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설교 모음(손진길 목사의 글)

창세기 제13장에 대한 강해설교 모음(손진길 목사의 글)

손진길 2024. 5. 22. 15:42

창세기 제13장에 대한 강해설교 모음(손진길 목사의 글)

 

1.    가나안 남부지역 네게브와 예루살렘 북쪽 벧엘에서의 아브람의 생활(13:1-6)

 

현대인류는 오늘 날 6개의 대륙에 흩어져서 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아브람 시대의 사람들은 그 가운데 3개의 대륙에 흩어져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삶의 터전은 사실 하나로 연결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의 대륙이라고 불러도 그리 틀린 말이 아닙니다.

유럽과 아시아가 본래 하나입니다. 그래서 진작부터 유라시아대륙이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옛날부터 유목민들이 서로 동서로 왔다 갔다 하던 땅을 인류학자와 역사학자들이 구태여 둘로 갈라서 유럽과 아시아라고 구분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내세우고 있는 이유는 인종과 역사와 문화의 차이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유럽 백인종들의 언어와 역사와 문화가 아시아의 황인종의 것과 상당히 다릅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오랜 세월 서로가 적대감을 가지고 벽을 쌓았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으로 보입니다. 활발한 교류를 하였더라면 주후 20세기까지 갈 것도 없이 벌써 하나의 문화권으로 통합이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프리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실제로 아브람 시대에는 아프리카 동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이집트와 아시아 중동 땅의 메소포타미아 사이에는 활발한 교류가 있었습니다. 서로 물자가 오고 갔으며 인적인 교류도 있었습니다.

시나이 반도와 가나안 남부지역을 통하여 육로로 이동이 가능하였으므로 당시의 사람들은 하나의 대륙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자들이 아프리카를 또다른 대륙이라고 구별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흑인종들이 주로 살고 있는 아프리카를 유럽사람들이 오랜 세월 식민지로 경영해오면서 그렇게 인위적으로 차별하고 구별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아브라함의 시대에는 다릅니다. 애굽제국이 강성했습니다. 그리고 메소포타미아와의 교류와 무역 또한 활발했습니다. 많은 아라비아 사람들이 두 문명권을 오가면서 장사를 했습니다. 창세기에 나타나고 있는 이스마엘 상인 또는 미디안 상인들이 그들입니다(37:25, 28).

그들 대규모의 상단들은 가장 짧은 거리를 찾아서 직선코스로 물건을 운반하고 있습니다. 그 무역로에 가나안 남부지역이 일부 위치하고 있습니다. 가나안 남쪽의 메마른 땅이 갑자기 무역로가 되면서 그 이름이 외부로 알려지기 시작합니다. 브엘세바와 브엘라해로이, 국경도시인 가데스 바네아 등이 그러합니다(14:7, 16:14, 20:1, 21:14, 31, 22:19, 25:11, 1:2).

그 지명들은 네게브 지역에 속해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출애굽을 한 아브람의 일행이 가나안 남쪽 네게브 지역으로 올라가고 있습니다(13:1). 여기서 네게브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남쪽이라는 뜻입니다. 가나안 남쪽은 사막성 기후를 가지고 있습니다.

연중 강우량이 30 cm도 못됩니다. 그래서 땅이 말라 있습니다. 모래사막은 아니지만 건조한 흙으로 되어 있는 일종의 광야입니다. 그 남단은 신 광야로 불리고 있습니다. 네게브의 면적은 가나안 전체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출애굽한 아브람 일행은 네게브를 지나서 계속 북상하고 있습니다(13:1). 드디어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19km에 위치하고 있는 벧엘과 아이 사이에 도착하고 있습니다(13:3). 그곳은 일찍이 아브람 일행이 하란에서부터 가나안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제대로 제단을 쌓을 수 있었던 곳입니다(12:8, 13:4).

그들은 애굽에서 바로 황제로부터 많은 재물을 얻었습니다(13:2). 그래서 그 발걸음이 경쾌하지가 못하고 무겁습니다. 사실은 롯이 아니라 아브람이 바로에게서 많은 재물을 얻었습니다(12:16). 그렇지만 아브람은 그것을 독차지하지 아니하고 조카인 롯에게 많이 분배한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출애굽 후에 갑자기 롯이 부자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12:6). 아들이 없는 아브람이 롯을 양아들로 생각하고서 사전에 재산을 상속해준 것으로 추정이 됩니다. 같은 맥락에서 롯이 벧엘에서 자신을 떠나고 나자 아브람이 가신(家臣) 가운데 다메섹 출신인 엘리에셀을 선택하여 양자로 삼고자 하고 있습니다(13:11, 15:2-3).  

