이 그들의 곁을 떠나야 합니다. 요컨대, 부활하여 그들을 다시 만나게 될 때까지는 기도의 뒷받침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스승 예수님이 무덤속에 들어가 있는 그 동안에는 그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요? 그 점에 대하여 예수님은 유월절 만찬자리에서 언급하고 계십니다; “생계를 유지하고 최소한의 자위권을 확보하기 위하여 필요한 조치를 취하고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나의 기도의 뒷받침이 없는 유일한 시간대가 바로 그 기간이기 때문입니다”(눅22:36-38).
예수님은 사도들을 위한 기도를 유월절 만찬이 끝난 다음 습관적으로 겟세마네 동산에 가셔서 계속하십니다(44-46절). 물론 그 기도 가운데는 대속의 십자가를 져야만 하는 예수님 자신을 돌보아달라는 간구가 들어 있습니다;
그 결과 십자가에 못박혀서 매달려 있는 그 극한의 고통스러운 시간이 예수님의 경우에는 단 6시간으로 엄청나게 경감되고 있습니다(막15:25, 34-37, 눅23:44-46). 참고로, 보통 십자가에 못이 박히면 사나흘 극도의 고통을 당하다가 운명한다고 알려지고 있습니다.
막상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한밤중에 체포를 당하시고 전임 대제사장 안나스의 저택으로 끌려가서 심문을 받게 되자(요18:13, 19-24) 그 집 뜰에서 불을 쪼이면서 상황을 주시하고 있던 베드로가 3번이나 스승을 모른다고 하면서 자기 목숨을 구하고자 얼른 도망치는 장면이 연출됩니다(눅22:56-60). 그 모습을 멀찍이 보고 있는 예수님은 자기가 직접 그를 돕지 못하고 있음이 안타깝습니다(눅22:61).
그 자리에서 스승 예수님이 아니 계시는 동안 시몬 베드로는 자신이 겪고 있는 그 비참함이 너무 슬프고 후회가 되어서 그 집을 벗어나자마자 골목길에서 대성통곡하고 있습니다(눅22:62). 그는 이제 다시는 예수님을 만나지 못할 것이라는 절망감에 빠져 있습니다. 사람은 죽임을 당하게 되면 모든 일이 허사가 되고 만다고 베드로가 철석같이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르십니다. 자신이 처형을 당하고 무덤속에 들어간다고 하더라도 창조주이시며 이 세상의 역사를 섭리하고 계시는 여호와 곧 아버지 하나님이 언제나 살아 계시기 때문입니다(출3:14-15). 창조주 여호와는 예수님이 천국복음을 전파하는 공생애를 끝내고 대속의 십자가를 진 다음에 무덤속에 들어가 있으면 반드시 부활의 영을 보내어 영생의 몸으로 그리스도를 되살려 내실 것입니다(롬8:11, 고전15:23, 44).
그때에는 유한한 몸을 가지고 시공간에 갇혀서 지내는 동안 예수님이 경험한 말할 수 없는 답답함과 참으로 불편한 생활들 곧 피조물에 대한 모든 금제가 영생의 몸으로 부활하게 하는 여호와의 새로운 창조로 전부 사라지게 됩니다. 달리 말하자면, 사람의 아들인 인자에 불과하였기에 공생애 기간동안 예수님이 마음껏 사도와 제자들을 돌볼 수 없었던 그 안타까움이 전부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인자(人子, son of man)인 예수님이 영생의 몸으로 부활하게 되면 독생자의 신원을 회복하여 성자 하나님(son of God)의 영광을 되찾고 이 세상 만민과 만물의 주인을 의미하는 주님이 되어 자신의 사도와 제자들을 찾아 나설 것입니다(요5:24-29, 마28:18-20, 눅22:28-30).
다시 만나 40일간 제자들을 천국복음과 부활의 증인으로 삼기 위하여 재교육할 것입니다(눅24:44-48). 그리고 주님은 자신이 승천한 다음에는 이미 약속한 그대로 진리의 보혜사 성령을 성도들에게 보내어 줄 것이며(눅24:49, 요14:16-18) 그 심령속에 성전을 마련하고 내주 역사하게 할 것입니다(행1:8, 2:1-4);
그러면 주님이 아버지 하나님을 모시고 그 성전에 역시 임재하여 영적으로 제자들과 동행하면서 지상명령을 실천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시게 되는 것입니다(요14:19-20, 고전6:19-20).
그 결과 삼위일체 하나님과 더불어 영적인 거듭난 삶을 살아가게 되는 성도들은 이 세상의 시험을 이기며 거룩한 하나님의 빛나는 자녀들이 될 뿐만 아니라 세상 끝까지 천국복음을 전파하여 많은 생명을 살려서 함께 새 예루살렘으로 입성하게 될 것입니다(롬8:14-39, 사66:20-21).
그와 같은 미래가 기다리고 있기에 예수님은 억울한 불법체포와 불법적인 심문 그리고 로마병사들의 모욕과 희롱을 전부 감내하시고(52-71절) 묵묵히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고 처형장으로 끌려가시는 것입니다.
그 길이 세상적으로 제자들이 생각하기에는 패배자의 길이지만 아버지 하나님의 역사섭리를 신뢰하고 있는 예수님의 눈에는 이 세상을 구원하는 승리의 좁은 길입니다.
