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설교 모음(손진길 목사의 글)

창세기 제12장에 대한 강해설교 모음(손진길 목사의 글)

손진길 2024. 5. 21. 18:53

창세기 제12장에 대한 강해설교 모음(손진길 목사의 글)

 

 

1.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는 3사람의 후보자 가운데 1사람이 탈락한 이유(11:31-32)

 

재력가인 아버지 데라, 그는 현재 북부 시리아에 속하는 하란 땅에서 자신의 아성을 구축하고 있습니다(11:31). 족장인 데라는 본래 오랜 세월을 고향인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살아온 사람입니다. 그곳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중심지입니다(10:10, 11:4-5, 9). 데라는 고대시대 최고의 문명을 자랑하고 있는 메소포타미아에서도 가장 중심지역인 고향에서(10:10, 11:2-4, 28) 일찍이 많은 것을 배우고 익힌 사람입니다.

예를 들면, ①가장 앞선 농사법, ②바퀴를 이용한 수레의 사용법, ③벽돌로 집을 짓는 방법, ④역청으로 도로를 포장하는 방법, ⑤설형문자를 사용하여 계약서를 만드는 방법, ⑥높은 건물과 탑을 만들어 도시를 형성하고 사람들을 조직화하고 동원하는 방법 등 여러 가지입니다(11:3-4).

그 뿐만이 아닙니다. 셈의 아들 아르박삿의 후손인 데라는 대대로 이어오고 있는 여호와신앙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한 족장 데라에게 여호와께서는 고향을 떠나 서쪽 변방 가나안으로 들어가서 원주민들에게 여호와신앙의 모습을 보여주고 또한 메소포타미아의 선진문명을 전달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11:31b, 7:3).  

그 명령에 순종하여 족장인 데라는 장자 아브람 부부, 장손 롯의 부부를 거느리고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 있습니다(11:31a&b). 그렇지만 여행 도중에 그는 북부 시리아에서 유프라테스 강 상류의 드넓은 땅 미개척지를 만나고 있습니다(11:31c).

이재에 밝은 부자 데라는 잘 개척만 하면 하나의 좋은 도시가 형성될 수 있다는 점을 한 눈에 파악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는 그 땅을 헐값에 사들이고 고향에서 먼저 죽은 3하란의 이름으로 부르고 있습니다(11:28, 31).

훗날 밧단아람 또는 메소포타미아의 나홀의 성으로(24:10, 28:2) 불리게 되는 그곳은 다음과 같은 장점을 지니고 있는 곳입니다; 첫째, 배산임수(背山臨水, 산을 등지고 물을 내려다 보는 살기 좋은 지형)의 지역입니다. 둘째, 넓은 들판이 있습니다. 셋째, 기후가 온난하여 농사짓기에 적합합니다. 또한 초지를 조성하면 좋은 목축지역이 될 것입니다. 넷째, 사람들이 아직 돈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데라는 결심하고 있습니다; “싼값에 사들인 그 드넓은 지역을 개발하여 성읍을 만들자. 땅의 가치를 높이기 위하여 우선 우물을 파고 대규모 목축을 하자(29:1-10). 그 다음에는 농토를 개간하고 노동집약식(勞動集約式, 사람의 노동력을 집중적으로 투여하는 방식) 농사를 짓자.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살 수 있도록 고향인 우르처럼 하나의 도시를 만드는 것이다”.

데라는 그에 그치지 아니하고 더 큰 야심을 품고 있습니다. 그는 높은 건물과 탑을 짓고 인생 말년에 하란을 지배하는 ()족장이 되고 싶은 것입니다(11:4-7). 하나님이 이미 무너뜨려버린 바벨탑을 데라가 다시 세우고 싶어합니다.

참고로, 하나님의 명령과 말씀의 뜻을 떠나서 세상을 향하여 마음껏 달려가고자 하는 그 거대한 욕망과 야망은 도무지 수그러들지를 아니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데라의 시대보다 오늘 날에 더욱 팽창하여 더 큰 위력을 떨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종교적인 세속화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데라는 이제 하나님의 명령을 잊어버린 사람입니다. 가나안으로 들어갈 생각을 아예 하지 아니하고 있습니다(11:31c). 왜 고향을 떠나왔는지 그 이유를 달리 생각하게 된 사람입니다.

미개한 지역 가나안 땅에 하나님 신앙을 심고 선진문명을 전해주어야 하는 사명을 잊어버리고 하란에서 또 하나의 바벨을 만드는 것이 자신의 과업이 되어버린 사람입니다(11:8-9). 그 결과 족장인 데라는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상실하게 됩니다.

만약 데라가 하란 땅에 눈독을 들이지 아니하고 곧장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더라면 믿음의 조상은 그의 아들인 아브람이 아니라 분명히 족장인 데라가 되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명령으로 고향과 친척을 떠나 변방인 가나안으로 들어가고자 출발을 한 집단의 우두머리는 어디까지나 아브람이 아니고 그의 아버지이며 족장인 데라이기 때문입니다(11:31, 7:3).

이제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지 아니하고 믿음의 길을 포기하였기에 영적으로 죽어버린 족장 데라를 하란 땅에 버려두고 그의 아들 아브람과 손자 롯이 가나안으로 향하는 역사가 다시 전개가 되고 있습니다(11:32, 12:1-5, 7:3-4). 그들이 떠나자 데라는 혼자 하란 땅에 남겨지게 됩니다.

그러나 그는 향년 205세를 맞이할 때까지 줄기차게 땅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11:32). 장남과 장손이 떠나버리자 족장 데라는 메소포타미아 고향에 남아 있는 둘째 아들 나홀을 불러들입니다(11:26-27). 그와 함께 하란 땅을 개척하여 도읍을 건설합니다.

