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예수님을 만난 세관장 삭개오의 회개와 은 10므나의 비유”(눅19:1-27)
설교일; 주후 2025년 1월 5일 주일
작성자; 손진길 목사(24년 10월 1일 국군의 날 목요일 작성)
흔히 사회적인 정의(justice)의 구현과 창조주 하나님의 공의(righteousness)를 실천하는 것을 같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엄연히 다른 개념입니다. 그 차이를 간략하게 설명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첫째, 사회적인 정의(justice)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 만든 법정에서 옳다고 판정이 되면 성립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국가나 사회는 공익을 확보하기 위하여 입법을 하고 국가의 법률과 지역사회의 규범에 맞으면 사법부에서 재판을 거쳐서 옳다는 것으로 판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만든 법률과 사법제도는 그 국가나 사회의 집단 이기적인 성격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해관계가 다른 나라와 사회에 대하여 적대적인 것으로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성경에서 그 예를 들어보자면, 선민으로 자처하고 있는 이스라엘이 이웃 주변국의 백성들을 이방인이라고 부르면서 멸시하고 적대시한 것과 같습니다.
(2) 둘째, 창조주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의 생명을 전부 살리고자 하며 똑같이 돌보고자 하십니다. 그것이 여호와의 공의(righteousness)의 정신이며 예수 그리스도가 실천하고자 한 아가페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선민 유대인사회에서 예수님이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이라는 천국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하자 그것이 큰 문제를 야기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선민 유대인들의 사회정의와 상반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경전을 해석할 때에 전통적으로 유대인들은 창조주 여호와가 선민인 자신들에게는 구원의 축복을, 그 반면에 자신들을 괴롭히고 있는 주변의 이방인들에게는 진노와 멸망의 역사를 섭리하시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마5:43). 그런데 창조주 여호와가 선지자들을 통하여 주신 말씀의 본래의 뜻이 그것이 아니라고 나사렛 예수가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으니(마5:44-49, 11:27) 그가 선민 유대인의 집단적인 이익을 해치고 있는 민족반역자인 것입니다(요11:47-53).
(3) 셋째, 공관복음을 저술하고 있는 사도 마태와 의사 누가의 관점이 언뜻 보기에는 좀 다른 것 같습니다. 그 점을 마태복음 제25장에 기록된 ‘달란트 비유’(마25:14-30)와 누가복음 제19장 오늘의 본문에 기록되고 있는 ‘므나의 비유’(눅19:11-27)가 다르다는 사실에서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주인이 자신의 재물을 종에게 맡기고 있는데 달란트의 경우에는 그 능력에 따라 5달란트, 2달란트, 1달란트로 차별적으로 맡깁니다(마25:15). 므나의 경우에는 주인이 10명의 종들에게 똑같이 1므나씩 맡깁니다(눅19:13). 어느 편이 더 창조주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을 구현하고 있는 것일까요? 달란트가 아니고 므나인 것으로 보입니다;
1) 그런데 달란트의 경우를 더 들여다보면 그렇게 차이 나게 재물을 맡기고 있지만 결산을 할 때에는 같은 원칙을 하나 적용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5달란트 맡은 종에게는 5달란트의 이익을 남겼기에 칭찬을 하고 2달란트 맡은 종에게는 2달란트의 이문을 남겼기에 똑같이 칭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마25:20-23). 결국 종들이 그 능력에 있어서는 다르지만 그 결과에 있어서는 갑절의 성취만 이룩하면 그것으로 주인이 만족한다는 의미입니다.
2) 따라서 오늘의 본문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두가지를 말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는, 여호와의 종인 사람의 가치에 있어서는 ‘므나의 비유’를 적용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제3복음서의 저자인 누가가 의사이기에 사람의 생명의 가치를 동등하게 보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3) 또 하나는, 마태는 가버나움 세관에서 일하던 관리였습니다. 그는 조직사회에 익숙한 인물입니다. 따라서 조직의 계급구조에 맞게 달란트의 배분이 차이가 나지만 주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동일한 비율의 충성심입니다. 요컨대, 결산을 할 때에는 달란트를 차이 나게 맡은 종이나 공평하게 므나를 맡은 종이나 전혀 주님의 차별이 없다는 것입니다. 다만 더 큰 이익을 남긴 종에 대해서는 그에 알맞게 더 큰 능력을 발휘하도록 사후조치를 취하고 있을 따름입니다(마25:21, 23, 28-29, 눅19:17, 19, 24-26).
