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설교 모음(손진길 목사의 글)

창세기 제9장에 대한 강해설교 모음(손진길 목사의 글)

손진길 2024. 5. 18. 18:47

창세기 제9장에 대한 강해설교 모음(손진길 목사의 글)

 

 

1.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는데 왜 여자들은 빠져 있는가?(9:1)

 

고대사회는 족장이 다스리는 사회입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두가 족장들입니다. 하나님의 방백이라고(23:6) 부를 수 있는 그들은 모두가 남자들이며 자신들의 가족과 가문을 대표하고 있는 족장들입니다.

비록 사라, 리브가, 레아 등 3대를 이어온 족장의 부인들이 하나같이 남편보다는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는 뛰어난 신앙을 선보이고 있지만(12:13-15, 24:58, 26:7, 29:35) 그들은 결코 가문의 대표자가 될 수 없었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초대교회시대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과 공생애를 함께 했던 12명의 남자제자들에게만 사도로서의 권위를 부여하고 있는 것입니다(1:21-26). 생전에 예수님을 따라다닌 수많은 갈릴리의 여자분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27:55-56, 8:1-3) 남자제자들만 사도로 삼고 있는 것입니다.

의사 누가가 조심스럽게 12사도에 추가하고 있는 후속사도 바나바와 바울 역시 남자들입니다(13:4, 9, 43, 14:3). 본문에서 현대인류의 조상이 되고 있는 노아가족의 경우에도 동일합니다. 노아의 아내와 며느리들은 모두 빠지고 노아와 그의 세 아들들만 하나님의 복을 인류의 대표로 받고 있는 것입니다(9:1).

생각을 해보자면, 하나님께서는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그들에게 똑같이 복을 주셨는데(1:27-28) 어째서 여자가 아니고 남자가 그들의 대표자가 되고 있는 것일까요? 창세기의 말씀을 더욱 깊이 있게 다음과 같이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과 모양을 닮도록 사람을 창조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은 복수의 하나님이 공유하고 있는 것으로 묘사가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1:26). 과연 하나님의 가문이 지니고 있는 형상과 모양은 어떤 것일까요?

남자와 여자로 나누어져 있는 그것을 하나로 합치면 그 해답이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1:27, 2:24). 그와 같은 의미에서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내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2:23-25)는 가정의 탄생은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한 몸이 되어서 이루고 있는 그 가정에 비로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 제대로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구체적으로, 남자와 여자 사이의 사랑의 고백, 그리고 영과 혼과 육의 하나됨, 나아가서 자신의 생명을 자녀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 등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의 특징들이라고 하겠습니다.

둘째로, 모세가 기록하고 있는 창세기의 기록은 여자가 남자를 보완하고 있다는 의미를 강하게 시사하고 있습니다. 두 가지의 사실에서 그 점을 엿볼 수가 있습니다; 첫째,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함께 살고 있는 아담이지만 그가 외로워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 그래서 하나님이 아담의 갈빗대를 취하여 여자인 하와를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여자가 남자를 보완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어디까지나 모든 갈빗대를 가지고 있었던 존재는 남자인 아담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땅에서 뿌리를 내리고 대를 이어서 살고자 합니다. 그러나 아담은 아직 가정이 없으며 옆구리가 시리고 허전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담에게 하와를 만들어서 아내로 데려다 줌으로써 그가 보다 완전한 인생을 살도록 조치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한 가지 의문이 발생합니다. 사람이 지니고 있는 형상과 모양의 본체인 하나님은 외로워하지 아니하고 있는데 왜 그것을 물려받고 있는 아담이 외로워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아무래도 사람을 만들 때 사용한 소재의 탓인 것 같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2:7). 땅에서 흙이라는 소재를 취하여 사람을 만들고 있습니다. 그 흙이 하나님의 생기를 받음으로 말미암아 살아서 움직이며 생각까지 할 수 있는 하나의 인격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람의 영은 영이신 하나님을 그리워하고 있지만(4:24), 반면에 흙에서 취함을 얻은 인간의 몸은 살아서 움직이고 있는 토양을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동질감을 느끼도록 흙으로 각종 동물을 지으시고 그에게 동무로 삼도록 선물했습니다. 그것은 짐승과 새 가운데에서 특별히 구별이 되어 사람을 잘 따르는 가축과 애완동물들이 나타나고 있다는 의미가 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아담이 여전히 외로워하고 있습니다.