그리고 데라는 60년 동안 일군 그 터전을 차남 나홀에게 상속합니다. 그러자 나홀은 아버지 데라의 성이 아니라 자신의 이름을 따서 그 성읍의 이름을 나홀의 성이라고 부르고 맙니다(24:10). 데라의 이름이 완전히 사라져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토록 땅에 집착하여 그 땅의 이름을 먼저 죽은 아들 하란으로 명명하고 또한 도시를 건설하여 자신의 이름까지 그곳에 남기고 싶어했던 데라의 소망이 모두 허무하게 사라져버린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명령으로 고향과 친척을 떠났던 세 사람 가운데 이제 두 사람만이 신앙의 길을 계속 가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과연 누가 끝까지 세상의 유혹을 이기고 믿음의 조상이 될 수가 있을까요? 창세기 제12장과 제13장에서 그 이슈를 흥미진진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2.    아브람과 롯이 포기한 것과 선택한 것(11:26-27, 12:4)

 

아브람과 롯은 참으로 엄청난 것을 포기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족장인 데라를 떠났을 때 아브람의 나이가 75세입니다(12:4). 그러므로 족장인 데라의 나이는 145세입니다(11:26). 당시에는 130세가 넘어서게 되면 언제 향년을 맞이할지 모르는 시대입니다. 예를 들면,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127, 그 아들 이스마엘이 137세에 향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23:1, 25:17).

그래서 그런지 137세가 되자 노쇠한 이삭이 장자인 에서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이삭이 이르되 내가 이제 늙어 어느 날 죽을는지 알지 못하니 그런즉 네 기구 곧 화살통과 활을 가지고 들에 가서 나를 위하여 사냥하여 내가 즐기는 별미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와서 먹게 하여 내가 죽기 전에 내 마음껏 네게 축복하게 하라”(27:2-4).

향년이 가까워졌다고 스스로 판단한 이삭이 죽기 전에 장남에게 축복의 예언을 해주고 자신의 족장권을 넘겨주고자 도모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그렇지만 이삭은 그 후 43년을 더 생존하여 180세의 향년을 누리게 됩니다(35:28).

참고로, 이삭의 당시 나이는 다음과 같이 계산이 가능합니다;

(1)  첫째, 야곱이 130세 때 아들 요셉을 애굽에서 만나게 됩니다(47:9). 그때 요셉의 나이는 39세입니다. , 야곱이 91세에 아들 요셉을 얻은 것입니다(30:24-26). 참고로, 요셉은 30살에 애굽의 총리가 되고 7년 풍년이 들고 2년째 흉년이 들었을 때 부자상봉을 하게 됩니다(41:46, 53-57, 43:1-2, 45:6-11).

(2)  둘째, 야곱은 처가살이를 14년하고 있던 때 아들 요셉을 얻게 됩니다(29:20, 27, 30:25, 31:41). 그러므로 야곱은 77세에 아비 이삭의 집을 떠난 셈입니다.

(3)  셋째, 이삭은 60세 때 에서와 야곱을 낳았습니다(25:26). 그러므로 야곱 77세는 이삭 137세에 해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언제 향년을 맞이할지 모르는 고령인 아버지가 데라입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지 아니하고 하란 땅 아비 집에 그냥 머물러 있기만 하면 그 엄청난 아버지의 재산은 모두 자신의 것이 될 것입니다. 그가 장자이며 차기 족장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아브람은 부친 재산의 상속을 포기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이 구체적으로 그 재산의 상속을 포기하고 아비의 집을 떠나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12:1). 이제 장자이며 차기 족장인 아브람이 족장 데라를 떠나고자 합니다.

백부가 떠나고 나면 할아버지 데라의 재산은 자연히 장손인 롯에게 상속이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롯도 그 엄청난 재산의 상속권을 포기합니다. 왜 그러한 당찬 결심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아마도 다음과 같을 것입니다;

(1)  첫째, 롯도 재산의 상속 대신에 백부인 아브람처럼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고자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과 롯은 모두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는 소질을 지니고 있습니다.

(2)  둘째, 롯은 일찍 죽은 아버지 하란 대신에(11:27-28) 백부인 아브람을 아버지로 모시고서 인생을 살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마침 아브람에게 자식이 없기에(11:30) 롯은 아들의 노릇을 하면서 백부를 아버지처럼 따르고 있으며 함께 행동을 하고 있다고 판단이 되는 것입니다.

 

3.    메소포타미아에 있는 고향과 친척 뿐만 아니라 북부 시리아 하란에 자리를 잡고 있는 아버지 데라의 집까지 떠나라고 명령하시는 하나님(12:1)

 

메소포타미아에 가장 먼저 자리를 잡은 사람들은 셈족입니다. 그들은 여호와신앙을 지키고 있는 민족입니다(9:26). 그 가운데 가장 중심지역이 시날인데 거기에 바벨과 갈대아인의 우르가 있습니다(10:10, 11:9, 31). 그곳에 살고 있던 아르박삿의 후손인 족장 데라가 그의 장자인 아브람과 함께 하나님의 명령을 받게 됩니다(11:31, 7:2-4).

변방 가나안으로 이주하여 그곳 미개인들에게 선진 메소포타미아의 문물을 전하고 무엇보다도 여호와신앙을 전파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데라는 장자 아브람의 부부, 장손 롯의 가족을 이끌고 서쪽으로 이동을 하게 됩니다. 그들 삼대(三代, three generations)는 유프라테스 강 하류와 중류에 살고 있는 고향사람과 친척들을 떠나서 선교에 나선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만 나이가 많은 족장 데라가 북부 시리아에서 개간과 개척의 가치가 엄청난 땅을 발견하게 됩니다. 부자인 그의 눈에 좋은 투자처(投資處, 투자를 할만한 곳)가 발견이 된 것입니다. 그러자 그는 하나님의 명령을 잊어버리고 그 땅을 원주민에게서 헐값에 사들여서 토지와 대지로 개발하여 높은 부가가치를 창출하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모습을 지켜 보십니다. 데라는 세상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지상명령인 선교의 사명을 포기한 사람입니다(13:22, 딤후4:10). 세상에 안주해 버림으로써 영적으로 죽은 자를 믿음의 조상으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7:4).

