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설교 모음(손진길 목사의 글)

창세기 제18장에 대한 강해설교 모음(손진길 목사의 글)

손진길 2024. 5. 26. 19:19

창세기 제18장에 대한 강해설교 모음(손진길 목사의 글)

 

 

1.    하나님과 천사들의 현신과 아브라함(18:1-8)

 

창세기 제18장의 문을 여는 구절이 다음과 같습니다; “여호와께서 마므레의 상수리 나무들이 있는 곳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날이 뜨거울 때에 그가 장막 문에 앉아 있다가 눈을 들어 본 즉 사람 셋이 맞은 편에 서 있는지라.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 문에서 달려나가 영접하여 몸을 땅에 굽혀 이르되,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시옵고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사 당신들의 발을 씻으시고 나무 아래에서 쉬소서. 내가 떡을 조금 가져 오리니, 당신들의 마음을 상쾌하게 하신 후에 지나가소서. 당신들이 종에게 오셨음이니이다. 그들이 이르되 네 말대로 그리하라”(18:1-5).

본문은 다음 네 가지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1)  첫째, 아브람이 열국의 아비아브라함이 된 후에 행한 일이 할례의 시행과 하나님 일행에 대한 대접이라는 것입니다.

(2)  둘째, 그가 헤브론 땅 마므레에 오래 머물고 있다는 것입니다.

(3)  셋째, 여호와께서 혼자가 아니시고 천사 둘과 함께 동행하여 현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4)  넷째, 여호와의 종인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마음을 상쾌하게 해주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부터 위의 4가지 사실에 대하여 설명을 하고자 합니다.

첫째로,할례는 이제부터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겠다는 언약의 표시입니다(17:7, 10). 그러므로 열국의 아비가 된 아브라함은 그의 자손들이 부디 그렇게 살아갈 수 있기를 기원하면서 할례를 시행합니다(17:24). 하나님의 명령대로 아브라함은 아들 이스마엘을 비롯하여 집안의 모든 남자와 함께 할례를 받은 것입니다(17:23-27).

할례의 의미를 열국의 아비아브라함의 입장에서 살펴보면 그 뜻이 더욱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할례는 하나님을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하나님 중심의 신앙을 말하고 있으며 그 신앙을 대물림할 수 있도록 믿음의 조상답게 살겠다는 다짐입니다. 그렇게 마음에 결단을 하고 사는 자는 생각과 행동이 달라지기 시작하고 결국은 삶의 방식이 달라집니다”.

그 구체적인 모습이 본문에서 가장 알기 쉽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장막 문에 앉아 있습니다(18:1). 그때 하나님과 두 천사가 현신하여 장막 앞 상수리 나무 아래에 서 있습니다. 그들이 누구인가를 아브라함이 금방 알아채고 있습니다(18:2). 한 마디로, 아브라함은 영적인 안목이 뛰어납니다.

그가 평소 하나님을 많이 사모하고 있으며 계시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하겠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그 일행을 자기 집에 모시고 잘 대접하고 싶어합니다(18:3-5).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허락을 받아서 당장 실천을 하고 있습니다(18:6-8). 요컨대,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하고 또한 잘 대접하고 싶어하는 것이 할례를 받은 자의 변화된 삶의 방식의 특징이라고 하겠습니다.

둘째로, 아브라함은 할례를 받기 전에는 아브람으로 살았습니다. 이제는 열국의 아비답게 아브라함으로 살아가야만 합니다. 그 변화가 그의 나이 99세에 이루어지고 있습니다(17:1, 24). 한 마디로, 할례에 이어서 새로운 삶의 출발이 있어야만 합니다.

특히 아브라함 부부가 약속의 아들 이삭을 잉태하기 위해서는 변화된 삶의 모습이 필요합니다. 그렇지만 현실적으로는 그것이 결코 쉽지가 않습니다. 아브람이 가나안 땅 구국의 영웅으로서 헤브론에 자신의 아성을 짓고서 그만 성주로서 너무 오래 안주를 했기 때문입니다.

75세에 가나안 땅에 들어온 아브람이 잠시 애굽을 다녀온 후 부자가 되어서 헤브론 땅에 정착을 했기 때문에, 따지고 보면 20년이 넘는 세월을 헤브론에서 지내 온 것입니다. 이제는 헤브론에서의 삶에 너무 익숙합니다. 그러므로, 다시 고생스러운 떠돌이 유목민의 삶으로 돌아가고 싶지가 아니한 것입니다.

아무리 더 큰 세상을 후손들에게 물려주기 위해서는 헤브론의 아성을 떠나야만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결코 쉽지가 아니한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도와 주시고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등 염해 지역에 대한 불 심판으로 말미암아 그 피해가 헤브론으로 몰려온 것입니다(19:27-28).

불 심판에 따른 열기와 재가 동풍을 타고서 헤브론으로 번지자 가뭄이 찾아 옵니다. 별 수 없이 아브라함 가족이 살 길을 찾아서 비옥한 지중해 연안 블레셋의 땅으로 이주를 하게 됩니다(20:1). 그러나 그 이주도 따지고 보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 이유는 때를 맞추어서 소아시아의 헷 족속들이 남하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랄 땅을 다시 떠나온 아브라함이 나중에 헤브론에서 그들을 만납니다(23:3). 자신의 아성과 땅도 새로운 정복민이 벌써 점령한 상태입니다.

그에 따라 훗날 아브라함은 어쩔 수 없이 아내 사라를 장례하고자 다시 거금을 주고서 막벨라 굴을 사게 됩니다(23:16-20). 결국 새로운 정복전쟁을 피할 수 있도록 아브라함의 가족을 미리 피난하게 하신 여호와의 배려와 섭리를 여기서 보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로, 창조주 하나님께서 천사 둘과 함께 동행을 하고 있습니다. 혼자서도 하나님은 전능자이십니다(17:1). 그런데 왜 천사 둘과 함께 구태여 3사람의 모습으로 아브라함 앞에 현신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무엇을 보여주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인생의 길에는 동행이 있으며 그 동행이 누구인가?가 중요하다는 의미를 시사해주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아브라함의 경우에도 동행이 있습니다. 늘 아내 사라가 동행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후계체제와 관련하여 세 사람이 번갈아 가면서 동행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다메섹 출신 엘리에셀, 서장자 이스마엘, 그리고 적장자 이삭 등입니다. 여호와신앙이 부자간의 인연과 동행을 통하여 대물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아버지가 아들에게 신앙의 본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것이 동행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양육이며 목양인 것입니다.

