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설교 모음(손진길 목사의 글)

창세기 제20장에 대한 강해설교 모음(손진길 목사의 글)

손진길 2024. 5. 28. 03:38

창세기 제20장에 대한 강해설교 모음(손진길 목사의 글)

 

 

1.    아브라함이 가데스와 술 사이 그랄 땅으로 이사를 한 이유(20:1)

 

99세의 아브라함과 89세의 사라가 이주를 하고 있습니다. 헤브론에 살고 있는 그들이 그 늙은 나이에 어쩔 수 없이 서남부 지중해 연안에 자리를 잡고 있는 이웃나라 블레셋의 땅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18:1, 20:1). 아브라함 부부가 이웃나라로 이주를 하는 것은 헤브론 땅에서 더 이상 살 수가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가 이미 제19장에서 다음과 같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그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여호와 앞에 서있던 곳에 이르러 소돔과 고모라와 그 온 지역을 향하여 눈을 들어 연기가 옹기가마의 연기같이 치솟음을 보았더라”(19:27-28). 하늘로 올라가고 있는 그 유황불의 뜨거운 연기와 시커먼 재가 세찬 동풍을 타고서 인정사정 없이 헤브론과 가나안 남부지역을 덮친 것입니다.

아브라함 부부가 살고 있는 헤브론 땅이 오염되고 목초지가 타 들어갑니다. 당장 가축들이 먹을 풀이 없어서 굶어 죽게 됩니다. 아브라함 가족은 도저히 헤브론 자신의 아성에 더 이상 머물 수가 없습니다. 헤브론의 주민들 모두가 피난을 가고 있습니다.

일단 새로운 목초지를 찾아서 남하를 하고 있는데 그들이 장기적으로 이주를 할 수 있는 지역은 두 군데입니다; “염해 지역의 불 심판의 피해를 입지 아니하고 있는 곳으로서 멀리는 나일 강변의 애굽제국 그리고 가깝게는 블레셋 족속들이 살고 있는 남부해안 내륙지역 그랄 땅입니다”.

아브라함 부부의 입장에서는 24년 전처럼 다시 애굽제국으로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12:10). 그들은 이미 블랙리스트에 올라가 있기 때문입니다(12:14-20). 그래서 헤브론에서부터 가나안 남쪽 국경도시인 가데스 바네아까지 일단 내려간 후에 다시 서쪽으로 방향을 틀었습니다. 드디어 수르광야를 통하여 해변에 가까운 그랄땅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2.    그랄 왕 아비멜렉이 전체 블레셋 족속을 통치하였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20:2)

 

아브라함의 가족이 이주하고 있는 지역을 그랄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랄이 가나안 남쪽의 국경인 가데스와 그 서쪽 수르광야 사이에 자리잡고 있다고 모세가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20:1). 그것은 통상적인 블레셋의 다섯 도시국가를 부를 때에 빠져 있는 이름입니다.

블레셋 족속의 땅은 일반적으로 욥바 아래쪽으로 아스돗, 아스글론, 가사라고 하는 세 도시가 80km에 걸쳐 있으며 내륙으로는 에글론과 가드가 위치하고 있는데 약 24km까지 가나안 쪽으로 진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가드를 훨씬 남하하여 그랄이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전통적인 블레셋 5개 도시국가 연맹에서 빠져 있는 이름입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과 이삭의 시대에 어째서 그랄 왕이 블레셋 족속의 최고 왕으로 여겨지고 있는 것일까요? 두 가지의 이유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1)  첫째, 블레셋의 영토의 절반 정도를 그랄 왕이 차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블레셋 족속의 땅이 지중해 해변을 따라서 80km, 가나안 내륙으로 24km 뻗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묘하게도 아스돗, 아스글론, 가사 등 세 도시국가가 해변으로 몰려서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그리고 내륙에는 에글론과 가드라는 도시국가가 역시 북쪽으로 몰려 있습니다. 자연히 내륙의 대부분의 땅을 그랄 지역의 왕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직할통치의 면적으로 볼 때 그랄 왕이 가장 힘이 강하다고 하겠습니다.

(2)  둘째, 그랄 왕의 칭호가 아비멜렉인데 그 뜻은 여러 왕들의 아버지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과 이삭의 시대에 있어서는 블레셋 도시국가의 패권이 내륙 남부지역 그랄땅의 왕에게 넘어가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랄의 왕이 전체 블레셋 족속을 통솔했다고 한다면 그는 무척 영리하고 유능한 왕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미 말씀을 드린 그대로, 그가 큰 권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그랄 땅이 넓을 뿐만 아니라 더구나 비옥하기까지 합니다. 예를 들면, 훗날 이삭이 그랄 땅에서 농사를 지었는데 100배의 소득을 얻고 있을 정도입니다(26:11-14).

그러하기 때문에 헤브론에 살고 있던 아브라함 가족이 일부러 남쪽 국경지대인 가데스까지 그 먼 길을 남하한 다음에 다시 북쪽으로 서진(西進)하여 그랄 땅을 찾아간 것입니다. 만약 헤브론의 바로 서쪽에 위치하고 있는 에글론이 더 비옥하고 좋았더라면 그들은 가까운 그곳으로 이주를 했을 것입니다.

결국 에글론으로 갈 수 없었던 이유는 두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첫째, 패권을 행사하고 있는 그랄 왕의 허락이 있어야 이주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둘째, 염해 지역 불 심판의 영향이 동풍을 타고서 서북쪽으로 번졌는데 다행스럽게도 남쪽 그랄 지역만이 그 영향권에서 벗어났다는 것입니다.

 

3.    그 밤에 일어난 하나님의 역사(20:3, 31:24, 6:1)

 

시간의 개념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냥 흘러가는 시간이 있고 특별한 사건이 발생하는 시간이 있습니다. 후자는 사람이 기억할 만한 시간이고 전자는 별로 기억할 필요가 없는 시간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큰 역사가 일어나는 하나님 개입의 시간이 있고 그냥 내버려두는 시간도 있습니다.

