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26년 설교문(손진길 목사)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과 성전의 미래”(눅19:28-48)(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4. 10. 4. 04:45

제목;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과 성전의 미래”(19:28-48)

설교일; 주후 2025 1 12일 주일

작성자; 손진길 목사(24 10 4일 금요일 작성)

 

여리고의 세관장 삭개오의 집에서 식사하는 도중 예수님과 사도들은 부자인 삭개오의 놀라운 회개와 결단의 장면을 보았습니다(19:8). 그것은 여리고에 오기 전에 유대 땅에서 그들이 만난 부자관리의 경우와는 정반대입니다(18:22-23).

예수님이 그 부자청년에게 부디 선대로부터 받은 재물과 신분에 미련을 두지 말고 그리스도의 제자로 새출발을 하라고 권면했습니다(18:22). 그렇게 되면 영생을 얻고 천국에 들어가는 좁은 문이 열릴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 부자청년은 고민만 하다가 되돌아가고 말았습니다(18:2325).

그런데 선민 유대인들이 부러워하는 부자관리가 결단하지 못한 그 일을 유대인들이 매국노이며 죄인이라고 지탄하고 있는 세관장 삭개오가 감행하고 있습니다(19:8). 그 장면을 보고서 심히 기뻐하신 예수님이 그 집에서 두가지 선언을 하고 계십니다;

하나는, 삭개오의 집에 오늘 여호와의 구원이 임하였다는 것입니다(19:9a). 또 하나는, 삭개오가 그 옛날 아브라함이 소원한 그 영생을 얻기 위하여(21:33) 이 세상에서 자신이 가진 것의 절반 이상을 여호와의 뜻에 따라 사용하고자 마음을 정하고 있으니(22:10-12) 그 회심과 결단이 참으로 귀하다는 것입니다(19:9b).

따라서 예수님은 그와 같은 회심과 결단이 여호와신앙을 떠나서 제멋대로 살아가고 있는 모든 사람에게서 발생할 수 있도록 스스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서 대속의 십자가에 자신을 속죄의 제물로 희생할 각오를 굳히고 있습니다(19:10). 예수님의 결심이 확고하다는 사실을 스스로 앞장서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걸어가고 있는 그의 모습에서 생생하게 느낄 수가 있다고 하겠습니다(19:28).

그런데 여리고에서 50리 남짓 서남쪽으로 진행하면 평균 고도 800미터의 높은 감람산(Mount of Olives)이 나타나는데 그곳의 지형이 특이합니다. 감람산이 평균고도 780미터인 수도 예루살렘의 동편을 방어하고 있는 천혜의 요새이므로 지리적으로 그 남부 협곡을 빙 돌아 서북쪽으로 진행하여야 예루살렘성의 동문으로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그 감람산이 예루살렘에서 동쪽 5리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데(11:18) 그 산지의 동편과 서편에 각각 벳바게 마을이 있고 그 남편에 베다니 마을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리고 산 정상에 좀더 가까운 동네 벳바게는 무화과 마을이라는 좋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만큼 일조량이 많고 나무가 잘 자라는 산중턱입니다;

벳바게의 남쪽 기슭에 걸어서 20분 남짓 떨어진 지점에 자리잡고 있는 작은 동네 베다니는 다행스럽게도 남쪽 도로에 인접하고 있습니다. 그 도로를 타고 여리고에서 오는 여행자들이 보통 베다니에서 일박하고 새벽에 예루살렘으로 들어갑니다. 그 이유는 예루살렘의 물가가 턱없이 비싸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지리적인 이점이 있어서 가난한 베다니의 주민들이 민박집을 운영하면서 나름대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갈릴리에서 유대교 절기에 예루살렘성전을 방문하고 있는 예수님과 그 일행이 베다니의 나사로 집을 단골로 이용하고 있는 실정입니다(11:11).

그와 같이 베다니 동네는 흔히 가난한 마을로 불리고 있지만 때로는 무화과 마을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그 이유는 옛날부터 큰 마을 벳바게의 일부분으로 여겨지곤 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서의 저자의 표현에 따라 벳바게는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기 전에 감람산에서 먼저 마주치는 마을로서 감람산의 동편으로 보이기도 하고(11:1, 19:28) 어떤 경우에는 베다니를 지나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자리잡고 있는 것으로 풀이가 되기도 합니다(21:1-11).

과연 벳바게의 위치가 감람산의 동편과 서편에 2개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 당시에는 맞는 이야기일까요?  의사 누가의 본문기록을 참조하면 그러할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28. 예수께서 (여리고에서) 말씀(므나의 비유)을 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시더라. 29. 감람원이라 불리는 산 쪽에 있는 벳바게와 베다니에 가까이 가셨을 때에(As he approached Bethphage and Bethany at the hill called the Mount of Olives, 벳바게가 베다니보다 먼저 나타나는 마을임), 제자 중 둘을 (건너편 서쪽으로 먼저) 보내시며, 30.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감람산 서편을 말함)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19:28-30);

예수님은 여리고에서 여러가지 말씀을 하시고 베다니를 거쳐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시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예수님은 소선지서에 기록되어 있는 그대로 (9:9) 예루살렘성의 동문으로 어린 나귀를 타고 입성하기 위하여 미리 2사도를 파견하여 감람산 서쪽의 벳바게 마을에서 어린 나귀를 빌리고 있는 것입니다(19:29-30, 21:1-2).

