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설교 모음(손진길 목사의 글)

창세기 제16장 강해설교 모음(손진길 목사의 글)

손진길 2024. 5. 25. 00:33

창세기 제16장 강해설교 모음(손진길 목사의 글)

 

 

1.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그 사람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15:4)는 예언의 말씀을 사래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16:1-2)

 

고대의 족장사회는 가부장 사회입니다. 남자들이 가장이 되고 장자가 족장이 되고 있습니다. 남자가 하늘이며 여자는 땅이라는 남존여비사상이 만연되어 있습니다. 요컨대, 남자에게서 나오는 가 가문을 이어가고 왕좌를 이어가는 고대사회입니다.

그러한 시대에 아브람은 애굽에서 많은 재물을 얻어서 가나안에 들어온 사람입니다. 따라서 그는 가나안 땅에서 많은 가축을 치기 위하여 종들을 대거 거느리고 있습니다. 재산을 지키기 위하여 호위무사도 많이 거느리고 있습니다. 더구나 헤브론에 정착한 후에는 원주민 호족들과 연합하여 침략군을 물리치고 구국의 영웅이 되어 있습니다.

그에 따라 70대 중반의 아브람은 비록 그 출신이 메소포타미아에서 가나안으로 들어와서 살고 있는 이민족인 히브리인이지만 이제는 헤브론에 자신의 아성을 구축하고 있는 힘있는 한사람의 족장입니다. 따라서 그는 그의 부와 권력에 걸맞게 수 많은 여인을 취하여 아들을 생산할 수 있는 위치에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그렇게 하지를 아니하고 있습니다. 그는 조강지처인 사래 한 여인만을 사랑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비록 사래가 불임여성이지만 아브람은 조금도 흔들리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가신 가운데 젊고 충직한 다멕섹 출신 엘리에셀을 양자로 삼고 나중에 헤브론의 기업을 물려주려고 합니다(15:2-3).

참으로 그 시대에 어울리지 아니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 아브람입니다. 아내 사래만을 사랑하는 일편단심, 그리고 다른 여자를 통하여 아들을 생산하고자 하는 생각을 아예 물리치고 있는 그 고지식함이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다고 하겠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 역시 언약을 철저하게 지키시는 신실함을 보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과 아브람은 그 코드가 잘 맞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구체적으로 자녀의 복을 주겠다고 예언을 하십니다: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15:4). 그 예언의 말씀을 엿들은 사람이 안방마님 사래입니다. 남편의 몸에서 상속자인 아들이 탄생할 것이라는 고마운 예언입니다.

그렇지만 사래는 평생 불임인 여성입니다(11:30, 16:2a). 그러므로 현실적으로, 다른 여인에게서 아브람의 아들이 태어나게 된다는 예언입니다. 사래는 그렇게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요컨대, 사래는 오로지 아브람의 씨만을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임여성인 자신이 아들을 생산할 수 있다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불임여성일 뿐만 아니라 그녀의 나이가 이미 75세가 넘고 있으니 여호와의 예언의 말씀을 그렇게 이해하는 것이 당연하게 보입니다(16:3). 게다가 사래는 여호와신앙을 대물림 함에 있어서 아버지의 역할보다 실제로 아기를 보살피고 있는 어머니의 역할이 훨씬 크다고 하는 생각을 미처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사래는 나름대로 결심을 합니다; “안방마님의 자존심을 잠시 내려놓고 사랑하는 남편에게 씨받이 첩을 얻어 주자. 마침 안성맞춤인 젊은 여자가 가까이에 있지 아니한가? 비록 애굽출신 이방인이지만 사래 자신의 시중을 오랫동안 들고 있는 여종 하갈은 충직하다(16:1 의역)”.

그래서 사래는 하갈을 씨받이 첩으로 삼아서 하나님의 예언을 성취하라고 남편에게 강력하게 권합니다. 아내 사래의 말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하여도 곧이 듣는 아브람이므로 순순히 그 제안을 따르고 있습니다(16:2).

아브람이 아내 사래의 말을 따라서 하갈을 첩으로 취한 시기가 가나안 땅에 거주한 지 10년 후라고 모세가 기록하고 있습니다(16:3). 십년 후라는 사실을 기록으로 남기고 있는 것일까요?

2가지 이유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 이미 설명한대로 사래는 불임이면서 동시에 이제는 늙은 몸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둘째, 10년 동안에 그 믿음이 좋던 아브람 부부가 변했다는 것입니다. 옛말에 십 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합니다. 사실은 강산만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생각이 강산의 변화에 따라서 바뀌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아브람 부부가 그러합니다. 그들은 아버지 데라의 재산을 상속하기를 포기하고서 하나님의 명령을 완수하기 위하여 하란에서 가나안으로 남행을 했던 엄청난 믿음의 용사들입니다. 그렇지만 10년 이상의 세월을 이방 땅을 떠돌면서 지내다가 보니까 완전히 현실주의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예를 들면, 씨받이 첩을 얻어서 간단하게 아들을 얻자는 발상이 그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2.    자신의 희생과 헌신으로 하나님의 예언을 이 땅에서 성취하려고 지난 10년 동안 애쓰고 있는 사래(12:15, 16:1-3), 그러나 그녀의 문제점은 무엇인가?(18:12) 그리고 그 부작용은 어떻게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가?(16:4)