그와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한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얻은 소중한 교훈과 메시지를 차제에 더불어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35. 그들(사도들)에게 (예수님이) 이르시되, 내가(예수님이) 너희를 전대와 배낭과 신발도 없이 보내었을 때에 부족한 것이 있더냐? 이르되, 없었나이다(사도와 제자들을 복음사역을 위한 전도자로 파송하면서 예수님이 그들을 위하여 아버지 하나님께 간구하였기에 전도여행에 있어서 불편함이 없었다는 것임, 32절). 36. 이르시되, 이제는(예수님이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고 무덤속에 들어가게 되면 제자들을 위하여 기도할 수가 없게 되므로) 전대 있는 자는 가질 것이요, 배낭도 그리하고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지어다(제자들은 스스로 생계를 돌보아야 하고 최소한 자신을 지킬 방도도 마련해야 할 것임). 37.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기록된 바 그는 불법자의 동류로 여김을 받았다 한 말이(사53:12) 내게 이루어져야 하리니(저주의 십자가를 지고 대속의 희생제물이 되는 것 곧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아 완전한 속죄양으로 죽임을 당하게 되는 것을 말함, 요1:29, 마27:45-46), 내게 관한 일이 이루어져 감이니라(대속의 십자가를 지기 위하여 오늘밤에 체포를 당하게 된다는 것임, 47-53절). 38. 그들이 여짜오되, 주여 보소서 여기 검 둘이 있나이다(평소 베드로와 야고보가 지니고 다닌 것으로 보임. 베드로는 스승 예수님을 지키려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칼로 체포조에게 대항하고 있음, 49-50절, 요18:10-11, 행12:1-2, 훗날 주후 44년경 예루살렘에서 사도 야고보가 칼을 빼어 헤롯 아그립바1세에게 저항하다가 살해당한 것으로 보임). 대답하시되, 족하다 하시니라(그 정도의 검만 있어도 최소한 자신들을 지킬 수가 있을 것으로 보신 것임. 이 세상에서는 최소한의 자위권을 보유하면 되는 것이지 최대한의 군비는 필요하지 않다는 의미와 같은 것임). 39. 예수께서 (집밖으로) 나가사 습관을 따라 감람 산에 가시매 제자들(수행제자인 사도들을 말함)도 따라갔더니(매일 밤 사도들을 데리고 산속으로 기도하러 가셨음을 의미함. 여기서는 겟세마네 동산임, 마26:36), 40. 그 곳에 이르러 그들에게(마26:37-38, 별도로 수행사도인 베드로와 야고보 형제를 데리고 더 진행한 다음에) 이르시되,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 하시고(이 세상의 시험을 이길 수 있도록 여호와께 기도하라는 것임, 눅11:5, 22:28), 41. 그들을 떠나 돌 던질 만큼 가서 (예수님 혼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 42.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아버지 하나님께서 동의하시면 극한의 고통을 주는 십자가 처형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대속의 희생을 치를 수 있게 해달라는 간구임).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매일 기도하였으나 번번이 인류의 패역함을 모두 청산하자면 극형인 십자가에서 속죄의 제사를 드릴 수밖에 없다는 결론임. 그 결론을 예수님이 마침내 받아들이신 것임), 43.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맞는 기도이므로) 천사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더하더라. 44.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십자가 처형이란 그만큼 두렵고도 무서운 것임. 그러므로 그 기도는 사력을 다한 것임). 45. 기도 후에 일어나 제자들에게 가서 (만찬자리에서 예수님의 유언을 들었으므로 그)슬픔으로 인하여 잠든 것을 보시고, 46. 이르시되,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하시니라(이제는 내가 대신 기도할 수가 없으므로 그 점을 알고서 스스로 기도에 힘쓰라는 당부임)”(눅22:35-46); 다음과 같이 3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35. 그들(사도들)에게 (예수님이) 이르시되, 내가(예수님이) 너희를 전대와 배낭과 신발도 없이 보내었을 때에 부족한 것이 있더냐? 이르되, 없었나이다(사도와 제자들을 복음사역을 위한 전도자로 파송하면서 예수님이 그들을 위하여 아버지 하나님께 간구하였기에 전도여행에 있어서 불편함이 없었다는 것임, 32절). 36. 이르시되, 이제는(예수님이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고 무덤속에 들어가게 되면 제자들을 위하여 기도할 수가 없게 되므로) 전대 있는 자는 가질 것이요, 배낭도 그리하고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지어다(제자들은 스스로 생계를 돌보아야 하고 최소한 자신을 지킬 방도도 마련해야 할 것임). 37.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기록된 바 그는 불법자의 동류로 여김을 받았다 한 말이(사53:12) 내게 이루어져야 하리니(저주의 십자가를 지고 대속의 희생제물이 되는 것 곧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아 완전한 속죄양으로 죽임을 당하게 되는 것을 말함, 요1:29, 마27:45-46), 내게 관한 일이 이루어져 감이니라(대속의 십자가를 지기 위하여 오늘밤에 체포를 당하게 된다는 것임, 47-53절). 38. 그들이 여짜오되, 주여 보소서 여기 검 둘이 있나이다(평소 베드로와 야고보가 지니고 다닌 것으로 보임. 베드로는 스승 예수님을 지키려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칼로 체포조에게 대항하고 있음, 49-50절, 요18:10-11, 행12:1-2, 훗날 주후 44년경 예루살렘에서 사도 야고보가 칼을 빼어 헤롯 아그립바1세에게 저항하다가 살해당한 것으로 보임). 대답하시되, 족하다 하시니라(그 정도의 검만 있어도 최소한 자신들을 지킬 수가 있을 것으로 보신 것임. 이 세상에서는 최소한의 자위권을 보유하면 되는 것이지 최대한의 군비는 필요하지 않다는 의미와 같은 것임)”(눅22:35-38);
1) 예수님은 유월절 만찬자리에서 사도들에게 마지막 유언의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그 내용이 지난 3년 6개월간 복음전파를 위한 전도여행을 하는 과정에 있어서 비록 풍족하지는 아니했지만 재정적으로 부족하지는 아니했다는 것입니다(35절). 예수님이 12사도와 함께 13명이 오랜 세월 복음사역을 하는데 있어서 필요한 것을 채워달라고 하는 기도를 아버지 하나님께 매일같이 드린 결과 긍정적인 응답을 받은 결과가 그러한 것입니다(눅9:3-4, 11:3, 22:32).
2) 그러나 이제는 문제가 발생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날 밤 예수님이 전현직 대제사장들이 보낸 무리에 의하여 체포를 당하시고 대공회에서 정죄가 되고 로마총독에 의하여 십자가처형이 결정되고 나면 한동안 12사도를 비롯한 여러 제자와는 완전히 헤어지기 때문입니다(37절). 무덤속에 들어가서 예수님이 제자들을 위하여 기도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아니 계시는 동안에 사도와 제자들은 어떠한 삶을 살아가야 할까요?...
