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설교 모음(손진길 목사의 글)

창세기 제11장에 대한 강해설교 모음(손진길 목사의 글)

손진길 2024. 5. 20. 20:45

창세기 제11장에 대한 강해설교 모음(손진길 목사의 글)

 

 

1.    시날 평지의 원주민과 정복민과의 관계(11:1-2)

 

시날 평지는 나중에 갈대아인의 우르라고 불리게 됩니다(10:10, 11:2, 31). 그 이유는 훗날 아람의 일족인 갈대아인들이 유프라테스 강을 타고서 남하하여 바벨이 그 중앙에 위치하고 있는(10:10) 소위 시날 평지를 점령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곳을 우르라고 부르면서 그 유명한 ()바벨론()바벨론의 제국이 그곳에서 발흥을 합니다. 느부갓네살 황제의 신바벨론제국이 결국에는 BC 586년에 다윗 왕조의 유다 왕국을 멸망시키고 맙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시날 평지라고 하는 태고적 지명보다는 자신들의 원수인 갈대아인의 우르라고 하는 지명이 더 생생합니다.

그런데 모세는 그 우르 지역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본래 고향이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습니다;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인 그의 손자 롯과 그의 며느리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류하였으며”(11:31).

그 사실을 초대교회 시대에 집사 스데반도 성령의 충만을 받아서 순교직전에 다음과 같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이르시되,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 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7:2-4).

그렇다면 데라와 아브라함의 조상은 언제부터 시날 평지에 거주하고 있었을까요? 모세는 셈의 셋째 아들인 아르박삿 때부터라고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습니다; “셈의 아들은 엘람과 앗수르와 아르박삿과 룻과 아람이요”(10:22). 셈의 4명의 아들들이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그들의 이름이 훗날 지명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①아르박삿의 큰형인 엘람의 이름이 이란의 북부지역을 의미합니다. ②둘째 형인 앗수르는 티크리스 강의 상류지역을 말합니다. ③아르박삿의 막내 동생인 아람은 유프라테스 강 상류를 포함하는 시리아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④아르박삿이 자리를 잡은 땅은 시날 평지라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그렇다면 셈의 아들인 아르박삿과 그의 자손들은 왜 자신들이 살고 있던 시날 평지를 이주민들에게 빼앗기게 되는 것일까요? 그 이유 역시 모세가 다음과 같이 기록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구스가 또 니므롯을 낳았으니 그는 세상에 첫 용사라. 그가 여호와 앞에서 용감한 사냥꾼이 되었으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아무는 여호와 앞에 니므롯 같이 용감한 사냥꾼이로다 하더라. 그의 나라는 시날 땅의 바벨과 에렉과 악갓과 갈레에서 시작되었으며”(10:8-10), “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더라.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류하며”(11:1-2).

요컨대, 니므롯은 영웅입니다. 그는 큰 무장세력을 형성합니다. 그리고 군사력으로 가장 살기 좋은 지역을 점령하여 최초의 정복왕조인 제국을 세우고 있는 것입니다. 그곳이 바로 유프라테스 강과 티크리스 강이 만나서 거대한 삼각주를 형성하고 있는 고대농업 지역이며 최초의 인류문명이 꽃피고 있는 메소포타미아인 것입니다.

조금 설명을 더하자면, 함의 장자인 구스가 이디오피아에 자리를 잡았는데 구스의 아들들은 홍해를 건너서 아라비아로 건너갔습니다(10:7-8). 그 가운데 막내인 니므롯은 아라비아에서 세력을 형성한 후에 북상을 합니다. 그리고 동방으로 옮겨 가서 가장 비옥한 땅 메소포타미아를 정탐하고 마침내 셈족 아르박삿의 후손들이 살고 있는 시날 평지를 정복하고 만 것입니다(11:2).

그때까지 중동 땅에서는 고대 글자가 하나이고 말조차 하나였습니다(11:1). 그러므로 소수의 사람들이 살기 위하여 이주를 해온다고 한다면 그냥 원주민들에게 흡수가 되어 평화공존이 가능한 시대입니다.

하지만 군사력을 갖추고 나라의 기반을 얻고자 시날 평지로 들어온 니므롯의 세력은 다릅니다. 그들은 그곳에서 나라를 세운 후에 그 힘을 길러서 드디어 메소포타미아 전역을 정복합니다. 그리고 인류 최초의 함족의 대 제국을 세웁니다. 그 제국 안에서 셈족인 원주민들은 모두 피지배민족이 되고 만 것입니다.