먼저 아들이 없었던 아브람은 가신(家臣, 집안의 신하) 엘리에셀을 양아들로 삼아 의존합니다. 그에게 헤브론의 아성까지 상속하고자 했습니다. 다음에는 하나님께서 서장자 이스마엘을 주십니다. 그래서 이스마엘을 상속자로 삼고서 다시 헤브론에서 여생을 편하게 보내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브람은 86세에 이스마엘을 얻고서 99세가 될 때까지 그 생각에 변함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 생각은 다릅니다. 애굽여인 하갈의 소생인 이스마엘은 어머니로부터 신앙교육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 신앙이 절름발이 입니다. 그를 다음 세대를 책임질 수 있는 약속의 아들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아브람 99세 때에 2차례 현신하셔서 이삭의 탄생을 예언해줍니다(17:16-19, 18:9-14). 새로 태어나는 사라의 아들 이삭이 아브라함 언약의 정식 계승자가 되는 것입니다(17:21).

그리고 아브람의 이름을 열국의 아비가 되라고 아브라함으로 개명합니다(17:5-6). 그 뜻은 장차 여러 민족의 신앙의 아버지가 될 수 있도록 본보기가 되는 삶을 끝까지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신앙을 후손들이 대물림을 할 수 있도록 할례제도를 시행하라고 하십니다.

아브라함의 신앙은 하나님과의 언약에서 비롯되고 있는 것이기에 언약의 측면에서 말하자면, 할례는 후세대가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처럼 신실하게 그 언약을 지키겠다는 맹세와 그 증표에 해당하는 것입니다(17:9-11).

넷째로, 아브라함은 현신하신 하나님과 천사들을 상쾌하게 만들어주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18:5). 극진한 대접을 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여호와를 하나님으로 대접하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도리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인간에게 생명을 주셨으며 지금도 인생살이가 가능하도록 모든 조건과 환경을 조성해주고 계십니다.  한마디로, 모든 것이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버지 중의 아버지이신 그 분을 극진하게 대접하고 그 뜻을 따르는 것이 피조물의 도리라고 하겠습니다.

모세는 아브라함이 우선 맛있는 음식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장면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급히 장막으로 가서 사라에게 이르되, 속히 고운 가루 3스아를 가져다가 반죽하여 떡을 만들라 하고 아브라함이 또 가축 떼 있는 곳으로 달려가서 기름지고 좋은 송아지를 잡아 하인에게 주니 그가 급히 요리한지라, 아브라함이 엉긴 젖과 우유와 하인이 요리한 송아지를 가져다가 그들 앞에 차려놓고 나무 아래에 모셔 서매 그들이 먹으니라”(18:6-8).

풀이를 해보자면, 여기서 스아라고 하는 것은 13.2리터의 곡식의 양을 말하는데 그것은 6오멜에 해당합니다(18:6). 그런데 오멜은 한국의 작은 되와 비슷하며 2.3리터입니다. 보통 한 사람이 한 끼에 충분히 먹을 수 있는 곡식의 양이 작은 되이며 그것이 오멜입니다.

그렇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두 천사를 극진히 대접한다고 6배의 고운 곡식가루를 가지고 떡을 만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장 맛이 좋은 송아지 고기를 대접하고 있습니다(18:7).

그 외에도 우유 뿐만 아니라 엉긴 젖을 대접하고 있습니다(18:8). 일종의 요구르트치즈라고 하겠습니다. 최상의 유제품을 가지고 손님을 대접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한 마디로, 최상의 요리로써 극진하게 하나님과 그 일행을 대접하고 있는 아브라함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극진하게 대접한 아브라함에게 엄청난 은혜를 베풀고 있습니다. 그 내용이 곧 이어서 서술되고 있습니다(18:9-33). 구체적으로, 약속의 아들의 탄생을 거듭 확인해주고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에 관하여 미리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을 자신의 충실한 청지기이며 선지자 그리고 중보자로 대접을 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 장면은 예수님의 황금률을 새삼 음미하게 합니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7:12).

 

2.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천사들을 대접하는 상을 장막 바깥 나무 밑에 차린 이유는 무엇인가?(18:1, 8) 그리고 왜 그 옆에 시립해 있는가?

 

헤브론 아브라함이 살고 있는 곳에 하나님과 2천사의 현신이 있었습니다(18:2). 그들은 마므레 아브라함의 장막 앞 상수리나무 숲에서 나타났습니다(18:1). 날이 뜨거울 때였으므로 시원한 나무그늘 밑에서 그 모습들을 드러낸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그 일행을 자신의 장막 안으로 모시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한낮의 열기가 가득한 장막 안으로 도저히 모실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뜨거운 식사대접을 하는 장소가 시원한 나무그늘 아래입니다(18:8).

참고로, 가나안 남부지역이 시작되는 곳 헤브론은 (, half) 사막성 기후를 가지고 있습니다. 헤브론에서부터 브엘세바를 거쳐 남쪽 국경도시 가데스 바네아까지 이르는 지역은 가나안 땅 전체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넓은 면적입니다. 그러나 인구가 적습니다.

그 이유는 비가 거의 오지를 아니하여 땅이 메마르기 때문입니다. 사막지역은 아니지만 강수량은 사막과 방불합니다. 그래서 반 사막성 기후라고 말하면서 그 메마른 지역을 네게브라고 구별하여 부르고 있습니다. 마치 호주의 중심부 사막지역과 같으며 뉴질랜드 남섬 중앙의 메마른 산악지역과 비슷합니다.

남부지역 네게브의 남단을 흔히 (Zin) 광야라고도 부릅니다. 그리고 신 광야를 지나서 서쪽으로 진행하게 되면 애굽으로 가는 수르 광야로 접어들게 됩니다. 그곳은 시나이 반도의 북부에 해당합니다.