3) 그에 대한 대비책을 예수님이 알기 쉽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제는(예수님이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고 무덤속에 들어가게 되면 제자들을 위하여 기도할 수가 없게 되므로) 전대 있는 자는 가질 것이요, 배낭도 그리하고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지어다(제자들은 스스로 생계를 돌보아야 하고 최소한 자신을 지킬 방도도 마련해야 할 것임)”(눅22:36). 요약해보면, 생계유지를 위하여 힘쓸 것이며 동시에 자신과 가족의 안전을 지키기 위하여 최소한의 군비를 갖추라는 것입니다;
4) 최소한의 자위권 행사를 위한 군비의 실제사례가 친절하게도 3명의 수행사도가 지니고 있는 검 2자루라고 말하고 있습니다(38절). 3명이 전부 검을 한자루씩 소지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실제로 예수님이 무덤속에 들어가 계신 기간은 이틀 밤에 불과합니다. 3일만에 영생의 몸으로 부활하셔서 사도와 제자들을 다시 찾아오시기 때문입니다(눅9:22). 그때에는 유한한 육신의 몸을 벗어버렸기에 자유자재로 시공간을 초월하여 그들을 찾아가서 직접 보살피고 돌볼 수가 있습니다.
5) 40일만에 승천하신 다음에도 별도의 조치가 취해지게 됩니다. 오순절에 진리의 보혜사 성령님이 먼저 강림하여 제자들에게 임재하여 내주 역사하시기 시작합니다(행2:1-4). 그 다음에는 성도들의 심령 속 성령의 전에 주님이 아버지 하나님을 모시고 오셔서 영적으로 내주 역사하시는 동행의 삶이 전개됩니다(요14:19-20, 고전6:19-20). 거듭난 성도들과 함께 삼위일체 하나님이 영적으로 동행하는 삶은 그 위력이 대단합니다(눅11:20). 구체적으로 사도 바울이 로마서 제8장 말미에서 상세하게 증언하고 있는 내용 그대로라고 하겠습니다(롬8:34-39).
(2) “39. 예수께서 (집밖으로) 나가사 습관을 따라 감람 산에 가시매 제자들(수행제자인 사도들을 말함)도 따라갔더니(매일 밤 사도들을 데리고 산속으로 기도하러 가셨음을 의미함. 여기서는 겟세마네 동산임, 마26:36), 40. 그곳에 이르러 그들에게(마26:37-38, 별도로 수행사도인 베드로와 야고보 형제를 데리고 더 진행한 다음에) 이르시되,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 하시고(이 세상의 시험을 이길 수 있도록 여호와께 기도하라는 것임, 눅11:5, 22:28), 41. 그들을 떠나 돌 던질 만큼 가서 (예수님 혼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 42.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아버지 하나님께서 동의하시면 극한의 고통을 주는 십자가 처형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대속의 희생을 치를 수 있게 해달라는 간구임).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매일 기도하였으나 번번이 인류의 패역함을 모두 청산하자면 극형인 십자가에서 속죄의 제사를 드릴 수밖에 없다는 결론임. 그 결론을 예수님이 마침내 받아들이신 것임), 43.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맞는 기도이므로) 천사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더하더라. 44.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십자가 처형이란 그만큼 두렵고도 무서운 것임. 그러므로 그 기도는 사력을 다한 것임)”(눅22:39-44);
1) 예수님 일행은 종교적 절기를 맞이하여 예루살렘을 방문하는 기간에는 동쪽 교외지역에 있는 감람산 남쪽 기슭의 베다니 마을에서 숙식을 해결합니다. 저녁식사를 한 다음에는 감람산 위로 올라갑니다. 예루살렘성이 멀리 보이는 산속 깊은 곳에 겟세마네 동산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2) 그곳에서 예수님이 일반사도들을 멀찍이 두고 베드로와 야고보 형제 등 수행사도 3명은 돌 던질 만큼 떨어진 가까운 위치에 배치한 후에 본인은 더 깊이 들어가서 혼자 기도에 전념하십니다(40-41절). 그러한 기도생활에 익숙한 예수님이 그날은 비록 예루살렘 성내에서 유월절 만찬을 가졌지만 그 다음 일정은 똑 같은 방법으로 진행하십니다.
3) 그날도 밤중에 기도하시기 위하여 사도들을 데리고 겟세마네 동산으로 행차하시는 것입니다(39절). 그날 한밤중에 배신자 가룟 유다가 체포조를 이끌고 그곳으로 다가올 것입니다(47-48절). 그 사실을 영안으로 벌써 보고 계시는 예수님이십니다(21-22절).
4) 그렇게 체포에 응하게 되면 예수님은 전직 대제사장의 불법심문을 받은 후에 산헤드린 대공회에서 정죄가 되고 전격적으로 로마총독부로 보내져서 사형에 처해질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따라서 그날 밤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예수님의 기도는 필사적입니다(44절).
5) 주요 기도내용이 두가지입니다; 하나는, 할 수만 있으면 극형인 십자가 처형이 아니라 다른 고통이 적은 방법으로 대속의 희생이 이루어지도록 배려를 해달라는 것입니다(42a). 그와 같은 기도는 오랜 세월 습관처럼 행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긍정적인 응답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6) 또 하나는, 인류의 패역함이 극심하여 극형인 십자가 대속이 아니면 효력이 없다고 하는 경우에는 십자가에 매달린 고통의 시간을 줄여달라고 하는 간구입니다(42b). 마침내 긍정적인 답변이 들려오고 있습니다. 실제로 보통 사나흘 십자가에 매달려서 모진 고통을 경험하게 되지만 예수님의 경우에는 단지 6시간으로 단축이 됩니다(막15:25, 33-37).
7)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못이 박히고 정오 12시에 흑암이 임하며 오후 3시에 운명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신만을 위한 기도만 하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을 위한 기도도 여호와께 드리고 있습니다. 자신이 무덤속에 들어가 있는 동안 제자들의 안위가 염려되기 때문입니다.