아브람과 롯은 자신들의 그 많은 재물을 지키기 위하여 많은 사람을 고용하고 있습니다. 우선 양치기와 무사를 고용한 것입니다(13:7). 그리고 가사 일을 도울 수 있는 이방인 여종들도 많이 거느리고 있습니다(16:1).

이제는 그냥 자연인 아브람과 롯이 아닙니다. 많은 재물과 종들을 거느리고 있는 족장들입니다. 따라서 족장 아브람과 족장 롯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정확하다고 하겠습니다. 마침내 벨엘과 아이 사이에서 그들의 많은 재물과 그것을 관리하는 수하의 사람들이 두 족장 사이에 갈등을 일으키고 있습니다(13:5-7).

 

2.    숙질(叔姪, 삼촌과 조카) 사이에 발생하고 있는 갈등의 핵심은 무엇인가? 출애굽과 과거 하란을 떠나올 때의 차이가 무엇인가?(12:4, 13:5-11)

 

갈등의 핵심은 그들이 기르고 있는 가축의 수에 비해서 벧엘과 아이 사이의 초지가 너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13:5-6). 그들 뿐만 아니라 원주민 가운데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이 역시 그곳에서 목축을 하고 있습니다(13:7). 그러므로 뜨내기인 그들 가운데 누군가가 다른 곳으로 옮겨가야만 합니다.

그래서 백부로서 손위가 되고 있는 아브람이 점잖게 조카인 롯에게 제안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한 친족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13:8-9).

고대사회는 가부장 족장사회입니다. 장유유서(長幼有序, 늙은이와 젊은이 사이에는 순서가 있다)라는 서열이 확실합니다. 그러므로 선택권은 손위인 어른이 먼저 행사를 합니다. 위와 같은 제안을 받았을 때, 롯이 집안의 어른이신 백부 아브람에게 먼저 선택을 하시라고 말씀을 드리는 것이 상식입니다.

그런데 롯은 그렇게 하지를 않습니다. 그의 눈에 요단 강 동편의 요르단 땅과 염해 아래쪽에 위치하고 있는 소돔과 고모라라고 하는 도시가 인상 깊게 들어왔기 때문입니다(13:10ab). 마치 하나님의 에덴동산과 같이 물이 넉넉하며 아름답고 풍요롭습니다(2:8-10, 13:10c).

그리고 마치 애굽의 도시와 같이 수준이 높아 보입니다(13:10d). 환경이 좋고 문물이 빼어나니 그곳에 가서 살고 싶습니다. 그 욕심이 롯의 마음을 사로잡아 버립니다. 그래서 그는 백부를 외면하고 맙니다.

먼저 동쪽을 선택하고서 아브람이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도록 아예 이주를 합니다(13:11). 그 다음 요르단에서 남하하여 드디어 염해 아래 쪽에 위치하고 있는 소돔에 들어갑니다(13:12).

왜 롯은 그와 같은 철면피한 결정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분명히 조부인 족장 데라를 하란에 남겨두고 백부 아브람을 따라서 가나안으로 들어올 때에는 그러하지 아니했습니다. 그는 할아버지 데라의 재산을 상속하는 것보다 백부 아브람을 따라서 하나님 신앙의 길을 가는 것을 더 좋아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애굽에서 나올 때에는 무언가 변화가 생겼습니다. 그 변화는 그가 그토록 존경했던 아브람에게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모세가 기록하고 있는 유일한 사건은 백모인 사래가 바로의 후궁으로 들어갔다가 나온 사건입니다(12:15-20).

그 때 아브람은 자신의 목숨 하나 살리겠다고 원주민인 애굽사람 앞에서 자신의 아내를 누이동생이라고 불렀습니다(12:11-13). 물론 사래에게 눈독을 들이고 있는 이웃사람들에게 그렇게 소개를 했습니다(12:13-14). 그 결과 바로의 후궁으로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그 광경을 지켜보고서 롯은 백부 아브람의 신앙의 정체가 무엇인지 의구심이 생겼습니다. 한마디로, 별로 존경할 구석이 없는 백부입니다. 롯은 아브람을 계속 따라다녀 보았자 배울 것이 없겠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아브람이 서로 헤어지자고 제안을 했을 때에 얼른 가장 좋은 땅을 선택하고 만 것입니다(13:10-11).

그렇다고 하더라도 롯은 욕심꾸러기입니다. 재산을 나누어 줄 때에는 군소리가 없었습니다. 더 이상 얻을 것이 없다고 판단이 되자 그만 제 살길을 찾아서 떠나가버리는 것입니다(13:10-11). 한때 그토록 존경하고 따랐던 백부 아브람을 헌신짝과 같이 버려버리는 것입니다.