그것을 흔히 헬라어의 두 가지 시간개념을 빌려와서 흘러가는 물리적인 시간크로노스’, 그리고 하나님 개입의 영적인 시간 카이로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여기 본문에서는 대표적인 카이로스의 시간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긴급하게 하나님께서 개입하시는 시간을 그 밤에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20:3)”.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급하게 그 밤에 그랄 왕 아비멜렉에게 현몽하고 계시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아비멜렉이 멋도 모르고 사라를 후궁으로 삼고자 자신의 궁궐로 그날 낮에 끌어들였기 때문입니다(20:2).

따라서 잘못되면 그날 밤에 사라가 아비멜렉의 수청을 들 수도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사라의 몸에서 약속의 아들 이삭이 태어나야만 하는데 그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가 방해를 받을 수 있게 됩니다(17:19, 18:10, 14).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일인데 인간들의 행위 때문에 결코 변경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날 밤에하나님의 특별한 역사가 다음과 같이 임하는 것입니다; “네가 데려간 이 여인으로 말미암아 네가 죽으리니, 그는 남편이 있는 여자임이라”(20:3).

그 말을 꿈 속에서 생생하게 듣게 된 블레셋 5도시국가의 연맹왕인 아비멜렉은 생시보다도 더 등골이 오싹했습니다. 한 여인 때문에 자신의 인생이 종말을 고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단 자신이 그 여인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였음을 밝히고 남편이 없는 여인이라고 그 오빠가 말을 하기에 후궁으로 삼고자 입궐을 시킨 것이라고 자초지종부터 설명합니다(20:4-5).

그리고 신하들과 함께 아브라함을 궁으로 불러서 부부관계라는 사실을 확인한 후에 이왕에 궁궐에 내리고 있는 기이한 하나님의 재앙을 그치게 할 수 있는 방법을 적극적으로 모색합니다(20:8-16). 하나님께서는 아비멜렉의 딱한 사정을 감안하여 아브라함의 기도로 살 길을 열어줍니다(20:6-7, 17-18).

참고로, 그와 같은 긴급한 개입이 훗날 야곱과 에스더의 경우에도 다음과 같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라반이 그의 형제를 거느리고 7일길을 쫓아가 길르앗 산에서 그(야곱)에게 이르렀더니, 밤에 하나님이 아람사람 라반에게 현몽하여 이르시되, 너는 삼가 야곱에게 선악 간에 말하지 말라 하셨더라”(31:23-24), “내일 왕에게 모르드개를 그 나무에 매달기를 구하고 왕과 함께 즐거이 잔치에 가소서 하니 하만이 그 말을 좋게 여기고 명령하여 나무를 세우니라. 그날 밤에 왕이 잠이 오지 아니하므로 명령하여 역대일기를 가져다가 자기 앞에서 읽히더니”(5:14-6:1).

둘 다 국면의 전환을 초래하고 있는 하나님의 긴급하신 개입을 말하고 있습니다. 야곱의 경우에 있어서는 야반도주를 하다가 장인 라반에 의하여 길르앗 산에서 덜미가 잡히고 있습니다. 그날 밤이 지나고 나면 야곱은 모든 것을 빼앗기고 문초를 당할 형편입니다.

혹시 라반이 그의 목숨을 살려준다고 하더라도 처자식까지 생이별을 하고 혼자서 쫓겨날 판국입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긴급하게 그날 밤에 라반에게 현몽하시고 있습니다(31:24). 안심하고 야반도주를 하라고 지시를 하신 바가 있기에 철저하게 하나님께서 그 책임을 지시고 있는 것입니다(31:3).

에스더의 경우에는 그녀의 후견인이자 사촌 오라버니인 모르드개가 위기에 처하고 있습니다. 현임 재상 하만이 동이 트면 황제의 허락을 얻어서 유대인 모르드개를 나무에 매달려고 획책하고 있습니다(5:14). 인간적으로 볼 때, 그 은밀한 계획은 완벽합니다.

아하수에로 황제가 하만의 말을 듣고, 국법을 우습게 여기는 하나의 소수민족이 있다고 하기에 그 민족의 이름 등을 자세히 알아보지도 아니하고서 전적으로 하만 재상이 책임을 지고서 그 민족을 진멸하도록 이미 승낙을 한 바가 있기 때문입니다(3:8-11).

그런데 하나님께서 긴급하게 개입하시게 되면 사람이 꾸민 일은 완전히 뒤집히게 됩니다. 그날 밤에 하나님이 황제에게 잠이 오지 아니하게 하고 왕궁의 일기장을 읽게 만듭니다(6:1). 그리고 황제로 하여금 모르드개가 자신의 생명을 살리는데 크게 기여한 적이 있음을 알게 합니다.

그 첫새벽에 아하수에로 황제가 모르드개를 불러들이고 그에게 관심을 표명하게 되자 하만 재상은 그를 처치할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렇게 사건은 역전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힘이 있는 자가 하나님의 사람을 핍박을 할 수는 있습니다. 그리고 해치려고 음모를 꾸밀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일은 하나님께서 개입하시면 성사될 수가 없습니다. ‘그날 밤에긴급하게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반드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4.    주여, 주께서 의로운 백성도 멸하시나이까?”(20:4, 18:23)

 

아비멜렉의 진언은 아브라함의 간구를 그대로 닮아 있습니다. 일찍이 아브라함은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미리 듣게 됩니다. 그때 그의 장조카인 롯의 가족이 소돔 성에 살고 있는 줄 알고 있는 아브라함이 그들을 살리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간구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려 하시나이까?”(18:23).

본문에서 아비멜렉은 억울합니다. 그는 사라가 아브라함의 누이동생인 줄만 알고서 그녀를 후궁으로 데려온 것입니다. 그런데 느닷없이 유부녀라고 합니다. 그래서 꿈 속이지만 하나님께 자신은 억울하다고 하소연을 하고 있습니다; “주여, 주께서 의로운 백성도 멸하시나이까?”(20:4).