거기서부터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이 시작되고 있기에 일명 그곳의 봉우리를 선지산으로 부를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옛날 다윗왕조의 역사에 있어서는 솔로몬왕의 시대부터 이방인의 여러 신상에게 제사하는 산당이 그곳에 즐비합니다(왕상11:7). 그러하기에 다윗왕조 초창기부터 선지산으로 불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남쪽 기슭 베다니 마을의 북쪽에는 높은 봉우리가 있습니다. 그곳에서 훗날 갈릴리의 제자들이 보고 있는 가운데 예수님이 승천하시기에 일명 승천산 또는 갈릴리산으로 불리게 됩니다(24:50-51). 그리고 감람산의 북쪽 중앙에는 은밀한 기도장소 겟세마네 동산이 자리잡고 있습니다(22:39, 26:36);

베다니에서 서쪽으로 진행하다가 보면 기드론 골짜기를 만나는 그곳 남부에 있는 공동묘지를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그에 따라 그 부근의 봉우리를 멸망산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왕하23:13). 요약을 해보자면, 감람산에는 ①선지산, ②승천산 또는 갈릴리산, ③멸망산, 그리고 ④겟세마네 동산 등의 4개의 봉우리가 있다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특히 죽음의 장소 멸망산과 예수님이 부활하여 승천하는 장소 승천산이 이웃하고 있다는 사실이 흥미롭습니다. 그렇게 오늘날에도 많은 영감을 주고 있는 봉우리를 가진 산의 이름이 바로 예루살렘 동편에 자리잡고 있는 감람산(Mount of Olives)이라고 하겠습니다.   

그와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한 구절 씩 풀이하면서 자세한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특히 본문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얻은 소중한 교훈과 메시지를 더불어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28. 예수께서 (여리고에서) 말씀(므나의 비유)을 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시더라. 29. 감람원이라 불리는 산 쪽에 있는 벳바게와 베다니에 가까이 가셨을 때에(As he approached Bethphage and Bethany at the hill called the Mount of Olives, 벳바게가 베다니보다 먼저 나타나는 마을임), 제자 중 둘을 (건너편 서쪽으로 먼저) 보내시며, 30.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감람산 서편을 말함)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31. 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말하기를 주가 쓰시겠다 하라 하시매, 32.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 가서 그 말씀하신 대로 (어린 나귀를) 만난지라. 33. 나귀 새끼를 풀 때에 그 임자들이(마을공동으로 집단적으로 나귀를 많이 사육하고 있는 것으로 보임. 벳바게 주민들은 예루살렘성으로 물량을 운반하기 위하여 비탈진 골짜기 험한 돌길을 힘겹게 올라가는 상인들에게 나귀를 빌려주는 영업행위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임) 이르되, 어찌하여 나귀 새끼를 푸느냐? 34. 대답하되, 주께서 쓰시겠다 하고(그 한마디 대답에 나귀주인이 두말없이 어린 나귀를 빌려주고 있음. 그것은 예수님의 복음사역을 위하여 모든 것을 미리 예비하여 주시는 여호와의 역사임, 9:1-4), 35. 그것을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 새끼 위에 걸쳐 놓고 예수를 태우니(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은 전쟁에서 승리하고 개선하는 장군의 모습과는 정반대임, 14:17-18. 생전 처음 사람을 태우는 어린 나귀이기에 안장과 고삐도 없음. 그에 따라 사도들이 겉옷을 벗어서 안장을 대신하고 있는 것임), 36. 가실 때에 그들이 자기의 겉옷을 길에 펴더라(벳바게에서 예루살렘 동문으로 들어가는 비탈길에는 돌맹이가 많아서 걷기에 굉장히 불편함. 따라서 사도들이 겉옷을 차례대로 깔아서 어린 나귀의 노고를 덜어주고 있는 것임). 37. 이미 감람 산 내리막길에 가까이 오시매(평균고도 800미터의 감람산을 지나 780미터의 예루살렘 동문으로 들어서기 전에는 내리막길이 전개되고 있는 것임),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들이 본 바 모든 능한 일로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여, 38. 이르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다윗제국을 재건하는) 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두가지 의미를 깊숙하게 내포하고 있음. 하나는,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주변의 이방인의 침입을 물리치고 선민 이스라엘군대에게 승전의 은혜를 주시기에 여호와 하나님께 모든 영광과 평화의 찬양을 올려드린다는 것임, 삼상17:45-47. 또 하나는, 아기 예수의 탄생을 에델 망대의 목자들에게 천사들이 전할 때에는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라고 찬양하고 있음, 2:14. 여기서는 그와 정반대의 구절임. 그 이유는 평화의 왕으로 오신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서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고 3일만에 부활하여 아버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수순이 전개될 것이기 때문임. 그때부터 이 세상에는 종말이 시작되며 온전한 평화가 사라지고 마는 것임)”(19:28-38); 다음과 같이 2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28. 예수께서 (여리고에서) 말씀(므나의 비유)을 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시더라. 29. 감람원이라 불리는 산 쪽에 있는 벳바게와 베다니에 가까이 가셨을 때에(As he approached Bethphage and Bethany at the hill called the Mount of Olives, 벳바게가 베다니보다 먼저 나타나는 마을임), 제자 중 둘을 (건너편 서쪽으로 먼저) 보내시며, 30.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감람산 서편을 말함)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31. 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말하기를 주가 쓰시겠다 하라 하시매, 32.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 가서 그 말씀하신 대로 (어린 나귀를) 만난지라. 33. 나귀 새끼를 풀 때에 그 임자들이(마을공동으로 집단적으로 나귀를 많이 사육하고 있는 것으로 보임. 벳바게 주민들은 예루살렘성으로 물량을 운반하기 위하여 비탈진 골짜기 험한 돌길을 힘겹게 올라가는 상인들에게 나귀를 빌려주는 영업행위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임) 이르되, 어찌하여 나귀 새끼를 푸느냐? 34. 대답하되, 주께서 쓰시겠다 하고(그 한마디 대답에 나귀주인이 두말없이 어린 나귀를 빌려주고 있음. 그것은 예수님의 복음사역을 위하여 모든 것을 미리 예비하여 주시는 여호와의 역사임, 9:1-4), 35. 그것을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 새끼 위에 걸쳐 놓고 예수를 태우니(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은 전쟁에서 승리하고 개선하는 장군의 모습과는 정반대임, 14:17-18. 생전 처음 사람을 태우는 어린 나귀이기에 안장과 고삐도 없음. 그에 따라 사도들이 겉옷을 벗어서 안장을 대신하고 있는 것임)”(19:28-35);