사람은 그토록 믿을 만 하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예수님께서도 이 세상에서 사람을 의지하지 아니했습니다(16:32a). 오직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 아버지만을 의지했습니다(16:32b).

이제는 배신감에 시달리게 되는 아브람이 인간적인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벧엘 땅에서 하나님께 호소할 차례입니다. 그 결과 여호와신앙을 끝까지 파수하고 있는 아브람 부부 앞에 여호와의 놀라운 축복의 말씀이 나타나는 것입니다(13:14-17).

 

3.    선택권을 먼저 행사하는 롯의 잘못은 무엇인가?(13:9-12)

 

겉으로 보면, 롯은 고대사회의 질서인 장유유서의 원칙을 무시하고 자신의 욕심을 먼저 이루고자 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습니다(13:9-12). 그러나 그 속을 들여다 보면, 그는 백부 아브람에게 실망하여 차제에 그를 떠나고자 하고 있습니다(12:13, 13:11). 겉으로 나타나는 롯의 행위는 비난을 받아 마땅합니다.

그러나 그의 내심을 감안하면, 함부로 그를 나무랄 수가 없게 됩니다. 그런데 그가 아브람을 떠난 결과가 이상하게 전개가 됩니다. 그는 소돔 땅에서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영적으로 둔감해져 버리는 잘못에 깊이 빠져들게 되기 때문입니다(19:8, 16, 33-38).

그러한 현상이 겹쳐서 그는 마침내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는 반열에서 완전히 탈락하고 맙니다. 그렇다면, 왜 그러한 결과가 초래되고 있는 것일까요? 한마디로, 롯이 범하고 있는 사회적인 윤리나 관습에 대한 위반 또는 백부 아브람의 결점을 보게 됨으로써 얻게 되는 상대적인 실망감 등으로는 결코 확실한 설명을 얻을 수 없는 절대적인 잘못이 그의 행위 속에 내재되어 있다고 하겠습니다.

구체적으로,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과 언약에 대한 인정의 미흡이며 완전한 인생을 살게 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에 대한 불순종에서 비롯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와 관련하여 훗날 아브람에게 주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15:1), “아브람이 99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17:1).

하나님께서 나의 인생의 주인이시며 언약대로 반드시 이루어 주신다고 믿는 것은 대단한 믿음입니다. 아브람이 그렇게 믿었기에 그가 믿음의 조상이 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롯은 그 믿음이 부족했습니다.

그는 자기 목숨을 살리겠다고 비겁한 행동을 하고 있는 백부만을 바라보았지 아브람의 인생을 인도하고 계시는 크신 하나님을 바라보지를 못했습니다(21:22). 그래서 아브람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방패와 지극히 큰 상급에서 멀어진 것입니다.

다음으로 롯은 장차 살 땅을 선택하는 중차대한 문제에 있어서도 하나님 앞에서의 의사결정을 하지를 못했습니다. 중요한 결정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과 의도를 먼저 파악하고 나아가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요청하지 아니하였다고 하는 것은 아예 완전한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전부 포기한 것과 같습니다.

그저 자기의 눈으로 보기에 좋은 곳을 선택하고 있는 것입니다(13:10). 사람의 눈은 겉모양만 보는데 익숙합니다. 요단 강 동쪽의 땅이 오아시스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염해 아래에 형성되어 있는 상업도시가 마음에 들었습니다. 문물이 번성하고 도시의 향락이 그곳에 있는 것 같습니다.

부자인 롯은 그곳 도시에서 여유롭게 인생을 즐기면서 살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소돔과 고모라야 말로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는 기회의 땅이기도 하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주민들의 영적인 타락과 퇴폐를 볼 수 있는 눈이 없었습니다(13:13).

만약 롯이 겸손하게 여호와께 기도로 물어보았더라면 정확하게 가르쳐주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그는 간과하고 맙니다. 결론적으로, 영이신 하나님께 여쭈어 보지 아니했으니 롯이 영적으로 실족할 수밖에 없습니다. 거기서부터 롯의 미래는 꼬이기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4.    같은 가나안 땅이지만 벧엘소돔과의 차이는 무엇인가?(13:12-13)

 

벧엘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입니다(28:17-19). 하란에서 가나안으로 들어왔던 아브람 일행이 가장 확실하게 제단을 쌓고 하나님의 이름을 마음껏 부르면서 제사를 드릴 수 있었던 땅이 벧엘입니다(12:8).