오늘의 본문에서는 ‘므나의 비유’보다 먼저 여리고의 세관장인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나서 회개한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의사 누가는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기 전에 여리고에서 삭개오를 만나 그의 회심과 놀라운 결단의 이야기를 들은 것을 무척 기뻐하신 것으로 생각하여 그와 같이 독점기사를 수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도대체 삭개오의 회심과 결단의 이야기 가운데 무엇이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그토록 흡족하게 만들고 있는 것일까요? 여기서는 간단하게 두가지만 먼저 지적하여 두고자 합니다;
(1) 하나는, 세관장 삭개오가 주위 백성들의 위협에 굴하지 아니하고 예수님의 한마디에 즉시 나무에서 내려와 주님을 자신의 집으로 모시고 있다는 것입니다(눅19:6). 이미 여러 번 강해설교를 통하여 말씀드리고 있지만 예수님 당시의 세관원들에 대하여 선민 유대인들은 그들을 매국노로 여기고 또한 율법상 백성의 재물을 착취하고 있는 죄인들이라고 치부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 세관원들이 관세를 거두어서 전부 로마황제에게 바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높은 관세를 매겨서 예루살렘의 물가를 부채질하는 한편 그 일부를 착복하고 있다고 유대인들이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 그러한 실정이므로 유대 땅에서 가장 큰 여리고 세관에서 총책임자로 근무하고 있는 세관장 삭개오에 대한 원성이 대단합니다. 그가 거리에서 주민들의 눈에 뜨이기만 하면 신체의 위협을 받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삭개오는 높은 나무에 올라가서 넓은 잎들 사이에 몸을 숨겨서 매우 조심스럽게 예수님의 모습을 내려다 본 것입니다. 감히 여리고 주민들이 무리 지어 있는 현장으로는 너무 위험하여 접근할 생각을 못하고 있습니다;
2) 그런데 예수님이 나무위를 쳐다보시면서 넓은 잎들과 무성한 가지들 사이에 얼굴을 숨기고 있는 삭개오 자신의 두 눈을 직시하고 있습니다. 그 순간 삭개오는 훗날 사도 베드로가 전직 대제사장 안나스의 저택 뜰에서 은밀한 예수님의 시선을 직면한 것과 같은 충격을 받고 있습니다(눅22:61). 그 동정의 눈빛에서 자신이 세상사람들의 판단과 눈치만을 보면서 지금까지 겁쟁이로 잘못 살아오고 있다는 사실을 확연하게 깨닫고 있습니다.
3) 사도 베드로의 경우에는 골목길에 몰래 숨어서 혼자 회개하며 통곡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삭개오의 경우에는 그와 다릅니다. 그는 이제 예수님의 눈만 의식하면서 그를 자신의 집으로 모시고자 합니다(창17:1, 39:9).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 제자로 한번 살아보고자 결심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사람들의 눈치를 보지 아니하고 담대하게 그 앞에 나서고 있는 것입니다.
(2) 또 하나는, 예수님을 모신 자리에서 삭개오가 아주 획기적인 회개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만일 착취한 것이 있으면 율법에서 정하고 있는 갑절의 배상이 아니라 아예 4배로 갚겠다는 선언입니다. 일찍이 부자관리에게서 듣지 못한 그 대답을(눅18:22) 예수님은 여리고의 세관장 삭개오의 입에서 그날 생생하게 듣고 있습니다(눅19:8). 그런 삭개오의 결심과 확실한 대답을 듣고서 예수님은 대속의 십자가가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으로 입성하게 되었으니 그것이 참으로 기쁜 일입니다. 그 심정을 헤아려서 의사 누가가 본문 제19장 전반부에 삭개오의 회개와 그 결단의 이야기를 가장 먼저 독점적으로 수록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1-10절).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한 구절 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얻은 소중한 교훈과 메시지를 더불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첫째로, “1.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 (성안 큰 거리를) 지나가시더라(혹은 신 여리고와 구 여리고로 나누어지는 경우 하나의 성읍을 이미 지나고 그 다음 성읍으로 들어선 경우임). 2.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유대인이) 있으니 (유대 땅에서 가장 규모가 큰 여리고 세관의 책임자인) 세리장이요 또한 (눅19:8, 녹봉이 높아서 상당한) 부자라. 3.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의사 누가가 점잖게 표현하고 있음. 사실은 주민들 앞에 함부로 나서게 되면 세관장 삭개오는 매국노이며 죄인 취급을 받아 돌팔매를 맞기 쉬운 것임), 4.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예전에 뽕나무로 잘못 번역이 되었으나 지금은 돌무화과나무라고 제대로 번역되어 있음. 흔히 시카모 단풍나무, Sycamore Maple, 라고 불리고 있으며 가로수로 사용하고 있음. 역시 플라타너스 나무와 비슷하기에 키가 크고 무성하여 넓은 잎을 가진 경우도 있음. 삭개오가 사람들을 피하여 은신한 것으로 보아 잎이 넓은 시카모 나무로 보임)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머리가 좋은 삭개오가 사전에 계획한 대로 무사히 그 잎이 무성하고 튼튼한 가로수 높은 나무에 올라가서 풍성한 넓은 잎들과 무성한 나뭇가지 사이에 몸을 숨기고 멀리 큰 길거리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임). 5. 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사 쳐다 보시고(마치 주님이 베드로의 눈을 쳐다보듯이 그렇게 눈을 마주치시고, 눅22:61)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주님의 부르심이 새로운 삶을 갈구하고 있는 삭개오의 정신과 몸을 순식간에 지배하게 됨), 6. (삭개오가 나무에서)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7.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가버나움 세관원 레위를 부른 경우와 같음, 눅5:30). 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눅18:22, 부자관리에게서 보지 못한 대단한 결단임),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4갑절이나 갚겠나이다(출22:9, 일반적으로 율법에서는 갑절의 배상임. 그러나 삭개오는 4배로 배상하겠다고 말함). 9.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삭개오의 회개로 그 가족 모두에게 주님의 구원의 은혜가 임하고 있음),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예수 그리스도가 믿음의 열조인 아브라함의 여호와신앙을 보여주고 있는 세관장 삭개오의 회개와 놀라운 결단을 칭찬하심). 10.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세관장 삭개오의 회개와 결단에 만족하신 예수님이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예루살렘 입성을 다시 한번 다짐하심)”(눅19:1-10); 다음과 같이 3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1.