1)   예수님은 12사도들과 함께 주로 갈릴리에서 주후 28 10월경부터 3년간 백성들에게 아버지 하나님의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뜻이 담겨 있는 천국복음의 말씀을 전파하시고 모든 병든 자와 장애자 및 귀신들린 자들을 신위적(神威的)인 능력으로 고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공생애 6개월을 남겨 두고서는 주후 31 10월 초막절을 맞이하여 은밀하게 갈릴리를 떠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남행을 하십니다(7:10, 9:51-56).

2)   그렇지만 일단 갈릴리지역을 넘어서자 사마리아와 유대지역에서 예수님 일행은 대대적으로 복음사역을 재개하고 있습니다(10:1-11, 21-24). 그 결과 여리고에 도착하기 전 유대 땅에서는 수만명의 백성들이 운집하여 예수님의 천국복음을 청취하고 온갖 질병과 장애에서 고침을 받고 있습니다(12:1).

3)   특히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관문에 해당하는 여리고 성읍에서는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예수님을 만나 눈을 뜨게 되고 그 제자로 따라나서고 있습니다(18:35-43). 그리고 여리고 세관장인 부자 삭개오가 예수님 일행을 자신의 집에 모셔 들이고 그 자신 앞으로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자 회심하고 결단하는 놀라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19:1-10).

4)   그와 같은 감격을 맛보신 예수님은 제자들과 백성들에게 이른바 10므나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대속의 십자가 처형이 기다리고 있는 사형장과 같은 예루살렘을 향하여 예수님은 스스로 앞장을 서서 걸음을 재촉하고 계십니다(28). 이제는 주후 32 4월 유월절기를 맞이하면 예수님은 세상죄를 지고 가는 여호와의 어린양이 되어(1:29) 대속의 십자가에서 모든 믿는 자들을 영생구원하기 위한 희생제물로 아버지 하나님께 바쳐지고 말 것입니다(22:12-14, 53:3-12).

5)   그와 같은 그리스도의 예루살렘 입성에 관하여 그 옛날 선지자 스가랴가 그의 소선지서에 예언의 말씀을 벌써 기록으로 남겨두고 있습니다; “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9:9). 이 세상의 만민과 만물을 구원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구원주 그리스도는 선민 유대인들이 고대하고 있는 정치적인 메시아가 결코 아닙니다;

6)   그 옛날 주전 21세기에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여호와의 도우심으로 가나안 헤브론에 살고 있는 아모리 3호족과 연합하여 사병 1천여명으로 무려 10만명이 넘는 메소포타미아 원정군을 쳐부수고 북송포로와 재물을 되찾아 예루살렘으로 개선한 적이 있습니다(14:11-19). 그와 같은 개선장군의 모습을 선민 유대인들이 정치적인 메시아에게서 다시 볼 수 있기를 고대하고 있지만 그리스도 예수님은 그와 정반대입니다.

7)   창세기의 기록을 참조하면(22:1-18) 그 옛날 아브라함이 모리아산에서 약속의 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여호와께 바치고 함께 영생을 얻고자 한 적이 있습니다(21:33, 11:16-19). 그러나 그것은 영생의 구원을 갈망하고 있는 아브라함의 기도가 얼마나 절실한 것인지를 파악하고자 하는 여호와의 엄청난 시험입니다(22:1-2). 따라서 여호와께서는 아브라함이 번제물 이삭의 목을 치려는 순간에 천사를 급히 보내어 그 제사를 중단하게 합니다(22:12). 그 대신에 그 산에서 여호와가 주신 숫양을 번제물로 바치고 이삭의 목숨을 온전히 구원받게 만드신 것입니다(22:13-14, 11:17-19).