그래서 그의 장자인 아브람에게 아버지 데라의 막대한 재산의 상속권을 일찌감치 포기하고 선교의 사명을 다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12:1). 그 명령을 따라 독자적인 신앙의 길을 떠나는 자가 바로 아브람과 그의 장조카인 롯입니다(12:4-5).

세상에서 많은 재물을 상속하여 쉽고 편하게 한 세상을 살려고 하는 욕심을 버린 자가 바로 그들입니다. 그들이 세상을 더 사랑하는 아버지의 집을 떠난 자들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그들의 새로운 아버지가 되어 주시고 장차 더 엄청난 하늘의 영광을 상속할 수 있도록 조치해주실 것입니다.

 

4.    75세의 아브람이 영적인 족장이 됨으로써 성경의 기록은 어떻게 달라지고 있는가?(12:1, 7:2-4)

 

모세의 창세기 기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인 그의 손자 롯과 그의 며느리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류하였으며, 데라는 나이가 205세가 되어 하란에서 죽었더라”(11:31-32).

데라가 그의 아들과 손자의 가족을 이끌고서 가나안으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창세기에서 가나안으로 가라고 하는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고 있는 자는 어디까지나 족장인 데라입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에서 의사 누가는 다르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이 애초부터 아브라함에게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데라가 하란에서 죽었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그 명령을 끝까지 수행했다는 것입니다”.

성경말씀을 직접 읽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스데반이 이르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이르시되,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 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그의 아버지가 죽으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지금 사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7:2-4).

왜 그와 같은 기록의 차이가 발생하고 있는 것일까요? 데라가 하란에서 죽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족장으로 삼아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라고 했다는 설명입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훗날의 역사 가운데 데라의 흔적이 지워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데라는 그의 아들과 손자가 자신을 버리고 가나안으로 떠나가버렸지만 하란 땅에서 60년이나 더 살다가 비로서 205세에 향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11:32). 멀쩡하게 살아 있는 데라를 스데반은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증언하기를 그가 이미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은 그를 대신하여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두려운 이야기입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고 있는 동안에는 영적으로 살아 있으나 그 명령을 저버리고 세상의 재미에 빠져서 살고 있으면 하나님의 기록과 생명의 책에서 그 이름이 지워져 버린다는 것입니다.

 

5.    아버지 데라의 엄청난 재산에 대한 상속권을 포기하고 있는 아브람이 대신 얻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의 어떠한 복인가?(12:1-4)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아버지 데라의 재산보다 더 크고 더 값어치가 있는 것을 주시겠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12:1-3). 그래서 아브람은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믿고서 고령(高齡, 나이가 많음)75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미지(未知, 아직 아는 바가 없음)의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게 됩니다(12:4). 본문에서 드러나고 있는 하나님의 약속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로, 아브람에게 자손을 주고 큰 민족을 이루도록 해주겠다는 것입니다(12:2a). 현재 아브람에게는 자식이 없습니다(11:30). 그런데 대를 이을 수 있도록 아들을 주겠다는 것입니다. 아브람의 자손이 대를 이어서 번성하여 마침내 큰 민족이 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고 복을 주겠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가나안 땅과 이방 땅에서 아브람이 나그네가 될 지라도 그의 이름을 창대하게 해주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12:2b). 그 약속 그대로,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의 이름을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존귀하게 만들어주고 있습니다;

(1)  첫째, 가나안 헤브론 땅에서는 구국의 영웅이 됩니다. 아모리 족속인 호족들과 연합하여 침략군인 메소포타미아의 다국적군대를 쳐부수게 되는 것입니다(14:13-16).

(2)  둘째, 애굽과 그랄 땅에서는 황제들이 함부로 취급할 수 없는 두려운 하나님의 방백이 됩니다. 애굽의 황제인 바로는 아브람에게 많은 재물로 보상해줍니다(12:16-20). 블레셋의 황제인 아비멜렉은 아브람의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브엘세바에서 상호불가침 평화조약을 체결합니다(21:22-32).

(3)  셋째, 가나안을 정복한 헷 족속도 헤브론에서 묘지를 구하고 있는 아브람에게 호의를 가지고 대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습니다; “내 주여 들으소서, 당신은 우리 가운데 있는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이시니 우리 묘실 중에서 좋은 것을 택하여 당신의 죽은 자를 장사하소서. 우리 중에서 자기 묘실에 당신의 죽은 자를 장사함을 금할 자가 없으리이다”(23:6).

셋째로,복의 통로가 된다는 것입니다(12:2c). 사람들이 아브람을 축복하면 하나님의 복이 아브람을 통하여 흘러 나가게 될 것입니다. 반대로, 그를 저주하게 되면 하나님의 저주가 임할 것입니다(12:3a). 그러므로 세상의 모든 족속들이 아브람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대접하고 그에게서 하나님을 창조주로 섬기는 방법을 배우기만 하면 됩니다. 그리하면 하나님의 복이 이미 아브람에게 언약한 그대로 세상 모든 족속에게 흘러 넘치게 될 것입니다(12:3b).

 

6.    롯은 왜 할아버지 데라의 재산을 상속하기를 포기하고 백부 아브람을 따라 나서고 있는가?(11:31, 12:2-4) 그 결과 롯은 어떤 보상을 받게 되는가?(13:6-12, 14:14-16, 19:29)

 

모세는 아브람을 대표자로 하여 하나님의 언약이 선포되고 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12:1-3). 지금 아브람이 하나님의 그 약속을 믿고서 자신의 행보를 정하고 있습니다(12:4a). 그런데 모세는 아브람의 일행 중에 그의 장조카인 롯이 포함이 되어 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12:4b).