창세기 제16장을 참고해보면, 헤브론 아브람의 집에서 안주인 사래의 학대를 피해서 애굽 고향으로 도망을 치던 하갈이 수르 광야길 샘물 곁에서 하나님의 사자를 만나는 장면이 나타나기도 합니다(16:6-7).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그 일행을 대접하고 있는 장면을 모세가 다음과 같이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엉긴 젖과 우유와 하인이 요리한 송아지를 가져다가 그들 앞에 차려놓고 나무 아래에 모셔 서매 그들이 먹으니라”(18:8).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그 일행의 식사의 수발을 들고 있습니다. 옆에 시립하여 모시고 서서 식사를 하시는 것을 돕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종의 임무입니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그렇게 섬겼듯이 아브라함과 똑같이 하나님의 종인 성도들도 그렇게 주인을 섬겨야만 합니다.

그 점을 예수님이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너희 중 누구에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그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말할 자가 있느냐? 도리어 그더러 내 먹을 것을 준비하고 띠를 띠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을 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17:7-10).

 

3.    식사를 마치신 하나님께서는 왜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찾고 계시는가?(18:9-10) 그리고 어찌하여 17:15-19절의 예언을 또 18:10-15절에서 반복하고 계시는가?

 

고대사회는 가부장 사회입니다. 남편이 집안의 대표인 가장입니다. 그리고 족장의 맏아들인 남자만이 차기 족장이 될 수가 있습니다. 한 마디로, 여자가 남자에게 종속이 되는 사회입니다. 여자에게는 토지의 소유권도 상속권도 없기 때문에 자연히 토지를 소유할 수 있는 남자에게 기대어서 한 평생을 살아가야만 합니다.

소위 3()의 법칙을 따르지 아니할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태어나서는 아버지에게 의존해야 합니다. 결혼을 하게 되면 남편에게 생계를 의지하게 됩니다. 과부가 되고 나면 맏아들에게서 노후 봉양을 받아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고대가부장사회에서 여자의 존재와 발언권은 미약하기 그지 없습니다. 그와 같은 시대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해서 사라를 찾고 계십니다. 왜 여자인 사라를 찾고 있는 것일까요? 당시의 시대적인 배경을 감안한다면 상당히 예외적인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초 아브람과 맺은 언약을 이제는 그의 자손들에게 대대로 승계시킴으로써 영원한 언약으로 발전시키고 싶어하십니다(17:19). 훗날 아브라함이 발견하게 되는 하나님의 속성은 영원성입니다(21:33). ‘영생하시는 하나님은 결코 찰나의 승리나 일시적인 약속을 선호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언약도 영원한 효력을 발휘할 수 있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그 방법이 바로 약속의 아들 이삭을 생산하여 그로 하여금 아브라함과의 언약을 승계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렇게 대를 이어가다가 보면, 아브라함의 언약은 영원성을 지니게 되는 것입니다(17:19).

그런데 한 가지 문제는, 약속의 아들은 부모로부터 영생하시는 여호와 신앙을 반드시 상속으로 받고 있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그 일을 성사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이 사라를 찾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녀에게서 한 가지 사실을 확인하고 싶어하시는 것입니다; “비록 늙은 몸, 그것도 불임의 몸이지만 하나님의 능력으로 약속의 아들을 주신다면 생산을 하고 싶습니다. 아들을 잉태하고 낳아서 여호와신앙으로 제대로 양육하여 약속의 아들로 세우고 싶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제17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하고만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당연히 이삭의 출생에 대한 예언도 그에게만 말해주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내인 사라에게 예언의 말씀만을 전해달라고 당부를 했을 따름입니다.

참고로, 그 내용이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사라라 하라.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가 네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여러 왕이 그에게서 나리라. 아브라함이 엎드려 웃으며 마음 속으로 이르되, 100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90세니 어찌 출산하리요 하고 아브라함이 이에 하나님께 아뢰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17:15-19).

이제 창세기 제18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사라에게 직접 예언의 말씀을 들려주시고 그녀에게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도록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비록 아브라함에게 말씀을 하고 있는 것 같지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장막 뒤에서 사라가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줄 하나님께서 다 아시면서 말씀을 하시고 있는 장면입니다; “그들이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 대답하되, 장막에 있나이다. 그가 이르시되,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 아브라함과 사라는 나이가 많아 늙었고 사라에게는 여성의 생리가 끊어졌는지라,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사라가 두려워서 부인하여 이르되, 내가 웃지 아니하였나이다. 이르시되, 아니라, 네가 웃었느니라”(18:9-15).

절묘하게 아브라함을 중간에 두고서 하나님과 사라와의 대화가 전개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능력을 불신하고 있는 사라의 모습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장막을 투시하여 그 모습을 낱낱이 보고 계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통찰력이 엿보입니다.

사라가 자신의 실책을 깨닫고서 순종을 합니다.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사라의 순종을 통하여 아브람의 언약을 영원한 것으로 변화시키고 계십니다. 그 결과 오늘 날의 성도들에게도 무려 4천년 전에 아브람에게 주신 언약이 그대로 작동을 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4.    여호와께서 하시려는 일을 숨기지 아니하시고 아브라함에게 미리 말씀해주시는 이유 2가지(18:16-24, 44:7-8, 13:19)

 

여호와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을 계시로 받아서 백성들에게 전해주는 자를 선지자라고 부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미래에 이루어질 예언의 말씀을 선지자에게 미리 계시해주고 그것을 백성들에게 전하게 하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이유가 성경에서 드러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첫째로, 미래의 역사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뜻 안에 있는 계획이 사람들의 미래이며 역사가 진행되는 방향입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벗어나서 결코 그 어떤 우상이나 세상의 권력자가 미래를 만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 점을 똑똑하게 알게 해주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미래에 대한 예언을 미리 이 세상에 계시해주시고 있습니다.

달리 말씀을 드리자면, 막상 그 일이 실현이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하신 일임을 시인하게 만들기 위함입니다(44:7-8, “나처럼 외치며 알리며 나에게 설명할 자가 누구냐? 있거든 될 일과 장차 올 일을 그들에게 알릴지어다).

같은 취지의 말씀을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일러주고 있습니다; “지금부터 일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너희에게 일러 둠은 일이 일어날 때에 내가 그인 줄 너희가 믿게 하려 함이로라”(13:19).