 

아브람은 조강지처인 사래만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일편단심인 남편이 아브람입니다. 사래는 마치 남편의 사랑에 보답이라도 하려는 듯이 남편의 목숨을 살리고 잘되게 하고자 언제나 자신의 희생을 감수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애굽에서는 아브람을 살리기 위하여 입 한번 벙긋하지 아니하고 애굽의 황제 바로의 첩으로 끌려가는 수모를 감내합니다(12:15). 지금 본문에서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상속자 아들을 생산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자 남편에게 씨받이 첩으로 자신의 여종을 제공합니다(16:2). 그녀는 사랑하는 남편을 하갈의 방으로 데려다 주는 역할을 감수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눈으로 보자면, 사래의 신앙심은 대단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예언을 성취하는 방법에 있어서 근본적인 몇 가지 문제점을 다음과 같이 지니고 있는 신앙 태도입니다;

(1)  첫째로, 예언의 정확한 의미를 하나님께 여쭈어 보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 말씀의 뜻은 여러 가지로 해석이 가능합니다. 그 가운데 정확하게 어떠한 취지의 말씀인지를 파악해야만 합니다(17:1). 말씀의 뜻이 더 구체적으로 이해가 될수록 더 좋은 것입니다.

(2)  둘째로, 예언을 성취하는 방법이 어떠한 것인지 하나님의 의사를 타진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방법이 어떠한 것인지를 알아야만 합니다. 그 이유는 자신이 선택하고 있는 인간적인 방법과 창조주 하나님의 방법이 다른 경우가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55:8-9).

(3)  셋째로, 사라는 하나님의 역사를 사람의 상식수준에서 그리고 현실적인 제약 속에서만 이해하고 있습니다. 고대 족장사회가 족장의 씨로서 장자이면 누구나 차기 족장이 될 수가 있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생각은 다릅니다; “여호와신앙심을 제대로 대물림하기 위해서는 신앙의 어머니 사래의 몸에서 태어나고 양육을 받는 그러한 아들을 원하고 있습니다”(17:16).

(4)  그런데 사래는 불임인 자신, 늙은 몸인 자신에게서 도저히 득남이 불가능하다고 사람의 상식과 여건을 가지고 판단을 하고 있습니다(18:12).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습니다(18:13-14). 그에 따라 창조주 하나님 여호와는 훗날 99세의 아브라함과 89세의 사라에게 아들을 낳게 해주겠다고 예언하시면서 그들의 몸을 젊게 만들고 특히 사라의 몸을 가임 여성으로 바꾸어서 약속의 아들 이삭을 기어코 생산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고 마시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창조주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이 이 세상에 새로운 창조로 임하기 전까지가 여전히 문제입니다. 비근한 예로, 먼 훗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 이후에 영생의 몸으로 3일만에 부활하는 여호와의 새로운 창조의 역사가 나타나기 이전까지 그 제자들의 신앙태도가 역시 그러한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본문에서는 헤브론의 아성에서 10년 가까이 살아오는 동안에 사래의 신앙이 너무나 세속에 물들어 있으며 영적으로 무디어져 있다고 하겠습니다(34:1, 3:16, 12:2). 그에 따라 그녀가 선택한 씨받이 첩을 들이는 방법이 아브람 집안에 심각한 부작용을 초래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그 내용을 적고 있습니다; “하갈이 임신하매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그의 여주인을 멸시한지라”(16:4). 사래는 여종 하갈이 아브람의 아들을 낳게 되면, 그 아들을 자신의 아들로 삼아서 대를 이어가려고 계획을 했던 족장 아브람의 조강지처이며 안방마님입니다(30:3).

그러나 하갈이 아들을 낳기도 전에 안방마님 사래에게는 결혼한 여자가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고난과 비참함이 찾아오고 있습니다. 하갈이 안주인인 사래를 멸시한 것입니다. 그것은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가 불임 여성이었을 때에 자식을 생산한 제2부인 브닌나로부터 받았던 모욕보다 더 지독한 것입니다(삼상1:2, 6).

자신의 몸종 출신이며 씨받이 첩에 불과한 애굽여인 하갈이 감히 하늘과 같은 상전이며 조강지처인 사래 자신에게 불경하기가 그지 없는 것입니다. 그 수모와 수치는 어떻게 보면, 사래 자신이 자초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정확한 뜻을 살피거나 물어보지도 아니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인간의 것 정도로 치부하고서 함부로 사람의 편법을 사용한 그 결과가 지금 사래 자신을 그렇게 괴롭히고 있는 것입니다.

 

3.    5절과 제6절 사이에 빠져 있는 아브람의 기도는 무엇인가?

 

사람이나 사회가 맞이하고 있는 위기와 어려움은 두 가지 종류로 분류가 가능합니다; 첫째가 내우’(內憂, 안에서 일어나는 걱정거리)이고, 둘째가 외환’(外患, 바깥에서 오는 환난)입니다.