 

2.    제국을 효율적으로 다스리면서 정복자의 영광을 온 천하에 드러내고자 하는 함족의 정책(11:3-4)

 

예나 지금이나 무엇이 좋은 통치인지에 대한 백성들의 생각은 똑 같습니다; “살기가 좋아졌습니까? 그래서 행복합니까? 라는 질문에 대하여 긍정적인 평가가 나오면 그것이 좋은 정책이며 좋은 통치입니다”.

수 많은 셈족을 정복하여 다스리고 있는 함족 니므롯의 제국은 그 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정책을 강력하게 시행하고 있습니다;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제국의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11:3-4). 그것은 한 마디로, 살기 좋은 성읍을 건설하고 정치적인 통합을 상징하는 탑을 하늘 높이 세우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그 건축기술이 탁월합니다;

(1)  첫째, 돌을 힘들게 다듬어서 집을 짓는 것이 아닙니다. 진흙에 짚을 넣어서 다진 것을 틀에 넣은 후 찍어냅니다. 그것을 마치 옹기나 기와처럼 높은 온도에서 구워 냅니다. 그렇게 얻어진 벽돌은 규격이 동일합니다. 따라서 반듯하게 쌓으면 높은 건물을 지을 수가 있습니다. 결국, 벽돌을 소재로 사용했다는 것은 이미 고층건물을 지어서 살기 좋은 도시를 건설했다는 뜻입니다.

(2)  둘째, 마차가 다니는 도로를 진흙으로 다지는데 그치지 아니하고 아스팔트를 깔고서 포장을 하고 있습니다. 도로가 발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유통이 빨라지면서 더욱 살기가 좋아집니다.

(3)  그 두 가지는 니므롯의 제국이 백성들의 삶의 질을 높여주는 좋은 통치를 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치 AD 17세기에 만주족이 세운 청 왕조가 중국대륙을 정복하여 좋은 정책을 편 것과 같습니다. 청나라는 성군들의 좋은 정책으로 민심을 크게 얻어서 오랜 세월 중국백성들을 잘 다스린 것입니다.

다음으로, 제국이 국민들의 통합을 위하여 하늘 높이 탑을 쌓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 탑을 바라보면서 제국의 백성이 된 것을 자랑할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함입니다. 비록 피정복민이라고 하더라도 강력한 힘을 지닌 제국에 자신이 소속되어 있다는 자긍심을 가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 결과, 그 웅장하고 높은 탑은 제국에 충성을 다하고자 하는 마음을 백성들에게 심어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심각한 영적이고도 종교적인 문제가 여기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11:4),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 후로는 그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으리로다. 자 우리가 내려가서 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11:6-7).

그 탑은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제국의 영광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창조주에게 충성을 다하고자 하는 마음보다 제국의 주인인 황제에게 충성을 다하고자 하는 마음을 고취시키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자리에 황제를 세우고자 하는 제국의 상징조작이 바로 그 마천루를 만드는 이유입니다.

그것은 신본주의가 아니라 인본주의의 높은 영광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처벌이 예상이 되고 있습니다. 비록 정치적인 상징물로서는 성공적인 건축물이 될지라도 영적인 의미에 있어서는 하나님에게 도전을 하고 있는 교만한 것입니다(14:13-15).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붕괴되고야 말 것입니다.

참고로, 니므롯 제국의 마천루 탑과 같은 것이 세워져 있는 도시들이 있습니다. 프랑스의 파리와 일본의 동경에 그와 같은 타워가 오늘 날도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것들은 오늘날에도 도시의 전경을 한꺼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전망대로서의 역할을 계속 수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도시 내에 높은 산이 전혀 없기 때문에 그들 타워는 훌륭한 전망대입니다. 그러므로 도시 내에 높은 산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별도로 높은 탑을 건설한다는 것은 옥상옥(屋上屋)이 될 것이며 재정의 낭비라고 하겠습니다.

또 하나, 파리의 에펠 탑이나 동경 타워는 제국주의 시대의 산물입니다. 제국의 위용과 영광을 인본주의적으로 만 천하에 드러내고자 한 것입니다. 그 맥을 잇고 있는 것이 오늘날 북한의 수도 평양에 세워져 있는 높은 탑과 고층건물이라고 하겠습니다. 그와 같은 제국들의 노력이 사상누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모세는 수천 년 전에 이미 창세기 제11장의 기록을 통하여 똑똑하게 증언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3.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성읍과 탑을 보려고 내려오신 이유(11:4-6)

 