벧엘은 황량한 들판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 동쪽에 있는 산에 아브람 일행이 제단을 쌓았는데 더 동쪽으로 진행하면 정말 황량한 지역 아이가 나타납니다. 그곳은 목초가 잘 자라지 못하여 아브람과 롯이 함께 목축업을 경영할 수도 없습니다(13:3-7).

한 마디로, 벧엘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예배를 드리며 마음껏 찬양을 드릴 수가 있는 영적으로 좋은 지역입니다. 그러나 반면에 목축을 하고 살기에는 발전 가능성이 별로 없는 땅입니다. 목초지가 넓지 못하고 풀도 무성하게 자라나지 못하고 있는 땅입니다.

한편 소돔과 고모라는 다릅니다. 염해 아래쪽에 위치하고 있는 그곳을 통과하여 대상들이 메소포타미아와 애굽을 오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중개무역이 발달하고 숙박시설이 좋습니다. 인근에 온천을 개발하고 오아시스를 잘 가꾸어서 떼돈을 벌고 있습니다(13:10, 36:24).

그 밖에도 염해의 바위소금을 잘 정제하여 중근동 전체에 공급하고 있습니다. 고대시대에는 작은 금덩어리만큼 비싸고 값진 양념이 바로 소금입니다. 소금이 없으면 음식에 간을 맞출 수가 없으며 몸의 염도마저 유지될 수가 없습니다. 생존에 꼭 필요한 소금을 가공하여 수출하고 있는 소돔과 고모라는 상업도시로 중시될 수밖에 없습니다.

동시에 소금은 인근 메소포타미아 패권국가에 대하여 가장 중요한 조공품목이 되고 있습니다(14:4). 그런데 훗날 소돔과 고모라 등이 패권국가에 바치는 소금이 아까워서 제 값을 한번 받아 보겠다고 일시에 조공을 중단합니다. 물론 또다른 강대국 애굽제국을 의지하고서 한 외교적인 행동으로 짐작이 됩니다.

그러나 엘람의 왕 그돌라오멜이 진두지휘하고 있는 메소포타미아 연합군의 힘이 훨씬 강합니다(14:1-2, 10). 그들이 가나안으로 쳐들어오자 소돔과 고모라를 위시한 염해 도시국가들이 패전을 합니다. 침략군은 승전을 하자마자 소돔과 고모라 성의 인질과 소금 등의 재물을 약탈하기에 여념이 없습니다(14:11-12).

요약을 해보자면, 벧엘은 황량하지만 하나님을 마음껏 섬길 수 있는 영적으로 좋은 지역입니다. 반면에, 소돔과 고모라는 화려하고 번성한 도시이지만 황금만능사상과 퇴폐 향락문화가 창궐하고 있는 지역입니다.

따라서 벧엘에 외로이 남게 되는 아브람은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고서 믿음의 성숙을 보이게 되지만 소돔으로 옮겨간 롯은 영적인 영향력을 상실하게 됩니다. 그 결과 롯은 믿음의 조상이 되는 후보에서 최종적으로 탈락하고 마는 것입니다.  

 

5.    외로움과 절망에 빠진 아브람의 간구와 하나님의 응답(13:14-18)

 

아버지 데라를 하란 땅에 남겨두고서 조카 롯과 함께 가나안 땅에 들어왔던 아브람입니다(11:31-12:4). 이제 아들처럼 의지했던 롯이 자신을 떠나가버렸습니다. 75세의 아브람은 쓸쓸하고 외롭기가 그지 없습니다. 남은 생애를 누구와 더불어 살아갈 것입니까?

아브람 부부는 황량한 들판 벧엘과 아이 사이에서 절망감을 맛보고 있습니다. 그들은 젊은 롯을 탓할 수만도 없습니다. 젊은 나이의 조카가 이제 부자가 되었기에 소돔이라는 대도시로 진출하여 자신의 인생을 한번 즐기면서 마음껏 살아보고자 하는데 그것을 적극적으로 말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죽이나 도시의 생활을 크게 동경하였으면 롯이 그리하였겠습니까? 따지고 보면, 애굽에서 얻은 자신의 재산을 장조카 롯을 아들처럼 여기고 아브람이 그만 한꺼번에 크게 나누어 준 것이 잘못입니다(15:12-14). 그 결과 백부까지 버리고 롯이 동쪽으로 떠나가버린 것입니다(13:10-11).

물론 아브람은 어른인 자신에게 선택의 우선권을 되돌려주지 아니하고 제 잇속만을 따져서 떠나버린 롯이 원망스럽습니다(13:9). 그러나 아브람은 롯만을 탓할 수 없는 자신의 잘못을 잘 알고 있습니다. 아브람이 생각해도 애굽의 수도에서 저지른 자신의 행동은 후회스럽습니다.