그렇다면, 아브람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넘치는 복은 아브람에게만 국한이 되는 것일까요? 아니면, 그의 일행이 되고 있는 조카 롯에게도 적용이 되는 것일까요?

그리고 부자이며 족장인 할아버지 데라를 하란에 버려두고 자신의 차차기(次次期, 다음 다음 번) 상속권까지 포기를 하고서 백부 아브람을 따라 나서고 있는 롯의 내심은 과연 무엇일까요? 그는 아브람을 따라감으로써 과연 무엇을 얻고자 하고 있는 것일까요?

첫째로, 겉으로 보면 하나님의 언약은 인류의 대표를 상대방으로 하여 맺고 있는 계약으로 보입니다. 구체적으로, 창세기 제9장에서는 하나님의 언약이 단지 노아와 그의 세 아들을 향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지만 그 적용은 엄청난 길이와 폭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점을 무지개 언약에서 똑똑하게 엿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이제부터는 홍수심판 대신에 악한 인간의 생각의 뿌리를 도려내고 구원하겠다는 의사를 천명합니다. 그리고 구름 속에 무지개를 설치하면서 하나님이 노아 4부자와 언약을 세웁니다. 노아와 그의 3아들이 언약의 상대방입니다. 그렇지만 그 언약은 그 때부터 노아와 그의 3아들의 자손인 현대인류 모두에게 적용이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 언약의 길이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 뿐만 아니라 방주에서 살아나온 모든 생물들에게도 적용이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 언약의 적용의 폭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9:8-17).

같은 맥락에서, 의 경우에도 동일합니다. 그가 백부인 아브람과 행동을 같이하기만 하면 똑같은 언약 안에 머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른 바 staying in the same covenant입니다. 나중에 할례제도를 마련할 때에도 동일합니다;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너희는 포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너희의 대대로 모든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 또는 너희 자손이 아니라 이방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막론하고 난지 8일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 너희 집에서 난 자든지 너희 돈으로 산 자든지 할례를 받아야 하리니, 이에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포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17:10-14).

둘째로, 할아버지 데라 대신에 백부인 아브람을 따라 나서고 있는 롯의 내심은 무엇일까요? 그는 데라의 하나님이 아니라 아브람의 하나님을 선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훗날 이방여인 룻이 조국 모압의 우상문화가 아니라 시어머니 나오미의 하나님을 따르고 있는 것과 동일합니다;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는지라”(1:16-17).

여기서, (Ruth)이 얻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자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백부 아브람을 따라 나서고 있는 (Lot)이 얻고자 하는 것도 하나님의 복을 자신도 똑같이 얻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의 선택은 올바른 것이기에 다음과 같은 구체적인 하나님의 은혜와 보상이 임합니다;

(1)  첫째, 애굽에서 나올 때 롯도 아브람처럼 부자가 되어서 출애굽을 하고 있습니다(13:5-6).

(2)  둘째, 백부 아브람의 도움으로 전쟁포로의 신세에서 자유를 얻게 됩니다(14:16).

(3)  셋째, 소돔과 고모라의 불 심판 가운데에서도 롯은 구원을 얻게 됩니다. 그 점을 모세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지역의 성을 멸하실 때 곧 롯이 거주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보내셨더라”(19:29).

 

7.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12:5)

 

하나님은 고향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잘 살고 있는 족장 데라와 그의 장자 아브람과 장손 롯 등 삼대를 불러내셨습니다(11:31, 7:2-4). 그리고 그들에게 거룩한 사명을 부여하셨습니다. 서쪽으로 이동하여 지중해에 인접해 있는 변방 가나안 땅의 주민들에게 하나님 신앙을 전파하고 메소포타미아의 선진학문과 문물을 전해주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일종의 Calling out’입니다. 그런데 도중에 족장인 데라는 북부 시리아 땅에서 그만 안주해버리고 말았습니다(11:31-32). 하나님이 주신 거룩한 사명을 저버리고 세상이 주는 이익을 얻고자 한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람과 롯이 족장인 데라를 떠나게 됩니다.

그들은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습니다(12:5). 그것은 그들의 신앙의 승리입니다. 당장 눈 앞에 보이는 데라의 재산을 상속할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하고 그 대신에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언약을 더욱 신뢰하고서 믿음의 길을 계속한 그들이 드디어 그 종착역에 도착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조심스럽게 관련구절을 다시 한번 살펴보아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족장 데라가 아브람과 롯을 데리고 여행을 할 때는 분명히 그 목적지가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11:31)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아브람과 롯이 족장 데라를 떠나서 독자적인 믿음의 길을 떠나고 있을 때에는 하나님께서 단지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12:1)고만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달리 말씀하고 계시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분명히 가나안이 믿음의 여정에 있어서 최종목적지가 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당시 가나안의 중심지인 세겜에서 아브람은 제단을 쌓으려다가 그곳 주민들에 의하여 쫓겨나게 됩니다(12:6-7). 그리고 겨우 벧엘 변두리 동쪽 산에 옮겨와서야 제단을 쌓게 됩니다(12:8).

그 뿐입니까? 그는 가나안의 흉년을 피하여 애굽에까지 들어가게 됩니다(12:9-10). 그렇다면 과연 아브람 신앙의 종착지는 어디일까요? 구약의 말씀만을 참고하면 그곳은 가나안의 헤브론 막벨라 굴인 것처럼 보입니다(49:29-50:14, 24-25).