하나님의 생각과 사람의 생각이 서로 어긋나고 있을 때에는 누구의 생각이 인생 가운데 그리고 사회적으로 관철이 되고 있는 것일까요? 그리고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누구의 생각을 우선적으로 받아들여서 모든 일을 판단하고 행동으로 옮겨야만 하는 것일까요? 그 질문에 대하여 답하고 있는 내용이 바로 바벨탑 사건입니다(11:4-9).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생각하고 있습니다; “,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11:4). 살기 좋은 성읍을 건설하면 백성들이 흩어지지 아니하고 모여들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먹을 것이 많고 고층빌딩이 즐비하면 살기 좋은 성읍이 되는 줄 생각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높은 탑을 세워서 제국의 위용을 과시하고 과학문명의 영광을 온 천하에 떨치게 되면 그 제국과 그 문명이 영원할 것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사람들의 생각은 오산(誤算, 잘못 계산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달리 생각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사람들이 건설하는 그 성읍과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더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후로는 그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으리로다. ,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으므로 그들이 그 도시를 건설하기를 그쳤더라”(11:5-8).

한 마디로,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하고자 하는 일을 막고자 하십니다. 왜 막고자 하시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두 가지로 볼 수가 있습니다;

첫째로, 한 평생 육체적으로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영적으로 인생과 자연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하면서 살아갈 때 진정한 만족을 얻도록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헛되이 물려받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있기에 영원한 하나님의 생명력을 사모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모양을 닮아 있기에 궁극적으로 병들고 늙고 사멸하고야 마는 육신을 벗고 영생을 누릴 수 있는 부활의 몸을 얻고 싶어합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창조의 목적을 떠나서 물질적인 성공과 풍요로움만을 추구하게 되면 그 인생은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맙니다. 비록 겉으로는 살기 좋은 사회를 만들고 세상의 문명이 만든 찬란한 금자탑을 자랑할지 몰라도 그 속은 약육강식의 현장이 되고 동시에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가 구조화되어 나갈 따름입니다(6:1-8).

둘째로, 하나의 언어, 하나의 사상으로 사회를 이끌고 가는 것은 위험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애초에 복수의 형상과 모양을 닮도록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를 했습니다(1:26-28). 그런데 국가의 지도자들은 사회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하여 오로지 하나의 사상과 모양만을 선택하여 그것을 슬로건으로 내걸고서 교육으로 백성들의 의식을 지배하고 국가적으로 동원체제를 강화하고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생각의 다양성이 사라진 사회, 선택의 폭이 사라지고 동조(同調, Conformity)성향만이 성행하고 있는 사회는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파악할 수가 없습니다. 전체주의 사고와 독재의 관행만이 기승을 부릴 따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사회의 존속을 원하지 아니하시고 있습니다. 그래서 진단과 처방을 다음과 같이 마련하시고 있습니다;

(1)  첫째, 사람들이 하는 일을 감찰하고 계십니다. 필요하시면 직접 사찰도 하십니다. 그 대목을 모세는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람들이 건설하는 그 성읍과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더라”(11:5).

(2)  둘째, 진단을 하시고 문제의 핵심을 파악하십니다. 그 대목이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후로는 그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으리로다”(11:6).

(3)  셋째, 처방을 마련하십니다. 직접 내려가서 사람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11:7). 그것은 언어의 혼잡만을 의미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전체주의적인 사고방식을 민주적인 다양한 사고체계로 전환시킨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아울러 서로 다른 문화를 꽃피울 수 있도록 공간적으로 이동을 시키고 격리를 시키겠다는 계획입니다.

 

4.    언어의 혼잡이 초래하는 제국의 멸망(11:7-8, 2:42-43)

 

제국은 강해 보입니다. 그러나 스스로 내부 모순과 갈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언어와 풍습이 다른 다양한 민족과 족속들이 하나의 제국에 통합이 되어 있으니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그 점을 선지자 다니엘은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왕께서 쇠와 진흙이 섞인 것을 보셨은즉, 그들이 다른 민족과 서로 섞일 것이나 그들이 피차에 합하지 아니함이 쇠와 진흙이 합하지 않음과 같으리이다”(2:43).

다니엘이 세상에 나타나는 가장 강력한 철의 제국조차 망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바벨론의 황제 느부갓네살에게 설명해주고 있는 대목입니다(2:31, 40). 언어가 달라지고 생각과 사상이 다양해지면 황제가 다스리고 있는 전체주의 독재국가는 종말을 고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직접 바벨탑의 건설현장을 보시고 그 문제의 핵심을 진단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문제를 치유할 수 있는 처방까지 마련하시고 계십니다. 그 방안은 느부갓네살 황제의 꿈에 계시해준 그 환상의 내용 가운데 들어있는 역사섭리의 방법 그대로입니다.