같은 질문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동일한 답변을 하시고 있습니다. 아비멜렉의 항변에 동의하고 있는 하나님의 긍정적인 말씀이 다음과 같이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네가 온전한 마음으로 이렇게 한 줄을 나도 알았으므로 너를 막아 내게 범죄하지 아니하게 하였나니 여인에게 가까이 하지 못하게 함이 이 때문이니라”(20:6).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다음과 같이 으름장을 놓고 있습니다; 첫째, 아브라함의 기도를 받으라는 것입니다. 둘째, 사라를 돌려보내라는 것입니다. 만약 그대로 시행하지 아니하면 죽음을 맞이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20:7).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의 으름장이 과연 협박으로만 끝나고 있을까요? 그렇지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믿을 수 밖에 없도록 강력한 조치를 취해놓고 계십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일로 아비멜렉의 집의 여인들의 모든 태를 닫아 버리신 것입니다(20:18).

그러므로 블레셋 족속의 황제에 해당하는 그랄 왕 아비멜렉이 도저히 항거를 할 수가 없습니다. 자신의 죽음 뿐만 아니라 왕가의 혈통이 완전히 절단이 날 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라와 아브라함의 마음을 달래고자 전심전력을 다하게 됩니다(20:14-16).

 

5.    선지자의 기도에 힘을 실어주시는 하나님(20:7, 17, 42:10, 18:18-20)

 

여호와 하나님의 사람인 선지자나 그리스도의 제자의 기도는 역사하는 힘이 큽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도에 힘을 실어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는 아브라함의 기도가 그러합니다.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게 부탁하여 그의 기도를 받게 되면 왕궁 여인들의 태가 다시 열린다는 것입니다(20:7, 17-18).

동일한 역사가 욥기 끝머리에 다음과 같이 기록이 되고 있습니다; “내 종 욥이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것인즉 내가 그를 기쁘게 받으리니 너희가 우매한 만큼 너희에게 갚지 아니하리라”(42:8),  욥이 그의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전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42:10). 욥이 기도하므로 그의 친구들이 용서함을 받고 욥 역시 신원이 회복되고 갑절의 축복을 받게 되었다는 내용입니다.

그와 같이 하나님께서 의인의 기도에 힘을 실어 주신다는 사실을 복음서에서도 다음과 같이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18:18-19).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이며 그리스도의 제자인 성도들은 용서하며 중보하는 기도생활에 더욱 정진하여야 할 것입니다.

 

6.    아브라함을 불러서 따지는 똑똑한 아비멜렉 왕(20:8-10)

 

블레셋의 황제 아비멜렉은 그 밤에 너무나 놀라서 잠이 깨었습니다(20:3). 사라를 돌려보내지 아니하면 죽여버리겠다는 꿈속 하나님의 엄포가 너무나 생생했기 때문입니다(20:7). 그런데 난데없이 내명부에서 급한 전갈이 왔습니다. 아기를 생산하고 있던 후궁 하나가 갑자기 아기의 태가 닫혀버리는 기현상을 경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20:18).

아기의 목숨은 물론이고 그 후궁의 목숨까지 위태롭다는 보고입니다. 아비멜렉 황제는 모골이 송연했습니다. 사라를 일찍 돌려보내지 아니하면 황제의 목숨은 물론이고 온 왕가의 자녀생산을 단절시켜버리겠다는 하나님의 엄포가 사실로 드러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유일한 타개책은 하나님의 선지자 아브라함을 불러서 그의 기도를 받는 것입니다(20:7). 그래서 그날 아침에 중신들을 모아놓고서 아브라함을 황궁으로 불렀습니다(20:8-9). 막상 저자세로 아브라함에게 기도를 부탁하려고 하니까 아비멜렉은 자신이 너무나 억울해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사실은 아브라함이 거짓말을 했기 때문에 모든 일이 연달아 발생을 한 것입니다(20:2). 따지고 보면, 자신은 완전한 피해자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다음과 같이 아비멜렉이 따지고 있습니다; “네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느냐? 내가 무슨 죄를 네게 범하였기에 네가 나와 내 나라가 큰 죄에 빠질 뻔하게 하였느냐? 네가 합당하지 아니한 일을 내게 행하였도다 하고, 아비멜렉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네가 무슨 뜻으로 이렇게 하였느냐?”(20:9-10).

 

7.    사라의 옛날 신분과 과거 애굽에서의 선례를 가지고 발뺌을 하고 있는 치사한 아브라함(20:11-13)

 

똑똑한 아비멜렉의 진실추궁에 대하여 아브라함의 해명이 거의 변명처럼 들립니다. 자신이 멀쩡한 아내를 누이동생이라고 속인 것은 다음 3가지 이유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1)  첫째로, 이곳 블레셋의 땅에서는 가정을 보호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아니하고 힘으로 이주민의 아름다운 아내를 빼앗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20:11a, 2:20-25, 6:2-5).

1)   그것도 아예 그 남편을 죽여 버리기도 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은 어쩔 수 없이 부부관계를 오누이 관계로 위장했다는 해명입니다(20:11b). 한 마디로, 제 목숨을 살리기 위하여 사랑하는 아내가 남의 첩으로 끌려가는 것을 두 눈 뻔히 뜨고서 그냥 지켜보고 있었다는 변명입니다(20:2).

2)   그것은 믿음의 조상의 후보가 되고 있는 여호와의 선지자 아브라함의 처신이라고 하기에는 낙제점인 것 같습니다(20:7). 요컨대, 변명치고는 치사하기가 그지없습니다.

(2)  둘째로, 사라가 본래 결혼하기 전에 자신의 이복 누이 동생이라는 아브라함의 진술입니다(20:12). 그 말은 사실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 옛날 혼인 전의 신분입니다.

1)   고대 족장사회에서 이복 오누이 사이의 결혼이 가능합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일단 혼인을 하게 되면, 이미 부부관계입니다. 마치 이혼한 것처럼 위장을 하고서 블레셋의 원주민들에게 오누이 사이라고 말한 것은 일종의 속임수입니다.