제 목숨을 살리겠다고 사랑하는 아내를 바로의 후궁으로 들여보냈으니(12:12-15) 조카 롯이 보기에 백부가 얼마나 한심했겠습니까? 자신이 생각해도 비겁하기 그지 없는데 할 말이 없습니다(12:16). 한 마디로, 자업자득(自業自得, 자신의 업보를 자기가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람은 반성을 많이 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외로움과 쓸쓸함이 가셔지지 아니하며 적막하기가 이를 데 없습니다. 그래서 아브람이 하나님께 매어 달리고 있습니다. 부디 이방인의 땅에서 살 길을 열어 주시고 갈 길을 인도해달라고 조상의 하나님에게 간구하고 또 간청하고 있습니다(31:53).

그때 하나님의 응답이 다음과 같이 주어지고 있습니다;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내가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두루 다녀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13:14-17).

그 요지는 아브람이 독자적인 믿음의 길을 시작했을 때에 이미 주어졌던 약속의 재확인입니다(12:2-3). 그러나 다음과 같이 조금 더 구체화된 언약입니다;

(1)  첫째, 아브람이 자신의 눈으로 볼 수 있는 땅을 장차 자손들의 땅으로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13:14-15). 다윗과 솔로몬 제국의 땅의 크기가 그 정도에 해당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메소포타미아와 애굽 사이에 있는 땅들을 다윗 왕이 모두 점령한 것입니다(15:18). 그 제국을 다시 재건하여 줄 메시아를 유대인들은 아직도 기다리고 있습니다(1:6-7).

(2)  둘째, 아브람이 자신의 발로 밟게 되는 땅을 모두 당대에 차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13:17). 그 약속을 이루고자 아브람은 황량한 벧엘과 아이 사이의 땅을 벗어나서 이왕이면 좋은 땅 헤브론으로 들어갑니다(13:18).

1)   아브람은 전쟁에서의 승리를 통하여 아예 헤브론의 대 호족으로 자리를 잡습니다(14:14-24). 그는 자신의 아성과 후계체제를 마련하고 헤브론에서 여생을 편하게 살려고 작심합니다(15:1-3).

2)   그러나 하나님은 아들을 주겠다는 약속을 구체화함으로써 아브람아브라함으로 변화시키고 있습니다(15:4-7, 17:4-7). 그 의미는 향년을 마칠 때까지 여호와 하나님의 종으로서 신실하게 한평생을 살아가라는 주문입니다(15:13-21).

3)   그와 같은 한 평생 나그네 길이 훗날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의 길이 어떠한 것인가를 미리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습니다(11:13-26).

(3)  셋째, 자손의 수가 엄청 많을 것이지만 그 수는 사람이 셀 수 있는 단위가 된다는 것입니다. 당시 고대사회의 셈본으로는 천천이나 만만일 것입니다(삼상18:7). ‘천천은 백만명입니다. ‘만만은 일억(, 100million) 단위의 인구입니다.

1)   신기하게도 현대 이스라엘의 국민은 6백만 명입니다. 물론 해외에는 그보다 더 많은 유대인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날 지구촌에는 70억 명 정도의 인구가 살고 있습니다.

2)   그 가운데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생각하고 있는(4:16-24) 기독교 인구가 23억 명쯤 된다고 합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언약은 긴 안목과 넓은 시야를 가지고서 따져본다고 하면, 이미 이루어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참고자료) 창세기 강의 골자 15(13:1-18)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강의일; 주후 2015 11 19()

 

1.      아브람과 롯이 함께 출애굽을 하고 함께 가나안 남부 광야 네게브로 올라간 이유는 무엇인가?(13:1)

(1)   애굽에서 강제추방을 당했으므로 이제는 가나안 땅에서 밖에 없게 것임. 그래서 가나안 남부 광야로 들어서고 있음(13:1).

(2)   아브람 일행이 죽으나 사나 가나안 땅에서 밖에 없게 이유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음;

1)      애굽의 바로는 재앙덩어리인 그들을 추방시키고 입국을 강력하게 막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고 하겠음(12:17-20).

2)      하란에 살고 있는 아버지 데라의 집으로 되돌아갈 수도 없음. 아버지를 하란에 버리고 떠나왔기에 다시 반겨줄 리가 없는 것임(12:5).

3)      그리고 하나님의 축복의 말씀을 따라 가나안에 들어왔기에 엄청난 축복도 놓치고 싶지가 않은 것임(12:1-3). 실제로 빈손으로 출애굽한 것이 아니라 굉장히 재물을 얻어서 나온 것임(12:16, 20, 13:2).