한 마디로, 쇠와 진흙과 같이 서로 섞이지 아니하도록 만들어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내려오셔서 그 공작을 다음과 같이 행하시고 있습니다;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으므로 그들이 그 도시를 건설하기를 그쳤더라.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음이니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11:7-9).

하나의 언어가 여러 개의 언어로 바뀌고 생각과 사상이 다양해지자 획일적인 사고와 사상에 기초하고 있는 전체주의의 체제가 깨어지고 있습니다. 피정복민인 셈족들이 지배민족인 함족과 다른 생각을 가지게 되고 각 부족 별로 자신들 문화의 고유성을 지키고자 노력하게 됩니다. 그러자 제국의 내부에 균열이 발생하고 드디어 체제가 붕괴되고 마는 것입니다.

강력한 함족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된 셈족들이 각 씨족과 부족 별로 살길을 찾아서 동서남북으로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합니다. 마치 훗날의 출애굽의 역사를 미리 보는 것과 같습니다.

그 가운데 모세는 특별하게 두 부족에 대하여 기술하고 있습니다; 첫째, 메소포타미아에서 동쪽 끝까지 진출하는 욕단의 후손들에 관한 기록입니다(10:25-30). 둘째, 나중에 가나안 땅으로 하나님 신앙을 전하고자 서진하게 되는 데라와 아브라함의 행렬입니다(11:31). 그들에 대해서는 최초의 디아스포라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입니다.

4,500년 전의 바벨탑 붕괴사건이 오늘 날에도 큰 교훈이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미국의 폴 케네디(Paul Kenney)와 같은 학자는 대국이 망하게 되는 원인으로서 다른 민족의 언어와 문화에 대하여 배우고자 하는 노력을 포기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날의 강대국이라고 할지라도 계속 대국으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약소국들의 언어와 풍습을 배우고 그들의 사고방식을 이해하는데 적극적인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국제문제를 힘의 논리로만 해결하고자 하는 강대국, 특히 약소국의 문화와 사고방식을 무시하는 대국의 횡포는 오래 유지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보이지 아니하시는 역사섭리의 방향과 전적으로 어긋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5.    최초의 디아스포라가 지니고 있는 성경적, 복음적, 문화적 의미(11:8-9)

 

바벨탑 붕괴사건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메소포타미아의 사람들을 온 지면에 흩어 버리십니다(11:8-9). 언어를 혼잡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바벨제국 내에서는 오해와 불신이 증폭됩니다(11:6-7). 지배족속 사이에서 이견과 다툼이 발생합니다. 더 큰 문제는 피지배족속들이 지배족속들에게 대하여 더 이상 순종적이지 아니합니다.

언어가 달라지면 사고방식이 달라지고 문화가 달라집니다. 그러므로 피지배민족인 셈족과 지배민족인 함족 사이에 차이와 다툼이 발생하게 된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건축과정에 있던 바벨탑만이 무너진 것이 아닙니다. 그 영향으로 제국이 분열되고 각 족속들이 각각 제 살길을 찾아서 뿔뿔이 산개가 되고 만 것입니다.

그와 같은 현상은 한 마디로, 불행한 사태의 발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면(裏面, 속과 안)에서는 엄청난 유익(有益)이 온 세상에 전달되기에 이릅니다. 셈족이 가는 곳마다 하나님 신앙이 전파된 것이 그러합니다. 동시에 고대에 가장 앞선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여러 미개지역으로 퍼져 나간 것입니다.

그러한 관점에서 하나님 섭리의 양면성(兩面性, 두 가지 다른 모습)을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갈파하고 있는 그대로 빛과 어두움을 창조하신 하나님(45:7), 모세가 신명기에서 기록하고 있는 바와 같이 생명과 사망을 사람들 앞에 두시고서 그 선택을 기다리고 계시는 하나님을 모두 여기서 만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30:19-20).

그와 같은 사실을 사도 바울은 더 적절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8:28).

주후 1세기 초대교회시대가 되면 비슷한 현상이 발생합니다. 주후 70년에 예루살렘이 로마군대에 의하여 함락이 되고 성전이 불타게 됩니다. 기독교인들도 모두 유대 땅 바깥으로 탈출하게 됩니다. 그들이 옮겨가는 이방 땅에 더욱 왕성하게 교회가 세워지게 됩니다.

복음을 가지고 이방 땅으로 가서 믿음의 씨를 뿌리는 자를 디아스포라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디아스포라가 그 옛날 바벨탑 붕괴사건으로 이미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발생한 것입니다.

모세가 기술하고 있는 창세기에 의하면 바벨탑 붕괴사건으로 말미암아 동방 땅으로 이주하게 되는 셈 족속은 벨렉의 아우인 욕단의 자손들입니다(10:25-31). 그들은 주전 2,357년에 제국이 무너지자 함의 지배에서 벗어나서 동쪽으로 한 없이 이동을 합니다.