그러나 히브리서와 복음서를 참고하면 그렇지가 않습니다; “믿음의 열조들이 가고자 하는 곳은 하나님께서 계신 천국입니다. 그곳에서 그들이 영생을 누리고자 한 것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곳으로 가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시는 것을 기다려야만 된다는 사실까지 그들이 짐작하고 있었음을 히브리서와 복음서가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사실을 알려주고 있는 성경구절이 다음과 같습니다;

(1)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11:15-16). 익명의 히브리서 저자는 히브리정경에 등장하고 있는 믿음의 열조들이 하나같이 그리스도를 만나 무덤에서 부활하여 천성에 들어가서 영생을 누리기를 소원하였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2)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8:56). 그와 같은 부활과 영생의 신앙을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지니고서 그리스도를 만나기를 그토록 고대하였다고 예수 그리스도가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3)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11:24-26). 히브리서 저자는 믿음의 장인 히브리서 제11장에서 모세가 진정 얻고자 한 것이 그리스도를 만나 영생의 천국에 들어가서 여호와의 상급을 얻는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8.    세겜땅과 벧엘 동쪽 산의 차이(12:6-8)

 

당시 세겜 땅은 가나안의 중심도시입니다. 히위 족속, 가나안 족속, 브리스 족속 등 여러 부족들이 어울려서 함께 살고 있는 다민족 사회입니다(12:6, 34:2, 30). 그리고 가나안에서 가장 번창한 도시입니다(34:1, 20-24).

그래서 아브람은 그의 목적지가 가나안의 중심인 세겜인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같은 의미의 말씀을 하시고 있습니다;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12:7a). 이제 목적지에 도착한 것으로 아브람은 생각을 하고서 얼른 그곳에 제단을 쌓고자 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제사를 드림으로써 하나님의 언약의 효력을 당장 발생시키고자 한 것입니다. 그 좋은 도시를 자신의 자손들의 땅으로 얻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아직 시기상조(時機尙早, 때가 아직 무르익지 아니함)였습니다.

어떻게 시기상조인 것을 알 수가 있을까요? 그리고 언제 아브람의 후손이 그 땅을 얻을 수가 있게 될까요? 때가 아직 무르익지 아니하였기에 아브람이 세겜에서 남쪽으로 쫓겨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가 제단을 쌓고 세겜 도시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려고 하였으나 실패했습니다. 그곳 토착민들이 이상한 신을 찬양하며 제사를 드리고 있는 아브람을 배격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아브람은 급히 남하를 하게 됩니다.

100리 이상을 남하하여 벧엘과 아이 사이에 이르게 되자 그곳에 ()이 하나 나타났습니다. 그는 벧엘 동쪽 산에 제단을 쌓고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마음껏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12:8).

그로 미루어 보아, 교회건물은 시내 한 복판에 지을 일이 아닙니다. 주민들에게 민폐가 된다면 좀 떨어진 곳에 짓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하여야 마음 놓고 큰 소리로 찬양도 할 수 있고 새벽 일찍이 모여서 목청껏 하나님께 부디 한민족을 살려달라고 외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훗날 세겜 성의 지배자인 히위 족속을 치고 그 성의 재물을 약탈한 자는 야곱의 아들들입니다. 디나의 오라버니인 시므온과 레위가 적을 계략으로 속이고 야간에 기습을 하여 승리를 거둔 것입니다(34:25-29).

그렇지만 세겜의 주변에는 원주민인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이 살고 있습니다(34:30-31). 그들이 연합하여 히위 족속의 원수를 갚겠다고 나서면 세력이 약한 야곱의 집안은 멸문지화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

야곱은 겁이 났습니다. 그래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살 길을 찾아서 정신 없이 남쪽 벧엘 지방으로 탈출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벧엘로 가라고 명령하셨기에 가는 동안 줄곧 적으로부터 보호해주었습니다(35:1-5). 그러므로 아브람 때나 그의 손자 야곱 때나 세겜에서 문제가 발생하여 벧엘로 도망을 친 것은 똑 같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공통점이 훗날에 발생을 하고 있습니다; “가나안 남부지방 헤브론에서 호족으로 성장한 아브람이 메소포타미아 침략군을 분쇄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14:13-16). 구국의 영웅으로 가나안 땅에 우뚝 서게 됩니다. 세겜에서도 높임을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야곱은 나중에 무력으로 세겜 지역을 차지하게 됩니다(48:22b). 그 땅을 애굽에서 요셉의 두 아들에게 미리 상속까지 하고 있습니다(48:22a)”.

결론적으로, 세겜을 아브라함의 후손에게 주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언약은 야곱 때에도 이루어졌으며 훗날 출애굽을 하여 가나안 땅을 정벌할 때에도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37:13, 48:22, 17:7).

더구나 1,400년 후 예수님이 사마리아 수가 성을 방문하였을 때에도 그 옛날 야곱이 세겜 성 북문 곁에 파 두었던 그 우물에서 여전히 물이 나오고 있음을 복음서가 말하고 있습니다;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4:5-6),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셨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마셨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4:12).

세겜은 오늘 날에도 현대 이스라엘 국가의 영토 내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수천 년이 지나도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의 언약이 여전히 그 빛을 찬란하게 발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12:7).

 

9.    가나안 땅의 가뭄을 피하여 애굽으로 들어가다(12:9-10)

 

아브람 부부와 롯의 가족이 가나안 지방의 가뭄을 피하여 애굽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12:9-10). 가나안 남부지역은 블레셋 족속이 차지하고 있는 바닷가 그랄 지방을 제외하고 나면 가뭄이 심한 땅입니다. 아라비아 반도가 가까운 남부의 국경지역은 () 사막성 기후가 우세합니다.

주전 21세기 아브람 일행이 가나안에 들어왔을 때에도 그 땅에 가뭄이 들고 있습니다(12:10b). 그래서 기근을 견디지 못하여 양식이 있는 애굽 땅으로 들어간 것으로 보입니다(12:10a).

참고로, 나일 강물이 풍성한 농업국가 애굽은 당시 중근동에서 메소포타미아에 이어서 두 번째로 손꼽히는 문명국가라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고대의 애굽은 오늘날의 이집트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큰 규모의 제국이었습니다.