둘째로,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 등 염해 도시국가에 대한 불 심판의 계획을 미리 아브라함에게 알려주시는 의도는 그에게 중보기도를 하도록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듣게 된 아브라함은 롯의 가족을 비롯한 염해 지역 5개 도시국가의 수많은 목숨을 구원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과 합치되는 행동이며 기도입니다(삼상24:6-7, 13:22). 구체적으로, 아브라함이 불 심판 계획을 다시 한번 재고해달라고 하나님께 매어 달리고 있습니다(18:23-24).

불의한 도시를 구원하기 위하여 필요한 의인의 수를 50명에서 마침내 10명으로 축소할 때까지 끈질기게 하나님께 간구하고 있습니다(18:24-32). 한 마디로, 그것이 가장 모범적인 중보의 기도입니다.

아브라함의 간절한 중보기도가 있었기에 하나님께서 천사를 통하여 롯의 가족을 불구덩이에서 구원하십니다(19:29,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그리고 작은 성 소알까지 불 심판을 면하게 됩니다(19:20-22).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마음이 심판보다는 생명구원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해주고 있습니다. 참고로, 선지자 요나의 기록이 다음과 같이 웅변적으로 그 점을 증거해주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12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4:10-11).

 

5.    천사가 하는 일과 하나님께서 직접 하시는 일의 구분(18:21-22)

 

여호와께서는 2천사를 소돔으로 파견하고 계십니다. 직접 행차를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마치 직접 시찰을 하시는 것처럼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계십니다; “내가 이제 내려가서 그 모든 행한 것이 과연 내게 들린 부르짖음과 같은지 그렇지 않은지 내가 보고 알려 하노라. 그 사람들이 거기서 떠나 소돔으로 향하여 가고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섰더니”(18:21-22).

2천사가 현지에 가서 실태조사를 하는 것이 어떻게 하나님께서 직접 가시는 것과 같은 효과를 가지게 되는 것일까요? 그것이 영적인 비밀인 것 같습니다. 영의 눈은 시공간을 초월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눈은 피조세계와 우주만물을 구석구석 모두 살필 수 있는 전능한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불 심판의 경우에는 더욱 신중하고도 세밀한 조사를 요하고 있습니다. 혹시 놓쳐버린 것이 있는지 거듭 확인’(cross check)을 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눈을 가지고서 천사들이 직접 현지를 방문하고 있는 것으로 풀이를 해볼 수가 있는 대목입니다.

현지사정을 확인하고서 어느 정도의 심판을 언제 어떻게 하느냐? 하는 문제는 정말 중요한 사항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전적으로 2천사에게 일임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전히 아브라함 앞에 서계시는 하나님께서는 그것보다 더 긴요한 일을 처리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심판이 아니라 구원의 문제입니다. 구체적으로, 부디 심판의 와중에서도 긍휼을 베풀어 달라고 아브라함이 중보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현재의 심판의 계획을 재고해달라고 하는 간절한 중보자의 기도가 급하게 요청되고 있기에 심판이 아니라 구원을 베풀기를 원하시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앞에 서 계시는 것입니다(18:22).

 

6.    티끌이나 재와 같이 보잘 것이 없는 인생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18:27)

 

아브라함이 자신 앞에 사람의 모습으로 현신하여 계시는 창조주 하나님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티끌이나 재와 같사오나 감히 주께 아뢰나이다”(18:27). 굉장히 겸손한 태도라고 일반적으로 풀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연과학에 대한 어느 정도의 지식을 가지고 다시 음미해보면 아브라함의 언급은 엄청나게 자신을 크게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사람은 온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 앞에 서게 되면 티끌이나 재보다도 훨씬 미세한 존재에 불과합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사람의 몸에는 약 100(, 10의 12승) 개의 세포가 있습니다. 그리고 지구에는 약 1,000조 개의 모래알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주에는 약 2,000억 개의 은하계가 있으며 각 은하계에는 평균 2,000억 개의 행성이 존재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온 우주의 행성의 수는 400(4x10의 22승, 여기서 垓는 10의 20승) 개나 됩니다. 그 전체 행성의 수는 비유를 하자면, 4억 명의 사람이 지니고 있는 세포의 수와 같습니다. 그런데 사람의 눈에는 개개의 세포가 너무나 작아서 눈에 전혀 보이지를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지구와 같은 행성도 전혀 보이지가 않는 크기입니다. 결국 하나님 앞에 서게 되면 지구와 같은 행성 자체가 티끌이나 재와 같은 존재만도 못한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감히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행성보다도 더 큰 존재인 티끌이나 재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이 보기에는 겸손한 표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입장에서는 참으로 엄청나게 무식한 발언입니다.

참고로, 사람의 눈에 익숙한 cm정도의 크기를 보이고 있는 물체도 따지고 보면 그 원자의 수가 보통 6x10의 23승정도가 됩니다. 쉽게 말하자면, 미시세계의 기본단위라고 볼 수 있는 원자가 6,000(垓는 10의 20승) 개나 모여서 비로서 인간 앞에 물체로서의 의미를 가지게 되는 셈입니다.

미시의 세계’(micro-world)가 그 정도라면 거시의 세계’(macro-world)가 또한 그 정도의 차원을 엇비슷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행성의 크기를 기본단위로 하여 400의 크기를 말하고 있으니 그 개수가 서로 닮아 있는 형국입니다.

그와 같이 무식한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하나님께서 귀를 기울여서 듣고 계십니다. 참으로 자상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사람과 대화를 나누고 싶어서 인간의 모습으로 찾아 오시기도 하고 먼지보다도 한 없이 더 미세한 존재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계십니다. 따라서 그 모습 자체가 이미 경천동지(驚天動地, 하늘이 놀라고 땅이 뒤흔들릴 만한 것)할 만한 다함이 없는 은혜인 것입니다.

 

7.    아브라함의 중보기도의 효과(18:23-33)

 

아브라함은 소돔과 고모라의 사람들을 살리고 싶습니다. 그 가운데 자신의 장조카인 롯의 가족이 포함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롯의 가족은 자신과 함께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서 가나안으로 남하를 했던 신앙인들입니다(12:4). 그래서 다음과 같이 하나님께 읍소를 합니다;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려 하시나이까?”(18:23).