8) 기도를 마치고 마음의 결정이 완전히 이루어지자 피와 같은 땀이 흘러내리고 있습니다. 너무나 간절한 기도를 행하고 있기에 도중에 기력이 크게 소진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보고서 아버지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어 예수 그리스도에게 힘을 북돋우도록 조치하고 있습니다(43절).
(3) “45. 기도 후에 일어나 제자들에게 가서 (만찬자리에서 예수님의 유언을 들었으므로 그) 슬픔으로 인하여 잠든 것을 보시고, 46. 이르시되,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하시니라(이제는 내가 대신 기도할 수가 없으므로 그 점을 알고서 스스로 기도에 힘쓰라는 당부임)”(눅22:45-46);
1) 수행사도 3명은 비록 돌 던질 만큼 떨어진 위치에서 스승 예수님이 기도에 전념하고 계시지만 정신을 바짝 차리고 귀를 모은다면 그 절박한 호소를 어느 정도 알아들을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기도는 점점 절정으로 치닫고 있으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고 있습니다. 하루의 일과가 고단했던지 수행사도 3명은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그만 잠에 빠져들고 맙니다.
2) 그날 유월절 만찬자리에서 스승 예수님이 유언을 하시면서 밤중에 체포를 당하고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셨기에 수행사도 3인은 사실 큰 슬픔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죽임을 당하는 것은 예수님이시지 자신들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슬픔 가운데서도 깊은 잠에 빠지고 마는 것입니다. 기도를 끝내신 예수님이 다가와서 슬픔 가운데 역설적으로 꿀 잠에 빠져 있는 수행사도 3인의 모습을 애처롭게 바라봅니다(45절).
3) 자신이 아직 그들의 곁에 있는 동안에는 기도로 그들을 지켜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막상 무덤속에 들어가고 나면 부활의 시간까지는 공백입니다. 그 사이에 어떤 변을 당하지 아니하도록 그들이 정신을 차리고 직접 여호와께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당부의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46. 이르시되,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하시니라(이제는 내가 대신 기도할 수가 없으므로 그 점을 알고서 스스로 기도에 힘쓰라는 당부임)”(눅22:46);
둘째로, “47. (예수님께서 3명의 수행사도에게) 말씀하실 때에 한 무리가 오는데(요18:3, 어두운 밤 무장한 자들이 횃불을 든 채로 접근하여 오는데) 열둘(12사도)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라 하는 자가 그들을(전현직 대제사장이 보낸 체포조를) 앞장서(인솔하여) 와서, 48. 예수께 입을 맞추려고 가까이 하는지라(야밤중 기도시간을 빼먹고 그 대신에 가룟 유다는 자신의 출세를 위하여 예수를 유대교지도자에게 넘기고자 체포조를 이끌고 왔으며 이제는 꼭 집어서 그들에게 넘겨주고자 스승에게 키스하려고 하는 것임). 예수께서 (그의 속셈을 진작에 아시고) 이르시되,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 하시니, 49. 그의 주위 사람들이(3명의 수행사도가) 그 된 일을 보고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칼로 치리이까? 하고, 50. 그 중의 한 사람이(사도 베드로를 말함, 요18:10a) 대제사장의 종(그 이름이 말고임, 요18:10b)을 (칼로) 쳐 그 오른쪽 귀를 떨어뜨린지라. 51. 예수께서 일러 이르시되, 이것까지 참으라 하시고 그 귀를 만져 (신위적으로) 낫게 하시더라(그와 같은 하나님의 능력의 발휘를 보고서도 예수를 계속 체포하고자 하는 전직 대제사장 안나스의 심복들의 영적 무지가 대단한 것임, 마26:52-54). 52. 예수께서 그 잡으러 온 대제사장들과 성전의 경비대장들과 장로들에게(무장을 한 체포조의 뒤를 따라 전현직 대제사장과 유대교지도자들 그리고 대제사장의 심복인 경비대장들이 함께 온 것임. 그만큼 나사렛 예수의 체포는 그들의 숙원사업임) 이르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왔느냐?(그것으로도 하나님의 능력을 행하고 있는 그리스도를 잡지 못한다는 사실을 어찌하여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가? 라는 의미임) 53.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을 때에 (아버지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므로 감히) 내게 손을 대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제는 (내부적으로 나의 신임을 받고 있던 가룟 유다가 스승인 나를 너희들에게 팔아 넘겼으니, 아버지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내가 대속의 십자가를 져야 하는 시간이 임박하고 있구나! 그러므로) 너희 때요 어둠의 권세로다 하시더라. 54. 예수를 잡아 끌고 (전임) 대제사장 (유대교의 실세인 안나스, 요18:13-15)의 집으로 들어갈새, 베드로가 (체포를 면하고자) 멀찍이 따라가니라. 55. 사람들이 뜰 가운데 불을 피우고 함께 앉았는지라 베드로도 그 가운데 앉았더니, 56. 한 여종이 베드로의 불빛을 향하여 앉은 것을 보고 주목하여 이르되, 이 사람도 그(예수)와 함께 있었느니라 하니(무장한 체포조에 여종이 함께한 것이 아니므로 그녀는 말고의 이야기를 듣고서 그 인상착의에 비추어 어림잡아 베드로를 지목한 것으로 보임), 57. (힘이 약한 여종이 대충 짐작하여 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겁을 집어 먹은) 베드로가 부인하여 이르되, 이 여자여 내가 그(예수)를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첫번째 부인사건임). 58. 조금 후에 다른 사람이(아마도 체포조를 따라 그날 산속에 온 인물로 보임) 보고 이르되, 너도 그 도당이라 하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아 나는 아니로라 하더라(두번째로 예수님을 모른다고 한 것임). 59. 한 시간쯤 있다가 또 한 사람이 장담하여 이르되(요18:26, 말고의 친척이며 그날 체포조로 함께 행동한 인물임), 이는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60. 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아 나는 네가 하는 말을 알지 못하노라고 (마26:74, 이번에는 위기를 벗어나고자 시몬이 스승을 저주하고 맹세하면서) 아직 말하고 있을 때에 닭이 곧 울더라(마침내 예수님의 예언 그대로 3번 부인한 것임, 34절). 