2)   그것은 기만 행위이며 사기 행각입니다. 더구나 이듬해 약속의 아들 이삭을 낳도록 역사하여 주겠다고 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두터운 보호하심을 전혀 믿지 못하고 있는 연약한 인간의 모습입니다. 요컨대, 그것도 해명이라고 줄줄이 변명을 늘어놓고 있는 아브라함이 참으로 딱하게 보입니다.  

(3)  셋째로, 과거 애굽제국에 들어갔을 때에도 그들 부부 사이에 그렇게 합의를 하고서 처신을 한 적이 있다는 사실을 아브라함이 밝히고 있습니다(20:13, 12:11-13).

1)   그들 부부 사이에 있어서는 이민을 가게 되면 그렇게 오누이로 행동하기로 이미 합의가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과거 애굽에서의 사례를 염두에 두고서 아브라함은 좋은 선례조차 있다는 변명입니다.

2)   그것이 무엇이 그렇게 좋은 선례라고 아비멜렉 앞에서 떠벌리고 있는 것일까요? 아브라함의 천성과 자질이 형편이 없는 것 같습니다. 마치 제 목숨 하나 살리겠다고 스승을 세 차례나 부인하고 도망을 치던 수제자 베드로의 모습을 창세기에서 미리 보는 것과 같습니다(18:25-27).

 

8.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 부부를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시는 하나님의 은혜

 

아브라함이나 베드로와 같은 자들을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조상으로, 그리고 사도로 세우고 계십니다. 그들이 결코 위대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위대하시기 때문에 그와 같은 세움이 가능합니다.

훗날 그 점을 아비멜렉 황제가 아브라함을 찾아와서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습니다;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21:22).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지자로 세워 주시고 그의 기도에 힘을 실어주시기 때문에 아비멜렉이 그를 겁내고 있는 것입니다(20:3, 7).

그냥 인간적으로 행하고 있는 소행과 처신으로 본다면, 아브라함이 아비멜렉보다 나은 점이 별로 없습니다. 그 점을 똑똑한 블레셋의 황제인 아비멜렉이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아브라함이 아니라 그의 뒤를 보살펴주고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요컨대, 아브라함이 무슨 일을 하든지, 설혹 치사스럽고 비겁한 행위를 하더라도, 그를 전적으로 보호하고 지켜 주시는 그 여호와 하나님이 아비멜렉은 진실로 두렵다는 뜻입니다.

훗날 스승님을 배신하고 뿔뿔이 흩어졌던 11제자를 다시 불러모아 예전처럼 사도로 세우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사도 요한이 그의 복음서 제21장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으로 남기고 있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21:17-19).

장차 베드로가 목양을 하는 과정에서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엄청난 믿음의 성숙과 성결의 과정을 밟게 된다는 예언입니다. 마침내 목자장이신 예수님처럼 양들을 위하여 목숨까지 버리게 되는 선한 목자가 될 것이라는 지적입니다(10:11).

그와 같은 말씀의 역사와 성령님의 인도하심이 있을 것이기에 예수님께서 안심하고서 그 부족한 제자들을 사도로, 그리고 목자로 발령을 내시고 세상으로 파송하고 계십니다(21:15-17).

결론적으로, 세상에 완전한 인생은 없습니다. 완벽한 인간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할 때에 보다 완전한 인생을 살 수가 있습니다(17:1). 그것이 아브라함과 베드로의 인생을 통해서 성도들이 배우게 되는 진정한 교훈이라고 하겠습니다.

 

9.    아비멜렉이 애초 거짓말을 하고 자신을 속인 괘씸한 아브라함에게 그래도 예물을 보내며 영주권을 주고 그의 기도를 요청한 이유(20:14-18)  

 

참으로 이상합니다. 사라를 후궁으로 끌고 간 잘못에 대하여 그 원인을 규명하자면, 분명히 귀책사유가 아브라함에게 있습니다. 그가 자신의 아내를 누이동생이라고 애초에 거짓말을 함으로 말미암아 2차례나 동일한 사건이 애굽과 그랄 땅에서 발생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12:13, 20:2).

본문을 살펴보면, 아비멜렉이 진실을 규명함으로써 귀책사유가 아브라함에게 있음을 명백하게 밝혀내었습니다(20:9-13). 그렇다면 아브라함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하고 하나님께 다시 한번 자신의 억울함을 고해야만 합니다(20:4-5). 그러나 아비멜렉은 결코 그렇게 처신을 할 수가 없습니다.

다음과 같은 엄중한 이유 때문입니다;

(1)  첫째, 하나님께서 이미 자초지종을 다 알고 계십니다(20:3, 6).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판결과 조치는 아브라함을 보호하시고 아비멜렉 자신에 대해서는 무조건 시정을 하라는 것입니다(20:7).

(2)  둘째, 그렇게 따지고 억울하다고 계속 항변을 하다가는 자기 목숨은 물론이고 왕가 자체가 망할 판국입니다(20:3, 7). 하나님께서 엄포에 그치신 것이 아니라 이미 창조주의 고유한 능력으로 실력행사에 들어가셨기 때문입니다(20:18).

하나님의 말씀은 무조건 사라를 그녀의 남편인 아브라함에게 돌려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과 사라의 마음을 달래어주고서 선지자 아브라함으로부터 기도를 받으라는 것입니다(20:7). 한 마디로, 아브라함에게 잘 보여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게 양과 소와 종들을 엄청 선물하고 있습니다(20:14). 물론 사라를 돌려보내고 그들 부부가 그랄 땅에서 마음 놓고 잘 살 수 있도록 영주권을 부여해줍니다(20:15).