여기서 외환의 경우에는 그저 용감하게 외부에서 침입해오는 적에게 맞서면 됩니다. 적을 막기 위해서 온 집안사람들이 떨치고 일어나기 때문에 내부의 결속력은 오히려 강화됩니다. , 집안의 걱정거리가 일시에 해결이 되는 유익함이 있습니다.

이민자의 삶을 살고 있는 아브람 부부의 입장에서는 외환은 늘 있는 일이었고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능수능란합니다. 그렇지만 막상 그들 부부 사이에 내우가 생기게 되자 그 해결방법을 쉽게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내 사래가 임신한 하갈의 불량한 태도문제를 가지고 남편에게 대들자 아브람은 생전 처음 당하고 있는 가정의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해야만 할지 걱정이 태산인 것입니다.

임신을 하게 되었다고 하늘과 같은 상전 사래를 감히 멸시하고 있는 하갈을(16:4) 어떻게 다스리면 될까요? 그 총명하고 아름다운 신앙의 여인 사래가 집안 내에서 슬기롭게 다스리는 방법을 스스로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존심이 모두 상해버린 사래가 여성 특유의 앙칼진 모습으로 남편 아브람에게 생전 처음으로 대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 대목의 기록을 쉽게 풀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저 씨받이 용도로만 사용하라고 하갈을 당신에게 첩으로 주었더니 도대체 어떻게 했기에 감히 하갈이 나에게 멸시하는 태도를 취할 수가 있습니까? 혹시 젊은 여자 하갈을 나보다 더 좋아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지 아니하다면 이러한 수모까지 받아가면서 아들을 얻을 생각이 이제는 없어졌으니 속히 결단을 내려주십시오. 나는 억울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억울함을 아실 것입니다”(16:5).

사래에게는 이제 남편도 믿을 만한 존재가 되지를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여전히 아내 사래만을 사랑하고 있는 아브람으로서는 무척 억울하고 당황스럽습니다. 아내 사래의 또 다른 모습을 생전 처음으로 대하고 있는 아브람은 자신의 능력과 판단으로써는 그 해결책을 찾지를 못하겠기에 그저 눈물로써 하나님께 호소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처음으로 맞이하는 가정사의 어려움, 그 내우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부디 알려달라고 매어 달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분명히 본문 제5절과 제6절 사이에 삽입이 되어 있어야만 하는 그 기도의 내용에 대해서 모세는 완전히 생략을 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스토리를 전개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글을 글자 그대로만 보지를 말고 글자와 글자 사이, 그리고 문단과 문단 사이의 뜻을 이해하면서 더 깊이 있고 폭넓게 살피라는 요청인 것입니다. 사람의 글도 행간(行間, 글자의 줄과 줄 사이)의 뜻을 살피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의 감동으로 쓰여진 성경말씀은 더욱 그렇게 세심하게 살피고 음미해야만 합니다.

진지하게 하나님 말씀의 뜻을 알고자 묵상을 하고 기도를 하게 되면, 진리의 성령님의 도우심이 있게 됩니다. 어떤 경우에는 마치 에스겔처럼 하나님께서 말씀하고 계시는 그 사건의 현장으로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직접 들어가서 믿음의 눈으로 보고서 영적인 교훈을 얻게 되는 은혜까지 있게 됩니다(40:1-4).

그 점을 예수님은 눈이 있는 자는 보고, 귀가 있는 자는 들으라!는 말씀으로 대신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8:18, 8:8, 14:35). 아무쪼록 그와 같은 이해심을 가지고 성경말씀의 인과관계를 기도하는 심정으로 깊이 묵상하시기를 바랍니다.

 

4.    아브람이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처와 첩 사이의 갈등을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해결하고 계시는가?(16:7-13)

 

사람이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를 하나님께서는 폭넓게 근본적으로 해결을 하실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능력의 개입은 아무 때나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당사자의 솔직한 고백과 의뢰가 있어야만 합니다; “자신의 능력으로써는 해결할 수가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실토를 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믿고서 하나님의 뜻에 맞게 해결을 해달라고 전적으로 의뢰를 해야만 합니다”.

그렇게 당사자의 고백과 의뢰를 기다리시는 이유는 이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주셨기 때문입니다(1:26). 비록 흙으로 사람의 모양을 만드셨지만 동물과는 달리 그 코에 하나님의 형상을 생명의 기운으로써 불어 넣으신 것입니다(2:7).

그래서 인간은 지적인 성장 뿐만 아니라 감정을 예술로 승화시키는 능력까지 얻게 됩니다. 더구나 자유의지를 가지게 됨으로써 만물의 영장이 되며 동시에 하나님의 청지기가 되고 있습니다(1:26-31, 2:8).

사람은 자신이 지니고 있는 자유의지로써 하나님을 주인으로 선택하고 그 전능하심과 새로운 창조를 찬양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입니다. 그것만큼 이 세상에서 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창조주를 기쁘게 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으로부터 그 영광을 얻고자 하십니다. 아브람이 자신의 한계와 유한함을 알고서 하나님께 하갈과 그 뱃속의 태아를 살려달라고 호소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기쁘게 그 일을 해결해주겠다고 약조하십니다.