(3)   함족인 애굽 사람들이 메소포타미아에서 셈족을 차별하고 있는 것도 이유가 되고 있음.

1)      함족의 종주국인 애굽 제국은 메소포타미아에서 셈족이 건너오게 되면 이를 강을 건너온 도래인이라는 뜻으로 히브리인이라고 부르고 있음(14:13, 43:32, 46:34). 이는 종족이 다른 이주민을 근본적으로 차별하고 있는 것임(14:13).

2)      따라서 히브리인을 사상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오염원이 있는 부정한 라고 여기고 있음(43:32).

3)      나아가서 원주민들은 자신들의 문명이 최고라고 생각하고서 도래인들의 문명과 직업까지 천시하고 있는 것임(46:34).

4)      그렇게 자신들의 문화와 전통을 고수하고자 도래인들을 차별하고 있으므로 아브람과 롯의 가족이 그들과 함께 살기는 근본적으로 힘든 것임.

 

2.      그와 같은 애굽 사람들의 히브리인 차별을 이미 알고 있었던 아브람이 일행을 보호하기 위해서 선택한 전략은 무엇인가?

(1)   아브람은 아내 사래를 누이동생이라고 속임으로써 자신의 안전도 도모하고(12:12-13) 애굽에서 있는 기회도 얻고자 것으로 보임.

1)      아브람의 생각대로, 사래의 미모가 탐이 애굽 사람들이 아브람 일행에게 호의를 베풀어 것임.

2)      그러나 때문에 사래가 바로의 후궁으로 끌려가면서 문제가 발생하고 있는 것임. 가까스로 하나님의 엄청난 개입으로 사래를 돌려받고 출애굽을 것임.

(2)   아브람이 애굽에서의 실수를 만회하자면 앞으로 어찌해야만 하는가?

1)      자신을 지켜주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철저하게 믿어야만 (12:3).

2)      의사결정을 하기 전에 항상 하나님께 먼저 여쭈어보아야만 하는 것임(17:1). 그것이 시행착오를 줄일 있는 유일한 방법임.

3)      예를 들면, 훗날 아들 이삭의 경우 하나님께 사전에 여쭈어봄으로써 애굽이 아니라 그랄 땅으로 들어서고 있는 것임(26:2-3).

 

3.      출애굽을 아브람과 롯이 모두 부자가 이유는 무엇인가?(13:2, 6)

(1)   아브람의 경우에는 애굽의 황제인 바로가 사래의 연고로 손위 처남이 되는 알고서 아브람에게 재물을 많이 주었음(12:15-16). 재물을 되돌려 받지도 못하고 급하게 출애굽을 시켰기에 자연히 아브람이 부자가 되고 있음(12:20).

(2)   그런데 롯은 바로로부터 얻은 재물이 없음. 그리고 아직 젊었기에 재산을 형성할 있는 기회도 없었음.

1)      그러므로 백부인 아브람이 그를 양자로 생각하고서 사전에 애굽에서 재산상속을 해준 것으로 있음(12:16, 13:5).

2)      훗날 하나님이 주신 전리품을 아낌없이 동료들에게 나누어주고 있는 아브람의 성품으로 미루어보아 그렇게 조치하였을 가능성이 농후한 것임(14:24, “나와 동행한 아넬과 에스골과 마므레의 분깃을 제할지니 그들이 분깃을 가질 것이니라”).

 

4.      아브람이 일부러 벧엘로 찾아가서 그곳에 제단을 쌓은 이유는 무엇인가?(13:3-4)

(1)   가나안에 들어와서 최초로 제단을 완성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 곳이기 때문임(12:8b).

(2)   동쪽으로 황폐한 광야 아이 있어 주민들이 별로 없으므로 마음껏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있는 안전지대이기 때문임(12:8a).

(3)   그리고 다시는 가나안 지역에 가뭄이 들어 애굽 땅으로 피난을 가지 아니해도 되도록 온전히 보살펴달라고 벧엘에 제단을 쌓고 여호와에게 크게 부르짖고 싶었기 때문으로 있음(12:10).

 

5.      벧엘과 아이 사이의 넓은 들판이 어째서 아브람과 롯의 소유 가축을 치기에도 비좁은가?(13:5-7)

(1)   그들 사람의 가축의 수가 너무 많았기 때문임(13:6)

(2)   그들 뿐만 아니라 원주민인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도 인근에 거주하면서 목축을 경영하고 있었기 때문임(13:7b).

 

6.      선호하는 목축지역을 먼저 선택하라고 롯에게 우선권을 주고 있는 아브람에게서 엿볼 있는 것은 무엇인가?(13:8-9)

(1)   아주 가까운 친척끼리 목축지를 두고서 갈등과 분쟁을 일으키고 싶지가 않았기 때문임(13:7a, 8).