끝으로, 사라에게는 따로 은 1,000, 30명 이상의 노예를 살 수 있는 큰 돈을 주고서 상처 입은 그 마음을 달래어주고 있습니다(30:16). 그 결과 마음이 풀어진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을 위하여 하나님께 진심으로 기도를 올립니다(20:17a). 그러자 아비멜렉 왕가의 모든 가임 여성들의 태가 다시 열리고 출산이 가능해집니다(20:17b).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이상한 분이십니다. 사람들의 상식에서 벗어난 일을 위와 같이 행하시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놀랍게도 그 가운데 역사를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지혜가 번쩍이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가시는 방향성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아브라함이 자신의 아내를 누이동생이라고 속임으로 말미암아 애굽의 황제인 바로와 블레셋의 연맹왕인 아비멜렉을 실족하게 만든 바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진상이 밝혀졌을 때에 아브라함이 그들에게 백배사죄를 하고 잘못을 바로잡아야만 합니다.

그런데 국면의 전개는 정반대입니다. 오히려 그들 황제나 연맹왕이 진상파악을 하고 나서도 정작 당사자인 아브라함에게 그 책임을 물을 수가 없습니다. 예를 들면, 바로는 손위 처남인 줄 알고서 아브라함에게 그동안 많은 예물을 주었는데 그것을 되돌려 받지 못합니다(12:16).

그 이유는 한마디로, 아브라함에게 잘 보여야 될 필요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애굽에 내린 재앙을 벗어나자면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습니다(12:17, 19-20). 그리고 위에서 이미 살펴본 아비멜렉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저 아브라함에게 진실을 알고자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핑계와 변명만 늘어놓고 있는 아브라함이 가소롭습니다. 그렇지만 말로써 따지기만 했을 뿐 그 이상의 추궁을 하거나 손을 댈 수가 없습니다. 아브라함의 거짓말로 말미암아 그가 받은 피해에 대해서 배상을 하라고 요구하지도 못합니다. 그와는 정반대로 오히려 많은 예물을 주면서 아브라함에게 부탁을 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이상한 판결과 조치의 내용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판결은 남의 아내를 황제가 후궁으로 데리고 왔다는 것입니다. 잘못 알고서 데리고 왔더라도 남의 아내를 후궁으로 삼은 것은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고의가 아니라 과실에 대한 책임을 추궁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적인 상식에 입각하여 판단을 한다면, 아브라함이나 사라가 사전에 자신들은 부부 사이라고 황제에게 밝혀야만 합니다. 그런데 상대방이 먼저 의도적으로 속인 사건에 대하여 어떻게 그렇게 억지 판결을 내릴 수가 있습니까? 그것은 사람들의 상식과 정반대입니다.

그렇다면 왜 그러한 억지스러운 일을 버젓이 행하시고 계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사람의 뜻과 하나님의 뜻이 서로 다를 때에 창조주의 뜻이 우선한다는 법칙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피조물인 인간은 우주와 인생의 주인이 되고 계시는 창조주의 주권적인 권리를 먼저 인정해야 하며 그 분의 뜻대로 역사가 진행되어 나간다는 사실을 깨달아 알아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나아가서 하나님의 뜻과 역사섭리의 방향에 맞도록 자신의 삶을 조율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는 창조주 하나님 말씀의 뜻과 세상경영의 이치를 이미 성경에서 밝히고 계십니다. 특히 창세기가 그러합니다. 쉬운 예를 하나 들어보자면, 아담과 하와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원하시는 가정의 제도를 사람들에게 밝히 보여주고 계십니다(2:20-25). ‘일부일처제도(monogamy)가 그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돈과 권력이 생기면 하나님을 저버리고 창조주가 만드신 일부일처라는 아름다운 가정의 제도마저 헌신짝처럼 버리고서 살고 있습니다(6:2-8). 그래서 하나님께서 강력하게 역사에 개입을 하십니다.

노아의 시대에는 전면적인 홍수심판을 행하셨지만 무지개언약 후에는 다른 방법을 사용하고 계십니다. 악의 뿌리를 도려내는 방향으로 역사를 전개하시는 것입니다(8:21).

그것이 사탄의 머리를 쳐부수고 인간을 구원하는 방법입니다(3:15). 죄와 사망을 관장하고 있는 사탄의 권세를 쳐부수고 사람들에게 구원과 영생을 주기 위하여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게 된 것입니다(3:16-17, 8:1-2).

그와 같이 성경은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가는 하나님의 섭리와 역사의 방향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법과 제도로 사회의 질서와 제도가 회귀할 수 있도록 역사를 섭리하고 계십니다.

그와 같은 관점에서 바라보게 되면, 아브라함과 황제들 사이에 이루어지고 있는 그 이상한 광경이 비로소 다음과 같이 이해가 되기 시작할 것입니다;

(1)  첫째,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기본적으로 아무리 황제라고 하더라도 너무 많은 여인을 거느리고 있는 것이 옳지 않다고 판정하고 계십니다. 세상적으로 저희들끼리 그렇게 그냥 지내게 될 때에는 내버려두고 있습니다(1:24, 32).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사람이 그 땅에 들어오게 되면 그 때부터는 조심을 하여야만 합니다(20:7). 하나님의 사람이 보고 경험하게 되는 것이 그대로 하나님께 보고가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2)  둘째, 하나님의 천사들과 군대가 하나님의 선지자를 감싸고 있습니다(19:10-11, 20:3, 21:22, 32:1-2). 그런 줄도 모르고 바로나 아비멜렉이 사라의 아름다움만을 보고서 덥석 후궁으로 끌고 가고 말았습니다(12:15, 20:2). 스스로 제 발등을 찍은 셈입니다. 하나님께서 눈이 따갑도록 주시하고 계시는데 감히 선지자의 아내를 끌고 간 것입니다(20:7).

그렇지만 세상적으로 보자면, 바로나 아비멜렉과 같은 황제들이 그렇게 처신을 할 만도 합니다. 자신의 본국 백성들도 황제가 원하면 예쁜 여자를 바쳐야만 하는데(왕상1:1-4, 삼상8:13) 이주민에 불과한 히브리인 아브라함이 무슨 재주로 자신의 아내라고 주장하면서 사라를 붙들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처신을 했다가는 쥐도 새도 모르게 사전에 황제의 신하들에 의하여 도륙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12:12, 20:3). 실제로, 매력적인 아내 때문에 그 남편이 살해를 당하는 일이 훗날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 발생을 합니다.