그 내용이 다음과 같습니다; “사래의 소원대로 해주어라. 사래가 만족할 수 있도록 하갈의 처분권을 사래에게 맡겨라. 만약 하갈이 견디지를 못하고 집에서 냉정하게 내어 쫓긴다면 나머지 일은 내가 모두 처리를 해주겠다. 그 일이 오히려 하갈과 그 뱃속의 아이에게는 복이 될 것이다. 내가 충분한 보상을 해줄 것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아브람의 간구가 있었기에 그러한 구체적인 응답이 있었다고 판단이 됩니다. 그렇게 볼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아브람이 시행을 하고 있으며 광야에서 하나님께서는 특별히 자신의 사자를 보내어 그렇게 사후조치를 확실하게 행하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16:6-13).

어쨌든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입니다. 아브람과 사래, 그리고 하갈과 이스마엘 모두를 살리시는 하나님의 지혜의 역사인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모든 사람의 생명을 살리시는 절대선의 하나님이심을(3:4, 10:18)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 본문의 내용이라고 하겠습니다.

 

5.    아브람의 가정으로 되돌아가서 사래를 섬기게 되면 하갈이 얻게 되는 복은 무엇인가?

 

2가지의 복을 얻게 될 것임을 하나님께서 사자를 하갈에게 보내어서 약속을 하고 계십니다(16:7-12). 그 약속은 하갈이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한 때에 벌써 주어진 것입니다(16:6, 8). 하갈은 여주인의 학대를 견디지 못하여 무작정 도망을 쳤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막상 수르 광야 길로 들어서자 살길이 막막해지고 말았습니다. 바로 그때에 샘물 곁에서 하나님의 사자가 그녀를 만났습니다(16:7). 그리고 하나님의 조건부적인 복을 예언으로 전해준 것입니다.

그 내용이 다음과 같습니다;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내가 네 씨를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네가 임신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 그가 사람 중에 들나귀 같이 되리니 그의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지며, 그가 모든 형제와 대항해서 살리라 하니라”(16:9-12).

요약을 해보면, 하갈이 무조건 여주인 사래에게 되돌아가서 복종을 하는 것이 축복의 조건입니다. 그리하면 ①첫째로, 하갈의 자손을 번성하게 해주는 하나님의 복이 임합니다(16:10). 둘째로, 뱃속의 아이를 강한 아들로 만들어서 장차 광야를 지배하는 대 영웅이 되게 해주겠다는 것이 여호와의 복의 내용입니다(16:11-12).

그 약조 그대로 훗날 이스마엘은 무력으로 광야의 지배자가 되며 그 슬하에서 13명의 족장이 탄생을 하게 됩니다(25:12-18).

 

6.    뱃속의 아기가 얻게 되는 이름 이스마엘의 뜻은 무엇이며 그의 일생은 어떠할 것인가?(16:11-12)

 

약속의 아들인 이삭뿐만 아니라 그의 이복 형인 이스마엘의 이름자도 하나님께서 그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지어 주신 것입니다(16:11, 17:19). 먼저, ‘이삭이라는 이름의 뜻은 웃음입니다. 그렇게 작명이 된 이유는 늙은 아브라함 부부가 그들 사이에 아들이 태어날 것이라는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을 전적으로 믿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 부부의 비웃음이 훗날 아들이 태어나는 것을 보게 되면 감탄과 기쁨의 웃음으로 바뀌게 될 것임을 아시고서 미리 아들의 이름을 이삭으로 부르도록 하라고 명령을 하신 것입니다(17:17-20, 21:6-7).

그 깊은 뜻은 이삭이라는 아이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들은 아브라함 부부의 아들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21:33, 22:2, 10-14).

하나님께서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셔서 하나님 신앙을 새롭게 하고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시키신다는 강한 복음적인 뜻이 이미 이삭의 이름 속에 들어 있다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3:12-17, 4:23, 31, 11:17-19).

반면에, ‘이스마엘이라는 이름의 뜻은 다릅니다. 그것은 사람의 고통의 소리를 하나님께서 들으신다는 의미입니다(16:11). 하나님 신앙을 새롭게 한다거나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한다는 소위 큰 복의 의미가 아닙니다. 그와 같은 영적인 의미보다는 육체적인 세상적 의미가 더 강합니다.

구체적으로, 하갈 모자의 경우처럼 세상에서 학대를 당하는 자의 고통의 절규를 들으시고 살 길을 열어 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의미에서 광야에서의 생존과 자손의 번영이 가능하도록 이스마엘을 강한 사람 들나귀같이 만든다는 축복의 약속이 나타나고 있습니다(16:12).

그 말씀 그대로 이스마엘은 강한 남자의 상징이 되고 있습니다. 그는 광야와 사막의 지배자로 우뚝 서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스마엘과 그의 자손들이 가지게 되는 신앙의 색깔입니다.

장차 그들은 광야에서 샘물이 솟아나고 먹고 살 길이 열리며 다른 족속과의 전쟁에서 이기게 되면 무조건 하나님의 은혜인 줄 알고 찬양을 드리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반대의 경우가 되면, 하나님은 그들의 원망의 대상이 되고 잊혀지는 존재가 되고 말 것입니다. 나아가서, 이스마엘의 자손들은 자신들의 소원을 더 잘 들어줄 수 있는 새로운 신을 만들어서 모시게 될 것입니다.