마침내 아시아 대륙의 동쪽 끝까지 이른 것으로 보입니다. “동쪽 산”(10:30)이라는 표현이 그러한 것이라고 짐작이 됩니다. 한반도에서 단군의 고대조선이 성립된 때가 단기 원년인 주전 2,333년입니다. 그렇다면 욕단의 후손 가운데 가장 기마술이 뛰어난 집안이 24년만에 동쪽의 끝자락까지 다다른 것으로 보입니다.

얼마나 강인한 족속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들이 가지고 온 선진문명이 극동에서 문화의 꽃을 피웁니다. 유일신(唯一神) 사상도 그들이 전파를 합니다. 그래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천신단(天神壇, the altar for the heavenly God)한반도(韓半島, the Korean peninsula) 곳곳에 세워지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또 하나의 디아스포라는 데라-아브람-이라는 삼대입니다(11:31). 그들은 아주 늦게 주전 21세기에 하나님의 명령으로 서쪽으로 향하게 됩니다. 목적지는 가나안 땅입니다. 그런데 족장인 데라는 도중에 기름진 새 땅을 발견하게 되자 그 땅을 개척하느라고 하나님의 명령을 끝까지 이행하지 아니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데라의 장자 아브람을 불러내어 그 사명을 완수하게 합니다(12:1-5). 그 결과 아브람 일행은 하나님 신앙을 가나안에 전합니다. 동시에 선진 메소포타미아의 문명을 변방 가나안 땅에 전하고 있습니다.

2,000년 이상의 세월이 흐른 후에 예수님의 사도들이 그 옛날 셈족처럼 복음을 동양과 서양에 전합니다. 그들이 가는 곳에 교회가 세워지게 됩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외에도 시리아와 애굽 그리고 로마에 교황청이 세워지게 됩니다.

훗날 로마의 기독교 탄압과 게르만 족의 문명파괴로 인하여 오직 로마의 교황청만이 존속하게 됩니다. 그 후 중세가 끝날 때까지 로마의 카톨릭이 기독교 신앙을 파수하게 됩니다.

그리고 주후 16세기에 유럽에서 종교개혁이 발생하게 되자 구교는 바깥세상으로의 선교에 박차를 가하게 됩니다. 그 결과 또 다른 선교의 시대, 디아스포라의 역사가 발생을 합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역사섭리는 오묘하기만 합니다.

 

6.    셈의 셋째 아들 아르박삿의 족보만이 자세하게 기록이 되고 있는 이유(11:10-12)

 

현대인류의 조상이 되고 있는 노아의 아들은 셈, , 야벳 등 3명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그 가운데 셈의 자손의 족보만을 연대추적이 가능하도록 기록하고 있습니다. 함과 야벳의 후손들의 족보는 그렇지 아니한데 유독 셈의 자손의 족보에서는 각 족장이 다음 대 족장을 낳은 나이와 그 후 생존기간을 적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적어도 두 가지의 큰 이유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다음 대의 족장을 낳은 나이가 징검다리가 되어서 연대계산이 가능해집니다. 둘째, 하나님 신앙을 승계해가는 족장들의 이름이 열거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의인으로 불릴 수 있는 자들입니다.

특이하게도 한 세대에 한 사람 씩입니다. 다만 아브라함의 세대에 있어서는 그의 아우인 나홀과 하란의 이름이 의인의 족보에 함께 등재가 되어 있습니다(11:26). 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훗날 아브라함이 며느리 리브가를 동생 나홀의 집안에서 데려오기 때문입니다(24:15, 67). 둘째, 또 나홀의 아내가 바로 밑의 동생 하란의 딸인 밀가이기 때문입니다(11:29).

참고로, 어떻게 연대계산을 하는지를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계산의 기준점은 솔로몬 왕이 성전건축하기를 시작하는 때입니다. 그 해가 솔로몬 왕이 등극한지 4년이며 출애굽한지 480년입니다(왕상6:1). BC 970년에 솔로몬이 왕이 되었다고 보면 그 해는 주전 966년에 해당합니다.

따라서 출애굽의 해가 주전 1,446년이 되고 애굽 거주기간 430년을 감안하면 야곱일행이 애굽으로 이주한 해는 주전 1,876년이 됩니다(12:40). 그때가 야곱의 나이 130세입니다(47:9). 야곱이 태어난 주전 2,006년은 이삭의 나이 60세 때입니다(25:26). 따라서 이삭은 주전 2,066년에 태어난 것으로 계산이 됩니다.