8)   그 일을 계승하여 이제는 예수님이 모리아산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에(대하3:1) 입성하여 스스로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는 여호와 이레의 번제물이 되고자 하십니다(24:44-48, 1:29, 3:13-17). 그러므로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의 말씀도 차제에 실현이 되어야 합니다. 그 일을 성취하기 위하여서는 무엇보다도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동문(東門, East Gate)을 마주 보고 있는 그 길목인 감람산 서편의 작은 벳바게 마을에서 나귀새끼를 빌려야 합니다. 아침 일찍 예수님이 12사도와 함께 여리고를 떠나 50리 남짓 남서진을 하자 드디어 해발 800미터의 높이를 자랑하는 감람산이 보입니다.

9)   가장 높은 봉우리에서 남동쪽 기슭으로 경사지가 펼쳐지고 있는데 그 중턱에 양지바른 벳바게 마을이 보이고 남부 기슭에는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으로 통하는 도로에 인접하고 있는 베다니 마을이 보이고 있습니다(29a). 한눈에 보기에도 중턱에 있는 벳바게 마을에는 햇볕이 좋아서 그런지 무화과나무가 많이 자라고 있으며 큰 동네인지라 능선을 타고서 동에서 서로 마치 하나의 띠처럼 펼쳐지고 있습니다. 그에 비하면, 그 기슭 남쪽에 20여분 거리로 떨어져 있는 베다니 마을은 규모가 작은 편입니다. 그러나 감람산 베다니 마을은 예수님 일행에게는 아주 친숙한 동네입니다;

10)             왜냐하면, 갈릴리 출신인 그들이 명절에 남하하여 예루살렘을 방문할 때에 반드시 묵게 되는 민박집이 베다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베다니 나사로의 집에 들릴 시간이 없습니다. 벌써 정오가 되어가는 시간이므로 빨리 벳바게 마을을 방문하여 아버지 하나님이 예비하신 나귀새끼를 구하여 예수님이 그것을 타고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여야 합니다. 그것도 비탈진 길을 어린 나귀가 쉽게 걸어가기 위해서는 짧은 거리여야 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멀리 감람산 중턱에 있는 벳바게 마을이 보이는 동쪽 지점에서 수행사도 2명을 재빨리 감람산 반대쪽 서편에 있는 벳바게 작은 동네를 방문하도록 파견하고 있습니다(29-30a).

11)             그곳에서 아버지 하나님이 예비한 나귀새끼를 만나 주인에게 양해를 구하고 빌려오라고 지시하고 있습니다(30b-31). 2사도가 무사히 나귀새끼를 구해서 벳바게 동네에서 기드론 골짜기 길로 내려오면 예수님이 그 새끼 나귀를 타고서 예루살렘에 입성할 예정입니다(35). 선지자들이 예언하고 있는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고자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예루살렘 입성이기에 그 일을 사전에 준비하고 계시는 여호와의 역사섭리가 놀랍습니다(24:44-45, 19:32-35). 나귀의 주인은 2사도의 설명에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아니하고 마치 맡겨 놓은 나귀새끼를 주인에게 돌려주듯이 그렇게 제공하고 있는 것입니다(32-35a).

12)             감람산 서편 도로에서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타십니다. 그런데 사람을 잔등에 태워본 경험이 없는 어린 나귀입니다. 그것을 보고서 사도들이 급히 2가지 조치를 취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재빨리 나귀주인에게서 얻어온 밧줄을 사용하여 나귀의 목에 줄을 매고 있는 것입니다. 그 줄을 나귀를 몰아본 경험이 있는 사도가 바투 잡고 있기에 예수님이 나귀의 등에서 떨어지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는, 어린 나귀이므로 아직 안장이 없습니다. 그에 따라 사도 중의 한사람이 자신의 겉옷을 벗어서 안장을 대신합니다(35b). 그렇지만 비탈진 돌길을 걸어가면서 자꾸만 나귀 새끼가 비틀거리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되는 것일까요?...   

(2)  “36. 가실 때에 그들이 자기의 겉옷을 길에 펴더라(벳바게에서 예루살렘 동문으로 들어가는 비탈길에는 돌맹이가 많아서 걷기에 굉장히 불편함. 따라서 사도들이 겉옷을 차례대로 깔아서 어린 나귀의 노고를 덜어주고 있는 것임). 37. 이미 감람 산 내리막길에 가까이 오시매(평균고도 800미터의 감람산을 지나 780미터의 예루살렘 동문으로 들어서기 전에는 내리막길이 전개되고 있는 것임),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들이 본 바 모든 능한 일로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여, 38. 이르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다윗제국을 재건하는) 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두가지 의미를 깊숙하게 내포하고 있음. 하나는,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주변의 이방인의 침입을 물리치고 선민 이스라엘군대에게 승전의 은혜를 주시기에 여호와 하나님께 모든 영광과 평화의 찬양을 올려드린다는 것임, 삼상17:45-47. 또 하나는, 아기 예수의 탄생을 에델 망대의 목자들에게 천사들이 전할 때에는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라고 찬양하고 있음, 2:14. 여기서는 그와 정반대의 구절임. 그 이유는 평화의 왕으로 오신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서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고 3일만에 부활하여 아버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수순이 전개될 것이기 때문임. 그때부터 이 세상에는 종말이 시작되며 온전한 평화가 사라지고 마는 것임)”(19:36-38);