다윗과 같은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있는 황제의 경우에 있어서도 버젓이 다음과 같은 일이 자행되고 있습니다; “다윗은 신하의 아내인 줄 알면서도 밧세바와 동침을 합니다. 더구나 그 남편 우리아마저 적군의 화살을 빌려서 암살을 하고 맙니다. 그리고 선지자 나단이 그 일을 질책하기 전까지는 그것이 죄인 줄도 모르고서 잘 지내고 있습니다”(삼하11:3-17, 12:9-14).

그래서 그런지 일찍이 모세는 신명기에서 왕을 세우는 문제와 관련하여 그 점을 명심하라고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도 우리 주위의 모든 민족들 같이 우리 위에 왕을 세워야겠다는 생각이 나거든 반드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자를 네 위에 왕으로 세울 것이며”(17:14-15), “그에게 아내를 많이 두어 그의 마음이 미혹되게 하지 말 것이며 자기를 위하여 은금을 많이 쌓지 말 것이니라”(17:17).

황제도 왕도 모두 하나님께서 만드신 제도의 본 뜻을 살펴야만 하는 시대가 도래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신 이후 황제와 왕의 특권이 사라지고 있습니다(12:31). 만민구원의 시대가 전개가 되고 하나님의 말씀과 뜻이 역사를 주도해 나가고 있습니다(25:40-46, 28:18-20).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려는 새로운 시대에 세상적인 논리와 명분으로만 대항을 하다가는 바로나 아비멜렉과 같은 곤경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본문에서 알 수 있는 깨달음이라고 하겠습니다.

 

(참고자료)  창세기 강의 골자 22(20:1-18)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강의일; 주후 2016 1 21()

 

1.      헤브론에서 살고 있던 아브라함 가족이 갑자기 블레셋 그랄 평야로 이주한 이유는 무엇인가?(20:1)

(1)   헤브론 지역의 가뭄을 피하여 비옥한 그랄 평야로 이주한 것으로 보임.

1)      소돔과 고모라(19:24-25) 그리고 아드마와 스보임(29:23) 등의 도시국가가 유황불 심판으로 초토화가 되면서 재와 연기가 하늘을 뒤덮고 있음(19:28).

2)      때문에 서북쪽으로 60KM떨어져 있는 헤브론 지역까지 가뭄의 피해가 심각하여 아브라함이 식솔을 이끌고 물이 풍부한 그랄 땅으로 이주를 하고 있는 것임(20:1).

(2)   이방인선교에 대한 아브라함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의 차이를 보여주고 있음.

1)      아브라함은 가나안 지역에서 이방인들과 함께 살면서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면(14:19-20, 20:7, 23:6) 그것으로 선교의 사명을 모두 감당하는 것으로 판단하고 있음.

2)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다른 것으로 보임.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들을 가나안에서 애굽’(39:2, 요셉, 47:8-10, 야곱, 12:29-36, 이스라엘 자손들의 출애굽) 블레셋의 그랄 ’(26:12-14, 28, 이삭과 아비멜렉)에까지 보내어서 그곳 현지인들에게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놀라운 권능을 보여주기를 원하시고 있음.

3)      이유는 그들 모두가 훗날 구원의 대상이기 때문임. 따라서 하나님신앙을 파수하고 있는 아브라함의 집안에 약속의 아들을 계속 세워서 만민구원의 준비를 미리 미리 하시는 것임(17:19, 22:18, “ 씨로 말미암아 천하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4)      훗날 메시아 시대를 내다보고 있는 선지자 이사야의 다음 예언을 참조할 필요가 있음; 그날에 애굽에서 앗수르로 통하는 대로가 있어 앗수르 사람은 애굽으로 가겠고 애굽 사람은 앗수르로 것이며 애굽 사람이 앗수르 사람과 함께 (여호와 하나님을) 경배하리라. 그날에 이스라엘이 애굽 앗수르와 더불어 셋이 세계 중에 복이 되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주시며 이르시되, 백성 애굽이여, 손으로 지은 앗수르여, 나의 기업 이스라엘이여, 복이 있을지어다 하실 것임이라”(19:23-25).

 

2.      아브람이 75세때 애굽에서 범한 잘못을 열국의 아비 아브라함이 되어 99세때 다시 그랄 땅에서 되풀이하는 이유는 무엇인가?(20:2)

(1)   첫째, 아내 사라가 할머니임에도 불구하고 내년에 아들 이삭을 낳기 위하여 엄청나게 젊은 몸으로 변화가 되어 있기 때문임(17:17, 19, 18:10, 21:1-2). 그래서 아브라함이 여전히 젊게 보이는 미인 아내 사라 때문에 이방인 블레셋의 땅에서 목숨의 위협을 느끼고 있는 것임(20:2, 11).

(2)   둘째, 믿음이 성숙하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육신의 약함을 경험하고 있는 것임.

1)      사도 바울의 고백을 참조할 필요가 있음; “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지체 속에서 다른 법이 마음의 법과 싸워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 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7:22-25).

2)      어째서 믿음의 열조들이 모두 그리스도의 구원을 기다려야만 하는지를 설명해주고 있다고 하겠음(5:24-29, “(그리스도의) 말을 듣고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 얻었고 심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11:13-16, 26, 그리스도를 바라는 모세의 믿음).

3)      따라서 성도들은 끝까지 하나님의 영적인 도우심을 받아서 신앙생활을 해야만 . 한마디로, 말씀묵상과 기도는 성도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 움직이게 만드는 개의 바퀴와 같다고 하겠음.

 

3.      밤에 즉시 하나님이 그랄 아비멜렉의 꿈에 현몽하셔서 그를 크게 위협하시는 이유는 무엇인가?(20:3)

(1)   약속의 아들 이삭을 낳을 있도록 사라를 안전하게 보호하시기 위한 것임.

(2)   블레셋의 왕중왕인 아비멜렉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위엄과 두려움을 보여주기 위한 것임(20:18). 때문에 후에 아브라함과 아비멜렉 사이에 대등하게 상호불가침 조약이 브엘세바에서 체결이 되고 있음(21:22-33).