1)      그들의 가축을 치고 있는 목자들 사이의 분쟁이 아브람과 사이의 갈등을 초래할 가능성을 사전에 예방하고자 하는 것임.

2)      더구나 원주민들과 분쟁이 발생하기라도 하는 경우에는 참으로 수습하기가 힘들어지는 것임.

(2)   그래서 아브람이 윗사람답게 먼저 장조카 롯에게 목축지역을 선택하라고 제의를 하고 있는 것임(13:8-9).

 

7.      백부의 호의를 추호의 망설임이나 양보 없이 덥석 받아들여 곧바로 행사하고 있는 롯에게서 엿볼 있는 것은 무엇인가?(13:10-11)

(1)   롯이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먼저 자신이 옮겨갈 목축지를 선택하고 있는 것은 이기적인 욕심의 발로라고 하겠음(13:11).

1)      이유는 고대가부장서열사회에 그들이 살고 있기 때문임.

2)      원칙적으로, 선택권이 젊은이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어른에게 있는 것이 고대사회임.

3)      따라서 아브람이 어른답게 그렇게 먼저 말씀을 하시면 롯은 사양을 해야만 하는 것임.

4)      구체적으로, 백부께서 먼저 선택을 하시면 자신이 이에 따르겠다고 말씀을 드리는 것이 상식임. 그러나 롯은 욕심에 눈이 멀어서 그만 아름다운 미풍양속과 사회적인 질서를 깨뜨리고 것임.

(2)   모습을 보고서 아브람은 망연자실해 하고 있음.

1)      자신이 옮겨갈 목축지도 얻지를 못하고 동시에 장조카 롯이 자신을 배신하고 있기 때문임.

2)      롯을 양자로 생각하고서 이미 그에게 재산까지 나누어주었는데 그가 자신을 벧엘에 버려두고 멀리 도회지역으로 떠나고자 하는 것임.

3)      어찌 보면, 그것은 자신이 하란에서 부친을 버리고 떠나온 보응을 이제서야 받고 있는 것만 같은 심정이라고 하겠음(11:31-32, 12:1, 7:3-4).

 

8.      백부 아브람과 함께 출애굽을 하였으나 벧엘에서 그를 떠나고자 하고 있는 롯의 심정의 변화는 무엇인가?(13:1, 5-6, 9-11)

(1)   롯이 백부 아브람을 버리고 떠나고자 하는 것은 그를 이상 닮고 싶은 존경하는 어른으로 생각하지 아니하고 있다는 의미임.

(2)   이유를 다음과 같이 생각해볼 수가 있음.

1)      아버지 하란이 일찍 돌아가셨기에(11:27-28) 롯은 백부 아브람을 아버지로 생각하고서 동안 행동을 같이하고 있었음(11:31, 12:4, 13:1).

2)      고향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 할아버지 데라가 이끄는 선교팀에 합류하여 가나안으로 떠나는 길은 젊은 롯의 가슴을 동경심으로 파도 치게 했을 것임.

3)      그러나 도중에 조부 데라가 신도시 하란 개척하면서 목적지 가나안으로 들어가지를 아니하자 롯은 갈등했음. 그냥 그곳에 남아서 백부 아브람 대신에 조부의 재산을 상속하여 한평생 편히 것인가? 아니면 백부를 따라 미지의 세계 가나안으로 들어갈 것인가?

(3)   롯의 선택은 조부 데라가 아니고 백부 아브람이었음. 이유는 데라보다는 아브람에게서 배울 점이 많았기 때문임.

1)      마디로, 아브람이 존경스러웠기 때문임.

2)      그러나 애굽에서 그의 존경심이 사라지고 말았음. 사래사건이 영향을 미친 것임(12:11-16).

3)      이제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그의 동경심은 화려하고 풍족한 도시(13:10) 소돔과 고모라를 바라보는 것으로 바뀌고 있음.

4)      존경스러운 멘토에게서 실망했기에 사람이 아니라 재물을 가지고 살아가고자 작심한 것으로 보임(19:16, 26).

 

9.      롯의 선택은 어째서 잘못된 것인가?(13:12-13)

(1)   멘토 아브람을 따르다가 그만 진짜 멘토이신 하나님을 놓쳐버리고 것임.

1)      완전한 신앙, 실망시키지 아니하는 신앙의 모범은 사람에게서 얻을 수가 없는 것임.

2)      오로지 여호와 하나님만이 완전하시고 온전하신 신뢰를 있음(17:1, 30:20, 3:17-18).