1)   예수님의 12사도 가운데 8명이 갈릴리 출신이며 대부분 어부들입니다. 그와 달리 4명은 유대지방 출신인데 그 가운데 시골 출신 곧 유대 땅의 산지 벽촌 가룟이 고향인 유다가 있습니다. 어린시절부터 어렵게 산동네 고향에서 자라난 유다이기에 어린 나귀가 비탈진 돌길에서 발걸음을 제대로 옮기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서 금방 필요한 조치를 취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겉옷을 벗어서 재빨리 길에 깔고 있는 것입니다;

2)   그것을 보고서 다른 사도들도 겉옷을 벗어 계속 길에 깔고 있습니다. 일단 나귀가 밟고 지나면 그 다음에는 겉옷을 거두어 그 앞길에 다시 깔아 줍니다(36). 그와 같이 500미터를 진행하자 예루살렘의 동쪽 문이 나타나는 내리막길이 보이고 있습니다(37a). 그 연도에는 어느 사이에 많은 주민들과 순례객들이 모여들어서 나귀 새끼를 타고서 예루살렘성으로 들어오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환영하고 있습니다(38).

3)   그 이유가 두가지입니다; 하나는, 갈릴리 나사렛 출신의 큰 선지자 예수가 이제는 유대 땅에 들어와서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으로 많은 병자를 고치고(18:43) 또한 갈릴리에서는 죽은 자를 살려내었다고 하는 소문이 무성하기 때문입니다(7:14-17, 8:54-56). 또 하나는, 수년전에 세례 요한이 요단강 동편마을에서 나사렛 예수에게 물세례를 주면서 그는 선지자의 수준을 넘어서고 있는 메시아이며 세상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외쳤다는 소문이 아직도 사라지지 아니하고 은밀하게 들려오고 있기 때문입니다(3:21-22, 3:11-17).

4)   다윗의 자손인 그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죽은 자를 살릴 뿐만 아니라 외세의 지배에 신음하고 있는 선민 유대인들에게 해방의 기쁨을 안겨줄 것이라는 기대감이 팽배하고 있습니다. 이제 선민 유대인들의 수도인 예루살렘에 나사렛 예수가 공식적으로 입성하고 있으므로 곧 하나님의 능력으로 외세인 로마총독부와 헤롯 왕가를 몰아내고 그 옛날 다윗의 제국을 재건할 것입니다.

5)   선민 유대인들은 메시아의 예루살렘 입성을 통해서 그를 선민의 땅에 보내신 여호와께서 영광을 얻으실 것이라고 말하면서 이제는 모두들 합창을 하듯이 부디 우리 선민들을 구원하시고 해방의 나라를 도래하게 해달라고 호산나 찬양을 소리 높여 외치고 있습니다(38). 물론 그 선창은 12사도들이 하고 있으며 흥분한 백성들이 열광적으로 후창하고 있는 것입니다(37b).

둘째로, “39. 무리 중 (예수님의 말과 행동을 사사건건 비난하고 헐뜯기에 바쁜)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예수의 제자들이 백성들을 선동하여 그러한 사건을 만들어내고 있다고 생각한 것임), 40.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이 세상을 구원하고자 오신 그리스도를 환영하는 것은 만민과 만물이 모두 행할 일이라는 지적임, 3:16, 8:19-22). 41. 가까이 오사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우시며(11:35, 예수님은 베다니의 나사로의 죽음을 보고 슬퍼하는 자들에게 눈물을 흘리시고 여기서 두번째로 우신 것임), 42.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5:1-2, 화목제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대속의 구원주로 믿고 아버지 하나님과 화해하여 이 땅에 평화를 가지고 오는 것)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43. (예루살렘성이 함락을 당하는)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높은 절벽위에 있는 예루살렘성을 공격하기 위하여 흙으로 계곡을 메워서 인공적인 언덕인) 토둔(土屯)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포위공격하고, 왕하25:1, 그 옛날 다윗왕조의 멸망과 비슷할 것임), 44. (예루살렘 주민인) 너와 가운데(유대 땅에) 있는 네 자식(백성)들을 (적들이 선민들을 죽여서) 땅에 메어치며(주후 70년 실제로 로마대군이 예루살렘과 유대 땅을 멸망시킬 때에 유대인 약 110만명이 죽임을 당했다고 함),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예루살렘성과 성전이 완전히 붕괴가 되고 마는 것임),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구원주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45.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사,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2:13-17, 사도 요한은 제4복음서에서 예수님이 복음사역의 공생애를 시작하신 이듬해 곧 주후 29년 봄에 예루살렘성전에서 이 사건을 일으키셨다고 기록하고 있음. 그것을 공관복음에서는 공생애 마지막 유월절 기간에 발생한 것으로 적고 있는 것임, 21:12-17, 11:15-19, 19:45-46), 46.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56:7, 만민이 기도하는 집너희는(대제사장을 비롯한 유대교지도자들과 로마총독이) 강도의 소굴을(이방인이 기도할 수 있는 성전의 뜰을 빼앗아 제물장사와 환전 장사하는 상인들에게 세를 주고 이권을 챙겨서 그 재물을 산헤드린 대공회와 로마총독이 함부로 사용하는 장소로) 만들었도다 하시니라. 47. 예수께서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니 (예수님의 성전청결사건으로 크게 책망을 받은 사두개파의 수장인) 대제사장들과 (바리새파의 수장인) 서기관들과 백성의 지도자(장로)들이 (유대교의 지도자들을 모욕하고 있는 나사렛 예수) (잡아서)죽이려고 꾀하되, 48. (유월절 순례객을 비롯한 많은) 백성이 (나사렛 예수)에게 귀를 기울여 (그가 전하고 있는 천국복음을 흥미롭게) 들으므로 어찌할(예수를 체포하여 죽일) 방도를 (현실적으로) 찾지 못하였더라(그러나 얼마 지나지 아니하여 뜻밖에 가룟 유다가 내부고발자로 나서게 됨으로써 전격적으로 예수님을 체포하고 대공회에서 유죄판결이 발생하게 되는 것임, 22:3-6)”(19:39-48); 다음과 같이 3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1)  39. 무리 중 (예수님의 말과 행동을 사사건건 비난하고 헐뜯기에 바쁜)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예수의 제자들이 백성들을 선동하여 그러한 사건을 만들어내고 있다고 생각한 것임), 40.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이 세상을 구원하고자 오신 그리스도를 환영하는 것은 만민과 만물이 모두 행할 일이라는 지적임, 3:16, 8:19-22)”(19:39-40);