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 (성안 큰 거리를) 지나가시더라(혹은 신 여리고와 구 여리고로 나누어지는 경우 하나의 성읍을 이미 지나고 그 다음 성읍으로 들어선 경우임). 2.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유대인이) 있으니 (유대 땅에서 가장 규모가 큰 여리고 세관의 책임자인) 세리장이요 또한 (눅19:8, 녹봉이 높아서 상당한) 부자라. 3.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의사 누가가 점잖게 표현하고 있음. 사실은 주민들 앞에 함부로 나서게 되면 세관장 삭개오는 매국노이며 죄인 취급을 받아 돌팔매를 맞기 쉬운 것임), 4.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예전에 뽕나무로 잘못 번역이 되었으나 지금은 돌무화과나무라고 제대로 번역되어 있음. 흔히 시카모 단풍나무, Sycamore Maple, 라고 불리고 있으며 가로수로 사용하고 있음. 역시 플라타너스 나무와 비슷하기에 키가 크고 무성하여 넓은 잎을 가진 경우도 있음. 삭개오가 사람들을 피하여 은신한 것으로 보아 잎이 넓은 시카모 나무로 보임)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머리가 좋은 삭개오가 사전에 계획한 대로 무사히 그 잎이 무성하고 튼튼한 가로수 높은 나무에 올라가서 풍성한 넓은 잎들과 무성한 나뭇가지 사이에 몸을 숨기고 멀리 큰 길거리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임)”(눅19:1-4);
1) 다른 복음서에는 그 기록이 없는데 유독 누가복음에서만 수록되어 있는 여리고 세관장 삭개오의 회심 이야기입니다. 그 이유를 누가복음 첫머리에서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1. 우리 중에(유대인사회에서) 이루어진 사실(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교훈)에 대하여, 2. 처음부터 목격자(직접 현장을 본 증인)와 말씀의 일꾼 된 자(예수님을 수행한 제자)들이 (이야기를) 전하여 준 그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출신과 복음사역의 공생애에 대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마가와 사도 마태 등) 많은지라. 3.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예수님의 생애와 교훈에 대하여 처음부터 부활 승천의 그날까지 전부 다시 파악하고자 저자 자신이 발로 뛰었음을 말하고 있는 대목임) 데오빌로(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라는 별명임. 그러므로 은밀한 로마의 정보수집의 총책임자이거나 아니면 초대교회의 성도들을 그와 같이 부르고 있는 것임) 각하에게 차례대로(체계적으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4. 이는 각하가 알고 있는 바(예수 그리스도의 천국복음에 대한 믿음)를 더 확실하게 하려(더욱 견고하게 만들어주려고, 롬1:11) 함이로다”(눅1:1-4);
2) 요컨대, 제3복음서의 저자인 의사 누가는 정보를 수집하여 상대방에게 제공할 때에 특이하게 2가지 방법을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는, 남의 이야기만 듣고서 편하게 정보를 수집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진실인지 확인하기 위하여 반드시 현지를 방문하여 발로 뛰면서 입체적으로 취재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직접 현장에서 수집한 정보들을 분석하면서 일의 자초지종이 체계적으로 이해가 될 때에 비로소 기록하여 그 보고서를 제출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야 그 보고서를 읽는 자들에게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을 더욱 확실하게 확증하여 주는 유익함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특징이 있기 때문에 의사 누가는 보기에 따라서 르뽀 작가 같기도 하고 혹은 과학자와 같은 인물입니다.
3) 신약 서신서의 기록을 살펴보면 그러한 특징을 진하게 보이고 있는 인물이 또 한사람 있습니다. 그가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18. 그후 3년만에 내가 게바(사도 베드로를 말함, 요1:42)를 방문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그와 함께 15일을 머무는 동안, 19. 주(예수 그리스도)의 형제 야고보(마13:56) 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노라(다른 사도들이 벌써 복음전파를 위하여 예루살렘을 떠나간 것임)”(갈1:18-19), “1. 십 사 년 후에 내(사도 바울)가 (후속사도인)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나니”(갈2:1). 그가 예루살렘을 2차례 방문하는 동안 무려 16년 이상의 세월이 지나고 있습니다. 그 긴 세월 그는 주님의 행적과 교훈을 추적하면서 그것을 랍비였던 그가 정통하고 있는 히브리경전의 내용과 비교 검토하여 천국복음에 대한 체계적인 이해를 얻기에 진력하고 있습니다.
4) 그와 같은 엄청난 추구와 노력이 함께하고 있기에 사도 베드로가 사도 바울의 천국복음에 대한 해박한 지식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말을 성도들에게 남기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의 내용에 관하여 모르는 것이 있으면 최종적으로 사도 바울에게 문의하여 보세요. 그도 모르는 내용이라고 말한다면 더 이상 사사로이 풀려고 애를 쓰지 마세요. 잘못하면 복음에서 빗나간 주장을 하게 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벧후3:14-17 의역). 그러한 특징을 사도 바울에 이어서 의사 누가에게서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제3복음서와 사도행전의 저자를 사도 바울의 수제자로 볼 수 있는 의사 누가라고 흔히들 말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배경설명을 하면서 이제부터 의사 누가가 독점적으로 수집하여 그의 복음서에 기록하고 있는 삭개오의 회심내용을 다음과 같이 한번 체계적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5) 첫째, 요단 강을 따라서 계곡길로 남하하다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 위하여 길을 잡는 경우 반드시 여리고 성읍을 들리도록 되어 있습니다(1절);
둘째, 유대 땅에서 가장 큰 소비도시가 예루살렘입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막대한 물량을 여리고 세관에서 검사하고 관세를 거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관세수입을 모조리 로마황제에게 바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관원들이 황제에게 충성한다고 관세를 많이 부과하게 되면 예루살렘의 물가가 상승합니다. 그 때문에 예루살렘의 주민들과 종교지도자들은 세관원들을 민족 반역자이며 동족의 고혈을 빨고 있는 죄인들이라고 비난하고 있습니다. 셋째, 그 모든 욕을 가장 많이 먹고 있는 인물이 평생을 세관원으로 살아온 여리고 세관의 총책임자인 삭개오입니다(2절).