마침내 아담의 갈빗대 하나를 취하여 하나님이 특별한 여자 하와를 창조하여 아담에게 함께 살도록 데려다 줍니다.  아담이 하와를 만나자 너무나 만족하여 사랑의 고백을 합니다. 그들은 부부가 되어 한 몸을 이루고 드디어 가정생활을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셋째로, 창세기 제2장을 보면, 아담이라고 하는 남자가 본래 하나님과의 대화의 상대자입니다. 그리고 그가 가정을 이루자 아내에 대한 책임까지 하나님 앞에서 지도록 조치가 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본래 아담만을 에덴동산에 데리고 와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인생을 살도록 조치를 했습니다(2:7-8).

그런데 아담이 허전해하고 쓸쓸해 하자 비로서 그의 갈빗대를 하나 뽑아서 하와라고 하는 여자를 만들어 준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소 불완전하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아담이라고 하는 남자가 본래 하나님과의 대화의 상대자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아담부부가 죄를 범하고 동산의 나무 사이에 숨었을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부르시고 있습니다(3:9). 그리고 선악과를 따먹은 경위를 심문할 때에도 아담에게 먼저 묻고 있습니다(3:11).

그 다음에 하와에게 다음과 같이 판결을 하고 있습니다;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3:16). 한 마디로, 하나님 앞에서 영적인 책임을 먼저 져야만 하는 자가 아담입니다. 그리고 아내에 대한 책임도 하나님은 그 남편에게 묻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에 따라 다스리는 권한을 가지고 있으며 가정과 가문의 대표자가 되었다고 하여 가장이며 족장인 남자들이 마냥 좋아만 할 것이 아닙니다. 창조주 하나님 앞에 서면 그 책임이 생각보다 큰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2.    육식을 허용할 수밖에 없는 이유와 하나님의 사전조치(9:2-3)

 

홍수심판의 결과는 처참한 것입니다. ‘아라랏이라고 불리게 되는 산이 얼마나 높아진 것인지 모릅니다(8:4). 홍수 전에는 땅의 모양이 거의 평평했는데 엄청난 양의 비가 내리고 지하수가 그 이상으로 분출이 되자 그 모습이 변하기를 시작했습니다.

더구나 지하수의 분출을 초래한 해저지진의 발생과 화산의 폭발은 지층의 구조를 완전히 바꾸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지구상에는 8천 미터가 넘는 높은 봉우리가 생겨나고 해저 3천 미터나 되는 웅덩이가 파이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홍수 전에 평평한 땅을 달리던 짐승들이 새로운 땅에서는 높은 산과 깊은 골짜기를 조심스럽게 타고 다니면서 가까스로 생존을 해야만 하는 입장이 되고 말았습니다. 동시에 기후의 극심한 변화는 식물이 자라나는데 큰 장애가 되었습니다. 그러자 식물성만으로는 먹거리가 부족해진 동물들은 서로 잡아 먹으려고 합니다.

홍수 전에도 사람이 사람을 해치고 짐승들이 약육강식을 하는 흉포함을 보여서 하나님이 심판을 행할 수밖에 없었습니다(6:4-6, 11-13). 그런데 홍수심판의 결과 초래된 새로운 세상의 환경은 사태를 더욱 악화시킬 형편입니다(8:22).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긴급조치를 발하고 계십니다;

(1)  첫째, 육식을 정식으로 허용한다는 것입니다(9:3).

(2)  둘째, 약한 육체적인 힘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보호하기 위하여 짐승들에게 사람을 무서워하도록 프로그램을 내장하고 있습니다(9:2). 사람을 두려워하는 본능이 짐승들에게 생겨나고 있는 것입니다.

(3)  셋째, 태초에 사람을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에게 주셨던 만물의 영장으로서의 복을 재삼 확인해주고 있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9:1). 그에 덧붙여서 더욱 강력한 권한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모든 생물들이 너희를 두려워하며 무서워하리니, 이것들은 너희의 손에 붙였음이니라”(9:2).