 

7.    하갈이 발견한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은 오늘 날 중동 땅에 어떠한 이름으로 남아 있는가?(16:13-16)

 

하나님의 사자가 가나안 남부 네게브 지역에서 애굽으로 향하는 수르 광야 길 샘물 곁에서 임산부 하갈을 만나고 있습니다(16:7). 하갈에게 엄청난 세상적인 축복을 해주고 있습니다(16:9-12). 하갈은 감격합니다. 그래서 그녀 모자의 고통의 소리를 들어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자신의 절박한 처지를 돌아보아 주신 하나님을 기념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사자를 만난 그 샘의 이름을 브엘라해로이라고 부릅니다(16:14). 그 뜻은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입니다(16:13).

당시 아브람은 헤브론에 살고 있습니다. 그곳은 예루살렘에서 서남쪽으로 30km정도 떨어진 곳입니다. 다시 서남쪽으로 43km 더 나아가면 브엘세바에 이르게 됩니다. 브엘세바에서 조금 더 남쪽으로 내려가면 브엘라해로이가 위치하고 있으며(16:14) 더 남하하면 국경도시인 가데스 바네아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임산부 하갈이 고향이 있는 애굽으로 탈출하고자 헤브론에서 남쪽으로 얼마나 멀리 도망을 쳤는지를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가히 필사적인 도주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갈에게 엄청난 복을 주는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조건부입니다. 하갈은 그 복을 받아서 아들로 태어날 이스마엘에게 주고 싶어합니다. 자신에게 아무리 가혹한 처벌이 내린다고 하더라도 아들의 장래를 위해서는 그것을 감수하고자 합니다. 그것이 어머니의 마음입니다. 그녀의 마음이 브엘라해로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와 같은 시각에서 살펴보면, 하갈은 하나님에게 끝까지 자기 모자를 지켜 주시고 살펴달라는 간구를 하면서 그 마음을 브엘라해로이라는 지명으로 남기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녀의 간구에 긍정적으로 응답을 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하갈은 무사히 아브람의 집에 당도했으며 드디어 이스마엘을 순산하게 됩니다(16:15). 그 아들이 아브람의 서장자이며 훗날 적장자로 태어나는 이복동생 이삭보다 14살이 연상입니다. , 이스마엘은 아브람 나이 86세에 태어나며 이삭은 100세에 태어나는 것입니다(16:16, 21:5).

그런데 비록 이복형제간이지만 이삭은 형 이스마엘을 굉장히 좋아합니다. 그리고 서모인 하갈도 많이 생각합니다. 그래서 훗날 이삭은 후처 그두라와 함께 살고 있는 아버지를 떠나서 남방 브엘라해로이에서 오래 살게 됩니다(24:62).

그런 동생 이삭을 이스마엘도 좋아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버지 아브라함의 장례를 그들 형제가 함께 사이 좋게 지내고 있습니다(25:9). 그리고 이삭은 부친상을 치른 후에도 한동안 브엘라해로이에서 살고 있습니다(25:11). 한 마디로, ‘브엘라해로이는 이삭의 포용력과 인간미를 동시에 보여주고 있는 뜻 깊은 장소라고 하겠습니다.

 

(참고자료) 창세기 강의 골자 18(16:1-16)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강의일; 주후 2015 12 10()

 

1.      자신의 희생을 각오하고 있는 사래의 위대한 선택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는 까닭은 무엇인가?(15:4, 16:1-2)

(1)   아브람 부부는 다음과 같은 엄청난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을 헤브론에서 듣게 ; “여호와의 말씀이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사람(다메섹 엘리에셀) 상속자가 아니라. (아브람) 몸에서 자가 상속자가 되리라 하시고”(15:4).

1)      시점은 가나안 땅에 들어온 10년쯤 지난 때임(16:3). 아브람 85, 사래 75세로 보임(그들 부부는 10 차이임, 17:17). 왜냐하면, 아브람 75세에 가나안에 들어왔으며(12:4), 그는 86세에 이스마엘을 생산하고 있기 때문임(16:16).

2)      처음 예언의 말씀을 들었을 그들 부부는 어리둥절했음. 왜냐하면, 85 노인인 아브람이 아들을 낳을 있을지 수가 없으며 더구나 그의 아내 사래는 평생 불임인 여성이었기 때문임(11:30).

3)      여자인 사래가 마치 옛날 하와처럼 우직한 아브람보다 머리회전이 빠름(3:1-6). 따라서 하나님의 복을 자신들의 가문에 얻기 위하여 당시 사회적으로 용인이 되고 있는 가장 세상적인 방법 하나를 찾아내고 있음.

(2)   인간적으로 사래는 하나님의 예언을 이루기 위하여 위대한 결심을 하게 .

1)      자신의 희생을 무릅쓰고 있음. 평생 일편단심 조강지처 사래만을 사랑하고 있는 남편에게 씨받이 첩을 얻어주고자 결심한 것임(16:1-2).

2)      상식적으로, 젊은 첩을 남편에게 얻어주고 더구나 첩의 아들을 얻어서 남편의 상속자로 삼는다고 하는 것은 여자인 안방마님의 입장에서는 견딜 없는 모욕이며 치욕인 것임.