1)    어린 나귀를 타고서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장면을 보고서 주민들과 순례객들이 환성을 지르고 있습니다. 큰 선지자로 불리고 있던 나사렛 예수가 사실은 여호와가 해방자로 유대 땅에 보내신 다윗의 후계자이며 메시아인 유다의 왕이라고 하는 소리가 예수님을 모시고 함께 입성하고 있는 사도와 제자들의 입에서 터져 나오고 있습니다(38).

2)    그리고 누군가 주여 우리를 지금 외세의 지배로부터 구원하여 주소서!라고 부르짖으면서 호산나를 외치기 시작하자 마치 누룩처럼 그리고 전염병처럼 호산나 찬양이 백성들의 입에서 삽시간에 목청껏 터져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21:9). 선민들의 정치적인 동조현상도 대단하지만 특히 유대교의 종교적인 메시아사상이 현재화가 되자 그것이 일종의 만세사건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3)    그러한 열광적인 분위기를 냉철하게 살피고 있는 자들이 있습니다(39a). 그들 바리새인들이 그동안 파악한 결과에 따르면 나사렛 예수는 외세를 쫓아낼 생각이 전혀 없는 평화 지상주의자입니다. 그것도 민족주의 해방사상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을 천국복음으로 전파하고 있는 일종의 몽상가에 불과합니다.

4)    여러 족속과 나라들이 서로 지역패권을 장악하고자 사투를 벌이고 있는 현실세계에서 모두가 평화를 누리고 번영을 함께 누릴 수 있는 이상세계를 만들 수 있다고 외치고 있으니 나사렛 예수야 말로 현실적인 감각이 전혀 없는 마치 구름 잡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인물입니다. 그와 같은 판단을 공유하고 있는 바리새인들이기에 그들이 분위기에 취하여 환호하고 있는 백성들을 진정시키기 위하여 직접 행동에 나서고 있습니다.

5)    우선 바리새인들이 단도직입적으로 예수님에게 항의하고 있습니다; “즉각 백성들을 선동하고 있는 당신 제자들의 행동을 제지하시요. 그렇게 분위기에 취하여 열광하게 되면 예루살렘의 질서유지를 위하여 로마군대가 출동하게 될 것이니 그 뒷감당을 어찌하려고 하는 것이요?”(39b 의역).

6)    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이 실로 상상을 초월하고 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전능하신 능력으로 성취하고자 하시는 일을 피조세계는 막을 방법이 없지요. 피조물인 사람들이 그 사실을 알고 있고 천하만물이 그 뜻에 순종하고 있는데 어떻게 그 입을 모두 봉하게 만들 수가 있다는 말이요? 당신들은 불가능한 일을 내게 요구하고 있는 것이군요!”(40절 의역).  

(2)  41. 가까이 오사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우시며(11:35, 예수님은 베다니의 나사로의 죽음을 보고 슬퍼하는 자들에게 눈물을 흘리시고 여기서 두번째로 우신 것임), 42.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5:1-2, 화목제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대속의 구원주로 믿고 아버지 하나님과 화해하여 이 땅에 평화를 가지고 오는 것)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43. (예루살렘성이 함락을 당하는)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높은 절벽위에 있는 예루살렘성을 공격하기 위하여 흙으로 계곡을 메워서 인공적인 언덕인) 토둔(土屯)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포위공격하고, 왕하25:1, 그 옛날 다윗왕조의 멸망과 비슷할 것임), 44. (예루살렘 주민인) 너와 가운데(유대 땅에) 있는 네 자식(백성)들을 (적들이 선민들을 죽여서) 땅에 메어치며(주후 70년 실제로 로마대군이 예루살렘과 유대 땅을 멸망시킬 때에 유대인 약 110만명이 죽임을 당했다고 함),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예루살렘성과 성전이 완전히 붕괴가 되고 마는 것임),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구원주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19:41-44);

1)    익명의 히브리서 저자는 제4장 말미에서 친히 사람의 아들로 이 세상에 태어나신 여호와의 독생자가 인생의 고달픔과 세상살이의 시험을 모두 체험하신 결과 대속의 십자가에 자신을 속죄의 제물로 바치시고 영생의 몸으로 부활하고 승천하여 천국에서 대제사장으로 지금도 일하고 계시기에 우리 성도들의 영생구원은 확실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4:14-16).