옛날에는 이집트, 수단, 이디오피아, 리비아, 튀니지 등이 모두 애굽제국에 속해 있었습니다. 주로 나일강 하류를 지배하고 있었던 이집트 족속들이 왕조를 이루었지만 때로는 이디오피아 족속이나 해안가의 족속이 정권을 잡기도 했습니다.

아브람이 독자적인 선교여행에 나선 때는 주전 2,091년경입니다. 당시 그의 나이는 75세입니다. 그는 가나안으로 들어갔으나 그곳에 정착을 할 수가 없습니다. 기근이 심하여 주민들이 남으로 이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브람도 가나안 땅의 기근을 피하여 양식이 있는 애굽까지 들어간 것으로 보입니다(12:10).

그런데 공교롭게도 215년 후에 똑 같은 사건이 발생합니다. 아브라함의 손자인 야곱이 역시 가나안 땅의 흉년을 피하여 모든 식솔을 이끌고서 애굽으로 이주를 하게 됩니다(46:1-7).

그 당시 주전 1,876년 야곱이 애굽에서 이미 총리가 되어 있는 그의 아들 요셉을 만나게 됩니다(46:29-30). 그리고 애굽의 귀족이 되어 있는 요셉이 아버지와 형제들, 그리고 조카들의 식구들을 모두 애굽에서 봉양합니다(47:11-12).

야곱 일행이 살게 되는 지역은 이집트의 동북면 고센 땅입니다(46:34, 47:6). 그곳에서 목축을 경영합니다. 출애굽의 때가 되면 가축 떼를 이끌고서 손쉽게 동쪽 국경으로 빠져나갈 수 있는 실로 절묘한 위치입니다.

어쨌든 야곱 일행 역시 가나안 땅의 계속되는 흉년에 견디지 못하고 애굽제국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그것은 그의 할아버지인 아브람의 경우와 동일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의 아브람의 애굽으로의 이주와 출애굽은 수백 년 후의 자손들의 역사를 미리 보여주고 있는 하나의 예표가 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와 같은 맥락에서 아브람에게 계시해주고 있는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이 예사롭지가 않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400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그들이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벌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15:13-14).

 

10.  사래는 아리따운 여인’(a beautiful woman)인가 아니면 심히 아리따운 여인’(a very beautiful woman)인가?(12:11, 14), 그리고 자기 목숨을 살리자고 아내를 누이라고 부르고 있는 아브람, 그의 말의 진실과 거짓은 무엇인가(12:12-13, 20:12)

 

아브람이 몇 살에 사래와 결혼을 했는지에 대하여 성경에는 기록이 없습니다. 그의 막내 동생인 하란이 일찍 결혼을 하고 3남매를 낳고 젊은 나이에 죽은 것으로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11:27-29). 그리고 하란의 딸인 밀가가 성인이 되어서 숙부인 나홀의 아내가 되고 있습니다(11:30b).

그런데 나홀의 이름 앞에 형으로 아브람의 이름이 등장하면서 아브람이 사래에게 장가를 들었다고 모세가 기록하고 있습니다(11:30a). 그러므로 아브람의 결혼은 하란보다는 늦지만 나홀보다는 다소 앞서고 있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한 마디로, 그들 둘의 사이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그때의 아브람의 나이를 짐작해보자면, 40살 정도로 볼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아브라함이 자신의 적장자인 이삭을 40세에 결혼을 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25:20).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하여 이삭의 결혼적령기를 산출한 것으로 보입니다.

아브람이 40살에 결혼을 했으면 당시 사래의 나이가 30살입니다. 그들 부부의 나이 차이가 10살이기 때문입니다(17:17). 그리고 사래는 사실 아브람의 이복 누이동생입니다(20:12).

당시 아브람은 족장 데라의 장자입니다. 그는 차기 족장입니다. 따라서 아브람과 결혼을 하게 되는 처녀는 장차 왕비대접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고대 족장사회에서 차기 족장의 아내는 집안의 재산을 지키기 위하여 자기 가문에서 선택을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아브람의 이복 누이동생들과 질녀들의 꿈은 한마디로, 장자인 아브람과 결혼하는 것입니다. 당연히 아브람은 가장 아름답고 지혜롭고 마음씨가 예쁜 처녀와 결혼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녀가 바로 사래입니다. 따라서 아브람이 결혼식 때 그리고 신혼 때 보았던 사래는 가장 아름다운 여인’(the most beautiful woman)입니다. 그런데 75세의 아브람이 아내와 함께 애굽에 들어와서는 그녀에 대하여 그저 아리따운 여인’(a beautiful woman)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12:11).

결혼생활을 한지 35년 만에 그 미모와 자태에 대하여 평가가 절하되고 있습니다. 사실 아무리 아름다운 것도 수십 년간 계속 보고 있으면 보통의 아름다움으로 범상하게 여겨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실을 솔직하게 드러내고 있는 모세의 표현이라고 하겠습니다.

반면에 아직 아기를 낳아본 적이 없는 사래는 비록 65세의 나이이지만 그 미모가 여전히 빼어납니다. 그래서 애굽의 수도에서 그녀를 바라본 사람들이 놀라고 있습니다; “애굽 사람들이 그 여인이 심히 아리따움을 보았고”(12:14).

사래를 처음 본 애굽 사람들의 평가는 대단합니다. ‘심히 아리따운 여인’(a very beautiful woman)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의 고관들도 사래의 미모와 아리따운 자태를 보고 나서 바로 앞에서 칭찬을 하게 됩니다. 마침내 바로가 그 여인을 자신의 궁으로 이끌어 들이게 됩니다(12:15).