그 때 아브라함의 나이가 100세입니다. , 아브라함은 주전 2,166년생인 셈입니다. 그는 75세에 독자적인 가나안 행을 시행합니다(12:4). 그 해가 주전 2,091년입니다. 이제부터 주전 2,166년이라는 아브라함의 생년을 기준으로 하여 각각의 자녀 생산 때의 나이를 더해주면 모든 연대가 계산이 가능해집니다.

그 가운데 흥미가 있는 연대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첫째, 벨렉이 태어나던 해에 세상이 나뉘었습니다(10:25). 그러므로 주전 2,357년에 바벨탑 붕괴사건이 있었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11:6-9).

(2)  둘째, 노아가 600세에 홍수심판을 맞이하는데 그 해는 주전 2,458년으로 계산이 됩니다(7:11). 그 다음해인 주전 2,457년에 무지개 언약이 있었으므로 꼭 100년만에 바벨탑 사건이 발생한 것입니다(8:13-14). 한 마디로, 홍수심판의 교훈을 잊어버리는데 101년 밖에 걸리지 아니했습니다. 그러므로 징벌의 교훈이 사라지는 것은 생각보다 빠르다고 하겠습니다.

(3)  셋째, 더 연대를 거슬러 올라가게 되면 아담의 창조는 주전 4,114년입니다(5:3, 28-29). 그때로부터 따지면 인류의 문명은 아직 6,000년 남짓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 고고학자들이 고대의 유골과 문명의 흔적을 추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하게도 유골은 수십 만년이나 수 만년 전의 것이 발견이 되고 있지만 그들의 문명의 자취는 남아 있지 않습니다. 의미가 있는 돌그림을 해석하더라도 살아 남아 있는 문명의 흔적은 6천년 이내의 것입니다. 그 이유는 6천년 이전의 옛날 문명의 흔적이 전부 사라지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역사섭리가 무엇인지를 깊이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라고 하겠습니다.

 

7.    셈과 아르박삿의 족보의 특징(11:10-26)

 

첫째로, 모세는 인류의 족보가 아니라 자기 집안의 족보를 모세오경에 적고 있습니다. 셈의 셋째 아들이 아르박삿이고 그가 아브라함의 조상입니다. 그런데 아르박삿의 3대손에 벨렉과 욕단이라는 형제의 이름이 나타납니다(10:25). 그들은 셈으로부터 따지면 5번째의 세대가 됩니다. 벨렉은 족장이 되어 갈대아 우르에서 고향을 지킵니다. 그러나 욕단은 형을 떠나 동방으로 진출을 합니다(10:26-30).

참고로, 성경은 벨렉이 태어난 때가 주전 2,357년이며 그때 바벨탑이 무너지고 그 동안 함족의 지배를 받고 있던 셈족들이 동서사방으로 흩어져 나간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10:25). 그 무리들에 나중에 편승하고 있는 자가 욕단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후손들이 극동에까지 이른 것으로 보입니다(10:25-30).

그렇다면 동북아의 끝인 한반도 평양에서 단군이 고대조선을 건국했다는 주전 2,333년은 성경의 기록과 어떠한 맥락을 통하고 있는 것일까요?

형 벨렉보다 나중에 태어난 욕단이 장성하여 약관의 나이에 새 나라 건국의 꿈을 가지고 동으로 이주하게 되었다고 한다면 그 출발의 해가 주전 2,333년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 이유는 훗날 그의 자손들이 극동에 나라를 세우고 조상인 욕단의 건국의 꿈을 이어받기 위하여 그 출발의 해를 단기의 원년으로 삼았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셈의 족보에서(11:10-26) 보는 바와 같이, 욕단이 아니라 그의 형인 벨렉의 가계에서 아브라함이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욕단은 아브라함의 직계가 아니고 방계인 조상이 됩니다.

셋째로, 묘하게도 셈으로부터 벨렉까지가 5대입니다. 다시 5대가 진행되면 아브라함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셈을 포함하여 10대에 이르기까지 약속의 아들들이 성공적으로 하나님 신앙을 파수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동시에 모든 손가락을 전부 꼽게 되는 10번째에 드디어 믿음의 조상이 등장하게 된다는 의미가 엿보이고 있습니다.

넷째로, 훗날 아브라함의 믿음을 승계하게 되는 이스라엘의 12지파가 제사장나라를 형성합니다. 그 나라의 왕으로서 다윗이 추대가 됩니다. 그리고 그 가문에서 여자의 후손인 메시아가 나타난다는 예언이 터져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3:15, 7:14, 9:6, 11:1-2). 결국 모세는 자신의 족보를 적고 있으며 그것은 이스라엘의 족보입니다. 나아가서 그것은 메시아의 등장을 준비하고 있는 믿음의 조상들의 족보라고 하겠습니다(11:13-16, 26, 8:56).  