61. 주(예수)께서 (저택 회의실의 심문장소에서 잠시 창밖으로 몸을)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스승의 그 슬픔과 긍휼의 눈동자를 보자)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34절), 62. (급히 대문을 열고) 밖에 나가서 (골목길에서 혼자) 심히 통곡하니라”(눅22:47-62); 역시 3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1) “47. (예수님께서 3명의 수행사도에게) 말씀하실 때에 한 무리가 오는데(요18:3, 어두운 밤 무장한 자들이 횃불을 든 채로 접근하여 오는데) 열둘(12사도)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라 하는 자가 그들을(전현직 대제사장이 보낸 체포조를) 앞장서(인솔하여) 와서, 48. 예수께 입을 맞추려고 가까이 하는지라(야밤중 기도시간을 빼먹고 그 대신에 가룟 유다는 자신의 출세를 위하여 예수를 유대교지도자에게 넘기고자 체포조를 이끌고 왔으며 이제는 꼭 집어서 그들에게 넘겨주고자 스승에게 키스하려고 하는 것임). 예수께서 (그의 속셈을 진작에 아시고) 이르시되,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 하시니, 49. 그의 주위 사람들이(3명의 수행사도가) 그 된 일을 보고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칼로 치리이까? 하고, 50. 그 중의 한 사람이(사도 베드로를 말함, 요18:10a) 대제사장의 종(그 이름이 말고임, 요18:10b)을 (칼로) 쳐 그 오른쪽 귀를 떨어뜨린지라”(눅22:47-50);
1) 선민 유대인들의 성전이 있는 수도 예루살렘은 해발평균고도 780미터의 높은 산지입니다. 그 동쪽에 있는 감람산은 그보다 더 높아서 평균고도가 800미터나 됩니다. 감람산에는 4개의 봉우리가 있는데 그 중에 서편에 있는 것이 겟세마네 봉우리입니다. 그곳에서 한밤중에 하늘을 올려다보면 별들이 총총하고 주위는 고요하여 한마디로 적막 강산입니다(창15:5). 참으로 하늘을 우러러보고서 기도하기 좋은 장소입니다.
2) 참고로, 그곳에서 남동진하면 산중턱에 횡으로 자리잡고 있는 큰 마을 벳바게가 나타나고 더 남동진하면 남쪽 기슭에 작은 마을 베다니가 큰 길가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그 길은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으로 들어오는 길목이므로 길손들이 많이 왕래하고 있습니다. 특히 대표적인 소비도시가 예루살렘이므로 물가가 비쌉니다. 따라서 여행객들은 예루살렘에서 볼일을 보고 숙식은 실비로 가난한 동네 베다니에서 해결하고 있는 것입니다.
3) 여행객들이 한밤중에 등불과 횃불을 들고 무장을 한 채 겟세마네 봉우리에 올라오지는 않습니다. 더구나 그 봉우리 으슥한 곳에서 밤늦도록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는 예수님에게 접근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단번에 배신자 가룟 유다가 앞장서 끌고 오는 체포조임을 알아채고 있습니다(47절). 유다는 빙긋 웃으면서 스승 예수에게 접근하여 포옹하고 입을 맞춤으로써 여러 사도 가운데 그 자가 바로 나사렛 예수라는 사실을 체포조에게 알려주고자 합니다(48a);
4) 그 죽음의 키스를 예수님이 받기 전에 한 말씀하십니다;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 하시니”(눅22:48b).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룟 유다는 물러설 의사가 없습니다. 그 장면을 예수님 곁에서 지켜보던 수행사도 3명이 동시에 접근하는 유다를 막으면서(49a) 말합니다; “주여 우리가 칼로 치리이까? 하고”(49b). 그 말을 듣자 영리하고 눈치가 빠른 가룟 유다가 얼른 뒤쪽으로 물러나고 있습니다. 그 대신에 멋도 모르고 앞줄에 서있던 유대교 실세 안나스의 종인 말고가 공을 세우고자 예수님 쪽으로 다가옵니다.
5) 그 순간 언제 빼어 들었는지 베드로의 칼이 번쩍입니다. 일순간 말고의 오른쪽 귀가 잘려서 바닥에 떨어지고 맙니다(50절);
그 광경을 보고서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야단을 칩니다(51a, 마26:52). 그 내용이 과연 무엇일까요? 그리고 예수님은 사후처리를 어떻게 하고자 하시는 것일까요? 그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체포조를 모조리 해치워버릴까요? 아니면 대속의 십자가를 지기 위하여 순순히 오라를 받고자 할까요?...
(2) “51. 예수께서 일러 이르시되, 이것까지 참으라 하시고 그 귀를 만져 (신위적으로) 낫게 하시더라(그와 같은 하나님의 능력의 발휘를 보고서도 예수를 계속 체포하고자 하는 전직 대제사장 안나스의 심복들의 영적 무지가 대단한 것임, 마26:52-54). 52. 예수께서 그 잡으러 온 대제사장들과 성전의 경비대장들과 장로들에게(무장을 한 체포조의 뒤를 따라 전현직 대제사장과 유대교지도자들 그리고 대제사장의 심복인 경비대장들이 함께 온 것임. 그만큼 나사렛 예수의 체포는 그들의 숙원사업임) 이르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왔느냐?(그것으로도 하나님의 능력을 행하고 있는 그리스도를 잡지 못한다는 사실을 어찌하여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가? 라는 의미임) 53.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을 때에 (아버지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므로 감히) 내게 손을 대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제는 (내부적으로 나의 신임을 받고 있던 가룟 유다가 스승인 나를 너희들에게 팔아 넘겼으니, 아버지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내가 대속의 십자가를 져야 하는 시간이 임박하고 있구나! 그러므로) 너희 때요 어둠의 권세로다 하시더라”(눅22:51-53);
1) 예수님의 선택은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오로지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사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종인 예수님 자신의 안위와 이익을 위하여 사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와 같은 뜻이 마태복음 제26장 제52-54절에서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2) 첫째, “52.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는 말의 의미는 창조주 하나님의 뜻은 무력으로 성취하는 것이 아니다 라는 것입니다.