 

3.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가 있는 그대로 먹지 말라(9:4)

 

홍수심판으로 말미암아 자연환경이 크게 변화가 되었습니다. 하늘의 창문이 열려서 40일 간이나 비가 쏟아지고 땅속 깊음의 샘들이 터져서 더 오랜 기간 지상으로 분출이 되어 나왔기에 그만 땅의 모습이 변한 것입니다(7:11-12). 해저지진의 발생과 용암의 분출 그리고 지각의 변동이 동반되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대목입니다.

20세기말에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소위 쓰나미 현상과 비슷한 것입니다. 그 결과 생물들이 살아 가기에 너무나 어려운 환경이 되고 말았습니다. 먹거리를 구하기가 특히 어렵게 된 것입니다.

땅의 모습이 그렇게 변모할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서는 아담부부의 범죄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최초판결의 내용에서 이미 엿볼 수가 있습니다;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3:17).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불가피하게 두 가지 조치를 취하고 있습니다;

(1)  첫째, 동물들에게 정식으로 초식(草食) 뿐만 아니라 육식(肉食)을 허용한다는 것입니다(9:3). 따지고 보면, 약육강식의 세계를 그토록 한탄하고 근심하시던 하나님이십니다(6:2-7, 11-13). 그러하신 하나님께서 이제는 육식을 허용하고 계십니다. 그만큼 먹거리가 부족한 세상이 되고 만 것입니다.

(2)  둘째, 땅이 존재하는 한 식물이 싹을 띄우고 열매를 맺도록 해주겠다는 것입니다(8:22a). 식물이 자랄 수 있는 최소한의 자연환경만은 보장해주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런데 육식을 허용하시는 하나님께서 한 가지 조건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 째 먹지 말 것이니라”(9:4). 생고기를 피가 흠뻑 스며 있는 그 상태로 뜯어서 먹지 말라는 명령입니다.

피에 젖어 있는 그 생고기에는 아직도 생명의 기운이 살아 있으므로 그것을 그대로 삼키게 되는 경우에는 살아있는 생명을 집어 삼키는 것과 같습니다. 만약 사람이 그렇게 살아 있는 생명을 집어 삼키는 경우에는 짐승과 같아질 것입니다. 약육강식의 습관을 지니고 있는 짐승의 야성이 사람의 본능 속에 그대로 흡수가 되고 만다는 뜻입니다.

 

4.    자기 형상대로 지은 사람을 두텁게 보호하고 계시는 하나님(9:5-7)

 

모든 짐승과 사람이 정식으로 육식을 할 수 있도록 허용이 되고 있습니다. 근본적으로 사람이나 짐승이나 그 육체는 모두 흙으로 만들어져 있습니다(2:7, 19, 3:19, 3:20). 짐승의 눈으로 보자면 그것은 똑같은 고기 덩어리입니다. 특히, 힘이 약한 인간은 좋은 사냥감입니다.

육식이 허용된 새로운 환경은 인간이 살아나가기에 너무나 불리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강력하게 보호하시고자 다음과 같은 특별선언을 하시고 있습니다; “내가 반드시 너희의 피 곧 너희의 생명의 피를 찾으리니, 짐승이면 그 짐승에게서, 사람이나 사람의 형제면 그에게서 그의 생명을 찾으리라.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 사람의 피도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께서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음이니라. 너희는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가득하여 그 중에서 번성하라 하셨더라”(9:5-7).

풀이를 해보자면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습니다;

(1)  첫째, 사람의 생명을 두텁게 보호하는 이유는 사람만이 유일하게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9:6b).

(2)  둘째, 하나님의 형상을 물려받고 있는 사람의 소중한 생명을 해친 자는 사람이거나 짐승이거나 반드시 죽이겠다는 것입니다(9:5a). 여기서 사람의 형제’(his fellow man)도 함께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표현이 되어 있습니다. 그 뜻으로 보아 his fellow man은 공모자나 가담자이거나 또는 살해행위를 사주한 바 있는 교사자나 짐승의 주인 등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자들까지 반드시 죽임을 당할 것입니다(9:5b).

(3)  셋째, 상해만 입힌 경우에도 그 사람에게서 동일한 대가를 치르게 할 것입니다(9:6a). 물론 짐승의 경우에는 반드시 죽임을 당할 것입니다.

(4)  넷째, 그렇게 사람의 생명을 두텁게 보호함으로써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충만하게 되는 축복의 약속이 성취가 되어 나가는 것입니다(9:7).