 

4.      그랄 아비멜렉의 항변이 정당하다는 사실을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면서도 일부러 강력한 조치를 취하시고 있는데 이유는 무엇인가?(20:4-7)

(1)   아브라함의 누이동생인줄만 알고서 사라를 후궁으로 데리고 아비멜렉의 입장으로서는 사실 억울한 것임(20:2, 5).

(2)   아비멜렉의 항변이 정당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하나님께서 짐짓 가혹한 처벌을 하시는 이유는 따로 있음(20:6). 그것은 훗날 성도들의 지상명령수행을 위한 것임(10:1, 7-15, 28:18-20).

1)      첫째, 하나님의 선지자를 이방 선교의 현장에서 강력하게 보호하신다는 사실을 후세에 알려주기 위한 선례에 해당함(20:7).

2)      둘째, 하나님의 선지자를 선대하는 자에게는 복을 내리고 불이익을 주는 자에게는 창조주의 징계가 임한다는 사실을 모두에게 눈으로 보여주기 위한 것임(20:18).

3)      셋째, 하나님의 선지자의 중보의 기도가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에 절실하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는 것임(20:7, 17).

 

5.      아브라함과 사라를 보호하기 위한 하나님의 안전장치는 어느 정도로 강력한 것인가?(20:6-7, 18)

(1)   약속의 아들을 생산하게 되는 부모를 괴롭히는 자는 죽을 것이며 가문이 모조리 망하고 만다는 것임(20:7). 허풍이 아니라 실제로 왕궁의 모든 여인들의 태를 닫아버리심으로 말이 사실임을 보여주고 있음(20:18).

(2)   같은 맥락에서 그리스도로 오신 아기 예수와 부모를 죽이려고 했던 헤롯 대왕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마는 것을 역사 가운데 있음(2:13, 22, 미쳐서 실각하게 되는 헤롯 대왕, 그리고 그의 아들 아켈라오도 폭정으로 실각하게 ).

 

6.      사라를 보호하여 이듬해 약속의 아들 이삭을 낳는 일이 어째서 그토록 중요한가?(17:16, 18:10, 20:6, 21:2)

(1)   이방 땅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하나님신앙을 정착시키는 것이 간단한 일이 아니기 때문임. 그것을 대를 이어서 수행해야만 하는 것임.

(2)   약속의 아들이 있어야 의인의 가계를 이어가면서 자신의 세대에 모든 백성을 대표하여 하나님과의 언약을 발효시키고 적용시킬 수가 있기 때문임. 일찍이 의인 노아가 자신의 세대에 있어서 하나님과의 언약의 상대방이 되고 있음을 있음(8:20-22, 9:8-13).

(3)   창세기 5장에 실려 있는 아담의 계보그리고 11장에 실려 있는 셈의 족보 그와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는 의인의 족보이며 영적인 장자 약속의 아들들의 계보라고 있을 것임.

 

7.      아비멜렉이 그날 아침에 일찍이 신하들을 불러 상의를 이유는 무엇인가?(20:8)

(1)   간밤 꿈속에서 나타나신 하나님의 말씀이 너무나 생생하고 두려웠기 때문임(20:3, 7, “돌려보내지 아니하면 몰살 당할 알지니라”).

1)      그냥 개꿈으로 생각하고 넘겨버리기에는 참으로 이상한 꿈임. 그래서 현명한 신하들을 불러서 상의를 것으로 보임(20:8).

2)      고대사회에서 왕의 꿈은 안보상의 위기를 미리 말해주는 경우가 많이 있기 때문임(41:1-7, 애굽 바로의 차례 , 2:1, 바벨론 느부갓네살 황제의 신상 ).

(2)   실제로 그러한지 아침 일찍 급히 조사를 필요가 있었기 때문임(20:8).

1)      아비멜렉의 종들이 왕의 말을 듣고 심히 두려워하고 있는 이유는 그들이 조사한 궁내의 사정과 부합되고 있었기 때문으로 보임(20:18, “사라의 일로 왕궁내의 모든 여인이 아기를 낳다가 기이하게도 도리어 태가 닫히고 있는 것임”).

2)      꿈과 현실을 대조하면서 신중하게 처리를 하고 있는 자가 바로 아비멜렉 아비 . 그는 굉장히 현명한 자임. 왜냐하면, 5도시국가 연합체에서 선출이 대왕이기 때문임.

3)      일찍이 지중해 바다로 진출한 함족이 혼혈이 되어 세력이 강해지자 블레셋 족속이 되어 가나안 남부 해안가 좋은 땅을 차지한 것임(10:14). 그들의 5도시국가가 바로 아스돗, 아스글론, 가사, 에그론, 가드 등임.

4)      참고로, 가드 가사 사이 넓은 평야지대가 곡창지대인 그랄 땅이며 왕중왕의 직할지가 되고 있음. 그곳에서 훗날 이삭이 농사를 지어 백배의 소득을 얻고 있음(26:12).

 

8.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을 불러서 따지고 있는 일은 무엇이며 아브라함의 해명은 어떠한가?(20:9-13)

(1)   귀책사유가 아브라함의 거짓말에 있음을 분명히 규명하고 있음(20:9a).

(2)   때문에 블레셋 도시국가에 위해가 발생하고 있으므로 거짓말을 아브라함은 자신의 숨은 의도를 밝히라고 말함(20:9b-10).

(3)   논리적이고도 현명한 아비멜렉의 책임소재와 의도에 대한 추궁에 대처하고 있는 아브라함의 변명은 실로 곤궁하기 이를 데가 없음(20:11-13);

1)      거인 (6:4, 네피림, 13:28, 아낙 자손, 15:1-16, 블레셋과 싸우는 삼손, 삼상17:4, 가드 사람 골리앗) 블레셋 사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므로 선지자인 자기를 죽이고 미인 아내 사라를 약탈해갈 것이 두려웠다는 것임(20:11).