3) 둘째, “53.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12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는 말의 의미는 천군천사를 동원하여 적군을 쳐부수고 선민의 제국을 재건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영생의 천국을 이 세상에 임하게 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4) 셋째, “54.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하시더라”는 말의 의미는 대속의 십자가에 그리스도가 희생제물로 바쳐져야 비로소 패역한 죄인이 회개하고 아버지 하나님께 돌아가는 영생구원의 역사가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5) 따라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은 2가지 조치를 취하고 계십니다; 하나는, 말고의 귀를 안수하여 즉시 하나님의 능력으로 회복이 되도록 하십니다(51절). 그 광경을 보고 무장한 체포조는 너무 놀라고 예수님을 두려워하여 감히 그에게 손을 대지 못하고 있습니다.
6) 또 하나는, 무장한 체포조의 뒤를 따라온 유대교지도자들에게 예수님이 자신을 체포하여 가라고 말씀하십니다(52절과 53b). 그 이유는 그동안 아버지 하나님의 역사섭리로 감히 나에게 손을 대는 자가 없었지만(52b&53a) 이제는 나의 신변을 아버지께서 너희들에게 넘기기로 결정하셨다는 것입니다(53b). 그 일이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고 회개하는 모든 사람을 영생 구원하여 천국으로 인도하기 위한 방법인 것을 영안이 어두운 유대교지도자들이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습니다.
(3) “54. 예수를 잡아 끌고 (전임) 대제사장 (유대교의 실세인 안나스, 요18:13-15)의 집으로 들어갈새, 베드로가 (체포를 면하고자) 멀찍이 따라가니라. 55. 사람들이 뜰 가운데 불을 피우고 함께 앉았는지라 베드로도 그 가운데 앉았더니, 56. 한 여종이 베드로의 불빛을 향하여 앉은 것을 보고 주목하여 이르되, 이 사람도 그(예수)와 함께 있었느니라 하니(무장한 체포조에 여종이 함께한 것이 아니므로 그녀는 말고의 이야기를 듣고서 그 인상착의에 비추어 어림잡아 베드로를 지목한 것으로 보임), 57. (힘이 약한 여종이 대충 짐작하여 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겁을 집어 먹은) 베드로가 부인하여 이르되, 이 여자여 내가 그(예수)를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첫번째 부인사건임). 58. 조금 후에 다른 사람이(아마도 체포조를 따라 그날 산속에 온 인물로 보임) 보고 이르되, 너도 그 도당이라 하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아 나는 아니로라 하더라(두번째로 예수님을 모른다고 한 것임). 59. 한 시간쯤 있다가 또 한 사람이 장담하여 이르되(요18:26, 말고의 친척이며 그날 체포조로 함께 행동한 인물임), 이는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60. 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아 나는 네가 하는 말을 알지 못하노라고 (마26:74, 이번에는 위기를 벗어나고자 시몬이 스승을 저주하고 맹세하면서) 아직 말하고 있을 때에 닭이 곧 울더라(마침내 예수님의 예언 그대로 3번 부인한 것임, 34절). 61. 주(예수)께서 (저택 회의실의 심문장소에서 잠시 창밖으로 몸을)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스승의 그 슬픔과 긍휼의 눈동자를 보자)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34절), 62. (급히 대문을 열고) 밖에 나가서 (골목길에서 혼자) 심히 통곡하니라”(눅22:54-62);
1) 요한복음 제18장의 기록에 따르면, 그날 밤 전직 대제사장 안나스의 저택으로 끌려가시는 스승 예수님을 염려하여 그 집안으로 들어간 사도가 2명입니다. 사도 요한이 갈릴리의 유지이며 레위인인 부친 세베대가 유대교의 실세인 안나스와 알고 지내는 사이이므로 그 점을 이용하여 그 저택에 들어가면서 사도 베드로도 함께 데리고 들어갔습니다(요18:15-16).
2) 그러므로 요한은 시몬 베드로가 3번이나 스승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하는 장면을 목격한 자입니다(요18:17-18). 그러나 개인적으로 요한은 베드로와 친하기 때문에 그의 잘못을 드러내지 아니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시몬 베드로의 잘못이 4개 복음서에 공히 기록되고 있는 것일까요?(마26:69-75, 막14:66-72, 눅22:56-62, 요18:17-18, 25-27)
3) 그 이유는 베드로가 자신의 잘못을 철저하게 회개하면서 그것을 하나의 교훈으로 삼도록 초대교회에서 간증했을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이 정직하게 자신의 잘못을 성도들에게 고백할 수 있는 인물이 사도 베드로이기에 그가 회개한 이후 가장 먼저 예수님으로부터 목자로 임명을 받으며 교회의 반석이 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4) 시몬 베드로는 안나스의 저택에서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자 열심입니다(54절). 스승 예수님의 안위가 걱정되지만 그것 이상으로 자신의 신변도 염려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멀찍이 대문과 안채 사이에 있는 마당에서 화톳불을 쪼이면서 아주 조심스럽게 거실에서 심문을 받고 있는 예수님의 모습을 힐끗 쳐다보고 있을 따름입니다(55절).
5)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날 밤 그 집에서 3차례나 시몬 베드로의 인상착의를 알아보고 있는 자들의 증언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첫번째는 겟세마네 동산에 온 적이 없는 여종이 어림잡아 다른 사람에게서 베드로의 용모이야기를 듣고서 한마디 한 것입니다(56절). 그럼에도 베드로는 깜짝 놀라서 자신은 그 자가 아니라고 부인하고 있습니다(57절);
6) 두번째는 겟세마네 동산에 따라왔지만 멀리서 베드로를 바라본 적이 있는 종이 증언하고 있습니다(58a). 이번에는 시몬이 극구 부인하고 있습니다(58b). 세번째는 치명적입니다. 베드로가 칼로 쳐서 귀를 떨어뜨린 말고의 친척이 그 산속에서 그를 보았다고 증언한 것입니다(59절, 요18:26). 도리가 없어서 시몬은 예수를 저주하고 자신은 그의 제자가 아니라고 맹세를 함으로써 그 위기를 벗어나고 있습니다(60a, 마26:74).