 

8.    데라는 70세에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더라”(11:26), 그 기록의 의미

 

데라는 아브라함의 아버지입니다(11:31, 17:5). 그는 70세에 세 아들을 얻고 있습니다(11:26). 같은 해에 아들 3명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은 아내가 많다는 뜻입니다. 데라의 세 아들인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은 나이가 같지만 쌍둥이는 아닙니다. 그러므로 세 아들은 모두 어머니가 다릅니다.

동물의 세계에 있어서는 수컷보다 일반적으로 암컷의 수가 많습니다. 한 마리의 수컷이 여러 마리의 암컷을 거느릴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의 경우는 다릅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고”(1:26).

애초에 인간은 남자와 여자로 대등하게 창조가 되었으며 그들 사이에 우리라는 가정생활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1:27, 2:21-25). 사람들의 가정생활을 통하여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 제대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러한 맥락에서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가 이루고 있는 가정과 사회에 번성과 세상경영의 축복을 더해주고 있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1:28).

결론적으로, 사람은 남자와 여자가 대등하며 똑같이 번성의 축복을 받은 자입니다. 그래서 남과 여의 비율이 11’로 같습니다. 그렇다면 데라는 같은 해에 아들 3, 3명을 낳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결국 그는 아내 6명을 거느리고 있는 대 족장이며 부자인 것입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데라는 실제로 6명의 아내가 아니라 그 갑절의 여자를 아내로 거느리고 있는 자입니다. 보통 여자들은 자녀를 낳을 때 평균 2살 정도의 터울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현실적으로, 12명의 아내와 그들의 소생을 모두 먹여 살릴 수 있는 데라의 재력은 실로 대단한 것입니다.

아브람은 태어날 때부터 그러한 재벌집의 장남입니다(11:26). 그는 고대 족장사회에 있어서 장자승계의 원칙에 따라서 차기 족장이 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족장의 권력이라고 하는 것은 씨족 내에 있어서는 왕의 권력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차기 왕권을 쥐게 되는 아브람은 온 집안 처녀들의 선망의 대상입니다.

그래서 아브람은 집안의 처녀들 가운데 가장 총명하고 아름다운 여인을 자신의 아내로 맞이하게 됩니다(12:14). 그 여자의 이름이 바로 사래입니다(11:29, 31). 그녀는 참으로 아름답고 운이 좋은 여자입니다. 그녀의 나이는 남편인 아브람보다 열살 아래이며 사실은 이복 누이동생입니다(17:17, 20:12).

그런데 세상에서는 좋은 일만이 있을 수는 없습니다. 사라는 차기 족장의 아내가 되는 행운을 얻었지만 그 대신에 자식이 없습니다(11:30). 그래서 막내 시동생 하란의 장자인 롯을 마치 양자처럼 여기고 있습니다. 롯은 생부인 하란이 일찍 별세를 하였기 때문에 백부(伯父, 큰아버지)인 아브람을 양부로 생각하고서 행동을 같이하고 있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11:27-28, 31, 12:5).

참고로, 하란은 형들보다 일찍 결혼을 하여 장자 롯 뿐만 아니라 딸 밀가 그리고 아들인지 딸인지 불분명한 자식 이스가를 낳습니다(11:27, 29). 하란은 일찍 죽었지만 그의 장녀인 밀가는 훗날 중부(仲父, 작은 큰아버지)인 나홀과 결혼을 하게 됩니다(11:29). 밀가의 친손녀가 리브가이며 훗날 아브라함의 적장자인 이삭의 아내가 됩니다(22:23, 24:58-67).

이미 설명한 바와 같이, 고대 족장사회에 있어서는 재산의 상속권이 아들에게만 있습니다. 그리고 맏아들이 차기 족장이 되고 가문의 모든 재산과 권력을 독차지할 수 있습니다. 동생들은 모두 가신이 되고 종이 될 따름입니다.

그리고 아름다운 딸은 남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우선적으로 집안사람에게 아내로 줍니다(29:19). 재산을 지키고 가문 내에서만 상속을 시키기 위하여 철저하게 대비하고 있는 제도입니다. 같은 경우를 한국의 역사에서도 볼 수가 있습니다; “신라시대에 성골이 계속 왕권을 보유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왕족 내에서만 결혼을 하고 있습니다. 기타 귀족에 있어서도 그러합니다. 그것이 신라의 골품제의 특징입니다”.