3)      그러나 사래는 남편 아브람을 매우 사랑했으며 하나님의 예언이 이루어지기를 바래서 자신의 희생을 각오하고서 결단을 내리고 있는 것임.

(3)   하지만 다음과 같은 신앙상의 근본적인 문제점을 안고 있음;

1)      첫째, “(아브람) 몸에서 ”(15:4) 단순하게 아브람의 핏줄이라는 예언인지 아니면 사래까지 포함하고 있는 예언인지 불명확한 것임(1:12-13). 따라서 가부장 족장사회의 전통에만 억매여 함부로 자신의 판단을 밀어 부치지 말고 사래가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의 정확한 뜻을 타진해야만 했던 것임.

2)      둘째, 이방인 애굽 출신 여종 하갈을 첩으로 삼았기에 아브람의 가계에 장차 우상문화와 이방신의 영향이 들어오게 되는 것임. 예를 들면, 솔로몬의 아내인 많은 이방여인들의 이방 숭배의 영향(왕상11:1-3), 그리고 이스마엘의 후손으로 자처하는 회교권의 등장이 그러한 것임.

 

2.      인위적인 위대한 결정이 아니라 신위적인 거룩한 결정을 얻자면 사래가 어찌하여야 하는가?(16:1-2, 17:15-19, 3:5)

(1)   인간적인 그리고 세상적인 선입견을 일단 모두 내려놓고 창조주 하나님의 폭넓은 견해를 여쭈어보아야만 하는 것임. 그것은 마치 모세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인간적인 세상의 신발을 벗는 것과 같은 것임(3:5).

(2)   그리고 아무리 위대한 신앙인이라고 하더라도 역시 시공간에 갇혀서 살아가고 있는 피조물인 인간이기 때문에 보는 눈과 생각하는 것이 무지하게 좁다고 하는 점을 솔직하게 인정해야만 하는 것임. 따라서 모두를 살릴 있는 하나님의 대안을 여쭈어보아야만 하는 것임.

(3)   여기서 역시 하나님의 진정한 뜻은 모두를 살리고자 하시는 것임. 구체적으로, 아브람 뿐만 아니라 사래 역시 살리고자 하시는 것이 하나님 예언의 특징임.

1)      하나님의 뜻은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음; “아브람이 이에 하나님께 아뢰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아니라. 아내 사라가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17:18-19). 그런데 사래가 지레짐작을 하고 하나님께 묻지 아니하였기에 실수를 인간적으로 저지르고 있는 것임.

2)      흔히 어줍잖게 예수님의 희생적인 삶을 흉내 내다가 엄청난 신앙상의 잘못을 저지를 수가 있음. 그것은 가장 중요한 선결문제 하나님 아버지의 깊은 뜻을 정확하게 묻지를 아니하고 스스로 결정한 경우임.

3)      더구나 아버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자신의 희생을 각오하고서 위대한 결심을 하는 경우가 그러함. 그러나 그것은 인간적으로 위대한 결정일 수는 있지만 하나님의 뜻을 끝까지 묻고서 자신의 계획을 버리는 거룩한 결정은 아닌 것임.

4)      예를 들면, 역사적으로 십자군 전쟁의 빌미를 제공하고 있는 광신도 피터의 선전선동사건이 그러한 것임. 그는 무장도 되어 있지 아니한 평민 수만 명을 그의 맹신적인 웅변술로 모집하여 무조건 예루살렘으로 진군하다가 대부분 죽음으로 몰아넣게 .

 

3.      참고로, 선지자 중의 선지자인 엘리야에게서 엿볼 있는 인간판단의 한계(왕상18:40, 19:2-3).

(1)   한때 엘리야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5:17) 우상 바알을 섬기는 선지자 450명을 모두 토벌한 있는 용감한 선지자였음(왕상18:19, 40).

(2)   그러나 막상 바알 신을 섬기는 왕후 이세벨의 군사에게 쫓기게 되자 너무나 낙담하게 (왕상19:1-2). 조국 이스라엘 왕국에서 자신을 숨겨줄 백성을 사람도 만나지 못하여 그것을 원망하면서(왕상19:4, 10) 부득이 남조 유다 왕국으로 도망을 치고 있음(왕상19:3)

(3)   그러나 호렙 산에서 그를 만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왕국에서 의인 7천명을 남기신다고 말씀하시고 있음(왕상19:18).

 

4.      참고로, 하나님은 엘리야를 어떻게 바로 세우고 계시는가?(왕상19:6-18)

(1)   우선 탈진한 엘리야에게 숯불에 구운 떡과 물을 공급해주심(왕상19:5-7). 그것은 부활하신 주님이 갈릴리로 제자를 찾아오셔서 하신 말씀과 같은 것임; “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21:9),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님이신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그들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21:12-13).

(2)   다음은 하나님의 호렙으로 가서 여호와를 직접 만나고 다시 사명을 받으라고 하시는 것임(왕상19:8-9).