6) 그가 유대인들이 모여 있는 장소를 방문하는 것은 굉장히 위험합니다. 눈에 띄기만 하면 돌팔매를 당하게 되고 목숨이 위험하기 때문입니다. 넷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갈릴리 출신의 큰 선지자이며 메시아로 불리고 있는 나사렛 예수가 예루살렘을 방문하기 위하여 여리고 성읍을 지나가는 그 광경만은 꼭 보고 싶어합니다(3절). 많은 무리들이 예수를 에워싸면서 큰 길을 지나갈 것인데 어떻게 하면 백성들의 눈에 뜨이지 아니하고 그를 볼 수가 있을까요? 다섯째, 머리가 좋은 삭개오가 발견한 것은 잎과 가지가 무성한 가로수인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서 그 광경을 멀찍이 내려다보는 것입니다(4절);
그가 상당한 위험을 감수하면서 그러한 계책을 마련하고 또한 실행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한번 자신의 눈으로 봄으로써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계기를 찾으려고 하는지도 모릅니다.
(2) “5. 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사 쳐다 보시고(마치 주님이 베드로의 눈을 쳐다보듯이 그렇게 눈을 마주치시고, 눅22:61)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주님의 부르심이 새로운 삶을 갈구하고 있는 삭개오의 정신과 몸을 순식간에 지배하게 됨), 6. (삭개오가 나무에서)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7.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가버나움 세관원 레위를 부른 경우와 같음, 눅5:30)”(눅19:5-7);
1) 요한복음 제5장의 기록에 의하면 두번째로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들리신 예수님이 베데스다 못 가에서 천사에 의하여 그 물이 움직이기를 기다리고 있는 수많은 병자와 장애자 가운데 오직 38년된 환자 한사람만 고쳐 주십니다(요5:5-9). 그와 마찬가지로 여리고 성내에서 큰 거리를 지나가는 동안에는 오로지 돌무화과나무에 숨어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세관장 삭개오만을 쳐다보시고 그의 집을 방문하여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주고자 하십니다(5절). 그 이유는 38년된 환자와 같이 삭개오가 그리스도를 만나 새로운 인생을 살아보고 싶다는 내적인 욕구가 간절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사람의 중심을 보시는 주님의 안목이라고 하겠습니다(삼상16:7).
2) 그런데 삭개오와 같은 간절함과 주님과 같은 영적인 안목이 없는 선민 유대인들이 문제입니다. 그들은 히브리경전을 오로지 율법의 의를 이루는 것으로만 해석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매국노이며 죄인인 세관장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서 식사대접을 받게 된 예수님 일행을 비난하기에 바쁩니다(7절). 그것은 그 옛날 가버나움 세관에서 일하던 레위를 제자로 부르시고 그 집에서 식사하신 예수님에게 퍼부었던 그 비난이 다시 나타난 것입니다(눅5:30). 그렇지만 잃어버린 양과 같은 죄인을 찾기 위하여 이 세상에 만민구원의 천국복음을 가지고 나타나신 예수님은 삭개오에게 회개를 종용하기 위하여 그의 집에서 식사를 함께하면서 내심 그의 회심을 기다리고 계시는 것입니다(6절).
(3) “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눅18:22, 부자관리에게서 보지 못한 대단한 결단임),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4갑절이나 갚겠나이다(출22:9, 일반적으로 율법에서는 갑절의 배상임. 그러나 삭개오는 4배로 배상하겠다고 말함). 9.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삭개오의 회개로 그 가족 모두에게 주님의 구원의 은혜가 임하고 있음),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예수 그리스도가 믿음의 열조인 아브라함의 여호와신앙을 보여주고 있는 세관장 삭개오의 회개와 놀라운 결단을 칭찬하심). 10.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세관장 삭개오의 회개와 결단에 만족하신 예수님이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예루살렘 입성을 다시 한번 다짐하심)”(눅19:8-10);
1) 사람의 중심을 보시고 계시는(삼상16:7) 주님의 영적인 안목이 틀림없습니다(요1:18). 동족들에게 욕을 먹고 있는 세관원의 일을 그만 두고 달리 의미 있는 인생을 한번 살아보고 싶어하는 삭개오의 마음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말미암아 이제 하나의 놀라운 결단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내용이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일에 기부하겠다는 것입니다(8a). 그리고 정말 자신이 동족의 것을 착취한 것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을 4배로 갚겠다고 하는 결심을 밝히고 있습니다(8b). 그것은 말로만 회심을 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이 뒷받침하고 있는 확실한 회개입니다;
2) 한마디로, 먼저 유대 땅에서 만난 유대인들의 존경을 받고 있는 부자관리가 결행하지 못한 제자의 길을(눅18:22-23) 유대인들의 비난을 받고 있는 세관장 삭개오가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눅19:8). 그 광경을 바라보시면서 예수님의 마음이 얼마나 흡족한지 모릅니다. 죄인으로 불리고 있는 삭개오의 회심과 결단이 더욱 왕성하게 이 세상에 나타날 수 있도록 자신이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여 대속의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야 하겠다는 결심이 새로워지고 있는 것입니다(10절). 따라서 그 자리에서 삭개오와 같은 마음을 지니고 있는 그의 가족들에게 아버지 하나님의 구원의 놀라운 은혜가 임하고 있음을 선포하고 있습니다(9a). 그리고 앞으로 아브라함의 믿음을 계승하여 살아가는 성도가 될 것이라고 축복의 말씀을 덧붙이고 있습니다(9b).