그 밖에도 하나님께서는 사전에 한 가지 조치를 더 마련해놓고 있습니다; “모든 짐승과 생물들이 인간을 무서워하리니 이것들은 너희의 손에 붙였음이니라”(9:2). 본능적으로 동물들이 사람을 두려워하도록 만들어 놓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신의 형상과 모양을 닮아 있는 인간을 보호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다양한 조치를 취하시고 있습니다. 그것이 한 마디로, 모든 사람들의 어버이가 되신 창조주 하나님의 마음이라고 하겠습니다.

 

5.    하나님의 언약의 상대방은 누구인가?(9:8)

 

말로 하는 약속을 언약(言約, verbal contract)이라고 부릅니다. 사람들 사이에 언약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특이하게도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 언약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 본문에서 모세는 현대인류의 조상이 되고 있는 노아와 그의 세 아들을 상대로 하여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약속을 하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한 아들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내가 내 언약을………세우리니”(9:8-10).

창조주께서 무엇이 답답하여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들과 언약을 맺고 계시는 것일까요? 다른 모든 피조물에 대해서는 그저 명령 하나면 만사가 끝나는데 왜 유독 사람에 대해서는 말씀을 나누고 약속을 하고 계시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아무래도 사람의 창조의 과정과 관련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다른 동물들에 대해서는 그냥 모양을 디자인하고 살아서 움직이며 번성을 하라고 복을 주었을 따름입니다(1:21-25). 그렇지만 마지막 날 끝 순서로 사람을 지으실 때에는 다른 방법을 사용하시고 있습니다; “하나님 사이에 존재하고 있는 형상과 모양을 사람들이 닮도록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신 것입니다”(1:26-27).

그러므로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가정을 이루게 되면 그곳에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 드러나게 됩니다. 사람이 혼자 있을 때는 잘 모르지만 다른 사람을 만나고 다른 피조물을 만나게 되면 하나님과 비슷한 성품과 모양새가 그 모습을 드러낸다는 뜻입니다.

그와 같은 특징이 있기에 창조주 하나님은 아담을 에덴동산에 옮겨와서 살도록 조치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 여호와께서 아담과 대화를 나누시고 함께 구별된 장소 에덴동산에서 한 가족처럼 살고 계시는 것입니다.

좀더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면, 아담의 창조과정에 대해서 모세가 다음과 같이 추가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living soul)이 되니라”(2:7).

풀이를 해보자면, 사람은 비록 흙으로 지어진 존재에 불과하지만 그 육체 속에 하나님의 생명의 기운을 받아서 (, soul)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특별하게 만들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아담은 하나님께서 주신 영혼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는 그의 영으로 하나님을 느끼며 그의 혼으로 하나님의 지성과 감성과 의지를 전수 받을 수가 있는 존재입니다. 그와 같은 맥락에서, 아담이 하나님과 대화를 할 수가 있으며 약속의 상대방이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더구나 창세기 제1장을 접목시켜보면, 그 사람 아담 속에 하나님의 형상이 살아서 숨쉬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창세기 제5장에서는 아담의 형상이 카인이 아니라 셋에게 대물림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5:3).

이제 노아의 홍수가 끝나고 나면, 그 형상을 대물림하고 있는 자는(5:28-32) 오로지 현대인류의 조상이 되고 있는 노아와 그의 세 아들뿐입니다(9:8-9). 그들이 바로 모든 피조물들을 대표하여 하나님의 언약의 상대방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6.    하나님 언약의 길이와 폭은 어떠한가?(9:9-10)

 

사람은 시공간에 갇혀서 살고 있는 존재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은 시공간을 초월하시는 영적인 존재입니다(4:24). 그와 같은 차이점 때문에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언약의 특징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 언약의 영속성 때문에 그 적용의 길이가 노아의 후손 대대로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둘째, 하나님 언약의 광대하심 때문에 그 적용의 폭이 모든 피조물에게 퍼져 나가고 있습니다.

그 두 가지 특징을 반영하고 있는 본문의 말씀이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내 언약을 너희와 너희 후손과 너희와 함께 한 모든 생물 곧 너희와 함께 한 새와 가축과 땅의 모든 생물에게 세우리니, 방주에서 나온 모든 것 곧 땅의 모든 짐승에게니라”(9:9-10).