2)    그리고 사도 요한이 기록하고 있는 제4복음서 제5장에서는 27. 또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느니라”(5:27)는 예수님의 말씀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요컨대,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몸을 입고 친히 인생을 살아가고 계시기에 그 눈물과 웃음이 진실하며 모든 인간에게 진정한 위로가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3)    인간은 유한한 육신을 입고서 100년 안팎의 인생을 힘들게 살아가고 있습니다(4:26). 향년을 맞이하여 이 세상을 떠나게 되면 영원한 육신적인 이별의 순간을 견디지 못하는 유족들의 슬픔이 눈물로 터져 나오게 됩니다. 베다니 나사로의 죽음을 맞이한 그 누이들의 슬픔의 눈물을 보시고 예수님이 무덤 앞에서 눈물을 흘리십니다(11:35).

4)    그 이유는 살아서 예수님을 구원주로 믿게 되면 영원히 죽지 아니하게 된다는 영생의 부활의 소망을 진리로 설명하여 주었지만(11:26) 그 영생구원의 진실을 도무지 믿지 아니하고 있는 유족과 조문객들의 불신앙이 너무나 슬펐기 때문입니다(11:32-33). 그러하신 예수님이 예루살렘성을 보시고 본문에서 다시 눈물을 흘리고 계십니다(19:41);

5)    그 이유는 정치적 메시아를 갈망하지 아니하고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천국복음을 믿고 신앙생활을 했더라면 38년후에 로마대군의 침입으로 선민 유대인들이 절반 가까이 학살을 당하고 예루살렘성과 성전이 완전히 파괴되는 비극을 막을 수가 있었을 것인데 그와 같은 믿음생활을 끝내 거절하였으니 그것이 참으로 슬픈 것입니다(42-44).   

(3)  45.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사,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2:13-17, 사도 요한은 제4복음서에서 예수님이 복음사역의 공생애를 시작하신 이듬해 곧 주후 29년 봄에 예루살렘성전에서 이 사건을 일으키셨다고 기록하고 있음. 그것을 공관복음에서는 공생애 마지막 유월절 기간에 발생한 것으로 적고 있는 것임, 21:12-17, 11:15-19, 19:45-46), 46.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56:7, 만민이 기도하는 집너희는(대제사장을 비롯한 유대교지도자들과 로마총독이) 강도의 소굴을(이방인이 기도할 수 있는 성전의 뜰을 빼앗아 제물장사와 환전 장사하는 상인들에게 세를 주고 이권을 챙겨서 그 재물을 산헤드린 대공회와 로마총독이 함부로 사용하는 장소로) 만들었도다 하시니라. 47. 예수께서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니 (예수님의 성전청결사건으로 크게 책망을 받은 사두개파의 수장인) 대제사장들과 (바리새파의 수장인) 서기관들과 백성의 지도자(장로)들이 (유대교의 지도자들을 모욕하고 있는 나사렛 예수) (잡아서)죽이려고 꾀하되, 48. (유월절 순례객을 비롯한 많은) 백성이 (나사렛 예수)에게 귀를 기울여 (그가 전하고 있는 천국복음을 흥미롭게) 들으므로 어찌할(예수를 체포하여 죽일) 방도를 (현실적으로) 찾지 못하였더라(그러나 얼마 지나지 아니하여 뜻밖에 가룟 유다가 내부고발자로 나서게 됨으로써 전격적으로 예수님을 체포하고 대공회에서 유죄판결이 발생하게 되는 것임, 22:3-6)”(19:45-48);

1)    예수님이 복음사역을 위한 공생애 기간 3 6개월 동안에 예루살렘성전에 들리셔서 제물장사와 환전장사를 하고 있는 장사치들을 성전의 뜰에서 쫓아내신 이른바 성전청결사건은 유명합니다. 그런데 주후 60년대초에 유대인들의 초대교회에 나타난 공관복음 3권과 30년 세월이 지나 주후 90년대초에 소아시아에서 나타난 요한복음은 그 성전청결사건이 발생한 시기를 달리 기록하고 있습니다;

2)    구체적으로 마가, 마태, 누가가 기록한 공관복음에 있어서는 공생애 마지막 해입니다(11:15-19, 21:12-17, 19:45-48). 그러나 요한복음에 있어서는 공생애 초기에 맞이한 유월절에 발생한 사건입니다(2:13-22). 어째서 그러한 차이가 발생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리고 어느 복음서의 기록이 진실에 가까운 것일까요?