하나님의 발걸음을 멈출 수 있는 훌륭한 질문입니다. 돌아보시는 하나님께 구체적인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그 성 중에 의인 50명이 있을지라도 주께서 그 곳을 멸하시고 그 50의인을 위하여 용서하지 아니하시리이까?”(18:24). 긍정적인 답변을 듣고 나자 좀 불안합니다.

그래서 계속 용기를 내어서 겸손한지 무식한지도 모른 채 정신 없이 의인의 수를 줄여 나갑니다(18:27-28). 50명에서부터 45, 40, 30, 20, 마침내 10명으로 계속 5단계에 걸쳐서 줄여 나간 것입니다(18:28-32). 그만큼 불 심판으로부터 구원을 받을 확률을 높여 나간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 알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자신의 뜻과 아브라함의 중보기도의 내용이 맞았기 때문에 계속 귀를 기울이신 것입니다. 심판을 줄이고 구원을 늘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3:16-17). 그리고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예수님의 간구에서 보듯이 십자가 대속의 죽음을 맞이하더라도 그 고통의 시간을 6시간 정도로 줄이는 간구와 조율도 가능한 것입니다(18:17, 23-26, 19:21, 14:35-36, 15:25, 34)”.

그와 같은 기도가 있을 때에 심판의 시간도 고통도 모두 줄일 수가 있는 것입니다(24:21-22). 보통 사람이 십자가 형을 당하면 사나흘 죽지 아니하고 달려 있음으로 말미암아 극도의 고통과 공포를 맛보게 됩니다. 그것을 단 6시간으로 타협하시는 예수님의 기도를 차제에 기억할 필요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8.    아브라함을 떠나신 하나님은 어디에서 소돔과 고모라 성을 내려다 보고 계시는가?(18:33)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간구를 듣고 계십니다(18:23-32). 그리고 의인 10명만 발견하더라도 소돔과 고모라 성 등을 멸망하는 심판을 재고해달라는 아브라함의 간청에 대하여 긍정적으로 답변을 하십니다(18:32). 마지막 답변을 하신 후에 하나님께서는 길을 떠나십니다(18:33). 드디어 창세기 제18장이 끝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도대체 어디로 가셨을까요? 적어도 소돔 성을 방문하신 것으로는 보이지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제19장에 들어서자마자 저녁 때에 그 두 천사가 소돔에 이르니 마침 롯이 소돔 성문에 앉아 있다가 그들을 보고 일어나 영접하고 땅에 엎드려 절하며”(19:1)라는 구절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제19장에서는 제18장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하나님 본체의 현신에 대한 언급이(18:1-2, 16-17) 일체 없습니다. , 불 심판이 끝날 때까지 염해 지역에서 하나님의 모습이 보이지 아니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다시 하늘로 되돌아가셔서 소돔과 고모라 성에 대한 2천사의 보고를 들으시고 최종결정을 행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한 마디로, 최종적인 결정은 이 땅에서가 아니고 하나님의 보좌에서 이루어진다고 하겠습니다.

도시에 대한 집단적인 심판 뿐만 아니라 개개인 인생에 대한 최종판결도 이 땅에서가 아니고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이루어진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흔히들 관 뚜껑을 덮어봐야 누가 옳은지를 안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후세대에 의한 역사적인 심판을 염두에 두고서 하는 말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역사적인 심판보다 더 두려운 것은 하나님 보좌 앞에서의 심판입니다(12:5). 영원한 생명을 얻느냐? 아니면 영원한 형벌에 들어가느냐?의 최종판결이 그 앞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신앙생활은 처음부터 끝까지 최종판결을 염두에 두고서 영위되어야만 합니다.

결코 사람들의 시선만 의식해서는 아니 됩니다. 모든 사람들이 옳다고 자기 편을 들어주더라도 하나님 보시기에 틀렸으면 실패한 인생입니다(7:21-23). 결론적으로, 다시 한번 옷깃을 여미고 항상 하나님의 보좌 앞에 서있는 마음가짐으로 진리의 말씀을 따라서 자신의 인생을 신실하게 살아가야만 할 것입니다.

 

(참고자료)  창세기 강의 골자 20(18:1-33)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강의일; 주후 2016 1 7()

 

1.      여호와 하나님께서 천사 둘을 데리고 사람의 모습으로 헤브론의 아브라함 장막 앞에 현신하신 이유는 무엇인가?(18:1, 17)

(1)   아브라함을 만나고자 현신하신 것임

1)      여호와 하나님께서 혼자 현신하여 아브라함을 만나신 경우가(17:1) 있으나 본문에서와 같이 천사 둘을 대동하고 직접 아브라함을 만나러 오신 경우는(18:1) 처음이심.

2)      사람이 천사들과 함께 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경우는 대부분 선지자로 세움을 받게 되는 경우임(6:1-8, 1:24-2:4).

3)      아브라함을 만나서 내년 이맘때에 그의 아내 사라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다시 예언을 해주심(18:10).

4)      17:19(적장자 이삭 탄생예언) 이어 번째로 동일한 예언을 해주신 것이므로 그것은 완전히 확정된 사실임을 있음.

(2)   아브라함의 의견을 듣고자 하신 것임.

1)      천사 둘을 먼저 소돔으로 보내시고(18:16) 여호와 하나님 혼자 남아 아브라함과 대화하심(18:17).

2)      번째 내용은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들이 하나님의 공의를 행하게 되면 천하만민이 복을 얻게 된다는 것임(18:18-19).

3)      번째 내용은 천사 둘이 먼저 소돔을 현지 시찰하여(18:22, 19:1) 주민들의 죄악상을 확인하게 되면 하나님도 거듭 소돔과 고모라(18:20, 19:24) 그리고 아드마와 스보임(29:23) 등지의 현황을 직접 확인하시고(18:21) 그들을 멸망시킬 계획이시라는 것임(18:20-21, 19:24).

4)      여기서 천사 둘이 현장 방문하는 곳은 소돔 성임. 그러나 하나님은 소돔, 고모라, 아드마, 스보임 등지를 모두 한꺼번에 살피신 것으로 추정이 되고 있음. 그와 같이 하나님의 시찰능력은 포괄적이며 최종적 것임.