(3)   크고 강한 바람, 지진, 또는 가운데 하나님이 계시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세미한 음성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을 엘리야가 만나게 (왕상19:11-14). 그때부터 엘리야는 바알 선지자 450명을 쳐죽이는 엄청난 영향력, 기도를 통하여 비를 멈추고 또한 내리게 하는 기적 등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사람의 마음을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사역에 나서게 .

(4)   혼자서 하나님의 일을 다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제자를 양육하고 선지자로 세워서 함께 동역을 하고자 (왕상15-21, 왕하2:3).

 

5.      씨받이 하갈이 감히 여주인 사래를 멸시할 있는 이유(16:3-4, 삼상1:5-6).

(1)   자신이 임신함을 알고서 여주인 사래를 멸시한 것임. 당시 가부장 족장사회에서는 장자가 재산을 상속하게 . 아들이 없는 과부는 재산이 없고 멸시와 괄시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마는 것임. 훗날 유다의 맏며느리 다말의 처지가 그러한 것임(38:6-8). 그리고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의 처지도 그러함(삼상1:6).

(2)   자신의 몸종을 씨받이로 주어 아들을 낳으면 자신의 아들로 양육하려고 계획했던 사래는 실망을 하게 . 그래서 하갈을 내어 쫓으려고 결심을 것임(16:5).

 

6.      처첩(妻妾)사이의 갈등에 대하여 어째서 가장(家長) 아브람에게 책임이 있는가?(16:5ab)

(1)   자신의 가문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에 대해서는 족장이 책임을 지도록 되어 있는 사회가 바로 고대가부장 족장사회인 것임.

(2)   특히 젊은 첩의 간을 키워준 것이 늙은 남편 아브람이므로 안방마님 사래가 정식으로 항의를 것임(16:5ab).

 

7.      여호와 하나님께 판단을 맡기고 있는 사래와 말을 따르고 있는 아브람 신앙의 위대함(16:5c).

(1)   사람은 잘못과 실수를 하지만 그것을 고치고 바로 잡으시는 분은 창조주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아브람 부부가 인정하고 있음. 그래서 사래가 최종판단을 위하여 남편 아브람이 반드시 하나님께 응답을 받아서 처결하라고 당부를 하고 있는 것임(16:5c).

(2)   하나님 앞에 가장이며 선지자인 아브람 자신의 위치를 인정해주고 있는 아내 사래가 고마워서 아브람 역시 하나님께 바로 간절하게 기도한 것으로 추정이 되고 있음. 왜냐하면 6절에서 하나님의 응답이 바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임.

 

8.      가장(家長) 아브람의 기도와 하나님의 응답에 대하여(16:6);

(1)   아브람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은 심히 간단함. 아내 사래의 요구를 100% 수용하라는 것임(16:6a).

(2)   자신의 자식을 임신한 하갈을 내쫓게 되면 어떻게 것인가? 걱정이 태산이지만 아브람이 하나님의 명령을 그대로 따르고 있음. 이유는 모든 뒷감당을 하나님께서 책임지시겠다고 하는 언질이 있었기 때문으로 보이는 것임(16:6b-7). 하나님은 자신의 명령을 따르는 자에 대해서는 전능하신 창조주의 능력으로 뒷배를 보아주시는 것임(28:18-20).

(3)   결국, 하나님의 말씀과 예언을 정확하게 파악하여 그대로 따르게 되면 그렇게 모두를 살리는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것임. 그것이 말씀의 능력임.

 

9.      여호와 하나님께서 가출한 하갈을 보호하시고 축복의 언약을 주실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16:9-10)

(1)   비록 늦었지만 아브람과 사래가 이제는 최종판단을 반드시 하나님께 여쭈어 보고서 내리고 있으며 그대로 시행하고 있기 때문임(16:5-6).

(2)   그것은 사래가 제멋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여 씨받이를 들이고 제안을 아브람이 하나님께 여쭈어보지도 아니하고서 덥석 따르고 있는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것임(16:2).

(3)   그래서 가출한 하갈을 하나님께서 보호하시고 있음. 사자를 보내어 광야 샘물 애굽으로 향하는 (15:22, 수르광야로 들어가는 길임) 곁에서 하갈을 만나게 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는 것임(16:7-12).

 

10.   하갈이 아브람에게 낳아주는 서장자 이스마엘에게 주시고 있는 하나님의 축복의 내용(16:11-12, 17:18-20, 21:13).

(1)   하갈이 마음을 돌려서 여주인 사래를 섬기게 되면 복이 내리게 (16:9). 아들을 낳을 것이며 자손이 번창할 것임(16:10-11a).

(2)   어미 하갈의 고통을 들으시고 아들을 크게 주시겠다는 의미로 하갈이 낳는 아들의 이름을 이스마엘 미리 하나님이 작명을 해주심(16:11b). 그것은 크나큰 세상적인 축복인 것임. 따라서 20세기에 그들의 후손들이 살고 있는 중동 사막에서 엄청난 석유가 터져 나오고 있는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닐 것임.

(3)   특히 이스마엘의 후손들이 척박한 광야와 사막에서 살게 될지라도 자생력이 강한 야생나귀 들나귀같이 강인한 족속이 것임을 예언해주고 있음(16:12). 따라서 그들은 전쟁으로 패망하는 것이 아니라 장차 복음으로 변화를 받게 것임(19:23-25, 옛날 역사상 처음으로 앗수르 제국이 그들을 모두 아우르고 있음).