한 마디로, 코로 숨을 쉬는 모든 생물들에게 앞으로 하나님의 언약을 영원히 적용시키겠다는 것입니다. 그 내용은 아가미로 숨을 쉬며 물 속에서 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물고기 종류에게는 적용이 되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 언약의 내용은 홍수의 심판과 관련되고 있다는 사실을 여기서 미리 눈치를 챌 수가 있는 것입니다.

 

7.    하나님의 새로운 언약, 그 무지개 언약의 내용과 의미는 무엇인가?(9:11-17)

 

흔히 무지개를 희망의 상징이라고 합니다. 비가 개이고 있으니 들판에 나가서 일을 할 수가 있고 새로운 수확을 얻을 수 있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리고 언덕에 올라가서 멀리 쌍 무지개가 뜨고 있는 지평을 바라보게 되면 무엇인가 먼 미래 저 먼 곳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영롱한 미래를 미리 보는 듯 합니다.

청운의 꿈은 그렇게 무지개의 이미지로 젊은이들의 가슴 속에 담기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그처럼 미래의 희망을 가리키고 있는 무지개가 창세기 본문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이 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노아 및 그의 세 아들에게 언약을 세우고 있습니다. 다시는 홍수심판을 일으키지 아니하겠다는 것입니다. 그 결심을 지키기 위하여 구름 속에 무지개를 숨겨두고자 하십니다. 비가 억수같이 내릴 때에 무지개가 마치 자동차 속에 내장이 되어 있는 에어백과 같이 작동을 할 것입니다. 무지개가 떠오르는 것을 보게 되면 하나님께서 즉시 진노를 거두시고 폭우를 멈추게 하십니다. 따라서 무지개는 하나님의 자기억제를 불러 일으키는 안전변(a safety valve)과 같다고 하겠습니다”(‘9:11-17 의역).

이상과 같이 그 무지개 언약을 풀이하고 보면 구체적으로 다음 사실들을 알 수가 있게 됩니다;

첫째로, 무지개는 하나님의 기억을 불러 일으키는 작용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무지개가 떠오르는 것을 볼 때에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언약을 기억하시기 때문입니다. 물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노아 가족들에게 약속하신 내용을 잘 기억하고 계십니다. 그렇지만 더 확실한 방법으로 재삼 그 약속의 중요성을 다시 상기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 무지개를 바라보게 되면 먼저 하나님께서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언약의 내용을 반추하십니다. 그리고 자신의 진노를 거두십니다. 동시에 노아의 후손들은 폭우 가운데에서도 잠시 무지개가 구름 속에서 떠오르는 것을 보게 되면 한숨을 돌리게 됩니다.

그 옛날 하나님께서 조상님들에게 하신 언약을 떠올리기 때문입니다.  다시 무지개가 떠오르고 있으니 하나님께서 심판을 멈추시고 구원의 기회를 다시 주실 것이라는 희망이 생기는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께서 자기 통제를 확실하게 하기 위하여 무지개 장치를 마련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절대자라고 하더라도 자만하지 아니하고 겸허하게 스스로 자기 구속의 장치를 마련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상대적인 능력밖에 가지고 있지 아니한 세상의 지배자가 제도적인 견제와 억제의 장치를 무시하고 자기 멋대로 통치행위를 하고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큰 문제를 야기할 것입니다.

독재와 독점이 주고 있는 엄청난 폐해를 굳이 거론하지 아니하더라도 충분하게 이해를 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러므로 전능하다는 뜻은 완벽한 독단의 권력을 가졌다는 의미 그 이상의 것입니다. 그것은 철저하게 자기를 억제하고 조절할 수 있는 능력까지 모두 가지고 있다는 뜻이라고 하겠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셔서 자기를 죽이고자 하는 유대교의 지도자들과 로마의 군정당국을 모두 힘으로써 다스리지 아니하시고(26:51-54) 그 대신에 자신을 대속의 십자가에 못 박는 길을 선택했다고 하는 구원의 방법론을 다시 생각해봅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심판보다 더 두렵고도 가슴이 떨리는 하나님의 인내의 한계를 마주하게 해주고 있습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되면, 우리는 이제 더 물러설 곳이 없습니다. 더 우물쭈물 망설일 수도 없습니다. 절대자이신 창조주가 자신의 아들을 나를 대신하여 심판하고 계시는데 우리가 무슨 변명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내 죄의 무게가 그것보다 가볍다고 어떻게 주장할 수가 있겠습니까? 차라리 심판보다 그 하나님의 자기절제와 인내가 더 무서운 것입니다. 그것이 마지막 기회를 주고 있다는 의미로 두렵게 다가옵니다. 그러므로 남은 평생 한결같이 옷깃을 여미고 하나님의 뜻대로 그리고 복음의 내용대로, 더 쉽게 말하자면, 예수님의 생애처럼 우리도 살아가지 아니하면 아니 된다는 사실을 절감할 뿐입니다.