5)      계획을 듣고서 아브라함이 소돔 성에 살고 있는 장조카 롯의 가족을 생각하고서 부디 성을 살려달라고 매어 달리게 (18:23-25). 그것이 선지자가 아브라함의 중보기도의 시작인 것임(18:1-9, 20:7).

 

2.      아브라함과 자손들이 강대한 나라가 되는 것이 어째서 천하만민에게 복이 되는가?(18:18-19, 23-32)

(1)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들이 강대한 나라가 되고(18:18) 나라가 하나님의 공의를 행하게 되면(18:19) 천하만민에게 복이 돌아간다는 뜻임.

(2)   여기서 하나님의 공의(公義, righteousness) 여호와의 () 지켜 () 공도(公道) 행하게 하는 ”(18:19)으로 표현하고 있음.

1)      창조주 여호와는 모든 피조물의 생명을 살리고 돌보고자 하시는 것임. 그것이 하나님의 공의이며(4:11, “하물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12 여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5:44-48, 3:16, 6:39) 번성의 축복임(1:11-12, 22, 28).

2)      하나님의 공의를 행하도록 선택을 받은 민족이 바로 제사장나라 거룩한 백성인 선민인 것임(19:5-6, “세계가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말을 듣고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3)   그러므로 일을 아브라함 가문이 대를 이어서 행할 있도록 하나님께서 도와주시는 것임.

1)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이방 가나안으로 향했기에 천하만민에게 복이 주어지기 시작한다는 것임(12:2-4, 아브라함, 26:4, 이삭, 28:14, 야곱, 50:20, 요셉).

2)      그리고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공의를 행할 있도록 하나님께서 그를 보호하며 도와주시는 것임(12:2-3).

3)      아울러 약속의 아들을 낳도록 해주시고 대대로 일을 행할 있도록 해주시는 것임(18:18-19).

4)      훗날에는 아브라함의 후손 가운데 하나님의 공의를 행할 있는 이스라엘 자손을 제사장나라로 만들고 계시는 것임(19:5-6).

5)      그러므로 선민의 나라는 반드시 하나님의 공의를 행해야만 하는 것임. 그것이 선민나라의 사명인데 사명을 저버리게 되면 존재이유가 사라지게 되는 것임. , 므낫세 왕의 경우와 같이 보호받을 실익(實益) 모두 사라지게 되면 선민의 나라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게 (왕하21:11-13).

 

3.      아브라함은 어째서 장조카 롯의 가족의 구원만을 요청하지 아니하고 소돔과 고모라, 아드마와 스보임, 그리고 소알 모든 성읍의 구원을 위하여 기도하고 있는가?

(1)   장조카 롯의 가족만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아니시라는 사실을 아브라함이 알고 있기 때문임.

(2)   위대하신 유일한 창조주 하나님 앞에 아브라함이 서있는 것임. 의미는 창조주의 눈으로 모든 피조세계를 있는 눈이 열리고 있다는 의미임.

(3)   예를 들면, 욥이 그가 소원하던 대로 창조주 하나님 앞에 직접 서게 되었을 때에 자신의 부족한 모습을 그대로 깨닫게 되는 것과 같은 것임(42:5-6).

1)      지금까지 자신의 자녀만을 위하여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에(1:5) 불과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것이 잘못임을 알게 .

2)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을 만드신 창조주라는 사실을 알게 . 따라서 창조주 하나님은 의인과 죄인 모두를 사랑하시고 모든 피조물의 생명을 구원하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5:45).

3)      그것이 하나님의 공의임. 공의의 정신으로 욥이 자신을 대적하던 친구들의 부탁을 들어주고 그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에 신원이 회복이 되고 있는 것임(42:10).

4)      그것이 마디로 제사장나라 거룩한 백성의 회복인 것임. 선민 이스라엘 자손들이 실패한 사명을 그리스도가 성취하고 있음.

5)      또한 그리스도는 그의 제자들에게 지상명령을 내리시고 세상으로 파송하고 계시는 것임(28:18-20). 그러므로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 하나님의 공의를 반드시 행해야만 하는 것임(24:44-49, 1:8, 1:21-23, 2:5-11).

 

4.      현신의 모습을 보고 아브라함이 금방 라고 부르면서 몸을 굽히고 있는 광경에서 있는 것은 무엇인가?(18:2-3)

(1)   마디로, 아브라함이 영적으로 깨어있다는 사실을 있음. 많은 사람 가운데 하나님과 천사들이 현신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챌 있다고 하는 것은 평소 하나님의 말씀과 행적에 대하여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뜻임.

(2)   영적으로 예민하기에 하나님과 천사의 존재를 알아 있으며 하나님을 창조주이며 자기 인생의 주인으로 대접하고자 하는 마음이 자발적으로 생겨나고 있는 것임.

(3)   여기서 하나님신앙 무엇인가를 쉽게 있음.

1)      하나님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창조주로 대접하는 것임. 그것이 피조물인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존귀함을 인정받을 있는 방법임(삼상2:30,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 7:12,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2)      그리고 자신의 인생은 주인의 뜻을 쫓아 사용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임. 그리스도가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인생을 살아간 것처럼 제자들인 성도들이 주님을 본받아 지상명령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임(28:18-20, 고전11:1,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3)      자신의 인생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뜻은 창조주를 사랑하는 마음으로(12:30) 모든 생명을 살리고 돌보라는 것임. 그것이 이웃사랑의 뜻임(12:31).

 

5.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종으로서 주인을 대접하는 절차는 어떠한가?(18:2-5)

(1)   무엇보다도, 모든 것을 종에게 주셨으므로 그것 가운데 좋은 것으로 주인을 대접하고자 하는 것임.

(2)   더구나, 창조주가 인간의 모습으로 피조물인 자신을 찾아오신 것을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하고서 지극한 정성으로 대접하고자 하는 것임.

(3)   따라서 절차가 다음과 같이 묘사가 되고 있음;

1)      첫째, 달려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 종의 집에 머물다 가시라고 간청함(18:2-3).

2)      둘째, 물을 가져다 발을 씻게 하시고 시원한 나무그늘 아래서 쉬시게 (18:4).

3)      셋째, 음식대접을 터이니 부디 상쾌하게 드시고 다시 출발하시라고 권하고 하나님의 허락을 얻는 것임(18:5).