둘째로, “11.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있을 때에 비유를 더하여 말씀하시니, 이는 자기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고, 그들은(선민 유대인은 물론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 사도와 제자들을 포함하고 있음)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함이더라(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외세를 물리치고 당장 다윗의 제국을 재건하는 것으로 여기고 있는 것임). 12. 이르시되,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로 갈 때에(그러나 예수님이 가시는 길은 그와 정반대임. 하나님의 나라는 현세적인 선민의 제국이 아니라 만민이 회개하고 영생의 구원을 받아 들어가게 되는 천국을 말하고 있으므로, 예수 그리스도가 예루살렘에서 대속의 십자가에 자신을 희생하고 3일만에 영생의 몸으로 부활하여 승천하게 되면 사도와 제자들에게 진리의 보혜사 성령님이 임재하여 지상명령을 실천하는 목자의 삶이 시작되는 것임, 눅24:44-49, 행1:8), 13. 그 종 열을 불러 은화 열 므나를 주며 이르되, 내가 돌아올 때까지 장사하라 하니라(천국복음의 말씀을 전파할 수 있는 능력과 온갖 병자와 장애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축사의 권세까지 파송을 받는 자들에게 동등하게 부여할 것임, 눅9:1-2, 10:1-3, 9). 14. 그런데 그 백성(선민 유대인들)이 그를(예수 그리스도를) 미워하여 사자를 뒤로 보내어 이르되,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의 왕 됨을 원하지 아니하나이다(다른 메시아를 보내어 달라고 계속 여호와께 기도한 것임) 하였더라. 15. 귀인이 왕위를 받아가지고 돌아와서(승천하신 주님의 재림을 의미함, 살전4:16-18), 은화를 준 종들이 각각 어떻게 장사하였는지를 알고자 하여 그들을 부르니(무덤에서 불러서라도 반드시 결산을 한다는 것임, 요5:24-29), 16. 그 첫째가(첫번째 부류에 속하는 종이) 나아와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의 한 므나로(원금을 종자돈으로 삼아) 열 므나를(놀랍게도 10배의 이문을) 남겼나이다. 17.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천국에서 받는 면류관을 의미하고 있음, 눅22:28-30) 하고, 18. 그 둘째가(두번째 부류에 속하는 종이)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의 한 므나로 다섯 므나를 만들었나이다. 19. 주인이 그에게도 이르되 너도 다섯 고을을 차지하라 하고(첫째와 둘째 사이에 차별이 없음. 충성한만큼 그 열매의 크기에 비례하여 면류관을 받는 것임)”(눅19:11-19); 다음과 같이 2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1) “11.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있을 때에 비유를 더하여 말씀하시니, 이는 자기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고, 그들은(선민 유대인은 물론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 사도와 제자들을 포함하고 있음)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함이더라(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외세를 물리치고 당장 다윗의 제국을 재건하는 것으로 여기고 있는 것임). 12. 이르시되,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로 갈 때에(그러나 예수님이 가시는 길은 그와 정반대임. 하나님의 나라는 현세적인 선민의 제국이 아니라 만민이 회개하고 영생의 구원을 받아 들어가게 되는 천국을 말하고 있으므로, 예수 그리스도가 예루살렘에서 대속의 십자가에 자신을 희생하고 3일만에 영생의 몸으로 부활하여 승천하게 되면 사도와 제자들에게 진리의 보혜사 성령님이 임재하여 지상명령을 실천하는 목자의 삶이 시작되는 것임, 눅24:44-49, 행1:8), 13. 그 종 열을 불러 은화 열 므나를 주며 이르되, 내가 돌아올 때까지 장사하라 하니라(천국복음의 말씀을 전파할 수 있는 능력과 온갖 병자와 장애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축사의 권세까지 파송을 받는 자들에게 동등하게 부여할 것임, 눅9:1-2, 10:1-3, 9). 14. 그런데 그 백성(선민 유대인들)이 그를(예수 그리스도를) 미워하여 사자를 뒤로 보내어 이르되,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의 왕 됨을 원하지 아니하나이다(다른 메시아를 보내어 달라고 계속 여호와께 기도한 것임) 하였더라”(눅19:11-14);
1) 주후 60년대초에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이 나타나 초대교회에 회람이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제25장에는 ‘달란트 비유’가 수록되어 있고 누가복음 제19장에는 ‘므나의 비유’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가지 비유의 주요한 차이점에 대해서는 모두(冒頭, 글의 앞머리)에서 벌써 상세하게 말씀을 드렸기에 여기서는 생략하겠습니다. 다만 한가지 공통점과 또다른 한가지 차이점만을 보완적으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2) 첫째, 그 공통점은 주인이 재산을 여러 종들에게 나누어 맡기고 먼 훗날 결산을 하겠다고 말하면서 타국으로 떠나고 있다는 것입니다(마25:14, 19, 눅19:12-13, 15). 둘째, 두 복음서는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것은 마태복음과 달리 누가복음이 본문에서 다음 두가지 사실을 추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는, 여리고를 출발하신 예수님이 이제 예루살렘 입성을 목전에 두고 있습니다(눅19:11b). 모인 무리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사도와 제자들까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면 곧 하나님의 능력을 발휘하여 외세를 물리치고 다윗의 제국을 재건하는 줄 믿고 있습니다(눅19:11c).