셋째로, 무지개 언약은 약속의 이행에 신실하신 하나님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반드시 약속을 기억하시는 하나님이심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내가 구름으로 땅을 덮을 때에 무지개가 구름 속에 나타나면, 내가 나와 너희와 및 육체를 가진 모든 생물 사이의 내 언약을 기억하리니, 다시는 물이 모든 육체를 멸하는 홍수가 되지 아니할지라. 무지개가 구름 사이에 있으리니, 내가 보고 나 하나님과 모든 육체를 가진 땅의 모든 생물 사이의 영원한 언약을 기억하리라”(9:14-16).

약속에 신실하시기 때문에 그 약속을 기억하시고 자비를 베풀고 계십니다. 그 모든 뜻을 담고 있는 히브리어가 바로 헤세드입니다. 헤세드의 하나님이 사람들에게도 자기처럼 약속을 지키라고 종용하고 있습니다. 그 음성이 가장 강하게 울려 나오고 있는 장소가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라고 하겠습니다.

넷째로, 하나님은 말로만 약속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물증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 언약의 증거가 여기서는 무지개입니다. 무지개를 보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자신의 언약을 다시 한번 기억하시고 홍수를 멈추십니다. 따라서 홍수가 전면적인 세상의 심판으로 이어지지가 않습니다.

인간들의 입장에서는 무지개를 보게 되면,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약속을 이행하실 것으로 기대하게 됩니다. 이제 다시 살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살려 주신다는 약속의 증거입니다.

개념을 확장해보면, 그 약속의 증거가 골고다 언덕에 세워진 십자가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전면심판을 보류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엄청난 진노의 억제의 장소가 바로 골고다 언덕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을 희생제물로 대신 처형함으로써 비로서 그 진노를 억제하고 계시는 두려우신 하나님의 모습이 그 언덕에서 선명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이제는 그와 같은 하나님의 모습을 발견한 자마다 회개하고 죄의 길을 떠나야만 할 것입니다.

계속 제멋대로 살다가는 홍수심판보다 더 엄청난 영벌(永罰, eternal punishment)의 심판에 처해지게 될 것입니다. 죽은 자를 다시 살려서 영원한 처벌을 받도록 심판하겠다는 예수님의 설명이 복음서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참고로 그 대목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또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느니라.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5:24-29).

 

8.    노아와 셈과 함과 야벳의 잘 잘못은 무엇인가?(9:18-23)

 

홍수심판이 끝난 후에 노아의 3아들의 자손들로부터 현대인류가 온 세상으로 퍼져 나가고 있습니다(9:18-19). 그렇지만 노아의 세 아들만은 아버지 노아를 족장으로 모시고서 함께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아버지 노아로부터 배워야만 하는 고대문명의 지혜와 지식이 많기 때문입니다.

노아는 이제 피조세계에 있어서 나이로 보나 경험으로 보나 가장 정상의 자리에 서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어른이 되어버렸을 때에 노아가 느끼는 심적인 부담감은 어느 정도일까요?

노아의 그 자리는 인간으로서는 견디기 어려운 외로운 자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 이유는 그가 포도나무를 심고 있기 때문입니다(9:20). 포도열매를 얻어서 포도주를 생산하고자 합니다.

시판용이 아니라 자신이 마시고자 합니다. 포도주에 취해 버림으로써 한 순간이나마 자신에게 주어져 있는 그 무거운 중압감과 자기 혼자서만 감당해야 하는 그 외로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사건이 발생한 그날 노아는 포도주를 얼마나 많이 마셨는지 모릅니다. 대취하여 자신을 속박하고 있던 옷마저 훌훌 벗어 던지고 정신 없이 자신의 방에서 잠이 들고 말았습니다(9:21).