그토록 아름다운 아내 사래와 함께 이방인들의 제국으로 들어가고 있는 아브람의 마음이 무겁습니다. 어떻게 하면 아름다운 아내 때문에 남편이 애굽의 남자들에게서 맞아 죽는 위험을 피할 수가 있을까요? 방법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녀를 자신의 누이동생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12:11-13).

자신이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좀 비겁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완전한 거짓말은 아닙니다; “결혼하기 전에는 분명히 자신의 이복 누이동생이었기 때문입니다”(20:12). 그래도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지금의 신분이 진실이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신분으로 현재의 신분을 왜곡한다는 것은 역시 거짓으로 포장을 하는 것입니다.

묘하게도 과거의 진실과 현재의 거짓이 이기적인 목적으로 야합을 하고 있습니다. 깊이 생각을 해보자면, 과거 어느 하나의 진실의 힘을 빌려서 현재의 거짓을 포장하고 자신의 주장이 모두 진리인 것처럼 믿게 하는 것은 엄청난 잘못입니다. 그것이 바로 거짓의 아비인 사탄의 술책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사탄의 화신인 뱀이 그렇게 하와에게 접근을 하고 있습니다;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3:4-5). 그 말의 앞부분은 거짓입니다. 그러나 뒷부분의 진실로 마치 앞부분이 진실인 것처럼 모두를 포장하고 있습니다(3:22).

그래서 예수님이 다음과 같이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8:44). 그 거짓의 함정에 지금 아브람이 빠지고 있는 것입니다.

참고로, 미국의 교회의 역사 가운데에서도 동일한 사례가 하나 있습니다. 1840년대에 종말이 온다고 선전을 하고 있었던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날짜를 제멋대로 계산하여 대대적으로 다가오는 미래를 대비하라!고 외쳤습니다.

당시의 침례교인들을 비롯하여 많은 성도들이 합세를 했습니다. 재산을 정리하고 직장도 버리고 오로지 종말의 때에 이루어지는 휴거만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그 날에 종말이 임하지 아니했습니다. 상당수가 속은 줄을 알고 떠나갔습니다.

그렇지만 출신교회로 돌아갈 수 없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구책을 마련했습니다;

(1)  첫째, 자신들의 계산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단지 주님이 하늘의 성소에 들어가시는 날을 이 땅에 재림하시는 날로 잘못 해석했을 따름이라는 설명을 했습니다.

(2)  둘째, 당시 소수교파로 존재하고 있던 7 안식교의 교리를 받아들이고 그들과 합병을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안식일 토요일에 예배를 드리지 아니하고 있는 모든 교단들은 이단이라고 주장하기를 시작했습니다. 자신들이 저지른 과오를 덮기 위하여 안식일 교리를 동원한 것입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그 옛날 아브람의 잘못을 다시 보는 것과 같습니다.

 

11.  미인은 결국 최고권력자의 수중에 후궁으로 들어가게 되다(12:15)

 

흔히 부자는 귀가 밝다고 말합니다. 그 뜻은 돈과 권력이 있는 곳에 정보가 집중이 된다는 것입니다. 애굽제국에서 가장 귀가 밝은 사람은 황제인 바로입니다. 그는 아브람과 사래가 롯의 가족과 함께 애굽에 이주해왔을 때부터 그 인적 구성원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단 한 가지입니다. 너무나 빼어난 용모와 미모의 여주인공이 그 마차를 타고서 입국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숨기려고 애를 써도 결코 숨겨질 수가 없는 것이 사래의 아름다움입니다(12:14). 비록 65세의 할머니라고 하더라도 아기를 낳아본 적이 없는 여자의 자태 그대로입니다(11:30). 그리고 처녀시절 메소포타미아의 중심지역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그 고향 아버지 데라의 집안에서 가장 아름답고 화려한 꽃이 바로 그녀 사래였습니다.

그 미모가 어디로 갔겠습니까? 여전히 남편 아브람의 눈에도 미인이고(12:11) 애굽 사람들이 볼 때에는 천하의 절색입니다(12:14).  그녀가 아브람의 누이동생이라는 정보를 얻게 된 바로는 당장 행동을 취합니다(12:13). 그녀를 후궁으로 맞아들이고 이제 손위 처남이 될 아브람에게는 후히 포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12:15-16).

이 글의 저자인 모세는 장차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되면 이스라엘 자손들이 왕을 두고자 할 것임을 사전에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에게 아내를 많이 두어 그의 마음이 미혹되게 하지 말 것이며”(17:17). 왕이란 국가의 권력을 독점하고 있는 자입니다.

특히 고대사회에서는 왕이 바로 왕국의 전부이며 모든 백성들은 왕의 종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왕국 내의 모든 아름다운 여자는 왕의 후궁이 될 수가 있습니다. 그와 같은 사실을 사무엘 선지자가 다음과 같이 완곡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가 또 너희의 딸들을 데려다가 향료 만드는 자와 요리하는 자와 떡 굽는 자로 삼을 것이며”(삼상8:13), “그가 또 너희의 노비와 가장 아름다운 소년과 나귀들을 끌어다가 자기 일을 시킬 것이며”(삼상8:16).

애굽의 황제인 바로는 제국을 다스리고 있는 절대자입니다. 백성들은 황제를 ()의 아들이라고 숭배하고 있습니다. 일반 백성들이 지키고 있는 윤리나 도덕 그리고 국가의 법률이 최고통치자인 황제에게 있어서는 적용이 배제되고 있습니다. 그것을 흔히 왕자무치’(王者無恥, 왕에게는 부끄러움이 없다)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존재인 바로에게 사래가 후궁으로 끌려간 것입니다. 아브람은 두 눈 뻔히 뜨고서 자신의 아내를 빼앗기고 있습니다. 아브람을 사랑하고 있는 사래는 자신 한 몸을 희생하여 남편의 목숨을 살리고자 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아브람의 아내라는 사실을 일체 발설하지 아니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거짓말을 한 것이 탄로가 나게 되면 어떠한 대가를 치르게 될지 뻔하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사래의 오라버니가 아브람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바로는 엄청난 호의를 베풀고 있습니다; “양과 소와 노비와 암수 나귀와 낙타를 아브람에게 주고 있습니다”(12:16). 한 마디로, 사래의 희생으로 졸지에 갑부가 되고 있는 아브람입니다.