3)      그런데 영이신 하나님에게서(4:24) 배우기에는 육신을 가지고 있는 인간이 어려움이 많음. 그래서 역사 가운데 말씀의 성육신이신 그리스도가 오셔서 완전한 믿음의 본을 보여주시는 것임(1:14).

(2)   롯은 불행하게도 부족한 사람 아브람을 다시 일으켜 세우시는 위대하신 하나님을 발견하는 안목이 없다고 하겠음.

1)      만약 롯이 부족한 사람 아브람 대신에 전능하신 하나님께 자신의 앞길을 인도해달라고 간구하였더라면 그의 인생이 달라졌을 것임.

2)      믿음의 조상이 있었을 것임.

3)      재물을 모으고 도시의 향락을 쫓는 것이 아니라 가나안 땅에 하나님의 방백으로 우뚝 섰을 것임(20:7).

4)      불행하게도 그가 얻은 재물에 만족을 하고 소돔과 고모라로 떠나갔으므로 악인들과 죄인들의 이웃이 되고 말았음(13:12-13, 19:4-9).

 

10.  롯이 떠난 후에 하나님께서 벧엘에 홀로 남은 아브람에게 현신하신 이유는 무엇인가?(13:14)

(1)   절망 가운데 부르짖고 있는 아브람에게 힘과 소망을 주기 위한 것임. 그가 가는 , 바라보는 어디에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임.

(2)   배신감에 사로 잡혀 있는 아브람에게 영원히 신뢰할 있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한 것임. 직접 현신하셔서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은 변함이 없다는 사실을 강조해주시는 것임(13:14).

 

11.   북남동서로 보이는 땅을 모두 자손에게 주고, 종과 횡으로 발길이 닿는 곳을 모두 아브람에게 주겠다고 말씀하시는 여호와의 뜻은 무엇인가?(13:14-17)

(1)   사람이 땅에서 자손들에게 물려줄 있는 가장 땅은 보이는 모든 것들임.

1)      동서남북이 아니고 북남동서라고 말하고 있음.

2)      메소포타미아에서 가나안에 들어온 아브람인지라 그의 고향으로 있는 북쪽과 동쪽이 우선이 되고 있다고 하겠음.  

(2)   그리고 자신이 당대에 누릴 있는 것은 자신의 발길이 닿을 있는 것이 한도가 되고 있음.

(3)   가지는 세상을 살아가고 후세에 물려주기 위해서는 가장 축복임이 틀림이 없음.

1)      그러나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세계로 돌아가야만 하는 사람의 기억과 영혼을 생각한다면(11:16) 그것은 매우 작은 것이라고 하겠음.

2)      따라서 아브람이 훗날에 아브라함이 되고(17:5) 그의 인생역정 가운데 신앙이 성숙해지게 되면 것을 소망하게 되는 것임.

3)      구체적으로, 영생하시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부활의 그날을 기다리는 신앙의 경지로 나아가게 되는 것임(21:33, 22:12, 11:16, 19).

 

12.   티끌과 같이 많겠지만 사람이 있는 정도라면 구체적으로 아브람의 자손의 수는 얼마인가?(13:16)

(1)   티끌은 본래 수가 없는 것임. 만약 전자현미경을 동원한다면 원자의 수에 해당하는 6X1023정도의 티끌이 있어야 지구를 형성할 있을 것임.

(2)   그런데 아브람이 살고 있는 고대사회에서 있는 티끌과 같은 수를 말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그들이 사용하고 있는 수의 개념 가운데 수에 해당하는 것임.

1)      예를 들면, “천천(千千, 106, 백만 단위임) 만만(萬萬, 108, 단위임)” 개념과 같은 것임(삼상18:7).

2)      실제로 현대의 인류도 수십억의 단위이며, 이스라엘의 경우는 백만 단위에 불과하다고 하겠음.

 

13.   벧엘에서 하나님의 축복의 언약을 얻은 아브람이 남행하여 헤브론에 자리를 잡고 있는가?(13:18)

(1)   하나님의 축복을 염두에 두고서 가급적 넓은 땅을 얻고자 하는 것임. 헤브론은 예루살렘에서 30km 남쪽으로 떨어져 있음.

(2)   그리고 가급적 인적이 드물고 이방인 차별이 적으며 목축에 적합한 땅을 얻고자 하는 것임.

(3)   당시 가나안의 지배족속이 아모리 족속인데(15:16) 그들은 여러 족속에 대하여 비교적 포용력을 보이고 있음. 따라서 아브람은 아모리 호족들이 마침 자리를 잡고 있는 헤브론에 정착을 것으로 보임(13:18, 14:13,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