오늘 날에도 골품제와 같은 결혼의 풍습이 재현되고 있습니다. 소위 상위 1% 내의 혼맥의 형성이 그러한 것입니다. 그런데 역사는 선민사상이 무너지고 만민구원의 시대로 이행된 지 오래입니다. 그리고 신라의 골품제(骨品制, 태어날 때부터 성골, 진골, 6두품, 5두품, 4두품 등으로 계급과 신분이 이미 정해져 있는 것)사회가 보다 개방적인 고려와 조선의 사회로 이행이 된 지도 오래입니다.

그러므로 시대착오적인 현대의 신종 골품제도 역시 머지않아 종말을 고하게 될 것으로 전망이 됩니다. 특히 전근대적인 왕조정치와 귀족정치를 강력하게 시행하고 있는 이상한 국가나 사회에 있어서는 그 종말이 더욱 빠를 것입니다.

 

9.    하나님의 명령보다 자신의 연민과 야망을 선택한 데라(11:27-28, 31)

 

바벨탑 붕괴사건이 발생한 해는 주전 2,357년입니다. 그때부터 함족의 지배를 벗어나게 된 셈족들이 디아스포라가 되어 동서남북으로 흩어져 나간 것으로 모세가 기록하고 있습니다(11:9). 하나님 신앙을 잘 간직하고 있었던 아르박삿의 후손 가운데에서는 일찍이 벨렉의 아우인 욕단의 집안이 발 빠르게 동쪽으로 이주해갔습니다(11:25-30).

그런데 벨렉의 직계자손들은 움직이지를 아니했습니다. 그들은 데라의 시대에 이를 때까지 선교에는 뜻이 없었습니다(11:12-26). 그래서 하나님을 유일신으로 섬기는 일신교의 신앙과 찬란한 메소포타미아의 선진문명을 변방의 이방 족속들에게 널리 전하지 아니했습니다. 그들은 계속 고향인 갈대아 우르를 지키고 있습니다.

그러자 주전 22세기를 전후하여 하나님의 이주명령이 데라와 아브라함과 롯에게 떨어진 것으로 보입니다(11:31, 7:2-4). 그에 따라 족장이며 대단한 재력가인 데라는 장남 아브람 부부, 장손 롯의 부부를 데리고 함께 가나안으로 출발합니다(11:31a).

그러나 족장 데라는 목적지 가나안까지 도착하지를 못합니다(11:31b). 그 이유는 밧단아람’(28:2), 곧 북부 시리아 지역에서 개발의 여지가 충분한 넓은 땅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이재(理財)에 밝은 데라는 그 드넓은 땅의 가치를 단숨에 알아보았습니다. 그래서 계획적으로 그 땅을 원주민에게서 헐값에 사들입니다.

그리고 그곳의 지명을 아예 아비보다 먼저 죽은 자식 하란의 이름으로 등기를 합니다(11:28, 31). 개간을 하고 개척을 하면서 그 땅에 성읍을 건설하는데 자신의 남은 생애를 모두 바치고 있습니다(11:32, 24:10). 변방 가나안 땅에 하나님 경외사상을 전하고 선진문물을 전해주라고 하신 하나님의 명령은 이제 아예 데라의 귀에 들어오지도 아니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데라의 영적인 상태는 살아 있으나 죽은 것과 같습니다. 그 점을 스데반 집사가 순교를 앞두고서 성령에 감동을 받아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그의 아버지가 죽으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지금 사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7:4).

실제로 아브람이 그의 아버지를 하란에 남겨두고서 독자적인 믿음의 길을 떠난 것은 그의 나이 75세 때입니다(12:4). 데라는 205세에 하란 땅에서 임종을 맞이합니다(11:32). 그러므로 장자와 장손이 비록 자신을 버려두고 하나님의 명령을 쫓아서 가나안으로 떠나버렸지만 데라는 하란에서 멀쩡하게 60년간 더 생존을 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그를 죽은 것으로 치부하고 맙니다. 그 이유는 더 이상 하나님의 명령을 듣지도 아니하고 영적인 삶을 살지도 아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명백하게 영적으로 죽은 자입니다. 반면에, 몸은 비록 죽었으나 그리스도가 오셔서 자신을 깨워 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성도들은 모두 마치 잠을 자는 자와 같습니다.

그 점을 예수님이 회당장 야이로의 집에서 뿐만 아니라 베다니로 향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분명하게 다음과 같이 선포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떠들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5:39),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11:11),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11:26).

요컨대, 주님의 제자로 살아가는 성도들에게는 부활의 소망이 있기에 결코 죽은 자가 아니며 부활 승천하신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면서 잠시 잠을 자고 있을 뿐입니다(5:24-29). 할렐루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