2)      실제로 결혼 전에 사라가 자신의 이복 누이동생이라고 말함(11:26, 아내가 많은 부자 족장인 아버지 데라, 20:12).

3)      지금까지 이방지역을 다닐 때에 목숨유지를 위하여 그렇게 했다는 것임(20:13). 관행임을 내세우면서 자신의 책임을 경감시키고 있는 것임.

4)      실제로는 애굽에 이어(12:11-15) 이번이 번째에 불과하므로 그것은 설득력이 약함. 참으로 비겁하고 치사하기가 이를 데가 없는 아브라함임.

 

9.      치사한 변명을 하면서 자신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있는 이기적인 아브라함을 그래도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시는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20:11-13)

(1)   구원이라고 하는 것이 사람의 의로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임(44:22, “너는 내게로 돌아오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니라”).

(2)   사람이 거룩한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이 거룩하시기에 구원을 베풀어주시는 것임(3:5, 거룩하신 하나님, 3:12, 출애굽시켜 하나님의 산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 44:24, “ 구속자요 모태에서 너를 지은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3)   구원을 받을 있는 사람의 자격은 첫째, 자신이 이기적이며 치사하고 비겁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인정하는 것임. 둘째, 자신은 스스로 고칠 능력이 없으므로 하나님께서 새로운 창조를 해달라고 매달리는 것임. 셋째, 남은 인생을 직접 인도하시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의미 있는 인생이 되도록 해달라고 맡기는 것임;

1)      무자식인 아브람이 자신에게 별과 같이 많은 자손을 것이라고 하는 참으로 믿지 못할 하나님의 말씀을 그냥 믿음으로 받아들임(15:5-6). 그것이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아브라함의 정직한 신앙자세임. 요컨대, 아브라함에게서 발견할 있는 놀라운 믿음의 자세임.

2)      마디로, 하나님을 창조주로 대접하였기에 피조물인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가 임하는 것임(7:12). 믿지 아니하면 새로운 인생, 놀라운 축복은 현실화되지를 못하는 것임을 가르쳐주고 있음.

3)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하건데 종을 떠나 가지 마시옵고”(18:3). 자신은 하나님의 종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고백함. 주인의 자리를 차지하고자 하는 루시엘과는 다름(14:12-15).

4)      나는 티끌이나 재와 같사오나 감히 주께 아뢰나이다”(18:27). 하나님 앞에 미물과 같은 피조물임을 잊지 아니하고 있음. 하와의 타락(3:5-6) 정반대임.

5)      장조카 롯의 가족만이 아니라 소돔과 고모라 성의 모든 사람을 살리기 위하여 7차례나 간구하고 있는 아브라함임. 하나님의 선지자로서 행하는 만민구원 중보기도의 자세를 아브라함이 제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임(18:23-32).

6)      여기 그랄 땅에서도 마찬가지 자세임. 아비멜렉 왕가를 위하여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선지자로서 간절히 기도를 해주고 있는 것임(20:17).

 

10.    차례나 자신을 이방나라 통치자의 후궁으로 끌려가도록 방치하고 있는 남편 아브라함을 그래도 따르고 있는 사라는 어떠한 여인인가?(12:12-15, 20:2)

(1)   진심으로 남편 아브라함을 사랑하고 그의 목숨을 살리고자 차례나 묵묵히 자신을 희생하고 있는 여인임(12:15, 20:2).

(2)   남편의 진심도 믿지만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믿고 있는 뛰어난 신앙의 여인임.

1)      따라서 그녀는 열국의 믿음의 어미가 되며 그녀의 아들이 약속의 아들이 되는 것임(17:15-16, 21:6-7, 4:23-31, 육신보다 영적인 하나님의 약속과 자유로운 창조의 능력을 믿은 여인 사라의 아들 이삭).

2)      이방여인 하갈의 소생과는 다른 것임(16:9-12, 4:23, 현세적인 축복과 육체를 따라서 아들 이스마엘).

 

11.   아브라함을 애굽 땅과 블레셋 땅으로 들여보냄으로써 하나님은 어떠한 이득을 취하시고 계시는가?(20:7-8, 17-18)

(1)   창조주의 살아계심을 증거하게 (12:15, 17, 사래의 연고로 애굽에 재앙을 내리심, 20:3, 7, 18, 여인의 태를 닫아버림으로써 아비멜렉보다 크신 하나님의 존재를 나타내심, 20:8, 아비멜렉의 신하들이 심히 두려워함).

(2)   선지자의 기도가 있어야 축복이 회복된다는 사실을 알게 (20:7, 17, 아브라함의 기도로 여인의 태가 열림).

(3)   훗날 만민구원의 대로를 미리 준비하고자 하시는 것임(19:22, “여호와께서 애굽을 치실지라도 치시고는 고치실 것이므로 그들이 여호와께로 돌아올 것이라”, 19:23-25).

 

12.   그래도 하나님과의 언약 안에 머물고 있는 아브라함과 언약을 잊어버리고 살고 있는 롯과의 차이는 무엇인가?(19:30-38, 20:3, 7)

(1)   하나님의 언약의 영원성과 성취를 믿고 있는 아브라함은 대표적인 언약 안에 머물고 있는 ”(staying in the covenant)(21:33, 22:9-10). 그래서 약속의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으로 데리고 것으로 히브리서 저자가 보고 있음(11:18-19).

(2)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구원보다는 소돔 성의 향락과(13:10-13) 그곳에 있는 자신의 재산을 아까워하고 있는 롯임(19:15-16).

1)      그는 그의 아내와(19:26) 더불어 이미 하나님의 언약을 떠난 ”(out of the covenant) 행동을 보여주고 있음.

2)      그것은 믿음의 조상의 반열에서 일찍 탈락하고 있는 족장 데라의 경우와 뒤늦게 같아져 버리는 것임(11:31-32, 12:1).

(3)   결국,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신실하게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며 전능성에 의지하여 끝까지 믿음의 인생을 살아내는 것임. 중도에 포기하게 되면 데라와 롯의 비극을 경험하게 된다고 하겠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