그의 신세가 기가 막히고 처량하기가 그지 없습니다. 그때 아브람은 무엇을 하였을까요? 자기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바로 그 순간에 아브람이 하나님께 부르짖은 것으로 보입니다. 유일한 구원이 조상들의 하나님 여오화께로부터 올 수 있음을 아브람이 익히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모세는 바로의 예물이 양과 소와 노비와 암수 나귀와 낙타”(12:18)라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싼 것부터 비싼 것으로 나열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양보다는 소가 비쌉니다. 노비의 값이 은 30세겔인데 그것은 소 값보다 비싼 것입니다. 그러나 짐을 운반하는 수단이 되고 있는 나귀보다는 싸다고 하겠습니다. 사막을 횡단하는 낙타의 가격이 가장 비싸다는 사실을 은연중에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싼 것부터 비싼 것으로, 또는 반대로 비싼 것부터 싼 것으로 열거하는 것이 보통 사람들의 기록의 방법이라고 하겠습니다.

 

12.  바로의 황궁에 내리는 큰 재앙과 아브람의 출애굽(12:17-20)

 

여호와께서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일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시고 있습니다(12:7). 그렇지만 그 큰 재앙의 내용이 무엇인지에 대하여서는 아는 바가 없습니다. 모세가 구체적인 설명을 생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그 일을 바로의 입장에서 한번 생각을 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바로가 너무 억울하기 때문입니다; “바로는 궁에서 소문을 들었습니다. 히브리인 하나가 무지하게 어여쁜 누이동생을 데리고 애굽에 들어왔다고 합니다. 그녀를 한번 쳐다본 애굽의 남자치고 그녀의 미모와 아름다운 자태를 칭찬하지 아니하는 자가 없다고 합니다. 게다가 그녀는 남의 아내가 아니고 단지 아브람의 누이동생이라고 합니다. 고관들이 바로에게 한번 데려다가 그 모습을 보시고 마음에 들면 후궁으로 삼으시라고 종용을 합니다. 바로는 그들의 의견에 따랐을 뿐입니다. 후궁으로 삼고 친정 오라버니에게는 엄청난 예물을 보내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일이 잘못 되었다고 여호와 하나님이 책망을 하면서 바로와 그의 집에 큰 재앙을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12:14-17).

당장 돌려보내지 아니하면 바로의 집이 망하게 될 것만 같습니다. 남의 아내를 후궁으로 잘못 데려왔다는 것입니다. 바로는 참으로 억울합니다. 그렇지만 어찌합니까? 상대는 자신의 군대로써도 어찌할 수 없는 전능한 신이 아닙니까?

그래서 바로는 아브람을 궁으로 불러서 따지기로 했습니다; “네가 어찌하여 나에게 이렇게 행하였느냐? 네가 어찌하여 그를 네 아내라고 내게 말하지 아니하였느냐? 네가 어찌 그를 누이라 하여 내게 그를 데려다가 아내로 삼게 하였느냐? 네 아내가 여기 있으니 이제 데려가라”(12:18-19).

그렇다면 이제 한가지 더 생각을 해보아야만 하는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과연 바로의 진짜배기 잘못은 무엇일까요? 고대국가의 관례에 의하면 왕이 자신의 왕국 내에서 자기 마음에 드는 여자가 있으면 후궁으로 삼는 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더구나 사래가 남의 아내가 아니라고 하는데 문제가 될 것이 없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왜 하나님이 재앙을 내리고 있는 것일까요? 아브람의 기도 때문일까요? 아니면 아브람에게 이미 약속하신 언약의 내용 때문일까요? 아브람에게 손해를 입히는 자에게는 하나님이 똑같이 손해를 입히겠다고 하는 그 말씀이 바로에게 응하고 있다고(12:3) 쉽게 생각을 정리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왕이라고 하여 절대권력을 휘두르고 왕국 내의 모든 여자를 남편만 없다면 함부로 후궁으로 삼는 것은 잘못된 관행이라는 것입니다. 왕도 창조주의 세상경영의 이치를 따라야만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일부일처제를 지지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따르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최소한의 규모에 만족할 줄 알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솔로몬 왕처럼 모든 나라의 공주를 자신의 비와 빈으로 삼는 행위는 잘못된 것입니다(왕상11:1-3). 더구나 사래의 경우에는 이미 유부녀입니다. 비록 남편의 목숨을 살리기 위하여 그의 누이동생인 척하고 있으나 그것은 사실이 아닌 것입니다. 속으로는 정조를 지키기 위하여 애간장이 모두 녹아 내리고 있는 사래입니다. 그 모습을 하나님께서 지켜 보시고 있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장차 약속의 아들 이삭을 생산해야만 하는 유일한 여자가 사래입니다(17:16, 19). 그녀를 깨끗하게 지키고 싶은 것이 아브람의 마음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마음이신 것입니다.

바로는 아브람과 사래가 하나님의 사람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을 잘못 건드리게 되면 바로의 왕가가 절단이 날 판입니다. 그래서 화근덩어리를 국외로 추방하고 있습니다. 이왕 준 재물을 회수하지 아니하고 신속하게 출애굽을 시키고 있습니다.

아브람 부부와 롯의 가족은 바로의 요청에 의하여 많은 재물을 애굽에서 얻어서 떠나고 있습니다(12:20). 마치 645년 후에 있게 될 이스라엘 자손들의 출애굽의 모습을 미리 보고 있는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12:31-42).