3) 그러나 막상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게 되면 전혀 다른 사건이 발생하게 될 것입니다. 제자들을 포함하여 유대인들의 기대가 물거품이 되고 예수님이 대속의 십자가를 지기 위하여 십자가 형장으로 끌려가게 되면 그들이 모두 흩어지고 말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미리 아버지 하나님의 향후계획을 슬쩍 말해주고 싶습니다. 그 방법이 바로 하나의 비유를 만들어서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취지를 의사 누가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눅19:11a).
4) 또 하나는, 그와 같은 목적을 가지고 예수님이 ‘므나의 비유’를 일부러 만들어 제자들과 무리들에게 말씀하고 있기 때문에 의미상 그 주요내용이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님이 천국에서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의 권세를 받아와야 하기에 제자들을 잠시 떠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하던 복음사역을 제자들에게 대신 실천하도록 권능을 똑같이 부여하고 있습니다. 훗날 예수님이 재림하게 되면 반드시 종들이 어떻게 지상명령을 실천하였는지 그 열매를 가지고 논공행상을 실시할 것입니다. 그리고 선민 유대인들에게 한마디를 첨언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끝까지 회개하지 아니하고 그리스도를 배척하게 되면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눅19:11-14, 27 의역);
참고로, 여기서 은 1므나의 가치는 100데나리온에 해당합니다. 그것은 6천 데나리온에 해당하는 은 1달란트보다는 훨씬 적은 것입니다.
(2) “15. 귀인이 왕위를 받아가지고 돌아와서(승천하신 주님의 재림을 의미함, 살전4:16-18), 은화를 준 종들이 각각 어떻게 장사하였는지를 알고자 하여 그들을 부르니(무덤에서 불러서라도 반드시 결산을 한다는 것임, 요5:24-29), 16. 그 첫째가(첫번째 부류에 속하는 종이) 나아와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의 한 므나로(원금을 종자돈으로 삼아) 열 므나를(놀랍게도 10배의 이문을) 남겼나이다. 17.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천국에서 받는 면류관을 의미하고 있음, 눅22:28-30) 하고, 18. 그 둘째가(두번째 부류에 속하는 종이)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의 한 므나로 다섯 므나를 만들었나이다. 19. 주인이 그에게도 이르되 너도 다섯 고을을 차지하라 하고(첫째와 둘째 사이에 차별이 없음. 충성한만큼 그 열매의 크기에 비례하여 면류관을 받는 것임)”(눅19:15-19);
1) 사도 마태와 의사 누가는 다음과 같은 차이가 있습니다; 첫째, 사도 마태는 3년 6개월에 이르는 긴 세월 예수님의 복음사역의 공생애에 수행제자로서 함께한 인물입니다. 나이도 예수님과 비슷한 연배로 보입니다. 그와 달리 의사 누가는 예수님의 공생애에 제자로 따라다닌 적이 없는 자입니다. 둘째, 의사 누가는 주후 50년경 후속사도인 바울이 소아시아를 거쳐 처음으로 유럽선교를 실행할 때에 그의 주치의로서 동행한 인물입니다(행16:10-16).
2) 셋째, 의사 누가는 사도 바울의 이방인선교에 있어서 동역자이며(골4:14, 딤후4:11) 동시에 바울이 설치한 성경학교에서 4년 가까이 학문적으로 주님의 천국복음에 관하여 집중적으로 그리고 체계적으로 배웠습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고린도에서 1년 6개월, 에베소에서 2년 3개월입니다(행18:11, 19:8, 10). 그 결과 그는 함께 공부한 사람들 가운데 훗날 엄청난 복음전파의 열매를 거두는 경우를 보았습니다(롬16:1-4). 그러한 경험이 여기 ‘므나의 비유’에서 1므나를 가지고 10배 또는 5배의 거대한 이문을 얻는 것으로 묘사가 되고 있습니다(눅19:16, 18);
3) 넷째, 사도 마태의 경우에는 예루살렘 초대교회의 성립과정에서 혁혁하게 성공을 거두고 있는 사도 베드로와 요한을 유심히 살펴보고 있습니다(행2:37-42, 3:4-10). 다 같은 사도이지만 그 두사람은 더 많은 달란트를 주님으로부터 얻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한 경험이 자신도 모르게 예수님의 ‘달란트 비유’에 반영되어 있다고 하겠습니다(마25:15).
4) 다섯째, 사도 마태와 의사 누가가 공감하고 있는 결론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반드시 주님이 재림하여 종들과 결산하는 과정이 있으며 크게 충성한 종은 더 큰 상급을 받고 적게 충성한 자는 적은 상급을 받으며 아예 불충한 종은 처벌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마25:21, 23, 29, 눅19:17, 19, 24, 26).