4)      넷째, 허락을 얻게 되면 지극정성으로 충분한 양의 , 맛있는 송아지 고기요리, 마실 우유와 요구르트 등을 준비하여 사람의 모습으로 오신 하나님과 천사를 대접하는 것임(18:6-8).

5)      다섯째, 식사가 끝날 때까지 아브라함은 나무그늘아래에서 심부름을 하면서 종의 의무를 다하는 것임(18:8).

6)      참고로, 그것이 종의 의무임을 의사 누가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음;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 들고 너는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일을 것뿐이라 할지니라”(17:8-10).

 

6.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천사를 대접하기 위하여 마련하고 있는 식사는 어떠한가?(18:6-8)

(1)   첫째, 인색하지가 않고 충분한 양의 식사를 준비하고 있음.

1)      1인당 1스아(seah, 고체의 측정단위이며 7.3리터임) 고운 가루를 준비함(18:6). 여기서 1스아는 3-4 가족의 하루치 양식에 해당함. 참고로 어른 1사람의 하루치 양식이 ’(보리 묶음을 의미하는 omer이며 2.2리터), 열흘 치가 에바’( 바구니 ephah이며 22리터), 백일 치가 호멜’(당나귀 마리에 실을 있는 양이며 homer 230리터).

2)      연하고 맛있는 최고품질의 쇠고기, 송아지 고기를 사용하여 요리를 하고 있음. 그것도 아예 송아지 마리를 잡아서 푸짐하게 맛있는 요리를 대접하고 있는 것임(18:7).

3)      음료수로 맛있는 우유를 제공하고 사려 깊게도 손님들의 소화를 돕기 위하여 엉긴 요구르트까지 대접하고 있음(18:8).

(2)   둘째, 시원한 곳에서 식사를 하실 있도록 상수리 나무 아래에 상을 차리고 있음(18:8a).

(3)   셋째,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천사들이 식사를 하는 동안 옆에 모셔 서서 시중을 들고 있음(18:8b).

 

7.      하나님이 갑자기 아브라함에게서 사라를 찾으시는 이유는 무엇인가?(18:9-10)

(1)   사라에게 전할 말씀이 있기 때문에 그녀를 찾고 계시는 것임. 그것도 하나님이 직접 사라를 불러서 그녀에게 말씀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을 통해서 사라에게 말씀하고자 하시는 것임(18:9).

(2)   고대 가부장 족장사회의 질서를 존중하면서 사라에게 전해주도록 아브라함에게 하시는 말씀이 바로 내년 이맘때 다시 방문할 때에는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라는 예언임(18:10).

(3)   말씀은 이미 아브라함에게 구체적으로 해주신 말씀임(17:15-16). 그때 아브라함이 불가능한 예언의 말씀이라고 비웃은 바가 있음(17:17-18). 그러므로 이번에는 사라의 믿음의 분량을 보고자 하시는 것임(18:10).

 

8.      내년 이맘때 사라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어째서 사라가 반신반의하고 있는가?(18:10-12)

(1)   장막 뒤에서 말씀을 듣게 사라가 역시 아브라함과 동일한 반응을 보이고 있음(18:11-12).

1)      내외가 모두 늙고 사라 자신은 생리가 끊어진 오래되었는데 어떻게 그들 부부가 아들을 생산할 있겠느냐는 지극히 과학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임.

2)      더구나 평소 불임여성이었으므로(11:30) 전혀 아들을 낳을 확률이 없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사라임.

(2)   아브라함과 사라의 믿음의 문제점

1)      자기도 모르게 세상적인 지식과 상식에 물들어 있음. 하나님의 능력을 인간들의 과학적인 지식과 능력의 한계 내에서 사유하고 있는 것임.

2)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주라고 하는 사실을 깜박하고 있음. 그것은 주인을 깔보고 있는 종의 교만한 신앙의 자세임. 그래서 하나님의 지적이 따갑게 나타나고 있음; “사라가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18:13).

3)      하나님께서는 창조주로서 평소 자연의 흐름 세상의 질서와 이치를 존중하지만 필요한 경우에는 새로운 창조까지 행하시는 능력의 소유자이심을 인정해야만 하는 것임(18:14, “여호와께 능하지 못할 일이 있겠느냐?”).

 

9.      하나님께서 창조주의 전능성을 언급하시자 두려워서 떨고 있는 사라에게서 엿볼 있는 것들(17:19, 18:15)

(1)   옛날 하와처럼(3:13) 발뺌을 하고 있음. 웃은 적이 없다고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임(18:15).

(2)   말에 속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심. 그러므로 자신이 낳은 아들을 때마다 자신의 불신앙을 되돌아보라고 하는 의미에서 아들의 이름을 이삭’(웃음)이라고 하나님께서 일찍이 작명해주신 것임(17:17-19, 21:3-7).

 

10.  천사 둘을 소돔 땅으로 보낸 후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가?(18:16-22)

(1)   첫째,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강대한 나라가 되고 하나님의 공의를 행할 때에 천하만민이 복을 받게 된다고 말씀하심(18:19-19).

(2)   둘째, 소돔과 고모라의 범죄를 고발하는 무죄한 사람들의 부르짖음이 도를 넘어서고 있으므로 실태파악을 하여 심판할 것이라고 미리 알려주심(18:16-17, 20-21).

1)      소돔 현지를 방문하여 실태를 파악하라고 천사 둘을 먼저 파견하신 사실도 아브라함에게 말씀해주심(18:16, 22).

2)      말을 듣게 아브라함은 가슴이 답답하고 마음이 급해짐. 왜냐하면, 그의 장조카 롯의 가족이 소돔성에 살고 있기 때문임(13:12, 19:1).

 

11.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상을 파악하기 위하여 천사 둘을 현장에 파견하시는 이유는 무엇인가?(18:20-21)

(1)   무죄한 자의 고발과 고소가 있다고 하여 무조건 당장 심판을 행하시는 것이 아님. 하나님께서는 신중하게 현지사정을 직접 파악한 후에 판결을 내리시는 것임.

1)      이유는 원고, 피고, 기타 관계인 모든 당사자의 의견을 수렴하고 모두를 살릴 있는 해답을 찾아내기 위한 것임.

2)      창조주 하나님의 판결이 있게 되면 그것은 하나의 사례를 처리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판결의 원칙은 동일한 사례가 발생하는 경우에는 모두 영향을 미치게 .