3)    그 주된 이유는 주후 70년에 로마대군의 침입으로 유대인들의 반란이 진압이 되는 과정에서 예루살렘성과 성전이 완전히 붕괴가 되고 유대인들 110만명이 살해가 되고 생존자들도 모조리 가나안 땅에서 쫓겨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유대교의 성전이 파괴가 되고 그들의 약속의 땅이 황폐화됨과 동시에 초대 예루살렘교회와 가나안의 교회들이 전부 역사속으로 사라지고 만 것입니다.

4)    그러므로 그곳 초대교회에서 주후 60년대초부터 회람되고 있던 공관복음이 대부분 사라지고 맙니다. 그것이 애통하여 30년 세월이 지나 주후 90년대초에 소아시아에서 사도 요한이 노년에 옛날 기억을 되살려서 제4복음서를 기록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성전청결사건이란 요한복음의 기록에 따라 공생애를 시작한 다음해 주후 29년 봄 유월절기간에 예루살렘성전에서 발생한 것이 더 맞다고 하겠습니다(2:13-22).

5)    그렇지만 4권의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그 사건의 메시지는 동일합니다. 성전의 뜰에 이방인들이 기도할 수 있는 공간을 허락하신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장사치들에게 세를 주고 그 이권을 챙겨서 산헤드린 대공회와 로마 총독 그리고 헤롯왕가가 부족한 재원을 보충하고 있습니다. 헤롯왕가의 경우에는 예루살렘성전을 증축하는 일에 재정이 부족하자 그 일에 적극 가담하고 있습니다.

6)    그러한 광경을 보시고 예수님이 통탄하시고 동시에 진노하십니다. 그 이유는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천국복음이 아버지 하나님의 뜻인데 선민 유대인들이 유일하게 이방인들이 성전에 들어와서 기도할 수 있는 그 공간마저 장사꾼들의 소굴로 만들고 있으니 그것이 여호와의 심판의 대상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19:45-46);

그 결과 유대인들의 선민사상의 보금자리가 되고 있는 예루살렘성전이 완전히 붕괴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19:43-44).

7)    그렇지만 나사렛 예수가 채찍을 휘둘러서 성전의 뜰에서 장사하고 있는 상인들을 쫓아낸 사건이 유대교지도자들의 공분을 사고 있습니다(47). 그 죄를 묻기 위하여 당장 예수를 체포하고 대공회에서 재판을 진행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천국복음을 듣고 불치의 병과 장애를 고치고자 하는 백성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습니다(49a).

8)    그러므로 유월절에 예루살렘을 방문하고 있는 순례객들이 대부분 돌아가고 난 다음에 그 일을 은밀하게 처리하는 것이 좋겠다고 유대교지도자들이 입을 모으고 있습니다(48b, 22:2). 그러나 유월절 기간에 뜻밖에 예수님의 12사도의 하나인 가룟 유다가 은밀하게 대제사장을 찾아와서 자신이 내부고발자가 되겠다고 제안합니다(22:3-6).

9)    그는 개인적으로 스승 예수가 선민의 제국을 재건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대속의 십자가에 자신을 희생제물로 바치고자 하는 결심이 확고하다는 사실을 확인하자 배신을 선택합니다. 자신의 출세와 입신양명을 위해서 이제는 말을 갈아타고자 하는 것입니다(22:4). 그러나 스승 예수를 처단하는데 성공하자 대제사장이 약속을 파기하고 맙니다(27:4). 절망에 빠진 가룟 유다는 자살을 선택하고 마는 것입니다(27:5-8, 1:18-19).     

결론적으로, 의사 누가가 본문의 말미에 기록하고 있는 예루살렘성전에 대한 예수님의 성전청결사건의 의미가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다음과 같기 때문입니다;

(1)  아버지 하나님께서 만민구원을 위하여 성전의 뜰에 이방인이 성전에 들어와서 기도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을 마련하도록 조치하여 두었는데 그 뜻을 살피지 아니하고 유대교지도자들이 제물장사와 환전장사를 하는 상인들에게 그 장소를 세주고 그 수익을 가지고 산헤드린 대공회의 재정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2)  더구나 예루살렘성전을 증축하는데 있어서 재정이 부족하자 헤롯왕가도 손을 벌리고 있습니다. 로마총독도 성전의 헌금에 손을 대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와 같은 종교적인 타락과 여호와의 뜻에 대한 배신행위를 보고서 예수님이 채찍을 휘두르고 계십니다(45-46).

(3)  그러나 구원주 그리스도에 대한 배척보다 창조주 여호와의 뜻에 대한 반역행위가 더 큰 재앙을 초래하고 맙니다(12:31-32). 그 결과 주후 70년에 로마의 대군이 유대인들의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그만 예루살렘성과 성전이 완파(完破)가 되고 110만명의 유대인들이 도륙이 되고 맙니다(19:44).

(4)  살아남은 유대인들이 약속의 땅에서 다시 쫓겨나게 됩니다. 그러한 역사적인 비극이 임하게 되는 것을 영안으로 미리 보시고 예수님이 예루살렘성에서 친히 눈물을 보이고 계십니다(19:41).

  예수 그리스도의 그 슬픔의 눈물이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오늘날 교회공동체에 다시 흘러내리지 아니하도록 우리 모두 결심을 새로이 하여야 할 것입니다. 아무쪼록 주님처럼 겸손하게 나귀새끼를 타고서 지상명령을 실천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모두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