셋째로, “20. 또 한 사람이(세번째 부류에 속하는 종이)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보소서. 당신의 한 므나가 여기 있나이다. 내가 수건으로 싸 두었었나이다(그 세번째 부류인 불충한 종이 수건으로 꽁꽁 싸두고 전혀 사용하지 아니한 것은 주님이 부여한 모든 영적인 재능과 내주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권능임. 오로지 세상적인 자신의 경험과 이성적인 논리 그리고 세상적인 이치만 가지고 주님의 일을 행한 결과 그 진정한 영적인 소득이 없는 것임). 21. 이는 당신이 엄한 사람인 것을 내가 무서워함이라. 당신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나이다(변명과 핑계가 참으로 그럴 듯함. 주님은 무에서 유로 이 세상을 창조하였기에 그 종에 불과한 자신은 할 일이 전혀 없다는 것임. 그것은 청지기의 사명과 역할이 무엇인지 일체 고려하지 아니하고 있는 책임회피의 발언에 불과함, 창1:26-31). 22. 주인이 이르되, 악한 종아 내가 네 말로 너를 심판하노니, 너는 내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는 엄한 사람인 줄로 알았느냐? 23. 그러면 어찌하여 내 돈을 은행에 맡기지 아니하였느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와서 그 이자와 함께 그 돈을 찾았으리라 하고(종자돈이라고 하는 것은 은행에 저축을 하더라도 이자가 붙는 법임을 말함. 그러므로 주님이 제자들을 목자로 파송한 것은 지상명령을 실천하면서 진리의 보혜사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성숙한 신앙인이 되어 하나님 자녀의 성화를 이루라는 것임. 그런데 세번째 부류는 그러한 흔적이 전혀 없는 것임), 24. 곁에 섰는 자들에게 이르되, 그 한 므나를 빼앗아 열 므나 있는 자에게 주라 하니(가장 충성한 자에게 가장 큰 상급이 그 면류관으로 주어지는 것임. 그러므로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 되고 있음, 마28:18), 25. 그들이 이르되, 주여 그에게 이미 열 므나가 있나이다(종에 불과한 자들이 감히 주인의 논공행상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임). 26. 주인이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릇 (충성한 열매가) 있는 자는 받겠고, (피조물인 인간의 경험과 이치만을 주장하면서 창조주의 주권에 이의를 제기하고 온전히 종의 법도에 따라 충성한 흔적이, 눅17:10)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27. 그리고 내가 왕 됨을 원하지 아니하던 저 원수들을 이리로 끌어다가 내 앞에서 죽이라 하였느니라(가깝게는 예수 그리스도를 처단한 유대교지도자들이 주후 70년에 거의 멸절을 당하게 됨, 눅19:41-44. 그리고 세상의 종말심판에 있어서 또한 그러할 것임, 요5:29, 마25:46, 계20:12-15)”(눅19:20-27); 역시 다음과 같이 2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20. 또 한 사람이(세번째 부류에 속하는 종이)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보소서. 당신의 한 므나가 여기 있나이다. 내가 수건으로 싸 두었었나이다(그 세번째 부류인 불충한 종이 수건으로 꽁꽁 싸두고 전혀 사용하지 아니한 것은 주님이 부여한 모든 영적인 재능과 내주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권능임. 오로지 세상적인 자신의 경험과 이성적인 논리 그리고 세상적인 이치만 가지고 주님의 일을 행한 결과 그 진정한 영적인 소득이 없는 것임). 21. 이는 당신이 엄한 사람인 것을 내가 무서워함이라. 당신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나이다(변명과 핑계가 참으로 그럴 듯함. 주님은 무에서 유로 이 세상을 창조하였기에 그 종에 불과한 자신은 할 일이 전혀 없다는 것임. 그것은 청지기의 사명과 역할이 무엇인지 일체 고려하지 아니하고 있는 책임회피의 발언에 불과함, 창1:26-31). 22. 주인이 이르되, 악한 종아 내가 네 말로 너를 심판하노니, 너는 내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는 엄한 사람인 줄로 알았느냐? 23. 그러면 어찌하여 내 돈을 은행에 맡기지 아니하였느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와서 그 이자와 함께 그 돈을 찾았으리라 하고(종자돈이라고 하는 것은 은행에 저축을 하더라도 이자가 붙는 법임을 말함. 그러므로 주님이 제자들을 목자로 파송한 것은 지상명령을 실천하면서 진리의 보혜사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성숙한 신앙인이 되어 하나님 자녀의 성화를 이루라는 것임. 그런데 세번째 부류는 그러한 흔적이 전혀 없는 것임)”(눅19:20-23);
1) ‘달란트 비유’나 ‘므나의 비유’에 있어서 다같이 문제가 되고 있는 종은 모두 제3부류에 속하는 인물입니다. 제1부류에 속하는 종들은 진리의 보혜사 성령님을 의지하여 주님과 영적으로 동행하면서 세상 끝까지 천국복음을 전파하고 거룩한 성도로서의 삶에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자연히 그 열매가 대단하며 주님의 칭찬을 크게 받고 있습니다(16-17절). 제2부류에 속하는 종들도 비록 자질은 조금 떨어질지 몰라도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고 있습니다(18절). 따라서 주님으로부터 동일한 칭찬을 받고 있습니다(19절);
2) 그와 달리 제3부류에 속하는 종들은 주님이 맡긴 사명에 대해서는 불충하며 종의 법도에서 어긋나는 행동을 서슴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자신의 입신양명과 세상적인 영광을 추구하기에 바쁩니다. 그가 사용하고 있는 방법도 세속적인 것이며 주님의 말씀과 성령님의 깨우침에 따른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수가성의 여인에게 말씀하시기를 영과 진리로 영이신 하나님을 예배하라고 했는데(요4:24) 그러한 예배인생이 아닙니다(롬12:1-2).
3) 그와 반대로 제3부류의 종들은 세상적인 소원성취를 목적으로 이상한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행동하고 있기에 주님이 찾고 있는 영적인 열매가 없습니다. 그 종에게 취조를 하자 어처구니 없는 변명이 들려옵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여호와 앞에 종이 무엇을 열매라고 내놓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저 주신 것을 잘 보관하였다가 돌려드립니다. 그동안 주님의 은혜로 한세상 잘 지내게 하여 주심에 감사할 따름입니다”(20-21절 의역).