 

11.   브엘라해로이 의미와 훗날 이삭이 그곳에 살게 되는 이유(16:13-14, 24:62-63, 25:9-11).

(1)   정처 없이 고향 애굽으로 도망을 치던(16:6b) 하갈은 자신과 태중의 아이에게 엄청난 축복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음(16:13). 마음을 담아서 가데스’(가나안의 가장 남서쪽의 국경도시, 14:7, 13:26) 베렛 사이의 그곳의 지명을 스스로 브엘라해로이라고 부르고 있음(16:14).

(2)   브엘라해로이 뜻은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여기서 뵈었다 것임(16:13-14). 훗날 샘물 곁에서 이삭이 살게 (24:62, 25:11). 그는 14 위의 이복 형인 이스마엘을 친형같이 따르고 있는 좋은 동생임. 따라서 이스마엘도 이복 동생 이삭과의 관계가 좋음. 그들은 우애 깊은 형제로서 훗날 아버지 아브라함의 장례를 함께 치르고 있음(25:9).

 

12.   여종 하갈이 낳은 아들의 이름을 이스마엘이라고 부르고 있는 아브람 가정의 하나님신앙의 모습(16:15-16).

(1)   집으로 돌아온 하갈이 브엘라해로이에서 만난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을 전달하자 아브람의 가정에서는 말씀에 따르기로 . 이에 따라 하갈에게서 태어나는 서장자의 이름을 하나님께서 작명하신 이름 그대로 이스마엘 부르게 . 그때부터 아브람의 집안에는 다음과 같은 가지의 신앙행태가 공존하고 있음;

1)      튼튼한 아들 이스마엘을 얻게 이방여인 하갈은 하나님이 주신 세상적인 번영의 축복을 의지하게 (16:15).

2)      반면에 자신의 친자식이 없는 사래는 영적인 구원을 소망하면서 더욱 창조주 하나님을 의지하게 .

(2)   하갈의 현세적인 의미의 신앙과 사래의 영생을 희구하는 믿음 사이의 구원의 개념차이가 앞으로 갈등을 일으키면서 성경의 주제가 되고 있는 것임. 예를 들면, 히스기야 왕의 현세적인 축복신앙과(39:8) 선지자 이사야의 영생을 소망하는 메시아 사상이 다른 것과 같은 것임(40:5).

 

13.   하나님의 예언이 제대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얼마나 기다려야만 하는가?(16:16, 17:19, 18:10-14, 21:1-7)

(1)   우선 안방마님 사래가 열국의 어머니 사라 되며(17:15-16), 그녀에게서 약속의 아들 이삭 태어나야만 하는 것임(17:19, 21:2).

(2)   인간적인 육체적 힘에 의존하는 신앙이 하나님이 주시는 기적과 같은 부활의 몸을 바라보는 신앙으로 바뀌어야만 하는 것임(17:17-19, 18:10-15, 3:10-12).

(3)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을 비웃는 것이 아니라(17:17, 18:11-12) 창조주의 능력으로 말씀이 현실화되는 것을 믿어야만 하는 것임(21:6-7). 그것이 사람의 상식과 과학을 뛰어넘어 정확하게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신앙인 것임.

 

14.   아브라함의 서장자 이스마엘 적장자 이삭사이의 투쟁이 결국 오늘날까지 회교와 기독교 사이의 이념 분쟁의 빌미를 제공하고 있는데 창세기 16장에 따르게 되면 분쟁의 핵심과 시원(始原, 최초의 원인) 무엇인가?(16:2, 17:17-18)

(1)   안방마님 사래의 성급한 인간적인 그리고 세상적인 판단에서부터 비롯되고 있는 재앙인 것임(16:2).

(2)   그리고 하나님께서 나중에 정확한 예언의 뜻을 말씀해주셔도 아브람과 사래가 역시 믿지를 아니하고 비웃고 있음(17:17-18, 18:11-15).

1)      그것은 생물학적으로 불가능한 말씀을 하나님이 하시고 있다는 인간적인 판단이 앞서고 있기 때문인 것임. 마치 복음의 비신화화’(demythologization) 주장하면서 이성적으로 이해가 가능한 하나님의 말씀만을 믿고 있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견해와 같은 것임.

2)      그것 역시 하나님을 창조주로 대접하고 있는 온전한 신앙이 아닌 것임.

 

15.   새로운 역사를 창조할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1)   만약에 사래가 성숙한 신앙인 사라의 입장에서 하나님의 뜻을 정확하게 묻고서 약속의 아들을 낳기를 기다렸더라면 이스마엘의 탄생과 그들의 후손인 회교의 비극적인 역사는 없었을 것임.

(2)   그러나 인간은 항상 사래와 같은 잘못을 저지르고 있음. 따라서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구주 그리스도가 필요한 것임. 구체적으로, 그리스도의 대속의 십자가가 필요함.

(3)   나아가서 현세적인 하갈과 이스마엘의 축복사상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영생의 구원을 현실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의 역사가 강력하게 요청이 되고 있는 것이라고 하겠음(24:45-53, 1:11, 2:32-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