창세기 앞부분을 다시 살펴보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형상과 모양을 닮아 있는 인류에게 먹거리를 풍성하게 주셨습니다. 우선 맛이 좋고 영양분이 풍부한 식물을 사람들에게만 주셨습니다; “다른 동물들에게는 푸른 풀만을 주셨지만 사람들에게는 다채로운 야채와 곡식과 과일을 주신 것입니다”(1:29).

그리고 노아의 홍수 후에는 신선한 육류까지 주셨습니다(9:3). 그것들은 인류의 생존을 위하여 필요한 먹거리들입니다. 생존에 필요한 그것을 얻기 위하여 농사를 짓고 목축을 합니다.

그런데 홍수심판 후에 현대인류의 조상이 되고 있는 노아가 포도나무를 심고 있습니다(9:20). 그것은 생존이 아니라 풍요로운 생활을 위한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사람은 일만하고 생존하는 것으로는 결코 만족을 할 수가 없는 존재입니다. 생활의 여유를 즐기고 인생을 노래하며 벗과 함께 세상의 이치를 논해야만 하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포도주가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점을 인정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노아가 포도나무를 경작할 수 있도록 허용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떡과 포도주그리고 젖과 꿀이라는 성경상의 표현도 이해가 됩니다(14:18, 3:8). ‘은 생존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포도주은 생활을 윤택하게 해주는 식품들입니다.

한편, 그 포도주는 사람들만 사용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도 포도주를 좋아하십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포도열매를 많이 맺으면 그것의 즙을 짜서 포도주를 생산하십니다(15:1-2, 5:4, 63:1-3). 주님은 그것을 가지고 천국잔치의 자리에서 사용을 하시겠다고 하십니다(14:25, 2:1-10).

그 잔치자리에 함께 참석하는 영광을 누리고자 성도들이 이 땅에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서 신실하게 예수님의 지상명령을 수행하는 자들이 그 잔치자리에 부끄럽지 아니하게 참석을 할 수가 있게 될 것입니다(28:18-20).

그렇게 좋은 의미를 지니고 있는 포도주이지만 그것을 마시는 것과 취해버리는 것은 차원이 다릅니다. 성경은 포도주를 마시는 것을 금하고 있지는 않습니다(6:20, 14:23-25). 다만 성도들이 술에 취하는 것을 금하고 있습니다. 성령에 취하는 것은 좋지만 술에 취하는 것은 문제가 되기 때문입니다(5:18).

술에 취하게 되면, 중추신경이 마비가 되고 판단능력이 저하됩니다. 마지막에는 육신의 정욕과 본능이 온 몸을 지배하게 되고 영성이 사라집니다(4:7, 5:11, 22-25, 5:1-4). 마치 하나님이 떠나버리고 육신적인 삶만을 영위하고 있는 죄인의 모습과 같아집니다(6:3).

노아가 바로 그와 같은 상태가 되어 있을 때에 그 집안의 비극이 시작이 됩니다; “둘째 아들인 이 우연하게 아버지의 방에 들어오게 됩니다. 그는 보아서는 아니 되는 풍경을 보게 됩니다(9:21-22). 그 순간 함은 아버지 노아를 경멸하게 됩니다. 아버지도 별 수가 없다고 하는 업신여김과 자신보다 못하다고 하는 교만이 고개를 들고 맙니다. 훗날 그의 교만함이 특히 넷째 아들인 가나안에게 대물림이 되고 맙니다(9:18, 22, 10:6). 함은 아버지의 수치를 가려줄 생각을 전혀 하지 아니합니다. 그 대신에 함은 형 셈과 동생 야벳에게 좋은 구경거리가 있다고 그 사실을 크게 떠벌립니다(9:22). 그러나 야벳은 즉시 옷을 가져다가 뒷걸음질로 아버지의 방에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그 옷으로 아버지의 하체를 가려줍니다. 결코 고개를 돌리지 아니합니다. 역시 아버지 쪽을 쳐다보지 아니한 채 그대로 방밖으로 나갔습니다(9:23)”.

그렇게 노아의 3아들은 아버지를 무시하는 과 존경하는 야벳으로 갈라집니다. 그들의 잘 잘못 때문에 현대인류의 비극적인 역사가 시작이 되고 있습니다.