7) 그렇지만 그 순간 새벽닭의 울음소리가 들려오고(60b) 안채에서 바깥 뜰로 고개를 돌려서 수제자 시몬 베드로를 바라보고 계시는 스승 예수님의 그 슬프고도 안타까운 눈을 그가 직면하게 됩니다(61절). 그 순간 베드로는 견딜 수가 없어서 얼른 그 저택을 벗어납니다. 그리고 어두운 골목에 숨어서 뜨거운 회개의 눈물을 흘리며 대성통곡하게 됩니다(62절);
셋째로, “63. (안나스의 하인 가운데 그날 밤 죄인을) 지키는 사람들이 예수를 희롱하고 때리며, 64. 그(예수)의 눈을 가리고 물어 이르되, 선지자 노릇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하고(진짜 선지자라면 누가 손을 대고 있는지 금방 알아 맞출 것이라고 희롱함), 65. 이 외에도 많은 말로 욕하더라(희롱에 그치지 아니하고 심한 욕설을 하면서 아예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모독하더라). 66. (요18:24, 안나스가 예수를 현임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보내고 가야바의 심문이 끝나자 그는 임시 대공회를 소집하여) 날이 새매 백성의 장로들 곧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성전에) 모여서 (종교재판을 실시하고자 피의자인) 예수를 그 공회로 끌어들여, 67. 이르되, 네가 (다윗의 자손으로서 선민의 제국을 건설하는 정치적 메시아 곧) 그리스도이거든 우리에게 말하라. 대답하시되, 내가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선민 뿐만 아니라 이방인까지 영생으로 구원하는 진정한 그리스도라고 나의 정체를) 말할지라도 너희가 믿지 아니할 것이요, 68. 내가 (너희들에게 회개하고서 이제는 여호와의 뜻인 천국복음을 믿겠느냐고) 물어도 너희가 대답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69. 그러나 이제부터는 인자가 (대속의 십자가에 자신을 속죄의 제물로 바친 후 무덤에서 영생의 몸으로 부활하고 승천하여)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어린양 그리스도의 보좌에 영원히) 앉아 있으리라 하시니(행2:32-36, 계5:13), 70. 다 이르되, 그러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대답하시되, 너희들이 내가 그라고 말하고 있느니라!(너희들의 말 그대로 자신이 여호와의 독생자임을 밝히고 있는 예수님의 진술임. 그에 따라 유대교지도자들은 나사렛 예수가 산술적으로 오로지 한 분 뿐이신 창조주 여호와를 모독한 참람한 죄인임을 지적하고 그것으로 확실하게 예수를 정죄하기에 이르고 있음) 71. 그들이 이르되, 어찌 더 증거를 요구하리요? 우리가 친히 그 입에서 들었노라 하더라”(눅22:63-71); 다음과 같이 2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1) “63. (안나스의 하인 가운데 그날 밤 죄인을) 지키는 사람들이 예수를 희롱하고 때리며, 64. 그(예수)의 눈을 가리고 물어 이르되, 선지자 노릇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하고(진짜 선지자라면 누가 손을 대고 있는지 금방 알아 맞출 것이라고 희롱함), 65. 이 외에도 많은 말로 욕하더라(희롱에 그치지 아니하고 심한 욕설을 하면서 아예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모독하더라). 66. (요18:24, 안나스가 예수를 현임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보내고 가야바의 심문이 끝나자 그는 임시 대공회를 소집하여) 날이 새매 백성의 장로들 곧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성전에) 모여서 (종교재판을 실시하고자 피의자인) 예수를 그 공회로 끌어들여, 67. 이르되, 네가 (다윗의 자손으로서 선민의 제국을 건설하는 정치적 메시아 곧) 그리스도이거든 우리에게 말하라. 대답하시되, 내가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선민 뿐만 아니라 이방인까지 영생으로 구원하는 진정한 그리스도라고 나의 정체를) 말할지라도 너희가 믿지 아니할 것이요”(눅22:63-67);
1) 패역한 인류를 전멸시키는 대신에 여호와의 독생자를 인자로 태어나게 하여 대속의 십자가에 속죄의 제물로 희생시키는 절차를 밟게 하자면 어떠한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일까요?... 그 점에 대하여 그 옛날 선지자 이사야가 정확하게 예언하고 있습니다.
2) 그 내용이 다음과 같습니다; “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8.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을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사53:7-8).
3) 풀이를 해보자면, 여호와의 존귀한 독생자가 피조물인 인간으로 태어나 인자로 살아가는 불이익을 당했으며 종교지도자로부터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마침내 속죄의 제물인 가축의 취급을 받아 죽음을 맞이하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예언이 한치의 오차도 없이 본문에서 다음과 같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4) 첫째, 전직 대제사장 안나스의 종에 불과한 자들이 함부로 예수님을 희롱하고 또한 모욕합니다(63-65절). 둘째, 유대교의 실세인 안나스가 자신의 심복과 종들을 보내어 예수를 체포하고 자신의 저택으로 끌고 와서 불법심문을 합니다(54절과 61절). 그리고 자신의 수하를 시켜 예수를 실컷 모욕하고 희롱한 다음에 현임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그 신변을 인도하게 합니다(요18:24).
5) 셋째, 가야바는 새벽에 전격적으로 산헤드린 대공회를 소집하여 간단하게 나사렛 예수를 정죄하고자 합니다(66절);
넷째, 예수가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천국복음을 전파하고 있다는 사실이 유대교지도자들이 바라고 있는 선민 유대인만의 구원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외세를 물리치고 선민의 제국을 건설하는 주는 메시아사상과 다르다고 하여 그를 처벌할 수는 없습니다(67절).