4) 그 종은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고 한세상 자기 뜻대로 지낸 자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질책이 엄중합니다; “종자돈을 은행에 맡겨도 이자가 붙는 법이다. 그런데 너는 은행보다도 못하구나. 종의 사명은 주인이 원하는 인생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아버지 하나님이 만민을 그리스도의 천국복음으로 구원하여 영생의 천국에 함께 입성하라고 너를 목자로 보냈는데 그 열매가 전무하구나. 한세상 네 뜻대로 원 없이 살았으니 이제는 그 대가를 확실하게 지불하여야 할 것이다”(22-23절 의역).
(2) “24. 곁에 섰는 자들에게 이르되, 그 한 므나를 빼앗아 열 므나 있는 자에게 주라 하니(가장 충성한 자에게 가장 큰 상급이 그 면류관으로 주어지는 것임. 그러므로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 되고 있음, 마28:18), 25. 그들이 이르되, 주여 그에게 이미 열 므나가 있나이다(종에 불과한 자들이 감히 주인의 논공행상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임). 26. 주인이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릇 (충성한 열매가) 있는 자는 받겠고, (피조물인 인간의 경험과 이치만을 주장하면서 창조주의 주권에 이의를 제기하고 온전히 종의 법도에 따라 충성한 흔적이, 눅17:10)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27. 그리고 내가 왕 됨을 원하지 아니하던 저 원수들을 이리로 끌어다가 내 앞에서 죽이라 하였느니라(가깝게는 예수 그리스도를 처단한 유대교지도자들이 주후 70년에 거의 멸절을 당하게 됨, 눅19:41-44. 그리고 세상의 종말심판에 있어서 또한 그러할 것임, 요5:29, 마25:46, 계20:12-15)”(눅19:24-27);
1) 민수기 제16장에는 ‘고라 도당의 반역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민16:1-35). 모세의 사촌동생인 똑똑한 인물 고라가 감히 대제사장의 자리를 노리고 반역을 도모한 이유는 여호와의 말씀을 빙자하여 모세와 아론이 권력을 독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인식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여호와의 말씀이 모세의 입을 통하여 다음과 같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론을 대제사장으로 삼고 모세를 출애굽의 지도자로 삼았으며 고라를 비롯한 레위인 친척들에게도 성막에서 섬길 수 있는 특권을 부여하셨다. 그런데 그 사명이 귀한 것인 줄 모르고 도리어 대제사장의 자리를 탐내고 있으니 그것은 여호와의 권한을 침범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잘못된 것임을 땅이 갈라지는 여호와의 역사로 증명할 것이다”(민16:9-11, 28-33 의역).
2) 그와 동일한 여호와의 심판이 주님의 재림을 통하여 이 땅에 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기 전에 제자들과 회중들에게 말씀하고 계시는 ‘므나의 비유’의 결말이 다음과 같기 때문입니다; “불충한 종의 한 므나를 빼앗아 열 므나를 가진 종에게 주는 것을 반대한 자들은 여호와의 권한을 침범한 무도한 자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선민의 영광을 이 세상에 드러내는 제국을 건설하여 달라고 여호와께 간구한 타락한 자들이다. 여호와의 말씀의 뜻인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천국복음을 외면하고 그것을 전파하고 있는 그리스도마저 해치고 말았으니 그들은 불충한 종과 함께 영벌의 심판에 들어가고 마는 것이다”(25-27절 의역).
결론적으로, 본문에서 다음 3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1) 첫째, 그리스도의 천국복음을 영접하고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며 앞으로 주님의 제자로 살아가겠다고 결단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서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고자 결심하십니다. 그러한 계기를 여리고의 세관장 삭개오의 회심과 놀라운 결단에서 뚜렷이 볼 수가 있습니다. 대속의 십자가에 자신을 희생하신 예수님이 무덤에서 3일만에 영생의 몸으로 부활하여 40일간 제자들을 불러모아 천국복음으로 재무장한 다음에 승천하시면서 아버지 하나님께 부탁하여 진리의 보혜사 성령님을 제자들의 심령속에 보내주십니다. 마침내 오순절에 성령님이 임하여 성도들에게 내주 역사하자 그때부터 초대교회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2) 둘째, 여전히 사도를 위시한 제자들과 모인 무리인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정치적인 메시아로 여기고 있습니다. 이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면 여호와의 능력으로 외세를 물리치고 선민의 제국을 건설하는 줄 믿고 있습니다. 그와 반대로 예수님이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천국복음을 성취하기 위하여 순순히 대속의 십자가를 지기 위하여 유대교지도자들이 보낸 체포조에게 끌려가게 된다면 그들의 실망이 엄청날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의 비유를 만들어 사전에 제자들과 무리들에게 훗날의 일을 가르쳐주고자 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므나의 비유’입니다.
(3) 셋째, 그 요지는 여호와의 모든 말씀의 뜻을 예수님의 천국복음에 비추어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말씀으로 이해하고 주님이 맡기신 지상명령을 실천하면서 거룩한 그리스도의 제자로 남은 인생을 살아가게 되면 주님의 재림 때에 그 상급을 크게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와 반대로 주님의 제자로 살아가지 아니하고 세상적인 성공과 영광을 추구하면서 살아가게 되면 그 결과는 제자의 자격을 박탈당하고 영벌의 심판을 받게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그와 같은 므나 비유의 의미를 본문에서 자주 음미하면서 끝까지 주님의 제자로 신실하게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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