 

9.    자식들과 그 후손들에 대한 노아의 예언의 내용(9:24-27)

 

 잠에서 깨어난 노아가(9:24) 훗날 세 아들과 그들의 자손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예언을 합니다;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의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하고 또 이르되, 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하게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9:25-27).

그 예언 속에 이미 인류의 역사가 다음과 같이 전개될 것이라고 함축이 되어 있습니다;

첫째로, 함의 넷째아들인 가나안이 저주를 받게 됩니다(9:25, 10:6). 아버지 노아를 무시하고 깔보는 둘째아들 함의 패역함을 가나안이 그대로 물려받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 결과 가나안 족속은 하나님 대신에 우상을 만들어서 섬기는데 앞장을 서게 됩니다.

특히 가나안의 장자인 시돈은(10:15) 페니키아인들의 조상이 됩니다. 페니키아인들은 시돈 땅에서 어업에 종사를 하다가 훗날 두로에서 해상무역을 시작합니다.

그들은 지중해 무역의 성공과 세상적인 번영을 위하여 풍요의 농사신 바알에게 여신 아스다롯을 만들어서 데려다 줍니다. 그리고 두 신의 합방을 통하여 다산의 풍요로움을 기원하게 됩니다.

그들은 신들의 합방의식에 머무르지 아니합니다. 실제로 제사를 지내고 여사제와 합방을 하는 축제를 벌입니다. 하나님 신앙을 떠난 가나안 족속들의 우상 섬김과 영적인 타락이 마침내 그 땅에서 쫓겨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15:16, 9:1-5).

둘째로, 셈의 자손은 하나님 신앙을 파수하게 됩니다(9:26a). 특히 의 하나님 신앙을 가장 확실하게 대물림하고 있는 아르박삿의 자손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을 차지하고 원주민들을 종으로 삼게 됩니다(9:25-26, 10:22, 25, 11:16, 26, 31, 9:23, 11:22).

셋째로, 유럽에 흩어져서 살게 되는 야벳의 자손들은 훗날 셈족의 기독교를 받아 들이고 중동 땅과 아프리카를 지배할 것입니다(9:27). 실제로 유럽사람들은 헬라시대와 로마시대에 중근동을 지배하게 됩니다.

훗날 유럽은 아프리카와 전세계에 식민지를 경영하게 됩니다. 그들은 로마시대에 셈족의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가장 오랜 기간 아프리카의 함족을 지배하게 됩니다(9:27).

결론적으로, 현대인류의 역사는 그 시조인 노아의 예언에 크게 기속(羈束, 멍에의 속박)이 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술을 마시고 대취한 적은 있지만 그래도 노아는 하나님의 선지자였음에 틀림이 없다고 하겠습니다(6:9).

 

10.  모세는 홍수 후 350년을 더 살게 되는 노아의 향년을 통해서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9:27-29)

 

노아의 향년이 950세입니다(9:29). 그 아들들은 그보다 훨씬 적은 향년을 누린 것으로 보입니다. 모세는 자신의 직계조상을 중심으로 오경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셈족의 족보만을 싣고 있습니다(11:10).

그것은 함과 야벳의 향년은 기록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형제인 셈의 향년 600세와 비슷할 것으로 추정할 수 밖에 없다고 하겠습니다(11:10-11).

셈의 8대손인 데라가 205세를 살다가 죽고 그 아들 아브라함이 175세의 향년을 누립니다(11:32, 25:7). 그후 이삭 180, 야곱 147, 요셉 110, 모세 120세 등의 향년을 참고해보면(35:28, 47:28, 50:26, 34:7) 한가지 사실을 알 수 있게 됩니다.

그것은, 홍수심판 이전에 대부분 900세의 긴 향년을 누리던 시대는 노아가 그 마지막이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홍수심판 이후부터 줄어들기 시작한 인류의 수명이 결국 120세 정도로 줄어들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지금까지 살펴본 노아시대 홍수심판의 결과를 다시 한번 정리해보자면 다음 2가지입니다; 첫째, 비우호적인 자연환경의 발생입니다. 둘째, 그 살기 힘들어진 환경 때문에 인류와 생물들이 스트레스를 엄청 받게 됩니다.

따라서 세포분열이 빨라지고 수명이 급격하게 줄어들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현대의학이 수명을 늘리고는 있지만 그러나 그들의 날은 120년이 되리라”(6:3)고 하는 하나님의 선고가 아직도 유효한 것으로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