3)      따라서 모든 시공간적인 당사자들의 형편을 고려하여 판결을 내려야만 하기에 통시적이며 신중에 신중을 더할 수밖에 없는 것임.

(2)   더욱 신중을 기하기 위하여 천사가 파악을 하고 동시에 하나님께서도 직접 파악을 하여 대조를 하시는 것임(18:21-22).

1)      천사 둘의 소돔 행과 시찰(18:16, 22, 19:1).

2)      하나님의 직접 시찰(18:21, 19:24-25, 29:23).

 

12.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숨김없이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계획을 말씀하시자 아브라함은 그곳에 살고 있는 롯의 가족을 구원하기 위하여 무엇을 요청하고 있는가?(18:22-25)

(1)   롯의 가족이 살고 있는 같은 심판을 받게 운명에 처하고 있는 성읍들 모두에 대하여 재고를 해달라고 하나님께 직접 요청하고 있음(18:23-25).

(2)   롯의 가족의 구원만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측면에서 아브라함은 이미 선민과 이방인 모두를 위한 중보기도자가 되고 있음을 있음(4:11-12). 그것이 창조주 하나님의 종이 공의의 정신을 실천하는 길인 것임.

(3)   구체적으로, 다음 가지를 요청하고 있음;

1)      첫째, 심판 가운데에서도 의인을 구원하여 달라는 것임(18:23).

2)      둘째, 의인 50인만 있어도 성읍을 용서해달라는 것임(18:24).

 

13.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의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께 구원을 간청하고 있는가?(18:25-32)

(1)   7 중보기도를 하고 있음. 번째 기도는 심판 가운데에서도 의인을 구원해달라는 것임(18:23).

(2)   다음 6번의 중보기도는 의인의 수를 계속 줄여가면서 정도의 의인의 존재만 확인하더라도 부디 성읍의 심판을 철회해달라는 것임(18:24-32);

1)      의인 50인이 존재할 경우(18:24-26).

2)      의인 45(18:27-28), 40(18:29), 30(18:30), 20(18:31), 10(18:32) 등임.

 

14.   모세가 그토록 자세하게 아브라함의 중보기도의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1)   그만큼 끈질긴 기도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는 것임.

(2)   의인의 수를 가지고 6차례나 구원의 기회를 얻고자 하는 아브라함의 구체적이고도 타협적인 중보기도의 특징은 훗날 그리스도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를 재음미하게 해주고 있음.

1)      십자가 외에는 만민의 죄를 대속할 있는 다른 방법이 없음을 알게 되신 예수님(26:39).

2)      다음에는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따르더라도 자신이 감당해야 되는 고통의 시간을 줄여달라고 매일 기도했을 것으로 유추가 .

3)      보통사람의 경우 십자가 처형이 되면 숨이 끊어질 때까지 길게는 일주일, 평균 3-4일이 걸린다고 .

4)      예수님의 경우는 오전 9시부터 당일 오후 3시까지 6시간이 걸리고 있음(15:25, 34-37). 그러므로 3, 2, ③하루, 12시간, 6시간 등으로 고통의 시간이 단축이 때까지 계속 기도했을 것으로 보이는 것임.

5)      그와 같은 기도는 역사하는 힘이 있다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예수님이 말씀하시고 계심; “너희가 도망하는 일이 겨울에나 안식일에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 이는 그때에 환난이 있겠음이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그날들을 감하지 아니하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나 그러나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날들을 감하시리라”(24:20-22). 그러므로 고통을 줄이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15.   아브라함은 자신을 티끌이나 재와 같다고 비하하고 있는가?(18:27)

(1)   창조주 하나님 앞에 서게 되면 자신이 얼마나 하잘 것이 없는 죄인이며 피조물인가를 즉시 깨닫게 되기 때문임(18:27, 31, 5:8). 욥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임(42:5-6)

(2)   사실은 사람의 눈으로 있는 티끌이나 재보다도 미약한 존재가 사람임. 왜냐하면 부피 계산을 해보면 다음을 수가 있기 때문임;

1)      티끌과 같은 모래의 수를 10의 23승을 하면 지구의 부피가 나온다고 .

2)      그런데 하나님이 창조하신 우주에는 지구와 같은 행성의 수가 역시 10의 23승 정도 존재하고 있다고 .

3)      그러므로 하나님이 창조한 우주에서 지구가 티끌이나 모래와 같은 비중에 불과한데 사람의 존재감이 지구만 하다고 말하는 것은 난센스인 것임.

4)      정확하게 말하자면, 창조주 앞에서 인간의 물질적인 존재감은 ZERO라고 하는 것이 정답임.

(3)   그와 같은 의미에서 과학적으로 보자면, 아브라함이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티끌이나 재와 같다고 비유한 것은 굉장히 자신을 높이 평가하고 있는 것으로 보임.

 

16.   결국 제사장나라 거룩한 백성의 임무는 무엇인가?(23-33)

(1)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께 범죄함으로 심판을 받아 죽을 밖에 없는 만민을 구원하기 위하여 중보기도를 드리고 사함의 제사를 드려주는 제사장의 직분을 수행해야만 하는 것임.

(2)   그것은 전통적인 선민들의 자신들만의 구원을 위한 제사장 직분이 아닌 것임.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모든 이방인까지 전부 구원하기를 원하는 중보기도자이며 진정한 제사장나라의 일원인 것임.

(3)   선례가 바로 하나님의 선지자 아브라함의 중보기도가 적혀 있는 본문임. 일을 행하지 아니하고 선민만의 구원을 바라고 가나안 땅에서 젖과 꿀이 흐르는 현세적인 복만을 추구했던 이스라엘 자손들이 하나님의 버림을 받게 것이 구약의 내용임.

(4)   그러므로 오늘날의 성도들도 옛날 유대인들의 선민구원 현세적인 구복사상이 어째서 천국의 도래와 만민구원을 부르짖는 그리스도의 사상과 정면으로 충돌을 하게 되고 그들이 마침내 메시아를 죽이게 되는 비극을 연출하게 되었는지를 깊이 묵상해야 것임. 그것이 현대교회를 새롭게 하고 성도들의 삶을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하게 바로 잡는 방법이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