6) 그 대신에 예수가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십계명을 어기고 있는 패역이며 여호와에 대한 신성모독죄이므로 처벌이 가능합니다(69절). 따라서 그것으로 예수를 정죄하고 재빨리 종교재판을 마치고 있습니다(71절). 남은 절차는 사형집행권한을 보유하고 있는 로마총독에게 압력을 가하여 예수를 사형에 처하면 됩니다(눅23:21-25, 요18:31). 그날 아침에는 그 일로 인하여 대제사장과 유대교지도자들이 아주 분주합니다(요18:28);
(2) “68. 내가 (너희들에게 회개하고서 이제는 여호와의 뜻인 천국복음을 믿겠느냐고) 물어도 너희가 대답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69. 그러나 이제부터는 인자가 (대속의 십자가에 자신을 속죄의 제물로 바친 후 무덤에서 영생의 몸으로 부활하고 승천하여)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어린양 그리스도의 보좌에 영원히) 앉아 있으리라 하시니(행2:32-36, 계5:13), 70. 다 이르되, 그러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대답하시되, 너희들이 내가 그라고 말하고 있느니라!(너희들의 말 그대로 자신이 여호와의 독생자임을 밝히고 있는 예수님의 진술임. 그에 따라 유대교지도자들은 나사렛 예수가 산술적으로 오로지 한 분 뿐이신 창조주 여호와를 모독한 참람한 죄인임을 지적하고 그것으로 확실하게 예수를 정죄하기에 이르고 있음) 71. 그들이 이르되, 어찌 더 증거를 요구하리요? 우리가 친히 그 입에서 들었노라 하더라”(눅22:68-71);
1) 예수님이 특별히 반어법(反語法, 상대방에게 거꾸로 되묻는 대화의 방법)을 사용한 경우는 지극히 중요한 믿음의 문제를 가르쳐 주는 경우입니다. 그 좋은 선례가 베다니에서 오라버니 나사로의 초상을 치르고 있는 마르다에게 구원주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그 영혼이 사망에서 생명으로 벌써 옮겨졌다는 사실을 밝히며 그와 같은 영생의 부활신앙을 당장 믿으라고 가르쳐 주신 경우입니다(요11:26, 5:24).
2) 그와 같은 맥락에서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유대교지도자들에게 한가지 사실을 확인하고 싶어 하십니다. 그것은 여호와의 말씀을 선민만 구원을 받으며 선민의 제국을 건설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메시아를 보내주시는 것으로 왜곡하고 잘못 믿은 사실을 회개하고서 이제는 여호와의 뜻인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천국복음을 믿겠느냐?고 차제에 그들에게 질문하고 싶다는 것입니다(68a).
3) 그러나 집단이기주의 신앙에 빠져 있으며 선민만의 구원사상을 교리화하고 있는 유대교지도자들은 완강하게 예수님이 전파하고 있는 만민구원의 천국복음을 배척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태도에 전혀 변화가 없습니다(68b). 그 사실을 확실하게 알고 계시는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자신의 안위를 돌보지 아니하시고 진리를 밝혀 주십니다.
4) 그 내용을 간추려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너희들이 나를 배척하여 처형하고 나면 대반전이 발생할 것이다. 대속의 십자가에 나 자신을 속죄의 제물로 바치는 것이기에 아버지 하나님이 나를 영생의 몸으로 부활하게 하여 만민구원 영생구원이 여호와의 뜻임을 증거할 것이다. 나는 승천하여 아버지 하나님의 우편의 보좌에 앉아서 영원히 이 세상을 심판할 것이다”(69절 의역).
5) 그 말을 듣자 유대교지도자들은 예수님에게 오직 한가지 사실만을 확인합니다; “그러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70a). 그들은 “너희들이 말하는 내용 그대로이다”(70b 의역)는 예수님의 답변을 듣자 만족합니다. 그 대답으로 넉넉하게 예수를 유일한 산술적인 한 분 여호와를 모독하고 감히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참칭한 그 잘못을 신성모독과 참람죄로 정죄할 수가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71절). 그로 인하여 전격적으로 새벽에 열린 종교재판이 순식간에 끝나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두가지 사실을 지적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는, 창조주 여호와의 말씀의 뜻을 천국복음으로 풀이하여 알기 쉽게 백성들에게 전하면서 하나님의 능력을 발휘하여 사람들의 모든 병과 장애를 고치며 귀신을 쫓아내는 나사렛 예수를 유대교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수하인 무장세력을 보내어 충분히 체포할 수가 있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창조주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우습게 여기고 있는 피조물의 엄청난 교만이며 착각입니다(마26:53-54).
또 하나는, 아버지 하나님의 천국복음 곧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새 역사를 열겠다고 예수님이 스스로 유대교지도자들에게 자신의 신변을 넘기고 있습니다(눅22:53). 그렇게 이상한 일이 발생하게 되면 당연히 머리가 좋은 서기관들과 랍비들은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같이 예수가 어리석은 선택을 하고 있다고 여기고 맙니다.
그들은 나사렛 예수만 대공회에서 정죄하고 로마총독의 힘을 빌려서 십자가에 처형하고 나면 유대교의 근간을 흔드는 위협요인은 제거가 되고 그들에 대한 선민 유대인들의 존경은 변함이 없을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위대한 착각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이 세상에 보내신 창조주 여호와가 여전히 살아 계시며 대반전의 역사를 준비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구체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이 헛되지 아니하여 대속의 십자가를 바라보고서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회개하는 모든 사람에게 죄사함과 칭의의 은혜를 줄 수 있는 확실한 속죄의 제사로 여호와께서 삼고 마시는 것입니다(행2:32-42).
그리고 무덤에서 3일만에 예수님을 영생의 몸으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장차 부활의 새역사가 성도들 모두에게 찾아오게 되는 것입니다(고전15:20-26). 아무쪼록 그와 같은 놀라운 하나님의 지혜가 대속의 십자가와 무덤 속 부활사건에 숨어 있다는 사실을 밝히 보는 저와 여러분들이 모두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살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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